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타난 악몽
-삐걱거리는 상처
그녀는 두려웠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구 년 전 그날 밤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옛 상처가 삐거덕삐거덕거리며 벌어지고 있었다. 그 벌어진 틈새로 미칠 듯한 공포가 새어 나와 그녀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수천, 수만 마리의 지네가 그녀의 영혼에 침입하고 있는 듯했다.
손발이 얼어붙고 혀가 굳는다. 뭐라고 말조차 한마디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피땀 흘려 수련해 왔는데…… 지금까지의 수련은 모두 헛것이었단 말인가?
그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발작적으로 내공을 일으켜 보려 해도 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몸 안이 텅 빈 듯한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 악몽을 떨치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노력해 왔 던 것이 아니었던가.
“두려우냐?”
나예린은 그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너무 꽉 쥐어 푸르스름해진 손과 창백한 안색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억제하고 절제 하고 참으려 해도 그녀의 몸은 과거의 상처와 공포를 잊지 못했는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붉은 옷의 사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아주 좋아!”
비에 젖은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나예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쾌락과 흥분이 차올랐다.
‘이 얼마나 달콤한 쾌락이란 말인가…….’
구 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눈부시게 개화한 순백의 아름다움, 그 속에 번져 나가는 검은 공포.
“크크크큭, 자신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상대를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지. 왜냐하면 자신의 강함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 몸이 지배자의 위치에 서 있 다는 것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거든. 더욱더 두려워하고 더욱더 떠는 게 좋아. 그 작고 새하얀 교구를 떨어, 좀 더 이 몸을 기쁘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작은 새야? 너의 절망에 찬 두려움에 떠는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참을 수가 없구나. 더욱더 몸부림치도록 해라, 이 몸의 앞에서.”
광기에 가득 찬 목소리에 나예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꾸욱!
그녀의 떨림이 갑자기 멈추었다. 자신이 두려워하면 할수록 이자가 기뻐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자는 그녀를 한껏 조롱하고 있었다. 좀 더 자신이 공포 에 빠져 벌벌 떨기를 바랄 것이다. 구 년 전 폭풍우가 치던 그날 밤처럼 절망 속에서 울부짖길 바라는 것이다.
나예린은 매서운 눈빛으로,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두려워하듯 피하던 시선을 지금은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떨리고 있지 않았다.
주르르륵.
나예린의 입가를 타고 붉은 홍옥 같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몸에서 떨림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 혀를 깨문 것이다.
“쯧쯧. 무슨 난폭한 짓이냐, 여자 애가.”
나예린의 눈빛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려 한다면, 만일 자신을 범하려 한다면 당장 혀를 깨물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서천이 가볍게 쯧쯧 혀를 찼다.
“뭐, 좋다.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것을 보는 것 또한 또 다른 여흥이지. 하지만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크크크.”
“그건 무슨 뜻이죠?”
나예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 역시 그를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 무슨 뜻일까? 선심 써서 가르쳐 주지. 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일은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이야기다.”
나예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금방 다시 안색을 회복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그러자 서천의 입가에 잔인하고 비릇한 미소가 맹독처럼 서서히 번져 나갔다. 잔인하고 일그러진 욕망의 검은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 거대하고 비틀린 욕망을 가까이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예린은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내공이 봉쇄되어 있다 해도 그녀의 용안은 지금도 정 상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경우, 그 사실은 오히려 그녀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저자의 악의를 그대로 느낀다는 것은 맹독에 쐬이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더럽혀지지 않은 그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크크크크. 예언을 하나 하지.”
그는 이 두려움에 떠는 여인을 농락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했다.
“너는 본좌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고 오체투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 종이 되어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될 것이다.”
나예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순식간에 붉어졌다가 단숨에 폭발했다.
“절 희롱하시는 건가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절대로! 제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는 나예린의 격렬한 부정에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크크큭. 과연 그럴까? 지금은 그렇게 기운차다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그때도 과연 그렇게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굳은 의지 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즐거운 도락이지.”
