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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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3화

3

드워프는 우리 옆으로 다가와서 중얼거렸다.

“말을 듣자니 대충 짐작은 가는군. 오크들에게 쫓기고 있군?”

“예. 죄송합니다. 우리들의 일이니까 당신은 물러나세요.”

칼이 롱 보를 뽑아들며 말했다. 드워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천만에. 이제야 싸울 수 있게 됐는데?”

난 이 배짱 풍부한 드워프를 내려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그냥 오크도 아닌 우르크인 데다가 저쪽은 아홉이고 우리는 다섯인데도 이 드워프 는 전혀 겁먹은 태도가 아니다. 잠깐, 다섯인가? 나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이루릴도 나를 바라보았다.

“후치.”

“예?”

“아침에 우린 친구가 되었지요?”

난 미소를 지었다. 이루릴은 내 미소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허리 양쪽의 에스터크와 망고슈를 뽑아들었다. 나는 말했다. “이봐요. 쫓기는 건 우리니까 당신은 나서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날 위해 행동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세수했잖아요.”

“나도 당신을 돕겠어요. 그러는 것 맞나요?”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엘프는 어쩌는 줄 모르겠지만. 난 엘프는 정말 피곤하다고 다시 기억해 두면서 앞으로 나섰다. 우르크들은 주춤하면서 글레이 브를 꼬나들었다. 저건 좀 섬뜩한데. 저놈들은 햇빛도 견딘다고 하던데 덩치도 예사롭지 않았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을 정도였고 어깨는 나보다 더 넓었다. 어떻게 한다?

“하아아앗!”

이런! 답도 없는! 샌슨이 돌격한 것이다. 아홉이나 되는 우르크들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어 어쩌겠다고! 그런데 그것은 정면이 아니었다. 가장 오른쪽 놈을 노리고 달렸다. 그렇다면? 나는 죽어보자는 심정으로 왼쪽으로 달렸다. 우르크들은 재빨리 양쪽으로 모여섰다. 그리고 그때 칼이 롱 보를 튕기 기 시작했다.

나는 바스타드를 아래로 내린 채 달려들었다. 자연 상체는 완전히 비어버렸다. 머리로 날아드는 글레이브, 자식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넌 속 았어!

“일자무식!”

우르크의 글레이브는 튕겨나가 버렸고 그 반작용으로 우르크는 두 팔을 들어올린 채 가슴을 완전히 노출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바퀴 돌아 올라가는 나의 바스타드. 엉?

우르크는 뒤로 뛰며 공간을 비워버렸다. 이놈 봐라? 그제야 난 일자무식이 제자리에서 돌게 되므로 발생하는 약점을 알아차렸다. 이번엔 내가 팔을 들어올린 채 가슴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우르크의 글레이브가 날아들었다. 으악! 죽는다!

“거꾸로!”

난 팔과 허리의 반동을 무시하며 위로 올린 바스타드를 아래로 쳐내렸다.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지만 간신히 글레이브는 땅으로 튕겼다. 놈은 그 충격으로 허리를 앞으로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 위에서 다시 내려쳐지는 바스타드에 그놈의 투구가 쪼개졌다. 하지만 내 허리도 쪼개지 는 기분이다. 눈앞에서 뭔가 아물거리면서 별들이 깜빡거렸다.

“우와, 이거, 심한데?”

난 일단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또 다른 놈의 글레이브가 숨쉴 사이 없이 날아들었다. 이 자식이 정말 날 죽일 셈인가? 하긴 난 이미 한 놈을 죽였지. 난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취했다.

“으랏차!”

난 오른발을 살짝 들며 바스타드의 끝을 빙빙 돌리면서 찔렀다. 기술 이름이 당장 떠올랐다. 난 역시 순발력이 넘친단 말이야.

“기름 젓기!”

