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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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린은 어쩔 줄 몰라하면서 황망하게 말해서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다 못한 사만다가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어휴, 진정하세요. 우리도 애 무진장 잃어먹었어요!”
그리고 사만다는 주위의 엄청난 시선에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칼이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러니까, 좀비들을 막아서느라 집중하던 사이에 사라진 것 같다고요?”
“예, 예. 아까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을 때, 아아! 그것을 맥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니! 그래서 그것을 보다가 문득 슈가 놀라지 않을까 싶어서 돌 아보았는데, 그때 안 보이는 것이에요. 이렇게 멍청했다니! 어떻게 그것을 멍하게 바라볼 수가!”
이루릴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이루릴이 상당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루릴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칼이 명령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요. 모두 흩어져서 찾아봅시다. 에델린께서는 환자를 지켜주십시오.”
모두들 신전 바깥으로 달려나왔다. 터커가 말했다.
“보자, 우리와 좀비가 바로 저 아래에서 싸웠으니까 그쪽은 아니고. 그렇다면 신전 뒤쪽의 산인가?”
우리는 일단 신전 뒤쪽으로 돌아가보았다. 산이라고 하긴 하지만 그것은 야트막한 야산의 산허리 정도였고 그렇게 험악한 지세는 아니었다. 터커는 사만다를 흘깃 보았지만 사만다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두 갈래가 아니잖아?”
하긴 그저 야트막한 산과 숲이 있을 뿐이니까. 커다란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라 숲 아래쪽에는 잡풀 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숲 사이로 얼마든지 걸 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터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자국을 찾기 시작했다.
“조그만 애의 발자국을 찾아보지.”
하지만 그것도 막막하다. 우리는 흩어져서 땅을 노려보았지만, 온통 딱딱한 땅이라 무슨 발자국이 남아 있을 여지가 없다. 게다가 낙엽들도 꽤 뿌려 져 있으니 무슨 발자국이………………
“이게 뭐지?”
낙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던 크라일이 땅에서 무얼 집어들었다. 우린 그에게 다가갔다. 크라일은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앙증맞은 빨간색 구슬로 가운데를 관통하는 가느다란 구멍이 있었다. 난 탄성을 질렀다.
“목걸이! 그 목걸이!”
샌슨도 입을 쩍 벌리며 좋아했다. 내가 슈에게 준 그 목걸이에 있던 구슬이다.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빠서 돌려받는 것을 잊었는데. 그것이 여기 떨어 져 있다는 말은 슈가 여기를 지나갔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시 흩어져 작은 구슬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걸이의 일부이던 작은 것을 찾아내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찾는 물건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잠시 후 다시 찾아내었다. 이번에도 크라일이 찾아내었다.
“또 있어!”
그것은 처음의 것이 있던 자리에서 약 30큐빗쯤 떨어진 위치였다. 우리는 첫 번째 구슬과 두 번째 구슬, 그리고 신전, 이렇게 세 개를 눈으로 이어보 았다. 직선이었다. 터커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좋아. 이거 꼭 옛날 이야기 같은데 말이야, 그 꼬마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자, 이걸 하나씩 떨어뜨리며 갔다?”
사만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건 너무 이상해. 일단 목걸이를 떨어뜨릴 정도라면 손발이 자유스러웠을걸? 그럼 입도 자유스러웠을 테니 고함을 지를 수도 있었을 텐데?” “입이 막혔다면?”
“터커! 입은 막고 손발은 마음대로?”
‘누군가가 슈의 입을 막은 채 끌고 가고 있다. 슈는 목걸이를 꺼내어 그것을 조심스럽게 분해한 다음 하나씩 떨어뜨린다. 그 동안 납치자는 참 똑똑 한 아이라는 듯이 슈를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는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목걸이 조각이 떨어져 있던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세 번째도 크라일이 발견했다.
“어이쿠!”
갑자기 크라일은 발을 하늘로 향하며 나가떨어졌다. 놀란 우리가 다가가 보니 땅에는 목걸이 구슬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크라일은 그것을 밟았던 모양이다.
“으윽. 허리야.”
터커는 크라일을 부축할 생각도 하지 않고는 땅에 떨어진 구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애가 끌려가다가 어떻게 목걸이가 끊어진 거야. 아마 반항하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아마 달려가고 있었을걸? 그래서 한 두개씩 실에서 빠져나오다가 여기서 주루룩 다 떨어진 거야. 이 떨어진 모양을 보라고!”
