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4부 : 황소와 마법검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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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4부 : 황소와 마법검 7화

7

아무래도 저건 황소가 아니다. 황소라면, 저건 미친 황소다.

“허, 그거, 제법 잘, 달립니다?”

“그쪽도, 보통 말이, 조용히 해! 아니군요!”

샌슨과 길시언은 서로 양쪽의 승마술과 승우술(이런 말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소를 타고 달리고 있으니까.)을 칭찬하면서 달렸다. 길시언은 허리에 있는 프림 블레이드에 한 손을 얹고 달리고 있느라 여전히 말이 이상했다. 하지만 손을 대고 있지 않으면, 그러니까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프림 블레 이드는 계속 웅웅거리기 때문에 손을 뗄 수가 없다. 참으로 수다스러운 칼이군. 덕분에 길시언은 한 손으로 선더라이더를 달리게 하고 있었다.

내 허리를 붙잡고 있던 네리아가 투덜거렸다.

“좀, 적당히, 달릴 수 없나?”

“힘들죠?”

“그래도, 네가, 바람막이라서, 좀 낫네.”

“저 황소, 정말 잘, 달리네요.”

그러니까 시작은 이렇다.

샌슨은 길시언의 황소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까 봐 천천히 달렸다. 그런데 길시언의 황소는 샌슨을 앞질렀다. 그러자 샌슨은 제법이라는 식으로 씨 익 웃으며 속도를 높였고, 그러자 길시언도 씨익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샌슨은 입술을 깨물며 최고 속도로 달렸고, 길시언도 눈을 사납게 뜨 면서 속도를 높였다.

결국 둘은 지금 갤럽으로 갈색 산맥의 험한 산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 뒤에서 따라가는 운차이는 죽을 맛일 게다. 그리고 그 뒤의 칼과 이루릴 도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고, 맨 뒤에서 나와 네리아가 달렸다. 네리아는 말이 없어서 나와 함께 타고 있다. 난 샌슨 같은 체격은 아니라 좀 강마른 체격이고 네리아는 가벼운 편이니 제미니에게 부담은 별로 없겠어.

왜 나와 함께 타느냐………… 네리아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샌슨과 함께 타자니 과거에 한 짓이 있어서 함께 못 타고, 운차이는 절대로 여 자와 함께 못 탄다고 했고, 길시언은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 데다 황소에 타기는 싫다고 했고, 이루릴은 미인이라서 싫고, 그러니 남은 건 칼과 난데, 내가 칼보단 체격이 가느다라니까 더 좋단다. 합리적이군.

그건 그렇고 저 황소 정말 시원스럽게 달린다. 자기가 말이라고 착각했는지, 아, 원래는 말이었다고 했지? 저주를 받아서 황소가 되었다고? 흠. 어쨌 든 황소가 저렇게 신나게 달리는 것은 보다보다 처음 봤다. 황소는 뛰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뛸 일이 있다면 다리를 편 채로 뛴다. 몸이 무거운 데다 다리가 짧아서. 그런데 길시언의 저 황소는 흡사 말처럼 몸을 띄운 채 다리를 구부리며 달리고 있다. 그러니까 말처럼 땅을 박차며 달리고 있다. 뒤에서 보고 있자니 경탄스러울 정도야.

결국 길 사정이 좀 좋지 않아졌을 무렵에야 두 사람의 기수는 질주를 멈추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슈팅스타도 선더라이더도 모두 거품 같은 땀을 흘 리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운차이였을 것이다. 샌슨은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리면 되지만 운차이는 밧줄 때문에 샌슨과 보조 를 맞추어 달려야 했을 테니 두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운차이가 타고 있는 앰뷸런트 제일은 그대로 쓰러지고 싶어하는 폼이었다.

운차이는 노랗게 변한 얼굴로 뒤에 따라가고 있던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 물 좀 주시오. 헉헉.”

운차이는 수통으로 나팔을 불며 걸어갔다. 선더라이더는 천천히 걷게 되자 모둠발로 걷고 있었다. 아, 원래 야생마라고 했지? 북부 대로의 야생마들 중에는 가끔 모둠발로 걷는 놈들이 있다고 들었다. 황소가 모둠발로 걸으니 그건……,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지만.

샌슨은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지 고개를 돌려 씩씩하게 말했다.

“저기 저 산 보이십니까? 갈색 산맥의 주봉인 닐 드루카입니다.”

칼이 파랗게 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저걸 넘는다는 말은 아니겠지, 퍼시발 군?”

“천만에요. 우리는 중부 대로로 다니고 있는 겁니다. 산을 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 중 닐 드루카 아래에 도착한 다음, 내일 그 산등성이에 있는 메드라인 고개를 넘을 겁니다.”

“흐음. 오늘 여정은 벅찰 것 같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기……………,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수면이 보이시죠? 요정의 성이 있다는 레브네인 호수입니다. 저기까지만 달려가면 그 다음은 평탄한 길입니다. 오후 동안은 호숫가를 따라 걸어가는 편안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걷는다고?”

