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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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일행이 모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실제로 쥐가 죽은 것은 아니다. 쥐뿐만 아니라 아직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피냄새는 나는 데.
늘어선 프리스트들은 모두 무서운 눈으로 우릴 올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 굳게 다문 입술,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뒤로 넘겨버린 로브 아 래로 갑옷과 검이 삼엄한 빛을 뿜고 있다. 그들은 왕족을 바라보는 눈길로는 최하급에 속하는 눈길로 길시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길시언은 꿈 쩍도 하지 않았다.
백발 프리스트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길시언은 백발 프리스트에게 선택 가능한 두 가지 상황을 제시해 버렸다. 교묘한 화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는데요, 왕자님? 보통은 선택 가능성이 하나뿐인 제안을 해야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한 것이거든. 그렇잖아요? 이런 말 우습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버리셨어. 왕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칼을 졸라서 당신을 헬턴트 명예 주민으로 추대하게끔 하고 싶은걸요.
백발 프리스트에게 가능한 첫 번째 선택은 품위 있는 태도로 왕가의 존엄을 인정해 주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저들에게 명예로운 양보를 제 안할 수 있겠지. 30명이나 되는 검과 파괴의 프리스트들로 하여금 우리 뒤를 따라오게 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레니와 크라드메서의 계약을 먼저 시도해 볼 수 있겠지. 단, 이 경우라면 우리가 성공하는 즉시 할슈타일 후작께서는 꼼짝달싹할 수 없이 반역자가 되시고 왕실 여관 0층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시겠지.
그 다음 둘째, 왕가의 존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그렇다면 검과 파괴를 상당히 좋아하는 30명의 프리스트들이 일제히 우리들에게 달려들게 되겠지. 우리가 인적 드문 이 갈색 산맥에서 모조리 몰살당하면 할슈타일 후작에 대한 고발인은 사라지게 되니까. 단, 이 경우라면 싸움의 와중에서 돌맨 할슈타일이나 레니의 목숨을 안전하게 담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크라드메서는 자유롭게 깨어나 바이서 스를 향해 상당히 뜨거운 감정 표현을 해버릴 수 있게 되겠지.
아, 난 너무나도 냉철 무쌍해. 그리고 냉철한 사람들은 항상 고민이 많아. 으으윽. 나머지 우리 일행들도 제각기 냉철함을 과시하며 각자의 무기를 불끈 쥐고는 백발 프리스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30여 명의 프리스트들 역시 모두들 칼자루를 꼬나쥔 채 백발 프리스트의 대답만 기다렸다. 양 쪽이 모두 수 틀리면 치고들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가운데 백발 프리스트는 힘들게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왕자여. 레티의 검은 왕가나 그의 백성을 향해 돌려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처음으로 왕가를 겨냥할 거요?”
백발 프리스트가 가까스로 만들어낸 대답은 무참하게 뭉개져버렸고 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껄끄러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나, 그 질문에 대 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나 모두들 성격이 너무 극단적이야, 젠장. 어쨌든 양자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열심히 쥐를 죽이고 있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목소리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지금 왕가는 레티의 검을 협박하는 것인가!”
프리스트들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짧게 깎은 금발머리에서 이마를 가로질러 흉터가 멋지게 나 있는 프리스트였다. 길시언은 곧장 욱 하는 표정으로 그 프리스트를 쏘아보았지만 달려나온 금발 프리스트는 계속 외쳤다.
“이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완벽한 협박이오! 길시언 왕자! 지금 당신은 레티의 영광을 무시하며 그 프리스트를 억압하려 드는…………….”
“닥쳐라!”
백발 프리스트는 일갈로 금발 프리스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금발 프리스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 보고는 뒤쪽에 서 있는 프리스트들이 모두 짓눌린 동조의 표정을 띠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말했다.
“이는 부당한 일이오! 인간의 왕이 프리스트를 협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 저런 무례한 언사를 용납함으로써 파괴신 레티의 검날을 무뎌지게 만드는 겁니까!”
그때 또 다른 젊은 프리스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레티의 입이여. 이것은 레티에 대한 도전 의사의 표명입니다.”
백발 프리스트의 눈썹이 몹시 곤두섰다. 또 다른 프리스트 하나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을 때 백발 프리스트는 고함을 빽 질렀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꼼짝말고 입들 닥쳐라!”
샌슨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스트의 화법치고는 수준급이야.” 옆에서 아프나이델이 킥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백발 프리스트는 자신의 무리를 장악하기 위해 애쓰느라 우리 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누가 이 무리의 입이냐! 너희들 모두가 레티의 팔이지만 입은 하나! 내가 레티의 입이다! 종단에 대한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것이냐!”
뛰쳐나온 프리스트 두 명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저 말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보이
고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른 프리스트들 모두가 불만에 찬 한숨이나 투덜거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백발 프리스트는 그들 모두를 쏘아보았고 마침내 소란이 조금 가라앉고 나자 다시 우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백발 프리스트는 입술이 하얗게 변하도록 굳게 다물고는 길시언을 올려다보았다. 길시언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기가 무거워지 는 느낌은 잠시. 레티의 입이라는 백발 프리스트는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겠소. 길시언 왕자.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드리지.”
길시언의 눈에 섬광이 튀었다. 동시에 뒤쪽에 있던 프리스트들이 모두 허리를 낮추는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살벌한 기분이 드는걸. 저쪽엔 칼이 30자루고 이쪽엔 몽둥이나 도끼, 트라이던트나 밀리터리 포크가 있긴 하지만 칼은 네 자루뿐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호흡을 가다 듬고 나서 차갑게 말했다.
“만일 바이서스 왕가가…………….”
하지만 백발 프리스트는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비명소리? 아니다. 울음소리다. 하지만 꼭 처절한 비명소리처럼 들렸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에 모두들 기절할 만큼 놀라버렸다.
