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3화 – 푸른 깃털의 강하

비뢰도 25권 3화 – 푸른 깃털의 강하

푸른 깃털의 강하

-비류연 강림!

강호란도에 위치한 원통투기장 안에 위치한 치료원. 여기는 투기장에서 싸움 도중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었다. 이곳은 패자를 위한 곳이 아 니라 승자를 위한 곳이었다. 패자가 가는 곳은 치료원이 아니라 장례원이었다.

끼이이익, 치료원 정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무기를 하나씩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이십대의 젊은 무 인들이었다. 그중에 특이한 존재가 섞여 있었는데, 그는 거지였다. 그러나 거지치고는 얼굴에 상당한 활기가 돌고 있는 이상한 거지였다. 거지답지 않은 거지, 노학 이 기지개를 쭈욱 켜며 입을 열었다.

“이야, 이번만큼은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궁상이.”

팔짱을 낀 채 옆에서 걷고 있던 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도 목숨은 부지했군. 난 오늘 드디어 친구의 송장을 치우게 되는 줄 알았네.”

현운은 실로 두려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조공(功)이었어. 마구잡이인 듯 법식이 없는데도 궁상인 전혀 피하지를 못하더군. 덕분에 의원이 할 일이 더 늘었어. 얼굴에 못 보던 혈선이 열 개나 생겼으니까. 여자들은 모두 그런 기술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당령이도 때때로 상상할 수 없는 기술로 나를 괴롭힐 때가 있어. 막아야 하 는데 막을 수 없는, 마치 신기루같이 잔인한 수법을 말이지.”

당삼은 당령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쓰던 잔인한 기술을 떠올리며 동변상련의 마음에 젖었다.

“진령도 진령이야. 기력을 다 소모한 줄 알았는데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났지? 마치 호랑이 같더군. 당장에라도 궁상이를 찢어발길 것 같았지. 잠력이라도 격발 시킨 걸까?”

“원래 여자는 요물이라 하지 않나. 남자들이 조금만 방심해도 곧장 삼도천 너머로 보내 버리고 말지. 궁상이는 오늘 운이 좋았어. 그 건수면 열두 번 정도 죽을 수 도 있었거든.”

“에이, 그건 스스로의 생명을 깎아먹는 짓이라고. 아무리 궁상이 양다리를 걸쳐서 불만이었다 해도 그렇게까지 했겠어?”

“분노의 힘이라는 거지.”

“아냐, 그건 분노라기보다 일종의 한(恨)’이 아니었을까?”

“한(恨)?”

“진령조의 조 이름처럼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이지.”

“그거 정말 무섭군.”

“그 누구지? 류은경이라는 은발 아가씨도 굉장했어. 그 피보라가 몰아치는 곳에서 끝까지 도망치지 않다니 말이야. 자기 의견을 철회하지도 않고. 그것도 ‘한’인 “가?”

“아뇨, 그건 ‘정(情)’이죠.”

가만히 사내들의 작태를 보고 있던 남궁산산이 한마디 했다.

“정(情)? 사내의 한 사람으로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이군.”

현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일부다처제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잖아? 솔직히 무림세가 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고 세가에서 자손의 수란 곧 세력의 증가를 의미하니까. 울 아부지만 해도 부인이 벌써 다섯이라고. 내년에 또 한 명을 들이려 해서 안채에서 반발이 심하다고.”

금영호가 두 겹짜리 자신의 턱을 긁적이며 의견을 피력했다.

“다다익선이라는 뜻?”

현운이 반문했다.

“그런 거지.”

“그렇다면 궁상이가 종마(種馬)라는 이야기?”

명색이 도가의 제자이면서도 현운의 표현엔 망설임이 없다.

“팔대세가의 선두를 다투는 남궁세가의 씨잖아. 품질보증은 이미 되어 있는 거라고. 쑴풍쑴풍 나아 번창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아내 한 명으 론 부족하지 않을까? 난 적어도 네 명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누구를?”

“부인을! 게다가 우리 집은 돈도 많잖아. 삼처사첩도 꿈은 아닐지도. 꼭 영웅들만 삼처사첩 가지라는 법 없잖아? 금력의 힘으로 나도 삼처사첩에 둘러싸여……

으헤헤헤헤헤.”