“예.”

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잠깐, 이상하잖아. 여기서 저기까진 길이 좋지 않은데 달려가고, 저기서부턴 길이 좋은데 걸어간다고? 바뀐 것 아냐?”

“아냐, 저기선 걸어가야 돼.”

그때 내 등 뒤에서 네리아가 내 귀에 숨을 불어넣듯이 말했다.

“저 아름다운 호수엔 요정의 성이 있다네………….”

“우우우, 그만해요! 그런데 요정의 성이요?”

“까르르. 저긴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성이 있지요.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하듯이 걸어가야 돼. 소란스럽게 달리면 안 돼. 조용히만 걷는다면 중부 대 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란다.”

“가장 안전해요?”

“몬스터가 없거든.”

“몬스터가 없다고요?”

“페어리퀸의 영토니까.”

“그럼 소란스럽게 달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녀의 영토에서 무례하게 달리면? 모르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그렇게 달린 자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거든.”

어어? 어. 장난이 아니네? 샌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서 저기서 속도가 느려질 것을 감안할 때, 오전 동안은 열심히 달려야 될 것입니다. 길시언. 그 황소는 더 달릴 수 있겠습니까?”

길시언은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프림 블레이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샌슨은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다. 길시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그쪽 말이 좀 지쳐 보이는데 잡아먹어 버리는 것이…………, 아냐! 임마, 끼어들지 마! 에, 지쳐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뭐,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그쪽이야말로 달리며 이야기까지 하느라 힘들어 보이는군요.”

“천만에요. 동시에 두 가지 정도 하는 게 뭐 어렵겠습니까. 난 정신병자라서…………, 젠장! 너, 임마!”

샌슨은 킬킬 웃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울상이 되어 따라갔다. 아무래도 이 질주에는 그 마지막 팬케이크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좀 내 포된 것이 아닐까 한다.

산길을 달려가는 것은 말도 괴롭겠지만 사람도 괴롭다. 말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중노동이다. 말은 자신이 태우고 있는 자의 균형까지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이름난 명마라면 혹 모르지만(길시언의 선더라이더는 이름난 명마였다지만 지금은 황소다. 흠.), 보통의 말에 속하는 슈팅스타, 트레일, 제미 니, 래셔널 셀렉션, 그리고 앰뷸런트 제일은 자신의 몸무게에다가 기수의 몸무게, 그러니까 최대 300파운드에서…………, 최저치는 모르겠다. 이루릴의 몸무게를 모르니까. 어쨌든 최대 300파운드는 되는 기수들을 싣고 달리는 것만 해도 죽을 맛일 게다. 그러니 기수는 자기가 알아서 균형을 잡아야 한 다.

산길의 급격한 경사 때문에 제멋대로 움직이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웬만한 승마술로는 어렵다.

이루릴을 보라! 저 놀라운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말의 충격이 전혀 기수에게 전달되는 것 같지가 않다. 등자에 얹힌 그녀의 발과 다 리는 말과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그녀의 허리 위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허리에서 하반신의 모든 충격이 사라지고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다.

샌슨? 저 인간의 탈을 쓴 오거는 말을 끌고 간다고 표현해야 옳다. 분명히 말 위에 타고 있지만, 그는 마치 자기 가랑이 사이의 말을 앞으로 질질 끌 고 가는 느낌이다. 힘이 넘치는 승마술이다. 말의 방향을 바꿀 때 그는 고삐로 하지 않고 300파운드는 쉽게 넘어가는 그의 온몸을 기울여 말을 틀어 버리는 듯하다. 그러니 슈팅스타는 옆으로 휩쓸리듯 몸을 틀 수밖에.

운차이는 나동그라지기 싫어서 죽자고 샌슨을 따라가고 있으니 별로 볼품이 없다. 칼의 승마술도 그저 그렇고. 역시 봐줄 만한 것은 길시언이다. 황 소! 저 미친 황소를 다루는 그의 능력은 엄청나다. 황소라서 그의 위치는 참 낮고 그래서 충격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모양이다. 아마 이가 부서 져라 부딪히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평평하고 약간 휘우듬한 황소의 등은 안정감이 없다. 그리고 그는 황소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왼손에 쥐 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와의 대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그는 오른손으로만 고삐를 쥐고 왼손으로는 왼쪽 허리의 프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를 쥐고 있 다. 마지막으로, 그는 좀 구색이 안 맞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중 최고의 중무장을 갖추고 있다. 아마 꽤나 무거울 것이다. 그런데도 용케 떨어지고 있 지 않는 것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나? 난 최악이다.

내가 제일 뒤에 달리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아무도 못 볼 테니까. 제미니는 다른 말들의 두 배에 가까운 체중 때문에(그래도 샌슨의 몸무게 정도일 것이 다. 난 별로 덩치가 크지 않고 네리아는 날씬하니까.) 기진맥진하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난 떨어지지 않는 데에만 신경을 써도 모자란 다. 그런데 네리아는 계속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 칵!

