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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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들판에 도열한 병사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열병일까. 그저 창검을 가지런히 들고 줄을 맞춰 서 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흥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저들의 긴장감이 우리까지 전염시키고, 전염된 긴장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증폭되어 공명을 일으키는 것일까?
부대들의 앞쪽에는 수도에서 온 기사들이 하프 플레이트를 입고 장검을 빗겨차고 말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깃발 달린 핼버드를 들고 있었으며 그 깃발로 각 부대의 표식을 삼고 있었다. 다섯 기사가 각자 하나씩의 부대를 담당했다.
첫 번째는 기사들과 함께 수도에서 온 중장 보병대로서 체인 메일을 입고 롱소드와 타워 실드로 무장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경장 보병대로서 원래 우리 성에 있던 경비대들이다. 그들은 각각 가죽 갑옷과 롱소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의 무장은 자유로운 편이다. 원래 우리 성의 경비대들의 무장 은 별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세 번째는 창병대로서 가죽 옷을 입고 포차드를 들고 있다. 네 번째는 궁병대로서 가죽 옷과 쇼트 보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보급대와 의무진, 공병대 등 기타 보조 부대를 통괄한 지원대들이다.
그리고 그 부대들 옆으로 가장 중요한 부대가 있었다. 부대원은 단 한 명과 두 마리(?)였다. 할슈타일 공이라는 그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 라자가 탄 하 얀 말, 그리고 드래곤 캇셀프라임이 나머지 부대의 위용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장관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머지 부대들은 아무르타트보다는 회색 산맥에 득시글거리는 몬스터들에 대한 대비일 뿐이므로 구성이 저렇게 간단한 것이다. 아무르타트는 캇셀 프라임이 상대하고, 아무르타트의 부하라고도 할 수 있는 몬스터들은―부하? 웃기는 표현이다. 그것들은 아무르타트에 잡아먹히는 먹이에 가깝지만, 아무르타트의 그 지독한 마성(魔性)의 공포 때문에 회색 산맥을 떠나지 못하며 회색 산맥에 접근하는 인간들을 공격한다-인간의 부대가 맡게 될 것이 다. 물론 나는 작전 같은 거야 모르지만, 뭐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임이 싸우게 될 때 나머지 저 빈약한 부대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부대들 앞에는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을 담당하게 될 작전 사령관 휴리첼 백작이 근사한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바딩까지 갖춘 말을 타 고 서 있었으며, 그 옆으로 우리 영주님 헬턴트 공이 헬턴트 가의 문장이 든 하프 플레이트를 입고 전차를 타고 있었다. 전차라…… 아무리 봐도 건초 수레가 생각나는 모양이지만, 군데군데 보강을 하고 창도 몇 개 세워져 있다. 전차라고 불러주는 것은 그 위에 우리 영주님이 타고 있어서일 뿐, 다른 어디에 저 마차가 세워져 있으면 누구라도 조금 이상하게 생긴 건초 수레라고 말할 것이 뻔해.
제미니가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찾았어! 저기 계셔!”
역시 제미니가 사람 찾는 데는 나보다 훨씬 낫다. 난 제미니가 가리키고 나서야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창병대에 속해 있었다. 투구와 앞사 람의 어깨 때문에 아버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어젯밤, 아버지는 평안한 얼굴로 보통 때처럼 악담과 농담 사이의 말을 나와 나누셨다. 난 물려줄 재산이 있으면 공개하고 떠나라고 했고 아버지는 날 키운 값은 톡톡히 받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키워준 값? 나 돈 없어요. 내가 무슨 돈 있다고?”
“네가 어깨 위에 얹어둔 게 머리라면 물려줄 재산이 있을지 생각해 봐라.”
“퍼셀 한 닢 없겠지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내가 만일 유산으로 줄 것을 가지고 있다면 네놈은 내가 죽으라고 빌지 않겠느냐? 그런 점에서 이 시점까지 우리의 돈독한 부자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우리의 궁핍함에 고마워할 일이다.”
