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7화 – 회유
회유
“아이구, 머리야. 비겁하게 뒤통수를 치다니. 도대체 이 자식 어디 있어?”
소녀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생긴 것과는 달리 소녀가 거친 말을 내뱉자,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한 소녀가 멍하니 바라봤다. 그 소녀의 옆에는 물이 든 세숫대 야가 하나 있었고, 벌떡 일어난 덕분에 저쯤으로 떨어진 물수건으로 보아 그 시녀는 아무래도 입이 험한 소녀를 간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넌 뭐야?”
퉁명스런 소녀의 말에 시녀는 다소곳이 말했다.
“저는 주인님께 주어진 하녀입니다. 세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하녀…라고?”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잘 꾸며진 방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로 봤을 때 여기가 감옥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어쨌든 사로 잡힌 사람에게 주어진 방치고는 대우가 좋았다.
“이 자식들이 이번에는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거야?”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리면서 다크가 침대 아래로 내려오자 세린이 손을 내저었다.
“저…,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옷?”
그제야 다크는 자신이 부드러운 잠옷 차림이라는 걸 알았다.
“네가 이걸 입혔냐?”
“예, 주인님.”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잠옷 따위를 입어 본 적이 없으니까 다시는 입히지 마.”
“하지만 잠옷을 입고 주무시면 편안하잖아요, 주인님.”
“편안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러다가 집에 불이라도 나면 잠옷 바람으로 뛰어나가라는 말이냐? 그건 그렇고……. 너는 묘인족이냐?”
세린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털 위로 귀엽게 솟아 있는, 금빛의 뽀송한 털이 난 작고 뾰족한 귀를 보면서 소녀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예, 주인님.”
“그러면 너는 노예냐? 하기야 말끝마다 주인님, 주인님 해 대는 거 보니까.”
“예, 보통 궁중에서는 수인족을 하녀로 쓰거든요. 여기는 별로 부유하지 않아서 수인족 노예가 많지 않습니다만…
“그러면 너는 몇 살이냐?”
소녀가 이제 열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세린을 보면서 궁금한 듯 물었다.
“이제 스물다섯 살입니다, 주인님.”
“스물다섯 살…. 별로 많은 나이는 아니군. ‘주인님(master)’이라. 호호호, 듣기에 나쁜 단어는 아니군. 그건 그렇고 빨리 옷이나 내놔.” 세린이 재빨리 옷을 가져왔다. 길고 넓은 치마가 꽤 아름답게 보이기는 했지만 소녀가 봤을 때는 매우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옷이었다.
“그거 말고 내가 이리 끌려 왔을 때 입었던 옷 내놔.”
“옷은 이런 것들 말고는 없습니다, 주인님.”
“뭐야?”
소녀가 세린을 밀치고는 옷을 꺼내던 작은 옷장을 뒤져 보니, 과연 그런 스타일의 옷 다섯 벌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작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까 지……..
“어쭈? 이건 또 뭐야? 나를 정부(情婦)로 착각하는 거야? 미친 자식들! 이거 말고 딴 옷 가져와. 그래, 그 여행복으로. 나한테 맞는 남자 옷이면 더욱 좋고.”
“주인님, 그런 옷은 없어요. 또 그런 걸 가져다 드리면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발 절 구해 주세요, 예? 주인님.”
정작 죄도 없는 하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두 손 모아서 통사정을 하는 데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제기랄, 두고 보자.”
성질 난 김에 그냥 입으려고 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 옷은 도저히 입기 힘들었다. 옷 하나 제대로 못 입고 비틀거리는 소녀를 보고, 세린이 한숨을 살짝 쉬며 옆에 서 도와줬다. 소녀가 옷을 다 입자 세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좋아. 일단 먹어야 힘을 쓸 테니까.”
“…….”
“자네들은 용병이라고 들었네. 전에 일하던 사람한테서 해고당했다고?”
“그런데요?”
“우리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나?”
상대의 말에 팔시온이 같잖은 말 하지 마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에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상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악당들 보고 악당이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게 정석인데, 오히려 상대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단순한 시각의 차이일세. 자네들이 보기에 우리가 나쁜 놈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네. 어쩌면 자네들이 우리 입장이었다면, 더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을 했을지도 모르지.”
팔시온이 거친 숨을 내쉬며 이죽거렸다. 상대의 변명이 꽤 그럴 듯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도둑질도 도둑놈들 입장에서는 어 쩔 수 없는 일일 테고, 산적들도 그 일을 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거 지금 농담으로 하는 소리요?”
“농담이 아닐세. 자네들은 여기가 어딘 줄 아는가?”
