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6부 : 톱메이지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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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3권 – 제6부 : 톱메이지 4화

4

“왜 하필 나예요!”

“넌 얼굴이 익었잖아. 불필요한 의심을 받지 않아.”

“사실대로 말해 봐요.”

“사실대로? 할 수 없군. 넌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지 않아. 그 점에서 샌슨, 길시언, 엑셀핸드가 빠지고, 그 다음 남는 것은 칼과 아프나이델인데, 에이. 칼이나 아프 나이델은 그런 곳에 데려다놓으면 이상해 말 시장에 잘못 끌려나온 황소 같을걸?”

“그 말에 찬성해야 된다는 것이 슬프군요. 하지만 혼자 가면 안 돼요?”

“어머나? 여자를 그런 곳에 혼자 보내시려고?”

“으커어억!”

그리하야, 나는 네리아에게 이끌려 또다시 그 고약한 장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망할.

다행히 이번에는 낮이라 머리 아프게 만드는 여인네들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밤의 장막이 가리고 있던 지저분한 것들이 그대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건물 곳 곳에 쌓여 있는 뽀얀 먼지, 부서져내리는 지붕 끄트머리, 곳곳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과 으슥한 곳이면 어김없이 쌓여 있는 토사물과 배설물들. 지린 냄새와 함께 자욱 한 먼지들이 코를 간질였다.

나는 코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낮에 찾아가도 상관없어요?”

“상관없어. 수도에서 연중 무휴인 사람들을 찾으라면 소방대원과 수도 경비 대원, 그리고 도둑뿐이야.”

“소방대원?”

“소방서, 불 나면 끄는 곳. 주로 마법사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래요? 마법으로 불을 끄나 보지요?”

“응. 훈련 기간 동안 대민 봉사 차원에서 빛의 탑으로부터 파견 근무를 나가는 거지. 뭐, 빛의 탑과 시청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흐흠.”

그것 참 볼 만하겠군. 어디서 불이나 안 나나? 응? 내가 이 무슨 망발을

저번에 한 번 찾아왔던 장소지만 낮에 오니까 하나도 모르겠다. 난 그저 네리아만 열심히 따라갔다. 네리아는 쉽게 쉽게 찾아갔다. 뭐? 여자 혼자 이런 곳에 오면 안 된다고?

“으응. 사실 혼자서 들어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야.”

“나이트호크가 도둑을 무서워해요?”

“무섭지. 안 무서울 수가 없어.”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쾌활하게 걸어갔다. 그래서 정말 믿기가 어려웠다.

저번에 왔던 그 주점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건물들 사이에 묻힌 듯이 처박혀 있는 주점의 모습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네리아는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영업 시간 아냐!”

“까불지 마! 들어올 때부터 감시하고 있었으면서 문 열어!”

응? 우리가 이 골목에 들어설 때 이미 이곳으로 연락이 갔을 거라는 말인가? 그거 참 몸조심해야 되는 장소가 맞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을 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컴컴한 내부의 암흑만이 보였다. 네리아는 나에게 천천히 따라 들어오라고 입모양으로 말하고는 들어섰다. 나는 속으로 다섯을 세고 따라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자 홀 안에 늘어서 있는 테이블들과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 슨 밀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홀에는 창문이 없었고 그래서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이 간신히 어둠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문 닫고 기대고 서.”

나는 저번처럼 문 닫고 거기에 기대어 섰다. 아마 퇴로를 확보해 둔다. 뭐 그런 이유가 있겠지.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니 늘어선 테이블 중 하나에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 테이블에서만 의자를 내려서 앉아 있었다. 바텐더와 문댄서였다.

네리아는 척척 걸어가서는 옆에 의자 하나를 내려서 남자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문 쪽에 서 있자니 문댄서의 표정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의 입가에서 빨갛 게 불타고 있는 파이프와 홀을 휘감아도는 연기의 모습은 보였다.

문댄서가 말했다.

“어쩌겠어?”

“안 돼.”

“빌어먹을, 장난치나?”

“그 후작과 이미 만나버렸거든.”

“만났다고?”

“그래. 할슈타일 후작. 이미 만났었어.”

“젠장. 알았어.”

“의뢰가 있어.”

“돈.”

“외상으로 해줘.”

“웃기네.”

“넌 내가 슬로드 관뚜껑 덮은 값도 지불하지 않았어.”

“부탁한 적 없어.”

“슬로드의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문댄서는 다시 파이프를 피우기 시작했고 보다 짙은 연기가 홀을 감싸고 돌았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뭐야?”

“네가 부탁한 바로 그거야. 빨강머리 10대 소녀를 찾는 거. 수확이 있어?”

“없어. 젠장, 너만큼 하는 여자를 찾기가 쉽진 않아.”

“아니, 정말 빨강머리 소녀를 찾아본 적은 없어?”

“찾아봤지. 없어.”

“좋아. 그럼 고용주가 누군지 말해 주겠어? 그 대신 후작가에서 그 소녀를 찾는 이유를 말해 주지.”

“이유? 딸을 찾는 데 무슨 이유.”

그 말에 네리아는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흥흥흥, 문댄서, 넌 그 짓 그만두는 게 좋겠어.”

문댄서는 턱수염을 만지며 씁쓸하게 말했다.

“천만에. 나만한 남자는 없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찾아와서 정보를 주는 사람은 드물지.”

“좋아.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에 대비해서 그 소녀를 찾는 거야.”

“크라드메서가 뭐지?”

“네 차례. 고용주는?”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청년.”

난 잠깐 놀라서 입을 열 뻔했다. 넥슨 휴리첼이라고? 그 청년의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난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노리는 서류는?”

“네 차례.”

“크라드메서는 언젠가 미드 그레이드를 끝장낼 뻔했던 이그누스 드래곤이야.”

바텐더가 움찔했다. 문댄서는 바텐더를 바라보았고 바텐더는 문댄서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문댄서는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였다.

“장난이 아니군.”

“서류는?”

“나도 몰라. 그냥 파란 표지의 책이야.”

“좋아. 그럼 넌 내게 빚졌어.”

“제길. 알뜰하시군.”

“나 같은 마누라 만나야 너도 편할걸.”

문댄서는 피식 웃었다.

“같이 뛸 생각 없어?”

“난 담배 피우는 남자는 싫어. 빚 갚을 생각이나 해.”

“뭐야?”

“빨강머리 10대 후반의 소녀를 발견하면 즉시 내게 연락해 줘.”

문댄서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한참 후 문댄서는 말했다.

“그 소녀는 드래곤 라자겠군?”

“할슈타일 가문의 인물이니까.”

“그렇다면, 그 소녀는 이그누스 드래곤의 드래곤 라자도 될 수 있겠군? 굉장한 일인데.”

“굉장한 일? 굉장하지. 하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 마.”

“무슨 말이지?”

“그 소녀를 찾지 못하면 미드 그레이드는 다시 쑥대밭이 된다는 말. 어쩌면 바이서스가 날아갈지도 모르지.” 문댄서의 파이프가 조금 흔들렸다. 바텐더의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응.”

그래서 찾는 거야?”

“바이서스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흠. 장사 안 되는 일에 끼어들었군. 네리아. 너 요즘 정말 이상해지는데.”

“무슨 소리? 장사 안 되다니. 세상이 평화로워야 나이트호크도 평화로운 거야.”

“알았어. 찾아보고 연락하지.”

“고마워. 밖의 녀석들 치워줘.”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이런, 또 밖에 누가 있나?

정말이었다. 밖에 나와보니 그때의 그 남자들이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건물 벽에 기대어 조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네리아 역시 그 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걸어가 버렸다. 정말 마음 놓을 수 없는 장소로군. 난 후다닥 네리아를 따라갔다.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이 아닐까요?”

“걱정 마. 도둑들은 믿어도 돼. 응? 까르르, 해놓고 보니 정말 웃기는 말이네.”

“정말 웃겨요.”

“내가 걱정하는 사람들은 상인들에게 찾아가기로 한 길시언과 아프나이델이야. 에구. 그 왕자님은 평소에도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 정보를 캐내는 일은 제대로 하려 “나?”

“아프나이델이 마법사니까…………. 뭐 믿어보시죠. 아니, 그것보다 칼과 샌슨, 엑셀핸드가 걱정이에요.”

“흠. 하긴, 그러고 보니 문제다. 칼 아저씨는, 흐응. 사람이 좋아서 위험하고 샌슨은? 샌슨이니까 위험하지. 엑셀핸드는 드워프니까 말도 못하겠고.” 우리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유니콘 인으로 돌아왔다. 각자의 정보 수집이 끝나면 그곳으로 모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유니콘 인에 도착하니 이미 홀에 칼, 샌슨, 엑셀핸드가 앉아 있었다. 모두들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칼과 엑셀핸드는 껄껄거리고 있었고 샌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칼은 우리들이 들어온 것을 보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서들 오게. 갔던 일은?”