“가난해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는 평온한 얼굴로 집을 나서셨다.
“잠시 다녀오겠다. 제미니 아버지께 나무 부탁해 뒀으니 좀 있다 찾아다놓거라.”
난 냄비를 닦으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녀오세요.”
그리고 아버지는 가셨다. 우리 둘, 약속은 없었지만 이것은 아무런 위험도 없는 일, 잠시 마을에 친구라도 만나러 가시는 것 정도의 일인 것처럼 여기 기로 했다. 내가 몸조심하라고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안전할까? 아버지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까?
그런데 난 집안 일을 팽개쳐둔 채 제미니에게 이끌려 정벌군의 출발 장면을 보러 와 있는 것이다.
주위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있긴 했지만, 난 정말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난 환송이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보낸다는 의미가 있는 어떤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쳇, 빨리 출발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아무르타트보다 일사병에 먼저 쓰러지겠군.”
영주님의 연설을 들으며 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미니는 깔깔거렸다.
“일사병? 가을에?”
우리 영주님은 아무르타트가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나쁜 놈이며, 캇셀프라임을 보내주신 임금님은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찬양받아야 된다는 내용을 대단히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감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7차, 8차 정벌군에는 따라가지 못 하고 9차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벌군에 참여하게 된 영주님은 분명히 흥분하고 있었다.
휴리첼 백작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영주님은 눈물 반 고함 반으로 연설의 대미를 장 식했고, 박수소리가 길게 이어졌으며, 이윽고 휴리첼 백작의 차례가 되었다. 휴리첼 백작은 고개를 조금 숙여보인 다음 말했다.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올려 출발 신호를 했다. 기사들의 구령과 복창으로 제1부대부터 순서대로 출발했다. 마을 사람들은 휴리첼 백작에게 박수를 보낼 타이밍을 놓쳐 당황했지만 그 박수를 교묘하게 출발하는 병사들에게 돌렸다.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병사들은 출발했다.
난 계속 아버지의 모습만 바라보려 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팔을 들어올리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난 두리번거리다가 기어 코 제미니가 뻗어올린 팔에 콧잔등을 맞고 말았다. 제미니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환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지금 까지 정벌군들이 떠날 때 내가 보곤 했던 침울한 분위기, 슬프고 무거운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그것은 부대의 제일 마지막에 걷고 있는 저 거대한 존재, 아름다운 만큼 공포스럽고 거만한 만큼 위대한 캇셀프라임 때문일 테지.
“캇셀프라임 만세! 정벌군 만세! 그들에게 유피넬의 가호를!”
“아무르타트에게 저주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저주를!”
시민들은 평소의 언행과 전혀 상관없이 신에게 제멋대로 저주와 가호를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신이라도 별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겠는데. 그 런데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난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위치를 놓쳐버렸다.
“제미니, 제미니!”
난 반광란 상태인 제미니의 어깨를 붙잡아 아버지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제미니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그때 바로 제3부대가 내 앞으로 지나가 기 시작했고 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부를 것인가? 하지만 뭣 때문에. 들리지도 않을 텐데.
“아버지! 돌아오셔야 돼요!”
나란 놈은 나도 못 말리겠다. 젠장. 아버지는 역시 아무것도 안 들리는 모양이다. 그저 무뚝뚝하게 걸어가고 계셨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 다. 그때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셨다. 그러더니 이런 소란스러운 군중들 틈에 끼인 나를 정확하게 바라보셨다. 난 놀랐지만, 내 얼굴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기를 애타게 바랐다. 아버지는 시익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바라보시면서 걸어가셨다.
그리고 난 아버지의 눈가에 반짝인 것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을 날씨에 흘린 땀인가?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딱 한 방울만 내려서 아버지의 눈가에 떨어졌나?
부대가 간단하다 보니까 행렬은 빠르게 끝났다. 마을 사람들은 캇셀프라임의 거대한 몸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박수를 보내고는 천천히 흩 어졌다.
