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안내된 방은 3층으로, 다행히 창문이 있었다. 난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바람을 쐬는 시늉을 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칼과 샌슨 은 내 방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창턱에 팔을 괸 채 잠시 기다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아까 그 소녀가 술병과 잔, 그리고 안주로 보이는 몇 가지를 소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난 글러버렸다는 느낌 이 들었다.
파랗게 질려서 이빨을 사려문 모습이다. 하도 떠느라고 소반에 있는 것들을 다 떨어뜨릴 듯했다. 연극이라면 최상급이겠지.
“어, 어디에 놓을까요………….”
목소리도 완전히 모기 소리다. 젠장. 난 턱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는 테이블에 소반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주춤거렸다. 그녀는 치맛자락 속에 손을 모으고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치마라…………, 어쩌면 위험하겠군. 난 주의 깊게 그녀에게 다가간 다음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엄청나게 떨고 있었다. 난 혹시나 해서 그녀 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역시다. 치맛자락에 나이프 같은 것을 숨겨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다. 그녀는 그저 두 손을 내게 붙잡힌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이리와.”
난 침대로 끌고 갔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날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다.
“아, 안 돼요. 수, 술시중만 들라는 거…………..”
난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 집어던졌다. 내가 집어던지자 물론 그녀는 가볍게 날아가 침대에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려 할 때 난 재빨리 그녀를 덮치면 서 입을 가로막았다. 난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마스터를 만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되지?”
그녀는 거세게 몸부림을 칠 뿐이었다. 제발 그렇게 꿈틀거리지 마! 가슴 뜨거워져 미치겠다고! 난 침착하려 애쓰면서 한 번 더 말했다. 그녀는 몸부 림을 멈추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떠들지 않겠다면 손을 치워주겠어. 낮게 말해.”
난 손을 치우고 다시 물었다.
“마스터를 만나고 싶은데. 어쩌면 좋지?”
“마, 마스터는 아래층에 계시는데………….”
“장난치지 마! 길드 마스터를 만나고 싶단 말이야!”
“예에……?”
“아까 들었겠지만 난 조만간 다시 모험을 떠날 생각이야. 도둑 하나가 필요해.”
“저, 저, 무슨 말이신지………?”
확실하군. 얘는 아냐. 젠장. 난 찍어도 꼭 요 모양이다.
대개의 술집, 여관, 역참 등에는 틀림없이 그 주인에서부터 마구간 하인에 이르기까지 중에 도둑에게서 돈을 받는 녀석이 있다. 그놈들은 돈을 받는 대신 여행자나 짐마차 등의 정보를 넘겨준다. 난 얘가 그런 애이기를 바랐지만, 들어오면서 하는 행동으로 보나 지금 나눠본 말로 보나 확실히 그런 계통은 아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칼의 계획은 복합적인 것이고, 이대로 제2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그 2단계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나는 그녀 옆에 일어나 앉았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 소녀는 내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고는 일어나자 놀란 표정이었다. 난 시트를 들어 올린 다음 그녀의 옆에 드러누웠다.
“꺄아…….”
난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으며 시트를 머리까지 덮어썼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버둥거리고 있었고 시트를 차내렸다. 난 잇소리를 내며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
“닥쳐! 떠들면 가만 안 둬! 아까 술잔 기억나?”
그녀는 벌벌 떨면서도 내 경고에 숨을 죽였다. 난 시트를 뒤집어쓴 다음 말했다.
“좋아. 얌전히 있어요.”
자………….., 이거 머리가 뜨거워져 미치겠군. 난 되도록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뭐, 그녀도 그랬으니까 서로 떨어지는 것은 간단했다. “손을 치울 테니 낮게 말해요. 시트를 덮은 것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한 거요. 알겠죠?”
어두웠지만 그녀의 떨림이 좀 줄어들었다. 뭐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뭐라고 말해야 되지?
“이름이 뭐요?”
“메, 메리안…….”
“좋아요. 난 후치라고 합니다. 당신 하는 모습을 보니, 어, 그러니까 아직…
그런 경험 없지요?”
그녀는 당장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목메인 목소리로 메리안은 말했다.
