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10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10화

10

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이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잠시 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자 조금 전처럼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호수와 검푸른 숲과 산의 그림자들이 보였다. 달빛을 밟으며 걸어오던 후작은 대략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왔다.

바람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리고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내려오는 것인지 숲 속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잠시 후, 후작의 발걸음 소리와 미미 한 파도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후작은 갑자기 어두워져서인지 고개를 앞으로 조금 내밀어 길시언의 얼굴을 살폈다. 보름달빛이라 서로의 얼굴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다. 과연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태자인가.”

마구 나오는군. 길시언은 잠시 지체했다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렇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시언의 뒤에 있던 우리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는 기분 나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궁성 밖으로 나간 주제에 무리는 이끌어보고 싶었던 모양이군. 졸개들을 졸래졸래 따라오게 하면서 꽤나 잘 도망치던데.”

저놈잇! 샌슨의 입에서 뭐가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시언은 호흡을 좀 고르더니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라. 내 친구들은 어미오리를 졸래졸래 따라가는 새끼오리 같은 네녀석의 사병과는 다른 사람들이니까.” 하핫! 좋아요, 길시언. 몰래 사병을 기르고 있었던 사람에겐 썩 적절한 대답이올시다. 후작은 두 팔을 조금 펼치더니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군. 도대체 왜 궁성의 일에 간섭하는 거지?”

“뭐라구?”

“왜 왕가와 귀족의 일에 간섭한단 말이냐?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는 일에 손을 뻗는 것은 옳지 않아. 너의 그 냄새 나는 방랑자의 생활에나 관심을 쏟으란 말이다, 길시언. 이정표와 오늘 밤 먹을거리에 대한 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피자는 도피자답게 구는 것이 좋은 거야. 왜 세상의 일에 간섭하려는 거냐? 예의도 모른단 말이야?”

“난……, 궁성과 왕가의 일에서 도피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고향은 그곳이다.”

후작은 한 손을 허리에 짚더니 웃으며 말했다.

“네 방에 못질을 하고 달려나간 것을 자랑할 생각인가 보군. 그건 자기 장난감을 자기가 생각하는 한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겨놓고는 아침에 집을 뛰 쳐나가는 코흘리개의 야망찬 발걸음보다 더 웃기는 것이었지.”

“주인의 식기 내용물에 군침을 삼키는 하인의 말 치곤 너무 길군.”

할슈타일의 독설에 대해 길시언도 독설을 구사할 생각인 모양이다. 반란자에 대한 이 은유에 할슈타일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주인이라구? 네가 말하는 주인이라는 것이 뭔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군. 그건 대마법사의 마법 장난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서스 왕가를 말하는 것이 냐? 아니면 떠돌이와 산적, 그리고 북부의 야만인을 끌어모아 만든 이 구멍쥐의 소굴 같은 나라를 말하는 것이냐?”

“바이서스가 구멍쥐의 소굴이라면, 그 구멍쥐의 소굴에 빌붙어 300년 동안 제 살을 키워온 고슴도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양쪽 모두 표면적으론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둘 모두 서로의 본론은 꺼내지도 않고 저런 야멸친 독설만을 꾸준히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속으론 꽤나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다. 후작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내 딸을 돌려줘.”

길시언은 턱을 쑥 내밀면서 말했다.

“그 전에 네가 받을 죄를 먼저 인식시켜 주어야겠다.”

“내가 받을 죄?”

“바이서스 왕가의 은혜를 감히 잊은 배덕자! 왕의 경비 대원과 그의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 그리고 왕의 드래곤을 사사로이 방면한 것! 그리고 분명 금지되어 있을 대규모의 사병 육성!”

길시언은 하나하나의 죄목을 짚으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후작은 무반응으로써 길시언의 말을 달밤의 개짖는 소리로 만들어버렸다. 그 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더 있나? 혹시 떠올리지 못한 모양인데, 조금 전부터 왕실 모독죄도 저지르고 있었다.”

“네놈의 죄가 어디 그뿐이겠느냐! 하지만 지금껏 말한 것만 해도 널 세 번은 교수형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니 바이서스 왕가의 응징은 그쯤으로 해두

겠다!”

“그걸론 모자라!”

이건 누구의 목소리지? 넥슨이잖아!