“후치? 가야지.”
제미니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려다가 내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방해를 받은 느낌인데.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이, 아무르타트고 캇셀프라임이고 다 상관없는 상태에서 난 아버지와 나만의 긴 이별을 나누고 있었다. 그것을 방해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니 제미니에게 화를 낼 수야 없지.
“그래. 가자고.”
난 몸을 돌렸다. 제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다가 낮게 말했다.
“어머, 칼이야.”
난 제미니의 시선을 따라갔다. 들판 귀퉁이의 나무 아래에 칼과 타이번이 서 있었다. 그들은 부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그냥 이대로 돌아가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싶었지만 제미니는 벌써 뽀르르 달려가고 있었다. 쳇.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안녕하세요, 칼? 일전의 융숭한 대접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스마인타그 양. 누옥에 왕림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아…… 닭살, 닭살! 난 제미니와 칼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눈 뜨고 못 봐주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칼의 옆에 있던 타이번은 눈을 감고 있지 만 그래도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칼.”
“오, 네드발 군. 이젠 내 실수를 용서해 주는 건가?”
“용서는 무슨. 소리쳐서 내가 미안해요. 구경 나왔어요?”
며칠간의 감정은 깨끗이 정리됐다. 칼은 말했다.
“사실은 타이번을 안내해 온 거라네. 난 별로 구경할 의향이 없었거든.”
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타이번, 당신이 무슨 ‘구경’을 한다는 말이죠?”
타이번은 히죽 웃었다.
“나름대로 요령이 있지. 소리를 들으며 상상을 펼치는 것도 재미있어.”
“재미?”
“응. 분위기가 꽤 좋더라구. 드래곤과 싸우러 가는 병사들 같진 않던데.”
어째 타이번은 칼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면서도(내 생각엔 두 배쯤 되는 것 같다. 칼은 마흔 살이 안 되었고 타이번은 일흔이 넘어 보이니까.) 칼보다 훨씬 편한 말
투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니 확실히 비교되는데. 칼이 좀 괴상한 건가?
“당신 근사한 마법사잖아요? 휴리첼 백작이 도와달라는 말 하지 않던가요?”
“상식이 있군. 뭐, 거절했네.”
“이유는?”
질문하는 내 얼굴 표정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칼과 제미니만이 내 표정을 볼 수 있었을 뿐, 타이번은 평온하게 말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스승에게 덤비는 꼴이 되니까. 감정적으로 귀찮아.”
“스승?”
“말했잖아.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 따라서 드래곤에게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사조(師祖)에게 덤비는 꼴이지. 우스운 모양이 된다고.”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자네가 고작이라고 해도 화는 내지 않겠어. 하지만 자네가 마법에 대해 좀 알거나 하다못해 기사도에 대해서라도 좀 안다면 대가리를 박살내 놨을 거야.”
어조가 너무 평온해서 분노는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욱 하려 했지만 잠자코 참았다. 갈가리 부서지던 트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타이번은 계 속 귀찮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뭐,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마법을 익혀왔으면서 할 줄 아는 게 박살내고 뒤틀고 죽여버리는 거라는 거, 그것도 찝찝한 일이고. 나 자신이 보잘것없 게 느껴지는 일이지. 자네가 이해할 간단한 이유를 말하라면, 죽기 싫으니까. 장님 마법사가 수백 년 동안 마법을 갈고 닦은 드래곤과 싸워주기를 바 라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당신은 장님이면서도 트롤들을 간단히 처리했잖아요?”
“야! 트롤이 마법 쓰는 놈이냐? 하하하. 캇셀프라임이 잘 상대할 거야. 휴리첼 백작도 그런 생각이니 날 끌어들이는 일에 열성적이지 않았고. 내가 보기엔 이건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이 아니라 제1차 아무르타트-캇셀프라임 대결이야. 나 같은 인간 마법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하긴 그렇겠군요. 다른 병사들은 어차피 구경꾼이고.”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다른 병사들은 무조건 구경꾼이어야 한다. 난 우리 아버지께서 포차드를 곧게 세워들고 아무르타트에게 돌격 이라도 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타이번은 웃으며 말했다.