그러고 보니 구슬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약간 길게 늘어선 모양을 이루고 떨어져 있었다. 터커의 말이 맞을 듯한데? 우리는 기세를 올려서 그쪽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펠레일은 장기대로 앞쪽의 지형과 양쪽의 지형을 살피더니 말했다.
“이 앞쪽은 아마도 계곡으로 이어질 듯합니다. 이 영지를 둘러싼 산악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요.”
터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거기 뭔가 있어! 아마 이 영지가 세이크럴라이즈된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 어쩌면 애들도 모두 그쪽으로 납치되어 간 것일지도 몰라!”
이루릴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모두 멈추게 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당신이 듣는 것을 내게도 들려줘요.”
이루릴은 잠시 집중하듯이 서 있더니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달려요! 저 앞쪽, 4000큐빗 정도에서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요!”
“4000큐빗! 그 발소리가 들려요?”
“실프가 들려주니까요. 하지만 오래는 안 돼요. 실프와 교감을 유지하면서 달리는 것은 어려워요.”
우리는 황급히 이루릴이 지시해 주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해를 다 가려버려 숲 아래쪽은 단단한 땅이었다. 그렇다고 달리기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난 두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졌다. 절대로! 앞에서 달려가는 이루릴의 가죽 바지의 저 멋진 어느 부분 때문이 아니다! 난 낙엽에 미끄러진 것이다.
이루릴은 정말 가볍게 달려갔다. 실프와 교감을 유지하며 달리는 것은 어렵다고? 하지만 그녀는 우리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통통 튀듯이 경쾌하게 달려갔다. 샌슨과 크라일은 그야말로 두 마리의 멧돼지처럼 씨근거리며 달려갔지만 그래도 이루릴을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아. 놓쳤어요.”
이루릴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더니 말했다.
“하지만 줄곧 같은 방향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달려갈 태세였다. 미치겠네! 숲 사이의 울퉁불퉁한 땅을 저렇게 사슴처럼 달려가다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볼이 벌겋게 되어 씩씩거렸 다. 이루릴은 달려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천천히 가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지쳐서 도착하면 안 되겠죠.”
샌슨은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헉헉거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 스스로 도저히 못 견디게 되 어버렸다. 어린애가 납치를 당했다는 현실이 자꾸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결국 차츰 발걸음이 빨라지다가 성큼성큼 걷는다고 표현하기엔 좀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즉, 달려갔다.
두 번째로 우리를 정지시킨 것은 펠레일이었다.
“잠깐………, 멈추십시오.”
펠레일은 헉헉거리면서 주의 깊은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바라본다면, 후우, 지금부터 우리가 보일 겁니다. 헉헉, 나무들이 적어지니 시야가 좋지요?”
그러고 보니 드디어 계곡이 드러났다. 양쪽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산악 사이로 나무들이 적어지며 숲의 끄트머리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앞쪽으로는 우리를 막아선 벼랑이 보였다. 벼랑은 한 500큐빗은 되어보였다. 펠레일은 벼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른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 같은 것이 보이는데…………… 나무들 때문에 위쪽이 잘 안 보이는군요. 하지만 위에선 우리가 잘 보일 겁니다.”
터커가 말했다.
“위에서 감시할까?”
“모험을 해볼까요?”
“저 벼랑을 올라간다면, 어차피 위에선 우리가 보일 거야. 그런데 위쪽에서 누가 공격한다면 정말 싫은데.”
그때 크라일이 말했다.
“위가 아냐. 옆이다.”
크라일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벼랑을 오른쪽으로 길게 따라간 부분에 동굴이 보였다. 터커는 동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기인 것 같지?”
우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주의 깊게 그 동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벼랑의 크기로 봐선 의외로 깊은 동굴일 수도 있겠는데………….”
펠레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혀를 찼다. 펠레일은 아마 산의 모양만 보면 그 산 너머 마을의 처녀의 이름도 맞출 것 같군. 동굴은 마치 벼 랑 사이로 위아래로 길게 벌어진 틈 같았다. 입구의 높이는 약 30큐빗 정도. 넓이도 꽤 넓어서 10큐빗은 되어보였다. 들어서는 입구는 바위들 때문에 울퉁불퉁했다. 우리는 약간 멀리서 관찰해 본 다음, 입구로 들어섰다.
“자, 확인됐어.”
이상한 말을 하며 터커가 들어올린 것은 조그만 신발이었다. 아주 작은 꼬마나 신을 만한 신발.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안을 살펴보니 꽤 깊은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타고 들어가 한참을 내려가게 되는 모양이었다. 터커가 말했다.
“불은?”
