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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급이라. 흠. 길시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이채로웠다. 프림 블레이드의 수다를 듣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던 길시언마저도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모 양이다.
칼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아인델프 님의 말씀으로는 엄청난 드래곤이 활동기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얼마 후에. ..?”
“그런 어려운 것은 나한테 묻지 마. 난 늙다리 광부일 뿐이야. 여기 마법사가 계시니 그분한테 여쭤봐.”
아프나이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읽은 바로는, 웨이크닝은 드래곤의 나이에 비례한다고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드래곤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만 드래곤은 나이와 크기가 거의 완벽한 비례를 이루며 평생토록 성장하는 생물이니까 나이든 크기든 같습니다. 그 드래곤의 나이를 알 수 있다면 정확한 웨이크닝 기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엑셀핸드 님 은 보통 이상으로 엄청난 드래곤이라고 했으니 나이도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장년 정도의 연령의 드래곤은 대개 3차 웨이크닝까지 있습니다만, 그 드래곤이 보통 드래곤이 아니라면 최소 4차 웨이크닝까지 있을 테지요. 그렇다면 기간은 약 4 개월이 소모될 것입니다.”
칼은 대경실색했다.
“그, 그럼 3개월 전부터 들려왔다고 했으니 남은 기간은 1개월? 한 달 후에 그런 엄청난 드래곤이 활동기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엑셀핸드는 침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광산을 몽땅 폐쇄하고 급히 상경한 거야.”
드워프들이 광산을 폐쇄했으니까 수도에 보석이 동이 나 버린 모양이군. 어지러운 대화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간신히 그거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칼은 허겁지겁 말했 다.
“그, 그럼 아인델프 님의 복안은?”
“복안? 복안이라. 뭐, 첫 번째. 그 드래곤이 선한 드래곤이기만을 바란다. 이건 좀 소극적이지?”
“선한 드래곤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뜻밖에도, 대답한 것은 샌슨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샌슨을 바라보았다. 아니, 샌슨이 미쳤나?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샌슨이 아침에 먹었던 메뉴를 돌이켜보고 있는 동안 칼이 먼저 샌슨에 게 질문했다.
“무슨 말인가, 퍼시발 군?”
샌슨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아, 제가 가진 왕실 지리원 편찬 지리서에는 갈색 산맥에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가 있다고 되어 있던데요? 어, 드래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 지만 이그누스 드래곤은 선한 드래곤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 악한 드래곤도 아니지만.”
“뭐야!”
엑셀핸드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 그리고 하이 프리스트의 미소가 뒤따랐다.
“정확하오. 정말들 지혜로운 분들이시군. 갈색 산맥의 드래곤이라면 틀림없이 크라드메서일 거요.”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멋지군! 이거 정말 멋지군!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에게 축복 있기를 바라네. 크라드메서, 이그누스 드래곤이라고? 겨우 놈의 정체를 알게 되었어, 고맙네, 샌슨. 허헛! 인간의 수도까지 오는 동안 내내 수염을 쥐어뜯으며 고민했던 것인데, 원 참! 자네는 듣자마자 알아차리는가?”
“저야 뭐, 책에 적혀 있기에…………….”
칼은 하이 프리스트에게 질문했다.
“크라드메서에 대해 아십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 자네가 말하지? 자넨 그때 도성에 있었지 않았는가? 난 그때 북부 대로 순례중이었고 처음부터 제대로 보지는 못했거든.”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다란 말을 하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지금 상당히 중요한 회담중이라는 것은 짐작하겠지? 점잖은 숙녀답게 굴어라.”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은 검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길시언을 아주 괴상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크라드메서는 좀 독특한 드래곤입니다. 아니, 아주 희귀한 드래곤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그누스 드래곤이라는 것이 원래 희귀한 종류이긴 합니다. 레드 드래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성격은 천양지차입니다. 레드 드래곤이 오로지 탐욕과 폭력의 가치만을 추종하는 데 비해 이그누스 드래곤은 조화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유
피넬의 추종자입니다.”