양초 골 때 기름 젓는 것처럼 앞으로 빙빙 돌리며 찌른 것이다. 글레이브는 튕겨나갔고 빙빙 돌던 바스타드의 끝이 뭔가에 닿은 느낌이 들자 오른발 을 강하게 밟으며 그대로 찔렀다. 뿌드득! 일자무식 때와는 달리 우르크의 몸을 파고드는 느낌이 그대로 칼자루를 통해 손끝에 느껴졌다. 소름이 돋 았다.

“윽, 제기랄. 마구 젓기!”

난 팔로 거대한 8자를 그리면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워낙 빠르게 돌리니까 그것도 훌륭한 방어가 되었다. 우르크들은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고 난 간신히 한숨 돌릴 정도의 거리까지 물러났다. 하지만 팔을 돌리는 것을 멈추자마자 다시 글레이브가 다가왔다. 이걸 그냥! 응?

그 글레이브는 힘없이 땅에 떨어졌고 글레이브를 들고 있던 우르크의 등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칼이 화살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 허리 옆 으로 뭔가 작은 것이 지나갔다.

“멋진 기술인데? 푸하하하!”

그 드워프였다. 배틀 액스를 어깨에 걸친 채 몸을 크게 숙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데 저러니 정말 작군. 우르크 두 마리가 동시에 글레이브를 찔렀다. 그러나 그 드워프는 어깨에 멘 배틀 액스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크게 휘둘러 두 개의 글레이브를 동시에 쳐버렸다. 놀랍게도 두 개의 글레이브가 모두 부러져버렸다. 그때 뭔가가 그 드워프의 등에 뛰어올랐다.

“뭐야!”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은 그 드워프 바로 뒤로 달려가다가 드워프가 글레이브를 튕긴 순간 드워프의 등을 밟으며 앞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무방비 상 태의 우르크들을 양쪽의 검으로 동시에 찔렀다. 우와, 대단한 합동 작전이군. 하지만 합동 작전의 의사가 있었던 것은 이루릴뿐인가 보다.

“어딜 밟아!”

이루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던 우르크에게 달려들었다. 우르크는 거친 동작으로 글레이브를 찔러들어 왔지만 이루릴은 살짝 몸을 돌 리며 오른발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오른손의 에스터크로 글레이브를 쳐내리고 그대로 빙글 몸을 돌렸다. 마치 춤추듯이 우아한 동작으로 이루릴과 그 우르크가 서로 등을 맞대었다고 느낀 순간, 그놈은 숨막히는 비명을 질렀다.

“취이엑!”

이루릴은 자신의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왼손의 망고슈를 찔러넣어 등 뒤의 우르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몸을 다시 반대쪽으로 돌려 망고슈를 뽑 으며 왼쪽 어깨로 우르크의 등을 쳤다. 그러자 우르크는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보자, 내가 둘, 칼이 하나, 그리고 이루릴이 셋, 그러면 셋이 남아 있어야 되는데, 그놈들은 어디로 갔지? 어느새 샌슨은 그 세 놈의 우르크를 쓰러뜨 려 놓고는 롱소드를 닦고 있었다. 드워프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투덜거렸다.

“뭐야? 자네들 괴물인가? 나는 한 놈도 못 잡았군.”

이루릴은 별 표정 없이 수건을 꺼내어 검을 닦았다. 언젠가 발러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한 일에 아무런 감동이 없는 동작이었다. 싸움………… 흥분되 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마치 매일 하는 식사나 세수라도 마친 것처럼 별 감동이 없어 보이는걸. 흐음. 어쩌면 대단히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을지도 모 르지. 하긴 나이가 120살이라니 1년에 한 번씩만 싸워도 100번은 넘게 싸웠겠다. 그에 비해 나는 나무에 기댄 채로 허리의 통증을 참고 있느라 별로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어떠냐? 난 우연히 OPG를 가지게 된 초장이일 뿐이야.

