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5화

랜덤 이미지

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5화

6

“그분을 만나셨다고요?”

칼은 한숨을 쉬었다.

“만난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린 수도에 도달하기는커녕 생사불명이 될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투미했다니.”

“투미하다니요. 그 드워프, 노커 님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몰골을 하고 있는데 누가 가장 존귀한 드워프라고 생각했겠어요?” 샌슨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후치. 길시언이 말한 우리의 국왕과는 좀 다르다라는 말을 정말 잘 이해하겠군요.”

네리아가 폴짝 끼어들었다.

“몰골이 어떤데에?”

샌슨은 아주 신랄하게 엑셀핸드의 모습을 묘사했다. 샌슨의 묘사는 좀 지나쳐서, 엑셀핸드는 완전히 어느 뒷골목에서 일주일쯤 술 마시다가 방금 대로로 기어나온 드워프 정도로 의심받게 되었다. 좀 심하군. 그래서 나도 끼어들고 칼도 끼어들어 간신히 엑셀핸드의 위상을 좀 높여놓았다.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탈하다는 말이네? 당신들처럼?”

으잉?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샌슨과 칼과 난 서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소탈한가? 하긴,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의 헬턴트 영지에서 방금 올라왔으니 촌스러워 보이 는 거야 당연하지. 흠. 네리아는 촌스럽다는 말을 좀 고상하게 하시는군.

길시언은 말했다.

“그럼,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10월 초였는데…………. 아마 4일 아니면 5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길시언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마도 갈색 산맥에 벌써 도착하셨겠군요. 그렇다면 조만간 수도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그분이 도착하면 보석 공급이 중지된 이유도 밝혀지리라 생각됩니 다.”

“그럼 그분이 도착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나…………. 아니지. 여보게, 퍼시발 군. 우리가 헬턴트 영지로 돌아갈 기간, 아니, 아무르타트가 있는 끝없는 계곡까지 가 야 하니까 그 기간까지 모조리 계산해 보고 우리가 언제까지 수도를 출발해야 하는지 좀 알아봐 주게.”

“알겠습니다.”

샌슨은 테이블 위에 지리서를 펼쳐놓고는 종이와 잉크, 펜 등을 꺼내서 계산을 시작했다. 그러자 네리아와 길시언도 끼어들어 자기가 아는 길을 가르쳐주며 같이 토 론했다. 두 사람 모두 미드 그레이드 지방에 대한 지식은 충분했고, 미드 그레이드를 벗어나면 우리 고향까지는 거의 일직선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보급과 잠자리를 어디어디에서 설정하느냐다.

나는 핑핑 도는 머리를 다잡으며 세 사람의 스케줄 짜는 모습을 구경했다. 한참 후, 샌슨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에……………, 저희들이 수도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총 27일입니다. 하지만 그중 레너스 시에서 3일, 칼라일 영지에서 3일을 허비했으니까 21일이면 충분합니다. 하지 만 돌아갈 때는 좀더 빠르게 돌아간다고 보고, 몇 개의 루트도 변경해 보면 약 18일 정도까지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헬턴트 영지에서 끝없는 계곡까지는 도보로 10일 거리지만 말을 탔을 경우라면 약 4일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총 22일이 됩니다. 12월 31일까지 도착해야 하므로 늦어도 12월 9일까지는 출발해 야 하는군요.”

“좋네. 오늘은 며칠이지?”

“10월 26일입니다.”

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한 달하고 좀 남는군. 퍼시발 군의 계산이 거의 정확하군 그래.”

그렇군. 샌슨은 언젠가 여유 일자가 한 달 보름 정도라고 말했지. 거의 정확한데 그래?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군. 아인델프 님께서 도착하는 것은 며칠 내일 테니까……….”

“그럼 며칠 동안 할 일 없이 기다려야 되는군요?”

“그런 셈이지.”

“쇼핑해요!”

내 외침 소리에 칼은 놀란 눈이 되었고 네리아는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칼은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서 엄숙하게 말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는가, 네드발 군?”

“예. 우선, 나 읽을 책. 나도 책 좀 사줘요. 여행하는 동안 내내 책이 있었으면, 책 좀 읽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요. 수도에서는 책 구하기 훨씬 쉽겠죠?”

칼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참으로 갸륵한 소망이군.”

“그리고 또! 우선 제미니한테 기념 선물, 이루릴한테 약속한 손수건, 칼라일 영지의 슈에게 약속한 선물, 메리안한테 사다줄 선물.

칼은 점점 얼굴을 굳혔고 그와 비례해서 샌슨과 네리아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칼은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허흠. 퍼시발 군. 우리 여비가 충분히 남아 있는가?”

“뭐, 충분합니다만. 후치, 요녀석아. 이건 공금인데? 엄밀하게 따지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우리 출장비란 말이다. 네가 주워섬긴 그런 물건이 우리의 공무 와 무슨 상관이 있냐?”

“이이이잉!”

네리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머나? 후치 씨는 여자도 많네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안 연애만 했나 봐?”

“여자들이 날 가만두지 않으니까. 이건 공정함과 조화로움을 바라는 유피넬의 은총이죠.”

“그게 무슨 말이니?”

“세상에 샌슨 같은 오거도 내었으니 나 같은 미소년도 내어야 조화를 이룰 수…

딱! 으음…………, 이 기분. 오래간만이군.

뭐라고 떠들든 샌슨은 날 따라나왔다. 샌슨이니까. 칼도 다른 쇼핑에는 관심이 없지만 내가 들먹인 ‘책’이라는 말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군. 그 생각을 못했어. 수도까지 왔으면서 책을 구한다는 생각을 못했다니. 허허, 워낙 정신적으로 압박되는 일이 많아서 그랬나 보군. 일깨워 줘서 고맙네, 네 드발 군.”

길시언은 어제만 해도 죄책감에 죽을 둥 살 둥 몰라 하던 사람들이, 게다가 구하고자 했던 보석이 품절을 일으키는 엄청난 위기까지 닥친 데에도 불구하고 희희낙락 하면서 쇼핑을 나서는 모습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모습이었다. 흠, 황야의 왕자님. 그건 헬턴트식 배짱의 또 다른 표현이올시다.

길시언과 네리아도 털레털레 따라나왔다. 길시언과 네리아가 타는 말들(?)은 수도 시민들에게 너무 놀라움을 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길시언과 네리아가 마치 우리 일행이 아닌 것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걷느라 마음이 들뜬, 그러니까 말 위에 올라 있어 다 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던 것과 달리 다른 사람과 함께 걷기 때문에 마음이 풀어져버린 샌슨과 내가 난리를 피웠기 때문이다.