“음. 그 대신 난 다른 일을 맡았지.”
“다른 일?”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조수를 선별할 권리도 받았고.”
“잠깐, 잠깐. 다른 일이라니요?”
“아, 그렇지! 자네, 내 조수가 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복장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인데요오!”
“헬턴트 영지의 경비. 경비대가 다 떠나고 나면 항상 그게 문제라며? 특히 이런 가을철에는 몬스터들이 눈 뒤집고 몰려들잖아.”
아, 그래. 며칠 전 나타난 트롤들도 겨울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식량 창고를 급습했다. 우리가 저희놈들을 위해 봄여름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줄 착각 하는 놈들. 가을이 되면 마치 수금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찾아오는 놈들. 제기랄, 게다가 경비대도 다 떠났으니 얼씨구 좋아라 달려들겠지. 물론 마을 사람들은 이 시기 동안 자경대를 조직하지만 난 징집 하한선에 걸린 나이라 자경대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이 타이번이 마을 경비를 맡는다고? 그리고 날 조수로? 내 어조는 순식간에 사근사근해졌다.
“거, 괜찮게 들리네. 조수 봉급이 어떻게 돼요?”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매일 술 한잔 사지. 어떤가?”
“술 말고 주머니에 넣어다닐 수 있는 것으로.”
“이 친구는 아직 세상에 돈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걸 모르는군. 더더욱 자넬 조수로 채용해서 인생 공부 좀 가르쳐야겠군. 돈으로? 흠. 좋아.”
황송스럽게도 타이번의 손끝에서 내게 날아온 것은 100셀짜리 금화였다!
“다, 당신 100셀짜리 말고는 가진 게 없어요?”
달려든 제미니에게 금화를 뺏기고는 내가 말했다.
“야이, 닭대가리야! 그건 준비금도 포함하는 거야! 적당히 무장을 챙겨. 뭐, 한 달 정도의 단기 고용으로는 보수가 비싸지만, 좋은가?”
“찬성! 두말 없기!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좋군. 내 사무실은 산트렐라의 노래니까 아침마다 찾아오도록.”
내게서 그 100셀짜리 금화를 빼앗아 침을 질질 흘리면서 구경하고 있다가 다시 내게 빼앗긴 제미니가 끼어들었다.
“저, 마법사님? 조수 하나 더 필요없으세요?”
“없어.”
제미니는 울상이 되었다. 타이번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걱정인가. 후치 돈이 아가씨 돈이고 아가씨 돈이 아가씨 돈 아냐? 자못 훌륭한 연인 관계에서 금전은 그렇게 취급되어야 해. 돈은 무조건 여자 것으로.”
“타이번!”
나와 제미니가 동시에 악을 썼다.
제미니는 끝까지 날 따라왔다.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구경이라도 해야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런 거금을 손에 쥐고 있자 앞이 캄캄했 다. 평소에는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막상 돈이 들어오니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무장, 무장이라…… 그렇지, 칼이다!”
난 평소부터 근사한 칼 한 자루 가지고 싶었다. 내 나이에 그런 욕망이 없는 사내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런데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은, 갑자 기 칼은 어디서 구하는지 생각이 안나는 것이다.
“대장간으로 갈 거야?”
그랑엘베르여! 마침내 해내셨습니다! 당신이 돌보시던 순결한 소녀들 중 가장 대책이 없는 소녀가 정곡을 예리하게 찔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 은 달랐다.
