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 그것이 정의이다
-유희(遊戱)
“충고 하나 하지, 친구들.”
각 섬을 향해 흩어지려는 사람들을 장홍이 불러 세웠다.
“자네들에게 미리 말해줄 게 있네.”
사람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장홍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해주다니요? 뭘요?”
효룡이 반문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 말일세.”
“그게 뭡니까?”
“흑수(黑).”
효룡과 옥유경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흑수? 그게 뭡니까?”
대부분이 그 말을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흑도의 인물들은 항상 본실력의 삼 할 이상을 숨기고 있지. 그리고 누구나 보이지 않는 마지막 한 수를 숨기고 있다네. 그것을 그들만의 은어로 보이지 않는 손, 즉 ‘흑수’라 부르지. 정파의 구명절초라고나 할까? 잔챙이들은 상관없지만 고수 급들은 달라. 그들이 감춰두고 있는 ‘비장의 한 수’는 차원이 다르다네. 그 흑수를 깨뜨리지 못하는 한 자네들은 그들을 이기지 못할 거네. 특히 실력 차가 그리 크지 않을 때는 더욱 말이야. 상대의 흐름에 휘말려서는 안 되네. 그건 곧 죽음을 의미 “하니까.”
장홍이 전에 없이 강경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자네들, 이것 하나만은 명심해 두게. 이제부터 자네들이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르다니? 뭐가 다르다는 거죠?”
흑수에 대해 고민하던 모용휘가 질문했다.
“흑도의 싸움은 백도 때와는 달라. 백도 때는 그저 상대보다 강하면 충분했네. 그걸로 자네들은 상대에게 이길 수 있었지. 하지만 흑도에서의 싸움은 달라. 모두들 무언가를 숨기고 속이고들 있다네. 모든 것이 은막에 싸여 있지. 그 막을 벗겨내고 그 진실을 파헤치지 못하는 한, 자네들이 그들보다 무공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 들에게 질 수 있네.”
상대보다 강한데도 진다? 천무학관에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네들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아마 같은 나이 또래로 보면 적을 찾을 수 없을 걸세. 하지만 이곳에서는 강하다고만 해서 이길 수는 없네. 게다가 여기는 그들 의 앞마당일세. 본거지지. 어떤 암수가 숨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일세.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하게. 항상 보이지 않는 암수가 자네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네.”
“뭐가 그렇게 복잡해?”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그냥 때려눕히고 이기면 되지, 뭘 그렇기 깊이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여긴 말이야, 실력만으로 승부하는 녀석들이 별종 취급 받는 세계니까 말일세. 특히 이 마천각 안은 온갖 괴물들이 판치는 곳일세. 얕봤다간 아무리 류연 자네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게다가 지금은 완전한 상태도 아니지 않나?”
“난 멀쩡해.”
비류연이 강한 어조로 내뱉었다.
“글쎄, 과연 어떨까?”
장홍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지금은 무슨 소리를 해도 먹히지 않으니 두고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말고 본인 걱정부터 하셔. 붕대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으니까.”
장홍 역시 옥유경과 싸운 여파로 상태가 정상이 아닌지라 남 말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괴물이라면 나는 괴물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겠어. 괴물들의 입에서 ‘괴물’이라는 소리를 내뱉게 만들어주지. 기대하라고.”
진심으로 비류연은 어떤 망설임도 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기대하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무모한 친구처럼 행동하지 않길 바라네. 무모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일세. 난 대부분이 현명 하길 바라네.”
그는 서찰을 펼친 다음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째, 천무학관 불순분자들의 마천각에 대한 적대 행동 정황이 포착됨. 둘째, 불순분자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 관이니 반드시 관을 사수할 것. 셋째, 불순분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 거짓이니 적의 농간에 넘어가지 말 것. 넷째, 만일의 사태에는 적을 죽여도 죄를 묻지 않을 것임. 망설이지 말 것. 이상의 임무를 반드시 수행할 것.
그것을 위해 ‘살인 허가’를 내림.
