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5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5화

5

빗방울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고 은회색 구름들이 갈라진 틈 사이로 희미하게 황금빛 햇살이 내리비쳐 먼 산들을 물들여놓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자 대기의 곳곳이 빛살로 구분지어져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대지는………… 마치 황금색 얼룩 무늬가 있는 검은 천자락처럼 보였다.

바라크 앞에는 어젯밤 동안 푹 쉰 말들이 마차에 매어져서는 달려가고 싶다는 듯이 푸르릉거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마차 앞에 서서 레인저 대원들과 하슬러, 에포닌과 작별을 나누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 우습겠지요, 하슬러 씨.”

하슬러는 과연 대답하지 않았고 칼은 그저 미소지었다. 한편에선 길시언이 중대 범죄자인 그들을 되도록 불편함이 없이 수도까지 호송하라고 말함 으로써 라다 대장을 어이없게 만들고 있었다.

“레인저 대원들은 잔혹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들어 알고 있소. 산등성이를 걷고 호수에 팔을 씻는 사람들이니까. 따라서 죄수들에게 쓸데없는 고통 을 주지는 않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저 소녀는 죄수가 아니라 죄수의 딸이라는 점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서찰은 죄수의 범죄 행위에 대한 길시언 바이서스의 고발장과, 그리고 정상 참작을 요청하는 진정서요. 모두 전하께 친전으 로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분부 시행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하슬러와 에포닌은 건장하게 생긴 레인저 대원 두 명 사이에 끼여 서 있었다. 에포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후작의 저 택이 싫어서 도망나왔다가 만난 아버지가 하필이면 반역자라니. 그래서 지금 그 아버지와 함께 수도로 호송당하게 되다니. 판단을 잘못했다고 생각 하고 있을까? 에포닌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팔을 꼭 붙들고 서 있었고 하슬러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 럽게 감싸쥐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 옆에 서 있는 레인저 대원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은 걸.

그때였다. 칼이 조심스럽게 네리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네리아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네리아의 얼굴이 환해졌고, 그녀는 웃으며 하슬러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푸른 이불은 세 명이. 날개는 그 아래에 있어요.”

지금 네리아가 캐스팅을 하고 있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못 알아들을 말을 하네? 하슬러는 네리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그는 네리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에포닌을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레인저 대원들에게 말했다.

“잘 좀 부탁해요? 어린 소녀도 있으니까 너무 급하게 걷지 말아주면 고맙겠네요.”

“예? 아, 예.”

레인저 대원들도 그들의 대장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에포닌에게 말했다.

“에포닌 어렵게 만난 아빠니까 아빠 옆에 꼭 붙어다녀야지?”

에포닌은 의아한 얼굴로 네리아를 올려다보았지만 네리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인사가 끝나고 나서 하슬러와 에포닌을 남겨두고 우리는 모두 마차에 올랐다.

“이랴.”

샌슨의 호령과 함께 선더라이더가 길게 울었다. “음메!” 그리고 마차는 거침없이 출발했다. 달가닥 달가닥. 절벽 위에서 다시 대로로 내려가는 급한 길을 따라 마차는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여전히 마차 위에는 나와 네리아, 그리고 운차이가 앉았다. 운차이는 또다시 나무 토막을 깎아대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하게 드러난 그것은, 무슨 말 이나 낙타? 어쨌든 그런 날렵해 보이는 네발짐승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지? 네리아는 운차이의 손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지만 운차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난 마차의 흔들림 때문에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을 주의 깊게 잡고는 네리아에게 말했다.

“네리아. 아이고, 턱이야. 아까 그거 무슨 말이에요?”

말을 하려니 정말 힘드네. 경사 급한 산길을 내려가는 마차는 쉼없이 덜컹거렸다. 네리아는 그저 날 보며 해죽 웃었다. 그때 마차는 다시 길로 접어 들었고 좀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운차이가 말했다.

“그건 도둑 속어인 듯한데.”

네리아는 손뼉을 짝 치면서 말했다.

“맞아맞아. 운차이. 뜻도 알아?”

운차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고, 시야에서 멀어진 바라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길 옆 에 있는 절벽 위로 바라크는 외롭게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몇 명의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도 레인저 대원들이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모양이다. 갑자기 햇빛이 허공을 가로질러 바라크를 비추었다. 비에 젖어 검게 보이는 절벽 위로 바라크의 젖은 지붕이 마치 황금덩이처럼 빛났다.

운차이는 뒤를 돌아본 채로 말했다.

“세 아름짜리 소나무 아래에…………….”

“예?”

“세 아름짜리 소나무 아래에, 도망가는 데 도움될 물건이 있다는 뜻인 것 같다.”

“뭐라구? 도망?”

길시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이라구? 어? 아침에, 칼이 산책을, 산책을 갔다왔지? 어라? 난 운차이를 바라보며 의혹에 가득 찬 목소리 로 말했다.

“그럼……………, 운차이가 아침에 그러고 앉아 있었던 것은 망을 봐준 거예요?”

운차이는 싱긋 웃었고 난 기막힌 심정으로 마부석에 앉아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말도 안 되는 말을 힘들게 만들어내면서 떠들기 시작했지 만 칼은 앞만 바라본 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아이고, 저 너구리! 길시언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면서 떠들기 시작하자 칼은 앞만 바라본 채 나직하게 말했다.