유피넬의 추종자라고?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엘프와는 다른 형태로 유피넬의 법칙을 추종합니다. 엘프는 완벽한 조화를 구가하지만 이그누스 드래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을 선의 힘과 악 의 힘의 투쟁장으로 파악합니다. 엘프는 완벽한 조화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관념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그누스 드래곤은 항상 세상의 흐름을 바라보고 선의 힘과 악의 힘을 저울질합니다. 그리고 악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는 악의 근원을 철저하게 공격합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선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는 악의 대변인이 되어 악을 실천합니다.”
“예에에……?”
나는 놀라서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그럼, 샌슨이 말한 이야기는 그런 뜻인가? 이그누스 드래곤은 선한 드래곤도, 악한 드래곤도 아니라는 말이 그것이었나? 길시언 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보통의 경우 활동하지 않습니다. 깊은 산중의 그의 레어에서 자신을 관조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드 래곤이라는 오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을 위해서라면 그는 분연히 일어납니다. 이때의 이그누스 드래곤의 힘은 저 강한 레드 드래곤이나 골드 드래곤마저 목숨의 위험을 느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철저히, 돌이킬 수 없이 선의 힘이든 악의 힘이든 파괴해 버립니다.”
“우우와……!”
네리아의 탄성이었다. 샌슨과 나, 네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잘 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길시언은 조용히 말했다.
“크라드메서, 그는 그런 독특한 이그누스 드래곤입니다. 게다가 그는 할슈타일 가문 이외의 인물을 드래곤 라자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도 독특합니다.”
“할슈타일 가문이 아니라고요?”
“예. 할슈타일 가문의 드래곤 라자들이 모조리 나서보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크라드메서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드래곤 라자는 카뮤 휴리첼로서 휴리첼 가문의 인물이었습니다.”
“어어랏? 휴리첼?”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리첼 가문은 무문의 명가였습니다. 그런 가문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드래곤 라자는 무골과는 관계가 적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러 나 카뮤 휴리첼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되었습니다. 아, 그는 지금 아무르타트에게 붙잡혀 있는 로넨 휴리첼의 동생입니다.”
“그럼, 아까 보았던 그 넥슨 휴리첼은?”
“그 조카가 되지요.”
하이 프리스트가 끼어들었다.
“이미 그를 만났소?”
“아. 예. 들어오던 길에 만났습니다.”
“음, 그렇군.”
칼과 하이프리스트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길시언의 말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잠깐만요. 그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인가요? 무문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났다는 것이?”
넥슨 휴리첼은 자기 아버지가 ‘명예롭게 전사했느냐?’고 물어왔었다. 길시언은 그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를 배출했다는 것이 씻을 수 없는 불명예란 말인가?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휴리첼 가문의 불명예는, 그 카뮤가 수치스럽게 죽었고 그 때문에 크라드메서가 발광하게 되어 미드 그레이드를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지.”
“수치스럽게 죽다니요?”
길시언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밀통을 하다가 여자의 남편에게 칼 맞아 죽었거든.”
으으으. 유피넬이여.
사람들은 대부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엑셀핸드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인간들은 성욕이 왜 그리 왕성한가? 나원참. 그 성욕 때문에 번영하긴 하겠지. 하지만 동시에 이 따위 사건도 일어나게 되는군. 도대체 그 왕성한 성욕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군!”
엑셀핸드의 노골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홍일점이었던 네리아는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주위의 남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길시언은 엑셀핸드의 악담이 더 이어 지지 않도록 황급히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 어쨌든 카뮤 휴리첼이 죽자마자 드래곤 라자를 잃은 크라드메서는 폭주하게 되었고 13개 도시를 생존자 하나 남겨두지 않고 파괴시켜 버렸습니 다.”
“히이익?”
네리아의 감탄 소리. 길시언은 말했다.