“어머, 흔들려! 왜 이러는, 거니?”

“길이, 엉망이잖아요! 좀 떨어져요!”

“안 돼, 싫어, 무서워.”

“뭐가 무서워요!”

“떨어질까 봐. 으음…….”

“소, 손 올리지 못해요!”

“얘는, 흔들리니까 그렇지.”

요런 식이다. 망할! 애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냐? 엉?

악전고투 끝에, 정말 거의 전투에 가까운 질주 끝에 우리는 간신히 정오가 되기 전에 고개를 넘어서 평지로 내려섰다. 이루릴은 전혀 변함이 없이 몇 시간이라도 더 달릴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고, 골반이 뒤틀린다아아………….”

네리아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땅에서 기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칼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 표정은 미골의 아픔을 삭이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그러지 않다면 왜 서 있겠는가. 난 운차이와 나란히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 아하, 아하하하……”

“저, 저 짐승 같은 놈. 정말 무, 무식하게 달리는군.”

운차이는 샌슨에게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말에 적극 찬성이다.

샌슨은 입술을 삐죽이며 가볍게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옆의 길시언은 황소 등 위에 드러누워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는 선더라이더의 널찍한 등 을 침대 삼아 누워서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샌슨의 판정승이군. 하지만 대결이 공정하진 못했어. 길시언은 황소를 탔으니까. 샌슨 은 외쳤다.

“밥 먹자!”

“아아아아아……………, 샌슨!”

“왜?”

“……내 안장 주머니에 팬케이크 있어. 꺼내 먹어.”

“알았어.”

콰당! 땡그렁. 뭔 소린가 싶어 돌아보니 길시언이 기어코 황소 등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프 플레이트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는 엄청났고 그 옆에 떨어진 카이트 실드는 핑그르르 돌고 있었다. 그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악, 하악.”

샌슨은 그걸 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거기 누워 있다간 황소가 싸면 입에 떨어지겠소.”

“우으으음…….”

길시언은 죽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망자의 신음소리를 뱉었다. 흠, 왠지 적절한 듯한 표현이다.

레브네인 호수는 산중호였다.

그 엄청난 크기 하나만 빼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모습의 산중호로, 수면에는 근처의 산의 모습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트인 곳으로는 아마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레브네인 호수의 서쪽 자작나무 숲에 서 있었는데, 호수가 넓고 곳곳에 곳이 튀어나와 남쪽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형상 남쪽으로 낮아지니까 거기로 빠져나가겠지. 게다가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폭포의 우르릉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어어어 북쪽을 따라 크게 도는 거야.”

샌슨은 팔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지만 우린 북쪽 땅이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 동쪽도 물 위로 아스라하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의 모습만이 보 였다. 정말 광대한 호수였다. 이런 호수가 산 속에 어떻게 생겼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평지라면 그냥 물이 고여서 생길 수도 있겠지만, 여긴 산 속이 아닌가? 산 속에 어떻게 이런 많은 물이 고이는 거지? 네리아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물을 잡아뒀거든.”

“예? 무슨 말이죠, 네리아.”

“수백 년 전에는 이 호수는 훨씬 낮고 작았어. 지금의 10분의 1쯤? 그리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아름다운 성이 호수가에 있었지. 그런데 다레니안

이 물이 빠져나가는 남쪽에 산을 몇 개 세워서 물이 모이도록 했어. 결국 호수는 범람하고 물은 여러 해에 걸쳐 점점 차올라 다레니안의 성은 물 속에 잠기게 되었어. 결국 남쪽에 새로 생긴 산들 사이로 폭포가 만들어져 수면은 더 올라가지 않게 된 거야.”

“다레니안은 왜 그렇게 했는데요?”

“그건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고 하던데.”

“남자? 인간 남자요?”

“으응. 그녀는 어떤 인간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와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물 속에 가라앉혔다고 해요. 영원한 물의 감옥으 로 말이야. 멋있지?”

“틀려요.”

갑자기 들려온 말은 이루릴의 목소리였다.

이루릴은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등을 돌린 채 멀리 보이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가 물었다.

“틀려요?”

이루릴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다시 찾아오지 못하도록 저 성을 폐쇄했죠. 90년 전, 그녀의 성에 들렀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아름다운 성이었죠.”

90년? 맙소사.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길시언이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싫어요.”

이건 인간의 말이라면 불쾌하게 들릴 법한 말이지만, 이루릴은 그저 부정의 뜻을 표현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인간이라면 ‘죄송하지만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정도로 말했을 법한 어투였다. 어떻게 저 짧은 말에 그런 의미를 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 만. 그래서인지 길시언도 별로 화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한데요. 이루릴. 이 호수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했는데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전 90년 전에 물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성에 간 것이죠. 놀라운 광경이었어요. 하늘로부터 내려온 햇살이 물 속에서 수십, 수백 가닥으로 갈라져 일 렁이는 가운데 호수의 바닥에 그녀의 성이 서 있었죠.”