샌슨은 참 보기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주무르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아. 넌 다른 사람은 도저히 못하는 이상한 동작도 할 수 있지만 고통도 안 느끼는 것은 아니야. 힘이 아무리 강해도 기본기를 써야지.”

“아, 내가 언제 검 쓰는 거 배웠어?”

“검 쓰는 건 주먹 쓰는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네가 검이라는 것을 너무 의식하고 그 날을 맞춰야 된다거나 그 끝을 찔러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한 동작을 만드는 거야. 네가 주먹 쓸 때 두 번이나 돌면서 주먹을 쓰냐? 주먹을 빙빙 돌리다가 치냐?”

“어, 그런가?”

“어떤 병기든 병기는 모두 팔의 연장선이야. 그러니 검술 기술과 비슷한 것이 창술에서도 보이고 그러는 거지. 상식적으로 싸워라.”

나는 샌슨의 말에 풀이 죽었다. 내가 그렇게 상식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그때 이루릴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기술이 떠올랐다.

“어, 하지만 이루릴은 겨드랑이 사이로 뒤를 찌르던데. 주먹을 겨드랑이 사이로 찌르는 사람은 없잖아?”

“그거야 검 쓰는 기본은 익힌 다음 검 자체를 익히는 사람의 이야기지. 그렇게 되면 두 번씩 끊어 치는 것이나 너처럼 회전치기를 하거나 하는 거 지.”

흠. 그렇단 말이지? 어쨌든 허리는 이제 좀 괜찮은 것 같군. 나는 슬며시 나무에서 등을 떼며 일어났다. 이루릴 쪽을 바라보니 이루릴은 배낭을 뒤적 거리고 있었고 그 드워프는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람! 꼴이 우습군! 내가 제일 열심히 싸우려고 해놓고선 한 놈도 못 잡았어.”

칼은 미소를 지으며 그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경황중이라 인사도 못 드렸군요. 저는 칼이라고 합니다.”

“엑셀핸드 아인델프.”

“아, 아인델프 씨.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돕기는 뭘 도와! 한 놈도 못 잡았는데.”

칼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들이 웃으며 다가가 각자 소개를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배낭을 뒤적거리던 이루릴은 여전히 우 리는 본체만체하고 뭔가를 꺼내어 걸어갔다. 엑셀핸드는 버럭 화를 내었다.

“이봐! 드워프와는 상종도 안할 텐가!”

이루릴은 고개를 들어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예?”

“왜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건네지 않는 거야?”

“제 이름은 그분들이 아니까 말씀드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엑셀핸드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왜 직접 하지는 않고? 말도 하기 싫단 말인가!”

“좀 바빠서요. 전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그러고는 이루릴은 빙글 돌아서 쓰러진 우르크에게 다가갔다. 엑셀핸드는 노기를 띠고 이루릴에게 걸어갔고 우리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에게 다가가 보았다. 이루릴은 작은 약병 같은 것을 우르크의 입에 가져가서 먹였고 그러자 우르크는 긴 한숨을 토했다. 그놈은 이루릴에게 등을 찔린 놈 이었는데, 이루릴은 등의 상처에도 약을 흘렸다. 놀랍게도 등의 상처가 사라지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놀라서 말했다.

“뭐, 뭐야? 왜 살려내는 거야!”

“계곡을 건너지 않을 건가요?”

엑셀핸드는 입을 쩍 벌렸다. 그렇군. 12인의 다리니까 네 명이 더 있어야 건널 수 있다. 그러면 이루릴은 네 명을 치료하여 같이 건널 생각인가? 의 외로 냉철하네. 이루릴은 내게 말했다.

“이들의 무기를 절벽 아래로 던져주세요. 샌슨은 절 도와주시고.”