“왕가가 할슈타일 가를 제어하지 못했고, 할슈타일 가는 하슬러 가를 괴롭혔고, 하슬러 가는 넥슨 가에 들어가 반란에 휘말려들고, 왕가는 하슬러 가를 벌주려 하니, 헬턴트 가는 하슬러 가에게 왕가 대신, 그리고 할슈타일 가 대신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오. 죄송합니다. 더 할말은 없는데.” 길시언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무엇을 남겨두셨습니까?”

“무기는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식량과 돈 조금, 그리고 편지를 남겨두었지요.”

“편지요?”

칼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남긴 글을 그대로 반복하듯이 말했다.

“이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 에포닌을 잘 키우도록 하십시오. 다시는 넥슨이나 할슈타일의 일에 관련되려 하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십시오. 만일 그 일에 관련되려 들면 에포닌 양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잡아 재판을 받게 하겠소. 아버지가 어디서 죽을지 모 르는 일을 하는 것보단 감옥에 잡혀 있는 편이 에포닌 양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 그럼, 행복을..”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썩 괜찮은 판결입니다, 칼, 국왕의 법정에 가서도 죄인에 대한 그만한 동정은 보기 어려울 겁니다. 훌륭한 재판관이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것인가? 그러나 길시언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없었다. 칼은 겸연쩍게 대답했다.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비에 젖은 나뭇잎들과 가지에서 빗방울들이 찰랑거리며 떨어져내렸다. 숲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길을 가로지르는 개울도 몇 개 생겨나 있었고 군데 군데 흙이 무너진 곳도 보였다. 걸어가기 힘든 흙탕길이지만 아침 나절이라 말들은 기운차게 걸어갔고 마차 바퀴는 흙탕물을 찰박거리며 잘도 굴러 갔다.

“이 계절에 내린 비 치고는 꽤나 많아. 음.”

네리아는 마차 지붕 위에 배를 깔고 길게 엎드려 마차 바퀴가 지나가면서 파문을 일으킨 물구덩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길시언 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난민들이 걱정이오.”

네리아는 고개를 돌려 길시언을 흘끔 바라보더니 다시 길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차피 집 버리고 나온 피난길은 고생이지요, 뭐. 이런 비 때문에 특별히 더 감상적이 될 필요는 없어요.”

“하긴. 옳은 말이오, 네리아 양.”

다시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마차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산길을 쉼없이 굴러갔다. 칼은 지루한 표정을 짓더니 마차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아인델프 님!”

잠시 후 엑셀핸드가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마차 바퀴에 머리가 어지럽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왜 그러나?”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사운드가 들렸다는 그 광산은 정확하게 얼마쯤 남았습니까?”

“아, 거기? 음. 여기선 설명하기 어렵고, 요정의 여왕의 성이 있는 레브네인 호수를 지나고 나서 설명하는 편이 낫겠군. 인간들은 잘 다니지 않는 길 이라서 말이야. 대충 위치를 말하자면 갈색 산맥이 북쪽으로 크게 꺾어지는 곳에 있는 자날 한타 봉의 서쪽 사면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자 길시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드워프들의 통행로 말씀이군요. 나도 몇 번 지나다녀 본 적은 있습니다. 낮에 나온 박쥐만큼이나 길눈이 어두워…………, 관둬! 에, 그러니까 중부 대로에서 급히 북부 대로로 빠져나갈 때 유용한 길이었지요.”

“그래? 그렇다면 광산으로 가는 길도 알고 있는가?”

“아니오. 광산에 들를 일은 없었으니까요. 가장 중요한 보물은 손에 쥐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 거짓말! 웃기지 말아! 에, 그러나 그 길까지라면 내가 안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군. 그럼 자네가 인도하시게나.”

엑셀핸드는 다시 머리를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고 길시언은 샌슨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아 마차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말들은 기운차게 걸어가 마침내 메드라인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숲 사이로 레브네인 호수가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가 닿을 듯한 거리였지만 내리막길인 데다가 비가 내려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지라 길시언은 마차를 천천히 굴러가게 했다. 그래서 메드라인 고개 위에서 레브 네인 호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난 아래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제레인트! 나와보겠어요? 페어리퀸의 성이 있는 레브네인 호수가 보이는데…

“뭐야! 윽!”

제레인트는 마차 밖으로 급히 머리를 내밀다가 길 옆으로 뻗어나온 나뭇가지에 머리를 긁혔다. 마차 안에서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제레인 트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더니 곧 환한 얼굴이 되었다.

“허! 허! 저게 호수야, 바다야?”

하긴, 산속이긴 하지만 고개를 돌리다보면 간혹 수평선도 보이는 곳이다. 수평선과 산봉우리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우리 마차는 그 거대한 레브네인 호수로 내려가는 완만한 곡선로를 따라 굴러 내려가고 있어서 호수까지 다다르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제레인트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곧 마차 문을 열고 천천히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영차! 이크. 진흙이네?”

그는 로브 자락을 양손으로 거머쥐어 올리더니 진흙탕 길을 반쯤은 미끄러지면서 겅중겅중 뛰어내려가기 시작했고, 네리아와 나는 마차 위에서 그 광경을 보며 쓰러질 정도로 웃었다. 운차이마저도 나무 토막을 내려놓더니 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우리들의 웃음 소리를 듣고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머리를 내밀었다. 레니는 제레인트가 로브 자락을 날개처럼 걷어올리고 뛰어가는 모습을 보더 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 산속에서 저렇게 혼자 가시게 내버려둬도 되겠어요?”