이루릴이 손을 모으더니 당장 윌로위스프를 불러내었다. 터커는 허공을 떠도는 작은 빛덩어리를 보면서 킥킥 웃었다.
“이루릴. 혹시 우리랑 같이 모험해 볼 생각 없소?”
“제겐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아쉽군.”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형식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종유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갑자기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꼭 우리 영주님 성의 홀처럼 엄청난 공간이 나타나자 우리들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 았다. 그때 펠레일이 신음소리처럼 말했다.
“이건 자연적인 게 아니군요.”
펠레일이 가리킨 방향을 보며 우리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종유석들이 창살처럼 앞을 막는 곳에서 몇 개가 잘려져 길이 나 있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과연 그 뒤쪽으로는 좀 작은 동굴이 있었다.
“인간일까?”
“바위를 잘라낼 줄 안다면…………. 그리고 꽤 많을걸. 혼자서 저렇게 해놓을 순 없겠지?”
“이거, 뭔가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 점점 기분이 이상하다. 이건 한두 명의 소행이 아닐 것이다. 꽤 커다란 집단의 소행이다. 혹시 그 집단이 이 땅을 세이크럴라이즈했다는 말 인가? 터커는 일행을 정지시켰다.
“제기랄. 그렇다면 조심해야 되겠군. 모두 좀 있다가 날 따라와요.”
터커는 주의 깊게 걷기 시작했다. 먼저 자기가 디딜 땅을 핼버드로 쿡쿡 찔러보고 디뎠다. 그리고 그 위의 공간도 모두 휘저어 보았다. 느릿하고 주 의 깊은 동작이었다. 우리는 터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우리도 천천히 걸어갔으므로 터커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도 재빨리 멈춰 설 수 있었다.
터커는 허공 한 지점에 핼버드를 멈춘 자세로 잠시 서 있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매우 느린 동작으로 핼버드를 내렸다. 그리고 똑같 이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터커의 손이 허공을 만지는 듯했다. 그는 아주 섬세하게 손가락을 스윽 허공에 문질렀다.
“실이 있어.”
우리는 모두 바짝 긴장했다. 터커는 허공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을 만져보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로 그것을 밀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리고 터커는 허 리를 깊이 숙여 앞으로 걸어갔다. 터커는 앞으로 좀 걷더니 옆으로 서서는 핼버드를 수평으로 들어보였다.
“이 정도 높이. 아래로 지나와요.”
하지만 실이 보이지 않으니 무진장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펠레일과 이루릴, 칼은 허리를 숙이며 부드럽게 빠져나갔지만 샌슨과 크라일은 자 신들의 덩치를 생각했는지 아예 네 발로 기었다. 사만다와 나도 불안해서 품위고 뭐고 생각할 것 없이 기어서 지나갔다.
사만다는 다시 일어서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울상이 되었다.
“박쥐똥이야…….”
우리는 손바닥을 털고 무릎도 턴 다음 다시 전진했다.
다시 터커가 멈춰 섰을 때 소름이 쫙 돋았다. 또 함정인가? 그러나 터커는 갑자기 이루릴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러자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 더니 윌로위스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다가왔다. 그 어둠 속에서 터커의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앞쪽에 불빛이 보입니다.”
뭐가 보여? 정말 불빛이 보였다. 마치 칼날처럼 곤두선 불빛이다. 왜 저렇게 보이는 것이지? 터커가 말했다.
“동굴 벽에 손을 짚고 천천히 걸어와요.”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갑자기 불빛이 확 밝아지면서 앞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두 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교차로 튀어나와 S자를 이루고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 너머의 불빛이 가늘게 보였던 것이다. 터커는 바닥에 배를 붙이 더니 우리들도 모두 엎드리도록 손짓했다. 우리는 엎드린 채 터커의 옆으로 다가갔다.
불빛이 비쳐나오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간 공간에서였다. 저 아래쪽엔 양초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었는데, 거기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불빛 때문에 사람들의 옷이 모두 갈색으로 보였다. 모두 단순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제멋대로 앉아서 뭔가 먹거나 뭘 읽거나 하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꽤 커다란 부대들이 보였다. 무슨 밀가루 부대인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물통인지 술통인지, 하여튼 나무통도 보였다. 취사 도구처럼 보이는 물건들도 바위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릇, 나이프, 접시, 냄비 등.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아! 난 입을 꽉 막았다.
아이들이었다. 저 아래의 바닥 끝에 좀더 낮은 바닥에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훌쩍거리거나 떠들지도 않고 모두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마치 백치 같은 얼굴. 모두 50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끄트머리에는 슈의 모습도 보였다. 샌슨의 눈에 불꽃이 튕기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어!”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크라일이 이를 갈고 있었다. 터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놈들일까?”
