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1화
그러나 전사들의 자부심과 흡사한 자존심은 몬스터들에게도 있다. 흔히들 몬스터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선입관이라고 하면 교활하고 파렴치하고 약삭빠르며 자부심이라고는 추호 도 갖지 못했다는 인상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부심이란 인간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드워프나 엘프도 몬스터와 마찬가 지이다. 그렇다면 저 드워프의 강인하며 끝없는 당당함과 엘프의 조용하지만 절대적인 자존심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따라서 자아(自我)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에게 자부심이란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관념이다. 흔히 인간들이 교활하다고밖에 여기지 않는 고블린에게도 자존심은 있고 수치를 느낄 줄도 안다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때로 몬 스터에게도 있는 자존심을 가지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 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2권 334쪽.
1
“우와! 덥다! 무슨 가을밤 날씨가 이래?”
“돈다, 돌아! 정말 김 난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날씨는 분명 가을밤이고, 우리가 위치한 곳은 회색 산맥 끄트머리의 휴다인 고개였다. 휴다인 고개는 우리 고향인 헬턴트 영 지가 있는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바이서스의 중심부 미드 그레이드 지역으로 넘어갈 때 사용되는 몇 개의 관문 중에 하나로, 회색 산맥의 끄트머리라 고 하지만 그래도 무시못할 정도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절대로 덥다고 말할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수리에서 김이 오를 정도였다.
샌슨과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짜증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칼은 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을 황당하게 보고 있는 것은 칼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은 모두 자신의 글레이브를 꼬나든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들은 도대체 포기라는 것을 모르나? 샌슨은 짜증을 부리다 못해 이젠 나 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 그러기에 남김없이 죽이자고 했잖아!”
“누가 저렇게 질길 줄 알았어!”
며칠 전 밤. 노숙을 하던 우리는 느닷없이 들려온 비명소리에 달려갔다가 오크들의 잔치를 방해하게 되었다. 오크들은 아마도 상인으로 짐작되는 여 행자 하나를 살해해 놓고는 그의 물건들을 꺼내보며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샌슨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그는 날래게 롱소드를 뽑아들며 그대로 오크 하나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다른 오크들은 반항하 려 했지만 칼이 롱 보로 지원해 주고 키가 월등히 큰 샌슨이 난리를 피우자 놈들은 압도적으로 불리해졌다. 그러자 오크들은 가장 만만해 보이는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난 실제의 몬스터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꾹 참고 바스타드를 붙잡았다.
“에라, 죽어보자! 일자무식!”
나의 화려한 일자무식! 음, 일자무식은 언젠가 오거의 일루전과 싸울 때 써먹었던 기술로 무식한 힘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그대로 몸이 한 바퀴 더 돌아 다시 올려치게 되는 기술이다. 너무 강하게 올려쳐 허리가 아파온다는 게 단점이지만, OPG가 내는 괴력에 의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두 번 올려치게 된다. 내 취향에 딱 맞는 기술이지만 샌슨은 죽기에 딱 알맞은 기술이라고 말한다.
실제의 오크들은 일루전처럼 멍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장 앞에 오던 놈은 옆으로 피하다가 귀를 잘렸다. 오크는 펄쩍 뛰었다.
“취이이익!”
그런데 하필이면 잘린 귓조각이 내 입에 들어와 버렸다.
난 왁왁거리며 게워내느라 귀를 움켜쥐고 달아나는 오크를 놓쳐버렸다. 샌슨은 달아나는 놈들을 끝까지 추적하려 했지만 난 속도 메슥거리고 졸리 기도 하는 참이라 상인의 신원이나 알아보고 매장이나 해주자고 말했다. 샌슨은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칼도 내 의견에 찬성했으므로 우리는 상인의 신원을 조사해 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체에 돌무더기를 쌓아 간단히 매장하고는 잠을 설친 채 출발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오크들이 복수를 하겠다면서 이렇게 우리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들의 복수심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이번엔 아예 달아나지도 못하게 완전 포위 진형으로 나섰다. 그래서 우리는 절벽을 등진 채 이렇게 몰려 있는 것이다. 뒤로는 켜켜이 쌓여 있는 기암절벽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었고 앞쪽으로는 넓은 구릉지대, 곳곳에 자작나무들이 서 있는 숲이다. 그리고 그 자작나무 사이사이로 보 이는 오크의 모습. 모닥불 때문에 놈들은 달려들진 못했지만 우리도 며칠 밤을 시달리다보니까 눈에 핏발이 설 지경이다.