네리아는 정신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아, 하아. 괜찮아, 괜찮아. 키기기긱! 여긴 몬스터가 없어요. 레니 양.”

“몬스터가 없다고요?”

네리아는 배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닦으면서 말했다.

“여긴 다레니안의 영토이기 때문에 몬스터는 들어오지 못해.”

“그래요? 그럼 사람은 들어가도 돼요?”

“그래, 사람은…………, 어랏?”

네리아는 갑자기 당혹한 표정을 지었고 그때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크! 여기선 저렇게 경망스럽게 뛰어가면 안 되는 곳이잖아? 난 다시 제레 인트를 돌아보았다. 제레인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구 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레니안의 영토이기 때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중히 허 락을 구한 다음 조용히 지나가야 되는………………

“침버 씨! 멈춰요!”

칼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굉장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 우리들의 정신을 완전히 빼놓았다.

먼저, 제레인트가 칼의 고함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다가 그대로 진흙탕 길을 밟고 주루룩 미끄러져버렸다.

“으아악!”

그는 그대로 호수 쪽으로 향한 급한 경사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그만 웃어버렸다. “푸하하!” 그런데 그와 동시에 길시언이 황 급하게 마차를 급출발시켰다.

“젠장, 들어가면 안 돼! 이랴아! 하!”

마차가 급출발하면서 몸이 뒤로 젖혀지는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파바

밧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길시언이 마차를 급히 출발시킨 이유는, 제레인트가 다레니안의 영토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붙잡기 위해서· 그런 데 그 순간 말들 사이에서 커다란 빛이 터져나와서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뭐, 뭐야!” 눈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난 마차 지붕 위라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져 손을 휘둘렀다. “으아악!” 샌슨의 고함소리와 함께 말들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힝힝힝힝힝!”

마차가 거세게 흔들리더니 곧 겁에 질린 말들은 격하게 출발했다. 쿠르르르르! 돌멩이와 진흙이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마차는 무서운 속도로 달 리기 시작했다. 손이 빠져나가라 휘저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나와 운차이는 뒤로 휘청 넘어지다가 짐더미에 등을 부딪혔다. “커헉!” 그리고 바닥에 배를 붙이고 있던 네리아가 주루룩 미끄러지더니 우리들 위로 덮쳐왔다.

“케엑! 네리아!”

“아, 난 괜찮아.”

“난 괜찮지 않아요! 엉덩이 치워요!”

눈앞에 별이 돌면서 난 무의식적으로 네리아를 밀어냈다. 그런데 힘이 좀 많이 들어갔는지 네리아는 데굴데굴 앞으로 굴러가 버렸다. “아악! 후치 이 자식아!” 네리아는 간신히 떨어지지 않고 지붕 가장자리를 붙들었다. 콰과과과! 마차 굴러가는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다. 난 도대체 왜 말들 사이에서 빛이 터져나왔는지 보기 위해 손을 휘저어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은 짐더미 속에 박혀 있었고 다리는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급 하게 달리는 마차 위라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칼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엇? 말이 여섯이야!”

그야 6두 마차니까 당연하……, 잠깐! 말은 다섯이잖아? 그때 운차이가 마치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몸을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공중에서 놀라 운 동작으로 몸을 안정시키더니 마차 바닥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부드럽게 균형을 잡았다.

“운차이! 나 좀 꺼내줘요!”

그런데 운차이는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렇게 구부린 자세로 앞을 보면서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더라이더가……?”

그러나 다음 순간 운차이는 황급하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지붕 위에 엎드리더니 마부석 쪽의 가장자리를 붙잡으며 외쳤다.

“멈춰! 제레인트를 깔아뭉개겠어!”

“으아아앗!”

길시언의 기합소리와 함께 마차가 거세게 요동했다. 그리고 칼의 고함소리도 들려왔다.

“제동기를 당기면 안 돼! 퍼시발 군! 이 속도에서 당기면 마차가 뒤집혀!”

“옆으로 틀어! 옆으로 틀어! 제레인트, 일어낫!”

운차이의 고함소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들은 그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더욱 격하게 달음박질쳤다. 그래서 절반쯤 일어나던 나는 다시 짐더미 속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걸음마는 16년 전에 졸업한 줄 알았는데!”

그때 마차 바퀴가 무엇에 걸렸는지 터덩! 소리를 내면서 마차와 내 몸이 함께 떠올랐다. “으아앗, 새가 부럽지 않아!” 다행스럽게도 격한 충격 때문 에 내 몸은 짐더미 속에서 퉁겨나왔다. 난 재빨리 몸을 앞으로 던졌다. 가슴에 부드러운 충격이 다가왔다.

“꺄악! 후치, 임마! 좋으면 말로 해!”

나는 네리아를 깔아뭉개며 운차이 옆에 나란히 엎어지게 되었고 그리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은 머리 끝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다. 네리아가 가슴 아래에서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지만 난 비켜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호수가 온통 터져나가는 듯했다!

저 넓은 레브네인 호수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섬광은 하늘을 찌르며 솟아올랐다. 붉은 빛살들은 숨쉴 사이 없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언 젠가 한번 본 장면이지만 굉장한 장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수면은 거칠게 파도치고 있었으며 붉은 섬광은 이제 갈대밭처럼 빽빽하게 뿜어져 나와 눈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내 아래에 깔려 있던 네리아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고개를 내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말이 여섯 마리였다! 조금전까지 말들 사이에 끼여 있던 황소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너무 말 같이 생겨서 오히려 말인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슈팅스타보다 더 거대한 그 몸은 에보니 나이트호크보다도 더 새카만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놀랍 게도 목 뒤에서 흩날리고 있는 갈기는 타오르는 은백색이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색 번개………….

