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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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네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눈은 이제 검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닥쳐!”
그러나 샌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네가 핸드레이크를 물어버린 것이군?”
“두 번째다. 닥쳐!”
“세 번째로 말할 기회를 주지. 그래서 핸드레이크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군. 핸드레이크는 아비스의 미궁에서 널 건져냈다고 들었다. 죽이지도 않고 데리고 다니면서 마법을 가르쳐줬지. 그런데 그 대가로 넌 그를 물어뜯어 버린 것이군?”
시오네는 세 번씩 말하는 취미가 없는가 보다. “파이어볼!”
푸화하학! 허공을 날아온 파이어볼이 우리들 앞에 작렬했다. 눈을 감을 사이도 없었다. 거대한 화염구는 우리 앞 4큐빗 허공에서 폭발해 버렸다. 불 똥이 사방으로 튀고 미친 바람이 불었다.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옆을 보자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에델린이 보였다. 그녀의 두 손에는 은은한 빛이 어려 있었다. 시오네는 에델린을 쏘아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는지 볼까?”
에델린은 구슬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이러지 마세요.”
시오네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에델린을 쏘아보았다. 에델린은 탐탁찮은 동작으로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도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그 거대한 손에 비해 볼 때 극히 작아 보이는 동그란 쇠테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일견 복잡해 보이는 도안이 들어 있었다. 코스모스였다.
시오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델브로이의 디바인 마크인가? 에델린은 그것을 꺼내들더니 팔을 그대로 늘어뜨린 채 말했다.
“언니…………. 천천히 생각해 볼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에델린은 시오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겠지요. 너무 뜻밖의 일일 겁니다. 불쾌할지 모르지만, 뱀파이어의 행동 원리가 조용하지만 처절한 집념 과 타오르지만 어두운 정열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난 언니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겠어요.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시오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아올랐나?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오네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너!”
에델린은 손을 들어올렸다. 디바인 마크를 든 손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오네를 말리듯이 가볍게 빈손을 들어올렸다. 시오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 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하세요. 지금은………… 더 말하면 감정만 앞세우게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잠시 헤어지도록 합시다, 언니.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제로 돌려보내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시오네는 에델린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눈을 내려 다른 손에 들린 디바인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쉬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팬텀 스티드를 천천 히 뒷걸음질치게 했다. 허공에서 그대로 뒤로 물러나며, 시오네는 우리들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들!”
무슨 뜻이지? 그녀는 허공 속을 향해 뒷걸음질로 사라져가며 외쳤다.
“꺼지기 위해 타오르는 불꽃! 너희 필멸자들은 항상 그랬어! 좌절하기 위해 달려가는 녀석들!”
시오네는 팔을 거칠게 휘두르며 외쳤다.
“죽을 수 있으면서! 죽을 수 있으면서 그 삶을 값지게 쓰지 못해! 너희 놈들은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해서 목적도, 의미도 없이 달려간 다. 파멸하기 전에 뭐든지 이룩하면 된다고 믿고!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아둔한 멍청이들!”
길시언이 마주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 마! 네가 불멸자라고 믿느냐! 필멸자의 생명에 기생해 사는 주제에!”
이제 제법 멀어져버린 시오네에게서 작지만 강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놈들은 세계에 기생하지 않느냐!”
“우리는 세계를 가꾸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돌려준다! 넌 뭐냐? 넌 필멸자들에게 뭘 준단 말이야! 더러운 흡혈귀, 입을 함부로..
그때 운차이가 길시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길시언은 운차이의 손을 뿌리쳤다. 운차이는 손을 치워주면서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떠들어. 옆에 동생이 있으니.”
길시언은 당황하면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델린은 뒤로 사라져가는 시오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눈빛은 슬퍼 보였다.
시오네는 이제 완전히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시오네가 나타났을 때부터 숨을 죽이고 있던 밤하늘의 별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에델린은 갑자 기 두 손을 올려 가슴 앞에 모으더니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에델린은 거대한 몸을 돌리더니 우리에게 미소를 지었다(그래서 레니는 새파래져버렸다).
“인사가 늦어 죄송하군요, 여러분. 전에 뵌 분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는군요. 전 에델브로이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에델린이라고 합니다.”
네리아는 상당히 주저주저하면서, 레니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에델린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제레인트는 거의 껴안으려 들지나 않을까 의심될 정도 로 열렬히 악수를 청했다. 그는 에델린의 큼지막한 손을 두 손으로 쥐고 흔들면서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제레인트 침버라고 합니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에델린은 지나친 환영에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예, 예.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제레인트는 열정이 담겨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전 오늘 신의 사랑의 광대무변함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에델브로이의 은총이시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장관이었던 것은 엑셀핸드와 에델린의 악수 장면이었다. 엑셀핸드는 온화한 표정으로 발뒤꿈치를 중후하게 들어올렸고 에델 린 역시 화사한 표정으로 허리를 압도적으로 숙였다. 엑셀핸드는 웃으면서도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 참 많이도 자랐군! 네가 나와 키가 비슷했던 것 기억나느냐?”
“예. 엑셀핸드. 제가 그때 많이 무례했지요?”