“삐이이이익!”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했다. 하늘 높은 곳에 청회색의 정적 가운데로 하늘의 중심을 찾는 자가 있었다. 세계의 중심을 찾아 외롭게 빙 글빙글 돌면서 날카롭게 좁혀들어가는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다시 한 번 모든 하늘과 그 아래 대지를 향해 포효했다.
“삐이이이익!”
포효소리만이 계속해서 되울리는 가운데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운차이는 입을 열었다.
“독수리다. 이 계절에 희한하군.”
운차이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가 저 새들의 제왕을 보면서 길시언이 느낄 감정, 혹은 다른 이들이 느낄 감정을 짐작해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 하하하!
30명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한결같이 창백해진 얼굴 때문에 시체를 모아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공포를 넘어선 공포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독수리……? 독수리라구?”
“설마? 설마, 독수리가?”
짓눌린 신음소리와 불안과 의심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프리스트들은 모두 뒤로 한두 발짝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엔 이 사태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도록 저려온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 닌가 싶을 정도로 내 맥박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쿵! 쿵! 길시언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잔뜩 잠긴 목소리로 운차이에게 물었다.
“독수리? 독수리가 확실한가?”
길시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운차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래. 독수리다. 그런데 너희 북부 미련퉁이들은 독수리 공포증이라도 있나?”
길시언은 운차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고개를 돌려 백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백발 프리스트는 이를 악문 채로 독수리와 길시언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고 뒤로 물러나던 프리스트들의 얼굴에는 이제 공포의 빛이 떠오르고 있 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를 놓고 있었다. 그리고 돌맨 할슈타일은 정도를 넘어선 불안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핫! 저 나이에 손가락을 빨 고 있다!
길시언은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몸짓으로 소리높여 외쳤다.
“영광의 아샤스의 전령이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
길시언의 목소리는 갈색 산맥 전역에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산울림과 어지러운 머리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다. 길시언은 두 팔을 들 어올렸다가 손을 내려 백발 프리스트를 겨냥했다. 설령 검으로 겨냥했다 하더라도 저 프리스트의 얼굴이 저만큼 하얗게 변하기는 어렵겠지.
길시언은 외쳤다.
“영광의 창공에 한 줄 섬광이 되어! 만물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저 제왕 앞에 말하라! 그대는 바이서스 왕가를 향해 참람된 검 을 겨눌 것인가!”
마치 나도 그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이 독수리가 울부짖었다.
“삐이이이익!”
제레인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뭘 못 믿어요! 하늘에선 독수리 가 울고 땅에선 길시언이 운다. 이거예요, 칼! 백발 프리스트는 가엾게도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 커걱, 그, 그것이, 그것은…”
나의 왕이여! 신의 영광이 독수리의 모습이 되어 지상에 나타나 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 어떤 보석 관이 저 영광의 관에 비할 수 있을까! 산 정상의 바위를 딛고 선 길시언은 영광의 7주 전쟁에서 방금 돌아온 고대의 영웅처럼 보였다. 세류델헨 왕자 앞에 아샤스가 나타났을 때가 저러했 을까? 루트에리노 대왕의 핏줄은 살아 있었고, 맥박치고 있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마침내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는 다 포기해 버린 목소리로 울부짖듯이 말했다.
“그 날개에 뿌려진 햇살처럼 정의롭게! 왕자여. 바이서스 왕가는 인간의 왕입니다!”
털썩. 레티의 프리스트들 중 하나가 그의 대변인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그 옆에 있던 프리스트가, 그리고 또 다른 프리스트가. 이윽고 모든 프리스트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금발 프리스트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돌맨 할슈 타일은 이미 오래전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시리도록 맑게 울려퍼졌다. 30여 명의 프리스트들은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길시언을 경배하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희열에 들 뜬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우리는………… 우리는 신의 것………… 그러나, 그러나 우리가………… 우리가 세상에 있으려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이 몸을 통해…………. 따 라서………… 이 몸의 주인인…… 나의 왕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어라…………. 신께 우리의 사랑을………… 바쳐 영생을 구하고………… 나의 왕께 경배를 바쳐… 명예를 오롯이하라.”
칼은 낮게 신음을 뱉었다.
“맙소사! 멜다로의 노래 아닙니까?”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바라보았다.
“책에서 봤었지요.”
“아아, 그래요. 으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전사에 가깝단 말이죠.”
창공의 독수리는 계속해서 영광의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의 꼭대기에 선 길시언은 타오르는 눈으로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경배를 받고 있 었다. 엑셀핸드와 운차이, 그리고 레니는 이 사태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심하게 꼬고 있었고 운차이는 콧 방귀를 뀌었다.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머나’ 하는 소리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저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 런데 바이서스의 국민도 아닌 제레인트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책에서 본 것만 가지고 이해하는 것인가? 아, 참. 그는 원래 감동을 잘하지. 난 점 점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거칠게 닦았다. 으윽, 제기랄. 속눈썹이 눈알을 찔렀어. 그래서 눈물이 나오잖아. 칫!
갑자기 거의 100퍼센트의 확률로 예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는, 그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 든 영원히 우리를 감동시킬 것이다. 대왕이 드래곤 로드를 무릎 꿇게 만들었듯이, 지금 그 핏줄이 30명의 파괴신의 프리스트들을 무릎 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 정말 싫다! 코끝이 찡해 오잖아. 샌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야 이거 정말, 가슴이 뛰어서 못 견디겠다.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나 역시 잠겨드는 목으로 힘들게 말했다.
“참아봐. 이 순간에 눈물을 보이면 후대에 그 무슨 개망신이겠어.”
“그래, 후치, 알았어.”
샌슨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목을 가다듬었고 그래서 난 눈물을 찔끔거리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길시언은 가슴을 활짝 편 채 독수리 의 눈매로 아래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대들의 정신의 지배자의 권한에는 경의를 바친다. 그러니 이제 그대들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왕족의 말을 들어라!”
