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12화 – 격염(炎)! 화룡난류(火龍亂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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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12화 – 격염(炎)! 화룡난류(火龍亂流)

격염(炎)! 화룡난류(火龍亂流)

-인증에 목숨을 걸어라!

“모두들 준비해 둬.”

비류연이 모두를 향해 동시에 전음을 보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내는 것은 상당히 고난도의 전음술이었다. 게다가 삼대낭랑 정도의 초고 수들 앞인지라 전음을 감청당하지 않으려면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뭘 준비하란 말인가?”

“언제든지 튈 수 있게 준비해 둬야죠.”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나?”

모용휘가 심각하게 물었다.

“글쎄, 아마 절대로 우리를 놔주려고 하진 않겠지. 방금도 두 사람이 뭐라 뭐라 소곤거렸잖아?”

“어, 언제 그랬습니까, 대사형?”

남궁상은 자신만 놓친 건가 해서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장홍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게, 그건 나도 못 들었네만?”

“그야 우리처럼 전음으로 얘기했으니 못 들었지. 너무 멀어서 훔쳐듣지도 못했어.”

“그나저나 대체 시험은 왜 본다고 했나, 이 친구야? 괜히 힘만 빠질 일을.”

“그야 우리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시간이니까 그렇죠. 혹시 또 알아요? 살아날 구멍이 생길지! 절대 그냥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게 속 편할 거예 요. 그 틈에 언제든지 튈 수 있게 준비하자는 거죠.”

하지만 현재 나백천의 부상은 한층 더 심해진 상태였다. 최절정고수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된 이 정도 규모의 천라지망을, 그것도 부상자를 데리고 빠져나간다는 것 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틈을 만들어보자고.”

“만일 못 만들면?”

“그럼 다 죽는 거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네요.”

내부 정리를 마친 비류연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더냐?”

“제가 신풍협인 걸 어떻게 증명하죠?”

“그런 것까지 내가 생각해 줘야 하느냐?”

엄청 귀찮다는 투로 단혜가 되물었다. 그러자 사란이 뭔가 생각해 둔 바가 있었던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신풍협은 천상에서 내려온 풍신처럼 바람을 다스리고 화룡을 부린다더구나.”

“우와, 그거 굉장한데요!”

비류연이 진짜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네 얘기니라!”

비류연을 힐끗 노려보며 단혜가 호통쳤다.

“아참, 그렇지!”

비류연이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단혜는 점점 더 의심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신풍협이란 자는 바람을 수족처럼 부리기에 화룡을 다스리는 것이고, 그 능력으로 화신지회가 열렸던 홍매곡을 모조리 불태우기 위해 타오르던 ‘화룡멸겁 진’의 초열 불길을 다스렸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죠. 불조심하고 다니지들, 좀. 그래서요?”

담담하게 이어지는 사란의 말에 비류연은 순순히 수긍했다. 원래 남들이 그에게 당신이 했소?”라고 묻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지, 누가 물으면 그다지 정체 를 숨기고 자시고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즉, 네가 정말로 신풍협 본인이라면 바람으로 화룡을 다스릴 수 있지 않겠느냐?”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아무래도 무척이나 어려운 난제가 나올 것 같았다.

“좋다! 그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녀 앞에서 보여주거라! 그럼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단혜의 시원시원한 말에 비류연은 주위를 둘러본 후 말했다.

“응? 여긴 그런 거센 불길이 없는데요? 더구나 화룡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잖아요. 설마 사방에 불이라도 직접 지르시려는 건 아니시죠? 일부러 그러는 건 자연 파 괴라고요, 아주 나쁜 짓이죠!”

어차피 단혜가 화공을 쓴다는 것은 비류연도 물론 잘 알고 있던 터였다. 다만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볼까 하여 일부러 ‘자연 파괴’라던가 ‘나쁜 짓’이라는 데에 힘 을 주어가며 말했으나, 단혜는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나한테 맡기거라. 아무 문제 없다, 나 단혜가 그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 줄 테니.”

단혜가 호언장담하더니 품에서 특이한 쇠공을 꺼내어 비류연 일행 앞으로 냅다 던졌다. 곧바로 공격하는 것인 줄 알고 다섯 사람은 깜짝 놀랐지만, 그 철구는 그들 의 코앞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더니 땅에 퍽, 하고 박혔다.

