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가오지 마라!”
길시언이 세 명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길시언은 어느새 좀비들을 모두 격퇴시켜 놓았지만 그 대가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다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숨결도 고르지 못했다. 하지만 길 시언은 방패를 앞에 세워들고는 당당하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멍청한 왕자. 차라리 달아나! 감성은 만족되겠지만, 합리적이지 못해.
길시언의 짜내는 듯한 협박 소리에 세 명은 멈춰 섰지만 그건 그저 웃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나 보군. 시오네가 처음으로 말했다.
“먼저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데.”
길시언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노려보았다. 넥슨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시오네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저 뒤의 세 명, 잘 알지. 무너진 굴 속에서도 도망쳐 나왔군. 정말 존경스러워.”
길시언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오네는 갑자기 길시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길시언 왕자 당신도 당신 정말 끈덕지군. 그런데 여기서는 오히려 죽으려 드는군. 기이한 일이야.”
길시언은 낮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여덟 명이나 되는 암살자들로부터 달아난 자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려 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뭐라고? 잠깐. 여덟 명의 암살자? 레브네인 호수 옆에서, 그 여덟 명의 암살자 말인가? 나는 몽롱해지려는 의식의 끄트머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길시언은 이 를 악물며 말했다.
“그놈들…………, 네가 보낸 것인가?”
“그래.”
“저분들에게 듣기로, 넌 자이펀의 간첩이라고 들었다. 맞는가?”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그런데 어떻게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날 죽이게 할 수 있었지?”
시오네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오홋호호! 물론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여기 계신 넥슨 휴리첼 국왕 말씀이다. 자이펀의 참된 위대함을 경배할 줄 아는 진정한 국왕의 재목인 넥슨 휴리첼, 그의 이 름이었지.”
길시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넥슨은 팔짱을 낀 채 시오네를 노려보고 있었고 시오네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이름은 바이서스에서 휴리첼로 바뀌게 될 거야.”
바이서스에서….. 휴리첼로? 젠장. 그까짓 이름이, 그까짓 이름이? 이름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거야. 빌어먹을.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 생각은 오히려 빠르게 진행 되었다. 길시언은 말했다.
“네가 모든 것의 원흉이었군. 칼라일 영지의 악몽도, 나에 대한 암살 기도도, 그리고 신심 깊은 재가 프리스트가 반역자가 된 것도, 모두 너 때문이었군.”
시오네는 마치 수줍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맨 마지막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전하?”
넥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의 의지였지. 난 남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절대로 휴리첼이라는 이름이 왕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길시언은 이를 갈며 말했지만 시오네는 깔깔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오네는 길시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해? 왕족의 피는 무슨 맛이지?”
길시언은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프림 블레이드를 맹렬하게 거머쥐었다.
“할 수 있다면 해봐!”
그러나 시오네는 덤벼드는 대신 손을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냐. 길시언 왕자. 당신은 어차피 죽을 테니까, 죽을 자에게 협박을 하지는 않아. 그런 취향은 없어.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당신 혈관에 흐르 는 피가 다른 사람의 피와 다르다고 생각해?”
“…다르다.”
“왕족의 피?”
시오네는 사납게 물어왔지만 길시언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라……………. 그래?”
“나의 의지를 위해 맥박치고, 나의 꿈을 위해 흐르는 나의 피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피와도 다른, 오로지 나만의 피다.”
“그런가? 그렇다면 당신의 피는 지금 당신을 구원하지 못해. 그 피 때문에 당신은 여기서 죽으려 들고 있는걸.”
길시언은 밤의 골목길 그 침침한 어둠 속에서 희게 웃었다.
“죽음도 내 삶의 한 부분이다. 떼어놓을 필요없어.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자신의 죽음에서 도망치는 당신 같은 뱀파이어는 알지 못하겠지만.”
시오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입을 벌리며 뱀처럼 사앗거렸다. 번쩍이는 송곳니가 드러난다.
“그래. 그럼 그 피를 흘리며 죽어봐. 길시언 왕자. 그 왕족의 피를! 그리고 휴리첼의 피가 새로운 왕족의 피로 맥박치게 되겠지.”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공식 명칭에는 항상 붙는 이름이 있다. 간첩이니까 그 정도는 알겠지?”
시오네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당신 폐태자는 왕족의 위치를 버리고 백성에게 내려온 자라는 건가?”
“천만에. 난 백성에게 내려간 적은 없다.”