그리고 그 밑에 이 서찰을 보낸 사람의 인(印)이 찍혀 있었다.
“흐음…….?”
받았던 서찰을 접으며 서해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 관 안에 뭐가 들었길래……?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일까? ‘살인 허가’라……. 이런 거창한 경우는 처음이군.”
그렇다는 것은 전력을 다하라는 증거, 절대로 사수하라는 의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라, 라는 뜻이겠지?”
지극히 흑도다운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단순명쾌명료함이 취향에 맞았다.
“진정한 강함이란 생사의 경계에서 나오는 것! 뒷일을 감당해 주겠다는데 사양할 필요가 없지.”
힘의 바닥까지 긁어내는, 전력을 다하는 싸움을 하고 싶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는 시합 따윈 따분할 뿐이었다.
“그놈들, 강할까?”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부하 하나가 즉시 대답했다.
“어떤 놈이든 대장님보다 강한 놈은 없습니다! 대장님은 최강입니다!”
전혀 망설임이 없는 대답. 정말로 굳세게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천총령’이 발해진 걸 보니, 날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두근두근해지는군.”
그렇다면 미리미리 이 기회에 전력을 다할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그걸’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강순천갑(鋼盾天鉀)’을 내와라!”
그가 명령했다.
“그, 그걸 말씀이십니까?”
부하가 깜짝 놀라 반문한다.
강순천갑, 그것은 대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별로 거의 쓸 일이 없던 최강의 갑옷이었던 것이다.
“물론, 창고에 처박혀 있느라 뻑뻑해진 그 녀석에게 오랜만에 피와 살로 기름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군. 크, 크, 크, 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 하하!”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락비오였다. 이런 짜릿한 기회를 제공해 준 ‘윗대가리’가 오늘만큼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타인의 피와 살을 대가로 그는 또 한 단계 강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성장 방식이었다.
* * *
도개교를 지나 본격적으로 서해도로 진입한 효룡은 잔뜩 긴장했다. 당연히 무수히 많은 십번대 대원이 그들을 공격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들어선 서해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왜 아무도 없지?”
아무도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좀 전에 쓰러뜨린 철갑사패의 호전적인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십번대 대원들은 무척이나 거친 성격인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만큼 인내심이 강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앞길이 휑하니 뚫려 있으니 수상쩍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일단 가보자고. 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
당장 싸우지 않는다면 효룡은 물론 비류연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이틈에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시켜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주위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 은 채 효룡과 비류연은 앞으로 걸어갔다.
“설마 일부러 그냥 놔두고 있는 건가?”
비류연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왜 그럴 필요가 있지? 함정이라도 준비하고 있나?”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뭘?”
“우리들의 체력이 회복되는 걸.”
“왜?”
“이런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지. 한바탕 제대로 싸워보고 싶은 거야, 우리들이랑. 아마 이곳 대장은 상당히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인 것 같군.”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긴 흑도라고. 그런 건 지극히 흑도답지 못한 사고방식이라고.”
일부러 체력을 떨어뜨려 가장 약해 보일 때 공격하는 게 흑도의 방식이었다. 반면 비류연이 말한 방식은 오히려 정정당당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글쎄, 이건 흑도니 백도니 하는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개인 취향의 문제라고 보는데…… 아, 도착했군.”
효룡도 시선을 들어 그들의 앞에 솟아 있는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높고 넓은 건물이었다. 정문 위의 현판에는 ‘제십번대 본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득 효룡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혹시 이 안에 모두 모여 있는 거 아닐까?”
특히 건물 안에서 다수에게 포위당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 될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신중을 기해야 할 때였다.
“글쎄, 들어가 보면 알겠지. 가보자고.”
그러면서 효룡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류연은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들어 갔다. 효룡은 신중을 기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한숨을 한번 내쉰 다음 악우의 뒤를 따랐다. 가끔씩 무모해 보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는 게 이 친구의 나쁜 버릇이었다.
“어라?”