“게다가 행동 주기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려 노스 그레이드의 도시를 파괴하기도 하고 그날로 날아가 이스트 그레이드의 도시를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닥치는 대로 파괴한 것이지요. 하지만 크라드메서는 주로 미드 그레이드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카뮤 휴리첼이 미드 그레이드에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사상 최대의 방어선이 펼쳐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미쳐버린 이그누스 드래곤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매일같이 들려오는 것은 파괴된 도시의 비보와 무 너진 군대의 패전 소식이었습니다. 아바마마는 피난 준비를 하셔야 했습니다. 바이서스 임펠 300년의 역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때 아샤스의 가호인지, 어쨌든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크라드메서가 지나치게 활동을 많이 하여 수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설을 펴기는 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날이 기억나는군요. 아바마마는 피난을 위해 마차에 오르고 계셨지요. 그때 전령이 달려와 고했습니 다. 크라드메서가 갑자기 갈색 산맥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기뻐하신 아바마마는 다음에 태어날 자식을 아샤스에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셨습니다. 그래 서 내 누이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가 된 것입니다.”
아아. 그런가? 길시언은 말했다.
“갈색 산맥을 향해 날아가는 크라드메서를 본 사람들 중에 어떤 자는 크라드메서가 눈물을 흘리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도 합니다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그것이 약 20여 년 전의 일이로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칼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정말 큰일이군요.”
엑셀핸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일?”
“옛날 크라드메서가 바이서스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 것은 수면기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활동기에 들어가게 되는 크라드메서는, 다음 수면기까지 얼 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바이서스 전체를 파괴하기엔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젠장.”
엑셀핸드도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칼은 말했다.
“아인델프 님은 아까 첫 번째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뭐? 두 번째? 아, 그거. 두 번째는 가능성이 조금 높아. 그러니까 드래곤 라자를 찾아서 그놈에게 고삐를 채워버린다는 거야.”
칼은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드래곤 라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못 찾아? 옛날에도 드래곤 라자가 있었다며?”
“하지만 찾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칼의 질문에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엑셀핸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조용히 있던 아프나이델이 주저하듯이 말했다.
“저, 제가 아는 바로는 그 어떤 드래곤이든 반드시 드래곤 라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 그것은 유피넬의, 유피넬의 법칙입니다. 저울대 양쪽에는 반드시 같은 추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은 하이 프리스트께서 확인해 주실 겁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물은 완전할 수 없고 따라서 그 불완전한 면을 채워주는 또 다른 불완전한 짝이 있는 법이오. 비록 헬카네스의 법칙에 따라 그 짝이 제대로 만나지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 짝이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소.”
아프나이델은 침착하게 하이 프리스트의 말을 듣고 나서 말했다.
“예. 바로 그것이 관건입니다. 헬카네스의 법칙. 예.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헬카네스 의 법칙에 따라 시공간의 장벽이 생깁니다. 장벽, 그렇지요.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고, 혹은 시기가 달라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에, 후자의 경우라면 드래곤 라자가 이미 죽고 나서 드래곤이 활동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경우겠지요. 헬카네스는 그런 식으로 유피넬의 법칙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깨 뜨리지요.”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그것은 헬카네스의 은총이라 해야 정확하겠지요. 완벽한 획일성 때문에 세상이 경직되는 것을 막아주는 은총이 아니겠소.”
아프나이델은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약한 미소를 지었다. 에델브로이는 헬카네스의 하위신이니까 에델브로이의 하이 프리스트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에 뭐라 반박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겠지. 하지만 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짝이 있어도 만날 수 없다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에, 그것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문제니까요. 사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 짝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둘, 그러니까 드 래곤과 드래곤 라자 당사자들도 과연 자기들이 스스로 적합한 짝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뭐, 부부들도 서로가 서로의 이상적인 배필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난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법칙이야!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파악할 수도 없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법칙이라면 난 수십 개도 더 만들겠다! 후치의 법칙 하나: 사람은 누구나 원래 선하다. 그럴듯하지? 하지만 원래 선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
엑셀핸드가 말했다.