“와아! 샌슨! 저, 저 아가씨 드레스 가슴 판 것 좀 봐!”

“윽! 이 녀석 눈 좀 보게!”

“씨이……. 내 눈이 뭐가 어때서?”

“저건 아가씨가 아니라 아주머니잖아!”

“어, 그런가?”

“우와! 후치! 저, 저 건물 좀 봐! 유리창에 색칠도 했어!”

“아냐! 저건 색유리야.”

“어? 그런가?”

뭐…………, 요 모양 요 꼴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렇게 난리를 피운다 해도, 칼! 어떻게 당신이! 우리와 멀찌감치 떨어져 길시언과 동료인 척하는 겁니까! 어쨌든 그 소동 끝에 길시언의 안내를 받아 책방 골목을 찾을 수 있었다.

길시언은 감개무량한 어투로 말했다.

“6년 전과 똑같군요. 어린 시절, 내가 밤중에 임펠리아를 빠져나와 미친 살쾡이처럼…………, 그만해! 에, 어쨌든 바람난 암말처럼…………, 그만하라니까! 어쨌든 돌아다니 던 그 시절과 같군요. 하하. 이 골목엔 주로 레드북을 구하기 위해 오곤 했습니다.”

“레드북이 뭐죠?”

내 질문에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도색 서적.”

“우와! 그런 거 구할 수 있어요? 어디서 파는……………. 어, 흠. 그만 노려봐요!”

칼은 나와 길시언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던 샌슨에게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샌슨은 머쓱해져서 눈길을 돌렸다. 칼은 말했다.

“그런 책 읽을 시간이 있거든 양식이 되는 책을 좀 읽을 생각을 해야지. 그런 책들은 그릇된 성의식이나 성에 대한 편견, 오해밖에는 일으키지 않는다네.”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그래도 읽을 때는 재미있는데에ᆢ

“네리아 양!”

칼이 씩씩거리자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길 옆에 있던 책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책방 앞의 가판대에는 많은 수의 서적이 쌓여 있었다. 마치 짐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적을 보며 네리아는 탄성을 질렀다.

네리아는 책 한 권을 뽑아들더니 말했다.

“이거 봐! 제목 멋있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고상한 교양과 학식의 소유자 에리드리네스가 고찰, 분류한 상사병의 종류와 증상, 치료법』이라. 에리드리네스 씨의 교양은 좀 이상한 방향으로 발달했군. 누구 상사병 걸린 사람?”

샌슨은 킬킬 웃으며 책더미를 뒤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더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 이것도 정말 괜찮네. 『사해 동포들의 충만한 안녕과 보장된 번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취합, 분류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 동지들에게 고하는, 머리카락 땋는 방식의 복잡 미묘한 테크닉과 변형 일체도해 첨부』라는데? 네리아. 혹시 머리 땋을 일 없어?”

네리아는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해죽 웃었다.

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상한 필명을 사용하거나 단체명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에리드리네스라고? 허, 그것 참. 우리는 킬킬거리며 제각기 흩어져 책을 뒤적거리 기 시작했고, 가끔 폭소를 터뜨릴 만한 제목이 나오면 서로 보여주며 웃었다.

칼은 책방 주인에게 중노동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책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책방 주인은 가장 으슥한 귀퉁이나 책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책 을 꺼내기 위해 고생해야 했다. 길시언은 예전 버릇이 나오는지 주로 도색 서적만을 뒤적거렸고 그래서 난 길시언 주위만을 맴돌았다. 네리아는 책에는 별로 관심 없 었고 주로 제목을 보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일에만 심취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샌슨이 말했다.

“어라? 이것 좀 봐?”

책방 주인을 끝없이 괴롭히고 있던 칼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샌슨은 굉장히 오래되었을 법한 책을 한 권 보여주었다. 검은 표지에 두꺼운 책으로 제목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마법 입문』.

“허, 그것 참 독특하게 제목이 짧네. 그게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우습긴 한데.

“아니, 제목 말고 저자명을 보라고. 여기 아래에 있잖아?”

저자명 난 샌슨이 가리키는 부분을 보았다. 검은 표지라서 저자명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읽을 수 있었다. 타이번.

어랏? 타이번? 이게 타이번이 쓴 책인가? 우와! 타이번이 책도 썼나? 샌슨은 책을 펼쳐 읽을 태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곧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샌슨은 책을 바라보 며 주춤거리듯이 말했다.

“이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어? 룬어인가? 난 궁금해져서 샌슨이 펼쳐든 페이지를 보았다. 룬어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못 읽는다는 거야? 난 샌슨의 옆에서 소리내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대저 마법이라 함은 마나의 집합과 이산, 변형과 전이에 작용하는 시전자의 의지의 발현에 지나지 않음이라는 상기의 진술에 대한 가장 비근한 예로 시전자의 순수 의지 이외의 부수적인 요건들, 즉 시약의 적절한 사용과 주문의 영창 등의 제반 사항은 본질적으로 시전자의 의지 발현을 돕는 매개체로서만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 다는 가이너 카쉬냅의 언명을 들어 상기의 진술의 이해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겠으나 가이너 카쉬냅의 언명이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인 정한다 하더라도 그 언명의 주창에서 파악되는 비본질 매체, 시약과 주문에 대한 파격적인 축소 해석이 마법 입문자들에게 있어 무익한 선입견으로서 작용할 수 있음 은 재론의 여지를 남기지 않음이니………….”

쓰러지겠군. 네리아는 어지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샌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사볼까? 그런데 읽지도 못할 책을 산다는 것은…….”

그때 책방 주인과 씨름하던 칼이 다가왔다. 칼은 우리가 뭣 때문에 몰려 서 있는지 물어보고는 그 『마법 입문』을 샌슨에게서 받아들었다.

“이게 타이번 씨의 저술이라고? 어디 보세.”

칼은 몇 페이지를 뒤적거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읽어내려갔다. 칼은 한참 읽다가 빙긋 웃었다.

“허어, 동명이인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이 책은 마치 타이번 그 어르신의 말투처럼 정말 쉽게 씌어졌는데? 마법책치곤 상당히 쉬워.”

난 칼을 존경해 버릴 거다! 칼은 대충 훑어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이 책은 교양 서적보다는 전문 서적에 가깝군. 마법 배우는 사람에게만 쓸모 있는 책이겠는걸? 어디 보자…… 응?”

책을 훑어보던 칼이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난 물어보았다.

“왜 그러시죠, 칼?”

“이 책 발간년도가 246년인데?”

엥? 246년이라고? 그럼 몇 년 전인가, 근 70년 전이잖아?