“모릅니다. 잡혀 와서 몇 번이나 공간 이동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기는 크라레스 제국이지.”
“크라레스……? 코린트를 침공했다가 오히려 역습당해서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그 크라레스 왕국 말입니까?”
팔시온의 말에 상대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건 다 코린트가 지어낸 말이야. 그 당시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동맹 중이었지. 힘을 합쳐서 그 당시 최강의 대국이었던 아르곤 제국을 막자는 의미에서 말이 야. 하지만 아르곤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코린트가 기습을 했지. 그 당시 코린트와 우리나라의 군사력은 6대 4 정도로 우리가 조금 뒤지기는 했지 만, 만약 우리 쪽이 기습을 가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또 비등한 것도 아니고 뒤지는 군사력을 가지고 싸움을 거는 미친놈들도 있던가? 어쨌 든 그놈들은 자국 타이탄 3백여 대 외에도 동맹국 타이탄 50여 대의 도움까지 받으며 우리의 국토를 유린했다네. 기습을 당한 놈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동맹국들 로부터 군사력을 원조 받는단 말인가? 이런데도 자네들은 그놈들이 퍼뜨린 헛소문을 믿는 건가?”
“하지만 모두 크라레스 제국이 코린트에 기습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자네들이 믿건 믿지 않건, 내가 하는 말은 사실이야. 그놈들은 기습을 가해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했고, 국토를 빼앗아 갔지. 그런 후 우리가 자신들에게 복수라 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힘을 제한했고.. 심지어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타이탄 수까지 제한하고 있단 말일세. 그 덕분에 우리는 대외적으로 봤을 때, 코린트와의 전쟁 이후로 단 한 대의 타이탄도 생산하지 못했지. 그리고 해마다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바쳐야 했고, 또 2백 명씩 공녀까지 바쳐야 해. 국민들을 노예로 바쳐야만 하 는 우리들의 심정을 자네들은 알 수 있나? 말로는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그놈들이 하는 짓은 짐승만도 못 하다 이 말일세. 참, 자네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 가?”
그 말에 팔시온이 대답했다.
“저는 콜로니아 왕국, 가스톤은 트루비아 왕국, 지미와 라빈은 엠페론 왕국, 미카엘은 크루마 제국, 로니에 사제는 아르곤 제국 태생이죠.”
사실 미카엘은 코린트 제국 출신이었지만, 팔시온은 상대방이 코린트에 대해서 별로 감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크루마로 바꾼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팔시온 은 미카엘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지만, 미카엘은 의외로 담담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매우 다국적이군. 좋아, 트루비아가 예를 들기 좋겠군. 이번에 우리가 훔쳐 온 드래곤 하트 때문에 아마 트루비아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 그놈의 코린트 황제인 아그립파 4세가 결정을 내리는 그날 기분이 좋다면 사과 몇 마디 받는 걸로 넘어가 주겠지만, 그날 별로 기분이 안 좋다면 트루비아는 멸망당할 수도 있겠 지. 어쨌든 모든 건 그놈 마음이니까 말이야.”
“설마 멸망까지…….?”
“자네들도 조금 지나 보면 알 거야. 자네들도 트루비아에서 왔으니까 그곳이 작은 속국으로 꽤나 평화를 사랑하는 조용한 나라라는 걸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들 을 멸망시키려고 아그립파 4세가 말하겠지. ‘트루비아는 악에 물들어 마신을 부활시켜 세계를 정복할 욕심으로 본국의 드래곤 하트를 훔쳤다. 용맹하고도 정의로 운 우리의 우방들이여, 저 악에 물든 왕국을 응징하라!’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글쎄요.”
“아마 각국에서 보낸 타이탄 3백 대 정도가 트루비아를 휩쓸면서 완전히 박살 내 버릴 거야. 그게 여태까지 코린트가 해 오던 짓거리니까.”
“설마 그 정도까지…….”
“설마가 아니라네. 아마 그 해답은 한 달도 안 돼 나타날 거야. 아마 트루비아는 멸망하리라는 게 내 생각이라네.”
그러자 분노한 가스톤이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나라가 멸망할 걸 뻔히 알면서도 드래곤 하트를 훔쳤단 말이오?”