나는 글레이브를 모아 절벽 아래로 던졌다. 돌아와보니 이루릴은 다섯 마리의 우르크를 치료해 놓았다. 어? 왜 다섯이지? 우르크들은 비무장인 데다 가 바로 앞에서 샌슨이 롱소드를 뽑아들고 있었고 그 옆에선 엑셀핸드가 ‘난 한 놈도 못 잡았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해볼까?’ 등의 말을 하고 있자 질 려 있는 상태였다.

이루릴은 말했다.

“당신들과 저 인간들 사이의 일은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계곡을 건너는 일. 지금 당신들을 치료했으니 건널 수 있지만 당신들이 거절하면 그건 어렵겠지요.”

꽤 정중하게 말하네? 거의 우리에게 말하던 것처럼. 그거 나쁠 것은 없지만 조금 전 그렇게 냉혹하고 차분하게 공격해 놓고 여전히 차분하게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인간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감정이 없나? 아니면 우리와는 다르게 표현하나?

“그래서 제의합니다. 인원을 맞추도록 도와주세요. 그럼 당신들에게 남은 동료들을 치료할 약을 주겠습니다.”

우르크들은 눈을 크게 떴다.

“취이익! 저,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취익취익, 거, 건너가면 죽일 것 아닌가? 취치익!”

이루릴은 별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당신들은 어떻게든 내 말을 따르는 것이 이익일 텐데요. 인원을 맞추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필요 없으니 저 드워프분께 신병을 넘기 겠어요. 하지만 같이 건너주면 남은 동료들을 치료할 약도 주겠다는 거예요. 차분히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텐데요.”

저렇게 말하면 차분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다.

“취익! 그런데 건너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돌아와? 취익! 돌아오지 못하면 약은 소용이 없다!”

“당신들 다섯을 치료했잖아요. 하나는 남아요. 남은 분에게 약을 드리고 건너지요. 그러면 남은 우르크가 다친 동료들을 치료할 수 있겠지요.” 우와…………, 졌다! 정말 머리가 잘 도는군. 엑셀핸드는 처음부터 입을 쩍 벌린 채 놀라고 있었다. 우르크들도 숫자를 세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취익! 좋아. 할 수 없군. 취이이이익!”

이루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우르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린 친구인가요?”

윽! 쓰러질 뻔했다. 나만이 저 말의 깊은 뜻을 조금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나 드워프, 우르크들은 완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우르크는 하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거칠게 외쳤다.

“취치익! 천만에! 취익취익! 지금은 힘이 없어 말을 듣지만, 취익! 이 앙갚음은 반드시 할 것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당신과는 다르군요. 후치.”

“….그러네요.”

오크 네 마리와 우리 일행, 그리고 이루릴과 엑셀핸드는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이루릴은 열두 명이 나란히 서게 되자 나직이 말했다.

“약속대로 여기 열두 명이 모였습니다. 계곡을 건너도록 해주세요.”

나와 샌슨은 좀더 앞에서 구경하려다가 떨어질 뻔했다. 이루릴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중에 떠 있던 그 뗏목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그 뗏목은 우리들이 서 있는 절벽에 조용히 닿았고 나는 겁먹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엑셀핸드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올라탔다. 뗏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칼이 올라탔고 나는 조심스럽게 한 발만 먼저 디딘 다음 천 천히 다른 발을 얹었다. 이거 이대로 떨어지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 뗏목은 흔들림 하나 없이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하늘을 노려보았다. 샌슨도 좀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 말들을 끌고 올라탔다. 말들은 조금씩 반항하며 멈칫거렸지만 샌슨이 살살 달래서 간 신히 다 태웠다.

이루릴은 네 마리의 우르크까지 다 오르고 나자 남아 있는 하나의 우르크에게 약병을 건네었다.

“까다로울 것은 없고, 적당히 먹이면 돼요. 상처가 심하면 상처에도 발라야 하지만 상처가 가장 심한 분들은 제가 다 치료했으니 그냥 먹이기만 하 면 돼요.”