“선더라이더?”

“선더라이더!”

길시언이 비명을 지르며 내 의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말들은 선더라이더의 갑작스러운 변신 때 일어난 빛과 호수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섬광 때문 에 굉장히 겁을 집어먹었는지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쿠르르르르! 그리고 저 앞에는 미끄러지는 것을 멈춘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인 트는 일어나려고 비칠거리고 있었지만 다리가 부러진 것인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서 다시 진흙탕에 얼굴을 갖다박고 있었다. 휙휙 지나치는 좌우 를 보자 왼쪽은 나무가 꽉 들어찬 숲이었고 오른쪽은 호수로 통하는 격한 사면이었다. 젠장! 마차를 틀 길이 없어!

“테페리여!”

제레인트는 쓰러진 채 고함을 지르더니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샌슨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더니 기어코 제동기를 당겨버렸다. 끄끼기기긱! 뼈를 긁는 소리가 들리면서 말들이 휘청거렸다. “이힝힝힝!” 바퀴가 멈춰버림에 따라 말들은 몸이 뒤로 당겨지게 되었다. 말들 중 몇 마 리는 그대로 주저앉기도 했다. 마차는 뒤집힐 듯이 요동을 쳤으나 간신히 뒤집히지는 않았다. 눈썹이 뽑혀나갈 정도로 맹렬히 달리고 있던 속도 때문 인 듯했다. 그러나 그 속도 때문에 마차는 바퀴가 멈추고도 계속해서 진흙탕 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좌우로 정신 없이 휘청거리며 미끄러지는 마차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다리가 좌우로 심하게 요동쳤다. 주루룩, 주루룩! “으아아아!” 난 차라리 네리아 위에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아무것도 잡지 못 한 네리아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으니까. 지붕 가장자리를 부서져라 움켜쥐면서 차마 바라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똑바로 누워 있었다. 그의 두 손만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안 돼!”

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말들은 그대로 제레인트의 위를 지나가 버렸고 마차 역시 좌우로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지나쳐갔다. 이런, 제기랄! 그 때 운차이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죽었어! 난 이빨을 마구 부딪치면서 힘겹게 고개를 돌려 마차 뒤쪽을 바라보았다. 끔찍하게 짓이겨진 시체………가 없네? 뒤에 남은 것은 마차가 미끄러지면서 땅을 파헤친 무시무시한 궤적뿐이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때 운차이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운차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다음 순간 내가 생각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제레인트! 거기서 뭐해요?”

제레인트는 호수 상공에 떠 있었다. 당신 정체를 이제야 밝히는군! 원래 새였지? 아니, 젠장! 운차이와 내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제레인 트는 고함을 질렀다. “우오오, 너무 높아!” 제레인트는 그렇게 고함을 지르며 날갯짓을 시작했다. 아니, 그건 날갯짓이 아니라 그냥 팔을 마구 휘저음 에 따라 로브가 펄럭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제레인트는 다행히도(?) 그대로 호수 수면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임을 입증하기 시 작했다. 차라리 안도의 기분이 드는 이유가 뭘까?

풍덩! 제레인트는 쏘아져오르는 붉은 섬광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멋지게 잠수해 들어갔다. 물보라가 거세게 튀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쿠쿠 쿵! 그때 좌우로 비틀거리며 미끄러지던 마차가 드디어 무엇에 걸려버린 모양이다. 콰아아앙!

“앞으론 마차 안 타겠어어어어!”

엑셀핸드의 비명소리와 함께 마차는 그대로 부웅 떠올랐다. 그러나 마차는 말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다시 호되게 땅에 부딪히면서 제자리에 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말들은 마차의 회전에 쓸려 들어가며 비틀거렸고 마차는 시작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회전을 멈추었다. 젠장! 그럼 왜 돌기 시작했어!

“으아아아!”

난 그대로 마차에서 퉁겨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

“하늘을 나는 기분이야!”

볼을 스치는 맹렬한 바람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시간은 느려졌고 난 차라리 느긋한 기분을 느끼며 비행의 경험을 음미했다. 내 몸은 붉은 섬광들 사이로 한 마리 새처럼 유연하고도 아름답게 날아갔다(아, 훗날 내 비행을 관찰하던 운차이의 증언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그야말로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고 한다).

“풍덩!”

캐액!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이 왔고, 동시에 어깨와 배가 누군가의 주먹으로 맞은 것처럼 아파왔다.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맛은 괜찮은 편이었지 만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손끝, 발끝이 뜨거워지고 발가락은 꽉 오므라들었다. 물 속에 웬 별들이 저렇게나 많이 떠다니는 거지? 팔다리는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뻣뻣해졌고 위와 아래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군가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면서 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주위는 완전히 환상적이었다. 눈 바로 아래에서 출렁거리는 물결, 그리고 ‘츠핏! 츠핏!’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뿜어져 올라가는 붉은 섬 광,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평생 동안 개울보다 더 큰 물에는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큰 산중 호수에 빠지게 되었을 때 마주치 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지.

“어푸! 웁! 사람, 살려!”

입은 다물 수가 있지만 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코로 들어오는 호수 물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물결은 계속 위아래로 움직여 물속과 물 바깥이 번갈 아 보였다. 물 위로 올라왔을 때는 붉은 섬광이, 그리고 물 아래에서는 짙은 보라색의 섬광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숨이 차올라서 말도 제대로 꺼 낼 수 없었다.