“그쪽부터.”

“모험가 길드 쪽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지. 퍼시발 군이 아주 능숙하더군. 자기 동생을 찾고 있다면서 모험가들에게 인정으로 호소하던데?”

“칼!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나와 네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허어? 샌슨이? 샌슨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쑥스러워하는 오거는 악몽 중에서도 최악이야.

엑셀핸드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정말 보여주고 싶군! 눈 뜨고 못 봐주겠던데?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을 붙잡고 물어보는 그 꼴이라니. ‘하늘 아래 하나뿐인 혈육이어요. 제발, 어느 분이시든 빨강머리의 소녀를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 제발 좀 알려주시어요…….??

“엑셀핸드!”

샌슨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외쳤고 네리아는 숨 넘어갈 듯이 웃었다.

“흐어, 허, 우헷헤헤헷! 틀림없이 무, 무서워서, 아니, 보고 이, 있기가 역겨워서 마, 말해 줬을 거야. 까르르륵!”

“뭐야? 이거 왜 이래? 모두들 날 동정해서 친절하게 말해 줬다고!”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지는 않기로 했다. 사람은 밤에 좋은 꿈을 꿔야 된다.

샌슨이 그런 거북한 장면까지 연출하면서 물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붉은 머리의 10대 소녀라는 것이 이렇게 희귀한 것인 줄은 몰랐다는 것이 엑셀 핸드의 평이었다.

“괴상하다고 말할 정도야.”

“그래요? 그거 신기하네. 이쪽에서도 전혀 없어요.”

“그것 참. 그럼 아프나이델과 길시언을 기다려야 되는군.”

샌슨의 말에 네리아는 눈을 깜빡여 보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흐음. 칼 아저씨라면 알아차리실까? 재미있는 정보가 있어요.”

“말씀해 보시오.”

“그러니까 말이죠. 저번에 봤던 그 문댄서 기억하시죠?”

“그런데?”

네리아는 조금 전 문댄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줄줄 들려줬다. 도둑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누구던가? 어쨌든 네리아는 문댄서가 네리 아를 그 소녀로 위장시켜 할슈타일 저택에 침투시킬 계획이었으며, 그렇게 침투하는 목적은 어떤 책이며, 그 책을 원하는 자가 넥슨 휴리첼이라고 말해 주었다.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그 젊은이 말이오?”

“예. 자,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동안 나는 맥주!”

“어, 나도 맥주!”

나의 황급한 주문에 칼은 히죽 웃더니 곧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맥주가 도착했고 네리아와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칼은 이내 말했다.

“그 정도만 가지고 뭘 추측하기는 어렵구료. 그런데 넥슨 휴리첼이라면 카뮤 휴리첼의 조카가 되는 사람 아니오? 그리고 카뮤 휴리첼은 바로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였던 사람이고.”

“그렇죠.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명예롭게 전사했냐고 물었던 사람.”

나의 악의가 좀 담긴 대답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소. 넥슨 휴리첼 씨가 할슈타일 가문에 있는 책을 노리는 이유가 뭔지, 그 책이 뭔지, 지금 당장으로서야 아무런 추리가 되지 않는데.”

“그 책, 가져다 드릴까요?”

네리아의 말에 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얼굴을 찌푸렸다.

“훔친다는 말이오?”

“담장 위로 날갯짓을 한 차례 하는 거죠.”

“그런 불법적인 일까지 고려하고 싶지는 않소.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인지 아직 확신이 서는 것도 아니고.”

“좋아요, 뭐. 하지만 이거 하나 알아두세요. 지금 위험한 것은 바이서스 전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거. 내가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네리아의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고 그 사실은 명심하고 있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들어왔고 길시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로 들어섰다. 나는 의아해서 질문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안 좋죠?”

길시언의 패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젠장. 말도 하기 싫어! 내 이놈의 검을 당장!”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씹어먹겠다는 식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의자에 앉더니 곧 킬킬거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길시언은 아프나이델에게도 똑같은 시선을 보내었다. 오우, 안 돼. 아프나이델을 씹어드시겠다니. 아프나이델은 웃음을 참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참 곤란하시겠습니다. 그 검.”

“됐소! 나 대장간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참으시죠. 어차피 귀금속이 없어 대장간에서도 마법검을 손질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프나이델의 말에 길시언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 앉는 자세가 몹시 강맹하여 주인장 리테들은 의자의 생사를 우려하는 표정이 되 었다.

아프나이델은 되도록 길시언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차분히 설명했다.

“저희들은 상인들을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상거래 도중에 붉은 머리의 소녀를 본 적은 없냐고요. 그러던 도중에 어떤 상인이 왜 찾냐고 물어오더군요. 그래서 길 시언께서는 그 소녀가 자기 어머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푸흐허아하하핫!”

길시언이 이를 북북 갈고 있었지만 엑셀핸드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웃어젖혔다. 물론 네리아와 샌슨도 크게 웃었다. 아프나이델은 치밀어 올라오는 웃음을 아래 로 끌어내리려 애쓰면서 점잖게 말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어진 상인이 그게 말이 되냐고 묻자 길시언은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다고 대답하시더군요. 상인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두 번 다시 저희 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우하하, 힉, 히꾹, 아아악! 나, 나 죽어, 히꾹, 수, 숨이 우하하! 마, 막힌다아아…….”

네리아는 웃음과 딸꾹질과 비명을 동시에 꺼내어놓았다. 길시언은 이를 박박 갈았고 아프나이델은 길시언의 눈치를 보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다음 상인에게 들렀을 때는 그 소녀가 자신의 첫여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콰당! 기어코 샌슨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샌슨은 미친 듯이 웃느라 두 번이나 테이블을 헛짚으면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아프나이델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상인이 괴이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언제 그랬냐고 묻자 10년 전이라고 대답을 해서 그 상인은 우리를 아주 괴상한 놈들이라는 식으로 쳐다보며… “그아악! 아프나이델! 이제 계속하시오!”

“예에?”

“아, 아니! 그만하시오옷!”

어쨌든 길시언이 그런 수모를 당한 보답인지, 어쨌든 아프나이델은 소득을 가지고 돌아왔다.

“소득이 있었다고요?”

칼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예.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의 어느 영지에서 그런 소녀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지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소녀의 이름은 제이미인지 젬인지 그랬…………, 왜 그러십니까?”

“그건, 별로 대단한 소득이 못 되는 것 같소.”

칼은 힘 빠진 표정으로 대답했고 나와 샌슨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이고 머리야. 제미니가 이렇게 유명했었나? 세상이 정말 좁군. 칼은 우리 고향에 제미니라는 소녀가 살며 그 소녀가 붉은 머리인 것은 확실하다는 이야기와, 나의 악착 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가 여기 있는 후치 네드발의 레이디라는 이야기까지 몽땅 해버렸다.

아프나이델은 피식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소녀는 고아가 아닌가 보군요?”

“부모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오.”

“그래요. 허, 이거 참.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렇게 드문 것인지는 몰랐군요.”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다. 붉은 머리 소녀가 이렇게 희귀한 것인가? 칼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뭐, 우리는 오늘 처음 시작한 것이니 아직 수확을 기대할 만한 단계는 아닌 것 같소. 지금까지의 방법이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붉은 머리의 소녀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즉각 출발하도록 하지요.”

모두들 칼의 의견에 찬성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모두들 내일의 조사를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도 우리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들은 유니콘 인에 방을 마련했다. 주인장 리테들은 마법사로 보이는 청년과 드워프가 같은 방을 쓰겠다고 말하니까 매우 괴이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괴이하다는 이유만으로 방 을 내어주기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칼은 하이 프리스트가 준 서류를 검토하다가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이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난 인간이 항상 이해하기 어렵다네.”

“무슨 말씀이시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로부터 관심을 받는 존재란 말은 항상 들어맞는다는 말이야.”

“모호한 말씀이네요.”

“닐시언 국왕 말일세. 길시언 전하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기뻐한 사람이 많았다 할 정도로 온화하고 학자풍인 사람이었지. 길시언 전하도 그에 대해 좋 은 기억만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아니, 관두세. 그런데 아프나이델 말이야. 저 젊은이, 우리도 아는 한때의 과오를 깨끗이 잊고 새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칼. 우리는 겨우 하루 동안 그를 봤어요.”

모두들 방으로 올라가고 남은 것은 나와 칼뿐이었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워프를 속일 수 있는 악인은 없다네.”

“엑셀핸드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뭔가, 네드발 군?”

바로 이 질문 때문에 나는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계속해서 칼 옆에서 얼씬거리고 있었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아버지가 그 딸을 찾으면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할슈타일 후작이 그 딸을 찾으면 안 되는 이유 말인가?”

“예.”