“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전, 전 아직 남자랑…… 그, 그러니까, 불쌍히 여겨주셔…………..”
“됐어요, 됐어! 그럴 생각 없어요!”
“예?”
“지금 이 일도 내 레이디에게 들키면 난 맞아죽을 거야. 하물며 내가 더 진도 나가봐요. 난 산 채로 가죽을 벗기게 될걸? 난 살고 싶으니 그럴 생각 없어요. 알았어요?”
그럼!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 맹세코 제미니는 반드시 그럴 거다. 메리안의 떨림이 멎었다.
“프흡!”
얼씨구? 웃네? 나도 싱긋 웃어버렸다. 난 정중히 메리안의 몸에 손을 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했다.
“부탁이니 겁먹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줘요. 난 아가씨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겠어요. 알았죠?”
“예에…………….”
“좋아요. 내 부탁은 이거요. 아가씨가 그저 나랑 같이 ……………하는 것처럼 행동해 달라는 겁니다.”
메리안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하는 척만 한다고요?”
“예. 내 뒤를 노릴 사람이 있어요. 난 그자를 잡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에, 그러니까, 내가 독한 술을 마시고 아가씨랑………….., 으음. 그래서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것처럼 위장할 생각입니다. 알았죠?”
그러니까 이것이 칼의 계획이다. 네리아의 소재를 물어보려면 결국 도둑 길드에 물어봐야 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서로 잘 알 테니까. 하지만 우리 는 도둑 길드에 접선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가 도둑 길드의 비밀 손짓이나 신호, 암호 문장을 알 까닭이 있나. 그래서 일부러 대단한 보물을 가진 풋내기 모험가가 들른 것처럼 위장한다. 그리고, 음음, 기타 등등의 짓을 하고는 곯아떨어진 척한다. 그러면 도둑 길드에서 좋아라 달려들 것이다. 그 때 그자를 붙잡아 네리아의 자취를 추적한다.
메리안은 황당했는지 부끄러웠는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알았어요?”
“에에…….”
“부탁 들어줄 수 있겠어요?”
“……너무하시네요.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난 정말로 끝장이 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그런 위장을 하려고 강제로 날, …………하지 않을 건가요?” 메리안은 이제 긴장을 풀었는지 좀 앙탈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휴. 어쨌든 골치 아픈 일은 이제 지나갔군. 메리안은 질문해 왔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글쎄요. 일단 갑갑하니 시트를 좀 치웁시다. 하지만 말을 할 때 무조건 목소리를 낮춰요.”
난 시트를 치우고 앉았고 메리안도 내 옆에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듯이 벽 쪽에 바싹 붙어앉았지만 난 신경을 쓰지 않고 시 간을 쟀다.
칼과 샌슨, 그리고 이루릴이 자리를 잡으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이 도시의 길드에 전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분 명 그 난동을 부렸으니 ‘어떤 모험가 한 놈이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지금쯤 모종의 행사를 치르고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 다.’ 따위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파이어 자이언트의 팔찌? 참 대단하시네, 칼은.
난 침대에서 일어섰다.
“술 좋아합니까?”
“예?”
“이걸 비워야 되는데…………, 난 마시면 안 되거든. 바닥에 뿌리면 치우기 힘들 테고.”
난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을 보여주었다. 메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잘 못 마셔요. 그리고………… 취하고 싶지도 않아요.”
“예?”
“취하면. “그러니까………….”
“할 수 없군. 아깝지만.”
난 화장실에다가 그것을 비웠다. 다행히 이 여관에는 화장실이 방방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관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소리가 너무 크지 않도록 주 의했다.
그리고 안주를 주워먹고는 테이블 위를 적당히 흐트러지게 해놓았다. 술잔에는 술을 부어두고는 술병은 일부러 바닥에 구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메 리안은 내 모습에 점점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녀는 불안을 떨치고 내가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술잔의 술을 적당히 머리카락에 뿌 렸다. 그러자 메리안은 킥킥거리기까지 했다.
“킥킥. 왜 술을 머리에 뿌리세요?”
“술 냄새가 나게 하려고요. 술병을 다 비운 사람이 술 냄새가 안 나면 이상하잖아요.”
메리안은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메리안. 당신 방에 아무에게도 안 들키고 갔다올 수 있습니까?”
