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9화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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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아프나이델은 죽었다 살아나자 퍽 얌전해져서 사근거리며 우리를 안내했다. 2층 중앙의 남작의 방에 도착한 후, 나 는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남작을 불러요. 조용히.”
아프나이델은 시키는 대로 조용히 남작을 불렀다. 남작은 깊이 잠들어 있는지 깨어나지 않았다.
“당신, 열쇠 없어요?”
“없는데.”
“그럼 할 수 없지. 자, OPG를 되찾은 기념이다.”
나는 주저없이 손바닥으로 문을 쳤다. 쾅! 문짝은 통째로 날아갔다. 나는 빠르게 말했다.
“자, 샌슨! 남작을 데리고 나와! 하인들은 내가 막지.”
샌슨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나는 문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2층을 올려다보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윽고 그들은 양초와 램프들을 켜들었고, 우리의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샌슨은 실리키안 남작의 목덜미를 잡아 끌고 나 왔다.
“이 때려죽일 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남작은 그 외에도 다양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도대체 상황 판단을 못하는군. 나는 그 작자의 다리를 잡아올렸다. 남작은 노호했다.
“이, 이놈! 감히 나를! 이것 놓지 못하냐!”
“내가 당신 하인이면 당신 말을 듣겠지만.”
그리고 나는 그대로 실리키안 남작을 들어 2층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아래의 하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실리키안 남작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나는 팔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 좀 무거운 편이군.”
“이 죽일 놈! 네가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살 것 같으냐?”
“당신은 그 따위로 떠들고 살 것 같아?”
그제야 남작은 정신을 좀 차리는 모양이다. 내가 손만 놓아버리면 그는 당장 고(故) 실리키안 남작이 될 테니까. 그는 아래를 향해 악을 썼다. “이, 이 녀석들! 어서 날 받아! 아, 아니 올라와 이놈들을 죽여!”
하인들은 당황하여 우르르 달려와 남작 아래에서 팔을 들어올렸다. 나는 조금 왼쪽으로 걸었으며, 그러자 하인들도 우르르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래 서 난 오른쪽으로 걸어갔고, 그러자 하인들은 욕지거리를 뱉으면서 오른쪽으로 우르르 달려왔다. 재미있다! 나는 몇 번 그렇게 왔다갔다 했다.
남작은 거꾸로 들린 채 여기저기로 휘둘리니까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더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날 저주하고 있었다. 보다못한 칼이 말했다.
“여보게, 네드발 군. 그만하게나. 내려놓게.”
난 빙긋 웃고는 그를 내려놓았다. 실리키안 남작은 땅에 내려지자 곧 달아나려고 했으나 난 그자의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그러자 그는 자유로운 부 분인 입을 마음껏 놀렸다.
“발칙한 놈들! 시궁창의 쥐새끼들이 인간을 몰라보고 이따위 짓을! 죽으려고 작정했단 말이냐! 네놈들이 감히 나에게 이런 무례한 짓을 해? 더러운 놈들!”
남작은 정말 입심이 좋았다. 머리가 어지러울 텐데도 끝없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칼은 뭐라고 말을 걸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놔두고 가자.”
“이놈들! 너희들이 어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희들 쥐새끼의 소굴인 하수구로 달아나려는 게냐? 어림없다. 너희들 사지를 찢어주겠어. 감히 나에게 이런 발칙한 짓을 하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아무리 자비로워도 그렇게는 못한다!”
난 칼에게 말했다.
“그냥 던져버리죠. 짜증나요.”
“뭐라고? 이 어린 놈이!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인 줄 알아? 싹수 노란 꼬맹이 같으니라고! 너희들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칼은 하마터면 그렇게 하라고 말할 뻔했다.
“그렇게 해버…………리지는 말고.”
그때 드디어 본관 정문이 왁살스럽게 열리며 사병들이 들이닥쳤다. 정말 출동 빠르네. 이제야 겨우 나타난 거야? 그들은 2층을 올려다보더니 남작 이 인질로 있는 것을 보고는 고함을 질렀다.
“이봐! 너희들, 딸꾹! 완전휘이 위포되어, 아, 아니 포위되었다!”
난 마주 고함질러 주었다.
