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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 동안 계속할 생각이지?”
네리아의 투덜거림. 샌슨은 정말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일부러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저렇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스카일램은 호위병들을 모조리 집합시켜 놓고는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우리 방의 베란다 에서 바라보기 좋은 위치였다. 게다가 스카일램은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고 있어서 베란다에 있는 우리들은 그의 앞에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과 똑같이 위축될 수 있 었다. 병사들은 밤중에 다른 나라의 알지 못하는 성의 연병장에 집합하게 되자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스카일램이 하도 윽박지르고 있어 감히 불평을 못한 채 꼼짝 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알았나! 여긴 우리나라가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란 말이다! 곧은 정신을 유지하고 눈을 크게 뜨고,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단 말이다! 군인의 자세가 뭐냐? 바다의 기운에 홀려버려 긴장감이 다 풀려가지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앗!”
스카일램의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에구. 머리 아픈 사람이에요.”
“그를 탓하진 말게. 퍼시발 군 자네의 실수일세.”
샌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가요?”
“그렇다네. 어쨌든 여긴 타국이고, 그래서 호위 대장의 신경은 베틀의 실만큼이나 팽팽해져 있을 걸세. 그런데 그의 소관이라 할 수 있는 운차이가 어처구니없이 사 라져버렸으니, 그가 얼마나 상심하고 불쾌해하겠는가. 자네의 실수야.”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아니고 이런 타국의 성에서 저렇게 병사들을 괴롭힌다는 것은………….”
칼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빨리 마쳐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라 망신이군.”
이루릴은 갈수록 혼동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미안합니다만 그렇다면 스카일램 씨의 잘못은 무엇이죠?”
“예?”
“운차이 씨는 분명 바이서스국의 전쟁 포로로서, 무관에 해당하는 스카일램 씨에게 그 신병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샌슨 씨의 잘못은 이해됩니다만, 스 카일램 씨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지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 스카일램 씨의 잘못이라는 것은 별로 대단치는 않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다른 나라에 와서 부하들을 공개적으로 꾸짖고 있지요.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좀 망신스럽군요.”
“부하들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까? 호위의 임무를 가볍게 취급했으니까요.”
“예. 하지만 조용히 꾸짖을 수도 있겠지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꼭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군요. 아무래도 제 자식 못나게 보이고 싶은 부모는 없지 않겠습 니까. 그러니 조용히 말해도………..”
“가식입니까?”
“예?”
“잘못된 것은 같은 집단 내에서 조용히 해결하고 외부에는 좋은 모습만을 보여줘야 된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좋은 모습이든 좋지 않은 모습이든 둘 다 진실이 아닌가요? 왜 가식을 보여줘야 되지요?”
“저 부하들이 부끄러워할 테니까요. 괴로움을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꾸짖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불쾌할 겁니다. 그런데 외국인이 구경하는 장소에 서 그런 일을 당하면…….”
칼은 설명하다가 그만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이런,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 했군요. 유피넬의 어린 자식에게 외국인이나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이해되지 않으시겠죠.”
“이해되지 않네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고, 칼 역시 머리를 마구 긁기 시작하는 네리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어떻게 말해도 이해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루릴은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더 열심히 관찰하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하군요.”
칼은 다시 책을 펴들었고 이루릴 역시 조용히 책을 펼쳤다. 도대체 저 둘은 저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부드럽게 해버리고 곧장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야? 이루릴이
이상하다기보다는 칼이 인간 같지가 않군. 난 김빠진 얼굴로 의자에서 다리를 쭉 뻗었고 샌슨은 생각에 잠겼다. 칼은 갑자기 책을 덮으며 말했다.
“퍼시발 군. 일러준 말은 잘 기억하겠지?”
생각에 잠겨 있던 샌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며 대답했다.
“예? 아, 예.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됐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칼은 손을 젓고 걸어갔다. 스카일램 호위 대장은 아직까지도 머뭇거리다가 한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정말 호위 대원들이 필요 없습니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저희들이야 뭐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일종의 여행객인 셈이죠. 사절은 칼이 아닙니까. 칼을 잘 부탁합니다.”
“하지만 제 임무에는 여러분들의 안전 보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스카일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운차이의 호송 마차로 걸어갔다.
“이봐, 운차이!”
운차이는 언제나 그러하듯 약간 시무룩해 보이면서도 차가운 얼굴을 내밀었다. 샌슨은 웃으며 말했다.
“바란 탄에 가거든 말 잘하고, 몸조심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고 이루릴은 나를 통해서 운차이에게 인사했다. 네리아는 콧방귀를 탕탕 뀌고는 여행길에 눈병에나 걸려버리라는 식의 축복을 해주었다. 운차이는 냉엄하게 웃으며 나를 통해 이루릴과 네리아에게 대답하고는 다시 마차 바닥에 주저앉았다.
실키안 레이크 기슭에서 우리는 떠나가는 칼과 운차이, 그리고 호위 대원들과 나우르첸 성에서 추가된 호위 대원들을 전송했다. 동녘에서는 바다에서 떠올라 길고 긴 하룻길의 여정을 시작한 태양, 그리고 서녘에는 푸른 물빛이 그윽한 호수. 칼 일행은 그 실키안 레이크 가장자리를 따라 멀리 사라져갔다. 언뜻언뜻 소나무들 사이 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했다.
샌슨은 팔을 좀 휘두르고는 가볍게 말했다.
“자, 가자. 신전으로!”
네리아는 웃으며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엉덩이를 짚으며 가볍게 뛰어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에 오르자 네리아는 말했다.
“얼마나 걸릴까?”
이루릴이 대답했다.
“오늘 하루를 달리면 오후 늦게나 저녁 무렵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그럼 해변을 달려봐요! 이랴아!”
네리아는 곧장 언덕의 기슭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뒤를 따랐고 나와 이루릴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네리아는 물거품이 깔렸다가 사라 지는 백사장으로 뛰어들었다. 백사장의 젖은 모래가 잠시 튀어오르고 나서, 곧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발 아래에서 물보라가 폭발적으로 튀어올랐다. 네리아는 비명 섞 인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하하!”
“우엣취!”
“젖은 채로 찬바람 맞으며 말을 달렸으니, 감기 안 걸렸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네리아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다시 기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샌슨은 투덜거리며 배낭에 묶어두었던 자신의 망토를 꺼내어 네리아에게 주었다. 네리아는 계속 기침 을 하면서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망토를 받아들었다.
“아으으……………. 떨, 떨린, 에, 엣추! 엣추!”
“안 그래도 신전으로 찾아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견뎌봐요.”