“예? 어………… 그건 안 되는데요. 다른 하녀와 같이 방을 쓰기 때문에.”
그럼 이제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해야 되는군.
“그럼, 미안하지만 옷을 좀 벗어줘야겠는데요.”
메리안은 퍼렇게 질려버렸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침대 옆에 옷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어요. 우습잖아요. 옷을 얌전히 입고 누워 있다니. 당신이 당신 방에 갈 수 있었다면 옷가지를 가져오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되잖아요. 제발. 당신에겐 손끝 하나 대지 않을게요. 원한다면, 맹세를 해도 좋고.”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다. 난 아직 맹세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니까 내가 맹세한다면 그것은 무효다. 따라서 난 맹세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 게……………, 아냐! 하지만 메리안은 그 말을 믿는지 벌겋게 된 얼굴을 푹 숙이고 말했다.
“……보면 안 돼요.”
난 몸을 돌렸다. 뒤에서 메리안이 옷을 벗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사회적으로 매장을 세 번쯤 당하고도 남음 이 있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뒤돌아 보고 싶지?
“…됐어요.”
난 몸을 돌리고는 기겁할 뻔했다.
침대 옆에는 옷가지가 몽땅 다 나와 있었다. 저 아가씨! 적당히 겉옷만 벗을 일이지 속옷까지 다 벗어버렸잖아? 미치겠네. 정말 말 잘 듣네. 메리안 은 시트를 뒤집어쓰고는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어찌나 떨고 있는지 침대가 내려앉을 것 같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죽 갑옷과 셔츠, 바지만 벗어 적당히 흐트러지게 만들어두었다. 롱 부츠는 집어던져 버렸다. 메리안의 속옷을 잡을 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 두 손 가락으로 살짝 집어올려서 적당히 흩어놓았다. 도둑이 노릴 물건, 그러니까 그 팔찌들은 테이블 위에 잘 보이도록 얹어두었다. 그리고 창문을 걸어잠 그고 촛불을 끈 다음, 조심스럽게 바스타드와 대거 하나씩만 쥔 채로 침대로 다가갔다. 옷은 벗었지만 OPG는 그냥 끼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들어갈게요.”
메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난 되도록 조심스럽게 몸이 닿지 않도록 침대 속에 들어갔다. 나는 대거를 메리안에게 내밀었다.
“자, 이걸 쥐고 있어요.”
“예?”
“내가 돌아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 장치.”
・킥!”
“농담이고. 혹시 위험할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요.”
“네에………….”
괴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자면 안 되기 때문에 실눈을 뜨고 바스타드를 꽉 쥐고는 문과 창문을 살폈다. 손에서 땀이 나서 바스타드가 미끌거 렸다.
그런데 메리안은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잠도 들지 않은 채 계속 커다란 숨소리를 내었다. 그 숨소리 정말 사람 돌게 만드네. 난 17세란 말이다! “좀 잘 수 없어요?”
“미안해요. 흥분도 되고, 또 거, 겁이 나요. 다,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내가 덤비면 그걸로 찌르면 되잖아요?”
내 말에 메리안은 마치 토라진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잠이 들면 방어할 수 없잖아요?”
말 되는군. 음. 난 관두고 계속 자는 시늉을 하며 감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젠장. 도저히 더 못 참겠다.
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몸을 좀 일으켜 베개를 높게 하고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다. 젠장, 도둑이라는 놈, 언제 올 줄 알아서 이렇게 자는 척하며 기다려? 난 일부러 자는 척하는 것보다 그냥 기대 앉으니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 안은 괴괴한 푸른 달빛만이 가득했다. 밝은 곳은 청백색, 어두운 곳은 암청색. 흩어진 옷가지들이 기괴한 그림자로 바닥을 수놓았다. 조금 추운 듯했지만, 포근한 달빛으로 기분은 좋았다.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시트를 뒤집어쓴 채 뻣뻣하게 굳어 있는 메리안이 보였다. 미치겠군! 푸르스름한 달빛이 그녀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 었다. 나는 그만 아무 말이나 꺼내고 말았다.
“메리안?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되었죠?”