“말이나 똑바로 해, 멍청아! 출동이나 한 게 용하다!”
사병들은 모두 취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고 갑옷을 거꾸로 입은 자, 걸치다 만 자, 방패를 머리에 쓰고 투구를 손에 들고 온 자 등 각양각색 이었다. 아무래도 무서울 수가 없는 몰골이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택을 지켜야 할 사병들이 저렇게 취해 있는 걸까? 남작도 나와 마찬가지 심 정인 모양이다. 그는 나와 더불어 아래의 사병들에게 욕설을 퍼부어대었다. 사병들은 남작의 욕설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그중 에는 바닥에 주저앉더니 구토를 하는 사병도 있었다. 대단하군. 처음부터 그냥 정문으로 들어올걸 그랬나? 칼은 그 사병들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좋아. 저 정도면 충분하겠군.”
나와 샌슨은 의아해서 칼을 쳐다보았다. 칼은 정중한 태도로 실리키안 남작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남작님. 저와 내기 하나 하실까요?”
“내, 내기라니?”
“남작님이 없어지면 저 병사들이 남작님의 재산을 완전히 절단낼까, 내지 않을까 내기합시다. 어때요? 우리가 이대로 남작님을 데리고 사라지면 저 병사들은 남작님의 보석, 옷가지, 중요 서류를 다 끝장낼 겁니다. 전 거기에 걸겠습니다. 남작님은 그렇지 않다에 거시겠지요? 남작님은 저 병사들의 충성을 믿으실 테니까요.”
남작의 얼굴에 드디어 공포가 떠올랐다.
“이, 이, 이봐, 너, 너, 어떻게.”
“네드발 군. 기절시켜.”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작의 뒤통수를 내려찍었고 남작은 개구리처럼 쫙 뻗어버렸다. 칼은 아래를 굽어보더니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아프나이델 씨. 남작의 가족은?”
“없습니다. 아내는 사별했고 딸은 이미 시집갔습니다.”
“그럼 거칠 게 없군. 아프나이델 당신도 아마 적당히 챙기고 싶겠지요?”
아프나이델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는 이루릴의 눈길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칼은 말했다.
“양심이 허락하는 한 봉사의 대가를 챙겨요.”
“어, 됐습니다. 내 짐만 챙기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미 충분한 것을 얻었습니다. 새 주문을 얻었죠.”
칼은 빙긋 웃었다.
“당신은 역시 마법사군요. 난 생명을 얻었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가보시오. 그리고 웬만하면 스승께 돌아가시오.”
아프나이델은 고맙다고 말하며 지하실로 돌아갔다. 칼은 빠르게 지시했다.
“사병들이 분탕질을 치는 도중에 하인이나 하녀가 다쳐선 곤란하다. 퍼시발 군, 네드발 군, 가서 사병들의 무장을 제거하고 모두 기절시켜 둬. 취한 놈들은 간단하겠지? 그리고 하인과 하녀 여러분, 이 작자는 우리가 끌고 갈 테니 취향대로 골라 가지시오!”
“뭐, 뭐라고?”
칼은 능글스럽게 말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많이 못 챙길 겁니다.”
하인들은 그제야 날카로운 눈빛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샌슨은 빙긋 웃으며 계단을 뛰어내렸다.
“야호!”
때리고, 휘두르고, 집어던지고, 걷어차고………….
우리는 말을 몰아 남작가를 벗어났다. 이루릴은 놀랍게도 남작의 마구간에서 말을 하나 슬쩍해 왔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엘프도 그런 짓을 합니까?”
“이건 합리적인 행동이죠. 어차피 이 말들은 주인을 잃고 마구 팔리거나 사병들에게 끌려가거나 하겠지요. 주인이 없으니, 제게 봉사할 수도 있겠 죠. 이름은 ‘래셔널 셀렉션’이라고 붙일까요?”
“좋군요. 합리적이라서.”
나는 빙긋 웃었고 이루릴도 미소를 지었다. 다만 샌슨만이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루릴 대신에 남작과 같이 말을 타고 있었으니까. 나는 칼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대로 달아나면 납치가 아닌가요? 시청에서 쫓지 않을까요?”
