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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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7화

7

실프가 공중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감성은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이성은 갑자기 마구 소용돌이치는 바람으로 느껴졌다.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흩날렸다. 꼭 보리밭 위에 바람이 불 때의 모습 같다. 사라락거리며 흩날려도 어지럽지 않다. 부드럽게 물결칠 뿐이다. 나는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앞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람을 맞으며 옷을 펄럭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몸무게가 가벼워진 사병들은 마치 종이 조각이 소용돌이에 빨려 올라가듯이 휘 날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병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실프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이상하게 들렸다.

“으아아….. 까르르………… 꺄아아…… 오호호호!”

시민들은 모두 얼이 빠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여관 주인 쉐린은 자기 하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다리가 풀리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 하인도 몸의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대경실색한 모습으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다시 이를 악물었다. 이루릴은 병사들은 실프에게 맡겨둔 채 가만히 서서 아프나이델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평온했고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실리키안 남작이라는 그 친구는 이미 사 라지고 정원에는 아프나이델만이 남아 있었다. 남작은 어디로 간 거지? 아프나이델은 고함을 질렀다.

“이 더러운 엘프! 마법은 인간의 것이다! 인간에게 훔쳐 배운 주제에 감히?”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이죠.”

“닥쳐라!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의 지팡이를 걸고!”

허공에서는 병사들이 낙엽처럼 흩날리고 있었고 넓은 정원에는 소용돌이치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의 한가운데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분노하는 마법 사와 침착한 엘프가 마주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내가 흥분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아프나이델은 다시 품속에 손을 넣었다. 도대체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는 거지? 그는 이번엔 붉은 천을 꺼내었다. 얼씨구. 그 는 천을 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서몬 스웜!”

그러면서 아프나이델은 붉은 천을 깃발 휘두르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그 천조각 뒤에서 갑자기 시커먼 것이 튀어나왔다.

“찌르르르! 찌륵! 찍찍찍, 찌르르르!”

맙소사, 박쥐다! 박쥐가 수십 마리나 나왔다. 나는 질겁을 하며 물러났다. 박쥐들은 곧장 이루릴에게 날아들었다. 끔찍스럽기 짝이 없는데, 이루릴은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박쥐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서 있는 과녁인 이루릴에게 쉽게 접근했다. 그리고 박쥐들로 이루어진 검은 구름이 이루릴의 상체를 휘감았 다. 나는 악을 썼다.

“이루리이일!”

“왜 부르지요?”

이러면 너무 싱겁잖아. 난 의아해져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쥐들은 이루릴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이루릴의 어깨에 앉거나 머리에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루릴은 두 팔을 앞으로 들어 박쥐들이 매달리기 좋게 해주기 까지 하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낮에 나왔으니… 눈도 아플 테고. 별로 괜찮지 않겠지요.”

“아, 아니, 당신이오!”

“예? 전…… 팔이 조금 무겁군요. 냄새도 나쁘고.”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난 내가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하지만 비둘기나 꾀꼬리, 휘파람새 같은 예쁜 새들이 아니라 시커먼 털이 빽빽이 난 박쥐들에 둘러싸인 이루릴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쥐들 중 어떤 놈은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 사이로 파고들기 까지 하고 있는데,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오래간만에 불러보는군요. 어쨌든 당신이 돌보시는 것들은 전부 왜 이렇습니까? 어 쩌자고 저 엘프는 박쥐에 둘러싸여도 아름답습니까?

이루릴은 팔에 매달린 놈들 중 하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쌍해라….. 낮에 나오다니, 햇빛은 너희들에게 너무 괴롭겠지. 가렴. 너희들의 동굴로 돌아가.”

그러자 박쥐들은 일제히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잠시 정원에는 하늘을 가린 박쥐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였고 시민들의 비명이 조금 시끄러

웠지만 박쥐들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이루릴은 박쥐들이 사라지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날 공격할 줄 알았는데, 왜 박쥐들을 불러내어 괴롭히죠?”

나는 도저히 못 참고 샌슨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샌슨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고 있었다.

“큭, 크크크, 프흐흐흐. 우하하하하!”

우리는 서로 매달려서 킬킬거렸다. 불쌍한 아프나이델은 덜덜 떨고 있었다.

“아냐! 아냐! 이럴 수는 없어. 넌, 넌 방어 마법도 쓰지 않았고 현혹 마법도 쓰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내 박쥐들이…………….”

“잠깐, 기다리죠.”

이루릴은 아프나이델의 말을 끊더니 아직까지 멋지게 흩날리고 있는 공중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그들과의 춤은 재미있었나요? 이제 그들을 내려줘요.”

병사들이 마치 낙엽 떨어지듯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더 공포스럽다는 듯이 악을 쓰고 있었고 그래서 꽤 소란스 러웠다. 뭐가 무서운 거야? 천천히 떨어지는구만.

“조심해요!”