“두드려패고 물어보지.”
터커는 침착하게 말했다.
“조심해야 되겠어. 아이들을 소리소문 없이 데려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예사 실력이 아니다. 게다가 마을 가까운 곳에 이 정도의 설비를 갖추 고 있다면…….”
“그래봐야 네 놈이야. 우린 여덟이고.”
그때 이루릴이 낮게 중얼거렸다.
“밤의 이슬 속에서도 젖지 않는 하나의 모래의 주인이며 휴식의 수호자,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저들을 달래줘요.”
샌드맨이군. 저들을 재울 계획이구나. 우리는 아래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네 명 중 하나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 았다.
“Aha………… Kashnep inma che dollar eerup?”
“Tiken un shemmi? Draheny eavllumm inma jian pnahe.”
그들은 서로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켜고 머리를 휘저었다. 크라일은 기겁했다.
“뭐, 뭐야? 저게 무슨 말이야?”
그때 칼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아, 낮인데 왜 이렇게 졸린 거지?’ ‘동굴에 있잖아? 밤낮이 구별 안 되니까..”
샌슨이 놀란 얼굴로 칼을 돌아보았다. 칼은 말했다.
“자이펀어군.”
터커의 입매가 올라갔다. 웃느라 그런 것이 아니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아니 우리 대부분은 어이가 없어졌다.
자이펀이라니. 그건 저 남쪽에 있지 않은가? 잠깐, 잠깐. 여긴 우리 고향이 아니지. 우린 미드 그레이드에 들어섰으니, 자이펀과는 조금 가까워진 셈 이지. 하지만 그래도 남쪽으로 사우스 그레이드를 한참 지나야 자이펀이 나오지 않는가?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일단 기다렸다. 아래의 네 명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하나는 편히 드러누워 잠들었고, 어떤 친구 는 앉아서 졸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네 명이 모두 잠들고 나서, 우린 천천히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서자, 터커는 당장 품속에서 나이프 하나를 꺼내었다. 그는 칼을 보며 말했다.
“어느 놈을 살려둘까요?”
칼이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터커는 다시 말했다.
“어느 놈이 지휘관일까요?”
“여보시오, 다 죽일 셈이오?”
“이놈들은 간첩일 겁니다.”
“일단 묶읍시다. 간첩이라면 판결은 국법에 맡깁시다.”
터커는 이를 드러내며 더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사만다가 나섰다.
“터커.”
터커는 사만다를 보더니 거친 동작으로 다시 나이프를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잠시 쓰러진 네 명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이펀 놈들이 바이서스 한가운데에…………. 이놈들을 그냥!”
터커는 당장에라도 핼버드를 후려칠 기세였다. 꽤 화나는 모양인데. 평소엔 침착하더니 왜 저러는 거야. 사만다는 그를 말리는 간단한 방법을 생각 해냈다.
“터커, 밧줄을 좀 찾아봐.”
터커는 구시렁거리며 한쪽의 밀가루 부대와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도 밧줄을 찾아보기 시작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터커가 말했 다.
“손발의 근육을 끊으면 되잖아?”
칼은 질린 표정으로 터커를 바라보았고 크라일마저도 좀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터커는 뭐 어떠냐는 식의 표정이었다. 어쨌든 나무통을 뒤지던 샌슨 이 그중 하나에서 밧줄을 찾아내어 그런 끔찍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네 명은 각자 쇼트 소드라든가 대거 등의 무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별로 중무장도 아니었고 갑옷도 입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무장들을 살짝 풀어내고 네 명을 묶었다. 어찌나 깊이 잠들어 있는지 손발을 다 묶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완전히 다 묶고 나자, 터커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 작자들 정말 일어나지 않는데, 깨우지 못하는 겁니까?”
“아뇨, 깊이 잠든 것뿐입니다. 강한 충격을 주면 일어날 거예요.”
“그렇습니까?”
이루릴의 대답과 동시에 터커는 한 명의 멱살을 휙 끌어올리더니 그대로 뺨을 후려쳤다. 쫘아악!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변을 당한 그자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투였다. 그는 머리가 어지러운지 휘휘 고개를 젓다가 한참만에 눈에 초점을 맞추 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동료들도 모조리 묶인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Cashine nharphe! it—na hagasa nharphe!”
그 작자의 멱살을 쥐고 있던 터커가 씨익 웃었다. 쾅!