“전하!”
“난 여기 계신 레이디를 크라드메서에게 안내할 것이다. 그대들은 나와 내 친구들을 방해할 것인가?”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들의 신에 대한 경의로써 그대들을 방해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자의로 돌맨 할슈타일 공을 모시고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도 록.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경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대륙의 선량한 만민을 위해!”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 말씀의 공정함이 아샤스의 영광을 드높일 것입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미앙스 수도원의 현명한 프리스트들에 대해……………”
“엎드려!”
뭐지? 고함소리. 그리고 방패를 들어올리며 몸을 굽히는 길시언의 모습. 그러나 길시언의 동작은 중간에 멈춰버렸다.
“삐이이이익!”
독수리는 하늘 이 찢어져라 울었다.
“운차이!”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다. 운차이의 찌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약간 높게 들어올린 그의 팔도. 그 팔에는 화살 이 꽂혀 있었다.
“으윽, 젠장…….”
운차이는 허물어졌다. 그러자 그의 팔에 가려져 있던 레니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이 황급히 레니를 끌어당기며 동시에 길시언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텍션 프롬 애로!” 그와 동시에 거칠게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타탕! 탱! 허공에서 화살이 튕겨올랐다. 제기랄! 누군 가 우리에게 사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엎드려! 엎드리라구!”
샌슨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급히 몸을 던졌다. 어디지? 제길! 여기는 사방이 노출된 산꼭대기잖아! 다시 한번 화살이 부딪힐 때 방향을 가늠해 보았 다. 화살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뒤쪽 방향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일행들은 바위 뒤로 몸을 숨겼고 난 바위 위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그 동안에도 화살은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화살들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무시한 채 우리 쪽을 향해서 만 날아오고 있었다. 등 뒤에서 칼이 이를 갈면서 외쳤다.
“빌어먹을! 할슈타일 녀석이!”
“운차이! 괜찮아요?”
제레인트의 고함소리에 이어 운차이의 불만에 찬 대답이 들려왔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제기랄. 팔에 화살을 맞았는데.”
개같은 후작놈과 그 졸개 녀석들이! 우리 아래쪽에 있던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황급히 몸을 돌리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로 연초 록색의 막이 생기더니 그들 전체를 둘러싸서 그들을 보호했다. 길시언은 바위 위에 서서는 프림 블레이드를 위로 들어올린 채 우리들을 보호하고 있 었다. 샌슨은 땅을 기어서 운차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재빨리 대거를 꺼내더니 칼집째로 운차이에게 내밀었다.
“물어.”
운차이는 대거의 칼집을 물었다. 그러자 샌슨은 곧장 운차이의 팔에서 화살을 잡아뽑았다. 선혈이 튀어 샌슨의 얼굴을 물들였지만 운차이는 신음소 리도 내지 않았다. 다만 칼집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레인트, 부탁합니다.”
샌슨은 화살을 집어던지더니 다시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아프나이델이 올라왔다. 난 바위 위에 엎드린 채 팔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안보여!”
젠장! 숲 속에 숨은 채 산 정상을 향해 쏘아붙이고 있어서 녀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내리면서 우리 옆에 엎드렸고 그러자 화살들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거나 바위에 맞아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타당! 탕! 아프나이델은 독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레니 양을 겨냥했습니다. 우연일까요?”
길시언은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가 대답을 거부하자 샌슨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맙시다.” “좋습니다. 달아날까요?” “뒤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것은 싫은데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막아주지 않을까요?”
아프나이델은 턱으로 바위 아래의 프리스트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선 채 연초록색의 방어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쪽 을 향하는 화살은 거의 없었다. 샌슨은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는 한통속이었잖습니까.”
제기랄! 그러고 보니 감동 때문에 잠시 잊었던 사실이다. 아미앙스 수도원은 사실 할슈타일 후작의 주구였지. 저 친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니 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지?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한다? 아프나이델은 프리스트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재까진 그들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것은 침착한 것이라기보다는 갑작스런 상황에서 행동을 결정할 수 없어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칼이 우리 옆으로 기어 올라 왔다. “위치를 포착했습니까?”
“머리도 못 내밀 지경입니다.”
그러자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곧 달려오겠군요. 아프나이델, 준비하십시오.”
“예? 아, 무슨 준비를?”
그리고 화살의 소나기가 멈추었다. 곧이어 정상 아래쪽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산등성이를 따라 전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렇게 중장비를 갖춘 전사들이 날렵하게 산을 달려온다는 것은 거짓말 같다. 샌슨은 나를 돌아보더 니 말했다.
“아무 바위나 집어던져!”
“……..날 거인이나 투석기 같은 걸로 생각하나 본데, 그거 보기는 좋겠지만 잠시만 기다리자구.”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드디어 행동에 들어갔다.
“경계 태세!”
백발 프리스트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차랑, 차라랑!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연초록색 방어막 속에 서 은백색 검광이 눈을 어지럽힌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열 명씩 3열로 섰다. 달려오던 전사들은 당황하며 멈춰 섰다. 전사들 역시 검을 겨눈 채 프리스트들과 대치를 이루었다. 양쪽의 거리는 30큐빗쯤. 그리고 전사들 사이에서 후작이 걸어나왔다.
후작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눈썹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고 관자놀이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눈이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런 파격적인 얼굴을 한 채 후작은 외쳤다.
“뭣 하는 것인가!”
백발 프리스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것이오, 후작. 지금 뭣 하는 것입니까?”
“너! 날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말조심하시오. 아미앙스 수도원은 우정으로서 후작가를 대해왔습니다. 우정에는 친구의 과오를 막는 것도 포함됩니다.”
상황이 의외의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칼은 박수를 치고 싶다는 얼굴로 헤벌레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작은 분통을 터뜨렸다.