우르크는 별 대답도 하지 않고 약병을 낚아채 들고는 쓰러진 우르크에게 달려갔다. 이루릴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뗏목 위에 올라탔다. 이루릴이 오름으로서 열둘이 차자마자 뗏목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섬쩍지근해서 난간을 꽉 잡으며 하늘을 계속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 들도 뗏목이 움직이자 크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히힝! 힝힝힝! 푸르르르!”

샌슨은 말을 달랬지만 쉽지 않았다.

“어, 워이! 야, 지금은 좀 가만히 있어! 워워!”

말들이 발을 구르는데도 뗏목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보고 있는 다른 탑승자들로서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꼭 뒤집힐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그때 이루릴이 말들에게 다가갔다.

이루릴은 뺨을 가운데 말의 얼굴에 대고 양손을 각자 다른 말의 뺨에 가져다대었다. 한꺼번에 세 마리의 말을 포옹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낮 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해요. 진정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놀랍게도 말들은 진정하기 시작했다. 칼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좀 도가 지나친 흠모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도 꽤 놀랐지만, 오금이 저려서 뭐라고 칭찬해 줄 기분도 안 난다. 그 광경을 보다가 그만 아래의 광경을 봐버린 것이다.

우와, 살 떨리네!

까마득한 절벽. 그 절벽들 사이로 급류의 거친 흐름을 바로 위에서 보고 있자니 눈이 빙빙 돌았다. 물결은 휘말려 들어오고 뿌리쳐 솟아오르고 다시 사정없이 떨어지며 절벽을 할퀴었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살짝 흩날렸다. 바람? 이루릴은 바람을 뺨으로 느껴보듯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쏴아아아……………

양쪽 절벽의 숲에서 낙엽이 흩날려 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단풍잎, 노랗게 물든 은행잎도 날아올랐다. 마치 무엇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듯 낙엽들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낙엽들은 계곡 사이로 부는 바람을 타고 비스듬히 떨어지며 춤을 추었다. 사방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낙엽이 휘날렸다.

우리들은 낙엽의 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떠가고, 날고, 돌고,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람과 더불어 춤을 출 수 있는데 떨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나에겐 낙엽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라라라라. 사라라라라.

이윽고 공중에 마지막 한 잎이 길게 휘날렸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은 저것뿐이다. 조금 전이 낙엽의 군무라면 저것은 독무. 그 낙엽은 작았지만 선명한 붉은색으로 푸른 하늘 아래에서 춤추고 있었다. 떠가고, 날고, 돌고,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 내릴 거야?”

샌슨이 내 어깨를 툭 쳐서 나는 간신히 뗏목에서 내렸다. 이런, 또 노래를 만들고 있었군. 조금 전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번 더 타고 싶 은 마음이 굴뚝 같다.

샌슨을 도와 말들을 모두 내렸다. 건너편에서는 약을 마신 우르크들이 일어나서는 우리를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욕설이라도 한바탕 하려는 줄 알았 는데 의외로 조용하군. 아, 여기 인질이 될 우르크 넷이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저놈들은 다른 오크들과 또 다른 차이점이 있군. 동료를 생각할 줄 아는 모양인데.

우리와 함께 절벽을 건넌 우르크들은 뗏목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고 엑셀핸드는 배틀 액스를 다시 얼굴 앞에 들어올려 그 날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비무장이고, 우리 요구를 들어준 우르크들을 과연 공격할 것인가? 가만히 관찰해 봄직도 하지만 이루릴이 먼저 말했다.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리다가 다른 여행자들이 나타나면 동료와 합류하세요. 그러려면 절대 약속을 지켜 싸우지 않아야 되겠지요?”

“상관 마! 엘프! 취이이칫!”

이놈들이 다시 합류하려면 어렵겠군. 이 12인의 다리는 그 취지는 썩 좋지만 역시 불편한 다리로군. 그 불편함 때문에라도 이종족끼리 싸우지 말라 는 뜻인가 보다. 그때 난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봐? 저기 동료들과 합류해야지? 그리고 우리들도 너희들을 뒤통수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진 않아.”

