거울 앞에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맑은 호수처럼 깨끗한 커다란 거울 안에 진한 고동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호안석 같은 눈동자가 비쳤다. 호안석을 닮은 눈동자가 지그시 거울을 바라본다. 그 눈동 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거울의 표면에 파문이 일며 거울 속의 상이 일렁거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과거에 함께했던 광경이 어른거리기 시작 했다. 나예린과 처음 만난 날, 하늘에서 떨어졌던 그녀, 선물로 준 은단검, 운향정에서 다시 만났을 때, 무당산에 갔다가 적들을 만났던 일, 폭우가 쏟아지는 동굴, 그 녀의 따뜻했던 몸, 시험을 치르다 동굴에 떨어졌을 때, 서로의 손을 잡고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별을 바라봤을 때, 화산에서 입을 맞췄던 일, 깨어나자 그녀가 눈물 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일, 뺨에 떨어진 눈물이 불처럼 뜨거웠던 일, 감옥에 갇혔을 때 그녀가 넣어줬던 웃지 못할 음식들이 거품처럼 끊임없이 떠 올랐다 사라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기억의 거품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호박색 눈동자의 깊숙한 곳에는 고통이 똬리를 틀며 맺히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그러자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손에 잡힐 것 같은 현실감, 그러나 현실은 상상보다 더욱 잔인했다.
***
“금방 돌아올 거죠?”
침상에 몸을 누인 채 나예린이 물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힘겨워 보였다.
“물론이죠. 금방 돌아올게요.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요. 칠상흔인지 팔상흔인지 모르지만 절대 지지 않을 테니까요.”
연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다릴게요.”
나예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미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였다. 물론 그녀는 류연이라고 직접 소리를 내서 이름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그 렇게 들렸다. 아무리 겉이 다른 모습을 취하고, 다른 인격을 연기하고 있어도 그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 린을 잘 부탁해요, 윤 미소저.”
연비의 장난스러운 말에 화산파의 소심쟁이 윤준호, 아니, 윤미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마, 맡겨주세요.”
나예린이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연비도 마주 흔들어주었다.
“눈 깜짝할 사이만 기다리면 돼요, 그럼 다녀올게요.”
나예린은 잔잔한 미소로 배웅했다.
“다녀오세요.”
비록 내상으로 몸이 힘들었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았고 애써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 게 약한 상태인 나예린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일말의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연비는 방을 나섰다.
문이 굳게 닫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흔드는 나예린의 애잔한 모습이 아직도 그의 두 눈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
검은 옷이 스르륵 바닥에 떨어진다.
새하얀 어깨를 지나 매끄러운 등을 타고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피부는 윤기가 날 정도로 매끄럽고 팔뚝은 얇았으며 어깨 또한 좁았 다. 그리고 허리도 잘록하게 들어가 있고 다리는 쭉 뻗었다. 뒷모습만 보면 조각 같은 여인의 몸이었다. 찬찬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신을 바라보던 호박색 눈동자 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규칙적인 호흡에 따라 몸 안의 내공이 사지의 구석구석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까지 촘촘 한 그물처럼 펼쳐진 신경을 타고 의지가 뻗어나갔다.
“후우우우!”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육체를 속박하고 있던 의지를 일순간에 해방했다. 우드드득! 뚜득!
좁게만 보였던 어깨가 넓어지고, 매끄럽게 쭉 뻗어 있던 팔과 다리에 단단한 조각 같은 근육이 잡혔다. 그저 풍선처럼 커다란 근육이 아니라 근육 한 올 한 올에 단 련된 힘이 어려 있는 강하면서도 날렵하고 유연한 근육들이었다. 자신의 의지에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단련되어진 육체는 예술에 가까웠다. 자신의 육체를 변형시키는 ‘축골공(蓄骨功)’을 가능하게 한 것도 이렇게 의지에 반응하도록 훈련된 근육들 덕분이었다.
예전에 입었던 옷은 천무학관에 두고 왔기 때문에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었다.
새 옷의 색깔도 검었다. 다만 좀 전에 벗었던 옷과 달리 이것은 남성용이다. 옷을 걸치고 허리띠를 조른다. 등과 소매에는 은은하게 날아가는 새의 날개 문양이 수 놓아져 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검은 비단실로 수놓은 탓에 눈에 확 틔지는 않으면서도 빛의 각도에 따라 문양이 신기루처럼 드러났다 사라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매 안에서 항상 느껴졌던 묵직한 비도의 감촉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옷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거울을 본다.