“뭐라고?”
“난 무엇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엇을 버린 적은 없다. 내가 버린 것은 내가 아닌 것. 그리고 난 버림으로써 나만을 남겨둘 수 있었다. 길시언. 모험가 길시언.”
길시언의 목소리가 우울해졌다.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먼지 날리는 길을 걷고 걸어 이곳에 선 폐태자. 그는 우리들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 처음 보는 여자가 날 죽이려 드는군. 나에게서 모험가 길시언이 아니라 내가 버린 태자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를 받아내려 고 하는군.”
시오네는 입술 끝을 올렸다.
“너희 나라의 핸드레이크가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간은, 그렇군.”
그러나 길시언은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를 앞으로 뻗어 시오네를 겨냥했다. 시오네는 마치 그 검끝이 자신의 가슴에 닿은 것인 양 흠칫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폐태자 길시언 바이서스도 나 모험가 길시언이 지키겠다. 그리고, 내 동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험가 길시언으로서 지키겠다. 어둠의 레이디여. 그대 앞에 선 자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떤 자인지.”
길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가슴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놓듯이 격렬하게 외쳤다.
“확인하라!”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파고든다. 돈다. 뭐지? 입에서 어떤 말이 돈다. 들었던 말인데.
길시언은 나의 왕이었다.
지독한 고통도, 자꾸 흐려지는 눈앞도, 그리고 복받치는 감정의 오열도 사라졌다. 그는 날 위해 저기 서 있는 기사 중의 기사, 그는 스스로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인물이었으며, 그로써 능히 나의 왕이다. 밤의 어둠도, 고통의 어둠도, 이 참혹한 현실이 가져다주는 어둠 중의 어둠도 내 눈에서 나의 왕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우, 제기랄! 귓가가 화끈해지는걸. 그게 그거였군. 하하하.
“나의… 왕이라고…………? 하, 하하하…….”
“뭐라고? 후치. 이런, 말하지 마!”
엑셀핸드의 굵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안 돼. 이걸 놔. 나의 왕이 저곳에 서 있어. 난 일어나야 돼. 그를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냐. 그와 함께 서기 위 해서 일어나야 돼. 나의 왕과 함께 서야 돼. 난 비로소 300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전설의 대마법사와 하나된 감정에 휩싸였다. 빌어먹을! 왕을 찾았는데 난 이렇게 쓰 러져 누워 있잖아. 내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는 왕이 아니야. 왕일지는 몰라도 나의 왕은 아니야. 난 일어나야 돼.
그러나 몸은 자꾸 아래로 늘어질 뿐이다.
시오네는 양팔을 조금 들어보이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자인지는 몰라. 그리고 알 필요도 없어. 죽을 자의 신상 명세를 모으는 저급한 취향은 없지.”
그리고 시오네는 레이피어를 뽑아들었다. 넥슨이 말했다.
“시오네. 지금 무슨…….”
시오네는 말했다.
“내 일을 할 따름이야. 길시언 바이서스의 제거.”
“그래. 알았다.”
시오네는 앞으로 걸어나왔다. 길시언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서서 우리를 가리고 있었다.
“당신은 죽는 것이 좋겠어. 길시언 왕자.”
“그렇더라도, 지금 여기선 안 돼.”
시오네는 킬킬거리며 레이피어로 허공을 몇 번 베었다.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검의 잔영이 흉포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길시언은 마치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너무 많이 본 뒷모습이다. 우리 고향에선 꽤 흔하지. 가장 커다란 사람은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야. 내 앞에 서서 날 가려주는 저 등. 안 돼. 이젠 지겹다. 더 이상 등 뒤에 숨을 수는 없어. 일어나야 돼.
“일어나야…………!”
그러나 내 몸은 내 의지를 무시하고 다시 힘없이 엑셀핸드의 품에 쓰러져버렸다. 길시언은 굳어버린 양 저곳에 서 있는데. 빌어먹을! 내가 왕 시켜줬잖아! 인정해 줬 잖아. 뒤로 돌아 도망가!
시오네는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죽어.”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패를 힘있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시오네는 곧 앞으로 달려나오려 했다. 그때였다.
“멈춰요.”
누구의 목소리지?
시오네는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달려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몇 발 물러났다. 어디선가 들려온 그 목소리는 밤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다. 희미하고 부드러 운 목소리다. 타는 목으로 간신히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본다. 그러나 어둡다. 캄캄하다. 내가 눈을 감았나?