우르크들은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건너가도록 해줄까?”

“어, 어떻게 말인가? 취익!”

난 대답 없이 절벽 반대쪽에 고함을 질렀다.

“이봐! 정신 똑똑히 차리고 잘 받아봐!”

우르크들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난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우르크를 잡아 들어올렸다. 내 머리 위로 들어올려진 그 우르크는 비명을 질렀다.

“뭐, 뭣, 취치익! 뭐하는 거냐!”

“걱정 마. 제일 처음이 어려워. 거기 그쪽! 정신 단단히 차려! 물러나면 안 돼!”

그리고 난 우르크를 집어던졌다. 물론 그대로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난 신중히 겨냥해서 그 우르크들이 정확히 받을 수 있게 살짝 던졌다. 60큐빗 거리고 다리 쪽을 앞으로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수평에 가깝게 던졌기 때문에 혹시 받아내지 못하더라도 목이 부러지지 는 않을 것이다.

난 살짝 던졌지만 우르크의 몸이 그렇게 작은 것은 아니다. 날아가는 우르크는 괴성을 지르며 허우적거리다가 내가 의도한 대로 정확히 다섯 마리의 우르크에게 나가떨어졌고 그대로 여섯 마리는 데굴데굴 굴러갔다. 혹시 다치지 않았나 살펴봤지만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

난 빙긋 웃으며 남아 있는 세 마리의 우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놈들은 퍼렇게 질려 주춤거리고 있었다. 좀 안심시켜야겠군.

“이봐. 조금 전에 봤잖아? 처음이 어려울 뿐이야. 갈수록 받아내는 인원이 많아서 안전해진다고.”

그러자 우르크들은 서로 나중에 던져지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어쨌든 마지막 한 놈까지 절벽 너머로 던져주었다. 마지막 놈은 불안을 상당히 털어내어 거의 즐기면서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놈은 똑똑히 볼 수 있 도록 머리부터 던져달라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위험해서 역시 다리를 앞으로 해서 던졌다. 그래야 못 받아내더라도 엉덩이가 좀 까지 고 말 테니까.

다 던져주는 동안 내 주위의 일행들도 모두 긴장 속에 그 광경을 즐겼다. 어어어……………, 됐어! 어어어…………, 좋았어! 뭐 이런 식이다. 이루릴도 두 손을 모아쥐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안전하게 넘어가면 한숨을 쉬고는 했다. 우르크들도 날려가고 받아내고 하는 동안 대단히 흥분해 버려서 꽤 소란스 러워졌다. 그놈들은 이제 웃기까지 하면서 좋아했다. 그놈들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제일 마지막에 던져질 수 있었던 놈이라서 그렇게 판단했다)이 절벽 가장 자리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뭐, 고맙다고 말은 해두겠다! 취익!”

“도움이 됐다니 나도 기쁘군.”

“너 같은 괴물은 더 이상 쫓지 않겠다! 취익! 우린 투사 우르크! 적에게 더 이상 자비를, 취익! 구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래? 그럼 나도 고맙지. 그런데 오크들의 의뢰는?”

“그깟 허약한 놈들, 취익! 의뢰라니, 부탁이지! 취익! 거절해 버리면 돼!”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들 사이라면 저것은 몹시 불쾌한 말이겠지만 오크들끼리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가 있나. 난 손을 저어주고 몸을 돌렸 다.

이루릴은 내게 말했다.

“당신은 이 12인의 다리의 의미를 무시해 버리는군요. 난 저들이 또 다른 종족과 협력을 해야 이 다리를 도로 건너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러면 저들은 협력과 화해의 의미를 배웠겠지요. 우리는 싸움 후에야 건널 수 있었지만, 저들이라도 그것을 배운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가요?”