“타이번 씨는 여든 살 가량으로 보이던데……………. 설마 열 살 때 마법 입문서를 쓰시지야 않았을 텐데?”

칼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샌슨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되는군요. 동명이인인가? 아!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타이번 하이시커! 그 사람은…………….”

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루릴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이 다리를 만든 것은 200년 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퍼시발 군. 그것도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데?”

그럼 타이번이라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나? 그것도 전부 마법사?

“같은 이름을 가진 세 명이 모두 같은 직업을 가졌다라…………. 그것도 희귀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는 직업을. 그거 정말 신기한 일이군.”

그때 우리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길시언이 끼어들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예. 우리 고향에 타이번이라는 마법사가 계십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기 조금 전에 마을에 들르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약 70년 전에 발간된 책이군요. 이 책의 저자의 이름도 타이번이군요. 퍽이나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휴다인 고개에서 보았던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사람도 타이번 하이시커입니다. 그 다리는 2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길시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현재, 70년 전, 200년 전에 각각 활약했던 세 명의 타이번이라는 마법사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마 그런 모양이군요. 허허. 타이번이라는 이름이 마법사들에게 꽤나 사랑받는 이름인가 봅니다?”

“글쎄요. 그렇게 유명한 이름이라면 나도 알 텐데. 난 타이번이라는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마법사의 이야기는 들어보았지 만…………….”

“들어보셨습니까?”

“예. 하지만 그저 어느 마법사가 만들었다는 식으로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 다리를 만든 사람이 타이번 하이시커라고 합니까?”

나와 샌슨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저긴 말을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말했다. 그 말은 곧 프림 블레이드가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길시언은 나와 샌슨이 놀 라서 바라보자 의아해하다가 곧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길시언 역시 크게 놀란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야, 네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이런 기쁠 데가…, 응?”

길시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조용히 해! 젠장. 이 녀석도 신기한 말을 들어서 방해하는 것을 잠깐 잊었던 모양입니다.”

에구, 사람하고 똑같군.

난 희희낙락하며 책을 쓸어보았다. 내가 산 책은 이제 나에게 가공할 지식을 전수함과 동시에 선현의 경험들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제목도 얼마 나 좋은가?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

우헤헤. 난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펼쳐보았다.

“걸을 땐 책 읽지 마!”

샌슨의 주의가 날아왔다. 흠. 하지만 궁금한걸. 난 아쉬움을 삼키며 책을 덮었다. 칼이 산 책은 내 것보다 월등히 커다란 것으로 이루릴의 방패만 한 마법책에 버금갈 만한 것이다. 하지만 저런 책을 왜 보시지?

『서지학의 발달과 전승에 대한 고찰』.

서지학이면 책에 대한 학문인데, 그것 정말 우습잖아. 책에 대한 학문을 다시 고찰한 학문이라니. 도대체 어느 게 먼저고 어느 게 나중이야? 내가 보기엔 정말 쓸모 없는 학문 같은데 말이야.

그래도 무협 소설을 뽑아든 샌슨보다는 품위 있다고 해야 하나? 샌슨은 나보고 걸으면서 책 읽지 말라고 해놓고선 자기는 책을 읽고 있다.

“우히힛히히!”

“으윽……, 제발! 걸을 땐 책 읽지 마!”

내 고함소리에 샌슨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책을 덮었지만 그래도 우스운지 낄낄거리고 있다.

“너무 웃긴다. 이 책.”

흠, 나는 무협 소설이 왜 우스운가에 대해서 질문하지는 않았다. 선원이 항해에 관한 소설을 보면 얼마나 웃겠는가. 비슷한 거지. 샌슨은 계속해서 자기가 사든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악당들에게 외치는 길고도 엄숙하며 장엄한 대사를 뇌까리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스우면 왜 사! 게다가 칼 뽑아들고, ‘내 목숨은 한 개! 그 래서 비싸지! 유니크하거든? 이라고 외치는 주제에!

네리아는 책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무 책도 사들지 않았고 길시언도 책을 사들지 않았다. 자기 짐에 책 들어갈 공간이 있다면 거기다가 물이나 한 통 더 넣겠다는 것 이 길시언의 주장이었다. 길시언은 모험가니까, 뭐.

칼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수건을 산다고 했는가, 네드발 군?”

“예. 그런데 칼이 골라주시게요?”

“내가 무슨. 네리아 양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그러자 네리아는 까불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요. 나 따라와요.”

네리아가 우리를 이끌고 간 곳은 여성용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였다. 네리아는 거침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그 외 남자들은 좀 우물쭈물거리며 네리아를 따라 들 어갔다.

주인으로 짐작되는 아주머니는 처음에 네리아를 보고 반색을 하다가 곧 우락부락한 네 명의 남자들도 함께 따라 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리아는 활기차게 주인장에게 말했다.

“이봐요, 손수건. 손수건 좀 볼까요?”

주인장 아주머니는 싹싹한 표정으로 구석에 있는 나무 궤짝을 가리켰다. 네리아는 궤짝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네리아는 몇 개 의 손수건을 꺼내어 들어보더니 그중 하나를 자기 목에 둘러보이며 말했다.

“자, 심사위원 여러분? 각자 점수를 말해 주세요.”

뭐야, 이건? 무슨 가축 품평회라도 되나? 아니면 채소 전시장이라든가, 어쨌든 난 갑자기 축제에서 벌어지는 그런 대회를 떠올리게 되었다. 난 빙긋 웃으며 말했다.

“10점 만점에 9점! 머리카락 색깔과 어울리지 않아서.”

“손수건은 9점, 그리고 손수건 안에 있는 것은 5점……………, 아니 4점?”

샌슨의 말에 네리아는 혀를 날름 내밀었고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웃으며 말했다.

“10점 드리지요.”

길시언은 주춤거리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보단 이놈이 훨씬 안목이 있겠지요. 이 녀석은 7점이라는데요?”

“애개, 짜다.”

네리아는 히히거리며 계속해서 손수건을 바꾸어 우리들이 점수를 매기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점수를 불러주었지만 결국 네리아의 결정에 따라 난 이루릴에게 선물 할 손수건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슈에게 갖다줄 파란 리본과 메리안에게 선물할 브로치, 제미니에게 선물할 팔찌도 골랐다. 뭐, 속마음으로 말하자면 향수나 보석 반지를 고르고 싶었지만…………, 헤헤. 그것들을 다 고르고 나서 나는 샌슨의 허리를 찔렀다.

“안 골라?”

“응?”

“어헛! 결혼 반지.”

샌슨의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샌슨 때문에 여기로 왔다. 겸사겸사 내 선물거리도 장만하면 좋고. 칼도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카아아아알!”