“이 작자가 시청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금력 때문이야. 이자가 금력을 잃으면 더 이상 시청은 이자의 주구 노릇을 하지는 않을걸.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지.”
“그게 뭔데요?”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레너스 시의 시청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시청 근처의 골목길에서, 나는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었다. 사두길 잘했어. 그리고 칼은 남작에게 투기장을 시청에 기증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도 록 명령했다. 물론 남작이 선선히 그런 각서를 쓸 리는 없다.
“뭐? 뭐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자 샌슨은 머리를 좀 가로저은 다음 남작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잠시 후, 남작은 퍼렇게 질려서 각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샌슨 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어?”
“안 듣는 게 좋아. 나도 다시 하고 싶지 않고.”
남작은 투기장을 시청에 기증한다는 각서를 다 썼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숫자가 딱 세 명이었다. 이루릴은 바이서스의 시민이 아니니까. 어쨌든 남 작의 서명 아래에 칼과 샌슨, 그리고 내가 서명했다.
“난 성인이 아니라 공증인이 못 되는데요?”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네드발 군의 성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헬턴트 영주의 권한이야. 그리고 난 현재 헬턴트의 전권 대리인이고. 그러니 내 이름 아래에 적힌 네 드발 군의 이름은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
하! 그것 참. 대단하군? 나는 서명을 끝내었다. 칼은 잉크가 마르도록 종이를 살짝 휘저으며 말했다.
“자, 시청에서도 이런 재산을 받으면 입 싹 씻을 수 있겠지. 그리고………….”
칼은 다시 다른 종이를 꺼내어 뭐라고 휘갈겨 썼다. 다 쓰고 나자 그는 말했다.
“레너스 시에서는 우릴 쫓지 않을 거야. 쉐린 씨는 우리가 죄인 명부에도 없다고 그랬지? 그러니 시에서는 우릴 꼭 쫓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 우리 자유와 투기장을 교환하자고 썼다. 시장이 머리가 돌아간다면 내 제의를 수락하겠지. 우리를 끝까지 죄수로 취급해서 뒤쫓는다면 남작의 각서는 효 력이 없어지거든? 죄수는 공증인이 될 수 없어.”
“와!”
샌슨과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칼은 옛날에 공갈범이나 사기꾼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우리가 시청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나 서, 칼은 화살에 그 두 장의 종이를 묶어서 시청으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우리는 질풍처럼 달려 레너스 시를 빠져나왔다.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새벽녘에 레너스 시 외곽 적당한 곳에 남작을 떨어뜨려 주었다. 남작은 이미 모든 용기를 잃고 완전히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레너스 시에 돌아간다 해도 그는 이제 아무 재산도, 아무 힘도 없는 것이다. 우린 그를 격려하며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했지만 남작은 아무런 친구가 없는 모양이다. 복수 치고는 최고로 통쾌하게 복수한 셈이지만, 저렇게 기운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군. 왜 친구 하나도 없는 거야.
칼의 복수 방법이 대충 이해가 간다. 그는 실리키안 남작의 인간성에서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결과를 유도해 낸 것이다. 실리키안 남작이 인망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그가 사라지든 말든 그의 재산과 인망은 유지될 것이다. 칼의 복수 방법은 내재된 형벌을 끌어내는 것으로 선한 이들에게는 아무 런 해가 될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실리키안 남작에게는 효과적이었다. 으음. 칼, 무서워요.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칼은 기꺼워하며 미소지었다.
“그렇다네, 네드발 군.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눈으로 보이는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법일세. 왜냐하면 죄에 대한 형벌은 이미 그 사람 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일세. 형벌이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지 않네. 그리고 지혜로운 심판관이라면 죄인의 죄에 대한 가장 적절한 형벌은 이미 그 죄인의 내부에 있음을 알고 있지. 내가 어쭙잖게 그 흉내를 좀 내어보았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레너스 시의 동쪽에 있는 산을 중간쯤 올라가 야영하고 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 잠을 자려니 좀 이상했지만, 우린 밤새도 록 자지 않았으니 그냥 출발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침해를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레너스 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너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많군요.”
“그건 어디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이 사는 곳이면.”
칼의 대답이었다. 나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지그시 감고 있었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해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속눈썹에 부서지는 햇살 이 아름답다.