“야! 너희들 우리 말 할 줄 알지?”
난 화가 나서 놈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크들 중 월등히 거대한 글레이브를 든 놈이 앞으로 나섰다. 덩치도 다른 오크의 몇 배는 되겠다. 놈은 불기운 이 마땅찮다는 듯이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했다.
“취익! 유언이라도 남길 텐가? 인간들은 간혹 그러더군. 취익!”
“유언 같은 소리 하네. 임마! 어떻게 하면 포기할 거야, 응?”
“취이익! 포기란 없다! 너희들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우리는 계속한다!”
“정말 귀여워 미치겠네. 아예 애교를 부리는구나.”
오크는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취익! 말인가?”
“인간 어린애가 너희들같이 군단 말이다!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지.”
오크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봐, 잘 들어봐. 인간은 나이를 먹지?”
“무슨 말을 하는가? 취익! 그건 어느 생물이나, 취익, 마찬가지다!”
좋아, 넘어온다. 넘어온다.
“맞아맞아. 그런데 말이야,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난 어느새 그놈 얼굴까지 바싹 다가가면서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 오크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나는 정답게 웃으며 설명했다.
“점점 교활해지거든!”
나는 날쌔게 그놈을 겨드랑이에 끼며 목에 바스타드를 가져다대었다. 오크는 반항하려 했지만 난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오크는 숨막히는 소리를 질 렀다.
“자! 더 이상 다가오면 이 녀석을 죽이겠다!”
난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칼과 샌슨을 바라보았다. 나 어때?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이상했다. 두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는 희귀한 것을 본다 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하나가 말했다.
“취익, 그래서?”
“다, 다가오면 죽인다니까!”
“다가가고, 죽이고, 취익, 그래서?”
“죽으면 안 되잖아?”
“도대체 무슨, 취이이익! 말을 하는 건가, 취익! 죽으면 안 된다니! 취치치익! 죽인다고 했잖아?”
“어, 어, 그렇긴 한데 말이야.”
그때 샌슨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후치, 안됐지만 오크는 인질 같은 것은 취급하지 않아.”
“그, 그게 무슨…. 아니, 그럼 복수는 왜 하겠다는 거야? 동료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다면 복수 같은 거……………”
“오크는 인질이 될 정도로 멍청한 놈을 동료로 여기지 않아. 그리고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동료의 복수가 아니라 그 상인의 물건을 훔치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복수일걸. 자기 일을 방해했다는 거지.”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이런 밥맛없는 놈들!”
난 하도 화가 나서 겨드랑이에 낀 놈의 모가지를 잡아 뱅뱅 돌렸다가 오크 무리로 집어던져 버렸다. 오크들은 내 힘에 크게 놀라는 듯했으나, 그보다 먼저 자기 무리로 날아온 이방인(?)을 처리했다. 오크들의 글레이브가 일제히 휘둘러졌고 내 겨드랑이에 끼였던 놈은 비명 지를 사이도 없이 고깃덩 이가 되어버렸다. 난 그 광경을 보면서 다시 구토증을 느꼈다.
“우욱…… 해도 너무한다.”
“저놈들은 원래 그래. 수놈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오크야.”
“암놈은?”
그 와중에도 호기심을 느끼는 것을 보면 난 인간이다. 칼이 설명했다.
“오크들은 암놈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요. 그리고 인간들도 암놈은 건드려선 안 된다네. 어차피 암놈들은 동굴에 틀어박혀 있으니 구경도 못하지만, 만일 누군가 암놈을 건드린다면 그가 제아무리 루트에리노 대왕만큼의 영웅이라도 죽었다고 봐야 돼.”
“허, 그래요?”
오크들은 작업을 끝내고 이제 글레이브를 우리에게 돌렸다. 이런, 쓸데없는 말을 나누다가 위험해질 뻔했군. 어쨌든 저놈들이 하는 짓을 보니 도저 히 용서고 자비고 생각해 줄 기분이 들지 않는다.