칼은 빙긋 웃더니 커피를 주문하고는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가 내게 은밀히 말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말해 주세요.”

칼은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평범한 저 얼굴. 저 얼굴 뒤에선 어떤 생각들이 움직이고 있을까. 나는 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유가 될 만한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그 딸을 찾는 것을 누가, 왜 말린단 말이죠? 비록 할슈타일 후작이 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 딸을 찾는 것은 아니라 할지는 몰라도, 그 어머니는 분명 마지막 순간에 할슈타일 후작에게 부탁했어요. 뭐, 이건 내 추측이지만, 그 죽은 하녀라는 여자가 할슈타일 저택을 찾아갔다는 말은, 결국 그 딸을 아버지에게 부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좋은 추측일세.”

칼은 미소를 지었다. 난 답답한 마음에 질문했다.

“말씀을 그렇게 끊지 마시고 좀 들려주세요.”

“글쎄.. 들려주기가 어렵군.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유가, 그러니까 하이 프리스트가 내게 들려준 그 이유는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이유라네. 그러니 확신을 갖고

자네에게 들려줄 수가 없어. 물론 하이 프리스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내게 말해 봐요. 내가 정확히 판단해 줄게요. 믿을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칼은 싱긋 웃었다.

“안 되겠네. 네드발 군.”

“절대로 안 되나요?”

“그래. 이 일은 어쩌면 너무나 불확실한 근거에 기인하고 있어.”

“예?”

“자네와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난 그 소녀를 찾고,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유를 들려준 다음 그 소녀에게 결정하도록 맡기고 싶네. 그 이유라는 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것인지는 그 소녀에게 판단하게 하고 싶네. 어쩌면 그 소녀는 그런 이유는 말도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르지. 나도 믿고 싶지 않은 이유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야겠네.”

“그런가요? 흠. 알겠어요.”

아무래도 칼은 그 이유를 들려주지 않을 모양이군. 할 수 없지. 칼의 판단이니까. 난 칼에게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잠시 계단 층계에 서서 홀을 내려다보았다.

칼은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그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2층 층계를 다 올라가 우리 방으로 들어섰다. 샌슨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길시언은 갑옷은 벗어놓았으면서 침대 속에서 검집 을 부여잡고 악몽을 꾸듯이 이를 갈고 있었다. 아마 꿈속에서 프림 블레이드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둘 다 자는 모습에선 왕자든 경비 대장이든 다를 바가 없다. 난 머리를 휘저으며 베란다로 나갔다.

오늘 하루 정말 요상한 일이 일어나버렸군. 어쩌다가 이런 일에 말려들었지?

“나왔니?”

옆쪽을 돌아보니 네리아가 자기 방의 베란다에 나와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리아는 혼자서 자겠군. 아주 고요하고 좋겠는걸.

“안 잡니까?”

이번엔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프나이델이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흠, 세 개의 베란다에 나란히 여자, 소년, 청년이로군. 잠시 후 그 모습 은 여자와 소년, 그리고 청년으로 바뀌었다. 네리아가 공중제비를 넘더니 내가 서 있던 베란다로 넘어온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멋있습니다.”

나는 조금 전 칼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프나이델, 당신 앞으로 뭘 할 생각이죠?”

아프나이델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했다.

“나? 글쎄. 그 소녀를 찾는 것 말고 말이지?”

역시 마법사로군. 말이 잘 통해. 아프나이델은 팔짱을 끼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보다 수련을 쌓아야지. 그리고 소원이 있다면, 고금의 모든 마법을 다 익혀보는 것.”

“그게 원래 소원이었어요?”

아프나이델은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레너스 시에서의 그 일.”

“괜찮아요. 지난 일인데.”

네리아는 우리 둘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는 못한 채 그저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 사위를 어지럽히고 있다. 아프나이델은 흐트 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것도, 변명하자면 나의 욕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겠지.”

“대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그렇지. 그 소원을 이루기 너무 힘드니까 가짜로라도 그렇게 되어보고 싶었던 거지. 변명 치곤 받아들이기 힘든 변명이지?”

아프나이델은 몸을 돌려 베란다에 팔꿈치를 기대고 멀리 바이서스 임펠의 전경을 바라보며 내겐 옆얼굴만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런 자세로 말했다.

“그래서 시골로 내려가, 사이비 남작의 졸개로 들어가서 그 사이비 남작의 부하들과 촌사람들을 겁주면서 뿌듯한 느낌을 받으려 했던 거지.”

“그렇게 비참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비참? 아니야. 비참하지 않아.”

아프나이델은 먼곳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시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눈앞을 어지럽혔지만, 아프나이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비참하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하는 거지. 하지만 난 나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이젠 다른 길을 걷고 있어. 그러니 비참하지 않 아. 모두 너희 일행 덕분이지.”

난 잠시 반대쪽의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여전히 난간에 등을 기대고 팔꿈치를 댄 자세로 턱을 치켜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다시 아프나이델 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

“그 전에, 먼저 너희 일행에게 진 빚은 갚아야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냐. 칼 씨에게 말했듯이, 이건 나 자신의 자기 단련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소녀를 추적하는 일이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으면 좋겠구나.”

조용히 있던 네리아가 튕기듯이 한마디 했다.

“무서운 말을 하시네?”

“미안합니다. 네리아 양.”

“괜찮아요, 뭐. 욕심만이라면야 무슨 생각을 못해.”

네리아는 가볍게 대답해 버리고는 아까와 똑같이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아프나이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아프나이델, 그건 당신 이름입니까, 성입니까?”

“응? 그건 왜?”

“궁성 임펠리아에서 조나단 아프나이델이라는 수비 대장을 만났어요.”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자세 그대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희한하군. 내 이름이 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관계 없는 사람이에요?”

“응.”

“그렇군요. 아, 이름이 같아서 조금 놀랐기 때문에 묻는 거예요.”

“응.”

아프나이델은 그 자세 그대로 바이서스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도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한하군. 마법사가 몸을 구부려 대지를 바라보고, 도 둑은 몸을 젖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군.

가짜 전사는?

나는 그저 똑바로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생각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그 딸을 찾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다음날도 우리는 제각기 흩어졌다. 아프나이델과 길시언은 상인들을 만나러, 샌슨과 칼, 엑셀핸드는 모험가들을 만나러, 그리고 나는 또 네리아에게 귀를 잡힌 채로 도둑 길드라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오우, 망할.

“도둑 길드요? 에비!”

“괜찮아, 괜찮아. 들어가는 사람 중에서 죽어서 나오는 것은 세 사람에 한 명뿐이야. 그런데 우리는 두 명이잖아.”

“지금 그거 안심하라고 하는 말 맞아요?”

“아마 그런 것 같아.”

네리아는 이런 식으로 날 겁주면서 도둑 길드로 끌고갔다. 수도의 거리들도 이젠 제법 눈에 익는 것 같군. 돌아다닌 지 얼마나 되었다고. 헤헷.

늦가을의 하늘은 묵직하게 대지를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맑았다. 이미 겨울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활 기가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모두들 벌겋게 익은 코를 가리고 하얀 김을 몰아쉬며 돌아다녀야겠지.

그래도 이 도시에는 낙엽이 날리지 않아 살풍경한 가을 풍경이다. 흐음. 그래서 난 그 칙칙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고 있는 존재들을 구경했다. 난 그렇게 지나가던 아가씨 하나를 구경하다가 네리아에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방법이 과연 제대로 된 걸까요?”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잖아.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봐.”

“국왕님께 부탁해서 각 영지나 도시로 붉은 머리 소녀를 찾아봐 달라고 말하면?”

“그건 이미 나왔던 계획이고 안 된다고 하잖았어?”

“그건 나도 기억해요. 왕명으로 그 소녀를 찾는 것은 결국 공식적으로 찾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된다면 그 소녀는 할슈타일 가문으로 가게 된다는 것 때문이었죠?”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상하지 않아요?”

“응?”

“그 소녀는 어차피 할슈타일 후작의 딸이잖아요. 왜 아버지가 그 딸을 찾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어? 흠. 이상하네?”

좋아! 넘어온다, 넘어온다. 네리아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 괜찮아. 수도에 사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더 골치 아픈 일도 많이 일어나. 하이 프리스트가 분명히 칼 아저씨에게 잘 설명했고, 칼 아저씨도 찬성한 일이잖아? 신경 쓸 거 없어.”

윽. 넘어오다 말았다. 다시 한번!

“우리, 그거나 알아보면 어떨까요?”

“응? 무슨 말이니?”

“왜 할슈타일 후작이 자기 딸을 찾으면 안 되는가 하는 거. 궁금하지 않아요?”

“그거? 별로 궁금하구나?”

이게 무슨 뜻이지? 궁금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는 거야? 네리아는 턱을 긁다가 기지개를 쫙 펴면서 말했다.

“넌 그게 궁금하니?”