“하하! 다락귀신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서 기웃거리던 네 모습을 보고 기겁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이젠 혹시라도 지하에서 만난다면 도끼부터 들어올리고 보겠군. 얼굴 좀 단단히 익혀 놔야겠다.”
상대의 감정을 별로 배려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지만 에델린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인사가 끝나고 나서 일행들은 건물로 들어와 식당으로 모였다. 바일하프는 그제야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타나더니 에델린의 모습을 보고선 먼저 기겁했다. 전후 설명을 듣고 난 바일하프는 감탄하면서 말했다.
“이런, 이게 그 에델린인가? 엑셀핸드! 너와 키가 비슷하다면서!”
“언젯적 이야기를 하는 게냐, 요 미친 드워프야! 트롤은 자라지 않는 줄 아느냐!”
두 드워프들의 설전은 일행들의 눈총 속에 사그라들었고 모두들 의자를 잡아 앉았다. 에델린의 경우엔 맞는 의자가 없어서 그냥 물통 하나를 뒤집어 놓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일렁거렸고 일행은 아직 남아 있는 흥분과 무한한 의문 속에 말없이 에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촛불 빛 때문에 생기는 얼굴의 음영은 그들의 표정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동시에 깊어지게끔 하고 있었다.
에델린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칼 씨. 그리고 샌슨과 후치. 모두들 건강한 것을 보니 기쁩니다. 그리고 운차이 씨도.”
운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아, 예. 코다슈 씨 외에는 모두들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코다슈 씨는 칼라일 영지에 남기로 했습니다.”
“코다슈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델린은 고개를 돌려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하군요. 어쨌든 일단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길이시죠?”
“예. 어떻게 아셨는지요.”
“전 여러분들을 찾아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갈색 산맥 아래 이라무스 시에 이르렀을 때 에델브로이의 신전에서 하이 프리스트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께 전후 사정을 모두 전해 들은 다음, 전 이라무스에서 이곳으로 곧장 걸어온 것입니다. 중간에 레티의 프리스트들 과 조우할 뻔했기 때문에 야음을 틈타 걸어오느라 지금에서야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저희들을 찾아오셨다고요?”
“예……. 칼. 제가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들으셨지요?”
“예. 칼라일 영지에서 들었지요. 에델린 양을 키워주시고 마법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그 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드디어 찾으신 겁니 까?”
칼은 네리아나 레니, 제레인트, 길시언 등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 서술적으로 말했다. 에델린은 행복한 표정(일 거라고 생각되는)으로 말했다.
“예. 만났습니다.”
“대단히 축하드릴 일이긴 합니다만, 그에 앞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군요. 그 마법사가………… 핸드레이크입니까?”
에델린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만나뵙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핸드레이크, 역시! 일행들은 바짝 긴장해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듣고 알아차리셨지요.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고, 믿게 되고 나서는 참 많이 울었답니다. 아 버지께서 제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에델린의, 커다란 얼굴에 있기 때문에 작아 보이는 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일행들은 숙연해졌다. 에델린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칼 은 따스한 눈으로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허헛, 참. 세레니얼 양이 여기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루릴? 아, 그렇군. 이루릴은 핸드레이크를 찾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이 자리에 없군, 그래. 에델린은 잠시 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만, 일단 여러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지 않도록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께서 지금 껏 알고 계시는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전해 드려야겠군요. 놀라지 마시길. 저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란 사실………….”
“여덟 종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의 보석이었지요.”
에델린은 입을 쩍 벌린 채 칼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저희들은 대미궁에서 드래곤 로드를 만났고 레브네인 호수에서 페어리퀸 다레니안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 습니다.”
칼은 그러고 나서 지금껏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데미 공주님의 이야기에서부터 하슬러의 이야기, 다레니안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요약해서 들 려주었다. 그 이야기에는 칼의 시각이 조금씩 배어 있었지만 칼은 되도록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중간중간에 제레인트와 나의 부단한 방 해를 받아가며 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여러분들은 핸드레이크가 생존해 있다는 이야기에 놀라지 않으신 것이군요.”
칼은 눈을 조금 내리깔면서 말했다.
“세레니얼 양은….. 그렇게 믿고 있었지요. 세레니얼 양은 핸드레이크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껏 반신반의하고 있었지요. 300년 전 의 인물이라니. 핸드레이크와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는 먼 먼 과거의 일이라는 생각은 태어나서 지금껏 굳어왔던 생각이었지요. 깨뜨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믿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생존해 계십니다. 300년 전의 인물인 저희 아버지께서 지금껏 생존해 계시는 이유는…………, 조금 전 저희 언니와의 이야기를 들어 대충은 짐 작하실 겁니다.”
“예. 그럼, 참, 이거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칼은 허둥거리며 손을 들어올려 휘젓기까지 하다가 겨우 말했다.
“핸드레이크는 현재 뱀파이어인 것입니까?”
누군가 참새 깃털을 하나 가져와 떨어뜨리면 그 충격음 때문에 우리 모두가 쓰러져버릴지도 모른다. 칼의 질문에 대한 에델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은 고드름만큼이나 긴장했다. 에델린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직껏 살아계시죠.”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가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라고? 그때 뭔가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난 내 심장이 무너 진 줄 알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길시언이 피로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는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맙소사………. 이런 비극이!”