“그건 어쩔 수 없었다네. 코린트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서야 했어. 사실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코린트의 적이 될 수 없지. 앞으로도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가능한 일이라네. 하지만 나는 그 대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해낼 생각이야. 왜냐하면 이 세계는 코린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 세계는 우리 모두의 것이야. 왜 일부 인간들이 전 세계를 주물러야만 하나?”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요? 강대국의 횡포는 언제나 있어 왔고, 또 크라레스 왕국이 더 커진다면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는 건 똑같을 텐데……. 그런 식으로 얼버무릴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아. 당해 본 자만이 억압받는 서러움을 아는 법. 그렇기에 코린트도 한번 당해 봐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나라들이 많아야 하지. 사실 우리만으로 코린트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또 설혹 그걸 우리가 해낸다면 그건 또 다른 코린트의 탄생일지도 몰라. 가장 좋은 건 여러 나라가 대등한 입장에서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거라네. 그러기 위해서 비밀리에 접촉 중인 몇 나라들이 있지. 그건 그렇고,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세계의 중심인 코 린트로 봤을 때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매우 악한 행위일 수 있고, 또 우리가 패배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평화를 위협한 악당으로 후세에 기억될 거야. 하지만 우 리가 코린트를 이긴다면 역사는 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해 낸 영웅으로 기억해 줄 테지. 어떻게 후세에 남느냐는 우리가 하기에 달린 거겠지만, 나는 이 일에 자네들 이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네.”
“하지만 저희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그다지 큰 힘이 되지 못할 겁니다.”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자네들이 직접 나서서 도와 달라는 건 아니야. 여기 없는 자네들 동료가 우리 일에 협력하도록 설득해 주기만 해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거야.”
“다크 말입니까? 하지만 다크는 저주에 걸려서 아무런 힘도 안 되는데요?”
“휴우, 그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저주를 건 사람이 다름 아닌 나니까 말일세.”
“예?”
모두들 저주를 건 마법사의 얼굴을 몰랐었기에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토지에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때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소드 마스터 때문에 대단히 애를 먹고 있었지. 어쩌면 코린트가 기른 사냥개일 수도 있었고, 또 자네들은 시드미안을 도와 우 리의 뒤를 추격 중이었기에 나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네. 그에게는 약간 어리숙한 점이 있었어. 그러니까 첫 번째 그와 만났을 때 파멸의 불꽃을 먹이면서 알았지. 그는 마법에 대한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것 같았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간단히 흑마법에 정통으로 노출될 리가 없었거든? 그래서 마법사와는 거의 싸 워 본 적이 없다고 결론짓고는 저주를 걸 결심을 하게 되었지. 자네들은 저주가 주는 공포는 알겠지만 저주를 상대에게 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를 거야. 거리 가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또 상대가 마법 보호막을 펼쳐도 안 되지. 하다못해 겨우 1사이클짜리 매직 실드도 못 뚫는다네. 또 축복이 깃든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저주에 걸리지 않지. 하지만 상대가 마법에 무지하다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고 저주를 걸었고, 그 결과는 자네들도 아는 대로야.”
마법사였지만 흑마법에는 매우 무지한 가스톤이 그 말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주에 걸려 자살했던 자신의 선배는 뭐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 고 방심하다가 당했다는 말 아닌가? 가스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저주를 걸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게?”
“그렇네. 일단 저주에 걸리고 난 후에는 축복을 곱절로 받은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소용없지만, 걸리기 전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다르지. 그건 흑마법에 대한 연구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저주 걸기가 그렇게 쉽다면 이 세상에 있는 소드 마스터들 중에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야겠지. 마스터를 상대로 할 때는 거리에 대한 제한은 아주 성가시다네. 그래듀에이트만 되어도 마나의 움직임에 대단히 민감한데, 마스터라면 웬만한 고급 마 법은 아예 쓸 생각을 말아야지. 주문도 다 못 외우고 곧장 머리와 몸통이 분리될 가능성이 더 크니까 말이야.”
“다크가 협조한다고 하면 저주를 풀어 주실 겁니까? 만약 저주를 풀어 준다는 확답만 있다면 그녀는, 아니 그는 협조할 겁니다.”
그 말에 토지에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저주를 푼다는 건 불가능해.”
“예? 저주를 거셨다면 푸는 것도 가능한 것 아닙니까?”
“아니, 나는 위험한 놈을 처치했다는 확신이 들자 바로 저주의 매개물이었던 반지를 공간 이동하면서 공간의 저편에 버렸거든. 다른 공간을 떠돌고 있는 그걸 되 찾아 올 방법은 없다네.”
“흐음, 그 사실을 다크가 안다면 협조는 고사하고 당신을 죽이려고 들겠군요.”
“글쎄 말이야. 그때는 그게 최선의 해결책이었는데. 으음, 설마 마스터급의 실력자가 아직도 주인이 없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나? 그런데 그는 누군가? 진 짜 주인이 없나? 또 누구에게 그런 엄청난 검술을 배웠나?”