“궁금해요.”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내 얼굴을 곁눈질로 들여다보았다.

“너도 아버지가 그리우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글쎄다. 하이 프리스트가 칼 아저씨에게 말할 때는 마법까지 써가면서 은밀하게 말했잖아? 동료들끼리니까 괜히 비밀 같은 거 물어보고 싶지는 않아.”

으윽. 네리아는 호기심도 없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아요. 뭐.”

네리아의 뒤를 졸졸 따라가니 이번에는 대로에 있는 상점가였다. 곳곳에 별의별 상점이 다 있었다. 네리아는 거대한 포목점과 건초상을 지나 조그만 구두가게로 접 어들었다.

구둣방? 흠, 희한한 장소네.

네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방 벽으로는 가위니 가죽이니 미완성 구두니 하는 것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채광이 조금 좋은 곳에서는 허리가 굽은 노인네 하 나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서는 두꺼운 손을 꿈지럭거리면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앉았는데 온몸에서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뿐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손놀림마저도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아주 느긋하게 구두를 만들고 있었다. 마치 구두 만드는 모습의 조각 같았다.

네리아가 그 앞에 서자 빛이 가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조각 같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는 벗겨지고 이빨도 시원치 않은 노인이었는데 목소리는 카랑카랑해 서 신기했다.

“숙녀화는 안 만들어.”

네리아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투로 벽에 걸린 구두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네리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요즘 유행은 어때요?”

노인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10년 전과 같지.”

“10년 전의 유행은 어땠는데요?”

“20년 전과 같지.”

“10년 후의 유행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과 같지.”

“들어가도 돼요?”

“들어가 봐.”

“고마워요, 자크.”

저 할아버지 이름이 자크인가? 네리아는 만지작거리던 구두를 아래로 당겼다. 뭐지? 그 구두에는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네리아가 당기자 곧 구석진 곳에서 뭔가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리아는 나에게 손짓을 하고는 구석 벽 쪽으로 걸어갔다. 네리아가 벽을 밀자 벽은 문처럼 뒤로 밀려났다. 삐이걱. 허어. 신기하네. 난 바짝 긴장한 채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기다란 수직 통로가 보였고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 계단이 있었다. 난 발을 조심하면서 나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것 참 신기하네. 구 둣방 벽 뒤에 이런 지하실이 자리하고 있다니.

“여기가 길드예요?”

“그렇지.”

“흠. 그럼 저 노인이 문지기예요?”

“응. 한마디라도 틀렸다면 내 구두도 저 벽에 걸리게 될걸? 자크는 사실 구두 만드는 데는 소질이 없어.”

“헷?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말 암호예요?”

“암호이긴 하지만 너 어디 가서 써먹을 생각은 하지 마. 사실 내용은 중요할 것이 없고 높낮이와 손동작이 더 중요하거든.”

“그렇겠군요.”

나선계단을 다 내려가자 엄청나게 어두웠다. 지하인 데다가 조명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네리아는 별 주저하는 기색 없이 문을 찾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낮은 목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네리아는 턱을 세운 채 말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 네가 밤마다 꿈꾸는 여자.”

“….들어와요. 네리아.”

정말 못 말리겠군. 네리아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 밝은 빛이 비쳐서 난 눈을 껌벅였다. 별로 밝지는 않았지만 컴컴한 나선 계단을 따라 내려오느라 눈이 암순응되어 버린 모양이다.

안은 그야말로 너저분한 지하실이었다.

한쪽에는 뭔가 잡동사니들이 잔뜩 들어 있는 책장, 그리고 또 다른 문이 보였고 문 맞은편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한쪽 벽에는 기다란 벤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한 남자가 잠들어 있는 것인지, 어쨌든 옆으로 누워 있었고 몇 개의 술병이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남자는 몸 위에 모포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 하나가 책상 위에 앉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대거를 들고는 책상에 던졌다 뺐다 하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탁, 탁. 무표정한 얼굴에 초점도 잘 맞지 않는 시선이어서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 러나 네리아는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는 시선도 보내지 않고 벤치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벤치에 누운 남자를 흔들면서 말했다.

“일어나요, 아빠!”

아빠? 아버지라고? 난 놀란 눈으로 네리아와 그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 병을 비웠어요. 앞으로 두 시간은 못 일어날걸?”

“내기할래? 내가 일어나게 한다면 어쩔래?”

“10셀.”

“짠 놈. 좋아. 10셀이야.”

그러더니 네리아는 벤치에 누워 있던 남자의 모포를 잡아당겨 버렸다. 그러자 남자는 데구르르 굴렀다. 얼핏 보기에도 술에 무진장 절어버린 중년 남자다. 턱수염에 술이 묻었다가 그대로 엉겨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머리는 거의 정수리까지 벗어져 있었다. 남자는 구르다가 그대로 멈춘 아주 역동적인 자세로 코를 골아대었다. “푸우…… 크르릉…… 푸르릉…….”

모포가 없어지니 코 고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일단은 항상 그랬듯이 문을 기대고 섰다. 네리아는 그 정도로 일어날 것은 예상치도 않았다는 듯이 당장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네리아는 척척 걸어가더니 벽에 걸려 있는 램프를 가져왔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맙소사, 어쩌려고요?”

“깨우려고.”

네리아는 모포에서 털실 뭉치를 조금 뽑아내더니 남자의 신발을 벗겼다. 아, 맙소사.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 네리아는 대단히 직접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계획하는 모 양이다. 네리아는 취한 남자의 발가락 사이에 실뭉치를 꽂고는 불을 붙이고 후다닥 물러났다.

잠시 후, 술에 취한 남자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일어났다.

“으아아악! 물! 물!”

그러면서 남자는 옆에 있는 병을 쥐어들었다. 안 돼! 그건 술병이야!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남자는 술병을 발에 기울였다. 휴우, 다행이다. 술병이 몽땅 비어 있었던 것 이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미친 듯이 발을 털면서 눈물을 찔끔거렸고 네리아는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부턴 술병을 치우고 해야겠군.”

불침을 맞은 남자는 그 목소리에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역시 너였군.”

“오래간만이에요, 아빠.”

“아빠, 아빠 하지 마! 총각 혼삿길 막을 일 있냐?”

초, 총각? 오, 맙소사.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빠.”

남자는 불안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콧소리를 내면 난 무지 불안해. 이번엔 또 날 얼마나 벗겨먹으려고 왔냐?”

난 하마터면 ‘옳소!’ 할 뻔했다. 네리아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성실한 나이트호크를 무슨 사기꾼 취급하지 마세요.”

“사기꾼은 문댄서 같은 놈이고. 일단 거기 앉아라.”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의자를 두 개 가져왔다. 네리아는 내게 손짓했고 그래서 난 좀 불편한 심정으로 네리아와 나란히 앉아서 벤치의 남자를 마주보게 되었 다.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는 날 보면서 말했다.

“이 아인 누구냐?”

“동료예요.”

“바람잡이로도 못 쓰겠고, 뭐에 쓰는데? 침대에서 쓰냐?”

그거 듣기 거북한 말이로군. 난 싸늘한 시선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마주보았다. 마치 ‘이놈 보게?’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리아가 말했다.

“주책 좀 부리지 말아요, 아빠.”

“원하는 게 뭐야? 아니, 그보다, 자크! 가서 물 좀 가져와라. 어흠.”

중년 남자는 목이 칼칼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대거를 가지고 놀던 그 남자는 책상 위에 있던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저 청년의 이름도 자크인 가? 그 청년 자크가 물컵을 내밀고 돌아가려 할 때 네리아는 자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크는 한숨을 쉬었다.

“알뜰한 네리아로군요.”

그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머니를 뒤져 10셀짜리 은화를 꺼내주었다.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은화를 공중에 튕겼다가 받아내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 위에 구두장이 노인도 자크였고, 이 남자도 자크고.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정면의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중년 남자도 자크 아닐까? 네리아가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자크.”

내 생각이 맞군. 중년 자크는 턱수염을 긁적거렸으나 곳곳에서 손가락이 걸리자 포기해 버렸다.

“뭔데?”

“어떤 사람을 찾아요. 밤새들 사이에 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뭘 찾는데?”

“붉은 머리 소녀.”

“지금 당장 하나 가르쳐줄 수 있지.”

“나 말고.”

“왜 찾아?”

“묻지 말고.”

중년 자크는 이번엔 턱수염을 꼬기 시작했다. 원래 잘 꼬여 있던 거라 아주 쉽게 엉망이 되었다.

“상인들하고 모험가들 사이에 그런 걸 묻고 다니는 사람이 있던데.”

네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래요?”

“그래서 밤새들 몇 명이 그 사람들을 따라서 유니콘 인까지 따라갔었지.”

나는 그만 놀라버렸다. 그럼 뭐야? 이 작자는 벌써 우리 일행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인가? 네리아는 벌쭉 웃으면서 말했다.