“이루릴? 인간의 도시와 엘프의 도시를 비교해 보겠어요?”
이루릴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엘프에겐 도시가 없는데요.”
“그럼 엘프의 관점으로 인간 사회를 정의한다면? 나 사실 불안하고 좀 부끄러워요. 당신은 어떤 평가를 내리겠어요?”
내 질문에 칼과 샌슨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루릴은 말했다.
“글쎄요…………. 실망스러운 점도, 놀라운 점도 많아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군요. 저 도시에 사흘 있었지만, 마치 30년은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요. 인간들의 하루는 항상 이런가요?”
“우리도 매일같이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가요. 난 혹시 인간이 단명한 이유가 너무 격렬하게 살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했거든요. 특히 어젯밤의 여러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 이………….”
“약삭빨랐죠?”
이루릴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그녀는 그제야 눈을 뜨고 날 돌아보았다.
“그래요. 약삭빨랐어요. 그 약삭빠른 행동에 대한 평가는 미루고 느낌만 말하자면, 꽤 상쾌했어요. 속도감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인데, 꽤 상쾌하고 시 원했어요. 음. 인간의 말로는 잘 설명하기 어렵군요. 그것을 활기차다고 하나요? 잘 모르겠네요.”
“아니, 그 설명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난 안심했다. 이루릴은 별로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루릴이 혹시 인간이란 모두 실리키안 남작 같은 사람인 줄 알까 두려웠거든. 나 스스로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족과 함께 있으니 왠지 인간이 더 잘나고 고상한 생물이었으면 하는데. 나도 결국 인간인가 봐.
샌슨이 말했다.
“자! 자자고. 이거 무지무지하게 피곤하군.”
칼은 나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난 별로 한 게 없으니 내가 불침번을 서겠네. 모두들 푹 쉬어요. 사흘이나 허비했으니 빨리 가려면 더욱 잘 쉬어야 된다네.”
난 제미니와 우리 고향 헬턴트 영지의 꿈을 꾸었다. 악몽인가?
우두두둑!
“으아, 언제 또 침대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몸을 비틀며 혼잣말을 했다. 뼈가 모조리 부서져나갈 듯한 소리가 들렸다.
칼은 나무에 기대어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흠, 퍽 안심시키는 불침번이군. 샌슨은 내 혼잣말에 눈을 뜨더니 일어났다. 그는 칼을 보더니 싱긋 웃고 는 칼을 깨웠다. 칼은 몹시 허둥지둥거리며 방금 잠든 거라며 미안해했지만 샌슨은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모두 밤을 샜는데, 당연합니다. 누워서 주무세요. 야간을 달리는 것은 좋지도 않고, 그냥 오늘은 여기서 푹 쉬도록 하지요.”
“시간이 되겠는가?”
“원래 여유 일자가 한 달 보름이었는데 레너스 시에서 사흘을 허비해서 여유 일자는 40일쯤 되겠군요. 그 정도면 전하를 알현하고 휴리첼 백작가에 들르고, 영지 매각에 대해 알아보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요?”
“40일, 40일이라………….. 그것 참. 퍼시발 군. 궁성은 원래 한 달 걸려서 중심부까지 들어간다고 해요.”
“에엑? 그렇게 궁성이 큽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아랫관리에서부터 관리들을 차례로 거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려요. 다행히 나는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고 왕의 드래 곤에 대한 일을 보고하는 거니까 곧바로 전하를 알현할 수 있겠지만.”
내가 끼어들었다.
“저, 그런데 꼭 임금님을 알현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아랫관리 아무에게나 캇셀프라임은 패배했다는 이야기만 전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건 곤란해. 다른 일이라면 그렇게 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 하지만 드래곤에 대한 일은 달라. 드래곤은 어디까지나 왕의 드래곤이야. 그리고 캇셀 프라임은 전하께서, 중요하네, 전하께서 직접 헬턴트 영지에 보내준 것이야. 국왕이 보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전하께 보고해야 돼. 그 신하들에 게 보고할 수가 없어.”
“그것 참! 귀찮네.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만일 국왕께서 진노하신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나니까. 다른 신하들은 자신의 목이 날아가기를 원하지는 않겠지.”