망상의 바다에 빠져 버린 금영호의 입가를 타고 한줄기 침이 흘러내렸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천박하게. 그 말, 진령이 앞에서 똑같이 해보시죠?”

남자들의 경박함을 참다못한 남궁산산이 쏘아붙였다. 그러자 금영호의 안색이 대변했다.

“아이구, 남궁 소저. 그것만은 참아주시구려. 안 그래도 요즘 살이 너무 빠져 체형이 무너졌는데, 가죽밖에 안 남는다고요.”

“그러니 처음부터 입조심을 했어야죠.”

남궁산산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이들의 논쟁에 화산의 화설옥과 투명삼인방이 가세하면서 대화는 더욱 격렬해졌다. 결혼하고는 거리가 멀기가 무당파보다 더 먼, 개방의 제자 노학은 그들의 팔자 좋은 이야기에 어울릴 생각이 들지 않아 잠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공방은 귀가 따갑도록 진행되고 있었다. 가 까운 곳에서 시끌시끌 떠들어대고 있지만 왠지 너무나 아득하게 먼 이야기처럼 들려 자신도 모르게 아득히 먼 하늘에 시선을 옮겼다. 푸른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햇 빛이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응?”

그때, 눈을 가늘게 뜨고 창공을 바라보던 노학의 눈이 뭔가를 포착했다.

푸른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그것은 처음에는 단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너무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을 맨 처음 발견한 것은 개방의 거지이자 차기 방주 후보이기도 한 노학이었다. 특별히 감이 뛰어나거나 시력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단지 남궁상이 입원해 있는 치료원을 나와 순전히 별생각없이 올려다본 하늘에서 우연히 이질감을 발견한 것뿐이었다.

“저게 뭐지?”

노학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가?”

“저거 말야, 저거! 하늘에 빙빙 돌고 있는 까만 점 말야.”

그 말에 주작단 몇몇의 시선이 노학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확실히 점 같은 게 보이는군.”

현운이 말했다.

“새 아냐?”

당삼이 의식적으로 시력을 집중하며 말했다.

“근데 기분 탓인가?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현운의 눈이 더욱 가늘게 뜨여졌다. 무의식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이 아니에요, 현운. 진짜로 커지고 있다고요.”

남궁산산이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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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하나의 점이었던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면이 되고, 이제는 형체까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저것은 계속 보면 볼수록 마음이 이리도 심 란해지고 불안해지는가? 이 정체불명의 불안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주작단원들이 불안으로 술렁거리는 가운데, 점은 점점 커지더니 하나의 형상을 이 루었다. 당당하게 좌우로 활짝 편 늠름한 날개, 그것은 바로 한 마리의 매였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어? 저 새는? 설마!!!”

저게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저 청포로 물들인 듯한 푸른 깃털의 날개를 지닌 새는 무척 드물었다.

“에이, 설마…….?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터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화산파의 화설옥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경박함을 책망하지 않았다. 왜냐면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은 모두 다 같은 마음 이었던 것이다.

“저, 저것은…… 저것이 왜 여기에…….”

이들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푸른 날개의 현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미, 믿을 수 없어! 이, 인정할 수 없어!”

자신들을 향해 춤추듯 날아 내려온 그것의 진정한 정체를 안 순간, 주작단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단적인 착란 상태에 빠졌다.

“이, 이건 꿈이야아아아아아!!!!”

이딴 잔혹한 현실이 자신들을 덮쳐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때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의 고막을 창처럼 꿰뚫는 한마디가 있었다. “아니, 현실이다.”

푸드드드득!

그리고 날아 내려온 푸른 날개의 매는 기쁜 듯이 날개를 접으면 그의 어깨에 앉았다. 주작단의 눈이 일제히 접시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숨이 턱 막혀하는 이들도 있었다. ‘딱딱딱’ 이를 부딪치는 이도 있었다.

““대, 대, 대사형!”

주작단원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해동청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푸른 날개의 매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대사형 비류연 본인이었다. 지금쯤 천무학관 근신실에 처박혀 있어야 할 사 람이 어찌 이곳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오랜만이다, 아가들아.”