레니의 목소리가 멀리, 아련하게 들려왔다.

“후치이이! 헤엄쳐! 머리를 억지로 물 밖으로 내려고 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젠장! 입장을 바꾸자구! 내가 밖에서 그렇게 외쳐줄 테니까 레니 네가 여기 들어와 있어보란 말이야!

“우푸우! 풋! 케겟! 사람 살려! 나 헤엄 못 쳐!”

그때 누군가가 내 귀 옆에서 정겹고도 황당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런 것 같군. 그건 다른 때라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는데?”

고개를 돌렸다. 응? 고개를 돌렸다고? 고개를 돌려보니 물 위에 앉아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으로 다리를 치료하고 있는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난 물 위에 앉아서 칭얼거리는 꼬마처럼 다리를 뻗대며 팔을 휘젓고 있었다. 난 얼빠진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 레인트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날 마주보았다. 제레인트가 말을 꺼내려 하기 직전, 내가 먼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원래 물 위에 떠요?”

제레인트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식과 경험이 아무리 다르다지만 이건 좀 심한 거 같다?”

난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보았다. 난 마치 풀밭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물 위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불안한 손길을 내려 물을 만져보다가 손이 물 아래로 쑥 들어가는 것에 기겁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이상하네? 물인데? 난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어 가랑이 사이를 만져보았지만, 마찬 가지로 손은 익숙한 느낌을 주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 몸은 물 위에 앉아 있었다.

“상황만 좋다면, 이유 같은 거야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죠?”

“명언이다! 좋아. 따지지 않겠어.”

제레인트는 이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따지고 들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난 고개를 돌려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샌슨과 길시언은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현실처럼 보이는 문제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는지 쓰러진 말들에게 다 가가 악전고투를 하면서 말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말들은 두 사람이 풀어주자 곧 기운차게 일어났다. 흥분해서 조금 날뛰는 말도 있었지만 심하게 다친 말은 없는 듯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쓰러진 마차 옆에는 네리아가 레니를 끌어안은 채 서 있었고 그 옆에선 칼이 땅바닥에 네 발 짚고 엎드린 채 우리들에게 기막힌 시선을 보내고 있었 다. 운차이는 창문을 통해 마차 안에 있던 아프나이델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마차 밖으로 힘들게 나오다가 우리 모습을 보고선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레인트와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프나이델을 보면서 히죽 웃고 말았다. 뒤이어 엑셀핸드가 머리를 문지르면서 모습을 드러내더 니 곧장 비명을 질렀다.

“이봐! 거기! 거기이!”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설명을 요구하지 말아요! 우리도 잘 모르니까!”

그러자 엑셀핸드는 자신의 수염을 쥐어뜯으면서 말했다.

“멍청아! 뒤를 보란 말이다!”

뒤? 나와 제레인트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다음,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으아아, 제기랄!”

무슨 배짱으로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제레인트와 난 벌떡 일어나서는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물 위에 앉을 수도 있는데 설마 달 리지는 못할까 등의 합리적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뒤의 광경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커서 눈에도 다 들어오지 않는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으아아, 안 돼!”

“오지 마! 오지 마!”

제레인트는 파도를 향해 말하면 알아듣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외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외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한 가 지는 확실했다. 우리는 수면을 달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사실 한 가지가 확실했는데,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저 급격한 파도보다 더 빠 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멈춰.”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도저히 안 되겠다. 제미니, 날 잊고 좋은 남자를 만나………….’ 등의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달려가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린 채 고개만 다시 뒤로 돌렸다. 이런, 조금 전과 똑같은 동작이잖아?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돌리는 동안 먼저 제레인트 의 질린 얼굴이 보였고, 그 다음 제레인트와 난 나란히 뒤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파도는 멈추어 있었다.

멈추어 선 파도는 우리들 바로 뒤에서 딱딱한 벽처럼 서 있었다. 높이는 대략 20큐빗 정도. 그러나 그 표면에선 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도의 가장 위쪽, 하얗게 포말이 일어나는 부분에는 무언가 작은 반점 같은 것이 보였다. 난 얼굴에 묻은 물과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는 다시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때 파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제레인트와 난 여전히 사람은 원래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 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서서히 낮아진 파도는 이제 내 가슴 높이 정도의 높이가 되었다. 이제는 파도라기보다는 좀 커다란 물결, 아니 물기둥? 그 정도로 보이는 크기로 바 뀌었다. 그리고 그 첨단 부분에 있는 물체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인간 형체였다. 마치 인형처럼 보이는……………,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었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형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이라도 시키듯이 말을 꺼내었다.

“고맙다는 말쯤은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의심스러운 시선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제야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던 그 형체가 똑똑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빛 옷으 로 성장한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는데 키는 내 손바닥에 조금 못 미쳤다. 물빛 머리카락이 순간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작은 여자는 파도를 마치 의자나 되는 것처럼 다리를 꼰 채 타고 앉아서는 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연한 질문이 나왔다.

“다레니안…………, 이크! 페어리퀸이십니까?”

아차, 무릎! 말을 꺼내고 나서야 난 수면 위에 무릎을 꿇었다. 느낌이 너무 이상한걸. 바닥에 무릎이 부딪히는 느낌이 와야 되는데 물이라서 그런지 부딪히는 느낌은 들지 않고 대신 첨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겁한 나머지 일어날 뻔했지만 다음 순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레인트가 나보다는 좀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나서야 그 작은 여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래. 내가 요정의 성 레브네인의 성주이자 페어리의 여왕 다레니안이야.”