“아니. 주점으로 갈 거야. 대장간에 주문하고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주점에 가면 술값 대신 맡아둔 검이 있겠지. 바로 구할 수 있어.” 난 펍 ‘산트렐라의 노래’의 해너 아주머니가 가지고 있는 근사한 바스타드 소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해너 아주머니는 그 근사한 검을 천하에 몹쓸 물건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아니 어떻게! 그렇게 몸살나게 멋있는 검을 대장간에 줘서 술잔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한단 말이야! 다행히 샌슨의 아버지이자 대장간 주인인 조이스는 바스타드 소드에 사용된 강철로는 술잔을 못 만든다고 핀잔을 줬고, 그래서 해너 아주머니는 이런 아무짝에도 쓸 모없는 검을 술값 대신 받다니 내가 돌았구나 어쩌고 하며 그걸 어디 처박아두었다.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잘 기억한다.
그리고 그건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을 테니 틀림없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성의 경비 대원들은 모두 멋진 무기가 넘치니까(전사자들의 무기다.) 그걸 가 져가진 않았을 테고, 그 외에 누가 그걸 가져갔겠는가?
“뭐야?”
해너 아주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요? 대금을 치를 테니 그 검을 넘기라고요.”
옆에선 제미니가 감탄한 눈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제미니는 자기 어머니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들 앞에서는 항상 주눅이 드는데,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해너 아주머니와 거래를 하자 내가 무진장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그거 있기는 한데…… 네가 그걸 뭐에 쓰려고?”
“아주머니는 돈만 받으면 되잖아요. 그걸 어떻게 쓸 건지는 내 맘 아녜요?”
봐라, 제미니. 난 이 정도의 사나이다. 난 이렇게 당당 무쌍하고 차갑고 무서운 남자란 말이다. 네가 주제에 보는 눈은 있어 언감생심 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오르기엔 너무 높은 나무란 말이다.
네, 후치. 제가 어리석었어요. 철없는 소녀가 눈앞에 있는 것이 땅에 내려온 태양인지 모르고 손을 대려 했으니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 저의 마음 아 프나 그것은 저의 어리석은 행동의 소치. 저를 용서해 주세요. 흑흑.
아니다. 가련한 소녀야. 너 같은 소녀들에게 난 항상 상처만 주는 운명이구나.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겠느냐. 내가 너무 멋있는 놈이기 때문이지.
“너 입을 헤벌리고 뭐하니?”
욱, 이런. 상상이 길었구나. 해너 아주머니는 근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해너 아주머니의 가슴에 꼭 안겨 있는 바 스타드 소드에 향해 있었다. 내가 손을 뻗자 해너 아주머니는 그 손을 찰싹 내리쳤다.
“아야!”
“욘석아! 원래 절대로 너 같은 개구쟁이에게 이런 걸 줘선 안 되지만, 이젠 너도 자기 몸을 지킬 생각은 해둬야 할 테고, 양초 만드는 걸로 먹고 살기 싫다면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팔 거예요, 말 거예요?”
“팔 생각은 없어. 가져가. 어차피 너 줄까도 생각해 봤지. 그런데 네가 직접 찾아와 달라는구나. 가져가렴.”
그러면서 해너 아주머니는 그 바스타드 소드를 내 손에 턱 쥐어주었다. 난 놀란 눈으로 해너 아주머니를 바라보다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무인은 자신의 무기에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따라서…….”
딱! 아이고, 정수리야.
이것, 문제군. 바스타드 소드를 허리에 차려니, 내 혁대는 검을 차는 칼고리나 기타 등등이 없거니와 너무 빈약하다. 칼날이 빈번히 닿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끝장이기 때문에 칼집이 매달릴 혁대는 튼튼한 것을 써야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할 수 없군. 난 그냥 왼손에 들고 다니기로 했다.
내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제미니는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 시선을 의식하며 허리를 쫙 편 채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제미니는 함부로 내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약간 떨어져 걸으며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보았다.
“저, 저, 후치. 어디로 가는 거니?”
“날을 갈러.”
“저, 저, 그럼 대장간에 가는 거야?”
“당연하지.”
제미니는 내 짧고 냉랭한 화법에 주눅이 들었나 보다. 아이, 신나라. 난 턱을 치켜들고 제미니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걸어갔다.