“결코 저의 의지를 허물어뜨릴 수는 없을 거예요. 제 영혼은 절대로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아요.”
크크, 서천은 웃었다. 그의 눈에 일렁이는 검은 불꽃이 더욱 강렬해졌다.
“글쎄, 과연 어떨까? 이 몸이 너에게 절망을 안겨주마. 끝없는 절망을! 너의 동료들과 동생들은 차례차례 죽어나가고 너의 어미는 네 앞에서 윤간당할 것이다. 그 리고 그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위선자인 네 아비는 내 손에 천 갈래 만 갈래가 되어 갈가리 찢겨져 참혹하게 죽을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그때도 과연 네가 지금 처럼 오만하고 팔팔할 수 있을까? 너의 연약한 영혼이 그 절망을 어디까지 견뎌낼 수 있을 지 그것참 기대되는구나. 크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
그의 광기 어린 선언을 들은 나예린의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그녀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미쳤다. 역시 이 사람은 미쳤다.’
그렇기에 방금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진짜 그렇게 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에게는 그것을 할 만한 힘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지난 십 년간 그는 복수에 눈이 먼 복수귀였다. 그 잔혹한 귀신이 십 년 동안 그가 증오하고 그를 내쫓은 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다. 분명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 다. 특히나 지금처럼 정천맹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있을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이자는 진심이다. 진짜로 할 생각이야!’
그 일그러진 검은 광기가 그녀의 눈에는 너무도 명확하게 실체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한 마리의 거대한 괴물이었다. 저 괴물이 지금 그녀의 소중한 것들은 집어삼키고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사로잡힌 수인(囚人)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자신은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사태의 진행을 막기는커녕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나예린은 조용히 가지런한 치아 사이에 혀를 가져다 댔다.
“내가 있으면 모두의 발목을 잡게 돼.’
지금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만일 그녀 자신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녀는 그 사태를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내가 죽으면.
적어도 그녀가 무기가 되는 일은 없어질 터였다. 그녀는 서서히 이빨에 힘을 주었다.
“……..”
하지만 끝까지 끊어내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비류연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 얼굴이 그녀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 살고 싶어!’
살아서 다시 한 번 비류연과 만나고 싶었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류연이 항상 말했잖아. 포기하지 마! 자신의 세계에서 가능성을 모두 던져 버리지 마. 끝 까지 물고 늘어져 그 가능성을 잡아내라고. 불가능은 가능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그를 믿자. 나의 자랑스런 부모님들을 믿자. 그리고 친구 인 연비를 믿자.’
연비와 비류연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자 왠지 힘이 났다. 그녀는 약해져 가는 의지를 다시 벼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질 수 없어.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러면 그럴수록 저자를 기쁘게 만들어줄 뿐이야. 그것만은 해서는 안 돼!’
나예린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저도 예언을 하나 하죠.”
“재미있군. 어디 한번 들어볼까?”
“그 사람이 반드시 절 구하러 올 거예요. 그리고 절대로 당신 같은 사람한테 지지 않을 거예요. 그때 환마동에서 공포에 떠는 절 구해줬을 때처럼 저를 구해줄 거예 요. 당신의 그 하찮은 예언은 그 사람의 손에 의해 부서질 거예요.”
그녀의 예언은 들은 그의 입가에 흉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의 눈동자는 광기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라면 누구? 소문에 들리는 그 비류연이라는 애송이 꼬마 말이냐? 듣자 하니 사고를 쳐서 이곳 마천각에도 오지 못했다 들었는데? 수백 리 떨어진 천무 학관에서 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기라도 한단 말이냐? 적어도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네가 멀쩡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거냐? 크하하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농 담이구나.”
“아니요, 당신은 류연을 몰라요! 상식을 깨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특기죠. 이번에도 당신의 상식을 깨부수고 그는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만이 아니에요. 연비도 있어요. 진설이도 있어요.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천무학관의 동료들 역시 당신의 만행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동료를 믿는 것뿐이었다.