“그만! 좀 천천히 질문하세요. 저희도 확실히는 잘 모릅니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뭐?”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엘프 카렐과 얘기하는 걸 옆에서 들었는데, 차원과 시간과 공간이 다른 어떤 곳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나이는 72세라고 했고…….” “뭐? 이계의 인물에, 72세? 말도 안 돼!”
“다크는 말이 된다고 하던데요. 영감님은 마스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있지. 키에리 발렌시아드란 영감탱이를 본 적이 있어.”
“그가 마스터가 되고 나니까 용모가 어떻게 변하던가요?”
그러자 토지에르는 잠시 주저하더니 풀이 죽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마스터가 된 후에는 본 적이 없다네. 그의 용모에 대한 마지막 데이터는 48세로 끝이지. 그는 마스터의 영광을 차지한 후 공식 석상에는 나타 난 적이 없었어. 지금 94세니까 모두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다크의 얘기로는 그게 아니랍니다.”
“뭐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엄청나게 축적된 마나로 인해 자동적으로 육체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젊어진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가 육체에 쌓이면 몸이 버티지 못하니까 방대한 마나를 몸속에 담아 둘 수 있도록 몸이 재구성되는 것이겠지요. 아!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시드미안의 생각입니다. 나 중에 시드미안이 그러더군요. 그 상태로는 마나를 더 이상 저장할 수 없으니까 육체가 바뀌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렇다면 마스터는 매우 젊다는 말인가?”
“다크의 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뭐, 그건 조금 지나 보면 알 수 있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께서 28년 만에 돌아오시니까……. 그분도 요 근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으니, 그분의 모습이 모든 걸 증명해 줄 테지. 하여튼,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해 보게.”
“예, 다크와 카렐의 말로는 저주 걸리기 전 둘의 실력은 거의 비슷한 정도라고 하더군요. 둘이 죽이 척척 맞아가지고는 쑤군거리면서 나중에 힘을 되찾으면 비무 를 하자고 약속까지 하는 걸 우리 모두가 들었다구요. 그러면서 카렐이 힘을 되찾은 후에는 필요도 없겠지만 그 전까지는 도움이 될 거라면서 아쿠아 룰러를 다크에 게 줬지요.”
아쿠아 룰러를 줬다는 말에 토지에르가 놀라서 물었다.
“세상에! 자네들 그 카렐이란 인물을 어디서 만났나?”
“그야, 그레이온 산맥에 있는 카마가스 지대에서 만났죠.”
“그럼 자네들이 고헨시에서 행방불명되었을 때 그레이온 산맥으로 갔다는 말인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희들은 고헨으로 가서 블루드래곤 키아드리아스를 만나러 카마가스 지대로 갔었습니다.”
“드래곤을 만나러 카마가스에 가 보니까 카렐이라는 엘프가 살고 있더라, 이거지?”
“예.”
“그럼 자네들은 이렇게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그 엘프는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가 트랜스포메이션한 존재고, 자네들의 행동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이것들을 아침 식사로 할까 말까 궁리하고 있었다는?”
토지에르의 추측에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에이…, 설마요.”
“설마가 아닐세. 엘프는 파괴만을 일삼는 뇌전이나 불의 정령을 싫어해. 그렇기에 엘프는 대지, 물, 바람의 정령과 가까운 존재들인 그린, 실버, 골드 드래곤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블루나 레드 드래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 때문에 엘프는 그 두 드래곤의 레어 주변에는 살지 않아. 그런데 거기서 엘프를 봤다면 그건 드래곤 자신이었을 거야. 참, 그건 그렇고 다크가 그렇게 강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와 거의 비등한 힘을 지녔었다니…….?
“한 방에 타이탄까지 박살 낸 인물인데, 뭐 그 정도 실력은 가지고 있겠죠. 어쩌면 한 방에 드래곤까지 골로 보낼지 누가 압니까?”
“설마? 아니야, 그런 자가 타이탄을 타고 있다면 정말 한 방에 드래곤까지 작살낼지도 모르지……. 어쨌든 강력한 우군을 놓쳐 버렸군.”
“그건 그렇고, 다크는 어디 있습니까?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감시하기 편한 곳에 가둬 뒀네. 물론 감옥 같은 곳은 아니야. 왕궁 한쪽 방에 머무르게 하고, 감시 역으로 하녀하고 그래듀에이트 한 명을 붙여 뒀으니 말썽은 부 리지 못할 거야. 어쨌거나 그 전에 얼마나 대단했던지 간에 저주에 걸리면 그 대상의 몸으로 완전히 바뀌면서 몸속에 쌓인 마나고 뭐고 몽땅 상실하게 되어 있지. 저 주의 무서움은 바로 그거니까……. 기억은 그대로면서 몸만 딴 것으로 바뀌어 버려 상대를 절망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 뛰어난 인물일수록 그 현실을 견디기는 힘 들 것이고, 나중에는 자살 외에는 답이 안 나오지. 그런데 그 녀석은 생생하게 잘도 살아 있더군. 나를 보더니 이를 갈면서 아주 죽이려고 들던데?”