역시 날개가 없군. 그런데 난 이 경악할 만한 상황에서 왜 이런 생각을 떠올릴까?

광막한 수평선을 바라보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해서 곧장 빠져들 것 같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어려웠고, 게다가 고개를 들어 요정의 여왕을 올려다보기도 어려워서, 도대체 시선 간수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되느냐 하는 고민은 시시한 것이었 다. 그래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다레니안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이루릴은 어디 있지?”

난 고개를 들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이루릴이 어디 있냐고요?”

윽!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해버렸다. 다레니안은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 질문이 그렇게도 부당한 것이니?”

“아, 아뇨.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에, 정신이 없어서…………. 용서해 주십시오.”

“아, 그래? 미안하군. 먼저 이름을 묻고……………, 친해지기 위해 이야기를 좀 나눠야 되는 거지?”

“예? 예?”

다레니안은 내 당황스러운 반문은 듣지 못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말했는데. 다레니안. 그렇게 부르면 될 거야.”

“아, 예. 전 후치 네드발이라고 합니다.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입니다. 예. 아, 헬턴트라는 것은 저희 인간들이 부르는 마을 이름으로서 그 소재 는 저 중부 대로가 웨스트 그레이드를 만나게 되는, 아, 웨스트 그레이드라 함은 역시 저희 인간들이 부르는 땅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서…………….”

페어리퀸 다레니안은 나로 하여금 인류의 모든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을 마구잡이로 늘어놓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횡설수설을 똑바 로 잘라 들어왔다.

“아니. 그건 궁금하지 않아. 후치 네드발이니? 후치라고 부르면 되겠지?”

“예! 감사합니다!”

“그래? 뭐가 감사하다는 거니?”

윽! 실수했다. 다레니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재빨리 머리를 굴린 다음 제레인트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제레인트 침버입니다! 테페리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레니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레인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테페리께서 요즘 다리가 불편하신가?”

제레인트는 울음을 터뜨리려는 것인지 기절하려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다레니안을 올려다보았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가 다시 말했다.

“아냐, 아냐. 테페리께서는 신이신데…………….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인간이나 오크, 드워프들의 경우였던 것 같아. 그렇지? 이상하네.”

“아,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저, 제가 테페리를 모시는 프리스트라는 뜻입니다.”

다레니안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멍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 그렇구나. 혼란스럽네. 헬카네스가 우리 만남을 주재하시는 모양이지.”

그런가 보다. 정말 무슨 만남이 이렇게 괴상망측할 수가 있는지. ‘수면 위에서의 만남’이라고 하면 그거 왠지 배가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기잖아. 그런 데 배는 구경도 할 수 없는걸.

주위의 붉은 섬광들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 전의 소란이 남겨놓은 잔잔한 파문과, 넓은 수면 위에 조그맣게 솟아올라 너

무 이상하게 보이는 물결, 그리고 그 위의 다레니안뿐이었다. 다레니안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붉은 빛을 뿜어 놀라게 한 것 같은데. 그건 허락 없이 들어오려는 자가 있으면 그냥 나가게 되어 있거든.”

“예? 죄송합니다!”

제레인트는 코가 땅에 닿을 듯이…………, 아니, 코가 물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레니안은 제레인트의 사과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이번엔 날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어. 그런데 기억에 있는 얼굴들이 보이더구나. 언젠가 이루릴과 함께 여기를 지나갔지?”

“예. 그렇습니다. 아, 그때 저희들을 도와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단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응…………. 그래서 이루릴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까 하고는 너희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어. 그래서 제때에 도울 수 있었지.”

“아, 정말 감사합니다.”

다레니안은 싱긋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루릴은 지금 어디에 있지? 보이지가 않네.”

“예? 아, 이루릴 세레니얼 양은 저희들과 함께 여행중이었지만 잠시 자신의 용무 때문에 지금은 저희들 곁을 떠나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저희 들도 모릅니다.”

“그래? 알겠어. 그럼.”

다레니안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나와 제레인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우린 동시에 다레니안을 올려다보았고 다레니안은 고개 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가라구. 계속 여기 있을 거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아쉬운걸? 요정의 여왕을 만났는데 그냥 이렇게 헤어져야 되다니. 난 좀더 말을 끌어볼 욕심으로 다레 니안에게 말을 걸었다.

“저, 구해 주신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루릴에게 무슨 전할 말씀이라도 없으십니까? 이루릴은 다시 저희들을 찾아 오겠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러니? 영원히 헤어진 것이 아니라?”

“예? 잠시 헤어진 것뿐입니다만?”

“그녀가 그렇게 말했어?”

“예.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다레니안은 이해 못할 말을 마치고 나더니 이젠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다시 무릎을 꿇었지만 파도 위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생각 에 잠겨 있는 페어리퀸을 올려다보면서 거의 넋이 나가버린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레니안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이루릴을 만나거든 그 소용없는 추적을 그만두라고 전해 줘.”

“소용없는 추적이오?”

다레니안은 놀란 눈으로 우릴 내려다보았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 하나하나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몸 전체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페어리는 원래 그런가?

“너희들은 모르니? 함께 있었는데? 다시 만날 거라며?”

“예?”

다레니안은 정말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갑자기 내가 정말 희한한 것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다레니안은 멍 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아, 그래! 말하지 않았구나? 호호호.”