콰콰콰콰콰!

“저걸 보게!”

장홍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바닥에 떨어진 철구를 가리켰다. 그 철구는 바닥에 박힌 채 정지한 게 아니라, 맹렬히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이윽고 회전이 극 에 이르렀는지 철구가 슬슬 속도를 늦추었다.

철구가 멈췄을 때는 비류연 일행의 둘레에 커다란 원형의 고랑이 생겼다.

단혜가 신호를 보내자 흑천맹의 수하들이 달려나가더니 주위에 생긴 고랑에 콸콸콸, 막대한 양의 기름이 투입되었다. 그녀가 등에 멘 화룡유박에 들어 있는 특수 기름이 아니라, 만일을 대비해 흑천맹의 수하들에게 들고 다니게 하는 기름이었다.

곧 비류연 일행의 주위로 기름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강을 바라보고 선 홍련선자 단혜가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준비됐겠지?”

화르르르르륵!

삼매진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단혜가 피워 올렸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불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비웃을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기라도 한 것은 비류연뿐이었다. “아하하하하, 장난이시죠?”

“왜? 이 정도면 주변엔 피해도 안 줄 것이고, 네가 신풍협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느냐?”

“에이, 잘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좋은 인증 방법이 많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원래 뭔가를 생각하는 건 귀찮아서 내 성미에 안 맞느니라! 자, 그럼 재미난 불꽃놀이를 기대해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단혜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둥글게 이어진 기름의 강 위로 떨어졌다.

포르르륵.

작은 불꽃과 졸졸졸 흐르던 기름의 입맞춤은 그 어떤 입맞춤보다도 더 뜨거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화르르르.

르르르륵!

거센 불꽃의 용이 홍련의 갈기를 휘날리며 대지를 내달렸다.

어느새 비류연과 그 일행들은 거대한 불꽃의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불꽃의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열기가 비류연들을 압박했다. 그냥 서 있기만 하는데도 피부가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엿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 다. 심지어 부상이 심해진 나백천은 진작부터 몸 가누기도 힘들어졌는지 말도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더니, 화염의 기운까지 접하자 그 자리에 스르륵 쓰러지고 말았 다. 상태가 상태인지라 혼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모용휘와 장홍이 나백천을 조심스레 뉘었을 때, 무시무시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단혜의 기술은 단순히 불의 벽을 만드는 게 다가 아니었다.

“히익! 이, 이게 아직 시작한 게 아니라고요?”

오늘 날짜로 자신은 통구이가 될 운명이 확정됐다는 생각에 좌절하던 남궁상이 새삼 기겁하며 외쳤다.

“그쪽엔 신풍협도 있다면서 뭘 그리 당황하고 그러느냐? 허둥거리지 말거라. 진짜는 지금부터니라!”

단혜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돌아라[回]!”

그러자 비류연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불꽃의 벽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대체…….”

단혜의 명령에 복종하기라도 하듯 회전하기 시작한 불꽃의 벽을 보며 모용휘가 침음성을 삼켰다.

“이거 어쩐지 감이 좋지 않은데…….”

장홍 역시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났다.

“대, 대사형?! 뭔가 이상합니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으니 모두들 조심해. 아차 하는 순간에 통구이행이니까!”

비류연의 시선이 이 사태의 장본인인 단혜를 향했다.

그때, 그녀가 활짝 편 손바닥을 서서히 오므리며 조용히 고했다.

“옥죄어라! 염옥(炎獄)!”

염궁 비전(秘傳)

화령신공(火靈神功)

비오의

염옥편

염벽(壁) 옥쇄(玉碎)

불꽃을 관장하는 선자의 명령을 받아 진홍색 불꽃의 벽이 마치 그물이 닫히듯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다.

“자, 네가 소문으로 듣던 신풍협이라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아니라면 여기서 타 죽는 수밖에 없겠지.”

단혜가 불꽃의 감옥을 조이며 말했다. 살아나면 신풍협, 죽으면 거짓말이었음’이라는 간단한 공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참, 이거 너무 증명 방법이 살벌한 거 아니에요?”

설마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불안하거나 떨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비류연은 웃고 있었다.

“이 친구야, 지금이 그런 걸 따질 때인가! 웃고 있을 시간에 빨리 뭐라도 해보게! 사이좋게 통구이가 되기 전에!”