“엣? 목이 달아나다니, 사형?”
칼은 싱긋 웃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네. 하지만 원칙상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말게. 작전 책임자는 헬턴트 영주로 되어 있지만 헬턴트 영주께서는 휴리첼 백작에게 전권 위임했거든. 그러니 패전의 책임은 휴리첼 백작에게 있지.”
“그럼 칼은 안전한 것인가요?”
“응. 캇셀프라임을 보내주신 데에도 불구하고 패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면, 국왕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정도로 끝날 거야. 형식상 그렇 게 해야 되고 그렇게 기록되는 것이지. 그리고 국왕께서는 인자한 분으로 알려져 있어. 그분의 형님이 폐위되고 그분이 태자가 되었을 때 기뻐한 사 람들이 더 많았다던데.”
“어휴, 놀랐네.”
칼은 한숨을 쉬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다시 수심이 피어났다.
“40일이라….. 패전 보고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고, 정말 큰 문제는 몸값을 마련하는 것이네. 내가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야. 하멜 집사가 어떤 재주 를 부린다고 해도 그런 돈을 우리 영지 내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러니 그 몸값도 결국 우리 셋의 책임이지. 수도에서 왕가에 부탁하든 귀족원 에 부탁하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돼. 난 헬턴트 영지의 여러 가지 수취권 증서도 가지고 왔다네. 여차하면 그것을 팔아야겠지.”
칼이 걱정하자 샌슨이 끼어들었다.
“저, 그럼 돌아올 때의 시간을 좀 짧게 잡겠습니다. 제가 이 길을 달려본 적이 없어서 지리서로만 판단한 것이라 계획을 조정하기는 좀 그렇군요. 하 지만 돌아올 때는 익숙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군. 알겠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모포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고민하더니 한참 후에야 잠들었다. 샌슨은 짐을 뒤 적거리더니 지리서를 꺼내어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유스네가 준 바구니를 꺼내었다.
바구니 안에는 빵, 맥주병, 그리고 치즈와 과일이 들어 있었다. 흠, 귀여운 말을 하던 계집애. 뭐? 자기가 방랑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평생 그리워하 는 처녀라고? 하하하.
거대한 맥주병은 단단히 막혀 있었고 거기다가 양초로 봉해 놓았다. 뚜껑을 뜯어내자 당장 거품이 피어올랐다. 워낙 흔들리던 것이니까. 난 한 모금 마시고 샌슨에게 준 다음, 빵을 먹기 시작했다.
오후였다.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맑고 높았다. 새소리가 요란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낙엽이 떨어지고 메마른 가지 위로 새들이 앉아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빵조각을 뜯어 앞에 던졌다.
새들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고, 난 새들에게는 어떤 표정이 안심스러울까 생각하다가 관둬 버렸다. 난 말의 표정도 읽을 줄 모른다. 그런 데 새가 나의 표정을 읽을까. 음, 이건 잘못 생각한 것이군. 말은 표정을 지을 만큼의 얼굴 근육이 없다. 즉, 표정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엘프도 있군. 이루릴이 모포 속에서 옆으로 누워 팔로 턱을 고이고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으로 나와 빵조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루릴은 빙긋 웃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리리, 휘릭, 쯧쯧쯧, 휘릭.”
곧 가지 끝에 있던 새 하나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 새는 빵조각을 쪼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새들도 뛰어내리더니 빵조각을 쪼았다. 난 두 다리를 뻗고는 팔로 상체를 받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놀라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휘파람 잘 부시네요?”
이루릴은 새를 바라보다가 날 바라보았다.
“나에게도 그걸 좀 주겠어요?”
난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어주었다. 이루릴은 모포 속에 누운 채 엎드려서 빵을 먹었다. 자연스럽군. 누워서 음식을 먹다니. 제미니라도 저렇게는 하 지 않을 텐데. 하지만 버릇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니 그런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 우습잖아. 숲 속에서 엘프가 낙엽 위에 누워 빵을 먹는다고 누가 뭐랄까.
“저, 일어나서 드시지요.”
음, 역시 샌슨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예?”
“누워서 드시면, 저, 소화가 잘 안 되실지도………….”
“대부분의 생물은 몸의 자세와 소화는 크게 관계가 없어요.”