“내가 그런 조무래기들이나 상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나를 쓰러뜨리려면 그런 조무래기가 아니라 천무삼성 정도는 데려와야지. 그래야 이야기가 되지 않 겠느냐?”
“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셔요. 그분들은 결코 당신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나백천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동자에서 흉망이 번뜩였다.
“크크, 그 잘나신 위선자 무림맹주님도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적이 아니다.”
굉장히 오만한 목소리로 그가 자신했다.
“아버님은 결코 당신 같은 잡배에게 지지 않아요.”
철썩!
그가 뺨을 후려쳤다. 나예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진주를 녹여놓은 것 같은 하얀 피부가 벌겋게 붉어졌다. 그는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바로 돌리더니 왼손으로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조금 더 조심했으면 좋겠구나, 사랑스런 조카야. 조금은 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지. 개처럼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겠지? 나의 인내심은 바다처럼 넓지만, 너무 그 크기를 시험하지는 말려무나. 난 그런 건 딱 질색이거든. 알겠니?”
그의 손길이 뺨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뱀이 그녀의 뺨을 핥는 것 같아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열이 받았 다. 부아가 치밀었다. 분노가 샘솟았다.
“너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해주지. 기뻐하는 게 좋아. 너는 내 후계자를 키우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는 차기 무림의 지배자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영광이라 생 각하도록 해라.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
그가 고개를 들어 앙천대소했다.
“절대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의지를 꺾지 않은 채 나예린이 외쳤다.
“너와 나의 예언, 어느 쪽이 맞을지 두고 보도록 하지. 그 또한 재미있는 여흥이 될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전에 주인에게 버릇없게 군 것에 대한 벌을 줘야 할 것 같구나.”
그의 마수가 서서히 다시 한 번 나예린의 창백해진 뺨을 쓰다듬더니 이윽고 턱을 지나 새하얗게 드러난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 손이 쇄골을 지나 더 아래 로 내려가려는 순간, 요란한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서천의 동작이 우뚝 멈추었다.
“이 소리는…….”
분명 비상종 소리였다. 그것도 특일급의 비상사태였다.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뗐다.
“아쉽지만 시간은 아직 충분해. 나 역시 급하게 모든 것을 다 맛볼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건 정말 아까운 짓이거든. 천하의 미식이 눈앞에 있는데! 그걸 단숨 에 먹어치우면, 순간적으로 기쁠진 모르지만 그 달콤함과 황홀함은 너무나 극단적으로 짧지! 참으로 아쉬운 일이야.”
그런 일은 그에게 있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구 년 만에 다시 손에 쥔 기회였다. 충분히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당장 손을 대는 것은 참기로 했다.
“천천히 천천히, 한 꺼풀씩 한 꺼풀씩 벗겨 나가며, 발가락 끝부터 시작해서 머리끝까지 너의 모든 것을 음미해 주도록 하마.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야. 그러니 나는 조바심 내지 않아. 안달하지 않는다. 잠시 시간을 죽이기라도 할 겸 너의 친구들을 상대해 주마. 너의 마음에 절망이 가득 차올라 그 보석 같은 눈동자 에 눈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절경이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등줄기를 타고 찌릿찌릿한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아아, 한시라도 빨리 그 광경을 보고 싶었다.
“네가 소중하다 여기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주마. 그때마다 너의 가슴에 새겨질 고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황홀해지는구나. 어서 보고 싶다. 네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그 교구를 분노에 떨며 나를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종국에 가서 너의 긍지와 의지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그때가 되면 너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끝에 가서는 너의 몸과 마음 모두 온전히 나 하나만의 것이 될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 나갔다. 그는 자신 안에서 이글거리는 어두운 욕망을 살살 달래며 극상의 맛을 볼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극상의 미식을 맛보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도 필요한 법. 그는 충분히 그걸 견뎌낼 용의가 있었다.
“벌써부터 그때가 기다려지는구나. 자,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볼까?”