아프나이델은 망연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핸드레이크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바이서스의 숨은 아버지인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네리아는 파랗게 질려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가, 바이서스의 아버지가!
페어리퀸, 아아, 다레니안이여! 다레니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300년의 오해가 비로소 풀렸는데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니! 이루릴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얼마나 놀랄까? 그러나 더 큰 비극이 눈앞에 있었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게
된 에델린은 어떻게 된단 말이야! 그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프리스티스인 그녀가? 샌슨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저 빌어먹을 뱀파이어, 그 여자가! 제기랄!”
“그의 노고, 그의 열정이 이렇게 보답받게 되다니! 그 현명하고 모든 종족을 사랑했던 선량한 인물에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비극이란 말인가!”
길시언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제레인트는 입술을 깨물면서 커다란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에델린은 아무런 표정없이 길시언을 바라보았 다. 그때 칼이 말했다.
“비극?”
그것은 그저 길시언의 말을 따라하는 듯한, 어떻게 듣자면 익살스럽게도 들을 수 있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칼의 그 한마디는 왠지 우리들 모두에게 냉수 한 양동이를 퍼붓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칼은 길시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비극이오?”
칼은 다시 말했고 방 안의 공기는 갈색 산맥의 실프들이 모조리 몰려와 장난을 치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피부가 스멀거리는 느낌, 뭔가 크게 당 했다는 느낌, 머리 뒤끝이 곤두서는 느낌. 길시언은 입을 쩍 벌리고 칼을 바라보았다. 그때 난 고개를 돌려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약간 슬픈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는…………, 트롤 프리스티스!
난 턱을 한방 맞은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알고 있었어! 칼은 나른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받쳤다.
“뭐가 비극이죠? 참새가 참새라서 비극이오? 뱀이 뱀이라서 비극이오?”
“예?”
길시언에게 거울을 가져다주고 싶다. 그는 절대로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겠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푸핫하하핫!”
칼을 향해 있던 일행들의 괴상한 시선이 이젠 그 강도를 두 배쯤 높인 채로 나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칼은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후치?”
“파하하핫! 하핫! 인간, 인간! 우하하하!”
죽어도 그 이상의 말을 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난 눈물을 좍좍 뽑으며 웃었다. 맙소사, 길시언! 나의 왕이여, 그런 표정이라니! 운차이, 당신은? 난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어둠 속에 서서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항상 불만족스러운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난 자이펀의 전사는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핫! 참새가 참새라서 비극인가? 뱀이 뱀이라서 비극인가?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라서 비극인가?
네리아가 내게 다가와 부드러운 동작으로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후치. 괜찮다구. 아무 일도 아니야………….”
맙소사, 그녀는 내가 잠깐 정신이 이상해진 줄 알고 있다! 미치겠네, 으킬킬킬! 칼이 에델린에게 말하는 나직한 목소리는 내 웃음소리 가운데서도 잘 들려왔다.
“후치 군을 좀 도와줘야겠군. 에델린 양, 핸드레이크께서는 뱀파이어이며, 그리고 절대로 사람을 해쳐서 피를 빨거나 하지는 않겠죠? 이렇게밖에 말 할 수 없는 내가 좀 슬프지만, 당신이 사람을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는 것처럼?”
에델린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킬킬킬킬! 장탄식을 뽑아내던 샌슨과 길시언은 바일하프에게 재빨리 시선을 보내었다.
“혹시 이 건물 안에 내가 들어가 숨을 만한 쥐구멍이 없겠소?”
“이상하군요. 여러분들은 인간들인데, 여러분들은 운명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종족인데 말입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의 입에서 자신의 운명에 굴복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말이 나오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에델린은 꾸짖는 기색도 없이 고요히 말했지만 길시언과 샌슨의 얼굴은 벌게져버렸다. 길시언은 간신히 목소리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칼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겁니까?”
“글쎄요. 왠지 핸드레이크는 자신이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핸드레이크로 남았을 거라고 생각되더군요. 설사 그는 자신이 드워 프가 되었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마법을 못 쓰는 대신 그의 손과 도구로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갔을 인물이니까요. 그 집념만 으로 여러 시대를 풍미한 인물 아니었습니까.”
레니가 찬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도 별로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난 이제 너무 웃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키, 키키, 키리리킥킥!”
“뭐…………,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흡혈의 충동을 이기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지켜나갔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칼은 울림이 별로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원래 불가능이라는 말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대마법사를 믿었던 것이군요!”
길시언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핸드레이크를 믿었습니다.”
길시언과 샌슨은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말했다.
“놀랍군, 후치. 자넨 우리들이 어리석게도 간과한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군.”
샌슨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저 녀석은 칼의 눈빛만 봐도 칼의 생각을 다 알아차릴 녀석이니까요.”