“으잉! 신전에 한 번 찾아가면, 서, 에추! 훌쩍. 석 달은 재수없는데.”
“그럼 신전 밖에 앉아 있든가.”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날 노려보다가 다시 거세게 기침을 했다. 에취! 에이취!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 우리는 일스 공국으로 넘어오기 전에 조사해 두었던 대로 길을 찾아가 마침내 테페리의 신전을 만날 수 있었다. 나우르첸에서 델하파로 접 어드는 길 중간쯤에 위치한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산등성이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테페리의 신전은 저무는 노을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붉은 색깔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평야는 이미 거뭇거뭇해지고 있 었지만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테페리의 신전은 아직껏 붉은색이었고 그래서 허공에 떠 있는 빛의 건물처럼 보였다.
네리아는 벅찬 표정으로 건물을 올려보았다.
“꽤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건물……, 에추!”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전으로 나 있는 소로를 따라 접어들었다.
석양이 산기슭의 신전을 비추는 시간이니, 아마도 오후 경전 봉독은 끝나고 저녁 식사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빵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신전 위로 엉성하지 만 단단하게 쌓아올린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랜드스톰처럼 우아하지는 않았고 잘못 본다면 마치 산촌의 장로 저택 정도로 착각할 수 도 있는 건물이었다. 이루릴은 방긋 웃었다.
“테페리의 신전답네요.”
“예?”
“문이 두 개예요.”
이루릴의 저 좋은 눈에는 벌써 신전 정문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이 두 개라고? 아, 이런.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가짜인가?
정말이었다. 오솔길의 경사가 완만해지며 신전이 가까이 오자 확실히 담장 정면에 있는 두 개의 문이 보였다. 갈림길의 신인 테페리였지? 문은 둘 다 단단한 나무문 으로 닫혀 있었다.
“왠지 둘 중 하나는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이런…………, 신의 지팡이들이 하는 일로 보기엔 왠지 장난 같다. 그렇지?”
나와 샌슨은 잡담을 나누며 두 개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디 보자.
“에, 에, 에추우! 오, 오른쪽이야. 훌쩍.”
우리는 모두 네리아를 돌아보았다. 네리아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문 손잡이가 닳은 정도로 알 수, 수, 에이치이!”
샌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오른쪽 문을 밀었다. 삐이이걱.
“놀라운데?”
그때 이루릴이 방긋 웃었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더니 왼쪽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쳐다보는 가운데 이루릴은 왼쪽 문을 밀었다. 삐이이걱. 열리네?
“한쪽이 옳다고 해서 다른 쪽이 그르게 되는 것은 아니겠죠.”
샌슨과 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다. 오른쪽 문이 더 많이, 많이, 에추!”
“오른손잡이가 많으니까 그렇겠죠.”
이루릴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고삐를 쥔 채 문으로 들어섰다. 샌슨은 감탄한 표정으로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재미있는걸. 일부러 문 두 개를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테고, 뭔가를 느끼라고 이렇게 만들었겠지?”
“뭔가가 느껴져?”
샌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맥 풀리는 어조로 말했다.
“문 하나가 고장났을 때 편리하겠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마당이 보였고 수련사들이 건물들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들이 문 두 개를 다 열고 들어서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 고 그들 뒤로 프리스트 한 명이 걸어나왔다. 팔뚝이 굵직한 그 프리스트는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산문에 들어선 손님들을 환영하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샌슨은 잠시 당황하다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루릴이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저희들은 지나가던 여행객들입니다. 날은 저물고 바람은 차가워 귀 신전의 지붕 아래 하룻밤을 유했으면 합니다.”
그 산적두목같이 생긴 프리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사들에게 말했다.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고 식사 수발 들거라.”
그때 샌슨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아, 저, 잠깐만요. 에…….”
그리고 샌슨은 자기 머리를 딱 치더니 갑자기 슈팅스타의 안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종이조각, 먹다가 쑤셔박아 둔 빵 덩어리와 햄 조각, 씻기 싫어서 대충 닦아 쑤셔박아 둔 컵이라든지 식기, 부러진 화살촉들 몇 개와 기름이 시커멓게 묻은 각종 주머니들이 테페리의 프리스트 앞에 선을 보이게 되었고 수련사들은 킬킬거 리기 시작했다. 나는 망신스러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네리아는 기침을 하면서 동시에 깔깔거리느라 결국 딸꾹질까지 하게 되어 몹시 괴로워했다.
간신히 샌슨은 칼라일 영지에서 사만다에게서 받아둔 소개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샌슨은 소개장에 묻은 빵가루와 기름 얼룩을 보고는 얼굴이 벌개졌다가 송구스럽 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소개장을 내밀자 프리스트는 먼저 참 한심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샌슨은 어쩔 줄 몰라했지만 프리스트는 별말 없이 소개장을 받아들여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어내려가던 프리스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우리 자매분의 소개장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품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
“아, 괜찮소. 편지는 마음을 전달하면 충분하오. 우리 종단의 친구로서 여러분들을 맞이합니다. 먼저 들어오셔서 노독을 푸시지요.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도록 하십
시다.”
“예. 감사합니다.”
수련사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충 손발을 씻고 나자 그들은 우리에게 방 두 개를 내어주었다. 샌슨과 내가 한 방, 그리고 이루릴과 네리아가 한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 배낭과 보따리를 던져두고 갑옷을 벗어두고 무기도 풀어둔 다음 잠시 기다리자 수련사들이 찾아왔다.
“오세요! 하루중 가장 중요한 행사를 할 시간입니다!”
샌슨의 얼굴을 보니 내 얼굴도 아마 저럴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수련사를 바라보다가 뭐라고 말도 못한 채 일어났다. 수련사는 싱 글거리며 우리를 안내했다. 밖으로 나와 여자들이 있는 방 쪽을 보니 네리아는 보이지 않고 이루릴만 걸어나왔다.
“네리아는?”
“음식 생각이 없다고…………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아, 그래요. 흠. 아파도 잘 먹어야 될 텐데.”
우리들을 안내하던 수련사들이 말했다.
“아, 아까 그분, 안색이 좋지 않더군요. 감기입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흠. 그럼 식사가 끝나고 약을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져다드리는 약을 드시면 아마 내일 아침엔 봄날 망아지만큼이나 건강해지실 겁니다. 하하 하.”
샌슨은 간신히 감사를 표시했다. 봄날 망아지? 신전에서 사용되는 어휘치곤 조금 저속하군. 봄날 망아지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바람 피우느라 정신 없는 여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도 그럴까?