“헤. 아빠는 모르는 게 없네?”

중년 자크도 히죽 웃었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큰 건이야?”

“아주 큰 건이죠.”

“킥킥. 그럴 줄 알았어. 문댄서 놈들도 그런 여자아이를 찾고 있더라고.”

“역시 아빠네!”

“아빠, 아빠 하지 말라니까!”

“헤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데.

네리아는 겉으로 아주 기분 좋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고 있었고 중년 자크 역시 호인처럼 웃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난 흘깃 뒤쪽 을 보았다. 청년 자크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에다 대거를 꽂았다 뺐다 하고 있었다. 조금도 박자가 틀리지 않는 기계적인 동작이다.

네리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어쩌시겠어요?”

“무슨 건수야? 좀 들려줘.”

“이거 들으면 아빠 심장 터질 텐데. 너무 큰 건이라서.”

“그럼 살살 말해.”

“바이서스가 통째로 날아가는 건수예요.”

중년 자크는 히죽이 웃었다. 그리고 청년 자크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대거를 던졌다 뺐다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왜 놀라지를 않는 거지?

“바이서스가 통째로 날아가? 그것 구미가 당기는데 그래.”

“뭐죠, 아빠?”

“응?”

네리아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손은 천천히 허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여차하면 의자에서 튕겨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상해, 자크. 뭘 숨기고 있지?”

네리아의 말투마저도 바뀌어버렸다. 중년 자크는 킬킬거렸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말이야, 요즘 바이서스가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게 되는데.”

“무슨 뜻이지?”

네리아는 이제 쉭쉭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야 하나? 지금인가? 중년 자크는 말했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삐이걱. 한쪽 옆 벽에 달려 있던 문이 열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의자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 순간 뭔가 섬뜩한 빛이 눈앞을 지나갔다. 퍽!

대거였다. 책상에 앉아 있던 청년 자크가 대거를 집어던졌다. 다행히 내가 의자에서 튕겨져 나오느라 빗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그 순간 네리아가 펄쩍 뛰어올랐다.

“도망가, 후치!”

네리아는 날아오르며 그대로 청년 자크에게 뛰어들었으나 청년 자크는 가볍게 피해 버렸다. 그러나 네리아는 책상을 밟고 다시 그를 걷어찼다. 청년 자크의 얼굴이 픽 돌아가는 순간, 나는 새로 나타난 자를 바라보았다.

넥슨휴리첼이었다.

“이야아아압!”

누군가가 내 몸을 껴안았다. 뒤에서 중년 자크가 날 붙잡은 모양이다. 좋아, 기회다. 난 힘에서 밀리는 척하다가 그대로 뒤로 돌진했다.

“어억? 뭐, 뭐…….”

쾅! 분명히 벤치와 중년 자크와 벽 중에 두 개는 박살났을 것이다. 어쩌면 전부 다. 난 그대로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네리아는 옆에서 대거를 뽑아든 채 청년 자크 를 상대하고 있었다.

넥슨 휴리첼은 잠시 네리아를 보다가 날 보았다. 그는 내가 바스타드를 뽑아든 것을 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그 역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구면이군. 그거 내려놔라.”

난 쌀쌀맞게 웃어주고는 그 대답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난 오른발을 들었다가 힘껏 내리밟았다.

“으아아아아!”

중년 자크는 내게 다리를 밟히고는 기절할 듯한 비명을 질렀다.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린 놈이…………, 안 되겠군.”

순간 넥슨은 오른발을 크게 내딛으며 베어들어왔다. 감각적으로, 무조건 튀어나가는 나의 기술은,

“일자무시익!”

“크어억!”

넥슨은 팔목이 부러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롱소드를 부러뜨리지 않은 것은 손목이 부드러워 그렇겠지. 그건 좀 있다 칭찬해 줄 테니까 삐지지 말라고. 제기랄, 내가 기선을 잡았을 때 끝낸다. 난 풋내기니까 반칙을 써도 용서해줘!

“먹어랏!”

난 바닥에 구르고 있던 술병을 강하게 걷어찼다. 술병이 박살나며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겼다. 쾅쾅, 파아악! 넥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목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 누구 맘대로. 난 기름젓기로 들어갔다.

“우와자자자잣!”

뭐야? 넥슨은 빙긋 웃으며 롱소드를 앞으로 내찔러 왔다. 해보겠다는 거냐? 그런데 넥슨의 롱소드가 마치 샌슨의 그것처럼 빠르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 상하게 손목에 힘이 빠지며 내 바스타드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나는 허리가 끊어져라 뒤로 튕겼다. 내가 있던 장소에 바로 넥슨의 검이 찌르고 들 어왔다. 우와! 죽을 뻔했어!

“크어억!”

순간 나와 넥슨 사이에 청년 자크가 쓰러졌다. 나와 넥슨은 둘 다 놀라서 뒤로 물러났고 네리아가 재빨리 내 쪽으로 뛰어들었다. 자세히 보니 청년 자크의 허벅지에 대거가 꽂혀 있었다. 청년 자크는 피가 벌컥벌컥 쏟아지는 허벅지를 움켜쥐고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네리아는 사나운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난 순식간에 바스타드를 빼앗겼다.

“네, 네리아?”

“자식아! 튀라고 그랬잖아!”

“도망가게 하려고 데려왔어요?”

“넌 어쩌면 그렇게 날카로운 데가 있냐.”

네리아는 헛소리를 하면서 바스타드를 빙빙 돌렸다. 우와? 저건 우리 고향에서 터커나 해리가 보여주던 그건데? 네리아는 허리를 부드럽게 돌리며 바스타드를 기상 천외하게 돌려대었고 넥슨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설익었어. 아가씨.”

“뭐야?”

“차라리 저 소년에게 맡겨.”

“알았어.”

그 말 듣자마자 네리아는 몸을 돌리더니 내게 도로 바스타드를 돌려주었다. 뭔가 바보가 된 느낌이 드는데?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바스타드를 받아들었고 네리아는 다시 몸을 돌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네리아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넥슨은 기겁하며 옆으로 움직였고 빗나간 대거는 벽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탱! 넥슨은 이를 갈면서 롱소드를 앞에 곧추세웠다.

“성미 사나운 아가씨로군.”

“책임지라고 안할 테니 고맙다고 그래.”

“고마워.”

네리아는 내게 등을 보인 채로 뒤로 훌쩍 뛰어 내 옆에 섰다. 정말 가벼운 몸이다. 그녀는 품에서 또 대거를 꺼내며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나 물러날 테니 후치가 공격해. 저 자식 빈틈만 보이면 찌를 테니까 마구잡이로 공격해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등만 보이면 던질게.”

“그거………… 너무 솔직한 이야기군요.”

“그게 내 매력이야.”

넥슨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난 폭력에는 관심 없어.”

“자기가 질 확률이 높을 때는 누구나 폭력에 관심 없어져.”

네리아는 낭랑하게 대답했고 넥슨은 코를 씰룩거렸다. 거참, 네리아. 정말 축복받을 입을 가지셨습니다. 그려? 넥슨은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롱소드를 도로 꽂았 다.

“좋아, 졌어.”

“됐어! 후치, 저놈 빈손이야, 쳐!”

“농담이죠?”

“재밌잖아.”

넥슨은 황당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보다가 아예 의자를 하나 끌어와 자리에 앉아버렸다.

“이야기 좀 하지.”

“조금 있다가. 후치. 저 청년 감시해. 코를 풀 때도 허락을 받아.”

“들었죠?”

“알았다.”

넥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앉은 채로 팔짱을 끼었다. 나는 바스타드를 뽑아든 채 그의 뒤에 섰다. 엉뚱한 활극은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네리아는 곧 익숙한 동작으로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책장으로 걸어가서는 붕대와 약병들을 꺼내왔다. 그녀는 청년 자크와 중년 자크를 일으켜 벤치에 앉혔다. 네리아 는 청년 자크의 허벅지를 붕대로 감싸주면서 말했다.

“넌 아직 안 된단 말이야. 섣불리 덤비지 마. 그러니까 다치잖아. 명성이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게 아니란다.”

“졌어. 젠장. 누님을 찌르면 나도 깃발 좀 날릴 텐데.”

“5년이나 10년쯤 후에 그런 시도를 해봐.”

네리아는 상냥하게 말하고는 붕대 위를 찰싹 때렸다. 청년 자크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중년 자크는 좀 심각했다. 내가 밟아버린 다리가 아무래도 부러진 모양이다. 중년 자크는 파리한 얼굴로 누워서 씩씩거렸다.

“젠장, 이 나이에 뼈 부러지면 잘 아물지도 않는데.”

“내가 왜 이 아이 데리고 다니는지 알겠죠? 메롱.”