난 여전히 웃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그래? 그렇게들 생각하셔? 천만에. 난 길시언과 샌슨의 실수 때문에 웃고 있는 것 이 아니다. 으헷헤헤! 이거였어. 난 이제 루트에리노 대왕을 알았고 핸드레이크를 ‘느꼈다. 이것이었나? 대왕이시여! 이것이었군? 핸드레이크! 이 게 바로 인간의 신전, 인간의 신화라는 말인가? 불가해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인간화. 세이크럴라이즈는 인간의 무기가 되었고!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 가 된 것은 다시 없는 커다란 비극이고! 펠레일은 50명의 꼬마들에게 자기를 바치고! 핸드레이크는 여덟 종족에게 자신을 바치고! 푸핫하하하!
당신들 모두 갈데없는 머저리들이었어!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머저리 영웅들이여! 아, 아. 아마도 영웅들은 대개 머저리여야 할 거야. 그래야 만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우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머저리 영웅 나리들. 당신들은 기막힐 정도로 닮은 꼴이었단 말이야!
당신들의 우정에 영원한 경의를! 당신들 정말 멋져!
에델린은 빠르게 설명했다.
“시오네 언니는 분명 아버지를 사랑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버지는 언니를 아비스의 미궁에서 나오도록 해주었으며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그 분의 마지막 전인으로 삼으셨지요. 모든 종족에 대한 당신의 차별 없는 사랑을 언니에게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오네 언니도 분명 그것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워했을 거라고도 믿습니다.”
에델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사랑이라는 것이 정녕 어떤 것인지 저는 파악하기 힘들군요. 그리고 그 점에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시오네 언니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소유욕………….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뱀파이어의 사랑, 피에 대한 갈망, 생명에 대한 애정은 성도착자의 그것과 비슷하 다던가요.”
“어머!”
레니는 기겁해서 화다닥 물러나며 자기 얼굴을 가렸다. 나도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으으음. 내 얼굴이 너무 빨개지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리고 저의 아버님께서 노쇠하여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시오네 언니가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과정이 어떻게 된 것 인지는 아버지께서도 잘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에델린은 말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나나 레니 때문이겠지. 하지만 에델린. 사실 이 방 안에서 당신의 이야기 뒷면의 이야기를 눈치 못 챌 사람이 있다 해도 난 포함되지 않아요.
유혹했겠지. 아마 핸드레이크는……………, 그걸 생각하기만 해도 머릿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 시오네는 인간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바라봐 온 핸드레 이크를 아버지로서, 그리고 동시에 남자로서…………. 그리고 그는 지독한 성욕의 노예가 되어 하늘과 땅이 통째로 바뀌는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시오네에 게 물려버렸겠지. 그것이 뱀파이어의 방식이니까. 그리고 나도 언젠가 당할 뻔했던 것이고. 그것은…………… 진짜 부녀가 아니었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부 녀의…………, 관두자! 젠장. 핸드레이크의 전언에 나타난 그 과장된 부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군.
아마 나 외에도 그걸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실내의 분위기는 상당히 끈적하면서도 우울하게 바뀌었고, 그래서인지 에델린은 서둘 러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뱀파이어의 생을 얻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대마법사셨던 아버님께서는 뱀파이어의 부작용을 상당 부분 이겨내셨습니다. 정 확하게 어떻게 이겨내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께서는 햇빛 아래에 노출되어도 상관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흡혈의 욕구도 상당히 억제하실 수 있으시답니다. 라이칸스롭은 대개 달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지요. 뱀파이어들도 대부분 보름달이 뜰 때 흡혈의 욕구를 강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은 찾아오는 그 욕구도 상당히 억눌렀다고 하시더군요. 도저히 참지 못할 경우엔………… 동물을 이용한다고 하시더군요.” 조금 전부터 레니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에델린은 레니의 얼굴을 보더니 생긋 웃었고 그러자 레니도 힘없이 웃었다. 에델린은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차후에 훨씬 더 길게 할 시간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칼은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예. 저희들에게 용무가 있다고 하셨지요?”
“예. 아버님, 그러니까 핸드레이크께서는 여러분들의 여행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다. 물론 옆에서 보는 것처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 분에게는 나름의 방법이 있으시니까요.”
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투시 마법쯤은 그분께는 우스운 일이실 테니까요. 하아………… 그분이 아직 살아 계시다니.”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절 보내어 여러분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용무가 있는데, 아버님께서는 절 통해서 제 언니와, 제 동생에게 각 각 말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순간 우리들은 어리둥절해 버렸다. 칼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시오네…… 양을 말씀하시는 것일 텐데, 동생은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델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왠지 그 시선이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짐작이 가는 듯했다. 난 에델린의 시선을 보기도 전에 먼저 그 사람을 바라보 았다.
다레니안의 애칭을 가진 소녀. 에델린은 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대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방 안은 단지 괴괴한 고요만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서 프리스티스가 드래곤 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구의 소녀 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트롤을 바라보았다.
“레니 양.”
갑자기 레니의 입이 열렸다. 그것은 폭발과도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저에게 아빠를 몇 명이나 만들어주시려는 거예요! 전 그레이든 씨의 딸이에요. 제발 저에게 더 이상의 아빠를 주지 말아요! 다른 아빠는 필요 없어요!”