효룡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건물 안은 썰렁했다. 다만 정면에 솟은 조금 높은 단 위에 커다란 의자가 놓여 있고, 특이한 모양의 갑옷을 걸친 거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은색으로 번쩍이는 얇고 반들반들한 갑옷은 전신에 걸치고 있었는데, 갑옷의 판들이 하나같이 둥글둥글했다. 마치 수십 개의 원형 방패가 전신을 감싸 고 있는 듯한 굉장히 독특한 모양의 갑옷이었다. 특히 양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라 있어, 저 안에 무슨 비밀 병기라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뒤 따랐다. 그의 옆에 놓여 있는 철갑 투구 역시 무척 특이한 모양이었는데, 전체가 둥글고 눈과 입 부분은 하나로 합쳐져 뚫려 있는데 가로로 철창 같은 강철심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눈과 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막기 위한 장치인 것 같았다.
그가 바로 서해도의 군림자이자 십번대 대장 서해왕 락비오였다.
그 뒤로는 마찬가지로 거구에 근육이 울퉁불퉁한 네 명의 거한이 서 있었다. 상당히 조촐한 환영이었다.
“너는 강하냐?”
서해왕 락비오가 맨 처음 물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신분을 묻기도 전에 강한지부터 묻다니, 어지간히 성질이 급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힘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 다. 그는 아마 자신과 대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대화하려고조차 들지 않을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비류연은 자신이 그와 대화할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친 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나는 강하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락비오가 말했다.
“대답에 망설임이 없군.”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비류연의 자기 확신은 거의 오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자칭 우주홍황은하제일의 초미소년 초절정고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 정도의 자기 확신은 별거 아니었다. 보통 정신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화산규약지회라고는 들어봤겠지?”
“물론.”
“거기 우승자가 나야! 댁보다는 훨씬 강하지.”
비류연이 씨익 웃었다.
“류연, 상대를 자극해서 어쩌려고?”
친구의 도발에 불안감을 느낀 효룡이 화급히 전음을 날렸다. 그러나 서해왕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것참 잘됐군.”
자신보다 강하다는 말에도 락비오는 화내지 않았다.
“……?”
“그렇지 않아도 내가 화산규약지회에 갔어야 됐다는 걸 증명해 주려고 했거든. 사고가 있었다지만 그런 데 가서 우승도 못하고 오다니, 쓸모없는 것들. 잘됐군, 아 주 잘됐어. 너를 쓰러뜨리면 나야말로 화산지회의 우승자에 걸맞은 자격을 가진 자라는 게 증명되겠지.”
“그건 글쎄?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거랑 다를 바가 없군.”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무슨 뜻이야, 댁은 절대 날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지.”
“뭐라고!”
“그렇잖아? 나랑 싸우기도 전에 승리에 대해 논하다니, 성급해도 너무 성급해.”
비류연의 자신만만함을 보자 사내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걸 증명해야지. 나는 입으로 하는 건 안 믿거든. 사람들의 입에는 거짓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 다들 입만 살았지. 혀 하나 가지고 고수가 되려 한단 말이 야.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어. 오직 주먹과 칼붙이로 보여주는 것만 믿지.”
너도 진짜 실력이 있다면 직접 몸으로 그걸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좋아, 얼마든지.”
비류연이 선뜻 대답했다.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물어봐.”
“오늘 이곳에 관 하나가 도착했을 텐데? 혹시 알아?”
“아, 그거? 왔지.”
락비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열어봤어?”
“아니, 열어보지 말래서.”
“열어보지 말랬다는 것은 당신보다 윗사람으로부터 온 명령이라는 뜻이군.”
“궁금한 게 뭐지?”
“그 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난 약한 놈 말은 안 들어. 명령이란 힘있는 자의 특권이거든.”
“여기선 모든 게 힘이군.”
“바로 그거지. 나보다 강하다는 말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했는데 그냥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덩치에 비해서 소심하군.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세고 있었다니 말야. 좋아, 싸우지, 대신 조건이 있어.”
“뭐지?”
“내가 이기면 그 관을 받겠어. 그 관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것과 들어 있었던 것 모두!”
“싫다면?”