네리아는 혀를 날름거리며 중년 자크를 약올렸다. 중년 자크는 신음소리를 터프하게 내었다. 청년 자크까지 힘을 합쳐서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부목으로 쓸 것을 가 져와 중년 자크의 다리에 대고 묶어두었다.

“내일은 웬일로 신전에 다 가겠네?”

네리아는 계속해서 중년 자크를 약올렸다. 중년 자크는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으윽. 제기랄. 신전에 한 번 가면 한 달 동안 재수가 없는데.”

“다리 안 고치면 한 달 동안 못 움직일걸?”

“으으으윽!”

중년 자크는 그런 한숨을 쉬며 날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헹, 쏘아봐서 어쩌겠다는 거야? 나는 씨익 웃으며 그 눈길을 받아내었고, 그러자 중년 자크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정말 네가 데리고 다닐 만한 꼬마로군.”

“난 눈이 높다니까.”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네리아의 치료 과정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과 자크, 둘이 잘 아는 사이인가?”

“잘 알지. 적어도 당신보다는 안 지가 더 오래되었을걸?”

“그래? 흠. 자크가 당신 칭찬을 많이 하더군.”

“용모가 빼어나다고? 기술이 엄청나다고?”

“알뜰하다고.”

난 웃음소리를 기침소리로 감추려 했지만 아무래도 내 기침소리는 웃음소리에 가까웠나 보다. 네리아는 볼이 불룩해져서 자크를 노려보았다. 넥슨은 손을 들어 보이 며 말했다.

“난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야. 그를 좀 치료해 주고 싶은데.”

“그래? 지금은 안 돼. 있다가 우리 가고 나면 해.”

“치료는 빠를수록 좋은데.”

“아픈 사람은 나 아냐. 그리고 응급 처치를 해뒀으니 바로 쓰러질 일도 없어. 누굴 뭘로 보는 거야? 난 트라이던트의 네리아야.”

난 도저히 못 참고 한마디 해버렸다.

“알뜰한 네리아…….”

“그만둬!”

넥슨은 히죽 웃더니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좀 할까?”

“해봐. 들어주지.”

“내 이야기는 이거야. 들어와.”

무슨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쾅! 엄청난 소리가 나며 우리가 들어왔던 문이 박살날 듯이 열렸다. 그러고는 뒤돌아 볼 틈도 없이 뒷머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끄으윽…….”

이게 뭐지? 난 정신이 가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쓰러지면서 보니 문에서 뛰어들어 날 후려쳤던 그 누군가가 이제 네리아에게 덤벼드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누구 지? 아, 안 돼. 네리아를 건드리지 마. 이, 이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으아아악!”

쾅! 별이 보인다.

“꺄아아악!”

으윽! 뭐야? 퍽! 오, 맙소사. 내 배!

“그 발 못 치워요! 콜록콜록!”

네리아는 던져진 주제에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내 배 위에 완벽한 동작으로 착지를 했다. 네리아는 서둘러 비켜주었고 난 드러누운 채 배를 쓰다듬으며 위를 보았다.

천장에는 하얀 사각형이 보였고 거기에 자크들과 넥슨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마지막 남자, 우리 뒤에서 우리를 덮쳐 기절시킨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망할, 바로 넥슨을 뒤따라 다니던 그 마부였다.

저 엄청난 친구는 넥슨의 말을 듣자마자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면서 내가 돌아볼 틈도 없이 곧장 내 뒤통수를 후려친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 네리아도 어찌어찌 붙 잡은 모양이다. 솜씨가 상당한 모양인데. 그러고는 우리를 이곳으로 집어던진 것이다. 여기는 우리들이 있던 방 아래의 또 다른 방인 모양인데 꽤 거대했다. 네리아는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따로따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위에서 중년 자크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명은 비석에나 새겨둬.”

네리아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야이…….”

야이, 다음부터 나온 네리아의 말은 몹시 험악했다. 난 귀를 막고 싶어졌다. 왠지 들었다간 수명이 짧아질 것 같은 그런 욕설들이었다. 기상천외한 욕설도 있었고, 그 재치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욕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저런 욕설을 하는가 싶은 욕설들도 있었다. 중년 자크는 히죽거리며 천장의 문을 닫아 버렸다.

“머리 좀 식히라고.”

네리아는 문이 닫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한참 동안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다가 내가 질릴 때쯤 멈췄다.

“끝난 거예요?”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리아는 주위를 더듬거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후치?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곧 네리아의 손이 더듬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잠시 만지더니 곧 주위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뭘 찾아요? 불?”

“응.”

“감옥에 무슨 조명 장치가 있을까요?”

컴컴한 허공에 대고 말하려니 기분이 퍽 이상했다. 숨이 막히는 기분도 들었고,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덜그럭거렸다. 덜그럭거려? 무슨 물건들이 있다 는 말이네? 난 허리를 굽혀 바닥을 짚어보았다. 네리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별로 안 울리는 것을 봐서는 제법 넓은 곳인데.”

흠, 정말 그런데? 난 벽에 손을 짚은 채 움직였다. 뭔가 손에 만져지는 물건들이 있었지만 도통 뭔지 모르겠다. 아무리 만져봐도 무슨 지푸라기를 같은 것밖에 안 보 이는데?

“지푸라기가 있는데, 됐어. 잠깐만.”

네리아는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지? 그런데 잠시 후 캄캄한 암흑 속에서 뭔가 불꽃이 팍 튀겼다. 동시에 치이익! 하는 마찰음도 들렸다. 그리고 조금 후, 주위가 환해지며 손에 지푸라기를 꼬아서 막대기처럼 만든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그 지푸라기 막대를 횃불처럼 들고 있었다.

“부싯돌이 있었어요?”

“응. 여기 대거 손잡이가 발화장치야. 어디 보자…… 일단 지푸라기 좀더 모아.”

주위가 밝아지고 보니 우리가 있는 곳은 바닥에는 짚이 많이 깔려 있었고 주위는 꽤 넓은, 무슨 창고 같은 곳이었다. 나는 재빨리 지푸라기를 모아 꼬아대었고 잠시 후 꽤 굵은 막대를 만들 수 있었다. 네리아는 거기다 불을 옮겨붙이고는 말했다.

“창고 같은데? 잠깐, 이 옆에 건초상이 있었지?”

“아, 그럼 여긴 건초상의 지하 창고인가요?”

“그렇겠군. 아마 두 건물을 몽땅 쓰고 있나 보군. 에이, 젠장! 불조심하지 않으면 타죽겠군.”

“짚은 별로 없군요. 괜찮겠어요.”

네리아는 투덜거리며 주위의 벽들을 조사했다. 나도 주위를 조사해 보았다. 잠시 후, 원래 문으로 쓰였을 법한 장소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곳은 문짝을 떼어내고 벽돌로 막아두었다. 그 외에 다른 출구는 하나뿐이었다.

“그럼 나갈 곳은 저 위의 트랩 도어뿐이네?”

나는 느긋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일단 불 끄죠. 볼 건 다 봤으니까.”

네리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연하네?”

“좋잖아요. 이건 하나의 계기죠. 우리가 그 붉은 머리 소녀를 찾기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무슨 조짐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에헤. 하긴 그렇네.”

네리아는 불붙은 지푸라기를 흔들어 꺼버렸다. 음. 너무 캄캄한데? 네리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네리아는 내 손을 쥐었다. 나는 네리아의 손을 마주 쥐어 주었다. 나와 네리아는 서로 어깨를 마주대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네리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는 말했다.

“넥슨은 왜 우리를 붙잡았을까?”

“자크가 아니고요?”

“자크는 멍청이야. 아마 넥슨의 의뢰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런데 진짜 아빠?”

“무슨.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런 것 같더군요.”

“그런데 넥슨은 왜 우리를 붙잡았을까?”

“내 생각을 듣고 싶은 거예요?”

“응.”

“들려드리죠. 내 생각엔! •모르겠어요.”

“왜 모를까?”

네리아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투로 그냥 계속해서 질문했다. 나도 캄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자니 뭐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좋아. 지금까지의 상황을 좀 정리해 보자.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계기로 하게 되는군.

“으음. 좋아요. 먼저, 넥슨 휴리첼의 삼촌이 되는 카뮤 휴리첼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였지요. 하지만 그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후 크라드메서는 발광해 버 렸죠. 아마 그것은 가문의 커다란 수치였겠죠.”

“좋아. 계속해.”

“아! 그렇군. 이제 알았어. 왜 백작쯤 되는 사람이 우리 영지에 파견 근무를 나왔는지.”

“무슨 말이니?”

“넥슨휴리첼의 아버지인 그 이름이 뭐더라? 아, 로넨 휴리첼. 그렇지. 그 사람이 우리 영지에 왔어요.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포함될 캇셀프라임을 호위해서 왔죠. 그 거군요. 아마 로넨 휴리첼은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웨스트 그레이드까지의 파견 근무를 나온 모양이군요.”