“과오? 과오라고! 네놈이 날 배신하려는 것이구나! 왕가에 빌붙을 셈이로군!”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어깨가 동시에 꿈틀거리는 듯했다. 백발 프리스트는 아래턱을 불쑥 내밀었다.
“우리는 레티를 섬깁니다.”
“조금 전 그를 경배한 것은 뭐란 말이냐!”
“레티는 우리들에게 속권의 지배자에 대해 거부할 것을 명하지 않았습니다. 신성함을 경배할 줄 알았던 기사 멜다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의 종복 인 우리들은 신의 자식인 세상의 선민들을 받들어 모십니다.”
하하! 저 백발 프리스트 의외로 능글맞은 데가 있군. 저 말은 조금 전 칼이 들려준 말이잖아. 후작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제 나의 적이냐?”
“아니, 당신도 신의 선민이십니다. 우리는 레티의 적 이외에 그 누구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켜라! 저 일행부터 해결한 다음 너희들의 일을 해결해야겠다.”
백발 프리스트는 이제 팔짱을 끼었다. 로브의 소맷자락이 흘러내리면서 얼굴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팔뚝이 드러났다. 히야, 그 팔뚝 정말 끝내주네. 무슨 기둥을 두 개 겹쳐놓은 것 같군.
“어쩔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백발 프리스트의 말에는 아무리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명백한 시비조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은 마음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왜 말해야 되는가?”
“조금 전 당신들은 검을 뽑아들고 돌격했소. 저 일행을 공격할 작정이오? 말해 두겠는데, 레티의 검 앞에서 부당한 살해는 절대로 용납 못하오. 파괴 의 권한은 레티에게 있소.”
후작 주위에 서 있던 전사들에게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파괴신의 프리스트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무모하게 돌진할 수 있는 사람이 헬턴트 독서가와 폐위당한 태자 외에 누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칼, 나 당신 존경해요.
“날 가로막겠다면 너희들이라고 따로 취급하진 않겠다!”
음, 존경할 사람이 하나 늘었군. 젠장. 후작은 단호하게 말해 버렸고 전사들의 얼굴에는 아찔한 표정이 떠올랐다. 반면 레티의 프리스트들 사이에서 는 피식거리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앞에 나서 있던 백발 프리스트마저도 고개를 조금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프리스트들이 왜 웃는 거지?”
“자신이 있나 보지.”
우리 옆에 나란히 엎드려 있던 길시언이 낮게 말했다.
“저 프리스트들에게 전투 기술은 그들의 신앙이자 그들의 기도니까. 저들은 꿈속에서조차도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고 투쟁을 계속하지. 그래서 아침 이 되면 침대에서 몇 명은 죽어나온다는…………, 이건 내 말이 아냐.”
“아, 예. 알고 있었어요.”
아프나이델은 손을 비비더니 손가락을 꺾었다.
“됐군요. 저 프리스트들이 뒤를 막아줄 모양입니다.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이대로 몸을 돌리는 것이 어떨까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시간을 끌어주 는 동안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겁니다.”
칼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저 두 무리가 격돌하게 되면 사상자가 많이 생길 텐데.”
“그러니까 더욱 빨리 가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성공해 버리면 후작은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쓸모없는 싸움을 계속하려 들 리가 없습니다. 사실 지 금도 덤벼들긴 어려운 상황처럼 보이는군요. 후작의 전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다.”
칼은 눈살을 더욱 찌푸리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제레인트가 치료를 끝내고 운차이의 팔에 붕대를 매고 있었다. 운차이는 아무런 표정도 없 이 붕대를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하겠어.”
제레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붕대를 빼앗아 운차이의 팔을 감았다. 그때 에델린이 위로 기어왔다. 에델린은 우리 옆에 힘들게 몸을 숨기더니 말했다.
“돌맨 할슈타일도 데리고 가야 합니다.”
“돌맨을?”
“예. 레니 양이 거절당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돌맨 역시 데리고 가야 합니다.”
돌맨은? 아래를 내려다보자 레티의 프리스트들 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돌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후작 일행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자기 주위의 프리스트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할슈타일 후작이 위를 올려다보며 패악스럽게 외쳤다.
“길시언 왕자!”
길시언은 움찔했다. 그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샌슨이 재빨리 그의 어깨를 잡아내렸다. 길시언은 샌슨에게 어깨를 잡힌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시언 왕자! 당신은 내 딸을 데리고 있고! 그리고 너 레티의 땡추! 넌 내 아들을 데리고 있다! 유괴범들끼리 잘들 어울리는군!”
“말 조심해!”
“입 조심하시오!”
길시언과 백발 프리스트가 동시에 외쳤다. 길시언은 기어코 샌슨의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제길. 화살이 날아오더라도 프림 블레이드가 보호 해 주겠지. 길시언은 바위 위에 꼿꼿이 서서 후작에게 외쳤다.
“너 이놈, 썩어빠진 반역자야! 누가 네 딸이란 말이냐! 레니 양에게 물어보지. 레니 양! 당신 아버지는 누굽니까!”
오, 맙소사. 난 눈을 질끈 감았고 칼도 신음을 흘렸다. 길시언. 당신에겐 그런 잔인한 질문을 할 절실한 필요성이 없을 텐데. 레니는 아직 소녀야. 자 신의 아버지의 면전에 대고 직접 부정하는 일을 시켜야 되겠어? 이건 조금 전에 칼이 백발 프리스트 앞에 레니를 내보낸 것과는 다른 경우잖아. 레니 는 하얗게 된 얼굴로 길시언을 올려다보았다.
“저, 저, 길시언…… 왕자님?”
“말하는 겁니다, 레니 양! 당신 마음에 있는 대로 말하면 돼요! 저자의 얼굴에 대고 똑바로 말해 주시오! 당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레니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만해요!”
길시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릎을 꿇었다. 털썩.