와! 정말 멋있었겠군. 하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그런데요, 어떤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백 년 동안 물의 장벽으로 막아야 되는 남자라면 그건 인간이 아니잖아요? 그저 인간을 막기 위해 저런 엄청난 장벽을 만든다는 것은…”

이루릴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그 남자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였어요. 더 이상은 묻지 마세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아니, 잠깐. 그 마법사는 300년 전의 인물이잖아? 그는 루트에리노 건국왕을 도와 우리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가 있었기에 루트에리 노 대왕은 바이서스를 건국할 수 있었지만, 루트에리노 대왕이 아니라면 그도 아무런 일을 못하고 그저 조금 능력 있는 마법사로 역사에 아무런 흔적 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알려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난 칼을 바라보았다. 그라면 역사에 대해 훤하니까 그 정도로 유명한 인물의 이야기라면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는 얼굴이다. 이상하군.

식사와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샌슨은 모두에게 말을 끌고 걷게 했다. 말을 타면 안 된단다. 그는 한 손엔 슈팅스타의 고삐, 다른 손엔 지리서를 들고 서는 호수의 수면 가까이 걸어갔다.

호수 쪽으로 가까이 걸어감에 따라,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길하거나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마치 허락도 받지 않고 영주님의 집 무실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닌, 터무니없이 고귀한 장소에 함부로 들어가는 듯한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주위 어디를 보아도 신격이 느껴질만큼 굉장한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 중에 있는 터무니없이 큰 호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네리아가 그런 날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소곤거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지?”

“어, 당신도 그래요?”

“모두 다 그럴 거야. 여기는 페어리퀸의 영토니까.”

흐음. 신기한 일이군. 샌슨은 이윽고 수면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지리서를 보더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저희들…….”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샌슨은 헛기침을 하더니 좀 크게 말했다.

“저희들, 대지를 걷는 방랑자가 고귀하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영토를 걷고자 하오니 …….”

“됐어요, 샌슨 씨. 가죠.”

이루릴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샌슨은 고개를 돌리더니 얼빠진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말에 오르면서 말했다.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땐, 인사나 허락은 필요없어요.”

“예?”

“전 다레니안의 친구이고, 저의 친구는 곧 다레니안의 친구죠. 가요. 조용히 예의를 지켜 걸어가면 됩니다.”

“아, 예…….”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에 올랐다. 이루릴의 태도가 확신에 차 있었으므로, 우리 모두 별 불안감 없이 말에 올랐다. 우리는 호수가를 따라 천 천히 말을 걷게 했다. 네리아가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헤에. 동료가 좋긴 좋구나? 원래 한참 떠들고 나서 허락을 받아야 지나갈 수 있는데.”

“허락이요?”

“원래 물 속에서 광채가 솟아오르게 되어 있어. 그게 페어리퀸의 통과 신호이고 그래야 지나갈 수 있지.”

“어? 잠깐만요. 지금은 광채가 없었잖아요?”

“어머나? 너 왜 이러니? 이루릴이 말했잖아?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땐 허락이 필요없다고. 마찬가지로 다레니안도 허락의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는 거 겠지.”

“어라. 좋은 게 아니군요. 허 참. 구경하면 멋있었을 텐데.”

“음, 그렇긴 그렇네. 볼 만하거든. 호수 가운데서 광선이 쫘악 올라가서 하늘까지 솟구치지. 근사해. 특히 밤에 볼 때는 정말 멋있어. 하아.”

아깝다. 음, 돌아올 때 봐야지.

우리 일행은 모두 점잖게,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이 보조를 맞추어 걸어나갔다.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그 이상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더 욱 이상한 건, 그런 기분을 느낄 때 당연히 느껴져야 할 반발감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호수는 우리에게 적의가 없다. 그저 유려하고 아름다우며, 페어리퀸의 성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물일 뿐이다. 마치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치!

시야한구석에서 뭔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겁한 내 마음은 날 낙마시킬 뻔했다. 호수 한가운데서 붉은 빛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수면 아래의 빛은 잘 보이지 않 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물이 맑은데도 수면 아래는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광선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 르고 있었다. 그것은 시야가 닿는 극한까지 하늘로 뿜어져 올라가 구름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감정, 무서운 적의가 느껴지며 그에 반발하는 나의 적개심도 느껴졌다. 난 저것이 싫다! 저건 무섭고, 끔직하다! “저, 저거예요?”

“아, 아냐. 저건 거부인데! 붉은 빛은 거부야!”

말들이 투레질을 시작했다. 말들은 히힝거리며 발을 굴러 호숫가에서 멀어지려 했다. 당황한 사람들은 말을 진정시키느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 했고 우리 일행의 말이 단속적으로 들려왔다.