“고맙네, 아프나이델. 어쨌든, 자! 이해가 되었는가? 내가 말한 두 번째 방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야.”
도대체 이 가장 존귀하신 드워프는 지금까지 나눈 말을 듣기는 한 건가? 칼은 힘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그곳으로 끌고가야 합니까?”
“좋은 방법이지 않은가?”
그때 하이 프리스트가 말했다.
“이제 내가 여러분들을 불러들인 이유를 설명해야 되겠군요.”
우리들은 모두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먼저 나직한 기도를 올렸다. 말하기에 앞서 기도를 올리는 이유가 뭘까? 하이 프리스트는 기도를 마치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할슈타일 가문이 언급되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말했다.
“흠, 여러분들 모두 조금씩은 아실 것이오. 할슈타일 가문은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약속되는 가문이지. 하지만 그 약속은 15년 전에 끝났고, 따라서 그 가문은 세인 들의 신망을 잃어가고 있소. 하지만 300년 이상 영화를 누려온 가문답게 아직 그 세력은 막강하오. 그래서 그들은 야심찬 계획을 세운 다음 실천할 수도 있었지. 바로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만들어낸다는 계획.”
길시언과 샌슨은 기겁했다. 하지만 칼은 그 정도는 벌써 저 멀고 먼 헬턴트의 자기 집에 앉아서 파악해 내었던 사람이고 나 또한 칼에게 이미 그 말을 들었으니 별로 놀라지 않았다. 흠, 그러고 보니 칼은 존경받을 만해. 네리아도 내게 들었던 이야기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길시언은 경악을 감출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혈통을 만들다니오?”
하이 프리스트는 침중한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무슨 뜻이냐고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끌어모아 서로 교배시킨다는 추악한 이야기죠.”
내 말에 길시언의 얼굴이 허옇게 되었다. 하이 프리스트도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라? 후치 군,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지?”
“칼이 말해 줬어요.”
주위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칼에게 집중되었고 칼은 겸연쩍은 표정이 되었다. 칼은 대충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해 주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허! 놀랍군. 어쨌든 정확한 예견이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양자, 양녀로 끌어모으고 있소. 겉으로는 빈민 아동 구제나 고아원 운용 등 사회 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작이지.”
“고이약한! ·죄송합니다.”
길시언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아니. 괜찮네. 그런데 말이오. 할슈타일 가문이 아닌 다른 집안 아이들의 드래곤 라자의 자질은 퍽 약하지. 그것이 핏줄의 힘인지 드래곤 로드의 약속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할슈타일 가문 출신의 드래곤 라자만큼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았소. 조금 전 크라드메서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밝혀졌 듯이 할슈타일 가문 이외의 인물이 우수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는 것은 퍽이나 드문 일이지. 지금 지골레이드와 함께하고 있는 돌맨만 하더라도 드래곤 라자의 자질로만 따지자면 역사상 최약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소.”
돌맨이 누구지? 그런데 칼은 처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 할슈타일 공은……?”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슈타일 공?”
“디트리히 할슈타일 말입니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꼬마 이야기만 나오면 정말 죄책감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 디트리히 그 아이. 흠, 그 아이도 자질 면으로는 대단치 않았소.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의 관계는 대단히 친밀했소. 많은 이들이 그 아이와 캇 셀프라임을 유피넬이 정한 짝이라고 믿을 만큼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의 관계는 돈독했소.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은 마치 카뮤 휴리첼과 크라드메서의 관계의 재현 같 았거든. 그 아이에 비해 보면 돌맨과 지골레이드는 오히려 원수 관계처럼 보일 정도였소.”
“그랬군요.”