시오네! 해냈구나! 후작과 우리 일행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의 별들 사이로 높게 떠 있는 팬텀 스티드들의 모습이 보였다. 두 마리의 팬텀 스티드 위엔 각자 넥슨과 시오네, 그리고 자크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핫! 해냈군!”

내 웃음소리에 샌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날 바라보았지만 운차이가 먼저 빠르게 말했다.

“네가 소란을 떨고 시오네가 구하는 양동 작전이었냐?”

“예! 그래요.”

운차이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조그만 꼬마 녀석이…………. 적국 간첩과 함부로 그렇게 손을 잡으면 못 쓴다.”

“협박받아서 한 거라구요! 협력하지 않으면 잠든 우리 동료들을 다 죽이겠다고 말했어요!”

샌슨은 이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운차이는 씩 웃더니 다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었겠군. 알았어.”

후작은 이를 악물면서 고개를 돌렸다. 메드라인 고개에선 횃불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야 넥슨의 탈주를 알아차린 모양이군. 하늘에 떠 있는 팬텀 스티드들은 호수의 경계에서 꽤나 떨어진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오네는 정말 이 호수 근처에는 다가오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조심하는 것인가? 넥슨은 조금 숨찬 목소리였지만 날카롭게 외쳤다.

“바이서스 왕가는 빠져! 저 늙은 구렁이에겐 내가 받을 빚이 있다!”

길시언은 의아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넥슨휴리첼! 네가 받을 빚이 무엇이란 말이냐? 독수리와 들개는 동업자가 아니었던가? 같은 반역자들끼리 서로를 증오하는 까닭을 모르겠군.” 넥슨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후작이 말했다.

“돌아와, 넥슨.”

“닥쳐! 이 더러운 놈!”

후작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마치 말썽만 부리는 학생을 앞에 둔 선생 같은 얼굴이었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네가 어떻게 해서 태어날 수 있었는지 모른단 말이야? 멋대로 철부지 짓을 하다가 산산조각 난 주제에 끝까지 나에게 반항하 려는 거냐?”

뭐야? 어, 어라?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넥슨의 미친 듯한 고함소리가 호수 전체에 울려퍼졌다.

“개만도 못한! 더러운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

샌슨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들개와 독수리가 싸우는 것은 대개 썩은 고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여기선 썩은 고기보다 더 복잡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고마워. 다음에도 종종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줘.”

샌슨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후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인 거지? 우리는 모두 잠시 잠자코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우리들이 입을 다문 사이에 후작은 다시 차라리 친근하게 들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 넌 기억하고 있을 거야.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을 누가 살려줬나? 조각나 버린 네 머릿속에서 그것도 사라져버렸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꺼낼 리가 없으니까. 대답해 보아라. 누가 널 살려줬는지.”

“개자식!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게 했어!”

뭐야? 카뮤 휴리첼의 죽음 말인가?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네놈이 우리 아버지를 죽게 했어!”

“그렇지 않아, 넥슨. 그건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곧 알려질 사실이었다. 카뮤는 네 아버지이긴 하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선택한 멍청한 자였을 뿐이야. 넘볼 수 없는 것을 넘보았지 않느냐. 형의 아내를 건드려 인륜을 파괴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파괴한 자였어. 그는 그 죄를 받아 죽었을 뿐이야.”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잠깐, 조금 전 후작이 그렇게 말했나? 길시언이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후작이 그 밀통을…”

로넨 휴리첼에게 고자질했구나!

맙소사, 그렇게 된 것이었군! 할슈타일 후작이 아멘가드 휴리첼과 카뮤 휴리첼의 밀통을 알아차리고는 로넨 휴리첼에게 귀띔한 것이었군. 그래서 로 넨 휴리첼은 카뮤를 죽여버리게 된 것이고. 넥슨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웃기는 소리! 넌 우리 아버지를 시기한 거야!”

“넥슨!”

“할슈타일 가문의 그 누구도 라자가 될 수 없었던 크라드메서, 우리 아버지 카뮤 휴리첼이 그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아버 지를 시기한 거야! 그리고 크라드메서를 도로 빼앗기 위해 우리 아버지가 죽게 만든 것이고! 인륜 좋아하시네. 네놈의 더러운 속셈을 치장하는 데 고 귀한 말을 써먹지마!”