메리안은 여전히 온몸을 뻣뻣하게 하고 있었지만 내 말을 듣자 몸의 긴장을 좀 풀었다. 그녀는 시트를 가슴까지 내렸다.
“여관 주인이 제 삼촌이세요.”
윽! 욕설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개새끼. 조카딸을 이렇게 보내?”
메리안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맙죠. 제 부모님은 모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제 언니는 미인이라서 영주님이 후견인이 되어 줄 수 있었죠.”
후견인? 말이 좋다.
나는 그 이야기를 안다. 우리 영주님도 그렇게 하니까. 사망한 가신이나 주민의 고아들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고아들은 영주가 후견인이 됨으로써 가식적이긴 하지만 높은 신분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영주님과 다른 영주의 차이가 난다. 우리 영주님은 후견인으로서 그런 고아들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한다. 남자아이라면 소질에 따라 훌륭한 장군의 부하로 보내어주거나 이름 있는 직공의 도제로 넣어주거나 좋은 직업을 알선해 주거나 하고 여자아이는 좋은 곳에 시집보낸다. 영주님이 후견인이니까 가문 따지기 좋아하는 집안에서도 잘 받아들인다. 그리고 영주님은 꼬박꼬박 지참금도 후하게 챙겨주시고. 우리 영주님의 재 산이 거덜나는 이유가 이토록 많다.
하지만 다른 영주들은 똑같이 하긴 하지만 그것은 재산의 매매이다. 즉 남자아이들은 하인으로 팔거나 군인으로 팔고 여자아이는 미인일 경우 다른 못된 귀족의 첩으로 파는 것이다. 후견인이 아니라 주인이다. 제길, 사망한 나이트의 과부들도 그렇게 모아들인다고 한다. 정말 말이 좋아서 후견인 이다. 칵! 우리 영주님 본 좀 받으라고!
메리안은 계속 말했다.
“……전 미운 아이였어요. 그래서 삼촌이 데려와서 절 양육했죠. 전 그거나마 감사하게 생각해요.”
난 목에 받치는 뜨거운 것을 삭이며 말했다.
“당신은 밉지 않아요. 내가 혹시 돌아버릴까 봐 대거까지 준 걸 보면 몰라요?”
메리안은 킥킥거렸다. 그녀는 긴장을 많이 풀고 말했다.
“그런데, 후치 씨는 어쩌다가 쫓기게 되었어요?”
이 소녀는 수치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자극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난 간단히 대답했다.
“뭐, 저 팔찌 때문이죠.”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아, 그렇지. 아까 그것 정말 미안해요.”
“예? 아, 예. 괜찮아요. 하루에 몇 번도 더 당하는 일인데요. 그럴 때마다 놀라긴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도 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메리안은 흠칫하더니 말했다.
“다행히…………, 마음씨 고운 분을 만나서…………. 전 운이 좋은가 봐요.”
“헤? 마음씨 고운 남자가 그렇게 발가벗겨요? 천만에. 나 좋으려고 하는 일이죠, 뭐.”
“그래도 덮치진 않으셨잖아요. 그렇게 하면 더 확실한 연극이 될 텐데, 절 생각해서 일부러 이렇게 더 위험할지도 모르게 하시는 거잖아요.”
이건 아무래도 덮치지 말라고 의식적으로 하는 말 같은데. 난 피식 웃었다.
내 마음 깊은 곳은 내가 잘 안다. 난 물론 덮치고 싶다. 어차피 이런 소녀의 운명이란 뻔하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면서 내가 아니더라도 어느 놈이
끝장내든 분명히 이 소녀를 끝장낼 놈이 있을 테니 내가 한다 해서 뭐 어떠랴 하는 합리화도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난 아니다.