그러자 샌슨은 할말이 없어졌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지리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피식 웃고는 새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을 탁탁 털더니 머릿결을 다듬었다. 저렇게 긴 머리니까 당연히 자다가 엉망이 되었다. 그런데 이루릴은 마
치 개들이 몸을 털듯이 머리를 앞뒤 좌우로 사납게 흔들었다. 나는 보다가 깜짝 놀랐고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새들도 다 날아가 버렸다.
이루릴은 그렇게 정신 사납게 머리를 휘두르더니 마지막에 머리를 뒤로 크게 젖혀 머리가 모이도록 하고는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주 간단하군. 이루 릴은 옆에 벗어둔 재킷을 들어 뒤적거리더니 빗을 꺼내어 머리카락을 빗어내리기 시작했다.
“어, 여자들 머리 손질하는 것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거 참 대단히 간단하네요?”
“인간 여자는 빗질을 어떻게 하나요?”
“글쎄요. 먼저 감고, 빗질하고, 말리고, 틀어올리거나 땋거나………….”
“나도 좀 감았으면 좋겠군요.”
“어, 어쨌든 그렇게 몸을 흔들어 머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의외군요.”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아, 그렇지요. 네, 머리카락이 엉키지요. 저흰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아요. 그래서 흔들면 그냥 다 풀려버리거든요.”
“편하겠네요?”
“글쎄요. 편하다? 땋기는 어렵지요. 머리카락들이 전부 가늘고 건조해서. 그래서 저처럼 전부 머리를 산발하고 있지요. 보기 이상하죠?” “아, 아뇨.”
“저도 머리를 땋거나 틀어올리거나 해봤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 머리카락으로는……………. 만져보겠어요?”
이루릴은 앉은 채로 다가오더니 머리카락을 한 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살짝 쓰다듬어보았다. 이루릴은 물었다.
“가늘죠?”
무슨 명주실 같다.
“가늘어요. 하지만 숱은 참 많은 것 같네요.”
“예. 머리카락의 숱이 많아서 그걸 뽑아 활을 만들어도 충분하지요. 제 활의 활줄은 제 머리카락을 뽑아 만들었어요. 엘프들은 모두 활줄 길이가 될 만큼 머리가 길면 그렇게 활줄을 만들어 자신의 활을 갖지요.”
그때 샌슨이 말했다.
“저, 활을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이루릴은 자신의 배낭에 꽂힌 컴포짓 보를 뽑아들고 샌슨에게 다가갔다. 나도 그에게 다가가 활을 구경했다. 샌슨은 활을 들어 시위를 몇 번 튕겨보더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데요, 제 체구에는 맞지 않지만, 썩 좋군요.”
“체구? 아, 팔 길이. 저와 팔 길이 대어보실까요?”
이루릴은 팔을 쫙 펼치더니 가슴을 내밀었다. 샌슨은 뒤로 후다닥 물러나다가 머리를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뒤통수를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내었고 이루릴은 깜짝 놀랐다.
“어머, 왜 그러시죠?”
왜 그러시긴. 그렇게 팔길이를 대어보면 가슴이 맞닿잖아. 포옹하는 것이나 다름없잖아. 어이구, 보는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지네. 샌슨은 간신히 정신 을 차려 말했다.
“아, 그, 저, 그것보다, 이 활줄이 이루릴의 머리카락이라고요?”
이루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선선히 대답했다.
“여러 번 꼬았죠. 검은 색이죠? 다른 엘프들도 모두 자기 머리 색깔과 같은 활을 가지고 다니죠. 그래서 자기 머리카락 색깔과 같지 않은 활을 가진 엘프가 있다면 그 활에는 뭔가 사연이 있거나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예? …………예.”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샌슨은 충격을 받아서 횡설수설하고 있다. 이루릴은 다시 활을 받아들면서도 이상하다는 듯이 샌슨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자신의 재킷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가죽 바지는 정말 멋지게 움직인다. · 제미니에게도 가죽 바지를 하나 선물할까? 그런데 그 계집애가 가죽 바지를 입으면 뭐 볼 게 있을까? 흠, 흠.