“뭐야! 다레니안이 거부를?”

“토,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어, 이럇! 정신 차려! 도, 도망가야 하나?”

그때 이루릴이 외쳤다.

“쾌속의 다리를 가지고 무한한 속도에 도취되는 정열적인 영혼을 가진 짐승들이여, 진정해요!”

말들의 버둥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이루릴은 말 안장 위로 뛰어올라 자신의 말 위에 섰다. 갑자기 웬 서커스지? 저건 그녀를 닮아가는 침착한 말 래셔널 셀렉션 덕분에 가능할 것이다. 잠시 후 이루릴은 다시 안장에 앉더니 말했다.

“안 보이는군요. 어쨌든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호수와 그 주변의 땅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당한 모양입니다.”

샌슨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 우리가 아니고요?”

“인간은…………, 그런 면이 있죠.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 놀라운 생각 때문에 그들은 번영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샌슨은 얼굴을 붉혔다. 이루릴은 말했다.

“이상하군요. 다레니안이 거부를 말하는 일은 적은데. 그녀는 어떠한 존재라도 예의를 지키면 지나가게 해줍니다. 몬스터들은 아예 이곳에 범접하

지 못하니 아닐 테고. 치윳!

기이한 소음과 함께 수면 위에는 다시 빛이 솟아올랐다. 조금 전보단 안정되었지만, 그래도 크게 놀랐다. 이제 두 개의 광선이 올라가고 있었다. 치 윳, 치윳! 곧이어 세 번째, 네 번째 광선이 솟아올랐다. 호수의 표면이 마치 바늘꽂이가 된 듯했다. 붉은 광선들이 빗발처럼 하늘로 쏟아졌다. 이루릴 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렇게 격렬한 거부가…………, 으음?”

이루릴은 급격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멀리 우리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달려오고 있어요.”

“뭐죠?”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요.”

샌슨은 그 말에 재빨리 롱소드를 뽑아들었고 길시언도 뒤질세라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칼은 일행의 뒤로 돌아가 활을 뽑아들었고 나는 앞으 로 나섰다.

“네리아는……?”

네리아는 벌써 말에서 내려 등에 메고 있던 트라이던트를 뽑아들었다. 그러곤 옆의 숲으로 달려가더니 트라이던트를 땅에 짚으며 솟아올랐다. 그녀 는 공중에서 나무를 박차더니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찌나 날렵한지 마치 다람쥐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듯했다. “대단해.”

난 침을 삼키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말, 그것도 꽤나 숫자가 많다. 앞쪽에서 마침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검은 점으로 보이는 정도였지만 그것은 시시각각 커져가고 있었다. 이거, 뒤통수가 뜨끈해질 정도군. 긴장되는데? 샌슨은 재빨리 자신의 안장 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 칼에게 건네주었다. 운차이는 그렇게 칼에게 인계되었다. 그 사이에도 이루릴이 중얼중얼 말했다.

“인간, 남자, 여덟 명, 검은 옷, 두건, 활!”

“프로텍션 프롬 애로.”

길시언은 고함을 지르며 프림 블레이드를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프림 블레이드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갔다. 마법을 쓰기 위해 자아를 가진 마법검! 그 빛은 삽시간에 퍼져 우리 앞쪽에 맑은 푸른색의 막을 형성했다.

“탱, 탱탱!”

날아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뭔가 공중에서 방어막에 맞아 튕겨나기 시작했다. 화살이었다. 샌슨은 악을 썼다. “뭐 하는 녀석들이야! 산적인가?”

길시언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산적들이라고 보기엔 화살이 정확한데. 기마 사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솜씨의 전사들일 게요.”

“아, 그렇군!”

칼은 말에 옆으로 앉아서도 쐈는데…………. 그런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검은색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었 고 타고 있는 말들도 모두 흑마다. 젠장, 산적이라고 보기엔 의상이 너무 잘 통일되어 있는데? 말들은 호숫가를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물보라 가 하늘로 쏟아지고 있었다.

“촤아아, 다다다다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롱소드를 뽑아들기 시작했다. 왼팔에는 모두 라운드 실드를 들고 있었다.

“말로 해결이 안 되겠군.”

칼이 노한 음성으로 말하더니 롱 보를 당겼다. 그리고 이루릴도 캐스트를 시작했다.

칼은 시위를 놓았다. 탱! 경쾌한 탄력음과 함께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맨 앞에 달려오고 있던 자가 방패를 내밀어 화살을 튕겨내었다.

“노, 놀랍군!”

“매직 미사일!”

이루릴의 몸 둘레에서 나타난 다섯 개의 광선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 광선은 달려오는 남자들의 주위에 서 소멸되었다! 이루릴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안티 매직 필드?”

“이런 빌어먹을!”

샌슨은 고함을 지르더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공격당할 수는 없다. 나도 말을 박차 달려가기 시작했고 길시언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황소인 선더라이더가 정말 말이 못 당할 정도의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음메에에엣!”