샌슨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칼도 저 노래를 알고 있었군? 난 확실히 너무도 천부적인 음악적 소양을 타고난 모양이야. 네리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질문했다. “결혼 반지?”

샌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얼굴 색깔을 보여주었다. 난 흐느적거리는 유려한 어투로 설명해 주었다.

“말하자면……, 샌슨은 결혼식장에서 끌려나온 신랑과 마찬가지…………. 그의 가슴에 맺혀 있던…… 그날 아침의 향기는…………… 잊혀질 수 없는 약속의 증거…………… 이루어져 야 하는 사랑의………….”

“그, 그만해!”

샌슨은 내 목을 비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얼빠진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곧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고향 언덕에서 황혼을 등진 채 검어져 가는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떤 아가씨?”

“오, 좋은, 켁켁! 표현, 한 번 더, 케에엑! 말해 봐요. 까먹었어.”

결국 네리아는 멋진 반지까지 골라주었고 샌슨은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몸짓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연구 대상이야, 완강히 거부하듯이 받아들다니. 역시 샌슨인가?).

쇼핑을 마치고 나자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유니콘 인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샌슨은 가끔 주머니 속의 무언가를 만지며 헤벌레 웃음 지음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네리아는 불그스름한 하늘빛 아래에서 깡총깡총 뛰었다. 네 명의 남자는 그것을 구경하며 웃으며 따라갔다. 네리아는 두 팔을 벌리고 큰 동작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 다.

“선물받는 것도 좋지만, 선물할 사람이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에요.”

난 웃으며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받을 테니 나한테 선물해요.”

“이건 어때?”

네리아는 키스를 날렸다. 난 질겁하면서 샌슨의 뒤에 숨어버렸다. 네리아는 깔깔 웃으며 다시 빙글 돌아 깡총거리며 뛰어갔다. 왼쪽으로 뛰었다 오른쪽으로 뛰고, 경 쾌하게 좌우로 뛰었다가 뒤로도 뛴다. 그때마다 네리아의 단발머리가 석양의 빛으로 더욱 붉게 찰랑거렸다.

그때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저기 길 앞쪽에서 건장한 말들이 끌고 있는 쌍두마차가 보였다. 정말 화려한 마차로군. 네리아는 마차가 달려오자 길 옆으로 폴짝 뛰었다. 그런데 그 마차가 네리아 옆에 멈추더니 마부석에 있던 남자가 내렸다.

그 마부는 체격이 좋은 남자로 가죽 갑옷을 입고 손엔 말채찍을 들고 있었다. 그 남자는 네리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야, 거기.”

네리아는 멈춰 섰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왜?”

으음. 네리아답군. 남자는 험악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너 몇 살이야?”

네리아의 어깨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남자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네리아의 대답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저 남자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다.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기 직전, 우리 들은 재빨리 네리아의 등 뒤에 나란히 섰다.

남자는 네리아 하나뿐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네 명의 남자가 그 뒤에 서자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네 명 중 세 명이 검을 둘러메고 있으니 더욱 위축되는 표정이 었다. 하지만 네리아는 우리들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야이, 자식아. 내 나이가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어디서 봤다고 보자마자 틱틱 반말지거리야, 엉?”

남자는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이 천한 것이 미쳤나……”

그때였다.

“훈트. 입 조심하라.”

마차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훈트라는 그 남자는 찔끔한 표정이었다.

난 마차를 흘긋 보았다. 마차는 무슨 귀족의 것인지(하긴 귀족이 아니면 누가 마차를 타고 다니겠는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마차 문에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 다. 낯익은 문장인데? 문에 달린 창문으로는 웬 남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나이가 거의 칼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밤색 머리카락에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였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말한 것이겠지만 그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앞 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훈트가 말했다.

“젠장. 나이만 말해 주면 돼. 그럼 얌전히 보내주지.”

네리아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샌슨이 먼저 나섰다.

“난 이렇게 말해 주지. 공손한 태도로 레이디께 실례를 사과하면 얌전히 보내주겠다. 알았냐?”

“레, 레이디?”

네리아는 입을 콱 틀어막았다. 웃음이 터져나와서 못 견디겠다는 투다. 그리고 훈트도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그는 눈에 불을 켜더니 말했다.

“이 자식이 감히 어느 면전이라고!”

훈트는 으르렁거리며 말채찍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쉬식.

훈트는 꼼짝도 못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샌슨이 빠른 손놀림으로 롱소드를 뽑아 훈트의 목젖에 가져다댄 것이다. 흠, 멋있는 장면이군. 난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감상했다.

훈트는 퍼렇게 질리더니 말했다.

“이, 이놈! 감히 누구에게, 이, 이 안에 계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

샌슨은 콧방귀를 뀌며 마치 마차 안의 인물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하인을 보니 상전의 인품도 대충 짐작하겠군.”

훈트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너 이 녀석. 모르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무례하게………

“훈트!”

마차 안에서 일갈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리더니 그 안의 중년 남자가 내렸다.

밖으로 나온 얼굴을 보니 확실히 날카로운 얼굴이다. 샌슨은 일단 롱소드를 거두었지만 남자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훈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곧 훈트의 뺨을 갈 겼다. 철썩!

훈트는 무릎을 꿇었다.

“후, 후작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놈이 너무나 무례하여…………

“닥쳐라. 훈트.”

훈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남자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훈트를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샌슨에게 말했다.

“아랫것의 잘못을 사과하오, 젊은이.”

“……교육을 좀 잘 시켜야겠습니다.”

샌슨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맙소사. 도대체 저 인간은 머리 양편에 귀라고 불리는 고귀한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전에 후작이라고 했잖아! 그 후작 씨는 샌슨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실례를 범한 이유를 설명하겠소. 나는 어떤 아가씨를 찾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나이는 대략 10대 후반쯤입니다. 그래서 혹시 이 아가씨가……………”

그 후작 씨는 말을 맺지 못했다. 네리아가 걷잡을 수 없이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까르르르! 와, 와! 후치, 지금 이 말 들었니?”

“핏. 당연하죠. 그렇게 깡총거린데다가 60대 노파라도 10대 소녀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석양빛의 마력이 더해졌으니까.”

“어어랏? 심술궂은 말이네. 이봐요, 후작님. 딸이 없으시죠?”

네리아의 발랄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 후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재미없다는 투로 웃으며 말했다. “나 10대 아니에요. 겉모습은 그렇게 보이겠지만.”

샌슨은 네리아의 말에 피식 웃었고 그래서 네리아는 샌슨을 흘겨보았다. 후작은 여전히 별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오. 실례를 용서하시오. 그럼.”