“어쨌든 여러분들은 이제 이해하셨을 거요. 할슈타일 적통의 아이가 아니라면 드래곤 라자의 자질은 약하다. 하지만 15년 전부터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드래곤 라자 가 태어나질 않는다. 이해하셨겠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그런데 말이오. 최근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붉은 머리의 10대 후반의 소녀를 찾고 있소.”
이번에는 네리아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네리아를 보더니 말했다.
“저희들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여기 계신 네리아 양에게 나이를 묻던데…………… 아까 하이 프리스트께서도 네리아 양의 나이를 물으셨지요?”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본 바로는, 아무래도 옛날 언젠가 할슈타일 가문의 아이가 하나 있었던 모양이오. 그런데 불가사의한 사건들로 인해서 할슈타일가에서는 그 아이를 잃게 되었 소. 단서는 붉은 머리에 여자아이, 두 가지만 남아 있지.”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참지 못하고 그냥 말해 버렸다.
“물론 그 소녀는 드래곤 로드의 약속의 기한 이전에 태어난 아이니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을 가능성이 퍽 높겠군요? 게다가 아까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그 아이 는 적통의 후계자. 따라서 현재 대륙 최고의 자질을 가진 드래곤 라자일 수도 있겠군요. 맞지요?”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하이 프리스트는 다시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놀라운 지혜로군! 정확하네.”
샌슨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 빙긋이 웃고 있는 네리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이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굉장한 소년이군. 그럼 조금 더 추리를 해보겠나? 왜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서 그 아이를 찾는 것일까?”
“뭐, 간단히 생각하자면 양자나 양녀로 들인 아이들이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너무 약해서 그 아이를 찾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그 아이는 현재 나이가 10대 후반, 따 라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겠지요. 칵! 그 할슈타일 가문의 뜻대로 혈통을 만드는 데는 최고로 도움이 되겠지요.”
길시언의 얼굴이 분노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샌슨만큼은 아니었다. 샌슨은 목을 울렁거리고 있었다. 한바탕 욕설을 내뱉고 싶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렇 게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칼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씁쓸하게 말했다.
“기분 나쁜 말이지만 조리 있는 말이기도 하네. 지혜로운 소년. 흐음. 그런 의미도 있겠지.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생각하거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조금 전, 우리는 크라드메서가 활동기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설마!”
칼은 고함치느라 기어코 찻잔을 뒤엎었다.
우리는 모두 의아해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이 왜 저렇게 놀라시지? 칼은 기막힌 표정이 되었고 네리아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어 탁자를 닦았다. 그러자 칼도 정신 을 차리고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그런데. 300년. 300년 동안의 기간이라 해도, 그게 가능합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번쩍이는 눈빛으로 칼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 정말 놀랍군. 흐흠. 대답을 하자면, 가능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소?”
칼과 하이 프리스트를 제외한 사람들은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대화의 진행을 따라가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고마워요. 칼.”
“응? 무슨 말인가, 네드발 군?”
“이제부터 설명해 주실 것 아니에요? 미리 감사해 두죠.”
칼은 힘빠진 미소를 지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턱을 괴면서 말했다.
“나도 감사해 두지. 한번 설명해 보시겠소?”
“할슈타일 가문은 300년 동안이나 드래곤과 함께해 온 가문입니다.”
“좋은 시작이오. 계속하시오.”
“그러니, 그들은 드래곤에 대한 일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수십 년 간 말을 다루어온 마부는 눈 감고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그 말의 색깔을 맞 춘다고 하던가요? 하물며 300년 동안 드래곤과 동고동락해 온 가문이라면…… 어쩌면 그들은 드래곤의 활동 주기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수 있겠지 요.”
“그러니까?”
“그들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을 짐작했을 수도 있다 이겁니다.”
“옳거니.”
하이 프리스트는 아주 기쁜 듯이 맞장구를 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로 기뻐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칼은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사상 최대의 드래곤이 깨어나는 시기에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단절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만들어보려고 애썼겠지요. 하지만 적통의 후계자가 아닌 자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좋아, 좋아. 계속하시오.”