“그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오네는 레이피어를 거두었다. 길시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지금, 둘은 싸울 수 없었다. 시오네는 이를 갈았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안 보이기에 어디 숨어 있는가 생각했지만, 아직도 나타나지 않아서 여기 없는 줄 알았지. 유피넬의 어린 자식. 내 일을 방해하는 것이 벌써 두 번째야.”
“미안하군요.”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은 조용히 걸어왔다.
침침한 골목의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처럼 이루릴은 느닷없이 나타났다. 등에는 배낭, 여전히 왼쪽에만 두 개의 검을 차고, 밤바람을 닮아버린 그 검은 머릿결은 풍부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마침내 평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그러나 이루릴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 고 있었다. 저 멀리 인간 아닌 그녀가 우리 인간들의 싸움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세, 세레니얼 양!”
칼은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반가움은 엄청났다. 엑셀핸드의 놀람에 찬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았다. 이루릴이 똑바로 보였다. 네리아도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릴! 이루릴! 돌아왔군요! 돌아왔어요!”
“이루……릴 양.”
네리아에게 안겨 있는 샌슨은 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왔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목례를 보내고는 곧장 시오네에게 말했다.
“내 친구들에게 대단히 처참한 일을 저질렀군요.”
시오네는 웃었다. 그녀는 레이피어를 빙글 돌려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때리기 시작했다.
“친구라. 당신, 고귀한 유피넬의 어린 자식 맞는가?”
이루릴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위로 떠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일이 날 슬프게 만드는 이상 방해하지 않을 수 없군요.”
“천만에. 미안할 것 없어. 나타나줘서 너무 기쁘군.”
“그랬나요?”
시오네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서 있었다.
“한꺼번에 처리해 주지.”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가세요.”
“싫다면?”
“당신과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친구 아닌 자와 한자리에 길게 있고 싶지 않아요. 분노의 강이 흘러 증오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 같습니다. 가게 만들겠어요.” “만들어보시지.”
“알겠습니다.”
이루릴은 가볍게 말하며 손을 앞에 모았다. 시오네는 흠칫할 사이도 얻지 못했다. 이루릴의 평온한 동작은 모든 사람에게 주의를 받지 못했고, 그래서 별로 빠르지도 않은 그 동작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작되어 버렸다.
“만물을 받치는 힘…………”
“캐스팅을! 어딜!”
시오네는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루릴은 스르르 뒤로 걷기 시작했다. 시오네의 날카로운 공격은 밤바람은 끊었으되 이루릴의 동선을 끊지는 못
했다. 넥슨과 마부가 뜻모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이루릴은 여전히 뒤로 스르르 움직이며 끝까지 캐스트했다.
“만물의 아래에 있으되 가장 아름다운 것의 위에 있는 자여. 파멸을 통해 영생을 구가하는, 파괴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힘이여. 혼돈 속으로 불타올라 끝까지 나아가라.”
푸화화화화악!
난 까무라치고 말았다.
숲이다.
숲을 걸어가고 있다. 내 앞의 나무에서 제미니가 머리를 내민다.
“후치 네드발?”
“제미니?”
“에헤헤.”
제미니는 나무 뒤에서 앞으로 훌쩍 뛰어나왔다. 그러다가 낙엽을 밟고 미끄러졌다. 콰당. 나는 크게 웃어버렸다. 제미니는 새빨개진 볼을 부풀리더니 앉은 채로 낙엽 을 거머쥐어 내게 집어던졌다. 그러나 낙엽은 바람을 타고 흩날려 제미니의 어깨와 머리에 떨어졌다.
“이잇추!”
제미니는 코를 간지럽히는 낙엽에 재채기를 했다. 난 껄껄 웃으며 제미니에게 다가갔다. 제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녀는 머리카락에 커다란 낙엽을 붙인 채 내게 말했다.
“왕을 찾았다고?”
“응.”
난 제미니의 머리에 붙은 낙엽을 털어주었다. 제미니는 움찔하다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왕은 어떤 분인데?”
난 멍청하게 닐시언 전하의 모습을 설명하진 않았다.
“왕이란, 뒷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야.”
제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뒷모습?”
“뒷모습은…………, 내 앞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 내게 거짓된 표정을 말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난 그 뒤를 따라 걸어가.” “호호호.”
제미니는 웃더니 그대로 반 바퀴 휙 돌았다. 치마가 가볍게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제미니는 뒤를 보인 채 낭랑하게 말했다. “나안 여왕이다아!”