오우, 용감한 황소여! 제미니, 들었지? 가자! 

“이힝힝힝힝!”

이건 정말 자신 없는데. 난 땅에서는 간신히 싸우지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말 위에서의 싸움은 처음인데, 제기랄, 게다가 끔찍한 놈들인데. 에 이, 최악의 경우 사망이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내게 저지를 수야 없겠지! 달려라, 제미니! 그때 샌슨이 외쳤다.

“후치! 시간차 공격이다, 내 뒤를 따라!”

뭔 말이야? 그러나 대꾸할 새도 없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샌슨이 첫 번째 남자와 부딪혔다. 그들은 서로 격렬히 검을 부딪히면서 그대로 스쳐 지나 갔다. 콰광!

둘은 균형을 잃으며 서로 지나쳐갔다. 말들이 쓰러지지 않기 위해 거칠게 땅을 밟아대며 호수가의 물보라와 모래를 함께 튀겨 올리고 있었다. 얼굴 에 물이 날아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철썩, 쏴아아, 푸르릉!”

그리고 난 그때 샌슨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샌슨과 검이 부딪히느라 검을 쥔 팔이 뒤로 크게 젖혀졌던 그 남자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달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휘둘러 그자의 복부를 후려쳤다. 내 힘에 말의 속도까지 더한 공격이다.

“쾅깡!”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그자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쇳소리? 남자의 로브가 크게 찢어져 있었으며 그 안이 보였다. 이자들, 로브 아래에 체인 메일을 입고 있잖아? 그자는 체인 메일을 믿고 방심하다가 순수한 힘으로 치는 내 공격에 뒤로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남자들은 두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지만 그때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으윽!”

뭐야? 고개를 들어보니 샌슨이 어깨를 부여잡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놈들도 우리 둘과 똑같은 전술을 썼다. 앞에 달려오던 놈 뒤의 녀석이 샌슨을 공격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자는 이제 나에게 달려오고 있다. 그자는 라운드 실드로 앞을 가리고 그 옆으로 롱소드를 랜스처럼 내밀고 있었다. 멋진 돌격 자세군! 하지만 이거 먹어봐!

“기름 젓기!”

말 위에서 기름 젓기를 하다가 나는 제미니의 귀를 날려버릴 뻔했다. 어쨌든 그자는 라운드 실드로 여유 있게 내 바스타드를 막아내었지만 그 라운 드 실드는 박살나며 그자는 그대로 뒤로 튕겨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콰다당! 남자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데굴데굴 굴러버렸다. 모래에 깊게 패인 자국이 남았다. 아마 그자는 내가 꼬마라 얕봤겠지. 그렇잖다면 샌슨에 게 부상을 입힐 정도의 남자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을걸.

난 그제야 간신히 말을 돌려세웠다. 길시언이 보였다.

“으합!”

길시언은 옆에서 뻗어오는 검을 방패로 쳐내며 그대로 밀어붙이고, 앞으로 오는 자에게 프림 블레이드를 내찔렀다. 앞에서 오던 자는 그것을 용케 막았으나 선더라이더가 상대편 말을 들이받았다. 굉장하군! 그야말로 인마일체(人馬一體), 아니 인우일체(人一體)다! 황소의 뿔에 들이받힌 상대편 말 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 기수는 말에 깔려버렸다.

“크아아악!”

그런데 이상하다. 우릴 스쳐 지나갔던 남자들 중 쓰러진 세 명을 제외하고 네 명이 길시언을 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나에게 달려왔다. 길시언의 무장 이 가장 좋으니 그가 제일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저 작자들은 황소를 탄 전사가 우습지도 않나?

“이크! 이 자식이!”

딴 생각 하다가 큰일 날 뻔했다. 내게 달려오던 놈이 제미니를 치려고 한 것이다. 난 생각할 것 없이 바스타드로 그자의 검을 내려쳤다.

“으아아악!”

남자의 검이 부러지며 그는 그만 낙마하고 말았다. 너무 강하게 내려치자 충격으로 균형을 잃은 모양이다. 길시언이 위험하군. 난 길시언을 돕기 위 해 달려갔다. 그때 이루릴이 뛰어와 한 명의 허리를 찔렀다.

“그랑!”

금속음이 요란히 퍼지며 에스터크는 상대를 파고들었다. 체인 메일이라도 에스터크처럼 뾰족한 찌르기 검은 막지 못한다. 남자는 상체를 부르르 떨 더니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대단한 버릇이군. 네리아가 나무 위에서 도약하더니 한 남자의 등 뒤에 내려앉았다.

“좀 태워주시겠어요?”

“뭐, 뭐야?”

“버릇이 없군.”