식당 안의 모습은 역시 산 위의 신전다운 분위기였다. 사방 벽에는 나무 기둥들이 드러나 보였고 벽은 두꺼웠지만 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저 거대한 오두막 정도 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프리스트들의 분위기는 별로 아늑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크게 낄낄거리며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 들어간 수련사 역시 들어가 자마자 웃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봐! 좀 비키라고! 하하. 손님들 모셔왔어!”
“여! 어서들 오세요!”
삽시간에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나왔고 그래서 우리는 사방에 대고 절을 해야 했다. 잠시 후 우리들은 종단의 친구로서 신전의 하이 프리스트와 같은 테이블로 안 내되었고 거기서 처음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뵙게 되었다.
“프리스티스 사만다의 소개장은 보았소. 난 링거스트라 하오.”
샌슨은 눈치 있게도 ‘안녕하쇼, 링거스트 씨. 어쩌고 하지는 않았다. 경험이란, 결국 시간이란 무서운 거다.
“예, 하이 프리스트. 황야의 방랑자에게 베풀어주신 귀신전의 우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 웃으며 우리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간단한 인사말들을 주고받았다. 물론 간단한 인사말마저도 거의 고함에 가깝게 큰 소리로 나누어야 했다. 이게 신전인가? 난 크게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로 용맹 무비한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수련사들을 보고는 얼이 빠져버렸다. 그 옆에선 젊은 프리스트 하나가 껄껄거리 며 응원까지 하고 있었다. 허어, 참.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한 수련사가 식탁 위로 뛰어올라 다른 수련사에게 달려들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근엄한 얼굴의 프리스트는 근엄하게 팔을 뻗어 수련사의 다 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수련사는 식탁 위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 모습을 본 주위의 수련사들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난 샌슨에게 말했다. “언제 달아날까?”
“밥은 먹고서………… 달아나고 싶은데…………….”
샌슨은 재빨리 빵을 입 안에 쑤셔넣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눈 앞에 보이는 음식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참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는 것을 본 하 이 프리스트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주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조용히 해! 이야기 중이잖아!”
그러고는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 이 나라에는 무슨 용무로 찾아오시었소?”
샌슨은 재빨리 빵을 삼키고는 가슴을 좀 두드리고 말했다.
“아, 예. 저희는 바이서스의 사절단을 따라 이 나라에 왔습니다만 저희들에겐 따로 개인적인 용무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저희들의 용무입 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사절단을 따라왔다는 말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말했다.
“누군가를 찾아왔다고? 흐음.”
“예. 바로 그 일로 테페리의 신전의 조력을 원합니다만.”
“우리가 도와드릴 것이 있소? 말씀해 보시오.”
“테페리의 성직자들 중 한 분을 모셔갔으면 하는데요.”
이것이 칼이 샌슨에게 말한 계획이다.
우리들은 드래곤도, 드래곤 라자도 아니므로 그 붉은 머리 소녀가 과연 할슈타일 가문의 딸인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테페리의 성직자들은 둘 중 하나일 경우 맞 출 수 있는 권능이 있다. 따라서 테페리의 성직자 한 분을 모셔가서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 소녀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드래곤 라자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식으 로 답이 둘 중 하나만 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칼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모험 동료가 필요하시다는 겁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내일 델하파의 항구로 갈 생각인데, 그곳에서 테페리의 지팡이에게 확인받을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 확인만 끝난다면 저희 들의 용무는 끝나며, 동행해 주신 성직자분은 다시 이 신전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늦어도 모레쯤까지만 저희들과 동행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아……… 그래요? 내 알아보도록 하지.”
“아, 감사합니다.”
“이거 좀 마셔봐요. 프리스트가 직접 만들어준 약이에요. 이걸 마시면 봄날 망아지처럼 뛰게 된다던데요?”
네리아는 이상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다시 약사발을 바라보았다.
“아………… 훌쩍. 에추! 이빨이 부딪혀.”
모포 속에 틀어박혀 있던 네리아는 벌벌 떨면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먼저 약그릇을 보더니 곧 코를 찡그렸다.
“이거 색깔이 왜 이래? 냄새도 이상하고…….”
“약이 그럼 맛있게 보일 거 같아요? 어서 마셔요.”
네리아는 한손으로 코를 쥐더니 약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곧 볼을 크게 부풀렸다. 나는 기겁하며 말했다. “삼켜요오!”
꿀꺽. 네리아는 간신히 약을 삼키고는 코를 놓았다. 그녀는 곧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으아, 아, 에엑, 너무 써.”
그러자 샌슨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약효가 좋은 모양이다.”
이루릴은 방긋 웃으며 배낭을 뒤지더니 곧 엄청난 것을 꺼내어 네리아에게 내밀었다. 네리아는 환호를 올렸다.
“설탕이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요. 속 버려요.”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서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샌슨은 피식거리며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하는 거 보니 내일 당장 출발해도 무리 없겠군.”
쩝쩝거리며 손가락을 핥던 네리아는 곧 너무 달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를 묶어서 이루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래, 뭐래? 이추! 성직자 한 사람 내어주겠대? 훌쩍.”
“음. 하이 프리스트를 뵈었어. 알아본다고 하시더군.”
“언제 대답해 주겠대?”
“그건 모르겠어.”
그때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리아가 말했다.
“들어오세………추우!”
문이 열리면서 하이 프리스트와 젊은 프리스트 한 명이 들어섰다. 젊은 프리스트는 약 20대 중반쯤의 흑발 머리가 산뜻한 사나이였다. 쭉 찢어진 눈이 장난기 있게 생긴 것과 계속 싱글거리고 있는 입매가 특이할 뿐 나머지는 평범한 인상의 젊은이였다. 입고 있는 옷이 프리스트의 사제복이 아니라 수련사의 사제복이었으면 더 어 울릴 듯한데.
하이 프리스트는 들어서더니 먼저 네리아에게 목례하고는 말했다.
“아, 이분이 편찮으시다는 그 동료분이군요. 좀 어떠십니까?”
네리아는 재빨리 설탕과 침 범벅인 손을 아래로 숨기며 고개를 까딱했다.
“훠얼씬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옆에 서 있는 젊은 프리스트를 가리켰다.
“이 녀석은 간신히 테페리의 지팡이 흉내는 내니까 데려가시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놈을 좀 세상으로 쫓아내려고 고심을 하고 있던 참인 데 퍽 잘되었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좀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윽. 소개 말이 좀 괴이하다. 그런데 저 젊은 프리스트는 왠지 낯이 익은데? 아, 그렇군. 아까 저녁 시간에 수련사들의 칼싸움을 구경하며 박수치던 그 프리스트다. 샌슨은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고민할 사이는 없었다. 그 젊은 프리스트가 먼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남자 둘에 여자 둘이라.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면 짝이 맞지 않잖아요.”