난 빙긋 웃으며 제미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건 안 되지. 뒤통수에 키스할 수는 없으니까.”
“꺄하하하.”
그리고 난 제미니를 다시 돌렸다. 제미니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칠흑 같은 머릿결 사이로 시오네의 창백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시오네는 내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송곳니가 내 목 을 파고든다.
“으아아아!”
쾅! 으잉? 정수리에 느껴지는 이 감각은 뭐지?
“아이고, 코야! 야, 이 망할 자식아!”
엑셀핸드는 코를 움켜쥐고 펄쩍펄쩍 뛰더니 곧 도끼자루로 날 후려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곧 하얀 손이 다가오며 엑셀핸드를 말렸다.
“그만하세요. 엑셀핸드. 후치는 환자예요.”
그 하얀 손의 임자는 길쭉한 귀 사이에 하얀 얼굴이 맞춤하게 자리잡고 있는 미인이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이루릴…………, 이루릴?”
“괜찮아요, 후치?”
방 안은 아직 캄캄했다. 왠지 새벽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루릴의 칠흑 같은 검은 머리는 촛불 빛을 반사하며 붉은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캄캄한 공허 속에서 여전히 초점을 맞추어 보기 힘들 정도로 투명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다.
“이루릴? 반가워요. 돌아왔군요!”
“예. 후치. 다시 만나서 반갑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이루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루릴이 미간을 조금 찌푸리지 않았다면 못 알아차릴 뻔했다. 난 황급히 이루릴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아!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을 보니 누워 있는 샌슨과 그 옆에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내게 눈을 찡긋 하고는 샌슨의 모포를 끌어올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다른 분들은 다 완쾌되셨어요. 그런데 아프나이델 씨가 좀 걱정스럽군요.”
“아프나이델이? 왜지요?”
“패밀리어의 죽음은 그 마법사에게 커다란 충격을 줍니다. 어떻게 보자면 패밀리어는 정신이 직접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나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넥슨이 그 박쥐……
그 순간 나는 아까의 처절했던 싸움을 떠올렸다. 어떻게 되었지?
“그런데 넥슨은? 그 뱀파이어는?”
“도망갔어요.”
“당신이 쫓아내었어요?”
“예.”
이루릴은 짤막하게 말했다. 별로 설명이 필요치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엑셀핸드가 흥분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 굉장했어, 후치. 땅이 좌악 갈라지면서 수맥 터지듯이 불길이 솟구쳐오르더라고! 그 뱀파이어는 머리끝이 그슬려서는 어마 뜨거라 달아나버렸지! 허허허.”
“아. 네. 그럼 아프나이델 이외엔 모두들 괜찮은 거군요.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어떻게 되는 거죠?”
“정신적으로 충격을 입은 거니까, 달리 치료는 필요없어요. 그 스스로 이겨내어야 됩니다.”
“그렇군요.”
난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니, 뭐가요.”
“우리가 목숨이 위험할 때 나타나서 우릴 도와주었군요.”
이루릴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친구……이지 않아요?”
난 그만 웃었다. 어두워 더 작아보이는 방 안에 앉아 약간 당황한 엘프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날 유쾌하게 만들었다.
“맞아요. 친구죠. 난 당신이 친구라서, 당신이 친구라는 그 사실이 고맙고 행복해요.”
“아, 그런 건가요? 저도 그래요.”
이루릴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엑셀핸드가 이마를 마구 긁어대기 시작했다.
“원 참! 그런 얼굴로 잘도 그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하는구먼!”
저쪽에서 네리아가 다가왔다. 네리아는 엑셀핸드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
“에헤. 드워프 아저씨. 좀 낯간지러우면 어때요. 모두 안전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에요.”
엑셀핸드는 기겁하며 네리아의 팔을 뿌리쳤고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엑셀핸드는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어헛! 으흠, 험! 뭐, 나도 감사하지. 이루릴.”
“고맙습니다. 엑셀핸드.”
난 그제야 피로를 느끼며 다시 드러누웠다. 이루릴은 모포를 끌어올려 날 덮어주었다. 난 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풀리니까 무지 피곤하네요. 음. 이루릴?”
“말해요, 후치.”
“갔던 일은 잘 되었어요? 일찍 돌아왔군요.”
“예. 일이 잘 끝나서 일찍 돌아올 수 있었어요. 뭐, 그것보단 여러분이 빨리 보고 싶어서..