무지막지하군. 터커는 멱살을 당기며 그대로 이마로 받아버린 것이다. 정말 멋진 박치기다. 당장 상대의 코가 뭉개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우리 말로 떠들어. 여긴 네놈들 물개 새끼들의 썩어문드러질 항구가 아니야.”
사만다가 화난 동작으로 터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물러나!”
“어, 사만다.”
“물러나! 이런, 짐승 같아! 뭐하는 짓이야? 이루릴 양 보기에 부끄럽네.”
터커는 이루릴을 보더니 뒤통수를 좀 긁으며 물러났다. 이루릴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터커 씨는 당신과 반대군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고 머리로 받아버렸으니까. 이루릴은 인간들끼리 나라가 나뉘어진다는 개념을 알 까? 그리고, 갑자기 궁금한 것이 있는걸.
“저, 이루릴 자이펀의 엘프는 그럼 자이펀어를 하나요?”
이루릴은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자이펀에는 엘프가 없어요. 거긴 숲이 별로 없답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사만다는 코피가 터진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작자는 귀싸대기를 두드려맞고 연이어 박치기를 당해서 기절해 버렸다. 사만다는 터커를 한 번 흘겨보더니 다른 사람을 깨웠다. 물론 터커완 다르게 어깨를 흔드는 식으로 깨웠다.
그 작자도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칼이 앞으로 나섰다.
“Ime youkchi Djipenian. Tanda nagarse un Bisus?”
칼은 조금씩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훌륭하게 말했다. 우리는 감탄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고 그 작자는 이를 악물면서 대답했다.
“Bisus? Ckraap-moinar atlla hahch e daune!”
“뭐라는 거예요?”
샌슨이 물었다. 칼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 자이펀인이지. 바이서스에선 뭘 하는 거냐? 라고 물었네.”
“대답은요?”
“바이서스? 땅개 새끼들의 썩어문드러질 땅굴도 나라냐?”.”
“푸하하하!”
그만 웃음을 참을 수 없어졌다. 터커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대답한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고 크라일은 빙긋거리며 말했다.
“똑같군, 똑같아.”
“입 조심해!”
“알았어. 킥킥킥.”
터커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칼 씨!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네놈들의 제사에 사용되는 낙타는 어떻게 되느냐?”
무슨 말이야, 이게? 그때 그 남자가 말했다.
“목의 동맥을 자른 다음 피를 뽑아내고,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사지를 잘라내지. 그때까지 죽으면 안 되지.”
샌슨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말을 하네?”
터커도 좀 놀란 표정이더니 다시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간첩이 되려면 우리 말도 잘 익혀야겠지. 이 자식아, 네놈들의 그 낙타처럼 해줄까?”
“하겠다면 말릴 수는 없겠군. 팔이 묶였으니.”
남자는 대단히 침착한 태도였다. 듣고 있는 우리가 무서울 지경이다. 하지만 터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외쳤다.
“오냐, 하라면 못할 것 같아? 이 자식아!”
터커는 또 나이프를 뽑아들었고, 당장 사만다의 발이 터커의 정강이로 날았다. 터커는 정강이를 움켜쥐고 팔짝팔짝 뛰었다. 사만다는 고함질렀다. “가만히 못 있어? 엉?”
“저 자식은 자이펀 놈이란 말이야! 내가 가만히 있으면 죽은 내 전우들이 무덤 속에서 이를 갈 거야!”
사만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우? 전우 좋아하시네. 용병으로 참전했던 주제에 전우애도 있었다는 거야?”
“용병은 전우애도 없는 괴물딱지인 줄 알아!”
“뭐, 돈만 많이 줬다면 자이펀에 고용되어 싸울 수도 있었겠지. 네가 머리가 나빠서 자이펀어를 배우지 못했으니까 자이펀 용병은 되지 못한 거 아 “냐?”
사만다가 유들거리면서 농담처럼 말하자 터커도 더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사만다는 윙크까지 해버렸고 터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만다는 묶여 있는 남자를 돌아보더니 상냥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제 동료의 무례함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었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재차 질문했지만 남자는 아예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그때 칼이 말했다.
“크레틴 양. 자이펀에서는 아내 아닌 여자와는 말하지 않아요.”
허? 그거 괴상한 관습이군. 사만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음…………. 혹시 저 아이들을 납치했는지 물어봐 주겠어요?”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듣고 있는 나도 좀 어처구니없다. 저기 아이들이 있는데 납치한 거냐고 묻는다니, 우습지 않은가? 남자도 하도 기가 막혀서 말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
퍽!