그 말에 팔시온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 마법사님 같은 경우 상대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힘이 약하다 뿐이지 기술은 매우 뛰어나거든요. 말씀하셨다시피 기억은 온전하니까 말이죠. 저희들도 몇 대 맞을 정도예요. 그 녀석도 처음에는 거의 자포자기해서 술에 찌들어 살았는데, 우연히 만난 마법사 한 분의 단순한 격려 몇 마디에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수련을 시 작하더군요. 저희도 겨우 그런 말에 정신 차리고 재기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흐음,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이 우리 일을 도와줄까?”
“아마 단념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오히려 훼방이나 안 놓으면 다행이죠.”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진 널찍한 저택……. 이 집은 꽤나 높은 마법사 나으리의 여름 별장이었지만 지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주인이 아닌 객(客)이 쓰고 있었다.
“뭐야? 놓쳤다고?”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코앞까지 추격해 들어갔을 때 공간 이동해 버렸기에…….”
“그놈들의 본거지에는 사람을 보냈나?”
“예, 매키니 경이 갔지만 그곳도 역시 빈집이었다고 합니다. 놈들은 모두 공간 이동용 마법 반지를 휴대하고 있기 때문에 잡는 게 매우 힘듭니다.”
“바보 같은 놈들!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 압력을 넣어 통신 마법의 발신처를 겨우 알아냈는데……. 쓰레기 같은 녀석들! 물러가라.”
“예, 백작 각하.”
백작이라 불린, 당당한 체구에 멋진 콧수염을 달고 있는 40대 초반의 무사는 꽤나 호화로운 복장을 걸치고 있었고, 허리에 찬 호화로운 롱 소드가 아주 잘 어울렸 다. 그는 보고를 올린 부하 녀석을 물리치고는 창가에 서서 아름다운 꽃들이 핀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지오네에게서 온 연락은?”
그러자 심기가 불편한 상관을 조심스런 눈길로 살피고 있던 인물들 중에서 아마도 마법사인 듯싶은 날씬한 여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백작 각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움이 되는 놈은 하나도 없군. 머저리 같은 것들! 본국에서 타이탄을 스물한 대나 끌고 오면 뭐 하냔 말이다. 상대가 없는데…….”
“백작 각하.”
“뭐냐?”
“키메라를 조사하러 갔던 미테오로부터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런 특이한 형상의 키메라를 제작한 사람은 없다는 보고입니다. 키메라 자체가 각 생물을 조합해서 만드는 마법 생물인 만큼 서로 간의 짜깁기는 가능해도 완전히 새로운 어떤 생명체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좋아. 키메라 쪽은 기대도 안 했다. 미테오를 불러 들여라.”
“예.”
“그리고 마법사 길드에 압력을 가해 공간 이동이나 특히 통신 마법의 발신처를 알아내 두더지들을 사냥해 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어서 오게나, 시드미안.”
“네 녀석은?”
시드미안이 도미니크와 함께 여관방으로 들어섰을 때, 방 안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세 명 더 있었다. 그들은 시드미안이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데 아무런 보탬 이 안 되기에 고헨에 남겨 놓고 간 안토니와 스미온을 결박한 채 목에 칼까지 들이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방 안에다가 널찍한 마법진까지 그려 놓은 걸 보면 꽤나 오래전에 도착해서 준비하며 기다린 모양이었다.
“서툰 짓은 하지 말게. 설마 고헨시 안에서 타이탄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된다구. 또 동료들의 목숨이 아깝다면 그런 행동은 자제해야 할 거야……. 그리고 팔시온인가 하는 녀석의 패거리들도 우리가 가둬 뒀지. 꽤나 애를 먹이더니 막상 손을 쓰니까 아주 쉽게 잡히더군.”
시드미안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꽤나 대단한 인물들이 몇 명 더 있는 것을 알았지만, 지오네처럼 코린트에서 파견 나온 기사라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이 지 않았던 것이 실책이었다. 시드미안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은 어떤 나라의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고작 하는 짓이…….”
그러자 상대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시작햇!”
뒤에 서 있던 마법사가 곧장 시동어를 외쳤다.
“슬립(Sle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