따악! 저건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하이 프리스트의 강맹한 주먹이 그 젊은 프리스트의 뒤통수에 경쾌하게 날아가 부딪혔다. 젊은 프리스트는 뒤통수를 움켜쥐고 팔 짝팔짝 뛰었으며 하이 프리스트는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얼이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시는 바와 같은 놈이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샌슨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 죄송합니다만 프리스트니까 당연히 테페리의 권능에 닿아 계시겠지요?”
그러자 젊은 프리스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음. 맞춰볼까요? 당신은 틀림없이 남자군요. 그리고 미혼이고, 애인은 있고, 오른손잡이군요.”
샌슨은 ‘남자군요.’에서는 맥 풀린 표정을 지었다가 그 뒤로 가면서 점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지요?”
“남자라는 거야 보면 알고, 결혼 반지가 없으니 미혼이고, 그대신 목에 반지가 있으니 애인은 있고, 검을 차는 고리가 혁대 왼쪽에 있으니 오른손잡이지요.”
샌슨은 한층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고 하이 프리스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네리아가 냉큼 말했다.
“이거 보세요. 그럼 이거 맞춰보세요. 이추! 저기 벽에 기대어 있는 트라이던트 보이죠? 저게 여기 청년의 것일까요, 아니면 소년의 것일까요?”
젊은 프리스트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정답. 내 것이니까.”
네리아는 히죽 웃더니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하나 꺼내었다. 그녀는 동전을 위로 던졌다가 받아서 손으로 가리고는 말했다.
“앞면인가요, 에취! 뒷면인가요?”
젊은 프리스트는 역시 웃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뭐야? 그러자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손을 치웠다. 손에는 동전이 없었다. 손 빠르네. 어디로 빼냈지? 젊은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리아에게 다가갔다. 네리아 가 빤히 바라보는 가운데 젊은 프리스트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저 친구는 기도하면서도 싱글거리네? 갑자기 그의 손에서 빛이 떠올랐다. 나와 샌슨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네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라지 마세요.”
그는 네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에서 빛이 사라졌다. 네리아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얼굴을 환하게 폈다.
“기침이 안 나와! 콧물도 안 나오고.”
나와 샌슨은 감탄한 얼굴로 그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이 조용히 말했다.
“테페리의 권능에 닿아 계시는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소. 정말 테페리의 불행이지.”
고개를 끄덕여야 되나?
테페리의 불행이라는 그 젊은 프리스트는 자신을 제레인트 침버라고 소개했다. 제레인트는 끝없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 그렇잖아도 이 신전의 밥 축내기 싫어서 순례 여행이나 떠날까 생각 중이었죠. 멋진 모험가분들과 함께 출발하게 되어 기분 좋습니다.”
샌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우리들은 모험가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그저 제레인트 님께서 델하파의 항구에서 무엇을 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 후에는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갈 겁 “니다.”
“그래요? 멋지군요! 나도 바이서스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페어리퀸과 핸드레이크의 전설이 숨쉬는 땅에는 매력이 있어요. 빌붙는 거 같습니다만, 나도 도움이 될 겁 니다. 바이서스까지만 좀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그 후에는 포교 활동을 빙자하여 유람이나 다닐 생각입니다. 바이서스는 아름답겠죠? 짠바람은 이제 지겹습니다. 바 이서스는 아마도 초목의 향기가 나는 땅일 것 같은데.”
“예? 아…… 예.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바이서스는, 제 생각엔 아름다운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쁘군요. 드디어 레브네인 호수를 보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산중에 펼쳐진 바다요, 땅에 떨어진 하늘의 거울이라던가요? 정말 기대됩니다. 바이서스에는 테페리의 신자들이 많습니까? 종단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그쪽으로의 포교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
“예. 그렇잖아도 저희들은 테페리의 프리스티스의 소개를 받고 찾아온 길입니다.”
“멋지군요! 신의 지팡이가 당신들을 나에게 안내하고, 당신들은 날 모험 속으로 안내하겠군요!”
“아, 우리들은 그저………….”
“야! 멋진 검이군요. 그렇지. 모험가들은 무기를 가지고 다녀야 되지요? 어디 보자. 난 무슨 무기를 들고 나간다? 다룰 줄 아는 무기가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 샌슨 은 전사지요? 무기 좀 골라주시겠습니까?”
“예? 아, 그렇게 해드릴 수 있긴 합니다만, 어디서 말입니까?”
“창고에 무기 비슷한 것들이 몇 개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 숨어서 술 마시다가 본 것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네. 따라오세요!”
그리고 제레인트는 곧장 샌슨을 잡아끌듯이 하고 달려나가 버렸다. 원참. 정신 사나운 프리스트로다. 네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드러누운 채 킬킬거렸다.
“저 사람과 함께하게 된 이상……… 나 앞으로 말수가 줄어들 것 같아.”
“하. 그렇군요.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난 이만 내 방에 가볼게요.”
이루릴과 네리아에게 인사를 보내고 내 방으로 돌아와 드러누웠다. 신전의 침대라기보다는 왠지 고향 마을에 있는 우리집의 침대 같다. 나무로 튼튼하게 속을 채우 고 짚으로 매트리스를 만들고 이끼를 잘 깐 다음 천으로 덮는, 완전 시골식의 침대였다. 흐음. 이런 건 정말 오래간만이야.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에 요란한 소리가 나며 샌슨과 제레인트가 우리 방에 들어섰다. 제레인트는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후치라고 했나? 봐. 이거 나에게 어울리냐?”
난 눈을 부비며 일어났고 곧 폭소를 터뜨렸다. 제레인트는 이 컴컴한 신전의 방 안에 황야의 분위기, 즉 거친 황야에서 드래곤과 대치중인 전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 었다. 굉장해, 어떻게 저런 무기를 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지? 제레인트는 양손에 하나씩 블랙잭을 들고서는 팔을 거창하게 펴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블랙잭을 들고 드래곤과 대치라. 나쁠 건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여행길에 목숨을 담보하게 되는 무기로는 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제레인트는 여 러 가지 포즈를 잡아보면서 물었다.
“어때? 블랙잭의 제레인트라면 어떨까?”
나는 그런 황당한 칭호를 불러주기에 앞서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도대체 어쩌자고 저걸 골랐지?”
“메이스나 플레일 멋진 것이 제법 되던데, 제레인트 씨가 도통 들지를 못하더군.”
난 한숨을 쉬고는 제레인트에게 평했다.
“그거, 괜찮기는 한데 별로 도움은 안 되겠어요.”
“다른 건 무거워서 안 되겠던데?”