그녀는 창대로 남자의 목을 걸어 당기더니 그대로 옆으로 같이 떨어져버렸다. 체인 메일을 입은 남자는 땅으로 나동그라졌으나 가벼운 네리아는 그 대로 땅을 짚으며 공중제비를 넘더니 똑바로 섰다. 이거, 싸움중만 아니라면 박수를 치고 싶다! 난 길시언 주위에 있던 두 명 중 한 명에게 덮쳐 들어 갔다.

“이야압!”

그 남자는 길시언을 치려다가 방패에 막히던 참이라 행동이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등 뒤에서 노리는 내 공격을 막지 못했다. 난 고삐를 놓고 두 손 으로 풀스윙을 했다. 그 남자는 그대로 말 위에서 튕겨나갔다.

“우아아아!”

남자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하늘을 날아 호수에 처박혀 버렸다. 풍덩!

세 명이 없어지자 길시언은 남은 한 남자를 적극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전사들의 기마전다운 검격이었 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수십 개로 바꿔 검은 남자를 공격했으나 남자도 그 재빠르고 풍부한 변화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길시언을 찔렀다. 길 시언은 방패를 쓸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이며 그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황소 위에 있어서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길시언은 아예 하프 플레이트로 가 려진 가슴으로 공격을 막아내며 남자를 후렸다. 엄청난 대결이다.

그러나 길시언은 타고 있는 것조차 무기였다. 선더라이더는 앞쪽에서 얼씬거리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 면상을 들이박았다. 뻐억! 말 은 쇠뿔에 들이받히자 그대로 앞발을 꿇으면서 기수를 낙마시키고 말았다. 남자는 떨어지는 도중에 길시언의 칼을 맞았다.

“후치, 조심해!”

고함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불꽃이 튀었다. ‘이힝힝힝힝!’ 제미니가 비명을 지르며 발길질을 해서 나는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어푸!”

일어나려다 미끄러졌다. 물 속에서 다시 데굴 구른 다음 살펴보니, 쓰러졌던 놈이 등 뒤에서 날 치려 하다가 샌슨에게 막힌 모양이다. 샌슨은 남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남자는 검을 들어 막았으나 그 순간 샌슨은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말 위에 앉아 있으니 말 아래에 있는 자의 가슴을 차는 것은 간단했다. 남자는 뒤로 벌렁 쓰러져버렸다.

난 제미니에서 내려온 김에 쓰러진 남자들의 무기를 들어 호수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써 일어나는 녀석이 있었다. 그놈은 롱소드를 앞으 로 뻗어 날 견제했다. 좋아. 지상이라면 내겐 독특한 기술이 있지!

“일자무식!”

난 밑에서 위로 두 번 올려쳤다. 호수물이 갈라지며 물보라가 정신없이 흩날렸다. 남자는 첫 번째를 막고 두 번째는 옆으로 돌아 피했다. 그러나 난 세 번째에서 가로로 돌았다.

“으억!”

남자는 가까스로 피했다. 남자의 로브 가슴 부분이 크게 찢어져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트라이던트의 창대가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남자는 다 리가 걸려 철썩! 물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지만 네리아는 그자의 가슴을 밟으며 목에 트라이던트를 겨누었다.

“칼놔.”

“야압!”

남자는 자신의 가슴 위에 있던 네리아의 다리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자 네리아는 곧장 목을 찔렀다.

“키히히……힉!”

남자는 바람 빠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부들거리는 손이 네리아의 발목을 꽉 잡았다. 네리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트라이던트를 뽑았다. 목에 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남자의 머리가 털썩 떨어지더니 잠시 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피가 호수를 붉게 물들였다.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그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풍덩. 네리아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망할 놈. 자살도 꼭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는 놈이 있어………….”

다른 남자들도 고통을 참으며 일어서더니 육탄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젠장! 난 비무장인 상대가 덤벼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할 수 없이 난 바스타드의 검날 옆으로 남자들의 뺨을 후려쳤다. 남자들은 몽둥이에 맞은 듯이 픽픽 나가떨어졌다.

길시언은 말에서 떨어지고 무기도 없어진 자가 그냥 덤벼오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황소에서 내리더니 마구잡이로 덤벼오는 상대를 방패로 막고 칼자루로 남자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저기선 샌슨이 역시 말 위에서 내려와 남자의 복부를 치는 장면이 보였다. 그악스러운 자들이었다. 무기가 없어졌는데도, 죽을 것이 뻔한데도 덤벼오니 막는 쪽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이루릴도 허리에서 피를 흘리는 자가 상처를 무시하면서 덤벼오자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피어올랐다.

“왜…………, 왜 죽으려 들죠?”

“이 자식들 도대체 뭐야!”

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이루릴을 공격하던 자의 등을 들이박았다. 남자는 숨막히는 고함을 지르며 나가떨어졌지만, 체인 메일을 입은 자를 그냥 들이박았더니 내 어깨도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위험해!”

뭐지? 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칼이 롱 보를 들고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시위. 뭘 쐈지? 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뺨을 쳤던 남자가 땅에 앉아서 허공에 팔을 든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남자의 팔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무슨 스크롤처럼 보이는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칼이 다급하게 외쳤다.