“임마들아! 내가 누군 줄 알아? 난 초장이다. 네놈들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주겠어!”
나의 다분히 직업 정신이 넘치는 경고에 샌슨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오크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취익! 너, 초장이라고?”
“그렇다. 대륙의 어디에서도 오크 기름으로 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보겠어! 거기에 내 이름을 붙이지. 네드발식 오크 양초!”
오크들은 갑자기 서로 구시렁거렸다. 그러더니 그중 한 놈이 다시 말했다.
“그럼, 취익, 저놈은 생포다.”
“뭐……야?”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때 칼이 끼어들었다.
“여보게들………… 오크들이 어떻게 저런 무기를 쓰고 갑옷을 입고 한다고 생각하나? 인간의 기술자들을 잡아서 부리기 때문이야. 그래서 저놈들은 기 술자를 좋아해.”
“예?”
“오크들은 머리가 나빠 배우지는 못해. 그래서 기술자를 잡아서 대신 일을 시키는 거야. 대장장이를 특히 좋아하고 자네 같은 초장이도 좋아하지. 촛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잡아온 기술자들이 오크의 동굴 속에서 일하려면 초가 필요하니까.”
샌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봐, 난 대장장이 아들로 대장간 일이 특긴데. 어쩔 거야?”
오크들은 당황했다. 그놈들은 다시 구시렁거리더니 말했다.
“취익! 그 뒤의 늙은 인간! 너는? 취익! 우릴 잘 아는 것 같은데, 취익취익! 너도 지식이 많은가?”
“나? 난 독서가고 작가 취향도 있지만 자네들에게는 일단 약사라고 해두세나.”
오크들은 완전히 당황했다.
“그, 그럼, 취이이익! 취익! 모두 생포다!”
샌슨은 껄껄 웃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죽을 걱정 안하고 싸우겠네?”
그리고 나도 싸늘하게 말했다.
“우린 좀 다른 의견이 있지. 우린 너희들 중 몇 놈만 생포할 거야. 네놈들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은 구해야겠어.”
내 말을 듣자 샌슨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그렇군!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샌슨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달려들었다. 당황한 오크들이 글레이브를 내밀었지만 오크는 팔길이가 짧은지라 인간만큼의 글레이브는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 낮다는 것이 문제다. 샌슨은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들어오는 글레이브를 황급히 튕겨내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에에에라!”
오크들의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난 크기가 거의 오크만한 바위를 집어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린 다음 말했다. “공기놀이 할래?”
“저, 저거 초장이 아니다! 취이익! 인간 아니다!”
난 사정없이 그걸 집어던졌다. 쾅쾅쾅! 오크들이 저렇게 날쌘가! 멧토끼 같군. 그러나 그중 재수 없는 놈이 하나 있어 바위 앞에 쓰러져버렸다. 난 좀 끔찍스러워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순간 뒤통수가 선뜻해서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똑똑히 봤다.
“음, 잔인하군. 누구야, 이런 일을 한 놈이.”
오크들은 발악을 하며 달려들었다. 샌슨은 상대가 너무 낮게 베어들어오자 화를 내면서 상체를 앞으로 길게 숙여 풀 스윙으로 롱소드를 휘둘렀다. 확실히 샌슨의 상체와 팔길이에 롱소드의 길이가 더해지자 오크들의 글레이브보다 더 길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달려들었다.
“일자무식! 옆으로!”
이번엔 일자무식을 옆으로 바꿔봤다. 옆으로 돌려보니까 간단하게 세 번을 돌았고 허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현기증이 나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리고 오크들은 그 퍼런 얼굴이 더 퍼렇게 바뀌는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놀랍게도 난 세 번이나 돌면서 하나도 맞추지 못했으며, 대신 옆에 있던 나무 몇 그루가 잘려버렸다. 난 샌슨의 비난 섞인 눈초리를 무시한 다음 잘려나간 나무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이걸 노린 거야!”
“적당히 해라….. 후치. 아무리 오크라도 그건 안 믿어주겠다.”