“그걸 쓰려면 몸이 보통 빨라서는 안 될 텐데. 제레인트 씨는 빠르게 몬스터의 뒤로 다가가서 그걸로 뒤통수를 후려칠 자신이 있어요?”
“앗! 그렇구나! 이건 짧아서 접근해서 써야 되는 거지? 샌슨 씨, 갑시다!”
샌슨은 쓰다 달다 말도 못하고 또다시 제레인트에게 끌려갔다. 잠도 다 달아나버렸군. 난 제레인트의 무기 고르기 장면이나 구경할까 해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과연 제레인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신전의 구석에 있는 창고였다. 곡식 자루로 보이는 자루들이 쌓여 있었고 갖가지 약초무더기들과 여러가지 주머니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어 창고 특유의 그윽한 냄새가 났다. 제레인트는 램프에 불을 붙이더니 농기구들과 함께 몇 가지의 무기들이 걸려 있는 곳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갔다. 샌슨은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역시 이게 제일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나와 제레인트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샌슨이 가볍게 들어올린 것은 아무리봐도 중량이 20파운드는 되어 보이는 메이스였다. 원 참. 난 샌슨에게 손을 내밀어 그 메이스를 받으려다가 발등 찍을 뻔했다.
“제레인트 씨는 샌슨처럼 오거가 아니니까………… 역시 무기는 긴 게 좋지. 제레인트. 저 스태프 어때요?”
“그래? 어디 들어볼까?”
제레인트는 씩씩하게 기다란 스태프를 들어올려 휘두르다가 곧 천장에 매달린 약초 무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구시렁거리며 약초를 그러모아 다 시 묶어 천장에 매달기 시작했다. 그 소동을 부린 탓에 곧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누구냐?”
“아, 접니다. 제레인트.”
“또 거기서 술 마시고 춤 추는 게냐?”
나와 샌슨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주 그러지는 않아요. 가끔.”
“그러시군요.”
창고 문을 밀면서 나타난 것은 늙수그레한 프리스트였다. 그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 의아해했고, 사정을 설명하자 곧 웃기 시작했다.
“제레인트 저놈은 농기구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오. 그런데 언감생심 무기라니. 당신들이 측은하구려. 진심으로 테페리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도해야겠소.” 제레인트는 자신을 정확히 지정하여 말하는 이 비난에도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을 동료로 하게 된 것 같다.
다음날 아침, 하이 프리스트는 제레인트와 함께 하게 된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 기도를 소집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우울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앉아 있게 되었다. 기도의 내용이야 우리들의 여행을 축원하며 제레인트가 훌륭한 테페리의 지팡이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는 교훈적이고도 품위 있는 내용이었지만, 제레인트는 싱글 거리며 도반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야, 제레인트. 모험 떠난다고?”
“그래, 자식아. 몇 년 후에 내 노래가 만들어질 거야.”
“음. 제목이 그럴 듯하겠지. 제레인트의 파멸, 아니면 대륙의 불행 제레인트.”
“부러우면 솔직히 부럽다고 말해, 임마.”
이 엄숙한 기도 순간에 제레인트는 쉴 새 없이 소곤거렸고 그래서 하이 프리스트는 대로한 표정으로 기도를 빨리 마쳤다. 제레인트는 기도가 끝난 것도 모르고 잡담 을 나누다가 다시 하이 프리스트의 신성한 응징을 받게 되었다. 따악!
수련사들과 프리스트들은 마당까지 나와서 우리들을 전송했다. 아무리봐도 제레인트와 함께하게 된 우리들의 불행을 슬퍼하는 듯한, 혹은 고소하다는 듯한 표정이 어서 왠지 전송 분위기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제레인트는 어디로 간 거지? 하이 프리스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레인트는 어디 있느냐?”
그때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여깁니다! 지금 갑니다!”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자 마구간에서 회색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오는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기가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 인트는 꿋꿋하게 노새를 끌고 와서는 하이 프리스트에게 당당히 말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이놈아, 그걸 가져가면 짐은 어떻게 나르라고!”
“제가 모험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틀림없이 대미궁의 침범자 제레인트, 혹은 아비스의 승리자 제레인트라고 불릴 겁니다. 혹은 발러의 불행 제레인트도 괜찮겠고. 그 럼 제가 그 고대의 보물들을 모조리 교단에 바칠 텐데, 이까짓 노새 한 마리가 문제인가요? 투자를 해야 얻는 것이 있죠.”
샌슨은 기이한 신음소리를 내었고 네리아는 갑자기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발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웃음을 참느라 그러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 제레인트는 이것을 옛노래에 나오는 모험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는 우리들이 그에게 대단히 현실적인 요구가 있어 찾아왔다는 것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우리들을 그저 모험 가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발러의 불행이라고? 맙소사. 아비스의 미궁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던 터커 일행이 생각나는군.
하이 프리스트는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져가라. 가져가.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네놈을 쫓아내는 대가로 노새 한 마리는 너무나 싸다. 가져가.”
“감사합니다!”
“멍청한 놈. 너 주려고 준비한 선물은 따로 있었는데 고작 노새냐. 그럼 그 노새를 가져가고…………….”
“어서 주세요.”
제레인트는 빠르게 손을 내밀었고 하이 프리스트는 그 손을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싱글거렸을 뿐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질린 표정으로 로브 자락에 손을 집어넣더니 곧 디바인 마크 하나를 꺼내었다. 제레인트의 눈이 커졌다.
하이 프리스트는 그 디바인 마크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세차게 건네주며 말했다.
“가지고 꺼져라!”
제레인트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놓인 디바인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건 사만다가 가지고 있던 것과 모양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보석으로 장식까지 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제레인트는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오, 맙소사!
“흑, 흐윽. 이건 하이 프리스트가 교단 본부에서 선사받으신… 감사합니다.”
“시끄럽다. 어서 가거라.”
“예. 하이 프리스트. 흐윽. 테페리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지팡이가 되겠습니다.”
“테페리의 분노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놈아.”
하이 프리스트의 눈시울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못 말릴 사람들이다. 산 위에 틀어박혀 사는, 게다가 종교적인 이유로 낙천적인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다른 수 련사들도 매우 감동적인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속물들에 가까운 나와 샌슨, 네리아는 매우 거북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물론 이루릴은 따스함 이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국 제레인트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얻어낸 노새에 올라타고는 우리들과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참으로 화창하고도 맑은 겨울날 아침, 괴상한 전송을 받으며 시작된 출발이었다.
“다시는 오지 마라!”
“오면 가만 두지 않는다!”
“꼭 돌아오려거든 로브를 뒤집어 입고 신발을 벗어 입에 물고 ‘날 때리시오.’라고 적힌 팻말을 등에 걸고 돌아와라!”