이런…………, 말도 안 나오는…………. 샌슨, 뭐라고 이 상황을 속시원하게 표현할 말 같은 거 없을까? 그러나 샌슨도 입을 쩍 벌린 채 대화를 듣고 있을 뿐 이었다. 오히려 운차이가 눈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말했다.

“Kjaeri, Talkomana ziishinu vohai………….”

“무슨 뜻이에요?”

운차이는 내 질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그저 이 지독한 이야기에만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아귀 다툼을 벌이고 있는 들 개와 독수리의 소란 같군! 그때 할슈타일 후작이 다시 외쳤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라! 이 녀석, 아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뭐야?”

“로넨 휴리첼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부인까지 죽이려 했을 때 그녀를 구한 것은 나였다. 그래서 네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 내가 없었다 면 네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겠나! 그런데 내가 카뮤 휴리첼을 시기했다고? 아멘가드를 구함으로써 너 또한 구해 낸 내가 말이냐?”

“핫하하하!”

넥슨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화를 낸다거나 어이없어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껄껄 웃다니? 넥슨은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그렇다!”

“네가 우리 어머니를 구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네가 살아 있는 것 아니냐!”

“교활한 여우가 자기 꾀에 빠졌군. 멍청이, 난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어! 그때의 상황이라면 우리 어머님께서 이미 들려주셨단 말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넥슨을 쏘아볼 뿐이었다. 넥슨은 잔혹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내가 직접 말해 볼까? 우리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옆에 있었다는 말이지! 즉, 네놈은 우리 아버지가 그 형의 칼에 맞아죽는 것을 방관한 다음 우리 어머니를 구해 낸 것이다. 내 말이 틀렸나!”

할슈타일 후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찌푸린 얼굴로 허공을 쏘아볼 뿐이었다. 넥슨은 길게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유도 말해 볼까?”

“그럴 필요 없어.”

“핫하하! 난 그것이 궁금했어! 네가 왜 우리 어머님을 구해 내었는지 말이야.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로 오랫동안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만.”

“결국은 네놈이 모으고 있는 드래곤 라자 꼬마들이 내겐 좋은 힌트가 되어주었지. 그리고 하슬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선 완전한 확신을 얻었지!” “그만 두라니까!”

“드래곤 라자의 혈통 창조!”

혈통 창조? 드래곤 라자의? 어, 그거야 할슈타일 후작의 유명한 악행이잖아.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을 왜 말하는 거지? 후작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어느새 기운 달은 넥슨의 등 뒤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넥슨은 이제 달을 보고 우짖는 한 마리 늑대처럼 보였다. 그는 길게 울듯이, 그러나 웃으며 외 쳤다.

“핫하하하! 디트리히를 손에 넣기 위해 그 어머니를 죽였듯, 날 얻기 위해 우리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이겠지? 카뮤 휴리첼이라는 당대 최고의 드래 곤 라자의 핏줄을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잖은가!”

엑셀핸드. 부탁이니 이제 뒤에서 내 머리를 때리는 짓은 그만 둡시다? 그러나 엑셀핸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렇다면 왜 이리 머리가 아 픈 거람. 관자놀이는 누가 짓눌러대고 있는 것 같았고 이마 한가운데에서는 소나무라도 하나 자라나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뿌리들이 파고들 어……………,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는군.

샌슨은 자꾸만 칼을 뽑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기 위해 애쓰느라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칼을 뽑아들어 후작을 후려쳐버리고 싶다는 말이겠지? 그거야 내 마음도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구, 샌슨. 다레니안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난 당장 후작을 무릎꿇려 놓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등에 그의 죄를 모조리 새겨주겠어. 지독한 인간 같으니! 사람을 뭐로 취급하는 거야!

샌슨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후자악! 저 말이 사실인가앗!”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밤하늘에 떠 있는 넥슨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뭘까. 길시언 은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내 말을 정정해야 되겠군. 네녀석에겐 교수형은 너무 자비롭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후작의 머리가 휙 움직였다. 후작은 이제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길시언을 쏘아보았다.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야수가 노려보 는 것 같은 시선. 그는 입매를 들어올렸지만 웃는 것은 아니었다.

“거지와 부랑자들의 왕자께서 황송스럽게도 내 죗값을 평가해 주시는 건가?”