잠시 후 그자의 모습이 방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예린은 간신히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다리와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엄청난 심력을 한순간에 소비한 탓인지 갈증이 나듯 목이 칼칼하고 몸이 무거웠다. 너무 지독한 악의에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지켜왔던 의지가 단숨에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어둡고 두렵고 무서워…….”
그자 입가에 맺힌 비릿하고 잔인한 미소와 그 형형히 빛나는 독사의 눈은 마치 그녀 자신을 낱낱이 해체하려는 듯 날카롭고 으슬으슬했다.
공포라는 이름의 야수가 천천히 그녀의 숨통을 끊어가고 있었다. 그 야수는 한 점 한 점 육신의 고기를 떼어 먹듯, 나예린의 무구한 영혼을 한 점씩 한 점씩 갉아먹 고 있었다. 이 악몽 같은 공포에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이 서지 않는다. 나예린은 자신의 마음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웅크린 채 몸을 감쌌다.
“류연…….?”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는 지옥이었다.
***
“역시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
장홍의 예감은 곧바로 들어맞았다. 정문을 지키는 사람이 저 두 사람뿐일 리가 없었다. 서른 명이 넘는 수비대가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나 비류연은 정문을 제압할 생각이 없었다.
“빨리 정리하고 가자고.”
“오우!”
두 배 조금 넘는 숫자 가지고는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비류연은 직접 나서지도 않고 살짝 고갯짓만 했다.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주작단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인지했다.
아직 부상 중인 남궁상과 진령을 제외하고 주작단 중에서 네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남궁산산과 현운이 앞장서고, 노학과 당삼이 뒤를 받쳤다. 굳이 다 나설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남궁산산의 손에서 뇌전검법이, 현운의 손에서 무당의 현검이, 노학의 손에서 개방의 타구봉법이, 당삼의 손에서 당가의 암기술이 펼쳐졌다. 그동안 비류연에 의 해 더욱더 연마된 기술들은 엄청난 위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어중간한 실력의 수비대로는 그들의 상대가 되기에 역부족이었다.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이럴 수가……. 단 네 명에게 수비대가 궤멸되다니…….”
서른 명에 가까운 수비대가 단 네 명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수비대 중 한 명이 자신 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것은 바로 침입자의 존재를 마천각 전체에 알리는 일이었다.
땡땡땡땡! 땡땡땡땡땡!
요란스레 울리는 비상종 소리가 바람을 타고 마천각 전체로 울려 퍼졌다. 역시 그냥 얌전히 보내줄 리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비상종이 울려 퍼진 게 얼마만의 일일까? 그동안 비상사태라고 할 만한 사태를 겪지 못했던 마천각은 오늘, 십수 년 만에 특일급 비상종을 울렸다. 이 사 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 종이 울렸다는 사실 자체가 마천각에 있어서는 이미 굴욕적인 일이었다. 잠자고 있던 흑도 제일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강자, 마천각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거인은 이제부터 대응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앞장서서 걸어가는 비류연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대범함과는 달랐다. 저것은…….
“류연, 잠깐!”
장홍이 비류연을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비류연이 대답했다.
“왜?”
할 말이 있으면 발을 멈추지 않은 채 하라는 뜻이었다.
“자네, 일부러 그랬지?”
“일부러라니, 뭘?”
“시치미 떼지 말게. 이 소동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해. 분명 비상종이 울릴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방치하다니, 자네답지 않아. 게다가 자네의 지금 그 무표정. 지 금 그건 대범함과는 달라. 대범하기 때문에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게 아냐.”
“그럼?”
“의도대로 상황을 이끌었기 때문에 무표정한 거야. 즉, 모든 게 자네의 계산대로였다는 뜻이지. 내 말이 틀렸나?”
“맞아.”
비류연이 순순히 인정했다.
“이유가 뭔가, 이렇게까지 소동을 크게 벌인 이유가? 조용히 들어갈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보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일이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지 않나?” “예린을 지키기 위해서야.”
비류연의 말은 짧았지만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 소저를 지키다니? 뭘로부터?”
그러자 이번에는 비류연의 날카로운 어조로 반문했다.