제레인트는 그러한 환송의 말에 일일이 응수해 주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어쨌든 간신히 출발은 하게 되었다. 샌슨은 앞으로 우리 여행에 있을 암담한 미래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노새가 끼여 있어서 어제처럼 빠르게 달리지는 못했다. 제레인트는 노새 위에서 스태프를 들고서 랜스 차지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지만 그런다고 해서 노새가 달려 줄 까닭은 없다. 그 고집스러워 보이는 회색 노새는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바로 옆에 자신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마들이 걷고 있든 어쩌든 상관하 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속력을 지키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쉼없이 이야기를 해서 우리는 알기 싫어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구의 보통 소년이었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새하얗게 질려버리는 어머니를 보며 세월을 헤던 것이 멈춰지곤 하던 항구의 소년. 어머니는 항상 출 항한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어느 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침대에 누웠다가 얼마 있지 않아 무덤 속에 몸을 누이게 되었다. 제레인트는 바다를 한 번 흘겨보고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산중의 테페리의 신전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결국 그의 인생 경험은 대개 테페리의 신전에서 읽은 책과 소설 등을 통한 간접 경험의 총괄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남성관은 소설 속의 남성들처럼 정의롭고 씩씩 한 불굴의 남성이었고 그의 여성관은 모두 아름답고 상냥하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매일처럼 계속된 신앙의 생활은 그의 그런 소박한 감성들을 더욱 고착시키는 결과 를 낳았다. 그에겐 생각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생각이 고착되는 것도 훨씬 간단한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신앙의 독특함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의 세계관과 괴리를 일으키는 현실의 모습에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의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결국 이런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다 착하고, 언제든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기회가 온다면 그들은 언제든 남을 도울 것이다.’
소박하지만 오히려 단단한 믿음이었다. 네리아는 미소를 지었지만, 노새에 타고 있는 제레인트는 네리아의 허리에 눈을 보내게 되는지라 네리아의 미소를 보지 못한 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확인할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궁금한데요.”
샌슨은 잠깐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더니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샌슨은 날 바라보았다.
“어쩔까?”
“말하지, 뭐. 내가 할까?”
“흠. 그래. 네가 잘못 말하면 내가 막지.”
“괜찮군.”
우리들의 대화를 들으며 제레인트의 눈은 빠르게 왔다갔다했다. 뭔가 대단히 재미난 일을 기대하는 악동의 눈이었다. 그것 참. 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에, 제레인트 씨.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어요?”
제레인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테페리의 이름으로! 그 드래곤을 잡으러 가는 거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려고……..”
“아니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어, 아냐? 아, 날 걱정해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깊은 땅 밑, 공포가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되어 휘몰아치는 드래곤의 굴에서라도 테페리의 가호가 나와 함께한 다. 사실대로 말해. 두려움 때문에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아.”
제레인트의 장엄한 얼굴이 퍽이나 아름다웠다.
“……당신은 안 두려울지 몰라도 우린 두려워요. 어쨌든 크라드메서에 대해서는 아는 모양이군요.”
“어, 그러니까 너희 나라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이그누스 드래곤 아니야?”
“예.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아시죠?”
“물론이지. 드래곤을 부리는 사람 아니야?”
“예? 어……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드래곤 라자가 없는 드래곤은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아시겠지요?”
“그래그래. 음. 이거 무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제레인트의 얼굴은 전혀 무서워하는 얼굴이 아니어서 그 말이 내겐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어쨌든 난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노새 위의 프리스트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크라드메서가 조만간에 다시 활동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레인트는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제레인트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게 아니고! 크라드메서가 벌써 일어날 까닭이 없어. 크라드메서가 사람처럼 불면증이라도 걸렸단 말이야?”
이번엔 나와 샌슨이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샌슨은 당황한 얼굴로 제레인트에게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레인트 씨의 생각으로는 수면기가 너무 짧다는 말입니까?”
“예. 수면기에 들어선 것이 언제라고 벌써 일어나다니………… 아! 그래서 드래곤 라자를 찾으시는 거군요? 알았습니다. 이해했습니다. 흠. 그러므로 제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난 팔을 마구 휘둘러 제레인트의 말을 막고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제레인트 씨가 이해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우린 아직 이해하지 못했어요.”
“뭐가?”
“크라드메서가 벌써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요?”
“응. 말이 안 되지. 크라드메서가 어떤 드래곤인데 벌써 활동기에 들어가?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지.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나는 거겠지.” “존재를…… 느낀다?”
제레인트는 우리들의 얼굴을 전부 한 번씩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모양이네요?”
“더 슬픈 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거지요. 도대체 무슨 말이죠?”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 크라드메서가 깨어날 때가 아닌데도 깨어난다는 것은, 드래곤 라자가 그를 부른다는 말이잖아?”
“드래곤 라자가 부른다? 그렇다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벌써 대륙에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뭐. 어? 그럼 당신들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는 거 아니신가?”
“마, 맞기는 맞는데 순서가 반대네요.”
“순서가 반대라고?”
“우리는 크라드메서가 깨어나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드래곤 라자를 찾는 겁니다.”
제레인트는 기분좋게 웃었다.
“아, 그래? 순서는 반대지만 결과는 같네. 그게 바로 테페리의 갈림길이지! 갈림길은 갈림길 그 자체이지 결과가 아니야. 갈림길 때문에 결과를 잊으면 곤란하지. 우 리 신전에 정문이 두 개 있던 것 기억나나?”
제레인트의 만사 태평식의 웃음을 뚫고 샌슨이 다급하게 질문했다.
“잠깐만요, 제레인트 씨.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는 벌써 자신이 드래곤 라자인 것을 알고서 드래곤을 부른다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겠죠. 그 라자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는 못하겠지요. 오히려 잠들어 있던 크라드메서가 그 라자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난다는 것이죠.”
“아, 그렇습니까?”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문제가 복잡해지는군요.”
우리는 모두 이루릴을 쳐다보았다. 이루릴은 생각을 하며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다름아닌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라면…………, 그는 깨어나자마자 드래곤 라자를 찾아가겠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찾을 필요가 없지 않나요?”
“예?”
샌슨은 놀라서 말고삐를 떨어뜨렸지만 난 놀란 나머지 제미니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말았다. 그래서 한참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샌슨은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다시 말했다.
“제레인트 씨. 도대체 어디서 그런 지식들을 얻으셨습니까?”