샌슨의 고함소리, 뭐야? 이런, 저 죽일 놈! 이루릴이 공중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아프나이델이 뭔가 빠르게 캐스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다른 때보다 훨씬 캐스팅 타임이 길었다. 이루릴은 샌슨의 주의를 듣고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불안이 떠올랐 다. 그녀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더니 앞으로 나섰다. 난 고향에서 저런 눈빛을 띤 채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를 막아주기 위해…….

“이루릴!”

이루릴도 아프나이델에 맞서 캐스트를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온몸으로 땀을 비오듯이 쏟고 있었다.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고 팔은 부들부 들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앞의 장난 같은 마법이 아닌 모양이다. 샌슨과 나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캐스트를 끝내고는 품속에서 시커멓고 작은 공 같은 것을 꺼내어 던졌다.

“받아라! 파이어볼!”

오, 맙소사!

아프나이델이 던진 시커먼 공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더니 거대한 불덩이가 나타났다. 거의 사람만 한 크기의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나타나더니 곧장 이루릴에게 날아들었다. 공기가 타오르는 무서운 소리가 들린다. 화르르르르, 열풍에 머리카락이 그슬리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루릴도 그때 캐스 트를 끝내었다.

“월 오브 아이스.”

쫘작! 촤아아아악!

눈 앞에 거대한 얼음벽이 나타났다. 얼음벽 때문에 시야가 가렸지만 엄청난 폭음은 잘 들렸다. 콰아아앙!

얼음벽이 쪼개지며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튕겼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려 눈은 다치지 않았지만 팔에는 마치 채찍으로 맞은 듯한 느낌이 왔다. “으으윽.”

팔을 내려보니 두 팔에는 모두 날카로운 상처가 가득 생겼다. 그리고 눈앞의 얼음벽은 사라졌고 거기에는 굉장한 수증기의 구름이 만들어졌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루릴은 그 수증기의 구름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루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이루릴을 불렀다.

“이, 이루릴?”

그리고 조금 후, 뭔가 둔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무엇이 땅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샌슨과 나는 눈앞을 마구 저으며 구름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 다. 그러다가 나는 뭔가 물컹하는 것을 밟았고 샌슨은 무엇과 부딪혀버렸다. 샌슨이 비명을 질렀다.

“아앗! 죄, 죄송합니다!”

샌슨은 이루릴을 껴안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물러나며 코가 땅에 닿을 듯이 절을 했다. 그리고 내가 밟고 있는 것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어, 어라?”

“머리를 쳐서 기절시켰어요. 참 위험한 인간이군요.”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자를 살펴봤다. 밟아도 모를 정도니 완전히 기절한 모양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망이었다. 저택의 꽃과 풀들은 얼음과 불이 충돌하며 일어난 폭풍으로 산산이 흩어져 있었고 그 둘이 충돌한 지점에는 땅에 구덩이가 파여 있을 정도였다. 저쪽에 있던 칼은 한숨을 쉬며 걸어오고 있었고 쉐린과 마을 시민들도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 들아, 우리가 더 황당해. 조용히 대화로 해결하려고 포로들까지 얌전히 데리고 왔는데 대접이 너무 과격하잖아.

칼은 우리를 둘러보고 다시 쓰러진 아프나이델을 보더니 말했다.

“이래서야, 점잖은 대화를 바라는 것은 어렵겠군. 그래도 할 수 없지. 남작을 찾아보자. 이 피해에 대해 보상해 달라고 하면 어쩌지?”

“그때는 사정 보지 않고 그놈을 화장실에 처박아 주죠.”

칼은 빙긋 웃었다.

“네드발 군…………, 그 의견이 매력적으로 들리네만, 그래도 그래선 안 되지.”

그때 뒤에 있던 시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저놈들이다! 저놈들이 내 하인들을 구타하고 내 고문인 아프나이델을 살해했어!”

저 목소리를 안다. 그런데 저 내용은 참 기분 나쁘군. 우리는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실리키안 남작과 20여 명의 병사들이 뛰어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공중으로 날려갔던 사병들도 다 땅에 내려온 데다가 페더 폴이 풀려서 모두 정상적으로 서 있었다. 달려온 병사들은 가죽 갑옷에다 포차드를 들고 있었고 그중 롱소드를 차고 있는 자가 우두머리 로 보였다. 병사들이 일제히 좍 늘어서 우리를 포위하자 그 우두머리는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본관은 레너스 시 경비 대장 레넌 위스터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을 무단 침입, 기물 파손, 폭력 행위 및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샌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죄명이 성립되지?”

“레너스 시민 실리키안 남작의 저택에 무단 침입했고, 그 정원을 파손했으며, 그 하인들을 구타하고 남작가의 고문인 아프나이델을 살해했다.”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샌슨을 밀치며 말했다.

“이봐요. 최소한 마지막 것은 빼자고요. 아프나이델이라는 이 마법사는 죽지 않았으니까.”