호안석의 눈동자는 지금 황금빛으로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일단…… 좀 가려야겠군.”
사르륵.
얼마 전에 가위로 자른 탓에 앞머리가 잘려져 눈이 조금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영 어색해 주변의 머리카락으로 눈 부위를 가린다.
연비일 때는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지만, 이 눈은 다른 눈에 비해 상당히 뚜렷한 특색이 있다. 특히 무공을 쓸 때는 특유의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 으면 누군가에게 눈치 채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막아야 했다.
머리카락으로 눈동자를 가리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거울 속에 서 있던 검은 옷의 미녀는 온데간데없고, 한 명의 날렵해 보이는 흑의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 를 아는 사람들이 비류연이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소중한 것의 이름을 입에 담아본다.
“예린…….”
그녀는 충분히 힘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돌려받기 위해 소중한 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 힘을 써서 전력으로.
그 마음이 상대에게도 틀림없이 닿았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마저 상대의 가슴에 닿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마음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한한 단절 을 넘어 타인의 마음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
만약 마지막에 영령이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깨어났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지금쯤 깨어난 영령은 또 어떨까? 그녀에 게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아직 예린은 그것조차 확인해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데, 얼마나 힘냈는데 그 결과조차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있을 곳에 있지 못했다. 존재해야 마땅한 유일무이한 장소에 부재중이었다. 그 사실이 그 무엇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예린, 그녀가 있을 곳은 바로 어느 곳도 아닌, 하늘 끝과 땅 끝 너머, 아니, 전 우주를 통틀어도 오직 한 곳, 바로 자신의 곁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바르고 올곧은 진리(眞理)! 음양이 나눠지기도 전, 시간의 시작 전부터 결정되어져 있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태는 이 우주에 있어서, 있어서는 안 될 뒤틀림! 그 심각한 왜곡은 그의 세계 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우주 종말의 위기에 해당됐다.
“이런 우주 따위, 이런 세계 따위 신이 인정해도 나는 인정 못해!”
이 세계는 무의미(無意味)하다.
한 장의 거대한 백지와 같은 이 세계.
세계가 무의미하다면 좋다. 내가 새하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면 되니까.
그것은 자신의 세계는 자기 스스로 창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내가 사는 세계의 의미는 나 자신이 정하겠다.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나 자신의 의지로.
그러니 그 소중한 백지에 더러운 발을 들이미는 악적에게 하늘의 철퇴를!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악을 불태울 벼락을! 나의 세계를 침식하는 자는 백 번, 아니, 백 억 번 죽어 마땅했다.
그런데 나의 백지 위에, 나의 세계 위에 오점이 생겼다. 제멋대로 난입한 누군가가 그어놓은 상처! 결락(缺落)!
“감히 잘도 이런 짓을!”
나예린이 존재해야 마땅한 곳에 지금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이 세계가 본래 있어야 할 모습이 아니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이 본래 있어야 할 본래의 모습 그대로, 뒤틀어진 세계를 본래대로 되돌리겠다고 그는 맹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 범인들의 종알거림 따윈 아무래도 좋다. 짖을 테면 짖어라! 내 눈썹이 반 치라도 깜빡이는 지. 어떤 오명을 쓰더라도 나는 나의 세계를 지킨다. 내가 나이기 위한 나의 미래를!”
마천각을 확 뒤엎어서라도 그녀를 다시 되찾겠다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귀신이든 도깨비든 악마든 뭐든 되어주지!”
그자가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를 후회하게 해주마! 두 번 다시 윤회의 수레바퀴에 들어가고 싶어지지 않도록!”
흉적(凶賊)에겐,
피의 철퇴를!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여, 두려워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늘이 아니라 바로 이 나를! 그러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라고 충고해 주지. 왜냐하면 하늘보다 내 쪽이 더 무서울 테니까.”
물론 무릎을 꿇고 빌어도 이미 그 운명에 어떤 변함도 없을 테지만.
“어차피 너의 종말에 변함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밖으로 나가 하늘 저편을 바라본다.
그녀가 사라졌는데도, 그녀가 내 옆에 없는데도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결코 기쁘지 않았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었다.
손가락을 입에 대고 숨을 강하게 내뱉는다.
휘이이이이이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드높은 하늘로 높이, 그리고 멀리 퍼져 갔다.
얼마 뒤,
푸드드드드득!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강호란도의 한쪽에 위치한 숲에서 매가 울음소리와 함께 푸른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