음, 똑같군. 사만다는 남자의 턱을 올려진 것이다. 멋진 어퍼컷이다. 남자는 완전히 턱이 돌았고 사만다는 아픈 주먹을 움켜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걸로 모자라 사만다는 들고 있던 참나무 로드로 후려치려는 자세를 취했다. 결국 크라일이 그것을 말렸다. 크라일은 사만다의 로드를 빼앗았다. “이봐, 이거 이러면 당신이 터커 나무란 것이 우습잖아?”
사만다는 부어오르는 주먹을 꽉 쥔 채 매서운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크라일은 한숨을 쉬더니 남자에게 질문했다.
“이봐, 성직자의 주먹 맛이 어때?”
남자는 혀로 입 안을 조사하는 것처럼 우물거리더니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말했다.
“꽤 맵군.”
“저 아래 영지가 세이크리드 랜드가 된 건 알겠지? 네놈들 짓이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크라일은 손가락을 뚜둑 꺾었다.
“뭐, 일단 당신들을 체포해서 넘기면 다 알게 될 일이지만, 먼저 좀 말해 주지?”
왠지 크라일과 터커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때 주위를 뒤적거리던 펠레일이 서류 같은 것을 찾아 들고 왔다. 그는 칼 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읽으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남자는 칼을 노려보았고 칼은 빙긋 웃으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자네 표정을 보니 이건 대단한 서류군. 그리고 자네에겐 불행하게도, 난 자이펀 글을 읽을 줄 안다네.”
남자는 이를 갈았다. 칼은 여유 있는 태도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한두 줄 읽어내려가던 칼의 시선에 흥미가 떠올랐다. 이윽고 칼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글을 읽어내려갔다. 정신없이 종이들을 넘기며 열중하는 모 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입도 제대로 못 열고 칼만을 바라보았다.
칼은 그 서류를 다 읽고 나더니 침착하게 그것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칼은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콰악!
맙소사! 물들었어! 물들었다고! 칼은 그 남자의 턱을 걷어찬 것이다. 사만다의 앙증스러운(?) 주먹이 아니다. 남자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샌슨은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내 표정도 아마 저렇겠지. 먼저 시작한 터커나 사만다도 황당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은 침착하게 발을 조금 흔들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발목이 조금 쑤시는군.”
“……그게 뭡니까?”
당황에서 깨어난 것은 이루릴의 질문 때문이었다. 칼은 이루릴을 바라보더니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부끄러운 일면을 보여드리는군요. 이 글은…….”
칼은 고개를 휘휘 젓더니 그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이크리드 랜드 조장에 관한 실험 보고서.”
우리는 모두 흠칫했다. 칼은 침울하게 읽어내려갔다.
“복잡한 거 다 빼고 간단히 읽겠소. 음. ・대상지는, 작전? 아니, 계획, 계획된 대로 한적한 시골 마을로 정해졌습니다. ………… 미드 그레이드의 중심 부로 자이펀이 의심받지 않을 영지를 물색했습니다. …………영지의 위치는 별첨한 지도에 따릅니다.”
우리는 서서히 싸늘하게 등골을 후리고 지나가는 무엇을 느꼈다.
“진행은 순조로웠습니다…………. 유소년기 아동의, 정신? 이건, 번역이 좀 자신 없군. 어쨌든 유소년기 아동의 무엇을 사용하여 제례, 제사, 의식? 의식 이 맞겠군 의식을 진행…………, 영지의 주민 90% 이상이 질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재래의 독약을 타는 수법에 비해 볼 때 훨씬 빠르고 순조로울 것이 라던 참모진의 말은 정확했습니다. 확실히 공기, 물, 땅, 모든 것들이 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몇 가지 발생했습니 다. 첫째, 질병으로 사망한 자들이 언데드 몬스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나 저의 소견으로는 언데드 몬스터도 하나의 질 병이므로 당연하다고 보아집니다. 다른 대원들의 의견도 대략 저와 일치합니다.”
손을 너무 꽉 쥐어 손가락이 아파왔다. 칼은 종이를 휘적휘적 넘기며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모험가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영지에 들어옴으로써 두 번째의 부작용이 밝혀졌습니다. 모험가들 집단이 두 번 방문했습니다. 그들의 인 원은….., 이건 필요없겠지. 우리들의 이야기야. …………첫 번째 집단은 영지의 주민과 마찬가지로 질병에 감염되었으나 두 번째 집단에는 흔히들 이 나 라에서는 ‘치료하는 손’이라 부르는 그랜드스톰의 에델린이 있었습니다. 에델린에 대한 상세 보고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기상 변화의 마 법으로 하늘에 먹구름을 만들어 태양을 가리자 질병의 전파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어쩌면 흐린 날씨에서는 이 방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할 것 같은 우려를 느낍니다.”