“그만해요, 제발. 이젠 그만해요. 아버지는, 흑, 아버지는, 내 아버지는 그레이든 씨예요. 이제 더 이상 그런 질문 좀 하지 말아요. 흑, 으흑!”
“……레니야.”
네리아는 울상이 되어 레니를 껴안았고 레니는 네리아에게 안겨 서럽게 울었다.
“어어어! 어어어! 난, 난 모르겠어요. 자꾸 자꾸 이상한 아버지를 만들지 말아요. 난, 난 머리도 나쁘고, 단순하게 살았어요. 드래곤, 으흑! 드래곤 라자 같은 거, 사실 난 싫어요! 그런 거, 그런 거 모르겠다구요!”
“쉬이…………, 괜찮아, 레니야. 쉬이. 기억하렴. 어제 에델린이 해준 말을 기억해. 핸드레이크가 뭐라고 말했지?”
“어어엉! 난 모르겠다구요!”
레니는 이제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개 같은! 개 같은 상황이야! 난 이 상황이 싫어! 길시언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 레니 양?”
그때였다.
뭐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뭐였지? 공간 전체가 한꺼번에 얼어붙는 듯한 느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지극히 밝은 오 후. 그리고 그 오후를 가로질러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독수리의 울음소리였다.
“삐이이이익!”
“커허억!”
길시언이 갑자기 두 팔을 들어올렸다. 뭐하는 거지? 길시언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뎅그렁! 프림 블레이드가 떨어졌고 곧 웅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쓰러진 길시언의 등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길시언!”
샌슨이 비명을 지르며 길시언의 팔을 끌어당겼다. 난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저 아래쪽에는 손에 석궁을 들고 있는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저놈 이! 길시언이 등을 보였을 때 쐈어!
“너 이새끼! 등을 쏴?”
난 곧장 옆에 있는 큼직한 바위를 들어올렸다. 칼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드발 군! 안 돼!” 그러나 늦었다. 난 이미 후작을 겨냥해서 바위를 집어던졌다. 바우우웅! 바위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후작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전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으아아악!”
콰과광! 재수 없는 전사 하나가 바위에 치어 튕겨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위는 그대로 사내를 깔아뭉개고는 산비탈을 따라 맹렬하게 굴러갔다. 콰 드드득! 바위는 나무 몇 개를 부러뜨리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난 고개를 돌려 후작의 모습을 찾았다. 후작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석궁을 당기고 있 었다. 어딜! 후작은 쿼럴을 장전하면서 손을 들어 외쳤다.
“돌격!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벤다! 계집애를 제외하고 모두 쳐라!”
전사들은 쓰러진 사내의 처참한 모습을 보더니 곧 눈을 뒤집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죽여!” 백발 프리스트 역시 검을 휘저으며 외쳤다. “방어막을 강화한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부우우웅! 강렬한 진동음이 들려오면서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감싸고 있던 연초록색 구가 더욱 진하게 바뀌었다. 전사들은 초록색 반구를 후려쳤으 나 검은 속절없이 튕겨났다. 탕! 타당! 전사들은 욕설을 퍼붓더니 곧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올려다보았다. 칼은 활을 꺼내들면서 외쳤다.
“아프나이델! 저지하시오!”
길시언! 이런!
샌슨은 길시언을 황급히 끌어당기다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길시언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샌슨은 아예 뒤로 누워버렸다.
“으윽, 제길! 잠시만 부탁한다, 후치!”
샌슨은 고함을 지르더니 길시언을 품에 안은 채 위험하게도 머리를 아래로 하고는 거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주루루룩! 아아, 저 멍청한 오거! 등 가죽을 홀라당 벗기고 싶어서!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아프나이델은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나 역시 바스타드를 휘두르며 아프나이델의 뒤를 따랐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공격하고 있던 전사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낼 수 없게 되자 욕지거리를 외쳐대며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이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아프나이델은 품안에서 뭔가 하얀 것을 꺼내어 공중으로 휙 집어던졌다. 하얗게 흩어지는 가루 속에서 아프나이델은 마법 주문을 외 쳤다.
아프나이델이 손을 위로 뻗어올리는 순간 전사들은 움찔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아프나이델? 어떻게 된 거예요? 뒤따라 뛰 어올라온 운차이는 아프나이델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아프나이델은 그저 지친 얼굴로 땀을 흘리며 전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전사들은 흉흉한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노려보았다. 그중 특히 거칠어보이는 전사 하나가 외쳤다.
“라쳐 고말지보 정사!”
“야뭐?”
저, 저 자식들 외국에서 수입한 전사들인가?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외치고 나서 그대로 달려들려 했던 그 전사는 자신이 한 말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멈춰버렸으므로, 그리고 다른 전사들도 너무 당황해서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운차이의 눈꺼풀이 꿈틀했고 아프나이델 의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
“야거 한 고라뭐 금지 너, 깐잠? 래이 뭐 이말 내, 라어?”
“다이법마! 어렸걸 에법마!”
그때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조금 뒤로 돌리며 외쳤다.
“길시언 씨는!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차, 샌슨과 길시언은? 난 또 다른 바위 하나를 집어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델린이 쓰러진 샌슨에게서 길시언을 가볍게 들어올리더니 그 품에 안았다. 길시언의 등으로 옮겨간 그녀의 손이 쿼럴을 뽑아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크으윽!” 길시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에델린의 가슴에 고개를 떨구었다. 제기랄! 죽은 건가? 에델린은 그렇게 길시언을 감싸안은 채 그 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제레인트가 위를 바라보며 외쳤 다.
“지금은 못 움직입니다!”
아프나이델은 입술을 깨물었고 칼이 화살을 잔뜩 먹이며 외쳤다.
“젠장! 운차이 씨! 네드발 군! 시간을 벌어줘! 아프나이델 씨! 계속 혼란시키십시오!”