턱을 너무 치켜들었나 보다. 콰당! 아이고, 빌어먹을! 전사가 가는 길에 똥을 갈겨둔 말이 도대체 어느 녀석이야! 내 이놈을 보기만 하면 단번에 그놈 을…… 에, 에, 먼저 그놈 주인이 누군지 살펴보고 나서 그놈을…….
제미니는 배를 잡고 웃으며 날 부축해 주었다. 난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제미니가 방긋방긋 웃으며 들고 온 건초를 받아들고는 그걸로 바지를 닦았다. 이거 내가 검을 차게 된 역사적인 날에 왜 이 모양이지?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껄껄거리며 웃었다. 제미니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웃지들 말아요! 뭐가 우스워요?”
제미니가 날 변호해 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에라, 결심했다. 제미니. 내가 희생하마. 널 데려갈 골빈 남자는 없을 테고, 내가 일찌감치 부 인을 맞이해야 세상의 남자들이 안심할 테니, 너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마. ..맙소사, 내가 미쳤나 봐.
대장장이인 조이스는 17세짜리 사내아이가 찾아와 험상궂고 냉엄한 표정으로 ‘검을 갈아주시오.’라고 말하는 데에서 느낀 당혹감을 간단하게 표현 했다.
“누구 심부름이야?”
“내 거예요!”
“네가 쓸 거라면 이것보단 저게 어떠냐?”
난 샌슨의 막내동생이 들고 놀던 나무칼을 바라보았다가 길길이 날뛰는 대신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조이스는 내가 건넨 100셀짜리 금화를 바 라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망할, 거스름돈 세려면 하루 종일 걸리겠네.”
아니, 어떻게 이 양반은 그 고귀하신 100셀짜리 금화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지? 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옆의 나무통에 주저앉았다. 제미니는 불꽃이 튀고 소리가 요란하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내 등 뒤에 서서 구경했다.
조이스는 투덜거리며 날을 살펴보았다. 순간 조이스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이거, 환상적인 검이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조이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검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검이면 새총은 공성 병기겠군.”
제미니는 자지러질 듯이 웃으며 내 어깨를 내리쳤다. 난 울상 반, 분노 반으로 한심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렇게 엉망이에요?”
“농담이야.”
“…..”
그게 재미있냐? 조이스는 내게 눈을 찡긋했고 제미니는 더욱 깔깔거렸다.
“해너가 가지고 있던 그 검이군? 길이 잘 들어 있어. 이런 게 손대긴 더 귀찮아. 뻣뻣하거든. 그리고 간수도 제대로 안 하고 처박아 놓았던 모양이군. 검 제대로 오래 쓰려면 매일 손질해 줘야 된다.”
그러곤 조이스는 두말 없이 망치를 가져와 내 검의 손잡이에 있던 대갈못을 뽑아내었다. 그러고는 검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으악! 그걸 그렇게 쑤셔박더니 조이스는 당장 다른 일감을 잡아 뚝딱거리며 만들기 시작했다. 어, 어, 저거 내 검 다 녹겠다! 난 조바심이 났지만 가만히 있었다. 내 대신 고함을 질러줄 사람이 있으니까. 제미니가 놀라서 말했다.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거예요?”
제미니의 질문에 조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그렇게 낫 하나 만들면서 내 간장을 오그라붙게 만들던 조이스는 흘끗 화덕을 보더니 천천히 장갑 을 끼고 집게로 내 바스타드 소드를 꺼냈다.
난 놀라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바스타드 소드는 백열(白熱)되어 있었다. 마치 검 모양의 불꽃 같았다. 어두컴컴한 대장간 안에서 빛의 검을 들고 있는 조이스가 마치 전설 속의 루트 에리노 대왕처럼 보였다. 다른 대장장이들도 조이스와 그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조이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괜찮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못 다루는 검이지.”
이렇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조이스는 그걸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띵깡, 탱! 띵깡, 탱! 아니, 뭐야? 저 건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꼴이잖아?
“너무 메져 있어. 표면도 시원찮고. 이도 좀 빠졌군.”