이죽거리며 묻는다. 그는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전대미문의 후회란 걸 하게 해주지.”
“후회? 그거 기대되는군. 해본 지 너무 오래돼서 말이야. 어떻게 하는 건지도 잊어버렸거든.”
“걱정 마. 잊은 척하고 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직접 몸으로 떠올리게 해주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명색이 사천왕 중 한 명인 내가 그렇게 쉽게 ‘옙! 여기 있습니다!’라고 내놓을 수는 없잖아? 체면이 있지. 게다가 총대장의 명령도 있고……. 게다가 넌 그 관을 손에 넣지 못할 거야.”
“왜지?”
“왜냐하면 넌 날 이길 수 없으니까.”
락비오가 좀 전에 비류연이 했던 말을 곧바로 돌려주었다.
“싸움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며? 그렇다면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해야지.”
비류연도 그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좋아, 하지만 여기는 내 구역이야. 손님 접대는 주인이 할 일이지.”
락비오가 은색 투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싸움 방식은 그쪽 식대로 하겠다?”
락비오가 씨익 웃었다.
“바로 그거지.”
딱!
락비오가 손가락을 튕기자 좌우에 뚫려 있던 문이 열리며 똑같은 남의 무복 복장을 한 한 무리의 무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들 덩치가 크고 근육질로 이루어 진 것이, 딱 보기에도 십번대의 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양쪽 벽에 각각 한 줄로 쭉 도열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양쪽 벽을 완전히 막아서자 그 기세가 사뭇 삼엄했다.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모두 여기 있었군. 다들 낯이라도 가리나?”
철갑사패를 쓰러뜨리고 정문을 통과한 이후 비류연과 효룡은 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본관에 도착했을 때 왜 다섯밖에 없는 걸까, 왜 아무런 저항도 없을까 의아해했는데 모두 이 건물 뒤쪽에 몰려 있었던 모양이다.
“다수로 소수를 핍박하는 게 이곳의 방식인가? 대가리 수가 많다고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오합지졸 하룻강아지가 아무리 많아도 한 마리 범은 못 이기는 법이니까.”
이들이 모두 함께 덮친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아, 걱정 마. 얘들은 그냥 구경꾼일 뿐이니까. 다수가 한꺼번에 소수를 치다니, 그런 치졸한 짓을 우리 십번대는 경멸해. 우린 힘의 정의를 믿는 만큼 항상 일대일 을 선호하지. 여럿이서 한 놈을 패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남자라면 마주 보고 주먹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강함과 강함이 부딪치는 그 순간이야말로 사내가 삶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지.”
그것 외에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차피 말해봤자 먹히지도 않을 터였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정의를 맹종하게 된 인간은 눈과 귀가 진흙으로 꽉 막히는 법이다.
“호오, 그건 혼자 나서겠다는 뜻?”
“물론! 하지만 그쪽도 혼자 나서야 해.”
“그건 걱정 마. 이쪽도 둘이서 한 놈을 팰 만큼 약하진 않으니까. 그쪽의 접대 방식에 따르지.”
“화끈해서 좋군! 사내라면 무릇 그래야지! 으하하하하하하!”
락비오가 고개를 치켜들며 앙소를 터뜨렸다.
“이쪽에선 물론 이 몸 혼자 나간다. 그쪽에선 누가 먼저 하겠나?”
“호오, 혼자서 우리 둘을 상대하겠다고? 상당히 무모하군. 뭐라고 놀리지 않을 테니까 한 명 더 구해오는 게 어때? 쪽수가 많아서 이겼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고.”
“필요없다, 어차피 너흰 이기지 못할 테니까.”
대소를 터뜨리는 락비오의 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저 덩치는 뭘 믿고 저렇게 오만한 걸까? 뭔가 숨겨놓은 꼼수라도 있단 말인가??
숨겨진 비장의 한 수를 조심하라는 장홍은 말이 문득 비류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뭘 숨겨놨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직접 부딪쳐 보지 않는 이 상 그것을 알기란 불가능했다. 다만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리는 것을 피해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대비하고 있다 해서 막을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것, 그것 이 바로 숨겨진 한 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딪쳐 봐야지, 여기서 계속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으니까.’