놀랍게도 길시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나는 유피넬의 저울대 노릇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자질밖에 갖추지 못한 자다.”

길시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그것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제방 같은 단단함이었을 뿐이다. 그 목소리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힘은 몸이 아프도록 실감나게 느껴졌다. 길시언은 말했다.

“하지만 난 바이서스다. 그리고, 이제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에게 존문한다.”

후작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쇳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릿! 네가 네 여동생처럼 재가 프리스트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네가 어떻게 아샤스께 직접 존문한다는 말이냐! 피 대신 구정물이 흐르는, 바이 서스의 이름을 가진 그 몸에 어떻게 신을 담겠다는 말이냐! 헛소리를 지껄이지 맛!”

“피 대신 구정물이라구?”

길시언은 검을 쥐었다. 운차이가 빠르게 다가서며 말했다.

“당신은 맹세했어. 그리고 다레니안의 경고를 잊지 마.”

“크으윽!”

길시언은 고함을 질렀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할슈타일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후후후. 맹세를 지켜라, 아샤스의 기사. 아샤스의 영광을 지켜라.”

길시언은 목의 핏대를 모조리 곤두세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슈타일을 바라보았다. 제길, 저놈은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내려왔다는 것을 이용 하는군. 그때 허공에 떠 있던 넥슨이 속시원한 한 마디를 외쳤다.

“할슈타일. 난 맹세한 기억이 없다.”

후작은 다시 당황한 얼굴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그는 뒷걸음질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넥슨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시오네라고 했던가? 내 동료라고 했지? 내 몸을 구해 주었다면 이제 내 의지도 구해다오. 저 쓰레기를 파멸시키도록 도와다오!”

그러나 시오네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넥슨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뭘 하는 거야!”

그제야 시오네는 낮게 대답했다. 간신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넥슨. 난 저 호수로 다가갈 수 없어. 저곳은 페어리퀸의 영토야.”

“빌어먹을! 허락을 구하면 되잖아!”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어쨌든 난 다레니안의 영토에 다가갈 수 없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 계획 때문에라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 “네, 네 계획?”

시오네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뭐라고 짧은 몇 마디를 말했고 그러자 팬텀 스티드들은 아무런 울음소리나 발굽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넥슨은 발악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날 도와줄 수 없다면 내려줘! 네 도움 따위는 필요없으니 내려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시오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팬텀 스티드들을 돌렸고 유령의 말들은 산으로 가려진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넥슨의 고함소리가 계속 울려오는 가운데 그들은 완전히 산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운차이가 짧고 강하게 말했을 때였다.

“칫! 가버렸군.”

아, 물론 넥슨은 갔지? 그러나 고개를 내려보자 운차이가 말한 것이 넥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어느새 호

숫가를 떠나서 고개를 되짚어 올라가고 있었다. 운차이는 갑자기 살벌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더니 낮게 웅얼거렸다.

“쫓을까.”

길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없이 찌푸린 눈으로 고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샌슨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길시언과 후작을 번갈아 보 는 사이에 후작은 이미 고갯길을 꽤나 올라갔다. 너무 늦었군. 지금 쫓아가 봐야 후작의 부하들과 만나기밖에 더하겠어. 길시언은 그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다.

“아니. 돌아가자.”

말을 마치자마자 길시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선더라이더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갑자기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호수 쪽을 향해 똑바로 서더니 말했다.

“오늘 저녁, 여러 번에 걸쳐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조력에 감사합니다. 페어리퀸. 후작을 저지해 주시고, 후치를 도와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페어 리퀸의 이름에 영원한 영광 있기를.”

길시언은 그렇게 말하더니 무거운 동작으로 선더라이더 위에 올라탔다. 그 다음 내가 호수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핸드레이크의 다레니안.”

더 할말은 없군. 나도 뒤로 물러났다. 샌슨은 머쓱한 표정이 되더니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에, 고맙습니다!”

샌슨은 그렇게만 말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운차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샌슨의 등 뒤에 올라탄 채로 우리 일행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샌슨의 등 뒤에 앉아 고갯길을 올라가면서 난 뒤를 돌아보았다. 호수에서 뿜어 올라오던 붉은 광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레브네인 호수는 그 저 고요한 밤의 산중 호수였을 뿐이다. 검게 반짝이는 잔잔한 수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의 그 엄청난 소란은 현실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고갯 길을 올려다보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후작 일행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피고 있던 모닥불을 꺼버리고 모두들 횃불을 드는 모양이다. 곧장 우 리들을 뒤쫓아 올 생각인가? 그러나 잠시 후 횃불들은 메드라인 고개를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작이 돌아가는데?”