레넌 위스터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는 그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군. 하지만 앞의 죄목은……”

“그것도 순서대로 빼보지요. 폭력 행위라, 그건 정당 방어였지. 이 작자들이 먼저 마구 마법을 쓰고 공격을 감행했거든요. 기물 파손도 그 때문에 일 어난 것이고. 그리고 무단 침입이라. 분명히 우리가 들어올 때 저 남작은 ‘손님들, 내 집에 어서 오시게.’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무단 침입이 될 수 없 죠?”

레넌은 당황한 얼굴로 실리키안을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실리키안 남작은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무슨 당치 않은 수작을! 이봐, 레넌! 뭘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봉급을 받는지 까먹었나? 어서 저놈들을 체포해!”

레넌은 다부진 표정으로 실리키안 남작을 노려보았다.

“전 시청의 공복으로 시에서 봉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드리지요.”

“이놈이!”

“하지만 당신이 고발하신 이상 이들을 체포하기는 하겠습니다. 이봐. 고발이 들어왔으니 일단 조사해야 된다. 모두 무기를 내놓고 순순히 우리를 따 라오도록.”

어, 사리에 맞게 말하는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이봐요. 저 작자는 정식으로 고발장을 제출한 겁니까?”

레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구두 고발이다. 정식 고발이라고는 할 수 없지. 따라서 당신들을 체포하는 것은 아니다. 동행 조사다.”

“그러면 우리도 저 작자를 구두로 고발하지요. 죄명은 무고죄. 저 작자도 우리와 함께 데려가요.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도 못 가요.”

칼은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샌슨은 감탄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흠, 내 입에 대해서는 나도 기특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레넌이라는 그 경비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실리키안 남작, 저와 함께 가실까요?”

“뭐라고! 이 자식이 돌았나! 네놈이 날 체포하겠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체포가 아니라 동행 조사입니다. 순순히 따라주시면…………”

쫙! 굉장한 소리. 실리키안 남작은 레넌 위스터의 뺨을 갈겼다. 우리들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넌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부들부들 떨면서 실리키안 남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리키안 남작은 크게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이 버릇없는 놈! 감히 네가 날 체포하겠다고? 서푼짜리 경비 대장 자리에 기고만장해서 아래 위도 모르고! 네녀석이 평소 하는 행실로 보아 오래 가

지 못할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대체 예절도 모르고 인사를 차릴 줄도 몰랐지! 내 이놈을 그냥………….”

실리키안 남작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쫙! 레넌이 멋지게 실리키안 남작의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실리키안 남작은 나동그라졌다.

“저 사람들은 동행 조사이지만, 당신은 이제 체포하겠습니다. 공무원 폭행과 공무원 모독, 공무 집행 방해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실리키안 남작은 쓰러진 채 그 말을 듣더니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 저, 저놈을 잡아!”

땅에 내려와 있던 실리키안의 사병들이 그제야 핼버드를 꼬나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레넌도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고 시의 경비 대원들은 포 차드를 앞으로 들어올렸다. 레넌은 낮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내려라! 감히 시 경비대에게 무기를 겨누느냐!”

사병들은 거칠게 쏘아붙였다.

“시 경비대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시 경비대야? 우린 돈 받는 사람 말만 들으면 돼!”

이런, 안 되겠군. 20대 30으로 시 경비대 쪽이 불리하다. 샌슨과 나는 눈길을 마주치고는 곧장 레넌 옆으로 다가섰다. 이루릴과 칼도 천천히 레넌 옆으로 가서 섰다.

우리들이 앞으로 나서자 사병들은 주춤거렸다. 그들은 특히 이루릴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조금 전 공중에서 이루릴이 마법을 쓰는 장면을 잘 목격했을 테니까. 나는 이루릴에게 속삭였다.

“뭔가 겁날 말을 하세요! 저들은 당신을 두려워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한발 나섰다. 그러자 사병들도 한발 뒤로 물러났다. 좋아, 멋지군. 레넌은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 한 명이 30여 명의 사병들을 위압하고 있는 것을 보자 입을 딱 벌렸다.

이루릴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사병들은 주춤거리며 마치 이루릴의 말에 밀린 듯이 더 물러났다. 훌륭하다! 그런데 이루릴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뒤로 다시 물러나 더니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하지요?”

으아아, 그랑엘베르여! 나는 머리를 내두르며 무조건 고함질렀다.

“어이! 이 아가씨가 당신들 몇 명을 죽일까 물어오는데, 뭐라고 대답할까?”

사병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거짓말을?”

정말 손발 안 맞네! 나는 계속 무턱대고 외쳤다.

“쳇, 그 끔찍한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고요!”