비류연은 자신이 나가겠다고 막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있었다.
“내가 먼저 하지.”
비류연을 제치고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효룡이었다.
“괜찮겠어, 룡룡? 아까는 떠넘긴다고 싫어했잖아?”
비류연이 물었다.
“그건 잔챙이였으니까 그렇지. 그런 건 아무리 쓰러뜨려 봤자 티도 안 나잖아? 자랑거리도 안 되고.” “호오? 계산이 많이 빨라졌는걸?”
“자네랑 어울린 지도 꽤 됐으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지. 다 악우를 잘못 사귄 탓이니 누굴 탓하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해줘. 소년이 어른이 되는 게 어디 내 책임인가. 누구나 언제가는 어른이 되는 법이라고.”
“좀 더 오랫동안 깨끗하게 소년으로 살 수도 있었다고, 아무런 계산도 없이. 세상의 더러움을 모른 채 순진무구한 채로.”
“그래서 맛 좋은 부분만 낼름 가져가시겠다?”
“그런 거지.”
“믿어도 되는 거겠지?”
“맡겨두라고.”
마천십삼대 제십번대의 본관인 철신관 내부는 무척 넓고 높았다. 그리고 바닥은 단단한 청석으로 깔려 있었고, 특이하게도 좌우로 여러 개의 칸이 나누어져 있었 다. 비나 눈이 올때는 이곳이 연무장의 기능을 담당하는 듯 바닥 여기저기에 수련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다.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만으로도 그들이 해온 수련의 정도와 그들의 특색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효룡과 락비오는 수십 명의 대원들이 도열한 철신관 한가운데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락비오였다. 서로에게 인사도 없이 락비오는 손을 휘둘렀 다. 그러자 효룡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과 함께 두 개의 선이 효룡과 락비오의 등 뒤에 그어졌다.
“규칙은 간단해. 운균(돌림판)을 돌려서 나온 숫자 만큼 서로를 때린다.”
“그리고 맞고 선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 지는 거겠군.”
“맞아, 그게 첫째 판이지.”
“둘째 판의 규칙은?”
“아, 그건 첫째 판에서 이기면 이야기해 주지.”
효룡의 눈썹이 살짝 치켜떠졌다.
“내가 첫째 판도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크크크크, 알고 있으니 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락비오의 말과 행동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지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람을 깔보고 있구나. 좋다. 이 어르신께서 오늘 너에게 뼈아픈 패배를 가르쳐 주마.’
비록 자신의 장기가 쌍도이긴 해도, 장법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무겁기만 한 갑옷이 네놈의 몸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자 그가 걸친 갑옷은 전신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양쪽 견갑이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있었고, 흉갑 한가운데, 붉은 글씨로 ‘+(십)’이 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이자는 자신의 전신을 두르고 있는 저 기괴한 모양의 하얀 갑옷을 믿고 있는 듯했다.
“자신없으면 기권해도 돼. 다만 그렇게 됐을 때는 얌전히 돌아가야 겠지?”
“하겠다.”
효룡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물러나지 못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 그럼 먼저 때리게.”
“먼저 때리라고? 진심인가?”
“물론 그런 쪼잔한 걸로 거짓말을 하는 건 사나이가 할 짓이 아니지.”
락비오가 순순히 선봉을 양보했다. 너무 솔깃한 제안에 효룡은 오히려 의심스러워졌다.
“이 녀석이 뭘 믿고 이렇게 대범한 거지? 뭔가 숨겨둔 한 수라도 있나?”
무엇보다 이자는 그가 알던 십번대 대장이 아니었다. 그가 이곳을 떠나 있는 동안 십번대 대장은 뒤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가 알던 십번대도 아니었다. 몇 년 사이에 그는 그가 알던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어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꼬리를 말 생각은 없었다. 걸어온 도전은 받아주는 게 예의 였다.
“좋아. 선봉을 양보한다면 마다하지 않겠네. 단, 후회하지 말게.”