장홍이 버럭 소리쳤다. 남궁상이나 모용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백천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화르르르르륵.

불꽃의 벽은 그 틈에도 점점 더 그들을 조여오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급박한 순간에 비류연은 시큰둥하게 투덜거렸다.

“아, 덥네.”

손목을 팔락거리며 손부채질까지 한다. 그 태평함에 주위의 사람들은 속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대사형, 저는 더운 정도가 아니라 뜨겁습니다!”

“우리보고 준비하라더니, 내 생각엔 자네만 빼고 다 준비된 것 같네!”

남궁상과 장홍이 절박하게, 혹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다들 이제나저제나 비류연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그 장본인은 그냥 이대로 생화형(生火刑)을 당 하고 싶은지 느릿느릿, 느긋느긋 태평하기 짝이 없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깐 기다려 봐요, 사람이 보채기는.”

게다가 자기 잘못도 전혀 모른다. 알 생각도 없는 듯했다.

“기다리긴 뭘 기다리나, 이 친구야! 숯검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쯧쯧,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급하기는.”

비류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물론 장홍 역시 비류연에게 기댈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장홍의 경험상 비류연에게는 되도록이면 기대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독자 적으로도 탈출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부상이 깊어진 나백천과 동료들을 데리고 모두가 함께 빠져나갈 방법은 안타깝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탈출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은 장홍만이 아닌 듯했다.

“자, 진령이 보러 갈 준비는 다 됐냐, 궁상아? 휘, 자네도 은 소저를 찾으러 갈 준비는 됐겠지?”

“그 말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사형.”

남궁상이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다. 대사형이 저런 식으로 여유롭게 묻는다는 것은 저 시커먼 속에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가, 갑자기 은 소저는 왜 나오나? 아무튼 나는 준비됐네.”

모용휘도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는 아직 은설란이 신마팔선자와 합류한 이후에 현재 갈효혜의 명으로 갈중하를 마중하러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슬슬 공기도 데워진 것 같고… 바람의 방향도 좋고…… 자! 가볼까?”

비류연이 오른손을 번쩍 위로 치켜들자, 그의 무복이 세차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비뢰도(飛雷刀) 비전(秘傳)오의(義)

풍신(風神)

용권승천의 장(章)

화룡난류(火龍亂流)

비류연의 몸을 축으로 삼아 나선의 원을 그리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불꽃의 벽 역시 천천히 회전을 개시했다.

“…….”

홍련의 불꽃 벽이 천천히 회전하는 것을 보고 단혜는 깜짝 놀랐다. 조여들라는 자신의 제어를 무시하고 회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저 아이가 진짜??

불꽃 벽의 회전은 점점 더 그 속도를 더해가더니 순식간에 정점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불꽃의 벽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조여들던 불꽃의 벽은 원심력에 의해 밖으로 벌어져 나갔다. 숨 막히듯 조이던 열기가 멀어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제대로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씨―익!

그 순간, 비류연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모두들, 시작한다?”

“이쪽은 준비됐네!”

장홍이 기절한 나백천을 둘러업으며 전음을 보냈다.

“시작하십쇼!”

“하게.”

나백천을 업은 장홍의 좌우로 남궁상과 모용휘가 호위하듯 다가섰다. 남궁상의 검이 강기에 휩싸이며 뇌전 같은 백광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모용휘가 뽑아 든 검 에서도 별빛 같은 강기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우우웅, 하고 울부짖는 남궁상의 검은 언제라도 하얀 뇌전으로 화해 적을 꿰뚫을 수 있다고 외치는 듯했으며, 모용 휘의 검은 한 번만 휘둘러도 밤하늘에 박힌 별빛과도 같은 강기를 사방에 흩뿌릴 태세였다.

“튀라고 하면 다들 곧바로 튀어! 난 안 도와도 되니까. 대신 장인어른은 맡긴다.”

“자네 정말 혼자서 괜찮겠나?”

“나보고 인증하라고 했으니 내가 직접 인증해야지.”

화룡몽상(龍夢想) 각성(覺醒)!

비류연은 비뢰도가 연결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검결지처럼 잡은 다음,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

그러자 광포한 불꽃의 벽 한쪽이 놀랍게도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불꽃의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르게 보면 고개를 치켜든 한 마리의 화룡처럼 보

이기도 했다.