이루릴은 이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질문이 끔찍했던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사병들은 제각기 취향대로 이루릴의 ‘그 끔찍 한말’에 대해 상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이봐! 어차피 실리키안 남작은 체포된다! 그런데 너희들이 이 경비대에 반항하면 실리키안 남작의 죄가 더 무거워진단 말이야! 남작은 시의 공적(公 敵)이 될 테고 그러면 너희들도 시의 공적이 된다! 도망자로 살아남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니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경비대에 협력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실리키안 남작의 죄가 가벼워진다!”

사병들은 급하게 서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그들은 곧 실리키안 남작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작은 악을 썼다.

“이, 이 쳐죽일 놈들아!”

“저, 남작님. 저 꼬마 말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반항하면 남작님 죄가 더 무거워져요. 그러니까 우린 남작님을 위해서라도 정중히 경비대에 체포되 도록 해야겠습니다.”

“뭐, 뭐라고! 이놈들이 찢어진 입이라고!”

그 광경을 보며 난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칼이 말했다.

“네드발 군. 자네가 이렇게 임기응변에 강할 줄은 미처 몰랐네.”

“나도 몰랐어요.”

“나도 몰랐다. 욘석아! 제법이네.”

샌슨이 내 머리를 헤집으며 웃었다. 실리키안 남작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주로 사병들에 대한 욕지거리와 레넌, 나, 기타 등등 주위의 모든 사 람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그러니 도저히 자기 편을 만들 수가 없지. 사병들은 두말하지 않고 실리키안 남작을 시 경비대에게 넘겨버렸다. 레넌은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조력에는 감사한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라…………….”

“가죠, 뭐.”

샌슨과 칼도 모두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쉐린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12인의 여관 마스터인 쉐린입니다. 제가 목격자로 따라가겠습니다!”

레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쉐린은 자기 말고도 하인과 몇 명의 시민들을 더 불러들였다. 그 다음 우리 일행은 모두 레너스 시 경비대를 따라 시청으로 향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쇠창살로 돌진했다. 그러나 쇠창살이 휘어지는 대신 내가 나동그라졌다. 제기, OPG가 없지. 샌슨은 날 보며 말했다.

“탈옥하면 완전히 죄수가 되지. 후치.”

“칵! 지금은 죄수 취급 아냐?”

샌슨은 여전히 풀죽은 얼굴로 구석에 앉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칼도 언짢은 표정으로 면회를 온 쉐린에게 말했다.

“그럼, 그 레넌이라는 경비 대장은?”

“직무 태만으로 감봉 처분되었습니다.”

“맙소사. 직무 태만이라고요?”

“저도 어이가 없군요.”

쉐린은 말을 전해 주는 자신이 더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발악을 하며 쇠창살을 다시 쥐고 흔들어대었지만 샌슨이 엉덩이를 걷 어차는 바람에 또 나뒹굴었다.

“이 자식아! 돼지 새끼처럼 툴툴거리지 말고 얌전히 못 있어?”

“이런 억울한 경우를 당했는데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그러자 쉐린을 따라온 유스네가 날 불렀다.

“저, 후치……, 이거 마셔. 나 다른 것은 해줄 게 없고, 숨겨 들어오기 힘들었어. 그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서 유스네는 품속에서 작은 수통을 꺼내어 주었다. 내가 술주정뱅인 줄 아느냐, 누명을 뒤집어쓴 채 생전 처음으로 감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등등으로 외치면서도 나는 그 수통을 받아들었다. 유스네는 그런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수통 뚜껑을 여는 순간 현기증이 핑 올랐다. 장난이 아니게 도수가 셀 것 같은데. 나는 한 모금 마시고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샌슨에게 줘 버렸다. 샌슨도 수통에 코를 가져다대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확확 달아오르는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마어마한 놈을 숨겨왔군. 고마워, 유스네.”

“화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말 이럴 수는 없다. 우리는 시청으로 오자마자 모든 무기를 빼앗기고 나는 OPG도 빼앗기고 그대로 감옥에 처넣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일 단 구속하고 조사가 끝나면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생전 처음 감옥 구경한다고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대로 아무 소식도 없이 이렇게 이틀째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쉐린이 면회를 와서 한다는 말이, 실리키안이라는 그 가짜 남작은 이미 풀려났으며 그를 체포한 레넌 경비 대장은 징계를 받았 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청에서는 우릴 조사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쉐린은 아마 실리키안 남작의 지시에 따라 우리의 처리 방식이 정 해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말했다.

“잠깐, 이루릴은? 이루릴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루릴은 엘프니까 가둘 수 없잖아요?”

쉐린은 침울하게 말했다.

“그 엘프분은 바이서스의 시민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불명확한 죄목으로 갇혀 있는 셈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죄인 명부에 올라 있지도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죄수인 셈이죠. 저희도 사실은 면회를 온 게 아니고, 감옥 답 사를 왔을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제에기…………….”