내 말을 들은 샌슨은 잠시 슈팅스타를 멈추고는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길시언이 말했다.

“페어리퀸 때문에 호숫가의 길을 이용할 수 없으니 호수를 우회하려는 모양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어쩔 수 없겠지.”

“아, 그런가요.”

끝까지 쫓아오겠다는 말이지. 하지만 우회로를 이용해야 할 테니 빠르게 쫓아오지는 못하겠지. 좀 느긋할 수는 있겠군.

느긋할 수 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먼저 시작한 것은 샌슨이었다. 샌슨은 논리적이고도 이성적인 대화라는 고상하고도 품위 있는 수단을 깨끗이 무시해 버리고는 내 팔다리를 꺾어대 기 시작했다. 그리고 샌슨에게 팔다리를 꺾이면서 칼의 점잖게 탓하는 말을 듣는 것은 정신 건강에 대단히 해로운 경험이었다. 제길, 사춘기를 아슬 아슬하게 넘긴 연약한 청소년의 가슴에 일생을 갈 앙금을 남기면 어쩌려고옷! (아이, 닭살스러워라.)

“협박당했………, 흐어아각!”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네 독단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뭐라고 특별히 변명할 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먼. 네드발 군. 물론 자네 의 그때 그 상황을 유추해 보자면 자네의 그 불유쾌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는 차분한 생각과 충분한 고려가 동반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네의 결정과 그 결정에 따라 발생하게 된 그 이후의 해괴망측하고도 놀라운 사 건들의 연속 가운데에는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구해 보자면 자네의 결정은 여러 가지 각 도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제발 그렇게 긴 문장으로 말하지 말라구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잖아. 게다가 칼이 길게 말하면 길게 말할수록 샌슨의 공격도 길어지잖아요! “흐험, 참, 그거. 요 녀석아! 요령도 없었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깨워놓고 볼 일이 아니냐?”

얼씨구, 엑셀핸드까지.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그만하지요, 칼, 엑셀핸드, 후치도 협박 때문에 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 내가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에게 최고 품질의 초 열 상자 정도 선물할 용의가 있어요! 그러나 칼은 매정하게 고 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일행들이 아까 저녁에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서 간신히 후작과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았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네드 발 군은 그 수고로움을 완전히 무로 돌릴지도 모르는 일을 저질렀단 말입니다.”

“협박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제 용서하시죠.”

“음…………, 알겠습니다. 퍼시발 군? 이제 그만 네드발 군을 풀어주도록 하게.”

그러자 샌슨은 콧소리가 많이 섞인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지? 이거 놔라, 임마! 콧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쑤셔넣지 말란 말이다!”

내가 어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인가? 흠. 난 잡아당기고 있던 샌슨의 코를 놓아주면서 외쳤다.

“그럼 샌슨도 내 귀 놓으라구!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게 모양이 이상해지겠잖아!”

“개성 있게 만들어줄 수 있었는데.”

“다시 집어넣을 거야!”

잠시 후에야 간신히, 두 헬턴트 사나이는 필사의 사투(?)를 멈추고 원래의 우애 어린 관계로 돌아갈 것을 굳게 맹세했다.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세 번째 헬턴트 사나이는 한숨을 쉬면서 마법검의 왕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네드발 군 덕분에 많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겠군요.”

길시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칼은 날 바라보면서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돌맨 할슈타일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단 말이지. 그리고 내일쯤 조우하게 될 거라고?”

“예. 시오네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후작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후작에게 크라드메서를 내어줄 수는 없게 되었군. 이제 목표가 두 가지로 늘어난 셈인가. 크라드 메서가 발광하지 않도록 라자를 연결시켜 준다. 그러나 후작과 관계된 인물은 저지한다.”

칼은 그렇게 정리해 보더니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우울해 보이는 얼굴을 얹어두고 있었다. 칼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레니 양.”

“예.”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뭐 특별히 더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없어요.”