“네드발 군, 저걸 뺏아!”

“크으윽!”

남자는 팔의 근육을 다쳐 어떻게 할 수 없자 다른 손으로 그걸 바꿔쥐었다. 내가 달려가려 했으나 너무 늦었다. 그 남자는 고함을 질렀다.

“국왕전하 만세!”

남자는 고함을 지르더니 이빨과 손으로 스크롤을 찢어버렸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의 입자들이 남자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쌔에에에엑! 뭐, 뭐야? 나 는 남자의 눈을 보았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죽으려 하는 자의 눈.

“콰콰쾅!”

눈을 불태우는 화염이 몰아쳤다. 귀를 찢는 폭음. 격렬한 폭풍에 난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엄청난 불꽃과 날 향해 날아오는 불길의 폭풍. 죽었구나!

“제미니!”

이런! 또 부르고 말았어! 난 역시 할 수가 없는 놈이군. 응?

살아 있잖아?

난 머리를 들었다. 내 몸을 보았으나 전혀 다친 곳이 없다. 그저 땅에 나동그라질 때 긁힌 자국들만 몇 개 보였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맙소사……!”

가까이 있던 나무들은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했고 좀 멀리 떨어진 나무들은 모두 쓰러져 불타고 있었다. 땅은 시커멓게 변했고, 남자가 서 있던 땅에 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직경 50큐빗은 넘어 보이는 구덩이였다. 잠시 후 호수의 물이 그곳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런, 빠져죽겠다!”

쏴아아아!

물은 급격히 쏟아져 들어와 호수 옆에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난 황급히 일어나 뒤로 달렸다. 잠깐. 이런 엄청난 폭발에 내가 살았을 리가 없잖아? 그, 그럼, 난 영혼인가? 그럼, 내 시체는 방금 만들어진 저 작은 호수 아래에…………… 맙소사!

난 그 호수를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저, 저 아래에 내 시체가?

“안 돼……………. 장가도 못 갔는데…………, 훌쩍.”

“뭔 소리 하냐?”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가 서 있었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똑같은데? 음, 하긴 나도 그렇군. 하나도 다친 데가 없으니, 확실히 우리 둘 다 영혼이다.

“자, 네리아. 훌쩍. 올라가죠.”

“어딜?”

“뭐, 가봐야 알겠죠…………, 훌쩍. 전 처음 죽어봐서요. 어머니가 거기 계실지 모르겠네요.”

네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다음 순간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 그럼, 너와 난, 여, 영혼이야?”

“그러니까 그 폭발 속에서도 모양이 제대로지요. 훌쩍. 네리아는 직업이 직업이라 혹시 나와는 가는 곳이 다를지도 모르겠네. 훌쩍, 걱정 말아요. 가 끔 편지할게요.”

“어, 어, 어머나! 아, 아, 안 돼! 내가 죽다니! 으아앙!”

네리아는 내게 달려들더니 날 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울었다. 그때 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해봐. 정말 볼 만하네.”

샌슨도 살아 생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여전히 어깨에서 피를 흘리네? 그리고 칼도, 이루릴도, 길시언도, 운차이도. 그런데 그 남자들의 영혼은 어디 갔지? 응? 그런데 영혼 치고는(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네리아의 몸이 아주 적나라하게 느껴지네?

네리아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는 벌겋게 된 눈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내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좀 이상하네? 전통적인 방법으로 확인 좀.”

“으아아아! 왜 날 꼬집어요!”

“안 죽었잖아? 후치, 임마! 진짜 죽은 줄 알았잖아!”

“어, 그러네? 어떻게 그 폭발에서 살았지?”

이루릴이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막아주었군요.”

“예?”

“여긴 다레니안의 영토. 그녀가 우릴 보호한 모양입니다.”

“아!”

난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표면은 잔잔하고 변함없었다. 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마치 그에 대답하듯이, 호수 표면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얼어붙은 채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호수 표면에 거대한 물보라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물의 탑이었다. 아니, 물의 커튼? 장막?

그것은 파도였다.

믿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라면 혹시 모를까, 호수에서? 그러나 무지무지하게 큰 파도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느리게 움직였다. 거짓말 같다. 물방 울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서 파도는 마치 단단한 물질처럼 서서히 움직였다. 그것은 우리 머리를 넘어 불타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파도는 불타고 있는 나무들 위에 쏟아졌다. 불은 단숨에 꺼졌다. 푸와악! 그러나 우리 머리 위로는 전혀 쏟아지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호수 표면은 잔잔해졌다. 조금 전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불타오르던 숲에서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하 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솨아아아.

“놀라워…………….”

샌슨은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호숫가로 걸어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급히 고개를 꾸벅거렸다. 이루릴은 다정하고 애틋한 어조로 말했다.

“고마워요…………. 내 친구 다레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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