위선? 글쎄. 난 위선이라는 개념이 항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위선의 반대말은 뭐냐? 위악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맹추고, 결국 욕망에 충실하라는 말 정도 되겠지. 그 욕망은 인정하면서, 왜 위선을 부리고 싶은 욕망은 인정하지 못하지? 칭찬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어서 착한 일을 한다면 질색할 것인 가? 웃기는 소리. 그럼 칭찬이나 존경은 뭐란 말이냐? 그런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
양떼를 모는 개가 있다. 개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양을 보면 양치기는 저놈은 성질이 사나운 놈이라고 말하며 싫어하고 잡아먹을 일이 있다면 그놈부 터 고를 것이다. 그리고 개의 인도를 잘 따르면 양치기는 순한 놈이라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놈은 사실 목장 바깥의 풀 맛을 보지 못해 욕구 불만일지 도 모른다. 똑같지 않나? 한 인간이 오로지 칭찬을 받기 위해 착하게 행동한다. 난 그게 개의 말을 잘 듣는 양과 다른 점을 모르겠다.
내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메리안을 그냥 덮쳐버리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하지만 난 하지 않는다. 메리안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칼이나 샌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어때? 그게 위선이라면, 위선자로 남지 뭐.
그러나 이런 말을 메리안에게 똑바로 전달시킬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난 농담 삼아 대답해 주었다.
“간단하죠. 난 내 레이디에게 가죽이 벗겨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메리안은 다시 킥킥거렸다. 아앗! 조심해! 웃느라고 시트가 내려간단 말이야! 정말 웃기 좋아하는 아가씨로다. 내가 다시 합리화를 시도하면 어쩌려 고? 메리안은 그렇게 무방비하게 킥킥거리더니 말했다.
“……당신은 나이트예요?”
“예?”
“레이디라고 하셨잖아요.”
“뭐, 이런 겁니다. 그 소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에게만 레이디이고, 난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소녀에게만 나이트입니다. 아시겠지요?” 메리안은 싱긋 웃었다.
“이해했어요. 그 소녀가 부럽네요.”
난 피식 웃으며 대꾸하려 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난 기겁하면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메리안도 내가 갑자기 움직이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 소리는, 뭔가 긁히는 듯한 소리였다. 꽤 멀리서, 정확하게는 건물 바깥? 아무래도 뭔가가 건물 벽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그런 소리다. 아주 미세 했고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난 긴장해서 시트 속에서 바스타드를 꽉 쥐었다.
다시 한번 그런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메리안도 이번엔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메리안은 숨죽여서 말했다.
“오, 오는 거예요?”
“코를 골아요! 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드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리안이 내 어깨를 잡았다.
“너무 이상하게 들려요.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 좋겠어요.”
그런가? 제법이네. 난 코 고는 것을 중지하고 그냥 숨만 느릿하게 쉬었다. 메리안도 눈을 꼭 감고는 느릿하게 숨을 쉬는 모습을 취했다.
딸각, 딸각.
창문이다! 벌써 창문까지 올라왔다. 뭔가가 밖에서 잠긴 창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무런 대비도 없었다면 절대 로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다. 너무 긴장이 되어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때 메리안이 뒤척이는 시늉을 하더니 팔을 내 가슴 위에 척 올렸다. “흐음…………. 음냐, 쩝.”
메리안 만세! 최고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은 둘 다 차렷 자세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누가 봐도 괴상하다고 생각했겠다. 메리안은 멋지게 잠든 시 늉을 하며 내 옆에 안겨들어왔다. 하지만 몸이 직접 부딪히고 나니까, 메리안이 얼마나 떨고 있는지 잘 느껴졌다. 안심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 럴 수야 없다.
잠시 그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지리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딸가닥, 철컥. 끼이익.
아주 낮은 소리지만, 엄청나게 긴장한 내 귀에는 잘 들려왔다. 놈은 지금 창문의 걸쇠를 어떻게 열고는 창문을 연 것이다. 볼까? 관둬. 위험하다. 어 쩌면 놈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발자국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구 흩어진 옷가지는 그자의 발에 걸릴 것이다. 그건 위장뿐만이 아니라 그런 목적도 있거든? 역시 옷 가지가 밀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사락, 사락.
그자는 이윽고 테이블 위에 있는 팔찌를 들어올리는 모양이다. 그건 안 될걸?
콰쾅!
“으아아악!”
엄청난 굉음과 불꽃, 그리고 비명소리. 걸렸구나! 뭔지 모르지만 이루릴의 준비에 걸렸어!
“이야아압!”