어쨌든 나의 OPG와 샌슨의 검술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오크들이 생포 운운할 정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크들은 질린 표정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그 건 절대로 안 된다. 난 달려들어 한 놈의 덜미를 잡아올렸다. 놈은 악을 쓰면서 내 얼굴을 치려 했지만 복부에 한 방 먹여주니 입가로 기분 나쁜 침을 흘리면서 기절해 버렸다.
오크들은 다 달아났고 우리는 밧줄을 꺼내어 생포한 오크를 묶었다. 샌슨은 말했다.
“저, 칼, 이놈들이 인간을 납치한다면, 아무래도 그 동굴을 수색하여 그들을 구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만……”
“나도 찬성일세. 먼저 시간이 충분한지 자네가 확신시켜 준다면.”
흠,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이 되었군. 우리가 출발할 때는 9월말이었는데.
“시간은 충분합니다. 수도까지는 이제 17일 거리니까 돌아오는 데 25일 정도 잡으면 왕복 42일입니다. 물론 며칠 차이는 나겠지만 대략 한 달 보름 정도 남습니다.”
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 참…… 전하를 알현하고 휴리첼 백작가에도 들러보려면 시간이 좀 그렇군. 한 달 보름이라.”
샌슨과 나로서는 그저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한 달 보름이 왜 부족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도의 사정이나 왕실 예법은 모르므로 잠자코 있었다. 칼은 얼굴을 펴며 말했다.
“깨우게. 내가 심문하지. 시간이 부족해지면 밤에도 달려야지.”
칼은 자상한 표정이었고 샌슨도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씩 웃으며 그놈의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놈은 곧 눈을 뜨고는 자기 상황을 살펴본 다음 공포에 질렸다.
칼은 그놈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아까 들었겠지만 난 너희들에 대해 조금 알아. 넌 이대로 돌아가면 족장에게 맞아죽겠지? 족장이 너의 머리를 잘라내어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집 어던져 버릴 거야.”
오크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별로 충격받지는 않았고 대신 샌슨과 내가 충격을 받아 얼굴이 노래졌다. 칼은 계속 말했다.
“네 동굴의 위치를 말해 주지 않으면 널 족장에게 데려갈 거야.”
샌슨과 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게 말이 되냐? 우리는 칼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취익! 저쪽 봉우리 정상에서 아래로 300큐빗쯤, 취익! 덩굴로 가려진 바위틈, 취익! 양쪽의 쓰러진 나무 두 개가 표시다. 취이익! 수효는 모두 150 쯤 된다!”
“그런가? 고마워.”
칼은 밧줄을 풀어주었고 그놈은 곧 줄행랑을 쳤다. 칼은 우리들의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제군들. 저놈들이 왜 인간 기술자를 납치하겠나.”
“그, 그래도 너무 심하군요.”
샌슨은 볼을 실룩거리며 황당해하고 있었고 나는 낄낄거렸다. 칼은 턱을 쓸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150마리라면 너무 많은데…………. 도대체 그렇게 많은 놈들이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하군. 휴다인 고개의 산적질이 그렇게 수입이 좋은가? 음. 샌슨. 근처에 요새나 큰 마을이 있는가?”
샌슨은 두툼한 지리서를 꺼내더니 횃불 가까이 가져와 위치를 짚어보았다.
“에, 좀 멀리 떨어진 곳에 포트 이룬다가 있습니다. 꽤 먼데요. 나흘 거리는 되겠습니다. 그 외에는 작은 영지들이 몇 개 있을 뿐입니다. 아마 그 작 은 마을들을 노략질하며 살아가는 모양이지요.”
“하긴 요새나 대도시가 가까이 있으면 저렇게까지 대규모 집단을 이루긴 어렵겠지.”
칼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들은 고민에 빠졌다.
샌슨이 보여준 지리서에 나타난 포트 이룬다는 우리들이 가려는 동쪽 방향과는 거의 직각으로 꺾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요새로, 그 남쪽의 자이 펀과의 국경을 지키는 국경 수비대 요새였다. 거기로 가면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국경 요새에서 오크 정벌을 위해 군사를 파견해 줄 것 같지도 않다. 우리가 뭐 대단한 신분도 아니고 국경 수비대를 출동시켜 주십사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의견을 내놓았다.
“저, 어, 으하아암. 쩝쩝. 그놈들은 낮에는 잘 거 아니에요?”