“진짜 사나이는 후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후회시켜 주고 싶은 게 또 사람의 심리였다.
“그럼 먼저 돌리지.”
효룡은 운균을 잡은 다음, 팽그르르르 돌렸다.
나온 숫자는……
이(二).
“두 대로군.”
그 말에 락비오가 웃으며 대꾸했다.
“두 번째를 때릴 수 있다면 말이지.”
이놈,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하지만 여기서는 상대의 흐름에 넘어가서는 곤란했다. 자신의 흐름을 찾아야 했다. 아무리 강철의 갑옷을 걸치고 있다 해도 효 룡은 그것을 꿰뚫을 자신이 있었다.
효룡은 조용히 운기를 통해 내공을 운용했다. 그리고는 진기를 끌어올려 주먹에 집중했다. 어차피 규칙상 상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은 보법을 이 용해 공격을 흘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문자 그대로 무식하게 공격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간단한 승리, 그냥 거저 먹어도 되는 걸까??
묘한 죄책감까지 드는 효룡이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했겠다,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 승리, 내가 가져가겠다!”
패왕권(覇王拳)
일격붕(一擊崩)
효룡은 주먹에 진기를 집중한 채,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주먹을 내질렀다.
쿵!
진각이 바닥을 때리며, 그 힘이 효룡의 허리를 지나 어깨를 타고 팔을 달려 주먹에 도달했다. 그 순간 공기가 찢어지며 기다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 같은 주먹이 락비오의 몸에 그대로 격중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효룡의 왼쪽 무릎은 바닥으로부터 겨우 한 뼘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마터면 한쪽 무릎을 꿇을 뻔한 것이다. 게다가 기혈이 뒤엉켜 몸 안이 엉망이었다. 아무 래도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등 뒤에 그어져 있던 금에서 이 장이나 뒤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가 밀려난 자국이 바 닥에 거멓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커먼 자국 한가운데 갑옷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하얀 철판 하나가 뱅그르르르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됐지??
홍소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하하하하하! 무릎을 꿇지 않은 건 칭찬해 주지. 그렇게라도 버틴 건 네가 처음이다.”
호쾌하게 외치는 소리에 효룡은 재빨리 고개를 들어 락비오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 이럴 수가!”
놀랍게도 락비오는 좀 전에 섰던 그 자리에서 조금 밀려난 듯했으나, 그의 발뒤꿈치는 여전히 금을 넘지 않고 있었다. 움직인 거리도 매우 미미했다. “우하하하하하, 역시 내 승리군.”
락비오가 입가에 승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오만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말도 안 돼! 단 일격에 승부가 나다니…….”
그것도 자신이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공격을 했는데 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나쁜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비류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룡룡, 정신 차려! 어떻게 된 거야?”
“모, 모르겠어. 분명히 내가 때렸는데…….”
효룡은 어딘가 얼이 나간 것 같았다.
“물론 네가 먼저 때렸지. 내가 궁금한 건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거야. 난 콰쾅! 하는 폭발음과 연기 때문에 제대로 못 봤어. 연기가 걷히고 보니 넌 뒤 로 밀려나 있었고.”
효룡은 자신의 주먹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장이 진탕된 것에 비해 주먹은 예상외로 멀쩡해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먹을 밀어낸 그 엄청난 힘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주먹으로 뇌탄을 때린 듯한 충격이었다. 그 순간 주먹이 바스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아마 단련을 게을리 했다면, 이미 그 의 주먹은 가루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우하하하하하, 그 정도 주먹으로 나의 비전 무공인 ‘금강반탄강기’를 이길 순 없다!”
“금강반탄강기?”
“그렇다. 그게 바로 내가 익히고 있는 기공이다. 어떠한 공격도 튕겨내는 무적의 신공이지. 우하하하, 어떠냐? 이것이야말로 사나이의 무공이라 생각되지 않나! 우 하하하하하하!”
“황당하군. 그렇게 자기의 비전 무공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도 되나?”