나는 벌떡 일어서며 시트를 집어던지…………려고 했으나 메리안이 목숨 걸고 시트를 붙잡느라 그러지는 못했다.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일단 몸으로 부딪혀갔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샌슨과 칼도 램프를 들고 뛰어들어왔다. 그 도적은 그저 갑작스러운 굉음과 불꽃 에 놀란 모양이다. 나는 테이블 옆에서 멍하니 서 있던 그 도적에게 온몸으로 부딪혔다. 그러자 곧 그자는 숨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부딪혔다. “꺄아악!”
여자잖아? 맙소사, 바로 걸렸다! 너 죽었다고 복창해라, 네리아였다!
벽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방 구석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은 네리아였다. 등에는 그 트라이던트를 둘러메고 있었다. 저걸 둘러메고 도둑 영업을 하 나? 어쨌든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는지 눈을 뒤집고 있었다.
“우하! 한 방에 잡았어!”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칼과 샌슨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그들이 흘깃흘깃 바라보는 곳은…………. 그들은 겸연쩍은 시선으로 시트로 몸을 가린 메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로 아니에요!”
“물론이에요!”
두 번째는 메리안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이 양반들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하다. 나는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 이루릴은?”
“여기 있어요.”
난 그만 기절할 뻔했다. 이루릴이 우리가 있던 침대 밑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가 침대 밑에서 마법을 썼나 보군. 이루릴은 말했다.
“이 아랫방에 있었죠. 천장을 소리없이 뚫고 올라오기가 퍽 힘들더군요.”
“됐어! 그럼 이루릴이 증언해 줘요! 아무 일도 없었죠?”
“아무 일? 뭘 말하죠?”
“어, 그, 그러니까.”
“먼저 좀 나가주시죠. 이 소녀가 옷을 입어야 하니까.”
으악! 나도 벗고 있었잖아? 나는 미친 듯이 옷을 챙겨들고 그 끔찍스러운 방에서 뛰쳐나왔다. 물론 내 뒤를 따라서 칼과 샌슨도 꽤 허둥거리며 네리 아를 끌고 나왔다.
“부럽다…….”
“주, 죽일 거야!”
“정말 부럽다….”
샌슨은 멍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 돌겠네! 난 이루릴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내었다.
“이, 이루릴! 제발 증명해 줘요. 나와 메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이루릴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무 일? 뭘 말하는……………, 아! 알았어요.”
우리는 일제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생식 행위 말이죠?”
“푸흐업!”
칼은 마시고 있던 물컵의 물을 반쯤 밖에다 쏟아놓았다. 이루릴은 깜짝 놀라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놀라셨군요. 후치는 생식 행위를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제가 알기론 후치 정도의 나이의 인간 남자는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충동이 대단히 강하다고 들었는데…………. 샌슨의 말을 통해 생각해 봐도 그렇게 판단되는데요.”
부러우니 어쩌니 하던 샌슨의 얼굴이 당장 붉어졌다. 그리고 나는 비명처럼 외쳤다.
“언제나 가능하지만 아무와 하진 않아요!”
“이상해요, 후치. 당신은 짝이 없잖아요. 메리안 양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이는데……………. 다른 여성상을 가지셨나요?”
관두자, 관둬! 젠장. 이런 식의 대화, 죽어도 더는 못하겠다. 엘프는 인간이 대단히 방종하다고 알고 있나? 하긴 엘프보다야 인간이 훨씬 종족 번식 이 빠르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렇고 그런 놈이 아니란 말이다!
여관 주인을 불러다 우리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다. 그리고 나 개인으로서도 몇 마디 전했다. 조카딸을 제공해 줘서 우리 계획을 순조롭게 해준 것 은 고맙지만, 이왕이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만일 또 그런 일을 저지르면 대륙 끝에서라도 찾아와서 박살내 주겠다는 뜻을 친절하게 전달 했다. 아마 그 주인장은 꽤나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난 다시 청동 술잔을 뭉개어 그걸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면서 말했으니까. 물론 소란을 일으키고 한 점에 대해서 이루릴이 충분한 사례를 지불했다. 내 생각엔 그런 것 필요없을 것 같았지만.
우리가 나올 때 메리안은 발갛게 익은 얼굴로 말했다.
“저, 저, 후치, 열일곱 살이라고?”