사람들은 당혹한 눈으로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앙칼지게 말했다.
“전 행복했어요!”
그녀는 자기 말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곧 레니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멋진 옷, 맛있는 음식, 으리으리한 집…………. 그건 행복이, 행복이 아닐 거예요. 제가 행복했기 때문에 전, 전 잘 알아요. 전 행복했어요. 아빠만 있으 면, 아빠만 있으면 계속 행복해요. 다른 아, 아빠는 필요 없어요!”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레니 양은 일스의 그 주점 주인 그레이든 씨의 딸입니다.”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든 씨가 핸드레이크입니까?”
레니 외에는 아무도 샌슨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꽤 아이로니컬한 일이었다. 레니는 놀란 눈으로 에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으으윽. 태어나서 지금껏 함께 살아온 아버지 아닌가. 에델린은 당황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운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레니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레 이든 씨는 당신을 누군가에게서 맡아 키웠습니다.”
“전……, 어떤 여행자가 절 아빠에게 맡기고………….”
그때 칼이 끼어들었다.
“그 여행자가 핸드레이크입니까? 그러니까 레니 양을 일스까지 데리고 간 여행자가 바로………….”
“그렇습니다.”
맙소사…………. 핸드레이크, 정말! 너무하는군! 300년 전의 시간 속에서 일으킨 일들만 해도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인데 지금, 그러니까 현재에까지! 이 시대마저도 당신의 시대인가? 우리는 아직 당신의 아이들인가! 젠장, 집어치워!
에델린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방 안의 누구도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때론 불량품이 아닌가 싶은 헬턴트 사나이가 날 흘긋 바라보았다. 그와 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난 목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삼켰고 칼은 미소를 지었다.
에델린은 레니에게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레니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받은 갑작스러운 충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고 나에게 그녀는 거의 정신을 가누지 못할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연 순간 난 그녀가 역시 항구의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핸드레이크 씨에겐…………, 아빠를 만나게 해주셨으니 감사해요. 제가 어떤 아버지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죠. 하지만 바로 웨일즈 본야드의 그레 이든 씨를 제 아빠로 있게 해주셔서, 전 그것에 감사해요.”
레니는 한점 흐트러짐 없이 말했다. 네리아는 발그레한 볼로 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겠어요. 무슨 말이죠?”
에델린 역시 미소를 지었다.
“길시언! 그만 인상 좀 풀어요!”
길시언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삭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다. 간신히 선더라이더가 제모습을 되찾았는데, 그런데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와 함께 할 수가 없다니!”
아, 물론 길시언이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선더라이더에 올라타 프림 블레이드를 비껴들고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나라도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그랬겠다. 아아악! 제미니, 미안해! 네가 멋진 말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야! 너도 정말 멋진 말이었다구. 하지만 너라도 이런 고지대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테지. 그리고 선더라이더도 마찬가지.
아직 캄캄한 새벽이다. 고지대의 분지인 이곳에 햇살이 닿으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볼 을 할퀴었고 발바닥에 닿아오는 서리의 뽀드득거리는 느낌이 오싹함을 더한다. 꽤 추운걸. 일행들이 들고 있는 횃불들은 주위에 약한 빛을 던지고 있 었지만 분지 전체는 거대한 암흑으로 우리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샌슨은 빙긋빙긋 웃으며 횃불을 들어올리며 다시 한번 자신의 짐을 점검했다. 이틀치 식량은 각자가 챙겨들었다. 하지만 칼잡이들은 무시무시한 무 장을 들고 있었다. 운차이는 자신의 롱소드 외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길시언과 샌슨은 각자의 원래 무장에다가 모두 여남은 개가 넘는 스피어를 메었고, 그 밖에도 석궁과 활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운차이는 싸늘하게 말했다.
“반나절도 가기 전에 지쳐 쓰러져버릴 거다. 곰단지들.”
“나중에 무기 빌려달라고 하지 마!”
샌슨의 유치한 고함소리에 운차이는 피식 웃었다.
“무기는 생명이다. 넌 생명도 빌려주냐?”
샌슨은 할말이 없어졌다는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끄으응.
제레인트는 자신의 지팡이와 함께 부득부득 그 살벌한 밀리터리 포크를 들고 나왔지만 지금 그 두 개를 모두 가슴에 품은 채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꽤나 추운 날씨거든. 네리아는 그런 제레인트를 보면서 히죽 웃더니 레니의 목을 끌어안았고 레니는 손을 모은 채 네리아에게 안겼 다.
레니의 얼굴은?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별다른 표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네리아에게 안겨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니? 괜찮은 아침이지?”
“응? 아, 그래. 좋은 새벽이야.”
난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칼은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약간 떨어진 계단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금부터 최강의 이그누스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그의 느긋한 표정은 그를 그저 밭일을 나가기 위해 일꾼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리며 추위 속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난 코를 훌쩍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에델린의 거대한 몸이 보였다. 에델린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냥 명상을 하고 있는 것 인지, 어쨌든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엑셀핸드의 작은 몸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도끼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약간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약간 피로하지만 맑은 목소리. 난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으으응?
“아니……?”