“조오금 단정적이지만, 뭐 계속해 봐. 재미있네.”

“예. 그날 아침의 질문. ‘아버지는 명예롭게 전사했느냐?”는 질문, 기억나죠?”

“흠, 맞아떨어진다. 가문의 명예란 말이지?”

“그리고 그는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니까, 어쩌면 그랜드스톰의 정보를 알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랜드스톰의 정보, 그러니까 할슈타일 후작이 크라드메서의 드 래곤 라자인 붉은 머리 소녀를 찾고 있다는 정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확실히 알았을 거예요. 문댄서의 말 기억나죠? 넥슨 휴리첼은 할슈타일 가문의 어떤 책을 노리고 있다. 누군가를 그 붉은 머리 소녀로 위장시켜 그 집안에 들 여보내 책을 훔쳐오게 하려고 하고 있다.”

“흐음. 그렇지.”

“그러니까 분명히 넥슨은 할슈타일 가문에서 붉은 머리 소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옳지 옳지, 잘한다! 그래서?”

“그래서!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죠.”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네리아의 한숨 소리가 잘 들려왔다.

“에휴, 그럼 있다가 물어보자. 아마 취조를 하겠지.”

“그렇겠군요.”

“자자, 자!”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내게서 떨어져갔다. 잠시 후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네리아는 지푸라기 틈새로 들어가버린 모양이다. 난 차가운 돌 벽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넥슨 휴리첼.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끼어드는데.

그건 그렇고 골치 아프게 되었군. 우리는 도둑 길드로 오는 참이라 행선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은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하겠지만 우리를 찾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 재주로 여기서 빠져나가야 되는군.

하지만 빠져나가는 것은 천천히 생각하자. 아무래도 넥슨 휴리첼은 뭔가 많은 정보가 나올 만한 사람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아까는 네리아를 안심시키려고 말한 거 지만, 그래도 이것은 분명히 기회다.

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소르르 잠이 들었다. 컴컴하니까 잠자기에 딱 좋다.

“뒤에서 말하지 마.”

무슨 말이야? 이런,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르겠군. 잠시 균형이 잡히지 않아 앉은 채로 그대로 옆으로 넘어갈 뻔하다가 간신히 땅을 짚었다.

“뒤에서 말하지 마! 날 욕하지 마!”

“뭐, 뭐야? 네리아?”

난 정신을 차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캄캄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네리아!”

네리아가 있는 쪽이 어디더라? 이런, 방향 감각도 살아나지 않는데? 난 일단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허둥지둥 기어갔다. 차가운 지하실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무 릎이 땅에 부딪히니까 엄청나게 아팠다. 와, 빛이 보인다! 윽, 눈에 불꽃 튀는 거군. 망할. 벽 쪽으로 기어갔어. 난 눈물을 찔끔거리며 허둥지둥 방향을 바꿔서 기어갔 다. 잠시 후 짚더미가 만져졌다. 어디 보자, 네리아는 분명히 짚더미 속에 들어가서 잠들었지?

“죽일 거야!”

귀가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우와, 정신 없어. 네리아의 고함소리가 갑자기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온 것이다. 난 놀라서 무턱대고 손을 내밀었다. 뭔가 부드러운 것이 만져졌다. 네리아의 어깨인 것 같았다.

난 네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네리아, 네리아!”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저리 가! 안 돼, 다가오지 마! 저리 가! 안 돼!”

네리아의 손이 마구 휘저어지면서 나는 몇 번이나 가슴, 턱, 뺨을 두드려맞게 되었다. 다행히 어두워서 타격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네리아앗!”

“누구야…, 제발………… 날 건드리지 마……………. 으흑.”

뭐야, 이건? 우는 건가? 네리아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고 주먹질은 멎었다.

“네리아, 나예요! 후치라고요!”

“안 돼……………, 제발……. 으흐흑.”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끅끅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였다. 이게 도대체 뭐람. 난 조금 더 손을 뻗쳐 네리아의 팔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았 다. 그런데 손이 닿은 곳은 무언가 말랑거리며 축축한 곳이었다. 네리아의 입술?

•후치니?”

윽. 맞군. 말소리가 나올 때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이 손가락에 닿았다. 갑자기 뭔가가 뻗어오더니 내 손을 옆으로 치웠다. 네리아의 손인가 보다.

“네리아, 괜찮아요? 예? 나예요.”

“후치구나…………. 여긴 어디지?”

“어디기는요. 도둑 길드의 지하 감옥이죠.”

“그것 말고. 여기가 어디지?”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것 말고? 그것 말고라니, 그럼 다른 뭔가가 더 있나? 네리아는 다시 흐느끼듯이 질문했다.

“여긴 사람이 있어?”

“두 명 있는데요.”

네리아는 갑자기 악에 받힌 목소리가 되었다.

“사람 말이야! 사람! 아무것도 없어! 캄캄해! 목소리뿐이야! 뒤에서 말하지 마! 내 눈에 보이지 않잖아!”

난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젠장.

“난 당신 앞에 있어요.”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구.”

“손을 이리 줘요.”

네리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난 네리아의 손이 있을 만한 장소를 더듬었다. 조금 후, 작은 손이 만져졌다. 난 그 손을 들어 내 볼에 가져왔다. 네리아의 손을 내 볼에 가져다 누르면서 말했다.

“만져지죠?”

“…….”

“죽은 자도 아니에요. 따뜻하고, 맥박이 뛰고 있지요?”

“……으응.”

“말할 때 내 볼의 움직임이 느껴지죠?”

“으응.”

“난 당신 앞에 있지요?”

“……응.”

난 네리아의 손을 놓았지만 네리아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네리아는 양손을 올려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네리아는 손을 내 리면서 일어나 앉는 눈치였다.

“내가 나잇값을 못하는구나. 고마워, 후치.”

“좋지 않은 꿈을 꾸었나 보군요. 아마 허기져서 그럴 거예요. 으……………, 괜히 먹는 이야기 꺼냈다. 뱃속 사정으로 봐서 꽤 오래 지났나 본데요.”

“그런 것 같아. 크응!”

네리아는 코를 크게 훌쩍였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짐짓 바꾸더니 활발하게 외쳤다.

“야! 이 자식들아! 사람 굶겨 죽일 거야아아?”

응?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아무 자크나 머리 좀 내밀어 봐! 밥 좀 먹자!”

우리는 기세 좋게 천장을 향해 고함을 질러대었다. 잠시 후 천장에 사각형의 빛이 생겼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와. 단, 허튼 짓은 하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

넥슨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곧 위에서 밧줄 사다리가 떨어졌다.

“헤엣? 간단하네? 올라가서 얌전히 굴다가 다 박살내어 버릴까?”

네리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설마, 무슨 대비를 하겠지.”

“레이디 퍼스트.”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바보 아냐? 그러고 보니 줄사다리는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 올라가는데. 위로 올라와 보니 역시 삼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칼 뽑아든 남자들이 자그마치 다섯 명이나 포위하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은 아까의 그 자크들이었고 하나는 우리 둘을 때려눕힌 그 마부였다. 나머지 둘은 새로 온 남자들이었다.

네리아는 이미 자크들에게 양쪽 팔목을 잡힌 채로 내게 빙긋 웃었다. 자크들이 손에 손에 대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네리아는 이미 무장 해제를 당한 모양 이다. 그리고 다른 남자 하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별로 반항할 생각 없다는 듯이 바스타드를 내주었다.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봐, 서툰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 장갑 벗어.”

“쳇. 아는 게 많아 좋겠군.”

“아까 칼 부딪혀봤지. 검 한 번만 부딪혀봐도 상대의 기술과 힘을 파악해야 검사라고 하는 법이다.”

“물론 그렇지. 그러니까 당신은 모를 줄 알았는데.”

퍽! 옆에 있던 놈이 칼자루로 내 복부를 찍었다. 망할 녀석! 난 우욱 하면서 일어나 덤빌 태세를 취했지만, 아무래도 다섯 개의 반짝거리는 검날을 향해 돌진하기엔 내 앞날이 아직 창창한걸.

“썅, 맨손의 사람을 치고도 검사야?”

“재밌잖아.”

넥슨은 유들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저 얼굴은 그날 아침의 얼굴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날 아침, 칼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던 모습은 가짜란 말인가? 그 수심 어린 표정은 모두 꾸민 것이었고?

나는 OPG를 벗어주었다.

넥슨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네리아와 나는 주위를 한 번씩 노려보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넥슨은 우리 맞은편에 앉았고 나머지 다섯 명 은 우리들 뒤에 둘러서는 모양이었다. 난 괜히 심사가 뒤틀려서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손가락을 튕겨주었다.

“난 팬케이크, 스테이크는 미디엄, 입가심으로 맥주!”