후작은 간단히 말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훈트도 허겁지겁 일어나더니 마부석에 올랐다. 그는 사나운 눈길로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샌슨은 그냥 무표정하게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이랴!”

훈트는 마치 말에게 화풀이하듯이 채찍질했다. 마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차 안에 타고 있던 그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 중년 남자도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잊혀지지 않을 듯한 날카로운 눈이다. 마차가 빠르게 출발해 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보지는 못했지만 그 눈빛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네리아는 10대로 보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쁘다는 듯이 해죽거렸다. 그게 그렇게 좋나? 네리아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헤헤. 후치랑 같이 걸으면 나 후치 동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네?”

“으악!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을 텐데!”

“야야! 조금 전에 엄밀한 상황 증거가 나타난 것 보고도 모르겠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볼까? 이봐요! 아저씨!”

네리아는 정말 지나가는 중년 남자를 붙잡았다. 정말 못 말리겠다! 네리아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내가 누나일까요, 이 사람이 오빠일까요?”

난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내가 네리아보다 키가 크기야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껏 세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청초한 얼굴이 있다! 길시언과 샌슨, 칼도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은 채 구경하기만 했다.

남자는 피식피식 웃더니 말했다.

“글쎄. 네 아빠 아니니?”

어어억! 이 남자 혹시 장님 아냐!

네리아는 저녁 내내 그 사실을 가지고 나를 놀려대었고 난 그 남자가 농담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물론, 당연히, 입증되지 않았다. 망할. 난 간신히 네리아를 그녀 방으로 쫓아내고 나서 책을 펴들 수 있었다. 샌슨도 자기 침대 위에 드러누워 곧 킬킬거리기 시작하다가 칼의 헛기침 소리에 입을 다물었 다. 그렇지만 샌슨은 계속 웃어대었고, 그래서 칼은 의자와 촛대를 들고서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10분쯤 후, 시퍼렇게 질린 칼이 들어왔다. 헤에. 야경이야 멋있겠지만 10월의 찬바람 속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실걸. 칼은 별말 없이 침대 속에 들 어갔고 샌슨은 웃음을 좀 참으며 책을 읽었다. 마침내 평화로운 독서 분위기를 맞이하여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을 읽을 수 있게 되었 다. 아아, 행복해라.

음, 설명만 보아도 정말 입에 군침이 도는군. 애개? 이렇게 배합해서 맛이 죽지 않나? 어엉? 가재를 사용하라고? 그 조그만 가재 벗기고 다듬고 할 게 뭐 있나? 그냥 구워먹으면 되지. 난 칼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바다에 사는 가재는 민물 가재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힛히히힛!”

으악! 제미니다! 아니, 샌슨인가?

“좀 그만두지 못해!”

“어,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난 진저리를 치며 베란다로 나갔다. 칼은 ‘못 버틸 텐데.’ 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지만 뭐, 그 정도를 못 버티랴? 칼보다야 내가 훨씬 젊은데 말이야아아아….., 춥다!

“어흠! 흠, 험! 시원하군!”

“어랏?”

옆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베란다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입고 있 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등에 멘 그 커다란 트라이던트는 잘 보였다. 난 놀라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네리아는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난 옆쪽 베란다에 가까이 다가 갔다.

“조금 전엔 칼 아저씨가 나오더니, 넌 또 왜 나오니?”

네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래서 나도 낮게 질문했다.

“그런 복장으로 어딜 가려고요?”

“으음.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위험한 거 아닙니까? 무장도 하고?”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그렇다고 내가 아, 그렇습니까? 잘 다녀오세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관심 끊고 살지는 않겠다.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디트리히 하나로 충분하 다. 난 팔짱을 끼고 말했다.

“여긴 수도예요. 나이트호크가 함부로 돌아다닐 곳이 아닐 텐데.”

“그것 참……. 너완 상관없는 일이야.”

“그때 기억나요?”

“응?”

“죽을 거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죠?”

“..살려줘.”

“뭔 일인지 모르지만, 같이 가죠.”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샌슨이나 길시언, 칼 아저씨는 안 돼. 알았지? 그 사람들은 절대로 안 돼. 조용히 나와.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는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대단하네. 난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산책?”

“베란다에서 바라보니 야경이 너무 좋아서. 잠깐 돌아보고 올게요.”

“산책 나선다면서 검은 왜?”

“그냥, 몸조심해야지요. 나처럼 남장 여인으로 오해받기 쉬운 얼굴의 미소년은 원래 몸조심을…………….’

“잘 다녀오게.”

칼은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시언이 함께 가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난 고즈넉하게 혼자 걷고 싶다고 말해 버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관 밖으로 나오니 네리아는 여관 벽에 기대어서서 돌멩이를 툭툭 차고 있었다. 네리아는 날 보더니 말했다.

“내가 그냥 나가면 뭐 밤도둑질이나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까 봐 데려가는 거야. 하지만, 절대 조용히 따라오고 함부로 나서면 안 돼. 알았지?”

“위험한 일이군요?”

“위험한 일이면 너 하나 데려가겠니? 여자와 어린애는 괜찮으니까 데려가는 거지.”

우와! 어린애라니. 역시! 난 청초 가련형 동안이 확실해!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내 팔짱을 끼더니 활발하게 걷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정말 밤산책이라도 다 니는 꼴이잖아?

난 네리아에게 물었다.

“이러고 다니면 연하를 건드리는 여자 소리 들을 겁니다.”

“아빠 따라나온 딸네미가 아니고?”

“그건 그만! 아빠 따라나온 딸네미가 그런 무시무시한 창을 등에 메고 다녀요?”

“무인 집안이라고 생각하겠지. 너도 등에 바스타드 메고 있잖아?”

우린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그야말로 산책이라도 다니듯이 편하게 걸어갔다. 주위의 시선은 아무래도 연하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닌 듯 했다. 아아……, 헬턴트의 햇살이 웬수로다! 그러고 보니 이라무스에서도 난 감쪽같이 청년으로 통했지. 물론 변장을 하긴 했지만.

한참을 걸었다.

네리아는 길을 잘 아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지도 않고 마구 걸어갔지만 주위가 점점 이상하게 바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걸어갔다. 네리아가 이 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곧 주점과 사창굴이 밀집한 장소가 나왔다. 어, 이런…………. 고약한 장소에 왔는데 그래?

주위에는 입었다기보다는 벗었다에 더 가까운 옷차림의 여인네들이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난 네리아와 함께 걷고 있어서 그런 추파의 대상은 되지 않았지만, 대신 욕설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헤에. 털도 안 벗겨진 걸 남자라고 데리고 다니네?”

“도련님 뼈 녹겠네?”