이루릴은 자신의 말에 흠칫했다.
“아…………, 예. 여러분들을 빨리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발걸음이 바빠졌어요.”
그 말에 엑셀핸드는 온몸을 긁으며 침대 가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입을 가리며 킬킬 웃었다. 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우리는 그 동안 엉망이었어요.”
“예. 후치가 잠든 사이에 네리아 양과 엑셀핸드 씨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난 거의 비몽사몽간에 말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엑셀핸드는 치가 떨리는 표정으로 전해 주길, 난 이루릴이 무지무지 보고 싶었으며 이루릴이 없어서 너무너 무 슬펐다는 말을 아주 애처롭게 말했던 모양이다. 에이, 설마? 아무래도 엑셀핸드는 좀 과장벽이 있어.
“아프나이델의 상태가 참 걱정이로군.”
칼은 묵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보다는 창 밖을 바라보며 거북한 기분을 느끼느라 바빴다.
여관 홀에 나 있는 창문에는 수도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서는 우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가 밤중에 이 여관에서 벌인 대활약의 소문은 엄청난 속도로 수 도 전역에 몰아친 모양이다. 길시언이 전해 주길 이미 어젯밤에 수도 경비 대원들이 가득 다녀갔다고 한다. 그들은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지명 수배자인 넥슨 휴 리첼의 공격으로부터 명예의 기사들인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개 분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유니콘 인의 주인장 리테들은 우거지상이 되었다. 수도 경비 대원들이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는 여관은, 여행객들의 고려 대상이 되기엔 마땅찮은 점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길시언은 왕자의 명령으로 수도 경비 대원들을 모조리 쫓아보냈다. 길시언은 정말 편리할 때만 왕자로서 활동하는군. 헤헷. 모험가 길시언이라면서? 그러나 그것은 선량한 마음의 표현이었고 리테들은 크게 기뻐했다.
수도 경비 대원들은 난색을 표명했지만 이미 나버린 소문의 위력 때문에라도 그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이란 주로 이루릴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었다. 어 쨌든 여관 앞의 대로에는 어젯밤의 엄청난 난투의 흔적이 잘 남아 있으니까 그 소문도 탓할 바는 못 된다. 난 오늘 아침에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포석이 단단히 깔린 수도의 대로에 깊이 5큐빗 이상의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주위의 포석들은 강한 열을 받아 녹아버렸다. 그리고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 조금 떨어진 포석들은 가루가 되다시피 부서져 있었고 주위의 건물 몇 채엔 어젯밤의 치열한 불꽃에 의해 돌벽이 녹아내리다가 굳은 자취까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 바깥에는 수도 시민들이 가득 몰려와 그 광경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빛의 탑의 고명한 마스터들 몇 명도 몰려와서는 그 흔적을 검토하면 서 노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밖에서 그 고명한 마스터들이 질러대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기로 했고 리테들은 치열한 상술을 발휘하여 밖으로 무수한 맥주잔을 나르고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케이지! 이 흔적이 어떻게 미티어 스웜이란 말인가!”
“이 덜 떨어진 대장장이 피리자니옵스야! 그럼 무슨 마법으로 이 놀라운 흔적을 설명하겠느냐!”
“뭐라고? 말 다했느냐! 이 수염도 없는 엉터리 늙은이가!”
“크아아악! 이놈아! 수염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랬지!”
음………, 그 고명한 마스터들이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군. 그들이 가장 간단한 방법, 즉 여관으로 들어와 이루릴에게 물어본다는 간단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해서 저 러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루릴은 아프나이델을 치료하고 있어 바쁜 것이다.
샌슨은 몸에 감긴 붕대가 간지러워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긁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네리아가 완벽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은근슬쩍 상처를 긁으려 했던 샌슨은 네리아에게 손등을 찰싹 얻어맞고는 축 처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루릴 양이 말하길 정신적 충격이라니까 곧 괜찮아지겠지요.”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마법사라는 사람들은 정신이 대단히 섬세하다네. 마법사들이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들 같은 사람의 그것과는 훨씬 다른 수준의 이야기일세. 아프 나이델 씨가 한 농담이 있지 않은가. 정신병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종은 고위 마법사라는.”
“흠. 그게 그렇습니까.”
“그렇지. 드래곤 라자를 잃은 드래곤이 폭주한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들 들어보지 않았는가? 마법사와 패밀리어의 관계도 그것도 마찬가지라네. 정신적으로 강하 게 연결된 두 객체 중 하나에게 주어진 파멸은 다른 하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네.”