그때 드디어 아래의 전사들도 당황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말 따위는 집어치우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티융! 칼이 쏘아붙인 화살이 한 녀석의 투구를 맞춰 날렸다. “으아악!” 그 사이에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한 손을 품에 넣고 다른 손으론 허공에 그림을 그려댔다. 난 손에 들었던 바위를 집어던지고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바위였다. 산 정상이라 바위가 그렇게 많지 않아. 제기랄! 뭘 집어던지지? 그때 운차이는 아래를 보며 씩 웃 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니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겠군.”
고함소리만을 남기고 운차이는 벼락처럼 뛰어올랐다. 운차이! 돌았어요? 운차이는 검을 세워든 자세 그대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카카캉! 첫 번째 충 돌. 맨 앞에 오던 전사는 운차이의 검을 여유 있게 받아냈다. 하지만 운차이는 얽혀버린 검을 거칠게 옆으로 눕히더니 그대로 무릎을 세워 상대의 낭 심을 쳐올렸다. 끔찍해! 상대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 뒤에선 다른 전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운차이는 쓰러지려 던 상대의 멱살을 침착하게 잡아올렸다.
“크욱!”
운차이는 사내를 방패로 삼아 뒤에서 오던 공격을 막아냈다. 뒤에서 공격하던 사내의 눈이 커지는 순간, 운차이는 손에 든 사내를 앞으로 밀어버렸 다. 죽은 사내와 살아 있는 사내가 엉켜 쓰러졌고 운차이는 옆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질려버린 내 귀에 아프나이델의 고함이 들려 왔다.
“후치! 날 믿고 너도 앞으로 뛰어라!”
“다음부턴 그냥 뛰라고 말해요옷!”
난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오우, 제기랄! 그런데 아프나이델을 어디까지 믿어야 되지? 도대체 어떻게 해주겠다는 건지? 전사들은 무서운 기세로 산등성이를 올라오고 있었다. 저 많은 전사들 앞으로 달려나가다니, 내가 미친 거야, 아프나이델이 미친 거야? 바람이 볼을 가르고 땅이 발아 래로 다가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지무지하게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전사들의 얼굴도, 그리고 초록색의 막에 둘러싸인 채 그들을 지나쳐 달려가는 전사들을 보며 당황하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얼굴도 잘 보였다.
털썩. 난 달려오던 전사들 바로 앞쪽의 땅에 섰다. 전사들은 외쳤다.
“다졌라사!”
“야거 간 로디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런데 이상했다. 전사들은 날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는데(솔직히 말해 꽤나 겁에 질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전사들은 내게 시선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은………… 날 못 본다! 인비저빌리티로구나! 난 고개를 돌려 아프나이델에 게 눈을 찡긋해 주려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대신 손가락을 꺾었다.
“좋아, 신사분들! 몹시 아프게 해드리지!”
전사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기겁한 표정을 지었고 난 그 얼굴들을 바라보며 상당히 우쭐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러곤 곧장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 의 다리를 잡아올렸다. 전사들은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는 그들의 동료를 보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난 들어올린 사내의 항의에도 무시하고 “아 아으 려살람사!” 그대로 그를 옆의 동료들을 향해 던져주었다.
“크아악!”
전사들은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며 한덩어리가 되어 날아가버렸다. 난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은 전사 중 하나가 미친 듯이 검을 휘저어대서 자칫하면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 후와, 이 자식이! 난 바스타드를 휘두르며 전사들의 무기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크헉! 으아아! 전사들은 비명을 올리며 검을 놓쳤다. 아무리 검을 꽉 쥐고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의 공격으로부터 검을 지키기는 어렵 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전사들이 운차이의 공격을 힘겹게 받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위에서 칼이 고함질렀다.
“네드발 군! 운차이 씨의 그림자가 되어라!”
상당히 시적인 분부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난 운차이와 검을 부딪치던 남자의 등 뒤로 다가서서 상대의 다리 뒤를 걷어차버렸다. 남자는 벌렁 쓰 러져버렸고 운차이는 그대로 상대의 턱을 걷어차면서 그 뒤의 남자를 찔렀다. 나와 운차이가 한곳에 모이고 나자 칼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퓽 퓽퓽!
“악! 다이살화! 여숙!”
전사들은 기겁하면서 몸을 숙였다. 난 그 광경을 보며 입이 쩍 벌어져 있었으나 운차이는 그 사이에도 쉴새없이 상대를 베어넘겼다. 미치겠다! 저게 사람이야? 눈앞의 사내, 가슴을 찌르고, 검을 빼는 동작 그대로 옆을 베고, 몸을 숙여 반대쪽 공격을 피한 다음, 허리를 퉁겨세우며 상대의 턱에 박치 기, 처절한 비명과 함께 휘청거리는 상대에게 다시 찌르기. 순식간에 운차이 주변의 사내 세 명이 쓰러졌다. 운차이가 물이 새듯 스르르 빠져나오고 나자 세 구의 시체는 차례로 포개어졌다. 참다못한 난 고함을 질렀다.
“운차이! 적당히 해요! 그 정도 실력이면 죽이지 않아도………….”
퍽! 턱에서 강렬한 느낌이 오면서 동시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었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잃은 것일까? 그러나 운차이의 말이 바로 들려온 것을 보아 정신을 잃은 것은 극히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닥쳐.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운차이는 그 말만 남기고 내 옆을 스르르 지나쳤다. 그리고 곧 등 뒤에서 비명소리와 살이 찢어지고 베어져 나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난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운차이는 내 턱을 치고, 그리고 날 비켜서 빠져나갔다. 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 의문은 머릿속 한구석 으로 잠시 치워졌다.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운차이는 지금 죽음을 생각하면서 싸우고 있단 말이지? 저 좋은 솜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난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죽음은 내게 일상사다. 어 머니의 죽음 이후로, 헬턴트의 공기 속에서, 모든 죽음은, 별것 아닌 에피소드.