“응. 변장이 그럴듯하지?”
“응. 난 열여섯 살이야. 저, 그리고…………. 이라무스 플라이에 묵고 있다고?”
“응.”
“저……, 이 마을을 곧 떠날 거야?”
“곧 떠날 거야. 도와준 것 정말 고맙게 생각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원하기는……………. 건드리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지.”
듣고 있던 이루릴은 다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난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루릴은 인간이 그런 방면으로 꽤나 난잡하다고 알고 있나 본 데, 언제 기회 봐서 그렇지 않다고 좀 설명을 해줘야겠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겠지. 내 행동이면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그때 메리안이 뒤통수를 두드리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고마운 것인지 모르겠어. 그런 상황까지 가서 날 건드리지 않았다는 거….”
난 한대 맞은 듯한 멍한 표정으로 메리안을 바라보았고 메리안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뒤로 돌아서 달려가버렸다. 뒤에서는 샌슨이 휘파람을 아주 몰상식하게 불어젖혔다.
“휘익! 들르는 마을마다 애인을 만드시는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샌슨은 정말 기쁘다는 듯이 고향에서 내가 항상 하던 짓, 즉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꽤나 별러왔던 모양인지 그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 “레너스의 유스네는? 그녀의 마음을 훔쳐 달아났지. 칼라일의 에델린은? 오, 맙소사, 그녀의 가슴을 훔쳤지. 이라무스의 메리안은? 드디어 침대에까 지 끌어들였네. 오! 위대한 모험가 후치. 어떠한 엄청난 모험에서도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크아아악!”
나는 샌슨을 뒤쫓기 시작했고, 그래서 칼이 네리아를 업고 오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원래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당신들 정말 대단한 모험가들이구먼?”
이라무스 플라이의 레네즈는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떻게 소매치기당하고 하루 만에 잡아오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우리는 간략히 설명하고는 곧 남자들이 묵는 커다란 방으로 네리아를 끌고 갔다.
방에서는 아직껏 운차이가 코를 골고 있었다. 운차이는 내버려둔 채, 우리는 네리아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를 의자에 묶는 귀찮은 작업이 있었다. 네리아는 할퀴고 물어뜯고 어쨌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앙칼지게 반항했지만 나와 샌슨이 악전고투 끝에 그녀를 묶는 데 성공했다.
“뭘 바라는 거야!”
샌슨은 간단히 말했다.
“간단하지. 훔쳐간 것 돌려줘. 그걸로 끝내자.”
네리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신고하지 않는 거야? 날 어떻게 한다든가…………….”
“어떻게 해? 너 생각이 참 불순하구나. 하긴 그러니 이기고도 물에 빠뜨리지 않은 나에게서 돈주머니를 훔쳐갈 정도지.”
네리아는 투덜거렸다.
“쳇. 그렇게 말하니 쪼오끔 찔리네.”
“다른 것 필요 없어. 도둑 길드에 원한을 사는 것도 싫고. 우린 바쁜 몸이라서 그건 안 돼. 그러니 훔쳐간 돈만 내놔. 그러면 놔주겠어.”
“놔준다고?”
네리아는 다시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것이 칼의 계획의 마지막이다. 즉, 도둑 길드에 원한을 사서 우리 행동에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은 삼가자. 그러므로 네리아를 체포하게 되면 돈만
돌려받고 놔준다. 그것이 칼의 계획의 최종 마무리였다. 샌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두 번씩 말하게 할래? 돈을 돌려주면, 놔준다. 이 이상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어.”
갑자기 네리아는 웃기 시작했다.
“에헤헤헤……… 미안해서 어쩌나? 나, 나이트호크라고. 그것, 이 도시에 들어와 영업하는 대신 길드 요금으로 벌써 바쳤는데.”
샌슨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그 많은 걸?”
“어, 조금 남긴 했지만, 그것도 정보료로 다 지불했어. 젠장. 정보료가 두 번이나 나갔다고. 처음에는 웬 모험가가 마법검을 가지고 있다기에 아이고 좋아라 지불했는데 찾아가보니 벌써 떠났다잖아? 정보료 날리고 나서 홧김에 다른 정보를 사버렸어. 그게 바로 웬 모험가가 엄청난 팔찌를 가지고 있 다는 정보였어. 뭔 말인지 알겠지?”