비전이라는 건 비밀리에 전수되기에 비전인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무공을 적에게 아무렇게나 발설하다니, 굉장히 괴상한 놈이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사나이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강하다!”
정말 상상 이상으로 단순무식한 놈이었다.
“승복하지 못하는 얼굴이군? 다시 한 번 해볼 테냐?”
“아니, 승부는 승부, 진 건 진 거다. 이 승부, 나의 패배다.”
분하지만 승패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효룡이 벌떡 일어난 다음 돌아서서 비류연을 향해 걸어갔다.
“미안하다, 친구. 자넬 볼 면목이 없네.”
“괜찮아, 다음은 맡기라고.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비류연은 화를 내거나 책망하기는커녕 웃으면서 효룡을 맞이했다.
“조심해, 뭔가를 숨기고 있어.”
“알아. 아직 뭔지는 못 알아냈지만.”
아마도 이것이 바로 장홍이 말했던 ‘흑수’라는 것일 터였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비류연 역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바닥에 그어져 있는 금을 넘어 락비오와 마주 선 비류연이 락비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수 교대다.”
“이건 당신 건가?”
비류연이 걸어오다가 주운 동그란 방패 모양의 철판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 일부러 가져다주다니 고맙군.”
락비오가 씨익 웃으며 철판을 받아 들었다.
“자, 시작할까?”
“잠깐! 잠시만 기다려라.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순간 비류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락비오가 신호를 보내자 십번대 대원 중 한 명이 조그만 나무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그는 그 안에서 하얀 반죽을 꺼내더니 갑옷 파편 뒤에 붙이더니 흉갑 부위에 다시 끼워 넣었다. 좀 전에 효룡의 주먹이 일격을 가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게 뭐지?”
“아, 별거 아냐. 그냥 단순한 접착제다.”
“철판갑옷을 접착제로 붙인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럼 오늘 보게 되었군. 이게 바로 사나이의 방식이다! 우하하하하하!”
“여기선 사나이가 바보랑 같은 말인 모양이군.”
비류연이 이죽거리자 통쾌하게 웃던 락비오의 웃음이 뚝 멎었다.
“사나이를 모욕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입에다가 사나이를 달고 산다고 해서 사나이가 되는 건 아니지.”
입가에 맺힌 비웃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위압 한 번 했다고 순순히 물러날 비류연이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 사나이 씨? 용기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선방을 넘길 수 있겠나?”
“물론! 용기는 사나이의 필수품. 사나이를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단순하군! ‘
락비오가 계산대로의 반응을 보이자 비류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림판을 힘껏 돌렸다.
팽그르르르르르!
나온 숫자는 ‘이(二)’였다.
“아깝군. 겨우 둘밖에 안 된다니 말이야.”
“충분해.”
어차피 상대가 무슨 수를 썼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가 아니라 십이 나와도 소용이 없었다.
“너는 과연 이격째를 칠 수 있을까?”
락비오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방어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비류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 말대로 되길 바라지.”
락비오는 하하, 호탕하게 웃으면서 허리를 살짝 숙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가올 공격에 대비하는 그만의 수비 자세였다. 그 외에는 딱히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비류연도 나름 신중했다. 효룡이 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무공의 고하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분명히 벌어졌고, 그는 이 유희에서 이기기 위해서 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자, 그럼 우선 한 대!”
비류연이 외치며 주먹을 뻗었다.
즈즈즈즈즈즈!
잔뜩 몸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 있던 락비오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느리지?”
비류연이 뻗은 주먹은 마치 굼벵이처럼 느렸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하리만치 느린 주먹을 뻗는 비류연의 태도 는 한없이 진지했다. 이 일격에 모든 것을 담겠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듯했다.
“혹시 저 일격에 엄청난 거력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절정에 이른 붕권(崩拳)은 느리면 느릴수록 그 위력이 강해진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약간 긴장이 된 그는 자신의 비전 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좋아, 이 상태라면 어떤 공격이라도 견딜 수 있지! 자, 와라! 너의 힘을 나에게 증명해 봐라!’