적당히 두드려서 표면을 고르고 이가 빠진 부분을 뭉개던 조이스는 그걸 물통에 쑤셔박았다. 담금질? 그러나 조이스는 보통의 담금질 횟수보다 훨씬 적은 두 번으로 끝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담금질할 필요가 없어.”
“예…… 예?”
조이스는 숫돌을 꺼내어 검을 싸악싸악 갈면서 말했다.
“원래 완성된 검은 다시는 불에 처박아선 안 돼. 하지만 이건 너무 오래 간수도 되지 않은 채 굴러다니던 검이라서 숫돌로 가는 정도로는 원래의 칼 날을 찾을 수가 없어. 그리고 검의 철도 너무 메져 있고. 이 철은 자이펀에서 나는 강철이다. 자이펀에선 담금질을 약간 모자라게 해서 검이 휘어지는 성질은 없어. 하지만 그 때문에 많이 휘두르면 철이 메져버리고 재수 없으면 휘어지는 대신 깨져버려. 뼈를 친다든가 상대의 갑옷을 많이 치면 그렇게 되지. 담금질을 잘해야 철이 질겨지는 거야.”
싸악싸악 하는 숫돌 소리에 맞춰 조이스의 설명은 리듬감 있게 들렸다. 제미니는 뼈를 친다는 말에 놀라서 내 어깨를 꽉 잡았지만 난 그것보다 다른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럼, 이걸 쓰던 사람은 꽤 오랫동안 썼단 말이군요?”
“응. 그러니 길이 잘 들어 있지. 손질도 잘했군.”
금세 장난치듯이 뚝딱뚝딱 내 검을 손질한 조이스는 다시 손잡이를 끼워맞추고는 못으로 고정시켰다. 조이스는 그걸 검집에 탁 꽂아넣고는 내게 건 넸다.
“뽑아봐.”
난 침을 삼키며 손잡이를 쥐었다. 스르릉!
우하, 우하하. 아이고, 심장이야. 팔에 털이 쫙 곤두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부드럽게 뽑히던 검이 조이스가 좀 손질을 하고 나자 가슴을 도려 내는 소리를 내며 뽑혀나왔다. 제미니는 아예 내 어깨에 달싹 붙어서 눈만 어깨 너머로 내놓으며 쌕쌕거렸다. 그래서 내 목덜미를 간질이며 동시에 내 발검 동작을 방해했다.
내가 검을 다 뽑아들고 나자 조이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혹시 전사들처럼 엄지손가락으로 칼날 만져볼 생각은 하지 마. 그건 지금 면도도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윽, 놀라라. 그렇지 않아도 난 엄지손가락을 칼날로 가져가고 있었다. 난 머쓱해져서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서슬 퍼런 검광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반짝거리는 검신은 정말 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조이스는 수건 하나와 숫돌을 내게 건넸다.
“네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뭐 누구나 검을 망쳐가며 배우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칼을 갈아줘라. 그렇게 많이 갈 아줄 필요는 없고 그저 한두 번 해주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많이 해줘야 되지만.”
그러곤 조이스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대장간 귀퉁이로 다가가더니 자신의 돈주머니를 찾아내서 한참을 끙끙거리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마 100셀 짜리 금화에 대한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다른 대장장이들도 합류했고, 웃통을 벗어던지고 근육투성이인 상체에 땀을 번질거리는 거 한들이 끙끙거리며 동전을 고르는 모습은 제미니를 퍽 재미있게 만드는 모양이다.
“까르르르…..“
하지만 난 그런 데 시선 줄 여유가 없었다. 난 내 모든 신경을 바스타드 소드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정말 멋있었다. 전투적 합목적성으로 제작된 기능 적인 검신, 날렵하고 길고 매끈거린다. 그 둘레를 감싼 검날, 그 목적은 적의 육체에의 침범. 피를 부르듯이 앵앵거리는 검날은 내 혼을 쏙 빼놓았다. 그리고 가드와 그 아래의 손잡이. 오래된 가죽으로 칭칭 감긴 손잡이는 내 손에 찰싹 달라붙는 것 같았다. 이 가죽을 좀 바꿔줘야 될까? 아니, 아니다. 지금 뭐 하나라도 바꾸면 큰일날 것 같다.