“뻣뻣해서 못 쓸 텐데, 내가 먼저 좀 튀겨줄까?”

별의별 욕설들. 차마 다 기억도 못하겠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화는 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왜 욕을 하는가. 난 그녀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녀도 나에게 원한이 없다. 저것은 무슨 의미로 나오는 욕설인 가. 그냥, 그냥이겠지. 한마디 튕겨주지 못하면 배길 수 없는 심정 때문에. 그리고 그때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러니 저건 눈 감고 던지는 돌멩이와 같다. 날 향한 욕설도 아니다. 네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어른이 되어볼래?”

“그거 무슨 뜻입니까?”

내가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네리아는 빙긋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마. 지금부터 무조건 입 다물고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마. 무조건 내 뒤에 서 있고, 그리고 등 뒤를 조심해. 내가 지키겠지만 완전할 수는 없어. 급하 면 나 버리고 튀어. 내 몸은 내가 빼낼 수 있으니까 네가 엉겨들어 귀찮게 굴면 나만 골치 아파. 알겠어?”

심상찮은 분위기로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한숨을 포옥 쉬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확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쇳소리를 내며 나지막하지만 사납게 말했다.

“잘 들어두라고. 넌 이미 내게 멍청한 모습을 보였어. 너와 아무 상관도 없는 꼬마 때문에 목놓아 울어젖히는 모습을 보였다고, 이 얼간아. 만일 내가 위험해지면, 너 살 궁리나 하고 튀란 말이야. 알았어!”

내가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네리아는 그대로 거리에 늘어선 지저분한 술집 가운데 한 건물에 들어섰다. 그 건물은 양쪽의 건물들 사이에 간신히 우겨넣은 듯이 자리잡고 있었다.

삐이이.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연기와 숨막힐 듯한 악취가 풍겼다.

내가 말쑥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지만, 지금 이곳에서라면 난 귀족가의 외아들이라고 해도 믿어주겠군. 덥수룩한 수염, 흉터, 문신, 붕대, 안대, 괴상한 액세서 리들. 남자들은 모두 날 한 번씩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걸로 끝. 더 이상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놈이 되어버렸다. 남자들은 모두 자신의 우울과 고독으로 돌아갔 다. 매캐한 연기 속으로 돌아가 나와 무관계해지는 남자들이 거기 있었다.

일곱 겹쯤의 벽이 주위에 둘러지는 느낌이다.

네리아는 주위에 시선을 보내지 않고 곧장 바로 걸어갔다. 나 또한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네리아를 따라갔다. 안개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칙칙한 안개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남자들. 날 선 칼날 같은 남자들이 몰려앉아 있었다. 침침한 듯하지만 싸늘한 시선들이 번뜩였다. 기가 죽는 느낌 이다. 술을 들이켜다가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남자도 보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구석자리에서 웬 여급 하나를 붙잡고 장난치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얼굴 뜨거워지는군. 남자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무슨 망측한 짓을 하고 있었고 여자는 심드렁하게 교태 어린 한숨 소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난 얼굴을 돌렸다. “뭐야?”

바텐더는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 때문에 발음이 튀었다. 나는 묵묵히 네리아 뒤에 섰고 네리아는 나에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말했다.

“문댄서를 만나고 싶어.”

남자는 파이프를 바에 털더니 다시 입에 던져넣으며 말했다.

“그런 술은 없어.”

“장난칠 서열이야? 아닐 텐데.”

“넌, 누구야?”

“슬로드의 관뚜껑을 내가 덮었지.”

“난 슬로드 몰라.”

“기억력이 나쁜 건 자랑이 아냐.”

바텐더는 침을 탁 뱉더니 걸레를 들어 묵묵히 바를 닦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바 앞에 앉아서 턱을 괴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난 그저 묵묵히 네리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바 전체를 닦고 나서 바텐더는 턱으로 홀 한쪽의 문을 가리켰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네리아는 일어나서는 그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네리아를 따라갔 다. 매캐한 연기에 기침이 나올 것 같다.

네리아는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안은 어두웠다. 홀의 불빛이 닿는 바닥에 밝은 사각형이 그려질 뿐, 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리아는 말했다.

“문 닫고 기대서, 후치.”

문을 닫으니 완전히 컴컴했다. 네리아는 손을 뒤로 뻗어 내 손을 쥐었다.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쥐었다. 마치 내게 무언의 다짐을 받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자 세 그대로 말했다.

“나야.”

“뒤쪽은 누구야?”

들어본 목소리다. 문댄서라는 그 남자다.

“까불지 마.”

“용건은?”

“불 켜, 빌어먹을 자식아.”

잠시 후, 탁탁거리는 부싯돌 소리가 나더니 주위가 으스름하게 밝아졌다. 자세히 보니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램프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램프 뒤쪽으로는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문댄서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다. 네리아는 그대로 서 서 말했다.

“날 찾는 이유를 말해 봐.”

“마음 바뀌었어?”

“바뀔지도 몰라.”

“단검 집어던질 때는 언제고.”

“일이야, 일. 쓸데없는 소리 끼우지 말아.”

“빨강머리가 필요해.”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강머리 10대 후반의 아가씨를 찾는 놈들이 있더군.”

“손잡을 건가?”

“설명부터.”

미동도 하지 않던 문댄서가 의자 등에 몸을 기대며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뒤로 기울이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네리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고, 그래서 나는 네리아와 문 사이에 끼여 서 있었다.

문댄서의 얼굴이 있을 만한 장소에서 빨간 빛이 반짝였다. 담배를 피우나? 문댄서는 연기를 뿜었다. 램프의 검붉은 빛 때문에 붉은 뱀들이 허공에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어떤 귀족이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어.”

“후작이지?”

“그래.”

“잃어버린 지 꽤 되나 보지?”

“아기일 때 잃어버린 모양이야.”

“빨강머리와 나이만으로 찾는다면 정말 힘들 텐데.”

“그것뿐이야. 다른 증거도 있을 텐데, 그건 알아내지 못했어.”

“재산?”

“서류야.”

“그래서 가능하다는 것이군?”

“응.”

“생각해 보고 대답하지.”

“젠장, 서툰 수작 하지 마.”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내일까지.”

“넌 깨끗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어.”

그리고 네리아는 몸을 돌렸다. 나가자는 신호인 것 같아서 나는 문을 열려고 했다. 갑자기 네리아가 내 손을 쳤다. 네리아는 사납게 말했다.

“밖에 떨거지들 치워.”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자 네리아는 날 밀어내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두 명의 남자가 좌우에 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쳐다보았고 네리아는 별 표정 없이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네리아를 따라나왔다.