“설마 그 죽일 놈이 그녀에게 아무 짓도 안 할 거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이미 나예린은 적의 손에 떨어졌다. 게다가 미녀였다.
“난 그놈이 어떤 놈인지 잘 알지. 어떤 비열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놈이지. 그놈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린에게 해악이야.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야 마 땅한 놈이지. 그놈이 지금 그녀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미칠 것 같아. 어떻게든 놈을 떼어놓아야 해. 그놈을 그녀의 가까이 있게 해서는 안 돼. 그놈 이 그녀를 욕보이게 할 수는 없어!”
“그거랑 이 소동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류연?”
효룡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장홍은 조금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했단 말인가…….?’
비류연이 말을 이었다.
“놈은 바로 마천각의 고위 관계자가 분명하니까!”
비류연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해하는 효룡의 말을 장홍이 끊는다.
“그다음은 내가 설명하지. 즉, 이런 걸세. 이 정도의 소동이 몇 년 만에 일어난 걸까?”
“글쎄, 적어도 십 년 안에는 일어난 적이 없겠지.”
딱 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그것도 외적의 침입이 아닌 내부의 문제였다.
“그래. 즉, 그렇다는 것은 초유의 비상사태라는 것을 의미해. 고위 관계자들이 놀고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지.”
이제야 효룡도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그 고위 관계자들을 바쁘게 만들기 위해서 라는 건가?”
“맞아. 난 적어도 놈이 대장급 이상이라고 생각해. 나이도 있고, 무공 실력으로도 그 이하가 되긴 힘들지. 그게 아니라면 권한도 적고 할 수 있는 일도 적을 테니 까. 난 놈이 마천십삼대의 대장 열세 명 중 하나이거나 아니면 마천각주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
“설마…….”
효룡은 비류연의 추리가 선뜻 믿을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마천각주가 바뀌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지. 그렇다는 것은…….?
장홍이 말을 받았다.
“아마 그놈은 틀림없이 마천십삼대의 대장 중 하나인 게 분명해!”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나? 물론 마천십삼대의 대장이 강하긴 해. 하지만 고위 관계자라면 꼭 마천각주만 있는 건 아냐. 호법들도 있고 원로회도 있고.” “아니, 난 십삼대 대장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왜?”
“왜냐하면 오직 대장만이 마천각 내에서 스스로의 세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으니까. 그는 무림맹주 나백천에 대해 언제나 복수를 꿈꾸는 자이지. 그런 자가 지난 구 년 동안 스스로의 세력도 키우지 않은 채 그냥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그래도 만일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가?”
“그땐 나머지 원로회인지 호법들인지 하는 것들을 하나씩 족쳐 나가야지.”
“너무 막가는 건 아닌가?”
“또 하나 신뢰할 만한 지표가 있긴 있지.”
“그게 뭔가?”
“감(感).”
“감?”
“그래, 나의 직감이놈은 그들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어. 그 빌어먹을 외팔이놈이 말야.”
“외팔이라고?”
“그래, 그놈은 외팔이야. 그러니 그놈을 보면 금방 찾아낼 수 있어. 그놈이 십삼대의 대장이든 원로회이든 말이야. 일단 수비대도 궤멸시켜 놨고, 이 정도 소동이면 모두들 비상회의라도 개최하지 않을까? 만일 참석하지 않은 놈들이 있다면 그놈들이 가장 수상한 놈들이 되겠지.”
일단 크게 한 번 판을 뒤흔들어 놔야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적이 딴 짓을 할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그 악적 놈의 시선을 이곳에, 자신들에게 묶어두는 것, 그 것이 비류연이 노리는 바였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류연, 그건 좀 이상해.”
“뭐가?”
“마천십삼대의 대장 중에 외팔이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자 장홍은 무척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마천십삼대에 외팔이 고수가 있다는 정보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로회도 마찬가 지였다. 그러나 비류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놈은 외팔이이면서도 외팔이가 아니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장홍은 비류연의 말이 마치 수수께끼 같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직접 보면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