난 그걸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무지무지한 예리함으로 적의 피를 부르는 물건이 왼손에 있다고 생각하자 손바닥이 근질거 렸다. 난 어깨를 조금 움츠린 다음 팔짱을 탁 끼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근사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피넬, 보라! 오늘 또 하나의 검사가 탄생하여 그대 아래에서 헬카네스의 율법을 실천하려 한다. 내 손은 헬카네스의 율법을 실천하나 그 손은 내 정 신의 노예.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은 그대에게 바치겠다. 잘 봐둬! 나다. 잊지 말라, 유피넬! 으음……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후치, 숫돌이랑 수건 챙겨야지.”
망할…… 망할, 망할, 망할 계집애! 이 순간에 그런 걸! 난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그걸 챙겼다. 숫돌을 수건에 감싸서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을 때 조 이스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모자라는데. 너 갑옷은 혹시 필요 없냐?”
욱. 까먹을 뻔했던 것이다. 갑옷이라? 흠. 당연히 좋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대장간 한귀퉁이를 뒤적거렸 다. 그러고는 가죽 갑옷 중에 내 체격에 맞을 것을 하나 고르더니 들고 왔다. 난 그 옆에 있는 체인 메일이 더 탐났지만 그건 무지무지 비싼데다가 차마 그런 걸 입고 마을을 돌아다닐 용기는 없었다.
“너 초장이지? 기름 다루는 법 아냐?”
“물론이죠!”
철로 된 갑옷은 습기가 가장 문제다. 하지만 철은 강인한 소재이다. 그에 비해 가죽 갑옷은 어지간히 무두질이 잘되어 있다고 해도 상하기 쉽다. 최소 한 갑옷에 곰팡이가 핀다면 그것은 가죽 갑옷이지. 하지만 기름을 잘 먹여둔 가죽 갑옷은 꽤 오랫동안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그리고 기름 다루는 것이 라면 내가 누구냐? 동물 기름이나 왁스로 초를 만들어내는 초장이 아니냐? 웬만한 칼은 미끄러져버릴 정도로 기름을 먹여줄 수 있지. 아예 빗방울에 도 까딱없도록 초칠을 해버릴까?
가죽 갑옷은 셔츠처럼 그냥 뒤집어쓸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기 때문에 난 간단히 그것을 입었다. 목 아랫부분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고 리벳이 달린 구멍이 양쪽에 있었다. 물론 끈 꿰는 곳이다. 난 조이스에게 끈을 건네받아 그것을 서툴게 꿰기 시작했다. 제미니가 큭큭거렸다.
“이리 줘봐. 그래서야 어디 풀기나 하겠니.”
난 순순히 제미니에게 끈을 줬다. 제미니는 내 가슴에 달라붙더니 끈을 꿰기 시작했다.
“휘익! 휙휙!”
뭐야? 대장장이들이 우릴 보고 휘파람을 날리는 것이었다. 제미니는 볼이 발그레해졌다. 흠, 그러고 보니 나도 전설 속의 루트에리노 대왕처럼 보이 겠군. 난 당당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서 있었고 제미니는 그 가슴에 달라붙어 손을 꼼지락거리며 끈을 꿰고 있는 것이다. 아마 임금과 시녀쯤 이겠지?
조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기 속의 레이디와 기사 후보생 같군.”
뭐, 뭐, 뭐라고!
어쨌든 난 롱 부츠도 장만했고 장갑도 샀다.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았고 그래서 난 무지 자상해지고 넉넉해져서 제미니에게 옷도 한 벌 선물해 버렸 다. 아무래도 난 제정신이 아닌가 봐. 100셀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제미니는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고 그걸 보고 있자니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