계단 위쪽에는 손에 횃불을 든 그림자가 서 있었다. 헐렁한 로브와 망토가 새벽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림자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횃불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리고 있는데다가 후드를 내려쓰고 있어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짙은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공중에 떠 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장엄하고 강력해 보이는 모습을 본 순간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핸드레이크?”
마법사는 갑자기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 대단한 영광인걸?”
“아프나이델? 기주가 참 오래 걸리네요.”
“아, 미안. 긴장이 돼서 말이야. 그리고 신경을 좀 많이 썼거든.”
그제야 아프나이델은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의 모습이 좀더 자세히 보이자 아래에 있던 일행들은 놀랐다. 아프나이델은 로브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려 이두박근 근처에서 가느다란 끈으로 묶어버려 팔을 거의 다 드러낸 모습이었다. 손목엔 무슨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리고 허리 역시 밧줄 같은 것으로 질끈 묶고 있었다. 그 밧줄에는 여러 가지 주머니와 함께 대거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망토는 어깨에서 고정시켜 모두 등뒤로 넘겨버린 자세였다. 대단히 전투적인 모습이었다(마법사 치고는).
“춥지 않습니까?”
샌슨은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프나이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허허? 그것 참. 얼굴마저도 바뀐 것처럼 보이는데? 기주를 방금 끝내서 그런지 그의 얼굴엔 약간의 피로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는 온화하면서 동시에 당당한 얼굴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아프나 이델이 입을 열었다.
“추위가 문제는 아니죠.”
그래? 아, 그래. 추위가 문제가 아니군. 샌슨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곧 추위가 그리워지겠군요.”
히하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추위를 느낄 새가 없는걸. 가슴 속이 마구 쾅쾅거려서. 그러고 보면 제레인트는 정말 대단해. 저렇게 추위를 느낀다는 것은 아무런 긴장감도 없다는 뜻인가? 그때 칼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에델린도 앞으로 걸어나왔다.
칼은 우리들 모두를 주욱 둘러보았고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예의 바르게 칼의 말을 기다렸다.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가슴은 싸늘하게, 동시에 불타 오르는 듯했다. 쿵쿵거리는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려올 것 같았다.
기나긴 여정, 그것은 그저 여정이었다. 목적은 아직 먼 곳에 있었고 따라서 크라드메서는 없는 것과 비슷했다. 그저 이곳까지 오는 것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군. 출발하는 거야! 우리는 오늘 그를 만날 것이다. 사상 최강의 이그누스 드래곤!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를 만나 러! 우리들의 눈이 모두 번쩍거렸다.
칼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그의 입에서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왔다.
“어, 춥네요. 빨리 갑시다?”
·출발!”
길시언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떼자니 멋쩍다는 듯이 고함을 질러버렸고 우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어정어정 걸어가기 시작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맥풀려 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째 우리 세 명이 헬턴트 마을을 떠나올 때보다도 더 평범한 발걸음이군. 크라드메서 드래곤 라자 호 송단의 여행 마지막 날은 그렇게 상당히 조촐하게(좋은 말로 해서 그렇고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무신경하면서도 무의미하게 시작되었다. 쳇. 그럴듯한 출정 의식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좀 멋진 대사나 격려사 한마디라도 하고 떠나면 안 되나? 하하하하!
“왼쪽! 왼쪽을 쳐! 후치!”
“누구 왼쪽? 저 녀석? 아니면 나?”
“이런 젠장! 농담할 기운 있으면 휘둘러!”
운차이는 달려들면서 온몸으로 롱소드를 휘둘러내렸다. 그러나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등을 노출시켰다. 그 등으로 거대한 그리폰이 날아들었다. “운차이이!”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를 두 손으로 잡으며 뛰어올랐다. 세상에! 그녀는 그대로 앞쪽의 그리폰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운차이의 등을 노 리는 그리폰의 머리를 공중에서 찔러버렸다.
“케에에엑!”
정수리를 찍혀버린 그리폰은 부리에서 피를 토했다. 그러나 네리아 역시 말도 안 되는 동작을 취한 대가로 공중에서 대책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꺄아아악!”
쿠당! 데구르르! 네리아는 어깨로 떨어지더니 그대로 몇 번 구르며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우리들이 서 있던 언덕에서 아래쪽으로 굴러가 보이지 않 게 되었다. 이런, 젠장! 왜 하필이면 이 언덕 위에 그리폰 둥지들이 몰려 있는 거야!
그리폰들은 우리 일행 중에 엑셀핸드의 모습을 보자 그대로 발작하면서 날아올라 하늘이 새카맣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임마들아! 지금은 너희놈들 보물엔 관심 없어! 저 자식들도 네 발이 달린 주제에 성격은 까마귀를 닮아서 반짝거리는 보물을 무지무지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드워프들과 사이가 나쁠 수밖에. 그래서 그리폰들은 무조건적으로 공격을 개시했고 우린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리아앗!”
“후치, 조심해!”
제레인트의 고함소리.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한다. 밤이냐? 역시 겨울이 다가오니 낮이 짧아지는……………. 아니, 젠장! 덩치가 황소만한 그리폰이 태양 을 가리며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흉맹스러워보이는 발톱들이 불을 뿜었다.