“여러분은 좀 낫습니다. 그 엘프분은 면회도 못하게 하더군요. 간수들에게 듣자니 그분은 이 아래층에 계시는 모양입니다. 처지는 더 안 좋고요. 마 법을 쓸까 무서워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장전한 석궁을 소지한 병사들이 24시간 교대하며 계속 감시하고 있답니다.”

“맙소사? 아니, 그저 아침에 기주를 못하게 하면 되는 것 아녜요!”

“정령을 부리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니까………….”

“제길!”

난 돌벽을 걷어찼다. 당연히 내 발이 아파왔다. OPG만 있다면 이대로 벽을 뚫고 달려나가 다 때려부수고 싶다. 칼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쉐린. 아무래도 정식 재판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것 참. 우린 여정이 바쁜데. 그리고 세레니얼 양도 우리 때문에 자신의 여정을 방해받게 된 데다 고초까지 겪게 했으니…………… 몹쓸 노릇이군.”

쉐린도 퍽이나 안 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일단 시장에게 탄원서도 내어보고 공개적으로 여론을 조성해 보겠다고 했지만 별로 자신 있는 태도는 아니 었다.

쉐린과 유스네가 떠나고 나서 나는 끙끙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더 못 참겠다. 탈옥, 탈옥이다! 한다, 반드시 한다! 그런데 어떻게 탈옥하지? 나는 이곳에 단 하나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창문에는 돌 격자가 설치되어 있었고, 설사 그 돌 격자가 없어진다 해도 너무 작아서 빠져나가는 것 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그 틈 사이로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보였다.

“제기, 그거 좀 줘봐. 샌슨.”

샌슨에게 수통을 받아들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우와? 감옥 천장이 돈다! 감옥이 무너지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자유다, 자유! 우하하하!

젠장. 나는 달아오르는 볼을 차가운 돌벽에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이건 안 돼. 우리가 여기 몇 달 갇혀 있으면 모든 게 끝장이야. 우리가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아무르타트는 영주님과 백작, 그리고 포로들을 전부 죽일 거야. 하멜 집사가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하겠어.”

내 투덜거리는 소리에 샌슨과 칼의 표정도 우울해졌다.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방법이 없다. 이 감옥이 닳아버릴 때까지 볼을 비벼볼까? 감옥에 단 하나 있는 창문에 재미있게 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흠, 저 얼굴 정말 재미있군. 난 술에 너무 취하면 안 되는 모양이야. 왜 머리에 풀이 난 중년 얼굴의 어린애가 보이는 거지?

“버터핑거!”

난 간신히 목소리를 죽였다. 듀칸 버터핑거라는 그 하플링이다. 듀칸은 입 앞에 손가락을 세우며 조용히하라는 시늉을 했다. 샌슨은 재빨리 쇠창살 에 붙어 밖을 감시했고 칼과 나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있는 감옥은 지하였고, 그래서 창은 바깥의 지면과 같은 높이였다. 그래서 듀칸은 몸을 땅에 눕히고 등 위에 풀더미를 올려놓은 채 엎드려 있 었다. 바깥은 시청의 정원이니 아마 이런 모양이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듀칸은 낮게 말했다.

“이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들키면 나도 끝장이야. 빠르고 간단하게 하자고. 당신들을 구해 줄 테니 얼마를 내겠소?”

칼은 잠깐 당황하더니 대답했다.

“낸다고? 어, 얼마나 원하시오?”

듀칸은 실쭉 웃었다. 그가 입을 헤벌레 벌리면서 말하려는 순간, 뭔가가 내려오더니 듀칸의 정수리를 찍었다.

“이놈! 틀림없이 이럴 줄 알았다!”

들켰구나! 경비병에게 들켰어. 이제 끝장이다. 그런데 듀칸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당황하며 옆으로 손을 뻗어 누군가를 땅에 눕히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듀칸의 얼굴 옆으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이 나타났다.

“엑셀핸드?”

12인의 다리에서 만난 그 드워프였다. 듀칸은 자신의 등 위에 있던 풀더미를 재빨리 엑셀핸드의 등에도 덮어주며 목소리를 죽인 채 엑셀핸드를 나 무랐다.

“아니,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 거야! 여기가 드워프의 광산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여긴 감옥이라고, 감옥!”

“웃기는군. 의로운 자들은 감옥에, 악당은 바깥에 인간의 방식인가?”

엑셀핸드의 중얼거림에 칼은 인간 종족을 대표해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난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술 때문에 이미 얼굴이 벌게져 있었으니까. 난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다, 당신이 여기 어쩐 일로?”

“구해주러. 인간 방식은 어떤지 모르지만 드워프 방식으로는 의로운 자는 바깥에, 악당은 감옥에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요 소악당을 보냈지. 하지 만 틀림없이 요따위 수작을 할 것 같아서 쫓아왔지. 그런데 자넨 감옥 안에서도 팔자가 편한 모양이군? 술 냄새까지 풍기고.”