엄청난 열기를 지니고, 엄청난 불꽃을 머금고, 그 안에 불꽃과 바람의 힘이 동시에 깃들어 있는 지극히 사납기 짝이 없는 화룡이었다. 아까는 주변을 태우면 자연 파괴라더니, 막상 다급한 상황이 되자 신경 쓸 여유는 사라진 모양이었다.

“날뛰어라, 화룡!”

비류연의 입에서 한마디 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고개를 치켜든 용은 하늘 위로 승천하는 대신 포위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 쪽으로 머리를 돌려 거칠게 포효하듯 불꽃을 내달렸 다.

“……!”

사란이 앞으로 나서서 그 화룡의 난입을 막아내야 했다. 빙궁의 기술이 불길에 맞닿으며 뜨거운 비가 되어 내렸다.

그걸 본 비류연이 새끼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접으며 외쳤다.

“휘둘러 내리쳐라!”

화룡패미!

용에게는 머리만 있는 게 아니라 꼬리도 있었다.

꼬리를 휘둘러 별을 떨어뜨리기라도 할 듯, 화룡의 꼬리가 포위망을 둘러싸고 있는 흑천의 무사들을 후려쳤다. 거대한 열풍을 동반한 불꽃의 채찍이 후려쳐지자 포위망은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다. 만일 비류연이 살의를 품었다면 모두들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리라.

거대한 화룡이 날뛰자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비명과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수라장 한가운데서 비류연은 또다시 명했다.

“휘몰아쳐라, 열풍(熱風)!”

꿈틀거리며 날뛰던 화룡의 몸이 똬리를 틀더니 불티가 섞인 거대한 열풍이 되어 사방으로 몰아쳤다. 뜨겁게 달구어졌던 공기가 마치 비류연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는 듯, 불꽃 조각이 섞인 흙먼지들과 함께 사방으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이제는 커다랗게 자란 화룡에게 한껏 자유를 선사할 때였다.

화룡난류(龍亂流) 화룡변식(火龍變式)

화룡열풍진(龍熱風陳)

포효하는 화룡이 나선의 똬리를 그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지상의 모든 것이 용의 난동에 휩쓸리며, 열풍이 대지를 유린했다.

“으아아아악!”

“크으으윽!”

사납게 휘몰아치는 열풍이 어찌나 뜨겁고 거센지 모두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화룡의 몸에 박힌 다섯 자루의 비뢰도, 그리고 그로부터 연결된 뇌령사는 마 치 화룡을 부리는 용의 고삐와도 같았다.

화룡이 날뛰며 뿌리는 열기와 열풍이 주위를 휩쓸고 있는 혼란을 틈타 비류연은 단숨에 포위망을 뚫기로 했다.

그가 다섯 줄기의 뇌령사를 잡아당기자 날뛰던 화룡이 그 거대한 상체를 치켜들었다. 용암 같은 침을 흘리는 엄청난 위용에 선마팔선자들마저도 안색이 창백해졌 다.

“자, 알아서 피하세요!”

무책임한 대사를 내뱉은 다음 비류연이 뇌령사를 확 잡아 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물어뜯어라, 화룡!”

상체를 일으켰던 화룡은 불꽃의 이빨이 이글거리는 아가리를 벌리며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들이 모여 있는 중심을 향해 날아갔다.

“어쩔 수 없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허리춤에 찬 쌍도를 뽑으려던 신마팔선자의 첫째 갈효인은 취하려던 동작을 한순간에 멈추었다. 딸들을 향해 달려드는 화룡을 막아선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셋째 어머니 빙련선자 사란이었다.

닥쳐오는 화룡을 향해 눈처럼 새하얀 팔을 뻗으며 사란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절대빙벽(絶代氷壁)

파화아아아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화룡이 찌그러지며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 충돌의 여파로 깨어져 나간 머리는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라? 이게 웬 날벼락?”

자세히 보니, 언제 생겼는지 모를 투명한 얼음의 벽이 솟아나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정도 열기로는 나의 빙벽을 뚫을 수 없다. 탈출은 포기하거라.”

이번엔 대체 어떻게 얼린 건지, 화룡의 열기로도 김만 무럭무럭 날 뿐 녹아내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면 그건 비류연이 아니었다.

“막으면 돌아가면 되죠!”