“예?”

“맞아. 너희들은 인간이었지. 엘프가 아니니까, 이루릴이 말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알지 못했겠지.”

아니, 그게 아닌데?

“저, 그런데 이루릴은 자신의 추적에 대해 저희들에게 조금 들려주었습니다만, 저희들이 알기로 이루릴은………… 핸드레이크를 추적하고 있는 것입니 다만. 그 추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핸드레이크의 이름이 나왔을 때 다레니안의 얼굴이 어떻게 바뀌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서 난 조심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이름

이 말해졌을 때 다레니안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심드렁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었니? 그래. 그 추적을 그만두라고 말하려는 거야.”

“그, 글쎄요. 제가 알기로 그녀는 열심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그 말을 전해 주면서 왜 소용없는 추적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비난은 듣 고 싶지 않은데요. 이유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이유? 이유라. 이루릴은 그런 것 궁금하게 여기지 않을 텐데.”

다레니안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고 그래서 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제가………… 궁금합니다만.”

“그래? 너완 상관이 없는 일 아니니?”

“예? 예.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고 궁금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뭐, 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상관이 생기고 관계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

고.”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았다. 그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붙은 눈, 코, 입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날 내려다보는 것은 얼굴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레니안은 말했다.

“핸 같구나.”

사람은 깜짝 놀랐을 때도 털을 곤두세우는 고양이나 귀를 쫑긋거리는 말처럼 몸의 일부분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장이 떨 어질 만큼 놀랐지만 난 평온하게 대답해 버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핸도 그랬지. 뭐든지 관심 있어하고 자신은 상관도 없는 모든 종족의 일에 끼어들고.”

다레니안은 여전히 대단찮다는 얼굴을 한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앞 3큐빗 정도에 신장 반 큐빗짜리 페어리가 파도 위에 앉아서는 날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우스운 남자야. 자기도 돌볼 줄 모르면서.”

다레니안은 미소까지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나 대신 칼이 여기 빠졌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제레인 트가 말했다.

“다른 피조물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쏟는 것과 똑같은 애정을 표시했다는 것은, 칭송받을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다레니안을 올려다보며 맑게 웃고 있었다.

“핸드레이크의 일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기를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 사실에 구속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가지고 태어나는 그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에서, 전 핸드레이크의 행동을 우습다고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높게 평가 하고 싶습니다.”

페어리퀸은 우울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늑대가 양에게 동정심을 가지면 어떻게 되지?”

“예?”

“대답해 봐. 늑대가 양에게 동정심을 가지면, 그렇다면 늑대는 어떻게 될까?”

다레니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했다. 제레인트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이윽고 힘없이 대답했다.

“굶어…… 죽겠지요.”

“응. 거미가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에 매혹을 느끼면 어떻게 되지?”

“죽게 될 겁니다.”

“그래. 땅속을 다니며 뿌리를 캐어먹는 땅강아지가 자신은 보지도 못한 꽃잎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한 번도 꽃을 본 적이 없을 걸. 하지만 누군가가 땅강아지에게 지금 그대가 파먹고 있는 뿌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의 뿌리라고 알려주면, 그래서 땅강아지가 꽃의 모양 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동경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제레인트는 이제 고개를 똑바로 들어 다레니안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죽을 겁니다.”

“꽃은 그걸 알지도 못하겠지?”

“그럴 테지요.”

“늑대의 경우를, 거미의 경우를, 땅강아지의 경우를, 넌 뭐라고 표현하겠니?”

“멍청하다고 말하겠습니다.”

제레인트는 침착하면서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온몸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칭송하지 않을 거니?”

“아뇨. 그건 어리석은 경우입니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거미는 나비를 잡아먹도록 되어 있지요. 또한 땅강아지는 꽃에 신경 쓰지 않고 뿌리만 캐어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닙니다.”

“왜 그렇지? 인간은 어떻게 다르다는 거니?”

“늑대는 양을 동정하지 못하게 태어났습니다. 거미도, 땅강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원래 자신의 제물에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예. 헬카네스의 빚음에 따라 우리들은 남과 달라지려는 존재가 되었지만, 유피넬의 힘은 우리를 남에게 전달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유피넬과 헬카 네스 양쪽의 관심을 받습니다.”

제레인트는 웃으며 날 바라보다가 다시 다레니안에게 고개를 돌려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원래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물결치는 파도에서 쉼없이 물방울이 치솟아 올랐지만 다레니안에게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레니안은 손을 뻗어 파도의 하얀 포말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말했다.

“너희들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니?”

“아뇨. 우리의 마음은 넓지 않습니다. 엘프나 당신 같은 페어리에 비한다면 우리는 소견머리 없고 터무니없이 속 좁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나눠줌으로써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핸은 그 멍청한 일에 만족감을 느꼈던 것이니?”

제레인트는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정도로.”

갑자기 다레니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짓말이야!”

다레니안의 외침소리와 함께 물기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레니안이 앉아 있는 부분만 제외하고 모든 호수가 날뛰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아. 호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나 하나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어!”

다레니안의 작으면서도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지듯 울려나왔다. 소용돌이는 하늘까지 솟아오를 정도로 거세게 물결쳤다. 다레니안과 우리 두 명이 있던 장소 주위로 무서운 소용돌이가 뿜어져 올라가 주위엔 물의 벽이 형성되었다. 귀가 먹어버릴 정도의 물소리. 몸이 그대로 소용돌이 속으로 찢겨 흩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레니안은 이제 파도 위에 똑바로 선 채 두 주먹을 하늘로 뻗어올리며 외쳤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너희들은 엘프들처럼 나눠주는 종족이 아니야! 너희들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길, 꽃잎을 사그라들게 하고 구름마저 그슬 리는 미친 불꽃일 뿐이야! 세상의 모든 것 속에 너희들을 투영함으로써,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야!”