이루릴은 비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단조롭게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12인의 다리의 취지는 가장 적절하게 이행한 것 같군요. 방금 싸웠던 우르크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어냈으니, 이 다리의 건설자 라도 다리가 소용없어졌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죠.”

“당신은 이제 저 우르크들의 친구인 것 같군요.”

이 엘프 아가씨 좀 끈덕진 데가 있군. 내가 모든 종족과 친구가 되길 바라는 사람으로 보이나 본데, 난 그런 거 모른다. 난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 보이자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네드발…………, 맙소사! 드디어 내가 나 스스로 이걸 인정해 버리는구나! 난 이제 끝장이야! 엑셀핸드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봐, 한 번쯤은 실수할 수도 있지 않았나?”

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네 번 모두 실수해서 안전하게 넘겨주었죠.”

“푸하하하! 덕택에 오늘은 정말 보기 드문 걸 보게 되었네. 고맙군. 자네들의 여정에 카리스 누멘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네.”

카리스 누멘…………. 난 간신히 칼에게서 드워프들이 섬기는 이 신의 이름을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런데 이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난 칼을 흘끔 바라봤고 역시 칼이 적절하게 대답했다.

“그 모루와 망치의 불꽃의 정수가 그대에게.”

엑셀핸드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자기 짐을 들어올렸다. 거창한 배낭을 메고 그 배틀 액스의 도끼날에는 가죽으로 된 커 버를 씌우고 나서 허리띠에 꽂았다. 꽤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데 태연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루릴은 우리 일행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작별 인 사를 할 차례인가? 그런데 난 그때 샌슨이 ‘난 지금 엄청난 용기를 짜내고 있다!’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샌슨은 주저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불가사의하군.

“이루릴 양의 여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어떤 필요라도?”

윽. 괴상한 답변이군. 내 여정을 당신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인 것 같은데, 그 뜻을 보자면 불쾌할 것도 같지만 이루릴은 그저 궁금하다 는 듯이 물어왔다.

“동행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말이 없군요.”

샌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와 말이 함께 후치에 타면 됩니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나에게 어쩌겠다고? 칼도 당황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고 엑셀핸드는 벌써 배를 잡고 웃기 시 작했다. 샌슨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얼굴을 확 붉히면서 말을 바꿨다.

“아, 아니 저와 후치가 함께 말에 타면………….”

“푸하하하!”

난 데굴데굴 굴렀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여러분의 목적은 여러분들의 국왕님께 있지요. 급하실 텐데요. 전 그렇게 급하지 않아요.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불쌍한 샌슨은 이번에도 말을 실수했고, 그래서 이루릴이 칼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숲 속으로 조용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이 벌게 져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난 어느새 엑셀핸드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면서 웃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숨이 넘어갈 듯이 말했다.

“뭐, 뭐 말과 함께 너에게 타겠다고………… 우헷헤헤헷!”

“마, 말을 태우고 다, 달려야 되나? 으하하하핫!”

엑셀핸드는 우리와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웃고,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웃고 했다. 어쨌든 우린 말을 타고 있는지라 먼저 달려 오게 되었고, 우리 등 뒤로는 엑셀핸드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그때마다 샌슨은 죽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칼에게 말을 걸었다. 샌슨은 도저히 내 말을 받아줄 상태가 아니었다.

“칼! 12인의 다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좋은 취지라고 생각하지만 불편을 통해서 화해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친해지기 어려운 종족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도 줘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보통 다리도 놓을 수 있 었을 거예요. 하지만 일부러 저런 다리를 놨다는 것은………….”

“맞네. 네드발 군.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길. 좋은 의미지. 저 다리에서는 협력이라는 것이 하나의 수단으로 변질되는군. 진정한 협력

은 이유 없이 발현되어야 된다고 보는데.”

난 칼의 말을 세 번쯤 다시 생각해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그건 너무 낭만적인데요.”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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