그러나 비류연의 얼굴에 언제나 보이던 장난스런 웃음은 이번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들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거 둬갈 수 있는 것은 혹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들은 의심해 왔던 것이다.

“여, 여, 여, 여, 여긴 어인 일로…….”

현운이 용기를 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난 오면 안 되냐?”

퉁명한 대답을 들은 현운이 깨갱하며 물러났다.

몸에 두르고 있는 묘하게 진한 살기가 바늘처럼 그들의 피부를 따끔따끔 자극했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살기가 풀풀 넘치는 비류연을 앞에 두고 자초지종을 캐물을 만큼 간이 큰 이들은 여기 없었다. 아무리 강해져도 이상하게 대사형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약 해지고, 하찮아지는 그들이었다.

“그래? 난 또 안 되는 줄 알았지. 놀라는 꼬락서니하고는. 누가 보면 새총이라도 맞은 줄 알겠다.”

사실 새총알로 엉덩이에서 입까지 꿰뚫린 기분이었다.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너희들이 도와줄 일이 생겼다.”

비류연이 간단하게 말했다.

“대사형이 저희들의 손을 빌릴 일도 있습니까?”

당삼과 노학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당연하지. 난 인간도 아닌 줄 아느냐?”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었대!’

‘정말?’

“에이, 거짓말. 분명 뻥일 거야.’

“맞아, 맞아! 인간일 리가 없잖아? 분명 착각일 거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잘 모르는 법이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 것으로 인간의 영혼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법.’

‘그럼 대사형이 인간이 아니면 뭐야?”

‘그건…… 알고 싶지 않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어.’

비류연의 말을 믿는 사람은 주작단 중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속닥거림을 듣다 못한 비류연이 한마디 내뱉었다.

“너희들, 죽을래? 다시 지옥의 특훈 맛을 좀 볼까?”

안 본 사이에 기합이 좀 빠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기합을 구겨 넣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히꾹! 딸꾹!”

거짓말처럼 속삭임이 뚝 멎었다.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사제 겸 제자들을 둘러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자, 현실 부정은 그만 하고, 정신들 차려라. 그런고로 급히 인원을 차출하겠다.”

앞말과 뒷말의 연관성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어떤 인원인가요?”

당삼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구출대다.”

비류연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사라진 나예린의 존재가 무거운 바위가 되어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이다. “누구를 구출합니까?”

“…..”

비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말한다는 것은 또 한 번 이 잔인한 현실을 자각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사형?”

현운이 조심스레 반문했다. 이런 대사형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공포스러웠다. 이렇게 음울할 바에야 차라리 예전의 막나가는 모습이 더 나았다.

나예린. 너희들의 대사저가 될 분이시다. 그녀가 납치당했다.”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 현실을 외면한다 해서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약함이 그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기에 비류연은 싫

지만, 다시 한 번 현실과 눈을 맞추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그는 견뎌내야만 했다.

“나예린 소저가요?”

“납치요?”

“대체 언제요?”

“그게 사실입니까?”

주작단원들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이다.”

“범인은 찾으셨습니까?”

“지금부터 찾으러 갈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들이 필요하다.”

오늘의 대사형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눈동자가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일종의 무기질이나 무생물 같았다.

뜨거운 분노도, 차가운 이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샅샅이 뒤져라. 아직 이 강호란도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터. 분명 어딘가에 꼬리가 남겨져 있을 것이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얼음 안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반드시 찾아라! 이 동정호를 피로 붉게 물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난 그녀를 되찾을 것이다. 그럼 가라!”

“예, 대사형!”

반문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렇게 무서운 느낌의 대사형은 모두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비류연은 몸을 돌렸다.

순간 참았던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비류연은 다시금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물들인 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묻은 피를 ‘홱!’ 하고 땅에 흩뿌린 다음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편하게 쉬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그의 귀에는 환청처럼 나예린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더 필요해. 유능한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몇 명의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역시 그 녀석들이 필요하겠지…….’

지금 자신들의 이름이 비류연의 시커먼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불행히도 그들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