난 뒤의 긴 말은 듣지 않았다. 중요한 건 맨처음의 한 마디뿐이다.

“구해 준다고요? 탈옥?”

“그렇지.”

“어떻게?”

“그건 이 소악당이 알아서 할 일이야. 이놈아! 어서 계획을 뱉어라!”

듀칸은 이마를 짚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정말 드워프란 족속은……………. 좀 조용히 못해?”

듀칸은 땅에 붙은 배 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끙끙거리더니 곧 열쇠 꾸러미를 하나 꺼내었다.

“자, 이건 마법의 열쇠, 자유의 열쇠지. 하하. 이 감옥의 모든 문은 이걸로 열리지 않는 게 없지.”

정말 그렇지 않을 수 없겠다. 열쇠가 자그마치 100개는 넘어 보이니까! 제기, 100개를 일일이 맞춰보고도 들키지 않으려면 그거 보통 일이 아니겠 다. 듀칸은 그런 우리 표정을 용케 알아채고(감옥 안은 어두웠으니까) 부연 설명했다.

“물론 그 많은 것을 일일이 맞춰볼 필요는 없어요. 그건 모두 103개라고. 이건 말이야, 시장의 열쇠 꾸러미를 복사한 것이거든? 103개를 복사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지. 아, 정말 그때는 정말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어! 그때 나는 시장이 목욕을 하는 사이에 세탁장이로 변장하고 방에 불을 지른 다음…………….”

“그만하지 못해?”

엑셀핸드가 팔꿈치로 찍자 간신히 듀칸은 헛소리를 멈춘 다음 설명했다.

“열쇠에는 문자와 숫자가 있어. 당신들의 감방 쇠창살의 자물쇠를 봐. 아래쪽에 작은 일련 번호가 있을 거야.”

나는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재빨리 쇠창살 한쪽의 문에 있는 자물쇠를 살폈다. 샌슨은 한참을 살피더니 말했다.

“좋아. J-104이다. 감옥 104호라는 말인가 보군.”

나는 재빨리 달빛에 비춰가며 열쇠들을 살폈다. 열쇠에 있는 작은 문자들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잠시 후 간신히 J-104의 열쇠를 찾아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감옥에 갇힐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보물이겠는걸? 듀칸, 당신 도둑입니까?”

“떽. 꼭 이 드워프처럼 말하네. 소유권 이전 전문가라고 불러. 어쨌든 지금 당장은 나오지 말아. 달을 잘 보다가 두 번째 달 루미너스가 산 너머로 나 타날 때까지 정문으로 나와요. 그때까지 어떻게든 당신들 말을 마구간에서 빼내어 시청 정문 옆에서 기다리겠어. 그리고 이것.”

듀칸은 대거를 세 개 들이밀었다.

“조용히 처리하면서 나와요. 되도록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겠지? 이 건물 안의 모든 자물쇠는 다 열 수 있으니까. 그럼.”

“곧 보세나!”

엑셀핸드는 호탕하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듀칸은 벌떡 일어서는 엑셀핸드를 보며 혀를 차더니 엑셀핸드의 팔을 붙잡고 사라졌다. 나는 단숨에 기가 올라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시작하지요.”

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벌써? 그 하플링은 루미너스가……”

“아니, 우리 물품도 되찾아야 되고 이루릴도 찾아보려면 바빠요.”

“그렇군. 이거 원, 도둑의 흉내까지 내야 되는군. 하지만 아무래도 정당하게 나갈 방법은 없으니.”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쇠창살 쪽으로 다가갔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쇠를 받아든 샌슨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애쓰면서(사실 그건 좀 어려운 일이 었다. 열쇠가 너무 많았다.) J-104의 열쇠를 끼워넣었다. 찰칵! 너무너무 듣기 좋은 음향이 들리며 자물쇠는 열렸다.

샌슨은 기름칠이 되지 않은 창살문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입에 대거를 물고는 세 명의 암살자처럼 복도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샌슨은 우리가 끌려올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밖으로 향했지만 나는 샌슨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먼저 이루릴을 찾아보자. 아래쪽에 있다고 했어.”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시청 지하의 이 감옥은 지하의 여러 층으로 구성된 모양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지하 1층이었는데 1층 을 다 돌아보아도 감옥은 모두 비어 있었다. 대신 우리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래쪽에서 갑자기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황급히 계단 입구 옆의 벽에 몸을 붙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 저쪽편에 있는 샌슨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였다. 한 놈이란 말이지?

잠시 후,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불빛이 환해지더니 손에 횃불을 든 병사가 계단을 올라왔다. 나는 OPG가 없어서 한 대 쥐어박는 대신 그의 어깨를 쳤다.

“이봐. 말 좀 묻자.”

그는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등 뒤에 있던 샌슨이 재빨리 그의 목을 틀어쥐며 목에 대거를 가져다대었다. 손발 잘 맞아.

“떠들면 죽인다.”