레니는 마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친부의 말과 행동에서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일까?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럼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일을 도와줄 거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레니는 잠시 대답을 보류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조금 들어올리더니 주위에 둘러앉은 우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서 로 모르는 척하면서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던 나와 샌슨에게 마지막으로 머물고 나서,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저건 무슨 의미이지? 앗! 딴 생각하다가 샌슨에게 두 번 연속 옆구리를 찍혔다! 에잇, 난 재빨리 세 번 연속으로 샌슨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샌 슨은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내 옆구리를 네 번 연속으로 찔렀다! 이이이잇!

“할슈타일 후작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저에게 부탁을 하고 이곳까지 절 데리고 온 것은 여러분이에요. 그리고 제가 하겠다고 한 일은 끝까 지하겠어요.”

레니는 최대한 빠르게 말했다. 듣고 있던 네리아는 씨익 웃더니 레니의 어깨를 안았다.

“자랑스러워, 레니.”

“네리아 언니.”

아…………, 우리는 왜 저처럼 우애로울 수가 없을까. 왜 나와 샌슨은 서로를 포용할 수 없단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야. 그럼. 시정해야 돼. 우리는 서로 를 포용해야 돼. 그러나 먼저 샌슨의 옆구리를 가차없이 다섯 번 찌르고 난 다음에 결국 샌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난 그 의 다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구르는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칼이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모두들 피곤할 테니 잠시 눈을 붙입시다. 후작 일행들이 호수를 우회해서 다가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쯤 늦어질 겁니다. 원래는 이틀쯤 늦어지지만 저 사병들은 훈련이 썩 잘되어 아마도 네 발로 걸을 테니 두 배로 빠른……………, 죄송합니다. 임마!”

“아, 예. 그럼 쫓기는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겠군요. 모두들 쉬도록 하십시다. 하지만 내일은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합시다. 돌맨 할슈타일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우리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기는 어려울 테니, 어떻게든 그들을 피하도록 하십시다.”

제레인트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런데요. 이 갈색 산맥이 넓긴 하지만 끝까지 그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뭔가 대책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 침버 씨. 우리가 성공한다면 그들은 달아나야 되겠죠.”

“예? 아……………, 그렇군요!”

그래, 우리가 성공한다면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는 거지. 그럼 할슈타일 후작이고 돌맨이고 간에 모조리 달아나기 바쁠 테지. 하하하. 샌슨 의 아래에 깔린 채로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자 샌슨은 더욱 집요하고도 냉혹한 공격을 퍼부어왔다. 맙소사! 계집애들도 아닌데 꼬집냐! 도 저히 참을 수 없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 그 어두운 배후의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온 가장 무서운 공격을 받아보아라!

“으핫하하하! 그만, 그만 간질여, 헥, 우키키키! 으칼칼칼!”

칼과 길시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꿈속인가? 그렇진 않았다. 왠지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유로서는 조악하지만 어쨌든 나는 자면서 뒤척거리다가 눈을 뜬 것이고 그때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아 있는 칼과, 그리고 그 옆에서 그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는 길시언을 보게 된 것이다. 다시 잠들려고 할 때 길시언이 말했 다.

“대마법사는 무엇을 원한 것일까요.”

그는 프림 블레이드를 옆에 세워두고는 두 손으로 작게 피워둔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칼은 장작 하나를 집어 불 속으로 던지면서 대답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든 종족들이 자신의 부조리를 벗어나게 되는 것을 원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저녁 페어리퀸이나 할슈타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잠이 들려다가 다시 깨어버리는데. 길시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걸. 난 눈을 살짝 감으면서 숨소리를 고르게 하며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 칼은 차 분하게 말했다.

“무슨 기분을 느끼셨습니까.”

“종족의 부조리라는 것이 과연 뭔지를 말입니다. 난 오늘 저녁 할슈타일과 페어리퀸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대립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칼도 보았 “지요?”

“예.”

“다레니안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아, 거리가 멀어서 그때의 대화는 듣지 못했겠군요.”

“아뇨. 아인델프 님이 다 전해 주었습니다. 아인델프 님은 드워프의 굉장한 청력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칼도 다레니안이 물러난 그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으셨겠군요?”

“예.”