“발톱 소제 좀 해라! 누우며 일자무식!”
난 옆으로 몸을 날리며 올려쳤다. 그리폰의 발은 내 어깨 위를 지나쳤고 놈이 내 위를 지나치는 순간 난 녀석의 뒷다리를 베었다. 케에엑! 피가 팍 뿜 어져 나오지는 않았다. 시시해 보일 정도로 매끈하게 잘린 상처와 찔끔거리듯 나오는 핏방울뿐. 그러나 그리폰은 중심을 잃으며 땅에 나동그라졌다. 콰과광!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흙이 마구 튀었다. 놈은 곧 날개를 퍼덕이며 몸을 뒤집은 것이다. 고양이 같은 날렵한 동작. 덩치가 황소만 하다는 것만 빼고는 아름다울 정도군. 놈은 그대로 뛰어오르더니 쓰러진 내게 달려들었다. 놈의 앞발 두 개와 부리가 세 개의 칼날처럼 날아왔다. 젠장! 그래봐야 넌 새대가리야!
“맛 좀 보자!”
죽을 힘을 다해 허리를 퉁겼다.
“키에엑!”
난 그리폰의 가느다란 목을 물어뜯었다. 가느다란? 뭐, 비슷한 크기의 다른 생물에 비해 볼 때 독수리 목이 라 가늘긴 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리폰의 앞발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가슴이 터지는 이 기분! 사랑에 빠져버렸나 봐. 지독한 노린내와 함께 먼지 맛 이 났다. 그리고 코로 깃털이 파고들어 재채기가 나려고 한다. 하지만 난 녀석의 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폰은 머리를 미친 듯이 휘저으며 계 속해서 내 가슴과 복부를 할퀴어댔다. 이 망할 놈아! 나도 두 손은 자유로워! 이 썩을 녀석, 네발짐승이 날개는 왜 달고 다녀?
“읍읍읍읍!”
젠장! 기술 이름이 안 나간다! 어쨌든 기름 젓기!
“케이이이익!”
놈의 날개와 앞다리 둘, 그리고 뒷다리 하나를 베고 나서도 난 녀석의 목을 물고 있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거의 닿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난 입안 가 득히 들어온 피와 살덩이를 뱉어내었다. 퉤! 이거, 내 사회적 지위에 손상이 가는 명장면이겠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레인트!”
그리폰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제레인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등 뒤로 아프나이델과 레니를 감싸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달아나요!” 그러나 제레인트는 눈을 감으며 무릎을 꿇더니 밀리터리 포크를 올려세웠다.
“테페리여! 당신 뜻대로!”
오, 맙소사! 테페리의 프리스트의 옳은 선택! 제레인트가 들어올린 밀리터리 포크는 기가 막히게도 날아드는 그리폰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리폰은 급히 피하려 했으나 앞발 안쪽을 깊숙이 찔리면서 포효했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길시언이 방패 째로 몸을 날려 그리폰에 부딪혀 들어갔다.
“우아아아!”
그리폰은 나가떨어졌고 길시언은 두 팔을 벌리며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폰은 별 충격도 없다는 듯이 다시 훌쩍 뛰어올 라 길시언을 덮쳐들어 갔다. 길시언은 하늘에서 날아드는 그리폰의 발톱을 방패로 막아냈다. 콰드득! 카가가각! 방패와 발톱이 부딪히면서 쇠 긁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걸렸어!”
길시언은 그대로 뒤로 쓰러질 듯이 보였지만 간신히 뒷다리로 균형을 잡고는 프림 블레이드를 크게 휘저었다. 방패를 치고 다시 날아오르려던 그리 폰의 허리가 싹둑 갈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 다른 그리폰 하나가 달려들면서 길시언의 등을 후려쳤다.
“크어어억!”
길시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엔장! 큰일이다! 그리폰은 그대로 부리를 들어올려 길시언의 목을 찍으려 들었다!
“카리스 누멘의 이름으로!”
콰드득! 살이 몸속으로 말려 들어가며 뼈가 박살나는 기이한 소리. 엑셀핸드가 휘두른 배틀 액스는 그리폰의 등을 거의 쪼개어놓았다. 좋아! 그런데 네리아는?
난 내가 물어뜯은 그리폰을 뛰어넘어 네리아가 날아간 쪽으로 달려갔다. 젠장! 언덕 아래에서 그리폰 두 마리가 쓰러진 네리아를 노리고 있었다. 네 리아는 다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주저앉은 채 트라이던트를 휘젓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네리아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표정은 그리폰으로 하여금 결단의 순간을 앞당기게 한 모양이다.
“캐아악!”
그리폰 하나가 달려들었다. “아아아악!” 이런, 안 돼! 그때였다.
“Peca!”
무섭도록 빠른 뭔가가 달려든 그리폰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달려들던 그리폰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율했다. 운차이였다.
“아아아아아!”