홀 안의 아무도 우릴 쳐다보지 않았다.

네리아는 거침없이 바깥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네리아는 그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멍청히 그녀를 뒤따라갔다. 주위에선 여전히 욕지거리들이 들려왔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골목 밖으로 나오자 네리아는 다시 팔짱을 끼고는 방긋거리기 시작했다.

“좋은 밤이지?”

“아까 그 대화, 물어보면 화낼 건가요?”

네리아는 대답 대신 내 팔에 뺨을 붙였다. 난 그저 멍청히 걸었다. 새로 산 검정 재킷이 네리아의 볼에 부딪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리아는 말했다.

“너 머리 좋잖아. 무슨 말인지 짐작할 텐데?”

“……아까 저녁 무렵에 봤던 그 귀족은 빨강머리 소녀를 찾고 있었죠.”

“계속해 봐.”

“그 문댄서는 사기꾼이라고 했어요. 아마 빨강머리 소녀, 잃어버린 딸이라죠? 어쨌든 그 소녀를 찾고 있는 귀족 집안에 당신을 대신 들여넣을 계획이겠군요.” “계속해.”

“그래서 당신은 그 잃어버린 딸인 것처럼 위장해서 그 집에 들어가서는, 그 집에 있는 어떤 서류를 훔쳐내 온다는, 그런 계획인가 보군요.”

“계속.”

“끝인데요.”

“흐음…………. 네가 말할 때 팔이 울리는 게 재미있어. 계속해 봐.”

하긴 뺨을 그렇게 붙이고 있으니까. 난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당신은 그걸 할 건가요?”

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해? 그 후작에게 이미 내 나이가 10대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후작일까?”

“할슈타일 후작입니다.”

네리아는 멈춰 서서는 날 바라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였고, 그러자 네리아는 다시 걷기 시작하며 내 팔에 뺨을 붙였다. 계속하라는 의미 같은데. 난 설명해 주었다.

“그 마차에 있던 문장…………., 어제 아침에 우리들을 찾아왔던 할슈타일 가문의 에포닌 아가씨를 호위하던 남자들의 검집에도 같은 문장이 있었어요.”

“그러니? 확실해?”

“확실해요. 에포닌 아가씨도 후작님이라는 말을 했고.”

네리아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와. 할슈타일 가문이면 드래곤 라자가 태어난다는 가문이잖아.”

“드래곤 라자는 태어나지 않아요.”

네리아는 뺨은 붙인 채 눈만 위로 올려 떠서 날 바라보았다. 이러고 걸으니 정말 힘들군.

“15년 전부터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기로 약속된 기한이 15년 전으로 끝났어요.”

네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난 드래곤 로드와 할슈타일 공의 300여 년 전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네리아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너, 아는 게 많구나. 그럼 내가 후작을 만나지 않았다 해도 어차피 못하는 일이네.”

“예?”

바람이 불었다. 네리아는 눈을 잠시 가렸다가 코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우우. 추워.”

난 바스타드를 벗어들고는 재킷을 벗어 네리아에게 주었다. 네리아는 까르르 웃더니 재킷을 받아들고는 트라이던트를 내게 건네었다. 흠, 아무래도 난 기사의 종자 타입인가 보군. 난 바스타드와 트라이던트를 한꺼번에 거머쥐었고 네리아는 내 재킷을 어깨에 둘렀다. 검은색 재킷이라 네리아의 검은색 옷에 잘 어울렸지만 크기에 서는 좀 차이가 난다. 재킷이 아니라 코트 같은걸. 네리아는 다시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

“15년 전에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끝났다고?”

“예.”

“그럼 뻔해. 그 집안에서 딸을 잃어버린 건 꽤 오래되었겠지?”

“아기였을 때 잃었다고 했죠.”

“그 동안 안 찾다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딸을 찾는 이유는 간단해.”

“간단해요?”

“드래곤 라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드래곤 라자가……………”

“10대 후반의 그 소녀는 혈통이 끊기기 전에 태어난 아이잖아.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지.”

난 침을 뱉었다.

“젠장.”

네리아는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잃어버린 딸을 찾는 식의 애틋한 이야기는 아니지, 뭐. 아마 ‘다른 증거’라는 것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겠지. 그러니 위장할 수가 없어.” 갑자기 에포닌 아가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후작님도 그 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 소식이란? 디트리히의 생사가 확실하지 않다는 소식이지. 그런데 칼의 말에 의하면 할슈타일 가문은 드래곤 라자가 꼭 필요한 가문이다. 드래곤 라자가 약속된다 는 이유로 300년 동안 영화를 누려온 가문이니까. 그런 가문에서 소중한 드래곤 라자가 생사불명이 되었는데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말은, 새로운 드래곤 라자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 빨강머리 소녀.

그 잃어버린 딸은 양자도 아닌 확실한 할슈타일 가문의 사람이니까 훨씬 확률이 높겠지. 그러니 양자인 디트리히 정도는 없어도 그만. 특히 디트리히는 아직 어려서 혈통을 만들 수 있는 나이도 아니지만…………, 제기랄! 그 잃어버린 딸은 10대 후반이라니까 자손을 생산할 수도 있겠지.

나는 다시 후작의 그 날카로운 얼굴을 떠올렸다. 젠장.

“빌어먹을 놈의 귀족 녀석………….”

“갑자기 뭐니?”

“인간을 다루는 게 아니라 무슨 가축 다루는 것 같잖아요.”

“무슨 말이니?”

난 네리아에게 차근차근 내 생각을 말해 주었다. 다 듣고 난 네리아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런 거니이……..? 휴우.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구나. 하지만, 그거 확실한 것은 아니지? 후치의 생각일 뿐이잖아.”

“다른 추리가 가능하면 말해 봐요. 열심히 들을 테니까.”

“난, 머리 나빠서 그런 것 못해. 그리고 그런 이야기 그만해.”

난 한숨을 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모습은 헬턴트나 이곳이나 똑같군. 돌아가고 싶다.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다. 젠장. 마음씨 좋은 우리 영주님이 다스리는 헬턴트로 돌아가고 싶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비교적 늦은 시간이라 거리엔 아무도 없었고 가로등만이 우울하게 10월의 밤하늘에 미명을 던지고 있었다. 땅에 그려지는 빛의 동그라미들이 아름다웠다. 이곳엔 밤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도 없군.

“그런데 네리아는 정말 몇 살이지요?”

네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신사가 못 되시는군?”

“나이부터 말해 줘요. 그럼 그 다음부터 신사가 될 테니.”

“호호호. 사실 몰라.”

“예?”

네리아는 가로등에 비친 자기 그림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말했다.