칼은 뒤를 좀더 넘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쓰던 도중이었어. 완결되진 않았군.”
우리는 일제히 묶여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누구야?”
터커는 남자를 죽이겠다고 떠들었고 사만다도 이번엔 별로 말리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그리고 크라일은 팔치온을 꺼내어 칼춤을 추어대어서 주위 사람들의 등골이 오싹하도록 만들었다.
“이 자식이!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했어! 이분들이 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 아냐? 야이, 개자식들아! 남의 나라에다가 이런 흉악한 짓을 해?”
남자는 유들거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이런 실험을 할까?”
“크아아아!”
크라일을 말리기 위해 샌슨과 펠레일이 달려들었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그의 팔치온을 뺏은 다음 그를 밀어내었다. 크라 일은 내게는 힘으로 당하지는 못하고 악을 바락바락 썼다.
“이 꼬마놈이! 그거 못 돌려줘?”
“계속 그러시면 이거 부러뜨릴지도 몰라요. 좀 참아요. 똑같은 사람이 되진 말자구요.”
크라일은 씨근거렸고, 난 잠시 동안은 팔치온을 돌려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펠레일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휴, 이제 설명이 되는군요. 저 아동들의 정신….., 아마 아동들 특유의 전신앙이 아닐까 합니다만, 어쨌든 아동들을 제물로 바쳐 그런 짓을 저지른 모양이군요.”
펠레일은 밧줄에 묶인 그 자이펀 간첩을 쏘아보았다.
“마법의 가장 지독한 영역에서나 취급되는 것들로 신의 힘을 불러내었군요. 마력과 신력을 조화시킨 것은 대단한 기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참으 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런 대단한 능력으로 이따위 짓을 하다니.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앞에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뒤의 질문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남자는 우울한 시선으로 펠레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칼은 서류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 보고서를 다 썼다면 좋았을 텐데. 저 남자가 말해 줄까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펠레일은 음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칼이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서 같이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펠레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칼에게 고개를 돌렸 다.
“이 보고서…………, 제가 보기엔 글씨가 참 좋습니다?”
“예?”
“글은 모르지만, 둥글둥글하고 섬세한 것이 남자들의 글씨 같지는 않은데요?”
칼은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서류를 보았다.
“이럴 수가. 당신 말이 맞아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자에게 말했다.
“이상했어요. 보고서를 쓰던 도중에 그만두었는데, 당신들은 모두 그렇게 급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지요. 느긋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보고서를 쓰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급히 어디로 갈 일이 있었겠지요. 다섯 번째 여자는 누굽니까? 그 여자는 어디에 갔지요?”
남자는 비웃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것을 말할 것 같은가?’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터커가 고함질렀다.
“그놈 내게 맡겨! 노래를 부르게 해주지!”
그때였다. 동굴에서 절대로 만날 것 같지 않던 것,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휘우우웅!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순식간에 위아래도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으나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발을 벌리고, 허리를 곧 게 세우려 했다. 그러나 너무 캄캄하다 보니 도대체 균형이 잡히질 않았다. 쾅! 누군가가 엉덩방아를 찧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터커 일행은 모두 숙련된 모험가들이니까. 그리고 칼이나 샌슨도 모두 입을 다물었고 그러다보니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위험해!”
이루릴의 고함소리. 갑자기 암흑 속 어딘가에서 불꽃이 튀겼다. 챙! 챙! 다시 불꽃이 연이어 튀겼다. 누군가가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와, 살벌해! 이루릴은 고함질렀다.
“모두 엎드려요!”
나는 납작 엎드렸다. 턱이 아래의 바위에 부딪혀 눈앞에 별이 보인다. 이루릴은 외쳤다.
“펠레일! 왼손 방향으로 굴러가요!”
챙! 다시 불꽃. 누군가의 신음소리. 정신이 없다. 암흑, 불꽃, 칼의 충돌음. 그 혼돈의 와중에서 난 간신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 보고서를 쓰던 다섯 번째의 여자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바람을 일으켜 촛불을 껐다. 그 여자는 암흑 속에서도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루릴도 암흑 속에서 눈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지금 칼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대단하군. 이루릴과 맞서 싸울 수 있으면 상당한 검술 실 력이 있나 보지? 그때였다.
“라이트!”