“아아………, 그렇군요.”
샌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상처 부위를 긁으려 시도하다가 이번엔 네리아에게 손등을 꼬집히고는 참으로 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길시언은 관자놀이를 긁 으며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넥슨 휴리첼은 다시 달아났습니다. 또 돌아올까요?”
“글쎄. 어젯밤엔 우리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 것 아닙니까. 이미 우리 뜻을 확실히 전했으니 또 돌아올 필요는 없겠지요.”
“복수는 어떻습니까.”
“그가 복수에 미쳐 자신의 처지, 쫓기고 있는 처지를 잊어버리는 멍청이는 아니기를 바랄 도리밖에.”
길시언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이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어쨌든 그는 복수 이외엔 우릴 굳이 처치할 필요는 없겠군요. 프림 블레이드를 탐내서 다가오지 않는다면…………, 누가 널 탐내! 탐내는 사람 있으면 그 냥 주겠다! 뭐야? 에, 어흠. 그럼 이루릴 양에게 부탁하여 우리 일을 진행해도 되겠군요.”
“예. 그런데 아프나이델 씨가 문제로군요.”
그때 쇠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전 괜찮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루릴의 부축을 받아가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엑셀핸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아니, 뭐 그저 그의 허벅지 정도를 붙잡은 거지만 그래도 그의 의도는 부축에 있었을 테니까 부축했다고 말해도 되겠지. 그가 의자에 앉자마자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어깨 를 두드리며 기뻐했다.
“다행이군! 이제 괜찮은가!”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의 조금 지나친 애정 표시에 몇 번 휘청거리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루릴이 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씨는 일단은 안전하시지만, 제 생각엔 요양을 취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가 듣기로 인간의 정신적 충격은 재발의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는데요.”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치가 되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고요.”
엑셀핸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참. 그 정신적인 충격이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건가?”
엑셀핸드는 곧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약한 미소를 지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은 우리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쉬도록 하세요.”
“죄송합니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때 이루릴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이라니요?”
“아, 예. 그것은……”
칼은 한참 동안 설명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가깝다는 말에 이루릴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드래곤 라자를 찾기 위해 그 붉은 머리 소녀를 찾아야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장시간에 걸쳐 설명한 다음 끝을 맺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세레니얼 양이 동물들에게 부탁하여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자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물들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우리는 모두 놀랐다. 칼은 입을 딱 벌리고는 뭐라 말도 못한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차분한 얼굴 그대로 설명했다.
“겨울철이 가깝습니다. 동물들에게 과중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계절에는 동물들에겐 생존 그 자체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허, 허나 그 드래곤 라자를 찾지 못한다면…….”
칼은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루릴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제가 붉은 머리의 소녀를 알고 있으니 더욱 부탁할 필요가 없겠지요.”
“예?”
칼은 거의 일어날 뻔했다. 우리들은 놀란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고 이루릴은 말했다.
“제가 델하파의 항구에 들른 것은 잘 아시겠지요?”
“아, 예? 예.”
“델하파의 항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그런 소녀를 보았습니다.”
“보셨다고요?”
“예.”
“잠깐, 저, 세레니얼 양은 델하파의 항구에 누구를 만나러 가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붉은 머리의 소녀입니까?”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델하파의 항구 주점에서 일하는 소녀였습니다. 네리아 양과 유사한 붉은 머리라서 인상이 깊었어요. 하지만 주점에서 일하는 소녀에게 뭘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가 할슈타일 후작의 딸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히 붉은 머리의 10대 후반 가량으로 보이는 소녀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그때 네리아가 손뼉을 딱 쳤다.
“역시! 이루릴은 멋져요! 우릴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구원해요. 하하하!”
“예? 아, 예.”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요. 드디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런 소녀를 찾았군요. 가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길시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델하파의 항구로 출발해야겠군요. 그런데…
“예? 왜 그러십니까?”
“델하파의 항구는 일스 공국의 땅입니다. 엘프이신 이루릴 양이라면 몰라도 우리들은 살그머니 국경을 넘는 것이…………, 그게 아니고! 국경 통과의 허락을 얻어야겠군 요.”
그러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
칼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난 밝은 얼굴이 되어 칼을 바라보았고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자. 짐을 챙깁시다. 델하파의 항구로 가서 그 항구의 소녀를 만나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