과우우우! 이제 주위의 공기들마저 소용돌이와 함께 돌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난 한 손으로 그의 어깨 를 붙잡았다. 하지만 물결이 요동을 쳐서 나 역시 똑바로 서 있기 어려웠다. 다레니안의 머리카락은 모두 하늘로 곤두서 있었고 그녀의 얇은 옷은 회 오리 속에서 찢어질 듯이 펄럭거렸다. 다레니안은 그 작은 몸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무서운 비명을 질렀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이야!”

제레인트는 팔을 들어 바람을 막으면서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지지직! 지직! 호수 상공에서 불꽃들이 튕기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사이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번갯불에 의해 가로로 찢어지고 세로로 갈라지고 있었 다. 번갯불이 소용돌이의 첨단을 가격할 때마다 굉음이 울려퍼졌다. 쾅! 콰과광! 호수 전체가 그대로 주위의 산을 집어삼키며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 았다. 지직, 지지직!

“아닙니다! 우리는…………, 어엇!”

말을 꺼내려 할 때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이 마침내 나와 제레인트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난 물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친 듯이 주위를 돌아보며 붙잡을 것을 찾았다. 그때 제레인트가 내 팔을 꽉 붙잡으면서 헐떡거리며 외쳤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이 핸드레이크를 태웠잖아!”

제레인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내 입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고함소리였다. 주위의 소용돌이 소 리도, 번개의 굉음도,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 소리도 순간적으로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팔이 아파서 돌아보니 제레인트가 내 팔을 꽉 붙잡은 채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려 다레니안을 쏘아보았다. 다레니안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사방으로 나풀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두 팔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라구?”

“당신이 당신이………, 후욱! 당신이 핸드레이크를, 태웠잖아! 핸드레이크의, 일생의 소망이던 여덟 별을 파괴했잖아!”

다레니안은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막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핸드레이크에게 무엇을 주었어!”

다레니안은 입을 틀어막고 있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난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무엇을, 후우욱! 무엇을 주었냐구! 핸드레이크를 도운 적이 있어? 그를 이해해 보려 한 적이 있냐구!”

“아아악!”

다레니안은 비명을 지르며 파도 위에 무릎을 꿇었다. 발이 떠올라서 공중에서 볼품 사나운 꼴로 허우적거리면서도, 난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고는 외쳤다.

“당신 멋대로 핸드레이크를 평가하고! 그의 소망을 평가하고!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잖아!”

“아악! 그만해!”

“그의 투쟁이 소용없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제멋대로 그를 드래곤 로드에게 넘기려고 했고! 그의 소망이 부질없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여덟 별을 파괴하고!”

“아아악! 아아아아악! 듣지 않겠어! 그만해!”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제레인트가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허우적거렸지만 난 그것도 무시 하면서 고함질렀다.

“당신이 그의 무엇이기에! 당신이야말로 핸드레이크를 집어삼키려고 들었잖아! 핸드레이크를 핸드레이크로 있게 만들지 못하고! 당신의 핸드레이 크로 있게 만들려고 했잖아아!”

갑자기 다레니안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작은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눈을 태우는 것 같았다. 다레니안은 날 쏘아보면서 말했 다.

“내가 그의 무엇이냐구?”

난 입을 열려고 했지만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몸은 낙엽처럼 흩날리고 있어 사방이 빙빙 돌고 있었고 하늘과 땅의 자리바꿈은 끝없이 계속되 는 것 같았다. 번갯불이 하늘을 쪼갤 때마다 세상은 하얗게 바뀌었고 다음 순간 지독한 암흑이 찾아왔다. 순백색과 검정색은 서로를 끊임없이 침범했 다. 그 혼란스러운 세상의 가운데, 그 중심에서 페어리퀸이 죽일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왜 내가 그의 무엇이어야 하지?”

“그…………… 그럼………… 왜 그를………… 그토록 괴롭………혔어?”

다레니안은 퍼렇게 질려버렸다.

“그를 괴롭혀?”

“그의………… 모든 것을…… 파괴했잖아…………..

“거짓말! 핸드레이크는 날 비난하지 않았어! 그가 비난한 것은 루트에리노야!”

이런 멍청한! 이게 정말 페어리들의 여왕에게서 나올 말인가? 아니면 페어리라는 것이 원래 이 모양인가?

“그건…… 그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뭐라구?”

“이해할………… 수………… 어떻게………… 그토록 지극하게………… 비록 방법은 틀렸지만………… 그렇게 위해 주는………… 자신을 위해 주는………… 사랑하지 않을 ……”

너무 오래 돌았다. 균형 감각은 모조리 사라지고 지독한 어지러움과 희미해지는 세상만이 남았다. 하지만 난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300년간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 내 것도 아니지만, 나완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이 지독한 오해의 고리를 두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벗겨야 한다.

“핸드레이크는………… 당신을………… 이해………… 한 번도………… 당신의 행동에 대해………… 묻지 않았겠지………… 비난하지도, 의미를 묻지도………… 그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너무 오래 버텼다. 세상은 이제 까맣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깨어나면 짙푸른 물 속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