“글쎄요?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어느 문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신전이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 책이 오가는지는 짐작하지 못하시겠지요? 책이라고 하면 마법사를 떠올리기 쉽겠지만 마법사들은 오히려 책을 별로 읽지 않아요. 그들이 보는 것은 어려운 책들뿐이죠. 하지만 성직자들은 세상을 순례하면서 별의별 책을 다 접하게 되고 그래서 신전으로 그러한 책들을 가져오게 되지요. 물론 떠나갈 때 그런 책을 가지고 떠나가기도 하고…. 신전은 책의 사거리 같은 곳이죠. 많은 책이 있 긴 하지만 머무는 책은 적은.”
“그렇다면 그 생각이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 중요한 일이니까 서투른 확신은 삼가해야겠죠?”
“확신할 수 없으신가 보군요.”
“예. 미안합니다만.”
제레인트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샌슨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야기가 겉돌았군요. 원래 우리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원래 계획이라는 것은 참 좋은 거예요. 비록 내가 그것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제레인트의 말에 샌슨은 웃으며 말했다.
“예. 우리는 드래곤 라자일 가능성이 높은 어떤 소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당신이 그 소녀가 드래곤 라자인지 확인해 준다면, 우리는 그 소녀를 데리고 갈색 산맥으 로 크라드메서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멋지군요! 알았어요.”
이루릴은 샌슨을 쳐다보았고 그래서 샌슨은 설명했다.
“크라드메서가 스스로 드래곤 라자를 찾아간다면 다행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레인트 씨의 말에 의하면 확실치 않은 일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희망을 가지고 있 기보다는 할 수 있는 행동을 계속 취해야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네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헤이! 결국 델하파로 달려간다는 이야기지? 그럼 가자고! 이랴!”
“잠깐! 노새를 탄 사람도 생각해 줘요!”
점심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우리는 델하파로 달려갔다. 그래서 짧아진 해 안에 간신히 델하파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제레인트는 자신이 4인의 기사와 함께 달려온, 전 무후무한 노새의 기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난 언덕바지에서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짠바람을 불어넣었 다. 후우우우욱!
딱! 켈록, 켈록, 누구야? 네리아가 등을 치는 바람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눈을 홉뜨면서 네리아를 돌아보니 네리아는 얼굴이 멍해진 채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후치야, 후치야! 저거, 저 배 좀 봐! 궁궐보다 더 크다!”
네리아가 가리킨 것은 항구 한켠의 도크에서 건조중인 거대 범선이었다. 허, 땅 위에 올려놓고 보니 정말 큰데? 그 옆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지? 우와, 말도 안 나온다! 그 옆의 다른 건물들 지붕이 모두 그 배의 허리춤에도 못 올라가고 있었다. 띵깡, 탱! 띵깡, 탱! 멀리서부터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 가 경쾌하다. 도크 한켠에는 아예 노천 용광로가 만들어져 있어 그곳에서 배에서 사용되는 각종 철 부품과 의장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산더미 같은 목재와 나무통이 쌓여 있었다. 정말 많아도 너무 많다.
제레인트가 웃으며 말했다.
“배를 만드는 것은 세계의 창조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요. 항해중인 배는 바다로 완전히 둘러싸인 고립된 세계, 그 안에서 모든 선원들의 생활을 처리해 내어야 되지요. 100명 이상이 타는 배는 확실히 거의 세계를 설계하는 기분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하더군요.”
이루릴은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름답군요. 세계의 축소판이라……”
샌슨 역시 감동받은 눈으로 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이나 궁전이 거대한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다. 하지만 저 거대한 것은 움직이는 물체다. 저렇게 커다란 것이 물 위에서 떠서 움직이다니,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배는 어째서 가라앉지 않는 거지?”
내 혼잣말에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배니까.”
“뜨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물이 받치고 있으니까.”
난 나머지 일행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 내려가죠! 어느 술집이죠?”
이루릴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델하파의 항구로 들어섰다. 항구 도시 주변을 둘러싼 얕은 성이 보였고, 성은 도시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도시의 전경을 잘 감상할 수 있었다. 마치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그릇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간단했다. 엘프도 있는데다가 성직자도 끼여 있어 아무도 우리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성문 경비병들은 우리를 검문하지도 않고 통 과시켜 주었다. 하긴 이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전시에 있는 것도 아니지. 우리들 외에도 많은 수의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포석이 잘 깔린 길을 따라 다가닥거리며 걷자 점점 낮은 지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항구의 사나이들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날씨가 꽤 쌀쌀한데도 모두들 두꺼운 선원용 외투를 어깨에 둘러매거나 아예 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 단짠바람 부는 곳이라 그런지 철제 갑옷 같은 것은 구경할 수도 없었다. 모두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대부분 머리에 선원모나 수건을 얹고 있는데 그 눈가에는 역 풍 속에서 항로를 바라보느라 생긴 잔주름들이 가득했고 꽉 다물린 입술은 당장이라도 술병 마개를 씹어 부술 것 같은 강인함이 느껴졌다. 덩치들이 모두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샌슨이 보통 체격으로 보일 정도이니…………. 네리아는 감동적인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대단히 크다아?”
“뱃일은 힘들 테니까.”
샌슨은 간단히 대답했고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때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대해원의 시련을 생활로 여기는 사나이들이니까요.”
“그 대답이 한결 마음에 드네.”
이루릴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의 사나이들은 바이서스와는 달리 엘프에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엘프는 숲의 종족이었지. 저들은 바다의 사나이들이 고.
이루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군요. 이쪽 길이에요.”
이루릴은 우리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항구의 건물들은 모두 꽤 단단해 보였다. 일스 공국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느끼는 것인데 벽이 정말 두껍다. 바닷바람 때문인가? 그리고 건물들이 대개 땅딸막해 보인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곳곳에서 비릿하게 풍겨오는 생선 냄새, 그리고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각종 해산물들이 보였다. 여러 명의 사나 이들이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네리아는 질겁을 했다. 저게 물고기 맞나? 생긴 것은 휘우듬하고 멋진 날개가 양쪽에 붙어 있어 거대한 방석 처럼 생겼는데 마치 창처럼 생긴 꼬리가 뒤에 길죽이 나 있었다. 네리아는 그것이 그대로 날아와 덮칠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 무슨 물고기가………… 물고기 맞나?”
제레인트는 히죽 웃으며 설명했다.
“저건 바다의 악마군요.”
“악마요?”
“가오리입니다. 바다의 악마라는 것은 선원들이 부르는 별명이지요. 저 거대한 날개를 펼치면서 간혹 바다 수면 위를 날아다닌답니다. 그럴 때 보면 영락없이 검은 망토를 두른 바다의 악마지요. 이 계절에는 잘 잡히지 않는 물고기인데, 아마도 자이펀 해 쪽의 원양 항해에서 잡아온 것인가 보군요.”