“그렇겠지.”
“그럼 낮에 동굴 안으로 살짝 들어가 사람들만 재빨리 찾아서 나온다면?”
“너무 위험해. 말도 안 돼요. 네드발 군. 어두운 동굴 속에서 150마리나 되는 오크들을 피해 사람만 찾아 나온다니. 그리고 놈들도 아마 보초병을 세 울 텐데.”
그때 숲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확실히 어리석은 계획이군요.”
“어엇?”
샌슨과 난 당황해서 무기를 들어올렸다. 목소리는 인간,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였지만 여자 목소리를 내는 몬스터도 얼마든지 있다. 어쨌든 한밤중이 니 무조건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사람이라면 앞으로 나오시오!”
숲 속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말을 거절할 수도 있을 텐데요?”
샌슨은 입을 딱 벌리더니 당황한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윽,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샌슨에게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지어주고는 숲 속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나오지 않으면 넌 변비 걸린 고블린, 무좀 걸린 오크, 치질 걸린 놀이다!”
역시 난 통쾌한 남자다. 샌슨도 나처럼 통쾌한 놈은 처음 보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숲 속의 목소리는 잠시 후 말했다. ·불쾌한 추측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나가야겠군요.”
이윽고 불빛 속으로 나타난 것은 키가 훤칠하고 귀가 큰 여자였다. 귀가 얼마나 큰지 꼭 엘프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샌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저 여자 꼭 엘프처럼 귀가 크네?”
샌슨은 날 이상하게 바라보더니 그 여자에게 말했다.
“숲의 종족이시군요?”
・・・엘프였군.
엘프는 샌슨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칼만큼은 훤칠한 키였다. 저렇게 새까만 머릿결은 처음 보는군. 그 새까만 머리카락은 뒤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백색의 얼굴 가운데 눈도 새까맣다. 옷은 하얀 블라우스에 고동색의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는데 앞쪽을 잠그지 않고 그냥 풀어놓아서 하얀 블라우스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색의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왼쪽 허리에는 가느다란 에스터크를 차고 있었고 그 아래 왼쪽 허벅지에는 망고슈를 묶어놓았다. 같은 쪽에 칼을 두 개 차고 있어? 오른쪽에는…………… 오른쪽 엉덩이 쪽에는 화살통을 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등에 멘 배낭에는 컴포짓 보 가 꽂혀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엘프였다. 나는 그 용모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엘프에 대한 옛이야기처럼 확실히 미인이었다. 하지만 내 취향대로라면 키가 좀 더 작았으면 좋겠어. 이 엘프 아가씨는 키도 훤칠하고 다리도 길어서 나무로 치자면 삼나무 같은 느낌이 든다. 난 좀더 소박한 전나무가 좋다. 키도 좀더 작고, 어깨도 좀더 좁고, 목도 저렇게나 길 필요는 없…… 으윽. 제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군. 망할.
내가 제멋대로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프 아가씨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오크들의 소리가 들려 와봤습니다.”
“샌슨 퍼시발입니다. 반갑습니다.”
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칼입니다.’라고 말했고 난 딴 생각을 하느라 당황해서 내 소개를 했다. 엘프 이루릴은 소개받을 때마다 살짝살짝 고개 를 끄덕였다. 소개가 끝나자 이루릴은 말했다.
“인간 여러분은 여행자이십니까?”
칼이 말했다.
“글쎄요. 세레니얼 양께서 인간의 일을 잘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은 수도로 전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입니다. 저희 고장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드리기 위해서지요.”
“그러신가요.”
“세레니얼 양도 여행자이십니까?”
“이루릴이라고 부르세요. 여행자입니다.”
그때 샌슨이 당황해서 말했다.
“아, 저, 일단 앉으시지요. 야, 후치. 주전자에 물 얹어라.”
흠, 좋지. 어차피 잠도 달아났으니 차라도 마시지. 이루릴은 감사의 말을 한 다음 앉았다. 흠, 엘프란 좀 뻔뻔스러운 데가 있나 보군. 컵을 꺼내면서 내가 말했다.
“이봐요, 아까부터 우릴 보고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좀 도와주지 그랬어요? 그럼 차 대접하는 기분도 썩 좋을 텐데.”