“그래서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잊혀졌던 한 아이를 찾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조금 전 네드발 군이 말했다시피 적통의 후계자. 어쩌면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한 드래 곤 라자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아이를 찾아서?”
“크라드메서는 할슈타일 가문에 귀속될 수 있겠지요. 적어도 그 가문에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크라드메서를 수하로 부릴 수 있다면, 글쎄요. 자선 사업이나 사회 봉사에 도움이 될까요?”
“생각하기 어렵겠지. 허허.”
하이 프리스트는 퍽이나 만족스러운 어투였다.
샌슨은 자신의 입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자신의 턱수염을 몹시 아프게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아프나이델은 이마를 짚고 있었다. 길시언은 끝없이 ‘고약한, 고약한!’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빠르게 설명했다.
“현재 할슈타일 가문의 우두머리인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가문의 영광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여념이 없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지. 300년.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오. 그런 기간 동안 영화를 누려오다가 갑자기 그 영화를 잃게 되면 마치 억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인간
인 모양이오.”
엑셀핸드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억울하다라. 나는 다시 후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이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나 또한 칼이 말한 대로 생각했소. 그렇다면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오.”
칼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저희들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랜드스톰의 이름으로, 아니 에델브로이의 이름으로 부탁하오.”
하이 프리스트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 소녀를 찾아주시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은 그랜드스톰의 현아한 지붕 장식들이 신에 대한 찬미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례하게도 자신들의 지친 날개를 쉬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새들은 인 자하신 에델브로이가 용서해 주실 거라고 믿고 있나 보지?
칼은 굳은 얼굴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난 어제 엑셀핸드에게서 갈색 산맥에 드래곤이 깨어난다는 말을 들었소. 그리고 한참 동안 추측해 보고 서적과 기록을 마구 뒤져본 끝에, 그 드래곤이 크라드메서 일 것이라고 짐작했었소. 흠, 여러분들은 당장 알아차린 일인데 말이오. 껄껄껄.”
그러자 엑셀핸드는 당장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라고? 다락귀신 네놈은 그 드래곤이 뭔지 짐작했단 말이냐?”
“그렇소, 노커여.”
“그럼 어제 왜 말하지 않았어?”
“노커여. 온갖 서류를 뒤져 본 이후에야 알아차렸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어제 당신은 피곤해하지 않았습니까?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에 깨우지 않았 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분들을 불러들여 한꺼번에 모인 자리에서 말하리라고 생각했소. 불쾌하시다면 사죄하지요.”
엑셀핸드는 두툼한 아랫입술을 위로 불쑥 올리더니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흠. 알았어. 계속하게.”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이 웃고 나서 말했다.
“고맙소, 노커. 그리고 그 이야기 외에 난 요즘 할슈타일 가문에서 찾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소. 이런 이야기들을 조합해 볼 때 간단히 결론이 나왔소. 그 소녀를 찾으면 그 크라드메서를 조절할 수 있다. 조금 전에 후치 군도 명쾌하게 이야기해 준 바니 모두들 이해하실 줄로 믿겠소.”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난 할슈타일 후작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의 가문의 영화에 내가 관심 가질 까닭은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 그 알 수 없는 소녀는 바이서스를 위기에 서 구할 수 있는 희망이오. 드래곤 라자를 잃어 폭주해 버렸던 크라드메서가 아직껏 그 광폭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이 바이서스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는 차마 언 급할 수도 없소.”
우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따라서 그 드래곤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그 소녀가 꼭 필요하오. 물론 그 소녀가 아니라도 다른 드래곤 라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오. 따라서 최선책은 그 소녀를 찾아내는 일이오. 그 소녀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강력한 드래곤 라자일 수 있으니까.”
칼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난 어젯저녁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소. 그 소녀는 찾아야 하오. 그런데 난 성직자라 누구를 추적하거나 하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지. 이런 노구를 이끌고 대륙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소녀를 찾아낼 수는 없다는 말이오.”