샌슨의 낮은 협박에 병사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을 빼앗고 그의 허리에 있던 롱소드도 빼어들고는 물었다.

“이 아래도 감옥이지? 아래에 엘프가 있나?”

“그, 그렇다.”

“지키는 사람은?”

“나와 둘.”

쉐린의 말대로 지키는 병사들이 있는 모양이군. 이 밤중에 고생들이 많겠어.

“넌 어디 가는 길이야?”

“야, 야식을 가지러 ………….”

“거 안됐군. 몸을 돌려 한 명을 불러.”

“부, 부르라고?”

“아이고, 내 다리. 미끄러졌어. 야, 누구 불 좀 가져와 봐.’ 이렇게 짜증스럽게 불러. 알았지?”

병사는 이를 악물었지만 샌슨이 손에 힘을 주자 곧 내가 시킨 대로 외쳤다.

“아, 아이고! 내 다리. 미끄러졌어! 야! 누구 불 좀 가져와 봐!”

곧 아래쪽 멀리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놈은 도대체 걷지도 못하나?”

샌슨은 재빨리 손에 잡고 있던 병사의 뒤통수를 대거 칼자루로 찍어버렸다. 병사는 쓰러졌고, 나는 횃불을 껐다. 계단 쪽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 려오고 횃불 빛이 보였다.

“야, 도대체 어디야?”

난 그 병사에게 말했다. “여기야.” 아까와 똑같이 그 병사는 샌슨에게 잡혀버렸다. 참 재미있을 정도군. 그 병사도 내가 시키는 대로 고함을 지르게 되었다.

“야! 이 녀석,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야! 혼자 못 들겠어, 이리 와봐!”

그리고 그 병사도 처리되었고 마지막 병사도 투덜거리며 나타나서 똑같이 처리되었다. 이거 원, 장난 같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히죽 웃은 다음 병사 들을 내버려두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루릴은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통로 중간쯤에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랜턴이 켜진 채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카드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 루릴은 바로 그 테이블 앞의 감옥에 있었다.

“이루릴!”

감옥 안에서 어떤 멋있게 보이는 것이 웃으며 일어났다. 이루릴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 놀라지도 않아요?”

“저 병사들은 듣지 못했지만 전 계단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었거든요.”

“우와! 대단해.”

샌슨은 재빨리 이루릴의 감옥 자물쇠를 조사하고는 감옥 문을 열었다. 이루릴이 밝은 바깥으로 나오자 곧 그 안쓰러운 모습이 잘 보였다. 항상 깔끔 하던 옷맵시가 감옥에 갇혀 있느라 초라해지고 얼굴이나 머리도 단정하지 못했다.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던데……………. 하지만 침착하고 단정한 몸 놀림은 여전했다. 샌슨은 너무너무 슬퍼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를 다그쳤다.

테이블 옆에는 장전된 석궁이 세 개 있었다. 못된 놈들. 이루릴이 뭔가 마법을 쓰려 했다면 당장 이것을 쏴버렸을 테지? 나는 그것을 쓸 줄 몰라서 다른 세 사람이 하나씩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옆에는 밧줄이 있었다. 그것을 들고 우린 다시 병사들이 쓰러져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병사들을 다 묶 은 다음, 샌슨은 물었다.

“누굴 깨울까?”

“마지막 녀석. 제일 위엣 놈이 마지막에 움직였을 테지.”

샌슨은 마지막 병사를 깨웠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공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샌슨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 다.

“자, 내가 질문하고 넌 대답한다. 우물쭈물하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그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따라서 헛소리는 열 번까지 할 수 있 다. 자를 게 더 없어지면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걸 자르겠다.”

보고 있던 칼과 내가 질릴 정도였다. 병사가 거의 눈물을 쏟을 듯이 공포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샌슨은 우리 물건을 둔 곳, 바깥의 병사들의 상 황을 질문했다. 그 착한 병사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샌슨은 고맙다는 인사 대신 뒤통수를 다시 쥐어박아 기절시켰다.

병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 물건은 모두 시청 비품실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은 시청이라 건물 내에는 별로 병사가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모두 바깥쪽의 경비대 건물에 있으며, 정문 옆의 초소에 숙직 병사가 두 명 앉아 있을 거라고 했다.

밤이라서 시청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으며 우리는 병사의 말에 따라 쉽게 비품실을 찾아내었다. 듀칸의 말대로 그 열쇠는 진짜 마법의 열쇠였다. 간 단히 비품실 문을 연 우리는 각자의 갑옷과 무기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OPG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망할! 아마 그 아프나이델이란 녀석이 가져갔을 거야.”

“할 수 없지. 일단 나갈 준비를 하자.”

우리는 시청 건물의 정문으로 갔다. 정문 옆의 창문으로 밖을 살펴보니 상황이 고약했다. 하필이면 초소에 앉아 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그는 건물을 빙 돌아 갔다.