“누굴 도우란 말씀이지요?”
응? 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루릴은 엘프고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을 도와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지. 내가 한 말은 자기 중심적인 말이었고 이루릴은 그것을 지적했나 보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뻗대보기로 했다.
“비슷한 사람이요!”
“비슷한………… 네드발 씨는 놀과 오크가 싸운다면 누굴 도울 건가요?”
어랏, 대답을 잘못하면 큰코 다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둘 다 안 돕는다고 말하면 이루릴은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난 칼이나 샌슨 이 좀 도와줄까 해서 두 사람을 돌아봤지만 칼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 도와주려는 기색은 없었고 샌슨은 이루릴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칵! 저 총각이 왜 저래? 고향의 그 아가씨와 질질 짜면서 헤어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난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는 컵을 헹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아이고! 나도 모르겠어요. 에, 나에겐 하나의 선이 있어요. 그 선 안쪽이면 친구고 그 선 바깥이면 타인이지요. 그리고 후치라고 불러 요.”
“그 선은 뭔가요? 후치.”
“나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오크나 놀은 둘 다 날 생각하지 않는 놈들이니까 둘 다 돕지 않겠어요.”
이루릴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그럼, 난 당신들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신의 타인인가요?”
“현재로선 그래요. 친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신이 돕지 않았으니까.”
나는 컵을 내밀었다. 컵을 받아드는 이루릴의 손가락은 가느다랗다. 난 칼에게도 컵을 줬고 샌슨은 어깨를 친 다음에야 컵을 줄 수 있었다. 샌슨은 컵을 받아들더니 다시 이루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총각 큰일 내겠군.
이루릴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온기를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싼 채 거기에 입술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그럼 후치는 나에게 이 차를 줬으니, 그것은 당신이 날 생각하는 것이겠죠. 그럼 난 당신을 친구로 여겨야 되나요?”
허억! 너무 어렵다.
“세레니얼 씨가 나와 같은 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이루릴이라 부르세요. 그럼 당신은 날 타인이라 여기면서도 나에게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가 보군요.”
“어, 그게 살아가는 방법 아닙니까?”
“그럼 당신이 놀이나 오크에게 손을 내밀면 그들 중 하나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어, 어, 그건, 내가 손을 내민다고 그놈들이 날 친구로 받아주겠어요?”
“당신이 나에게 차를 건넨다고 내가 당신을 친구로 받아들일까요?”
・모르겠어요.”
이거 내가 해놓고도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난 내 기억 저장고에다가 엘프는 무지 황당하며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종족이라고 써 둔 다음 차를 마셨다. 뱃속이 뜨뜻해지니까 곧 졸음이 온다.
이루릴의 칠흑 같은 머릿결 사이로 떠오른 하얀 얼굴은, 어두운 밤의 배경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 얼굴은 하얗고 투명해서 초점을 맞춰 바 라보기 어려웠다. 칼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듣고 있자니 퍽 인상적이었소.”
아무래도 칼은 나와 이루릴이 인간과 엘프로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보고 두 종족 사이의 대화를 관찰했나 보다. 퍽도 재미있으셨겠어. 이루릴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간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를 다 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 중에 하나니까요.”
이루릴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전…… 인간에 익숙하지 못해요. 지난 120년간 인간을 봐왔지만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마 제 지위가 올라가지 않나 보지요.”
으아, 120살! 엘프야 나이를 천천히 먹는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120년을 살았다면 슬라임도 이해했겠다. ‘그대 꿈틀거리는 슬라임이여, 너의 매혹적인 꿈틀거림은…………….’ 이상한가? 어쨌든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서 왜 사람을 이해 못해. 난 차를 후루룩 마셔버리고 모포를 챙겼다.
“으아함.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돼. 샌슨, 졸려?”
“아, 아니. 난 괜찮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고. 나는 칼을 쳐다보았고 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잘 테니 교대할 때 되면 깨워주…..아함.”
나는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고 칼은 이루릴이라는 그 엘프 아가씨와 계속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샌슨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루릴의 입만 보고 있었다. 정말 우리 마을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군! 칼이 말했다.
“나로서도 엘프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자신 없습니다.”
“그러신가요.”
칼의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난 잠이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