자이펀해라. 흠. 하긴 여기는 일스 공국이니까 얼마든지 자이펀 해 쪽으로 항해할 수 있겠지. 이루릴 역시 놀란 눈으로 그 가오리라는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우 리들을 안내했다.
사람보다 바람이 더 많이 다니는 포석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삐이걱.
바람에 간판이 삐걱거리는 펍이 보였다. 간단한 2층 건물로 간판에는 웨일스 본야드라고 적혀 있었다. 고래의 묘지라고? 샌슨은 말에서 내려 펍 앞에서 잠시 주춤거 렸다. 말을 매어둘 말뚝이 없는 것이다. 샌슨은 안을 향해 외쳤다.
“이거 보셔, 주인장! 웨일스 본야드에 주인장 계십니까? 말은 어디다 묶으면 되오?”
“네! 잠시 기다리세요!”
안에서 짜랑짜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묵직한 항구 도시에서 듣기엔 왠지 맑아서 이상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그 소녀의 목소리에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
었다. 소녀의 목소리라? 그렇다면?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안에서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달려나왔다. 간단한 모직 원피스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 소녀였다. 소녀는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고 우리 는 그 머리를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였다.
소녀는 먼저 우리 일행을 보고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우린 외국인이니까 복장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많이 달라보이겠지. 한편 우리는 그 소녀의 머 리카락을 보며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못 꺼내고 있었다.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안녕하세요?”
꼭 적당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특별히 흠잡을 것도 없는, 상당히 무난한 말이었다. 소녀도 그제야 자신의 역할을 알아차린 듯이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전에 오신 분이군요?”
소녀는 이루릴에게 말했다.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절 기억하세요?”
“예. 엘프분이시니까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처음 뵙네요.”
제레인트가 냉큼 말했다.
“아, 난 일스 사람이고 이분들은 저 전설이 숨쉬는 초원의 땅 바이서스에서 오신 손님들이오, 아가씨.”
전설이 숨쉰다고? 헤헷? 그 소녀는 곧 선망의 눈초리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이마를 가볍게 치고는 말했다.
“아, 말을 데리고 절 따라오세요. 일스는 항구라 말들이 별로 없긴 하지만 저희 펍에서는 마구간을 만들어두었지요. 말들은 바람을 싫어하지요? 마구간을 뒤쪽에 만 들어두었어요.”
“아, 예.”
우리는 긴장된 걸음걸이로 그 소녀를 따라 걸어갔다. 건물 뒤편을 돌아가니 그런대로 마구간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흠. 그 소녀는 여기가 썩 훌륭한 마구간이 아 니냐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우리는 그래서 참으로 대단한 마구간이라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우리 말들의 속마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말들을 매어두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네리아는 입을 쫙 벌렸다.
“히야아아…………!”
건물 안은 온통 거대한 뼈와 이빨로 장식되어 있었다. 왜 웨일스 본야드인지 알 것 같다. 아마 고래뼈인가 보다. 마치 건물의 기둥처럼 벽에는 거대한 갈빗대(그 갈빗 대를 보자 고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가 세워져 있었고 옷걸이 대신 커다란 이빨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바를 보자 정말 할말이 없어졌다. 바에서 식당으로 통하는 문은 거대한 머리뼈(아마 고래 머리뼈겠지.)로 장식되어 있어 주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마치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되어 있었다. 장관인걸?
안에는 두세 명의 손님들이 앉아 있을 뿐 한산했다. 아마 선원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사람들은 모두 엄청나게 독해 보이는 시커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모두 별 말도 없이 조용했다. 그들은 우리들이 들어섰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소녀는 재빨리 빈 테이블 하나를 행주로 훔치더니 우리들을 앉게 했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샌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펍이 자랑할 만한 술이 뭡니까?”
“어떤 술이든 다 좋아요. 아, 제가 마셔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손님들은 다 좋아해요.”
“맥주 있습니까?”
소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의아해졌다. 소녀는 말했다.
“역시 초원의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일스에선 맥주보리가 자라지 않아요.”
“아, 그렇겠군요. 음. 그럼 저기 저분들이 마시는 걸로 주세요.”
이루릴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전에 마시던 걸로 기억하세요?”
“와인이죠? 물론이에요.”
그러자 네리아와 제레인트도 와인을 주문했다. 거 참 호기심도 없군 그래. 난 샌슨과 마찬가지로 ‘저기 저분들이 마시는 것’이라는 기다란 이름의 술을 주문했다. 소녀는 뽀르르 달려갔다. 그 새에 샌슨은 재빨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확실한 거 같지? 10대 후반이고, 머리카락은 정말 붉은데?”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고아인지 확인하면 되겠네?”
그러자 이루릴이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샌슨은 재빨리 말했다.
“아, 걱정 말아요. 이루릴. 우리 중엔 그럴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까. 어이, 후치야? 너만 믿는다.”
“엉? 무슨 말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아인지 확인해.”
“왜 나야?”
“네가 우리 중 제일 얼굴이 두꺼우니까.”
샌슨은 왜 저리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어려워할까. 게다가 저 소녀는 이제 아이라 부를 수도 없이 다 큰 처녀인데. 제레인트는 우리들의 대화를 보며 얼 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난 샌슨에게 푸념 섞인 표정을 지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루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헤헷. 고아냐고 물어보는 것이 어려운 일 이긴 하지.
잠시 후 그 소녀는 소반을 받쳐들고 와서 잔을 내려놓았다. 샌슨은 좀 과장되게 나에게 눈짓을 보내었고, 난 그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 지금 바쁘신가요?”
“예? 아뇨. 별로 바쁘지는 않은데요.”
“우리는 여행자들이거든요. 그래서 델하파의 이것저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요.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자 저쪽의 바에서 주인으로 짐작되는 중년 남자가 흘깃 우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손님들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자 소녀는 기세 좋게 말했다.
“시끄러워요! 아빠는 조용히 해요! 여기 외국 손님들이 뭘 좀 물어볼게 있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자 주인은 피식거리며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빠라고? 샌슨은 맥이 탁 풀리는 표정을 지었다. 오우, 젠장! 이 먼 일스까지 찾아왔는데 아니라니. 네 리아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루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허, 이것 참. 나도 기운이 쭉 빠졌지만 그렇다고 말을 걸어놓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난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후치라고 해요. 후치 네드발.”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흠. 바이서스의 이름은 신기하네요. 아, 이상하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저, 좀 낯설다는 거지요. 난 레니예요.”
“레니라. 멋진 이름이네요. 그런데 성은 뭐지요?”
레니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성은 없어요. 고아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