비류연은 왼손으로 중지와 약지, 그리고 식지에 연결된 뇌령사를 움켜잡더니 그 세 가닥만을 위로 잡아당겨 올리며 외쳤다.

“갈라져라! 화룡 대가리 쪼개기!”

화룡쌍두세(龍雙頭勢)

쌍염류(流)

절대빙벽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화룡의 일부가 갈라지더니, 또 다른 머리가 생겨났다.

몸통은 하나고 머리는 두 개인 쌍두룡이 된 것이다.

절대빙벽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머리 하나를 내버려 둔 채, 새로 생긴 화룡의 머리가 절대빙벽을 타고 넘어섰다.

“그런 얄팍한 수가 통하리라 생각하느냐?”

촤라라라라라!

절대빙벽에서 튀어나온 얼음의 사슬이 또 하나의 화룡 머리를 순식간에 포박했다.

“우와, 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았다고??

이글거리는 화룡을 얼음으로 사로잡고 있는데도 역시 전혀 녹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앞서 비가 되어 내렸을 때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듯했다. 여유로웠다 이거지?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었다.

화룡의 머리 두 개가 각자 따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양손 모두에 비뢰도가 있었다면 좀 더 손쉽게 이 기술을 써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 부분이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대신해야 했다.

화룡의 양쪽 머리 회전이 매섭게 속도를 붙여갔다. 두 개의 머리가 곧 두 개의 몸통으로 갈라지더니,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용권풍(龍捲風)이 생겨났다. 아 직 미약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용권풍이었다.

비류연은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꿈틀! 꿈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두 개의 소용돌이, 용권풍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더욱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콰르르르르릉! 쾅!

하늘을 진동시키며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뇌전이 번뜩였다.

“어라? 이건……!”

비류연의 반응을 보니 그가 의도적으로 펼친 기술은 아닌 듯했다.

“실마리가 풀렸다!”

그것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온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이거라면 저 무서운 아줌마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겠어!’

그동안 막혀 있던 뇌신(神)의 경계로 가는 문이 지금 한순간 비틀려 열린 것이다.

“날뛰어라, 질풍! 울어라, 천둥! 내리쳐라, 벼락!”

비류연이 뇌령사를 당겨 두 마리의 화룡이 만들어낸 거센 회오리바람을 한곳에 부딪쳤다.

콰르르르르릉! 쾅!

다시 한 번 하늘을 진동시키며 천둥이 울려 퍼지면서 서로를 물어뜯는 용의 피가 뇌전이 되어 사방에 번뜩였다. 그 결과, 열풍과 불꽃과 바람을 감은 용이 마지막 으로 천공을 달리는 신의 벼락, 비뢰(飛雷)를 그 몸에 두르게 되었다.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두 마리의 용을 하늘로 돌려보내 줄 때였다.

비뢰도(飛刀) 비전(秘傳)

벽력의 장(章)

심득心得) 오의(奧義)

뇌화열풍인(熱風刃) 쌍룡귀천(雙龍歸天)

황금빛 뇌전을 몸에 감기 시작한 두 마리의 화룡이 온 힘을 다해 더욱 거세게 서로 부치며 반발했다. 그 격렬한 반발에 의해 다시 한 번 굉음이 터지고, 벼락이 사방 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뻗어나갔다.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바람 안에 갇혀 있던 진홍의 불꽃과 열풍이 터져 나오며 사방을 무참하게 유린했다.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는 전대미문의 위력을 발휘해 사방을 휩쓸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일반 무사들 중에서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사람들도 생겨났다. 갑자기 터진 자연재해와도 같았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사수하는 데만 해도 벅찰 지경이었다.

“우와, 이 정도일 줄이야.”

쓰기는 비류연 자신이 써놓고 설마 이런 위력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나 보다.

너무나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광포함이기에, 아무리 삼대낭랑이나 신마팔선자라도 일단은 방어가 우선인 듯했다. 일반 무사들이나 수하들은 평소에는 훌륭한 전력이었겠지만, 이런 순간에는 모두가 지켜야 할 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즉, 지금 이 찰나의 순간.

신마가의 여인들은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여유가 없었다.

비류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전음을 날렸다. “튀어!”

잠시 후.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가 있었기에 당연히 열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비류연과 나백천들이 있어야 할 곳에는 이미 시커멓게 탄 재의 흔적밖에 보이지 않았다. “뜻밖이로구나.”