“고아거든. 그래서 정확한 나이는 몰라.”

“그럼……………, 설마 진짜 내 나이보다 더 어릴 수도!”

네리아는 갑자기 앞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가로등 아래에서 한바퀴 돌더니 날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그럴 것 같니?”

뭐라고 대답하지? 난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나보다 연상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느껴왔다. 분위기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 떨어져 쌓이는 가로등 불빛 속에 펑퍼짐한 내 재킷을 걸치고 빙글 도는 그녀는………….

“에구! 당신은 여든 살 먹은 마녀야. 어서 가요, 춥다구.”

“뭐야! 저게 죽고 싶어서, 어? 너 거기 안 서!”

우리는 인적 없는 바이서스 임펠의 밤거리에서 빛의 동그라미들을 징검다리처럼 밟아가며 달렸다. 네리아의 목소리는 짜랑짜랑 울렸고 내 발소리도 우렁우렁 울렸 다. 볼에 부딪히는 바람은 무한한 속도감을 선사했다.

유니콘 인이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 네리아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 헐떡거렸고 나도 유니콘 인의 정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푸하하하.”

“뭐가, 헥, 우스워.”

“그냥,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좋아? 어, 그럼 이 소식 알려주기 싫네.”

“무슨 소식인데요?”

“문이 잠겼어.”

“어어어억!”

난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정문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홀의 불빛은 꺼져 있었고 문을 밀어보니 확실히 잠겨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조금만 밀면 문 정도야 간단히 부 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간신히 그 유혹을 억눌렀다. 네리아는 해죽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 트라이던트.”

트라이던트를 네리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네리아는 여관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까지 걸어간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거꾸로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탁! 트라이던트를 땅에 찍으며 네리아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나이트호크. 한 마리 새가 날 듯이 그녀는 가볍게 2층 베란다에 올라섰다.

“오우! 멋있어요!”

“그러니? 고마워. 그럼 잘 자!”

“어? 어어어어! 문 안 열어줘요?”

“마녀가 어쩌고 한 벌이야. 호호호. 재킷도 없으니 조오금 춥겠다?”

“어! 그거 농담이라면 별로 재미없고 진담이라면 별로 달갑잖아요!”

“달가운 벌도 있니? 날이 새면 문 열릴 거야, 안녕!”

어어랏! 정말? 네리아는 정말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조용해졌다. 난 아래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네리아는 몸이 가벼우니까 발소리를 안 낼 수도 있겠지. 에, 지금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서, 홀을 가로질러, 문 손잡이를 잡고, 지금, 연다!

안 열리네?

노, 농담이 아니다! 정말 날 여기서 재우려고? 어, 조금 버티면 열어주겠지? 약올리려는 거겠지? 난 팔을 감싸안고 벌벌 떨었다. 달려오느라 몸에 열이 올랐다가 식 으니 무지 추웠다.

자, 지금 열겠지? 이 정도면 장난으로도 괜찮아. 웃으며 넘어가주지. 어, 장난이 아냐? 에이, 열어주겠지!

“카악! 네리아!”

고함을 지를 뻔했지만, 난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고함을 지르면 난 눈총 맞아 죽을 것이다. 우와, 이거 정말 체온이 뺏기는 감각이 온다?

에이! 네리아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 난 벌벌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대, 장대 없나? 하지만 한밤중의 도시의 거리에서 장대를 찾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것 을 깨닫게 되었다. 눈 딱 감고 문 부숴버린 다음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까?

아버지는 지금 얼마나 추우실까?

난 갑자기 처량맞은 기분이 들었다. 난 유니콘 인의 정문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아버지는 고블린들의 동굴에 잡혀 계시겠지. 고블린들이 불을 잘 다루던가? 하지만, 그놈들이 오크 같다면 불을 잘 다루지 못하겠지. 설령 불을 잘 다룬다 해도 포로

들에게 난방을 잘 해줄까? 그놈들이 따스한 마음씨를 가졌을까? 난 이루릴이 아니고, 따라서 놈들에게 호의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놈들은 분명 아버지를 차가운 동굴 바닥에 가두어두었겠지.

그렇다면, 아버지는 회색 산맥의 어느 차가운 동굴 바닥에서 극도로 떨고 계시겠지.

뭘 드실까? 아버지는 지금 무얼 드실까? 카악! 빌어먹을!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이라고? 잘도 그런 책을 샀군.

“아버지…………. 아버지………….”

삐이걱.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귓가에 말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나? 후치, 너 우는 거니? 얘, 얘. 장난이었어. 이렇게 나왔잖아?”

네리아인가 보다. 네리아는 내 어깨를 잡고 흔들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들어올렸다. 하지만 난 네리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다.

“너 정말 우는 거니? 어처구니없어서, 그런 일로?”

“……보고 싶어요.”

“응?”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네리아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네리아. 나 몇 번씩이나 당신을 실망시키지요? 또 멍청한 모습 보였지요? 하지만 보고 싶은걸. 무슨 욕설이 날아올까? 욕설은 날아오지 않았다. 네리아는 날 살며시 안았다. 네리아는 가볍게 내 등을 쓸어주었고, 추위와 울음 때문에 덜덜 떨던 내 몸은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다. “울음 그쳐, 후치.”

난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멈추었다. 네리아는 낮게 말했다.

“들어가자, 후치.”

난 몸을 일으켰다. 네리아는 날 부축하듯이 안고는 2층의 우리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 방 앞에서, 네리아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내 눈을 닦았다. “이젠 됐어?”

“……예.”

“들어가서 내 꿈이나 꿔. 조금 에로틱해도 용서해 줄게.”

“……그건 어렵겠지요. 네리아라면.”

네리아는 킬킬 웃었다. 나도 바보같이 웃어버렸다. 아마 내 얼굴 볼 만했을 거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바보같이 웃고 있었으니. 하지만 네리아는 내 얼굴을 보고 웃지 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어서 들어가라는 듯이 손짓했고, 난 문을 열었다.

“잘 자, 후치.”

“잘 자요, 네리아.”

방 안에 들어서자 그르렁거리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갑자기 심술이 맹렬히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 양반들은! 내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팔자 좋게 잠들어 있어? 에라이, 인정머리없는 양반들아! 난 씩 씩거리며 배낭을 뒤진 다음 잉크병을 꺼내었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칼, 샌슨, 길시언의 모습을 한 번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후후후. 차가운 밤의 숨결 속에서, 그대를 주시하는 복수자의 눈길이 더욱 활활 타오름을 알라.”

난 잉크병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난 손가락에 묻은 잉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복수의 검은 손길이로군………….. 우후후후!”

내일 아침이 몹시 기대된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