그리고 마침내 비류연의 한없이 느린 주먹이 락비오의 몸에 닿았다.
툭!
약간 맥빠지는 소리와 함께 비류연의 주먹이 락비오의 몸에 닿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락비오의 몸에도 어떤 충격도 전해지지 않았다. 미심쩍어진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끝났냐?”
“엉, 끝났어.”
너무나 망설임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락비오는 갑자기 무척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뭐, 뭐냐? 이 솜방망이 같은 주먹은? 날 놀리는 거냐?”
“아니, 안 놀렸는데? 왜, 좀 긴장했어?”
“누, 누가 긴장 따윌 했다는 거냐!”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는 걸 보니 긴장했었나 보군. 뭐,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 없어. 인간이란 누구나 의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마련이니까.”
“긴장 안 했다니까!”
락비오가 소리쳤다. 왠지 자신이 바보 취급당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저 앞머리가 지나치게 긴 놈은 왠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작은 충격에는 폭발하지 않는 모양이군.”
비류연이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호오, 알아챈 건가?”
“반쯤.”
“눈썰미가 좋군. 하지만 나머지 반은 어쩌지?”
“한 대 더 때려보면 알겠지.”
태연하게 대답한다.
“이번에는 과연 나의 최강의 호체반탄기공인 ‘금강반탄강기’를 깨뜨릴 수 있을까?”
자신의 금강반탄강기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지 그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그러자 비류연이 물었다. “그거 알아? 금강석을 연마할 때 부드러운 진흙을 쓴다는 걸? 아무리 단단한 금강석도 부드러운 진흙에는 당해내지 못하지.”
“뭐든 영원한 건 없는 법이지.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는 법이거든.”
그 순간 비류연의 주먹이 섬광처럼 빠르게 뻗어나갔다.
펑!
또다시 좀 전과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뒤로 튕겨 나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효룡은 깜짝 놀랐다. 혹시나 비류연이 자신처럼 금 뒤로 밀 려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땅에 떨어지더니 탱! 소리를 내며 팽그르르르르 돌았다. 락비오의 흉갑 부분에 달려 있던 방패가 분명했다. 효룡은 다시 연기가 걷혀가고 있는 대결 장소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비류연은 왼쪽으로 허리를 비스듬히 꺾은 채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의 발 역시 금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주먹은 어느새 접혀 있었다.
“끊어 친 건가?”
락비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제대로 이격 째를 때리고도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슷해. 하지만 역시 이 정도로는 쓰러뜨릴 수 없는 모양이네.”
비류연은 자신이 튕겨 나가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락비오에게 이긴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발을 금 밖으로 밀어내기에는 파괴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디어 알았어.”
“뭘 알았다는 거냐?”
“방금 전 효룡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았다는 거지.”
“호오, 정말이냐?”
자신의 숨겨진 비밀이 탄로날지도 모르는데도 그는 상당히 태연했다.
“물론, 난 이런 걸로 거짓말하진 않아.”
“하지만 아쉽게 됐군. 비밀까지 풀었는데 말야.”
“왜?”
“너에게 다음 기회는 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 차례거든.”
락비오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운균을 돌렸다.
팽그르르르!
전장을 달리는 전차의 바퀴처럼 힘차게 돌아가던 운균이 멈춰 섰다.
나온 숫자는 ‘오(五)’.
그 숫자를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며 락비오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넌 운이 없는 것 같군.”
“난 나름대로 행운의 사나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편인데?”
그렇지 않다면 운수대통 격타금이라는 해괴한 별명으로 불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운도 오늘로 끝이군. 왜냐하면 난 방어에 있어서만 최강이 아니라 공격에 있어서도 최고거든. 지금까지 나의 철권을 정면으로 맞아 세 대 이상 버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비류연도 지지 않고 히죽 웃었다.
“그럼 오늘 한 사람 생기겠군. 어떤 것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
절대로 말로는 지는 법이 없는 비류연이었다. 비류연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나의 운을 시험해 본다고? 재미있군. 그 도전, 받아주지! 자,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