“당신은 죽일 권리가 없어!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니까!”
고함이 먼저였는지 몸을 돌린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몸을 돌렸고, 허공에서 들려오는 내 고함소리에 놀란 전사를 향해 주먹을 날렸 으며, 주먹을 날려놓고 보니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정확히 맞추었을 때, 즉 공격이 목표물에서 정확히 멈추었을 때 파괴력은 최고가 된다는 헬턴트 경비 대장 샌슨 퍼시발의 증언에 따라 복부를 맞은 전사는 그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의 전사 서넛을 쓰러뜨리며 날아가 버렸다. 또 다른 사내 의 머리카락을 잡아 그 목을 뒤로 홱 젖혀버리면서 상대의 다리를 걸던 운차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살 권리가 죽일 권리야, 멍청아.”
“빌어먹도록 잘 알아요! 하지만 그건 내 식이 아니야! 그런 슬픈 방식은!”
다리가 걸린 남자는 쓰러져버렸고 운차이는 쓰러진 남자를 뛰어넘으며 그 복부에 검을 꽂았다. 남자는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가 뻣뻣해졌고 운차이 는 또 다른 남자를 향해 달려들며 중얼거렸다.
“네 식으로 삼으라고 한 적 없어.”
“좋아, 아주 좋아요! 헬턴트식을 보여드리지. 에라라라라!”
나는 제미니가 죽고 나서 싹 잊은 채 마차 위에 앉아 있었고, 당신은 제미니를 깎아주었지. 하하! 그게 당신과 내 차이야. 갑자기 다가드는 사내. 사 내의 검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노려 친 것 치곤 꽤 무섭게 날아왔다. 아마 내 발자국이나 인기척을 노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어설펐고, 난 비어버린 사내의 명치를 걷어찼다.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졌다. 운차이, 그거 알아요? 내가 왜 꼭 이렇게 외치는지?
“죽어보자!”
내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상대에게도 죽음을 강요할 수가 없어. 헬턴트식이지. 멍청한 헬턴트 자작님께서 다스리는 멍청한 헬턴트 영지 의 멍청한 헬턴트 사나이들의 방식이라구. 하지만 당신 말도 맞아. 상대를 죽이는 것은, 난 살겠다는 의미지.
우라질! 왜 그걸 확인시켜 주냐구! 이 숨가쁜 싸움터에서! 나 화난 상태니까 내 앞에서 모두 비켜!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백발 프리스트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강한 명령은 시기를 정확히 잡은 명령이었다. 정말 싸움이 멈췄거든? 비록 무기를 내려놓은 사람은 아 무도 없었지만.
운차이는 자신의 업적들 사이에 선 채로 입가에 튄 피를 핥았다. 그것은 운차이의 피가 아니다. 사내들은 운차이의 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는 그를 반포위한 채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사내들은 보이지 않는 나의 존재 때문에 더욱 무서워하고 있었다. 난 조용히 운차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요.”
운차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던 후작이 괴성을 질렀다.
“이이잇! 멍청이들, 누구의 명령을 듣는 거냐!”
후작은 그대로 석궁을 들어올렸다. 운차이는 옆으로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정말 빠른걸? 자, 잠깐! 그런데 운차 이가 비켜나면 내가 과녁이 된다구! 그런데 다음 순간 괴상한 소음과 함께 후작이 비명을 질렀다.
“우아아앗!”
탱! 후작은 석궁을 떨어뜨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떨어진 석궁의 활줄은 끊어져 있었고 그 위에 걸려 있던 쿼럴은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났다. 후작은 끊어진 활줄에 맞은 손을 부여잡은 채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노려보았다.
백발 프리스트였다.
그는 들어올린 오른손을 후작에게 고정시키고 얼굴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기겁했다.
“레티의 입이여! 무슨 짓을!”
백발 프리스트는 아무 대답없이 후작을 뚫어지게 노려보았고 후작은 이를 갈며 검을 뽑아들었다.
“파괴의 권능 따위에 목숨을 거는 멍청이들! 뭘 부순 거냐!”
무슨 말이지? 백발 프리스트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전사들과 우리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백발 프리스트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방금 잘라낸 것처럼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었 다. 전사들은 신음을 흘렸고 운차이는 고개를 약간 가로저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부산하게 짐을 뒤져 약병과 붕대 같은 것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 친절한 사람,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 없나?
할슈타일 후작은 눈길로 사람을 죽이는 법의 시범을 보이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는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으로 백발 프리스트를 쏘아보았다. 검 을 쥔 그의 손이 흠칫거리는 것은 너무나 잘 보였다. 그러나 백발 프리스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 손 하나를 포기했으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소.”
후작의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백발 프리스트의 왼손을 싸매는 동안에도 백발 프리스트는 후작에게 눈길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했다.
“간단한 일이오. 당신 뇌를 파괴하면 되지. 사실 손가락이 아니라 손톱 하나 정도 희생해서 당신을 죽일 방법도 많았어. 심장에 구멍을 내준다거나 당신 연수를 없애버리는 방법도 있소. 조금 전엔 너무 급해서 그렇게 정확한 조작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해.”
후작은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난 파괴신의 공포에 두려워하는 철부지 꼬마가 아니다. 아무리 레티의 프리스트라 해도 보이지도 않는 상대 몸 속의 장기를 파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안다.”
백발 프리스트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당연하지.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그런 믿음을 시험해 보겠소? 난 시도해 볼 용의가 있소. 실패해도 난 손톱 하나 잃는 정도니까. 하지 만 당신 몸 중의 어느 부분은 파괴될걸. 내가 노린 것이 아니더라도 어느 부분은 사라질 거란 말이야. 당신에게 행운이 충분하다면 손톱이나 맹장 정 도가 없어질 수도 있겠지. 당신에게 별다른 행운이 없다면 눈이나 척추 한 마디쯤 없어질지도 몰라. 당신에게 악운이 가득하다면 고환이 없어질지도 모르지. 하하하. 당신의 행운을 시험해 볼까?”
