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6권 5화 – 미폭국, 그 영원한 미의 세계를 위해
미폭국, 그 영원한 미의 세계를 위해
-붉은 꽃, 피다
“분하지만 격이 달라!”
동해왕 감자군과 모용휘의 싸움을 지켜보며 공손절휘는 분하고 분하고 분하고 또 분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당했는데, 모용휘는 십수 초가 교환된 지금까지도 쉽게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회를 봐서 반격까지 가했다.
좀 전에 보인 유성우와도 같은 검기는 공손절휘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과연 자신이 자군의 위치에 있었다면 방금 전 그 검기를 막아낼 수 있었을 까? 그 물음에 공손절휘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저 느끼한 놈은 그 검기를 막아냈다. 그리고 허점을 찔렸음에도 그대로 패배하지 않고 몸을 피 해냈다.
“…이것의 격의 차란 말인가!’
공손절휘는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모용휘의 등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 뒷모습이 더욱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난 언제나 돼야 저 등을 쫓아갈 수 있는 거지?”
우물가에서 진검을 들고도 모용휘의 손에 들린 먼지털이개에 패배한 이후로 그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난 듯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아, 안 돼! 안 돼! 자꾸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기혐오에 자꾸만 빠져들 뿐이었다. 가문을 나설 때, 모용가를 쓰러뜨리고 공손세가의 위상을 전 무림에 알리겠다는 자신감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공손절휘는 자신의 손에 들린 가문의 보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그렇게 결심했건만.
분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이 무리에서 떨어지면 끝장이라고. 모용휘가 속해 있는 이 괴상한 구출대는 어딘가 그가 서 있던 세계와는 달랐다.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다른 대문파의 제자나 세가의 애송이들이랑은 달랐다. 이들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 무리에서 떨어져 버리면 더 이상 저 등을 쫓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을 공손절휘는 싫어도 깨닫게 되고 말았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이 세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설령 이곳에 있다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모용휘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이 순간 공손절휘는 처음으로 가문과 자만심을 모두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기가 이상으로 여기던 경지가 저곳에 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 위치가 그 가 출발해야 할 출발점이었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 느끼한 놈부터 쓰러뜨리는 게 선결 과제였다.
의욕이 마구마구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음 깊숙한 곳까지 뜨거워진 공손절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외쳤다.
“모용 형, 그 감자 녀석을 으깨 버리시오!”
게다가 저 감자 녀석은 그가 몰래 마음에 품고 있던 연비 소저에게 느닷없이 청혼을 한 참으로 황당한 놈이었다. 그런 놈을 으깨지 않고 대체 누굴 으깬단 말인가.
입만 열었다 하면 자신의 미를 훼손시키는 공손절휘의 버릇없고 괘씸한 언사에 자군의 인상이 더욱 심하게 구겨졌다. 일그러진 그의 입가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흐흐흐. 보여주지, 미의 진정한 힘을.”
양염화화려려신공(陽炎華華麗麗神功)
양염분영신(陽炎分影麗身)
순간 자군의 신형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다섯으로 나뉘어졌다. 놀라는 모용휘를 향해 자군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떠냐, 이것이야말로 ‘미의 증폭(增幅)’이라는 것이다! 어때, 이런 것 처음 보지 않나?”
그러나 모용휘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냥 늘어난 것뿐 아니오? 분신이라면 그렇게 신기하지는 않소.”
모용휘의 주위에는 워낙 괴물 같은 인간이 많아서 분신 정도로는 그리 놀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특히 비류연이 쓰는 분신술은 굉장히 특이해 모용휘도 아직 그 요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군은 늘어난 분신도 어딘지 선명하지 못하고 일렁이고 있는 듯해서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 감히 이 압도적인 미를 무시하다니! 역시 가만둘 수 없겠구나. 나의 미를 너의 몸에 직접 새겨주마!”
미적으로든 위력적으로든 자신있는 기술이 무시당하자 분노로 얼굴이 붉게 변한 자군이 노도 같은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락!
다섯으로 나뉘어진 인영으로부터 붉은 채찍이 사나운 뱀처럼 사방에서 모용휘를 향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검으로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특수 한 재료들을 꼬아 만든 채찍은 날카로운 명검으로도 쉽게 자를 수 없을 만큼 질겼다.
“하하하하하! 어떠냐, 나의 아름다운 채찍 맛이!”
팡팡팡팡팡!
모용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채찍을 휘두르자,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진다. 동시에 채찍이 발생시키는 바람에 의해 꽃잎이 사납게 흩날렸다.
다섯으로 나뉘어진 신형으로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니 모용휘는 정신이 없었다. 분신은 신기하지 않지만, 그 근간이 되는 자군의 신법에는 무언가 비밀이 있었 다. 그 비밀이 그의 검을 자군에게 닿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지금은 무작정 큰 기술을 써봤자 진기만 낭비할 뿐이야.’
아무리 위력적인 초식이라 해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군의 신형을 베면 벨수록 주위에 휘몰아치는 꽃잎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날 뿐이었다. 그 수가 너무 늘어나다 보니, 주위에 소용돌이치는 꽃잎 바람의 장벽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바람 속에서 자군의 신형은 완전히 감추어졌다.
“이건 환각인가…….?
사방을 둘러봐도 난폭한 꽃잎은 소용돌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가 차단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어느새 그는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모용휘가 위험을 감지한 그 순간,
다섯 방향에서 동시에 붉은 채찍이 날아왔다. 또한 그 채찍의 끝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 무엇이 허초고 무엇이 실초인지 분간해 내기 무척 난해했다. “은하밀밀(銀河密密)!”
모용휘는 서둘러 검막을 펼쳐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데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던 나머지 약간 대응이 늦 어졌다. 그 틈을 타고 붉은 채찍이 날아들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사나운 뱀처럼 달려든 붉은 채찍 서너 대가 모용휘의 몸을 거침없이 물어뜯었다.
“크억!”
살을 파고드는 지독한 통증과 함께 모용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푸슈욱
채찍을 맞은 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윽. 이, 이럴 수가!”
비록 공격을 허용하긴 했지만, 검으로 쳐내 위력을 감소시켰던 터라 이 정도의 출혈이 날 일은 없었다.
‘좀 전에 느꼈던 찌릿한 통증과 관계가 있는 건가…….?
그동안의 전투 경험에 의하면 좀 전의 통증은 채찍에 당했을 때의 공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통증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날카로운 못이 살을 꿰뚫을 때의 통증과 어쩐지 닮아 있었다.
“설마…….”
자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홍장미의 가시는 다른 어떤 가시보다 뾰족하고 날카롭지.”
그러나 지금 자군의 손에 들린 붉은 채찍에는 아무런 가시도 박혀 있지 않았다. 모용휘는 곧 그 비밀을 간파해 냈다. ‘상대와 접촉하는 순간 가시를 뿜어내는 구조로 되어 있는 모양이군.’
그래서는 장미가 아니라 마치 벌 같지 않은가. 게다가 그 가시는 아무래도 이상 출혈을 가져오는 모양이었다.
“붉은 꽃이 이쁘게 피었군.”
자군이 휘파람을 가볍게 분 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체내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물든 모용휘의 백의는 마치 붉은 꽃 세 송이가 핀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