샌슨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으으으으음…….”
아이고, 돌겠다. 그럼 뭐야? 우리 멋진 계획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 이런 괘씸 무쌍한 우연이 있나. 칼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럼 몸으로 갚아!”
샌슨의 말에 우리 모두는 이제 샌슨을 바라보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네리아도 눈을 사납게 뜨면서 말했다.
“무슨 뜻이지, 너?”
“너 현상금이 있을 거 아냐!”
아, 그런 뜻인가? 난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리아도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거………… 내 현상금? 그건 없는데.”
“뭐야?”
네리아는 샐쭉샐쭉 웃었다.
“난 대개 정정당당하게 통행료를 받거든. 그리고 여자 한 명에게 박살난 모험가들은 부끄러워서 별로 신고를 안 하고. 10셀이나 20셀은, 뭐 잃으면 아쉽지만 그렇다고 찾으려고 날뛰기엔 그런 돈이잖아? 적어도 여행자들에게는 말이야. 난 그렇게 잃어도 가슴 아파할 일이 적은 사람만 골라서 덮치 “거든.”
“넌 우리 돈을 몽땅 훔쳐갔잖아?”
“어? 이상하네. 난 저 엘프 아가씨 돈은 안 건드렸어!”
하긴 그렇긴 그렇군. 그러니까 네리아는 다른 사람 것은 놔두고 샌슨의 주머니만 건드렸다, 이런 말이렷다? 너무 큰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아서? 네리 아는 계속 설명했다.
“이야기가 도는데, 어쨌든 난 귀족이나, 어쨌든 후환이 생기고 골치 아플 자들은 안 건드려. 그러니 현상금은 거의 없어. 몇몇 도시에는 날 현상범으 로 게시하기도 했지만 이 도시엔 내게 건 현상금이 없는데.”
“아아하하하………!”
샌슨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정말 요걸 어떻게 해야 되나? 나도 골치가 아파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칼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퍼시발 군, 풀어주게.”
“예?”
“어쩔 건가, 풀어줘야지. 달리 방도가 없잖은가.”
샌슨은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네리아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네리아는 진짜 풀어주자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놀랐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샌슨은 꼴 보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네리아를 외면하면서 손을 저었다.
“가라, 가! 보고 있으면 울화통 터진다.”
네리아의 얼굴에 뭐라고 설명 못할 희한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양이가 웃을 줄 안다면 꼭 저런 표정이겠다.
“흐음……. 당신들, 세고, 머리도 좋은데, 정말 마음에 드네? 아까 아침에도 퍽 마음에 들게 행동하더니 말이야. 닳아빠진 모험가 같지 않아. 닳아빠 진 모험가들이라면 돈을 못 찾을 거 재미나 보자는 식으로 말할 텐데.”
샌슨이 속 뒤집어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릴 뭐 취급하는 거야!”
나도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며 한 마디 했다.
“우리 돈을 꿀꺽해 버린 걸로 충분해. 우리를 싸가지 없는 놈들로 만들지는 말고 어서 가요!”
네리아는 킥킥 웃더니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절하는 시늉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문을 닫은 다음 문 저편에서 쾌활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호호!
환장하겠네. 메리안과 그런 괴상망측한 짓까지 해가며 겨우 잡았더니…………. 그런…………, 그런 꿈 같은 일을…………. 으음. 내가 왜 이러나, 아니나다를까, 샌슨이 당장 찔러왔다.
“그럼 덕 본건 후치뿐이군.”
“솔직히 기분 나빴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좀 그만해 두지? 그렇게 부러워할 거면 처음부터 악당 역할을 샌슨이 하지 그랬어?”
샌슨은 천장을 보며 넋두리를 뱉었다.
“아, 제기랄. 이 억울함을 어디다 호소한다? 젠장. 나도 다리를 막아서고 통행료나 받아낼까?”
“퍼시발 군!”
“아, 아녜요. 농담이에요. 농담도 못합니까. ·그런데 네리아 말이 그럴듯한데, 정말 부끄러워서 신고 못할 사람을 노린다면…
“자네 좀 그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