네리아는 까르르 웃었고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다시 칼자루로 날 찍을 태세를 취했다. 으악! 그만 찍어! 넥슨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뭐 마실 거라도 가져다 줘라.”

남자들 중 아까의 그 마부가 밖으로 나갔다. 저 작자는 정말 말이 없군. 그리고 넥슨은 손가락을 꺾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귀를 파는 시늉을 하더니 말 했다.

“당신 뭐 하는 작자야?”

“나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네리아는 한숨을 크게 쉬더니 날 바라보았다.

“후치. 네가 말해 봐. 왠지 너와 잘 통할 것 같아.”

“악담이라도 그건 좀 심하네.”

난 고개를 조금 꺾은 다음에 넥슨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중에서 제일 잘하는 게 뭔데? 이길 수 없는 상대는 부하 시켜 패기? 졸개들 끌어모아 둘러세우고 어깨에 힘주기?”

넥슨은 피식피식 웃었다. 흠, 이거 말로 어떻게 해볼 사람은 아니군. 샌슨과는 다른데? 그때 밖으로 나갔던 마부가 맥주잔을 들고 돌아왔다. 네리아와 내 앞에 맥주 잔이 하나씩 놓이게 되자 나와 네리아는 서로 쳐다보게 되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걸까? 넥슨은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독은 없어.”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있으면 있다고 말할 거야?”

“응.”

“후치, 넌 조금 있어봐.”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대어 마셨다. 그녀는 혀를 내밀어 먼저 맛을 보고는 조금씩 입안에 흘려넣더니 잠시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는 듯했다. 그 녀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마시지 마.”

“뭐? 그럼!”

“김이 빠졌어.”

넥슨은 곧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핫하하하!”

그는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넥슨은 한참 동안 웃더니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처음 보겠군. 하하하! 좋아. 아주 배짱들이 좋아.”

“고마워. 대접 잘 받았으니 이만 돌아가도 될까?”

“어디로? 하늘로?”

넥슨은 싱글거리며 그렇게 대답했고 그래서 난 기분이 점점 더러워졌다. 이 친구가 원하는 것이 뭘까?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우릴 끄집어내어 말을 걸어오는 것이겠지.

“당신과 사교 관계를 논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원하는 거나 빨리 말해 봐.”

놀라워. 역시 네리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귀신같이 질문하는데? 넥슨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그래도 난 신사다. 먼저 소개를 좀 하지. 그날 아침에 당신을 보기는 했지만 소개를 받지는 못했어.”

“그래? 난 숙녀다. 네리아.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그건 아까도 들었던 말인데. 일명 알뜰한 네리아라고도 하던 것 같던데?”

네리아는 콧방귀를 뀌었고 넥슨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할말이 없나 보군. 좋아. 그리고 이쪽은?”

“후치 네드발. 일명 괴물 초장이. 오크의 재앙이자 가짜 남작 실리키안의 재앙이며, 팬케이크의 성자, 오거 일루전 슬레이어, 칼라일의 구원자, 레이디 제미니의 나 이트. 그리고 헬턴트의 초장이 후보이며………….”

넥슨 씨가 점잖게 손을 들지만 않았다면 난 몇 마디고 더 지껄였을 것이다. 넥슨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장자,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

콧방귀를 뀌고 있던 숙녀께서 그 마지막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길드 마스터?”

네리아는 몸을 돌리며 중년 자크를 바라보았고 중년 자크는 그냥 빙긋이 웃고 있었다. 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중년 자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들은 대로야.”

“젠장, 밤의 신사도 갈 데까지 갔군. 뭐야, 귀족을 길드 마스터로 섬긴다고? 웃기네.”

옆에서 사나이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노려보아서 간신히 네리아의 목소리는 좀 수그러들었다. 어이없는 일인데? 도둑도 아닌 자가 도둑 길드의 마스터가 될 수 있 나?

넥슨은 마치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전통적인 조직학의 응용일 뿐이야.”

네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허수아비?”

“그렇지.”

“맙소사.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가 허수아비였다니, 말도 안 돼.”

“말이 돼. 시간과 노력의 문제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란 말이군?”

“그렇지.”

네리아는 넥슨이 더 말하길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넥슨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질문했다.

“원하는 게 뭐야?”

“단순한 복종.”

“거절하면?”

“시시한 죽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라. 음. 골치 아픈 일이로군. 난 김이 빠졌다는 그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다행히 맛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머 리에서는 점점 김이 빠지고 있다.

네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좋아, 죽긴 싫어. 말해 봐. 뭘 복종하면 되지?”

“붉은 머리 소녀. 알고 있겠지? 하이 프리스트가 이미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이 친구는 역시 그 소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군. 네리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넥슨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쳇. 난 빨간색이 싫어. 내가 빨강머리라서. 푸른 표지 책 이야기는 어때?”

처음으로 넥슨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떠올랐다. 넥슨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여전히 약간 힘 빠진 듯한 초점 없는 시선으로 넥 슨을 마주보았다.

“할슈타일 저택에 있다는 그 푸른색 책. 맞지? 할슈타일 저택에서 찾는 붉은 머리 소녀로 위장하여 거기 잠입해서 그 책을 빼와라. 그거 아냐?”

“푸른 책에 대해 뭘 알고 있지?”

“표지가 푸르다는 것 외엔 몰라.”

넥슨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손끝을 모았다 벌렸다 하면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문댄서 녀석이 다 불었군.”

네리아는 별말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넥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그 녀석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 솜씨 좋은 녀석들이 부족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차라리 안하는 것만 못한 일이었군. 그 문댄서 녀석에게 선 물을 좀 보내야겠군.”

선물이라. 그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이미 알고 있다면 간단하겠군. 그래. 하이 프리스트가 말해 줬을 테니 너희들도 잘 알겠지. 크라드메서가 웨이크닝에 들어가게 되며, 따라서 할슈타일 가에서는 옛 날에 잃었던 한 아이를 찾고 있다. 그 소녀만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와 네리아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넥슨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 당신이 그 붉은 머리의 소녀로 위장하여 할슈타일가에 들어가도록. 그러고는 내가 원하는 책을 가져다주면 된다.”

“당신 의뢰는 거절. 안 되거든.” “안 된다고?”

네리아는 말했다.

“난 그 후작을 이미 만나버렸어. 그리고 내 나이가 10대가 아니라고도 말했어. 그런데 지금 다시 찾아가서 ‘사실은 저 10대예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

넥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만났다고?”

“응.”

“이런 젠장…….”

넥슨은 투덜거리더니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그럼 쓸모가 없군. 알았어.”

뭐라고? 이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넥슨은 갑자기 내 등 뒤로 눈짓을 했다. 뒤를 재빨리 돌아보자 롱소드를 뽑아들고 있는 그 마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제 기랄!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원하는 것은 그 푸른 책이지?”

넥슨은 다시 눈짓을 했고 그러자 마부는 롱소드를 꽂아넣었다. 우, 우화! 10년 감수했다. 네리아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든 그걸 가져다주면 되는 거 아냐?”

넥슨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훔쳐오겠다는 식의 말은 안 되겠는데. 그게 가능했다면 벌써 했을걸. 도둑 길드에는 재주 좋은 자들이 많아. 하지만 할슈타일 저택에 잠입해서 그 책을 가져올 만한 자는 없었어.”

“어쨌든, 가져다주면 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럼 가져다줄 테니 살려줘.”

“살고 싶어서 하는 말인가?”

네리아는 사나운 눈길로 넥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질을 잡아둬. 우린 둘이야. 그러니까 하나가 나가서 그 책을 가져오면, 인질과 교환해. 이러면 되겠지?”

넥슨은 그 말을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좋은 말이긴 한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네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잖아? 원하는 것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거 아냐?”

“그건 그렇군.”

“알아들으니 다행이군. 그럼 내가 인질이 될 테니 저 아이를 보내줘. 저 아이가 그 책을 가져다줄 거야.”

나는 놀라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리아는 넥슨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넥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걸? 네가 도둑이잖아. 그런데 저 꼬마를 보낸다고?”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의 말이니까 묻지 말고 믿어.”

“그렇다면 믿지.”

난 더 못 참고 외쳤다.

“자, 잠깐만요! 네리아, 지금 무슨·

“닥쳐!”

네리아는 내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말했다.

“멍청아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야지.”

“네, 네리아?”

“입 닥치고 나가. 내 몸은 내가 빼낼 테니까.”

그리고 잠깐 쉬었다가, 네리아는 갑자기 어조를 바꿔서 말했다.

“너희 일행을 만나고부터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정말 엉망진창이다. 휴우.”

그리고 네리아는 그대로 내게서 떨어져버렸다. 난 어쩔 줄 모르고 네리아를 봤다가 넥슨을 봤다가 했다. 그러나 네리아는 차가운 태도로 넥슨에게 말했다.

“이 꼬마에게 가져와야 할 물건을 정확히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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