“노구? 허헛.”
엑셀핸드는 피식 웃었고 하이 프리스트도 미소를 지었다.
“노커여. 당신이 보기엔 내가 어려 보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늙은이라오.”
“알았어, 알았어.”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니 여러분들이 생각나더군.”
하이 프리스트는 우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짐작이나 했다는 듯이 수도로 찾아오시었소. 게다가 여러분들은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이곳까지 힘들 이지 않고 달려온 인물들이오. 그리고 당신들은 도착하자마자 닐시언 국왕을 놀라게 했소.”
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을 호위하기 위해 40여 명의 임펠리아 수비 대원들이 집합했다가 당신들의 거부로 그대로 해산되었다는 소문은 간단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소. 그걸로 미루어보아 여러분들은 국왕에게 대단히 솔깃한 어떤 제안이나 조언을 했다고 보는데, 내 짐작이 맞소?”
칼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하이 프리스트는 재빨리 말했다.
“아, 꼭 대답할 필요는 없소. 난 국왕의 권한을 침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곧장 수도에 귀금속이 품절을 일으켰다는 것도 알아차렸소.” 하이 프리스트는 두 팔을 조금 벌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의 대화에서, 여러분들은 여러 차례 나를 놀라게 함으로써 나의 결심을 굳혔소.”
“그 결심이란, 저희들에게 그 소녀의 추적을 부탁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 말씀은…… 할슈타일 가문과 별개로 그랜드스톰에서 그 소녀를 찾고 싶다는 것입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차라리 그 가문을 돕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시오. 난 그 가문을 직접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 가문의 영광은 이제 충분하고, 그 대가의 추가 유피넬의 저울대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으니 까. 하지만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는 찾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바이서스가 위험해지니까. 그런 고충 끝에 낸 타개책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소녀를 찾게 하자는 것이오.”
“그 말씀은?”
하이 프리스트는 싱긋 웃었다.
“결국, 관건은 그거 아니오? 할슈타일 가문에서 그 소녀를 찾으려 드는 것도 바로 그 이유고. 이그누스 드래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힘.”
하이 프리스트는 힘이라는 말을 강하게 발음했다. 사람들 모두가 번쩍거리는 눈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그 얼굴들을 모조리 둘러보며 말 했다.
“따라서 그 소녀를 찾는 자는 전무후무한 힘의 소유자가 될 수 있소. 적어도 당분간은 더 이상 강력한 드래곤 라자가 출현할 가능성이 적은 지금에 와서는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랜드스톰의 일원이 아닐 뿐더러 할슈타일 가문의 일원도 아니오. 적어도 현재로선 누구의 세력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이지.”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칼은 어눌한 듯하면서도 강하게 질문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난 여러분들이 그 소녀를 찾아주기를 바라오. 그리고 그 소녀를 드래곤 라자로서 크라드메서에게 데려다주길 바라오. 그걸로 끝이오.”
“끝이라고요?”
“끝이오. 그렇게 된다면 크라드메서는 인간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도 하지 않겠지.”
“그랜드스톰에는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바이서스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와 안정을 얻게 되는 거겠지.”
하이 프리스트의 담담한 대답에 네리아는 눈을 반짝거렸다. 샌슨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칼은 여전히 회의에 찬 표정으로 질문했다. “저희가 아니라 할슈타일 가문이 그 소녀를 찾는다면?”
“그래도 평화와 안정은 있을 것이오. 그리고 덧붙여 그들로서는 가문의 영화를 증대시키겠지. 하지만 그들은 찾지 못할 것이오. 그 소녀를 찾는 것은 당신들이 될 테 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흰 그 소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하지만 지금 그 소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아무도 없소.”
“마법사에게 부탁하시면?”