다른 사람들은 뒷수습을 하느라 한창 바쁜 때에 갈효혜의 곁으로 다가온 사란이 조용히 말했다.

“네, 어머니. 소녀도 이번엔 한 방 먹었습니다. 신풍협… 그 아이가 정말 신풍협이었군요.”

그 껄렁껄렁한 아이가 신풍협이라니, 거기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였다.

“저건 무엇이냐?”

사란이 한곳을 가리켰다. 뜨거운 열풍이 휩쓸고 간 검은 들판 한가운데에 하얀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마치 잿더미 속에 핀 한 떨기 백합처럼 대조적인 모습이 었다.

갈효혜는 서찰을 주워 어머니 빙련선자 사란 앞에 내밀었다.

“불꽃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남겨둔 한 통의 서찰이라니, 그 아이의 내공이 범상치가 않나 봅니다.”

하얀 서찰 어디에도 탄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서찰에 실은 내공의 힘만으로 불길로부터 서찰을 보호했다는 뜻이었다.

급히 갈겨쓴 듯, 서찰 안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지금은 차분하게 얘기할 상황이 아니니 먼저 자리를 뜹니다.

무당산으로 오십시오

이 일에 관한 모든 진실은 그곳에서 밝히겠습니다.

백도 정파 무림 연맹 정천맹주 나백천대리 신풍협(俠 비류연.)

언제부터 무림맹주 대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신분 급상승한 비류연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

서찰 안에 담긴 내용만으로 이 시점에서 뭔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무당산으로 가야지.”

사란이 잠시 생각한 다음 조용히 말했다.

“이 내용은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죠?”

사란에게서 너무도 순순히 무당으로 가겠다는 말이 나오자 갈효혜는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반문했다.

“안다. 하지만 거짓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지. 어차피 그들이 이 와중에 어디로 가겠느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갈효혜가 즉시 대답했다.

“없습니다. 역시 이곳 호북 땅에서는 무당밖에 없겠지요. 무당파와 ‘진천(震天)’이 함께 있으니까요.”

“그래, 오직 그곳만이 그들을 보호해 줄 힘이 있다.”

나머지는 그들을 받아들여 봤자 함께 쓸려서 멸문지화를 당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큰어머님께 허가를 구하고 둘째와 설란에게도 연락을 넣어야겠군요. 전 아직 여기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그 일을 정리한 다음 둘째랑 함께 가겠습니 다.”

“그래, 그리하도록 하거라. 자매 두엇을 더 붙여주마.”

“네, 어머니.”

염도와 빙검은 삼대낭랑이 데려가기로 했다. 딸들과 함께 남겨두기에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

세 명의 어머니들에게 인사를 마친 다음, 갈효혜는 몇몇 동생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돌려 흑천맹이 있는 무한으로 향했다.

구천현녀 무화와 홍련선자 단혜, 빙령선자 사란은 나머지 딸들과 함께 무당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시지요, 큰언니.”

사란이 묵묵히 서 있는 무화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

무화의 대답은 무척이나 짧았다. 사란이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화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했다. 그녀가 반 이상 은 계속해서 다른 데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화룡이 날뛰었다 해도 비류연 일행은 결코 몸을 뺄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아까 동생이 한 말은 진심인가?”

막 발걸음 떼기 시작한 무화의 곁에서 사란이 무화의 침중한 질문에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혜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셋째 동생, 나는 자네가 전음으로 했던 얘기가 납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질 않네. 꼭 그래야 했는가?”

“네, 준비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자네가 셋째 동생이니 망정이지, 다른 자가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면 나는 아까 그 자리에서 즉시 처리했을 것이야!”

아무래도 단혜는 불쾌감을 떨쳐 내기 힘든 듯했다.

“지금도 그렇지. 만일 무당에서 그자를 내놓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그러자 사란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빛내며 또박또박 끊어 답했다.

“그들은 내놓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리하도록 할 것이니까요!”

감정이 거의 실려 있지 않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유사시엔 실력행사를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이미 ‘공천’이 무당 쪽으로 향했으니,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피의 격돌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무화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이 끝나고 그 경계(境界)에서 낮과 밤이 뒤섞이고 있었다.

“무당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겠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정사대전을 향한 이 거대한 흐름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 역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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