펠레일의 고함소리. 그리고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의 빛. 억지로 눈을 떠보니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 펠레일이 동굴 천장에 무슨 주문을 걸어버린 모 양이다. 동굴 천장에 희미한 광점이 매달려 있었고 주위의 모습이 식별되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껌벅거리면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과연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루릴이 어떤 여자와 싸우고 있었다. 그 여자는 레이피어로 이루릴 의 에스터크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검은 옷에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 뱀파이어다!
“하아압!”
샌슨이 뱀파이어의 측면에서 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 뱀파이어 여자는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샌슨은 허공을 치고 말았다. “호핑! 어디로?”
이루릴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만다가 고함질렀다.
“입구!”
우리가 들어온 입구에 그 여자의 모습이 서 있었다.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이루릴을 겨냥했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여! 무엇 때문에 인간의 일에 간섭하는가!”
이루릴은 잠깐 멈춰 서서 대답했다.
“이들은 내 친구니까. 당신은 암흑의 주민으로서 왜 인간의 일에 끼어드는 거지?”
“이들은 내 먹이니까. 호호호홋!”
우리들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아예 머리를 휘저으며 웃기 시작했다.
“엘프가 동굴 속에서 죽다니, 하! 드워프가 바다에 빠져죽는 것보다 더 웃기는데?”
우리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 여자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갑자기 그 여자는 벽의 한 부분을 쳤다. 그러고는 모습이 바뀌었다. 그 여자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곧 안개가 되어버렸다. 안개는 그대로 엷어지며 동굴 바깥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샌슨의 얼떨떨한 질문에 대한 답은 대단히 기분 나쁘게 돌아왔다.
우르르르….. 쫙, 쫘자아아아…………….
갑자기 불빛이 일렁거렸다. 우리는 위를 쳐다보았다. 천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펠레일이 천장에 붙여둔 광점이 흔들리는 것이다. 천장은 금 이 쫙쫙 가면서 돌가루가 떨어져내렸다.
“제기랄! 뛰어!”
우리는 후다닥 달려나가려 했다. 그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아이들,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저기 있다. 그리고 붙잡아둔 포로들, 그들은 모두 손발이 묶여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심문하던 남자는 무섭게 웃고 있었다. 난 저 웃음이 싫다.
“아이들은? 포로들은?”
파파팡! 천장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터커가 고함지르며 달려갔다.
“같이 죽어줄 생각이야? 방법이 없어! 뛰어!”
터커는 달리다가 멈춰 섰다. 사만다, 나, 칼 등이 남아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바닥도 정신없이 흔들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렵다. 칼은 절망적인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 하, 하지만 데려갈 수 있는 데까진…….”
“이런 얼빠진 소리를!”
터커가 욕지거리를 외치는 순간, 굉음을 내며 천장이 쫙 갈라졌다. 콰캉! 사만다는 위를 쳐다보며 비명을 질렀고, 터커는 사만다에게 달려들었다. 그 는 사만다를 덮치면서 외쳤다.
“제기랄!”
그때 이루릴이 고함질렀다.
“만물을 받치는 힘, 만물의 아래에 있으되 가장 아름다운 것의 위에 있는 자여! 그 굳건한 팔로 대지를 받들라!”
빠아악, 빡, 빠박!
흔들리고 있는 동굴 바닥에서 석순들이 솟아올랐다. 맙소사. 난 이 동굴의 역사를 순식간에 다시 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 위 기둥이었다. 바위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동굴 내부는 마치 숲처럼 바뀌었다. 바위 기둥들의 숲.
콰쾅!
바위기둥들이 갈라지고 있는 동굴 천장에 부딪히며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밀폐된 공간에서 굉음은 귀를 찢어내는 듯했다. 이루릴이 불러낸 기둥들 은 아예 동굴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어쨌든 갈라지려던 천장은 멈추었지만 엄청나게 쏟아지는 흙먼지, 매캐한 연기에 질식해 죽을 것 같다. 나는 눈 을 가리며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코올록! 콜록콜록, 으흐음! 칵!”
나는 손을 휘저어 내 주위의 먼지 구름을 가라앉혔다. 한참 동안 소란을 부렸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먼지가 어떻게 빠져나가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루릴이 실프를 불러낸 모양이다. 산들바람 같은 바람이 불면서 먼지들을 어디로 날려버렸다. 난 주위를 둘러보고, 몹시 어둡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이루릴은 이제 윌로위스프를 불러내어 주위를 밝게 만들었지만, 바위 기둥들의 그림자 때문에 주위의 밝기는 제각각이었다.
“이봐, 모두 괜찮아? 죽은 사람 대답해!”
터커의 고함소리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터커의 만족한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안 죽었군.”
그때 실낱 같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너…………, 빨리 내 위에서 안 비키면 난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