길시언은 앉은 자리가 불편하다는 듯이 몸을 좀 뒤척이다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야 핸드레이크를 초상화로밖에 보지 못했고, 그리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식으로 전해 들은 작은 일화들에서 간 신히 그 대마법사의 거대한 윤곽의 일부분을 추측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레니안이 할슈타일에게서 핸드레이크의 모습을 느낀다는 것은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지요. 길시언과 마찬가지로 인간 아닙니까. 페어리퀸께서 왜 그렇게 느끼시는지 짐작하기는 지난한 노릇입니다.”

“예. 나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말입니다, 그것이 페어리의 부조리냐 하는 것입니다.”

“페어리의 부조리라구요?”

“부조리라면 너무 어감이 강하고, 단점 정도로 할까요. 어쨌든 그것이 우리와 페어리 사이의 이질점일까요? 그녀는 세계를 건너뛰고 차원을 건너뛰 면서도 우리가 바이서스와 일스를 보면서 느끼는 정도의 이질감밖에는 느끼지 못할 겁니다. 맞습니까?”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예. 그렇다면 그녀는 너무 거시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어서 우리 인간들, 이 개개인 같은 미시적인 존재들을 서로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이 아닐까요? 할슈타일과 핸드레이크라니,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글쎄요.”

“동의하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는군요?”

길시언의 말에 칼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핸드레이크가 과연 미시적인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길시언.”

“인간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세계를 재편성해 버리겠다는 그 굉장한 야심, 신이 되려고 든 터무니없을 정도의 상상력, 그리고 드래곤 로드를 쫓아버릴 수 있는 그 추진력. 멋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점에선, 비록 방향은 다르긴 합니다만 할슈타일 후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뭐라구요?”

모포 아래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발에서 발가락들이 꽉 오므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카아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칼은 모 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도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되니 짐보따리를 풀면 곤란하겠지요.”

“칼, 저…….”

“전 페어리퀸의 입장이 되어보려 한 것뿐입니다. 조금 전 제가 핸드레이크를 거론하면서 말했던 그의 특징들을 기억하시겠지요? 이제 할슈타일로 바꿔볼까요?”

“예?”

“드래곤 로드가 정한 드래곤 라자의 시한을 자기 맘대로 늘려버리겠다는 그 굉장한 야심, 라자의 혈통을 모아 새로운 종족…………, 예, 난 새로운 종족

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혈통에 의해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겠지요. …새로운 종족, 드래곤 라자를 만들어내겠다는 그 터무니없을 정도의 상상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한점 거리낌 없이 파괴해 버릴 수 있는 그 추진력.”

“칼……!”

“페어리퀸께서 할슈타일의 모습에서 핸드레이크를 느꼈다 해도, 난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부한 말이 좋은 설명 이 될까요. 핸드레이크와 할슈타일은 서로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양극단에 서 있다 해야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닮은꼴이라고 느껴집니다.”

“이해는 됩니다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페어리퀸 보시기엔 그럴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편하자고 만들어낸 윤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분께서 보시기에………….”

길시언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파격적인 말이로군요, 칼, 젠장. 나쁜 꿈을 꾸게 될 것 같은데.

세계로부터 내가 서서히 빠져나올 때, 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레니얼 양은 핸드레이크를 추적하고 있지요. 그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 이제 그녀에게 찬성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마법사는 죽었습니다.”

“예? 아니, 무슨 말씀인지?”

길시언의 당황한 목소리에 비해 칼이 대답하는 목소리는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졌다.

“칸 아디움의 안티고어 시장은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가장 소중한 뿌리이자 긍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대왕 은 한 인간이 아니라 이 나라 자체였고 저 대마법사는 우리의 정신 그 자체였지요. 나 또한 지금껏 그렇게 알아왔고 그렇게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이 젠 아닙니다.”

“칼?”

“대마법사는 죽었습니다. 한 인간인 핸드레이크가 있을 뿐입니다. 여덟 별을 추구했지만, 그 또한 스스로의 부조리를 안고 걸었던 인간일 뿐이지요. 대왕과 마찬가지로. 이제 더 이상 내게 우리의 정신 자체이며 우리의 전설이던 대마법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들었던 그에 대한 모든 이야기, 전 설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된 그의 만가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대마법사의 만가만을 되풀이해서 불러왔을 뿐이고, 단 한순간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야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난 눈을 감고 3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 핸드레이크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