이루릴은 재킷을 들어 입더니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엄청난 크기의 책이 나왔다. 방패라고 해도 믿어주겠는데! 나와 샌슨이 탄복한 눈으 로 그 큰 책을 보고 있는 동안, 이루릴은 책을 펼치더니 거대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장도 워낙 커서 이루릴은 손바닥 전체로 그것을 넘겼다.
“저, 구경해도 돼요?”
“읽을 줄 아세요?”
나와 샌슨은 가까이 가보았다. 음, 새로운 경험이군. 흰 건 확실히 종이인데, 검은 건 글이 아니잖아.
나와 샌슨은 서로 쳐다봤다가 다시 책을 보았다. 이상한 도안과 무늬들이 있었고 복잡하게 뭔가 글자 같은 것이 있긴 있는데 도대체 무슨 글인지 모 르겠다.
“이건 엘프어인가요?”
“마법의 언어, 룬이지요. 이건 실제로 읽거나 할 수는 없어요.”
“예? 읽을 수 없다고요?”
이루릴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주위의 낙엽을 치우고 땅이 나오게 했다. 그녀는 돌멩이를 들더니 땅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THM, OEW. 이게 뭐 람?
“읽어보시겠어요?”
난 의아한 표정으로 그냥 그것을 하나씩 읽었다. 그러자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전 이렇게 읽겠어요. 세 명의 인간 남자, 한 명의 엘프 여자.”
“아!”
나와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루릴이 쓴 것은 읽을 수는 있잖아요.”
“예. 이 글자는 원래 읽을 수 있고 이름이 있으니까 그렇게 ‘THM, OEW’ 하고 읽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룬어는 원래 읽을 수 없고, 이름도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쓴 것처럼 룬어도 그 의미는 있어요. 설명이 좀 이상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하겠군요.”
“예…………. 그럼 마법사들이 외우는 주문은 어떻게 말소리가 있는 것이죠?”
“그것은 룬어가 아니라 시동어지요. 룬어는 기주할 때 필요한 말이지만 시동어는 그냥 자기 종족의 말로 만들 수 있어요. 룬어로 된 주문을 읽고 기 주하면 자연스럽게 시동어가 만들어져요. 제가 ‘THM, OEW’라고 써두고 읽을 때는 세 명의 인간 남자, 한 명의 엘프 여자라고 읽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럼 룬어만 읽을 줄 알면 누구나 마법을………….”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마력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해야지요.”
“마력이 움직이는 방식?”
“저 아프나이델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은 분명 마법사로서 룬어를 읽을 줄 알아요. 제가 수단을 가르쳐주고 룬어도 정확하게 적어주었지만, 그는 당장은 그 패밀리어를 불러내진 못할 거예요.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 한참 연구하고 연습한 다음에야 쓸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전 마력을 움직 이는 요령까지 가르쳐줬으니 이해가 훨씬 쉽겠지만.”
난 머리를 쩔쩔 흔들었다.
“그러면………….., 마법사가 제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 난 지금까지 그냥 주문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했는데.”
“마력을 다루는 기술, 그 기술을 증진시키는 연습 방법, 그리고 룬어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 마법을 가르치지요. 특정한 마법에 필요한 룬어를 가르 쳐줍니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주문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마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죠. 그 룬어를 가르쳐준 다음, 그때 마력을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설명해 주지요. 그 부분이 훨씬 어려워요. 헤엄치는 것에 비교하자면, 어떤 마법의 룬어를 배우는 것은 겨우 물속 에 들어가는 정도고, 마력을 움직이는 것은 실제로 물속에서 손발을 놀리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셈이죠.”
나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렵군요. 샌슨, 내 머리에서 김 나?”
“응.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샌슨은 농담을 했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루릴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게 무슨 뜻인가요? 머리에서 김이 나다니요.”
어, 어? 이걸 설명까지 해야 되나?
“아, 그건 농담이에요.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 김이 나지요? 우리도 머리가 열을 받으면 김이 난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냥 비유지요.”
“하지만 후치. 당신 머리에서는 김이 나지 않아요.”
나와 샌슨은 한참 동안 얼이 빠져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설명해 주려고 했지만, 막상 설명하려니 우리도 주전자와 머리를 비교하는 것이 우스운 이유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것이 왜 농담이지?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