칼은 말을 하다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저, 제가 보잘것없는 마법사이긴 하지만 에, 그래도, 그래도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 님의 질문은 마법의 기초 지식만 있으면 충분히, 얼마든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가능합니다. 마법사는 마나를, 마나를 힘으로서 사용하는 것이지 의지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나는 넌인텔릭입니다. 예, 넌인텔릭입니다. 힘은 언제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이며 마법사가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마나는 사 용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러니까, 저,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빠른 말이라도 태우지 않은 사람을 이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말을 이용해 어딘가로 가고 싶다면 말에 타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렇군요.”
“그리고 기수는, 기수는 말에게 지시를 해야 됩니다. 당연히 승마술은 알아야겠지요. 즉,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항상 최소한의 지식은, 기본적인 지식은 있어야 한 다는 말입니다.”
아프나이델은 이 말을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마 퍽 중요한 말을 했나 보다. 샌슨과 나는 진지한 얼굴에 감명 깊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아프나이델은 두 호흡 쯤 후에 다시 말했다.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누군가를 찾으려면, 당연히 그 누군가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구별되는 특징, 그를 형 성하는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얼굴이면 충분합니다만, 빨강머리와 10대 후반, 그런 특징만으로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긴 그렇군. 빨강머리에 10대 후반이면 제미니도 포함되겠는걸? 그러나 칼은 집요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에게 질문했다.
“위시를 사용한다면?”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아무리 위시 주문이라 하더라도 기본 원칙은 깨뜨리지 못합니다. 물론 저는 그런 고급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점을 생각해 보십 시오. 위시 주문이 그렇게 뭐든지 가능하다면 예전에 세상은 파멸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오?”
“에, 이런 농담이 있지요. 정신병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종이 무엇입니까?”
칼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고위 마법사지요.”
“고위 마법사는 위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미친 마법사들도 많지요. 그렇다면 미친 마법사가 위시 주문으로 세상을 끝내려 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직껏 세상이 안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워낙 놀라운 마법이라 위시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그런 황당한 소원까지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서 마법사들에게 부탁한다 해도 그 소녀를 찾을 수는 없소. 그렇다면, 누구도 그 소녀를 찾을 확률이 높지 않다면 그 말은 동시에 누구에게도 똑같은 정도의 확 률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소?”
칼은 끝까지 버티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글쎄요. 달아나는 귀중품을 쫓으려면 레인저에게, 달아나지 않는 귀중품을 쫓으려면 도둑에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리아는 그 말에 샐쭉 웃었고 칼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소녀를 찾을 확률이 똑같다면 문제는 찾는 이의 능력이겠지요. 보다 능숙한 인물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난 전설이 될 만한, 최소한 노래로 남을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노래라고 하셨습니까?”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세 남자. 그 여행에서 그들이 겪은 모험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을 경이로 가득 차게 만드는군. 누군가 불가능을 가 능하게 만들어야 될 필요가 있다면, 난 그에게 당신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저희들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항상 훌륭하신 분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륙의 사활이 걸린 문제요. 거절하지 마시오.”
나와 샌슨도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차라리 국왕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왕명으로 각 영지나 도시의 시장들에게 붉은 머리의 소녀를 찾으라는 공고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칼은 끈질기군. 좋아요, 칼, 끝까지 버팁시다. 그러나 하이 프리스트도 꽤나 끈질긴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되오.”
“예?”
“이유는 간단하오. 왕명으로 그 소녀를 찾으면 결국 공식적으로 찾는다는 말이 되지요. 그럼 할슈타일 가문에서 이의를 제기할 것이오. 그 소녀는 자기 가문의 후계 자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오.”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렵게 질문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안 됩니까? 결국 소녀의 가정을 찾아주는 일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소녀도 행복한 일이고, 크라드메서도 진정시킬 수 있는 일 인 것 같은데요?”
칼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퍼시발 군의 말이 맞습니다. 바로 그 점. 왜 할슈타일 가문에서 그 소녀를 찾으면 안 되는지를 먼저 확실히해 두지 않으면, 저희들로서는 하이 프리스트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얼굴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