“지금 갈까? 아니면 돌아와서 앉을 때까지 기다릴까?”

“기다려야지. 아직 루미너스가 안 떴어.”

우리는 초조하게 창문 밖을 내다보며 루미너스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병사는 돌아왔고 그는 다시 초소에 앉아 동료와 잡담을 나누었다. 자, 그런데 저 병사들과 싸우면 경비대 건물에 있다는 경비 대원이 다 뛰어나올 텐데. 경비대 건물은 본관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거리는 가까웠다. 샌슨은 그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나갈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하필 그 멍청한 하플링은 정문으로 나오라고 했지? 이거, 조금 있으면 루미너스가 뜨겠는데 말이야. 쏠 까?”

샌슨은 석궁을 들어올려 보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그건 싫다. 그렇지? 우리는 자유지만 저쪽은 생명이니까.”

그러자 이루릴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캐스트에 들어갔다.

“어? 기주를 했어요?”

칼이 대신 대답했다.

“정령을 부르는 것이야.”

칼이 말한 대로 이루릴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밤의 이슬 속에서도 젖지 않는 하나의 모래의 주인이며 휴식의 수호자,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저들을 달래줘요.”

뭔가가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역시 보이지는 않았다. 칼이 말했다.

“샌드맨이군.”

샌슨과 나는 눈이 빠져라 초소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두 병사들은 하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켜고 볼을 두드리면서 졸음을 잊기 위해 애썼다. “반항하지 마! 잠들어, 이 녀석들아!”

샌슨과 나는 애가 타서 낮게 외쳤다. 하지만 별로 조바심칠 필요는 없었다. 병사들은 머리를 끄덕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 었다.

“자, 가자.”

우리는 본관을 나와 살금살금 걸어갔다. 정원이 엄청나게 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정문까지 나올 수 있었다. 샌슨과 난 손바 닥을 소리 안 나게 부딪히며 속삭였다. “나왔다!”

밤의 도시는 고즈넉하고 간혹 불어오는 바람소리만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더했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달빛이 주위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문으로 나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벌써 루미너스가 떴는데? 이 하플링 녀석이 우릴 속였나? 그러나 바로 그때 엑셀핸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 정확하군!”

이번에는 나도 정말 듀칸과 같은 심정이었다. 우리 모두가 엑셀핸드의 목소리에 10년은 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보자 어둠 속에서 빨 간 빛이 보였다.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피워문 채 시청 담벼락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림자 속인데다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일어서자 곧 듀칸도 나타났다. 그는 손짓으로만 우리들을 불렀다. 듀칸을 따라가자 곧 나무에 매어둔 우리 말들이 보였다. 엑셀핸드는 여전히 태평스럽게 말했다.

“자, 잘들 가게. 이만하면 12인의 다리를 건네준 보상은 충분하겠지?”

“아니, 그걸 갚으시려고 이렇게 위험한 일을…………?”

드워프는 밤하늘로 멋진 담배 연기 고리를 날려보냈다. 그의 눈은 우리 머리 위의 밤하늘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깊고 심원하게 번뜩였다. 검은 눈은 달빛에 번뜩이는군. 그는 대답했다.

“자네들도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주지 않았나. 드워프는 함께 싸운 자들을 영원한 친구로 생각하지. 흠, 흠. 설령 그게 암석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숲 의 종족이라도.”

마지막 부분은 목소리가 좀 낮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됐어! 잘들 가라고.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그리고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다시 물더니 두말 없이 몸을 돌렸다. 방금 세 명의 죄수를 탈옥시킨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밤 산책이라도 가는 태도다. 샌슨에게 열쇠를 돌려받은 듀칸도 우리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곧 몸을 돌렸다. 칼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대가를 원하시는 것이…………?”

“천만에요. 저 능글맞은 드워프가 다 지불했어요.”

엑셀핸드가? 듀칸은 몸을 돌리다가 두 팔을 과장되게 펼치고는 말했다.

“언제라도 이 도시에 들르면, 그리고 만일 곤경을 당했다면, 날 기억해요. 듀칸 버터핑거! 소유권 이전의 전문가이자 밤의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 있 는 진정한 로맨티스트! 하하하.”

듀칸은 상쾌한 웃음만 남겨놓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칼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엑셀핸드와 듀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맑은 달빛 속에는 우리들만이 남아 있었다.

“허, 이런, 저렇듯 고마운 사람들이 있나.”

“사람이 아니라 드워프와 하플링이죠. 그리고 사람으로 말하자면, 난 지금 당장 만나봐야 될 사람이 하나, 아니 두 명 있어요.”

칼과 샌슨은 날 바라보았다. 나는 기세등등하게 대답했다.

“시간은 오늘 밤뿐이죠.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탈옥했다는 것을 들킬 테니까. 그 가짜 남작과 사이비 마법사에게 오늘 밤은 잊혀지지 않는 밤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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