운차이는 그리폰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넣은 채 그대로 앞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좌르르륵! 그리폰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네리아를 비켜갔고 운 차이와 그리폰은 함께 나동그라졌다. 그때 뒤에 있던 그리폰이 뛰어들었다. “운차이!” 네리아의 비명소리가 들린 순간 쓰러졌던 운차이가 뱀처럼 머 리를 쳐들었다. 너무 빨랐다! 운차이가 고개를 든 순간 달려들던 그리폰이 급히 멈춰 섰다. 마치 벼랑으로 달려가던 말처럼 그리폰은 황급히 앞발을 꿇어버렸다.
“Ahn choudar!”
그리폰은 잠시 어쩔 줄 몰라했다. 그걸로 충분! 난 놈의 뒤에서 달려들어 날개를 후려쳤다. “캐애액!” 이런, 맙소사! 놈은 날개를 퍼덕이더니 마치 싸 움닭처럼 훌쩍 뛰어올라 피했다. 네 발 달린 닭도 있냐! 놈은 그대로 자세를 낮췄다. 이놈아, 그럼 나도!
“채썰기! 우아아아!”
탕, 타당, 탕탕! 바스타드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어오른다. 칵! 왜 하나도 안 맞아! 열 번도 넘게 땅을 후려쳤지만 놈은 낮은 자세로 이리 뛰 고 저리 뛰며 모조리 피해 버렸다. 그거 다리 네 개에 날개까지 달려서 무지 빠르네? 어엇! 놈은 갑자기 머리를 뒤틀더니 내 바스타드를 쳐냈다. 놓쳤 다! 이런 젠장! 칼 없으면 몸으로 때우지!
“에라, 뚜껑덮기!”
난 두 손을 얼굴 앞에 엇걸어 눈을 가리며 뛰어올랐다. 놈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난 그대로 놈을 깔아뭉개 버렸다. 케에에엣! 가슴 아래
에서 무섭게 꿈틀거리는 놈의 힘이 느껴진다. 난 되는 대로 고함을 지르면서 고개는 가슴에 박은 채 녀석의 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 는 데다(눈을 뜨고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머리를 후려치는 그리폰의 날개와 몸을 할퀴어대는 발톱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놈이 날뛰어 도대체 잡을 수 가 없었다. 그때 손끝에 아주 미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매끄러우면서 촉촉한… 눈알이다!
“케에에엑!”
내 손가락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다니? 녀석의 눈을 찔러버리고 나서 다시 뒤로 물러나자 머리를 휘저으며 발광하는 그리폰의 모습이 보였다. 바 스타드, 바스타드 어디로 갔지? 그러나 놈의 다른쪽 눈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하필이면 그쪽 눈에 들어간 것이 땅에 주저앉아 있는 네리아였다. 그 리폰의 정신 없는 목동작이 멈추었고 네리아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폰은 땅을 걷어찼다. 그리폰이 뛰어오른 순간 다시 뭔가가 굉장한 속도로 움직였다.
“아아아…..압!”
네리아의 비명소리는 희한하게 틀어막히고 말았다. 네리아에게 달려든 운차이가 그대로 네리아를 가슴에 끌어안은 것이다. 덕분에 그의 등은 그리 폰의 앞발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제기랄, 안 돼! 순간,
쌔애애액!
“케켁!”
달려들던 그리폰은 단말마를 외치며 그대로 나동그라져 굴러가 버렸다. 스피어에 맞아 굴러가는 그리폰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언덕 위쪽에선 샌 슨이 또 다른 스피어를 뽑아들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걱정 마. 샌슨. 난 괜찮으니까. 샌슨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르친 보람이 없다.”
으윽. 잠시 후, 칼잡이들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아프나이델이 간신히 마법을 사용하여 그리폰 한 마리를 구수한 냄새가 날 때까지 구워버리고 칼 이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대자 놈들은 물러났다. 언덕 위에선 엑셀핸드가 아프나이델의 손을 잡고서 그 짧은 다리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이히호! 히호, 히호!”
네리아를 안고 있던 운차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무뚝뚝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네리아가 운차이를 으스러져라 끌어 안고 있었기 때문에 운차이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다. 일어나.”
네리아는 고개를 들더니 운차이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운차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하늘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라니까.”
그녀는 코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 아파.”
운차이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말했다.
“부러졌나?”
“몰라. 아파. 못 일어나겠어.”
운차이는 뭐 씹은 얼굴이 되더니 네리아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자 네리아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아악!”
“뭐, 뭐야?”
“어깨, 어깨도…………. 아까 떨어질 때…….”
운차이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네리아의 허리를 감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네리아는 절뚝거리긴 했지만 간신히 일어날 수 있 었다. 그녀는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고마워.”
“이제 빚은 없다.”
“빚? 무슨 빚?”
“아까 내 등을 구한 것.”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발목의 통증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흐응. 만일 아까 내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운차이는 네리아를 안 구했을까나?”
운차이는 잠시 멈춰 서 자신의 팔 안에 있는 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자신의 발끝만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 실하다. 그렇잖다면 왜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고 있을까.
“모르겠다.”
운차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네리아를 옮기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해죽 웃었다. 흐음. 두 사람 모두 난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군? 이봐, 이봐. 내 가 사이에 없으면 말도 못 나누던 시절이 있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