백발 프리스트의 차분한 말이 끝났지만 후작은 이를 드러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 같았어도 고환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시험 같은 것은 받지 않 겠…………, 어흠! 흠. 어, 어쨌든 저 프리스트는 샌슨 말대로 성직자의 어투로는 수준급의 어투를 구사하는군. 백발 프리스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쳇. 그까짓 활줄 하나 파괴하려고 손가락을 날리다니 아깝게 됐군. 어쨌든 섣부른 짓 하지 마시오, 후작.”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에게는 갈림길의 권능이 있었지. 그렇다면 저건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권능인가? 후작은 이를 박박 갈아댔지만 움직이지는 않 았고 그 사이에 백발 프리스트는 빠르게 말했다.
“레티의 검들이여. 저 두 무리 사이를 가로막아라. 움직이는 자는 공격하도록. 그리고, 그 위의 마법사! 내가 안전을 담보할 테니 소년의 모습을 도 로 드러내시오!”
뒤쪽에서 아프나이델의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그러니까 레티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겁니까?”
“맹세하지. 지금부터 여기 있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투쟁 행위는 레티에 대한 도전이며, 그 투쟁을 막지 못하는 것은 레티의 모욕이오. 됐 소?”
“예, 수락합니다.”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자 잠시 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와! 갑자기 부끄럽다! 난 운차이의 옆에 다가섰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주르륵 움직여서 우리 둘과 아직 서 있는 전사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서 있지 못하는 전사들은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거나 일어나려고 비칠거리고 있 었다. 운차이는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바로 곁에 있는 나도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
“일행에게까지 물러난다. 후치.”
난 고개를 끄덕여 보일까 하다가 그냥 물러났다. 후작의 전사들은 움찔거렸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도 제지할 엄두 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려 세 개나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고 분위기나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도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판단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와 운차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후작은 주위의 분위기가 어떠했든 자신이 할 행동은 한다는, 참으로 경하할 만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 멈춰!”
“얼마 줄 거야!”
내 재빠른 대답에 후작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미소를 지었다.
“뭐라구?”
“나 당신 명령들을 이유 없어! 명령 듣는 대신 얼마 줄 거야? 저 닭대가리 전사들보다 낮은 가격으론 안 돼!”
기어코 실소해 버리는 프리스트도 보였다. 후작은 노기등등한 얼굴로 산 위를 노려보다가 백발 프리스트를 향해 외쳤다.
“도대체 어쩔 생각이냐! 네 생각을 말해라.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난 내 뜻대로 행동하기 위해 너에게 이렇게 물어야겠다. 죽어서라도 날 막 겠냐고!”
백발 프리스트는 다 싸매고 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해버리고 싶은 생각도 꽤 강하군, 후작.”
“뭐라구?”
“당신이 저 일행을 모조리 죽이면서까지 크라드메서를 손에 넣으면, 그 이그누스 드래곤을 가지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단 말 이오. 후작. 스스로를 구속할 줄 모르는 자에게 보통 사람도 도저히 구속할 수 없는 힘이 넘어가는 것은 고려해 봐야 될 일 아니겠소?”
“이놈! 지금 라자의 가문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너 따위 땡추가 할슈타일 가문이 드래곤을 다스릴 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바로 그렇소.”
할슈타일 후작은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이 일어나는 동안 운차이와 나는 다시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정상에선 칼과 아프나이 델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말했다.
“당신 가문은 드래곤을 다룰 줄 아는 라자의 가문이지. 하지만 내 보기에 당신은 드래곤을 잘 다루지 못해. 캇셀프라임은 상대가 되지 않는 드래곤 에게 보내어져 생사불명이 되었고 지골레이드는 달아나버렸지. 나였다면 지골레이드를 아무르타트에게 보내고 캇셀프라임은 지골레이드의 빈 자리 를 담당하게 했을 것이오.”
후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지금껏 잔뜩 일그러졌던 표정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여전히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엄격한 얼굴이 쉴새없이 후작과 백발 프리스트 사이를 오가고 있어 엄격한 분위기를 많이 희 석시키고 있었다. 칼은 신음을 뱉었다.
“그렇군….., 맞았어!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에게 캇셀프라임은 상대가 되기 어렵겠지. 보다 안전하게 하려면, 저분의 말대로 하는 것이 훨씬 낫 겠지.”
어어? 이거 참. 자랑스러워해야 되나? ‘우리 고향 드래곤은 말야, 국왕의 드래곤쯤은 아침 식사 전의 운동거리로 잡을 정도거든. 아핫하하!’ 으윽. 여 기까지 오고 보니 아무르타트도 고향 친구처럼 느껴지는군. 말도 안 되는 감정인걸.
백발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놀랐소? 성직자의 로브를 걸친 칼잡이의 생각으로 믿어지지 않으시겠지. 사실 이건 하이 프리스트의 생각이셨소.”
“그놈잇!”
후작은 잇소리를 내었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며 백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백발 프리스트는 말했다.
“그렇소. 출발하기 전, 하이 프리스트께선 은밀히 날 부르셨소.”
“뭐라고 지껄였나!”
“말씀 조심하시오, 후작.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당신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나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라고 하셨을 뿐이오. 그리고 그때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셨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젠 정확하게 알게 되었소.”
“뭐냐!”
“그분께선 우리들의 여행을 축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돌맨 할슈타일이 크라드메서와 계약을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드래곤이 하 나도 없는 지금의 바이서스의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여러분들의 여정에 레티의 축복이 함께하길. 간단하고 단조로워보이는 말씀 아니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분께서 그런 단순한 말 속에 중요한 의미를 담아두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바로 ‘지금의 바이서스엔 드래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