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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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3화

3

“그 역할은 내 것이군.”

조용히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운차이가 갑자기 던진 말이었다. 칼은 젖은 눈으로 운차이를 돌아보았지만 운차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샌슨은 황급히 말했다.

“무, 무슨 말이야? 네가 후작을 잡겠다고?”

“그래.”

네리아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자신의 발만 내려다 보았다. 그때 칼이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워프들의 마을이었지요. 당신은 다시는 검을 쥐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운차이는 눈을 들어 칼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칼 역시 그를 마주보았다. 운차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생의 묘미 중 상당 부분은 반전에서 오니까.”

“위험하오. 당신이 어떻게………….”

“엉큼한 소리 관두시오. 칼. 어차피 날 염두에 두고 있을 것 아니오. 샌슨이? 천만에. 저 멍청이는 안 돼. 후치가 해야 된다고는 말하지는 않으실 테 “지?”

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샌슨은 ‘내가 어째서 멍청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려다가 내게 발등을 밟히고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운차 이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핏값은 받아내야 밤에 잠이 잘 오는 더러운 성격이라서.”

길시언의………… 핏값 말이군. 길시언이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고 그의 신병을 책임졌지.

“OPG를 가진 후작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약하게 말하던 칼은 네리아의 얼굴을 보고서는 흠칫하며 말을 멈췄다. 그는 당황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난 답답한 느낌을 받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멋진 임펠리아의 방 안이 왜 이렇게도 어두컴컴한 거지.

잠시 후 운차이는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예?”

“후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된다고 하셨소. 그 날, 길시언이 죽던 날…….”

운차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머지 우리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가장 빠른 속력으로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왔소. 하지만 충분히 빠르다고는 할 수 없을 테지. 후작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보 다 훨씬 먼저 이곳에 도착했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귀족원을 장악할 무슨 방법을 강구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후작은 아직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칼. 당신에겐 무슨 정보가 있는 거요? 닐시언 국왕과 꽤 오랫동안 이야기하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별 정보가 없습니다. 국왕전하와 나눈 이야기는 주로 길시언 전하의 사망 소식과 그간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모래 찾기군. 할 수 없지. 어이, 핫소드.”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하슬러는 눈만 움직여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따라올 거지?”

“따라가? 웃기는군. 후작은 내 것이다. 하지만 네녀석이 날 따라오는 것은 말리지 않겠어.”

“그래? 네 딸내미는 어쩔 거야?”

“어디…………, 적당한 수도원에라도 맡길 생각이다. 지금으로선 그랜드스톰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군.”

“나도 갈래!”

갑자기 터져나온 네리아의 고함 소리에 샌슨은 황급히 창문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맑은데?”

“천둥이 아냐. 네리아가 고함지른 거야.”

샌슨과 나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네리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칼이 입을 쩍 벌린 채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네리아는 운차이만 바라 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들을 따라오겠다는 이야기야?”

“그러엄! 물론이지.”

“이유가 뭐야?”

“당연하잖아. 좋은 동료들을, 그러니까 떠돌이는, 따라다녀야 하는 법이라구. 목적지가 없으니까. 에, 난 지금은 별 목적지가 없거든? 한곳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성격상 맞지 않으니까, 에, 가벼운 여행 정도인 셈인데, 그렇지. 여행이야. 음. 난 목적지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잖아? 뭐 내가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말이야, 여행이라구. 그렇잖아?”

이번엔 내가 칼을 바라보았다.

“자이펀어죠?”

“그건 아닌데. 접한 적이 없는 희귀한 언어로군.”

나와 칼의 농담에도 네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놀랄 일뿐이로군. 운차이는 화를 내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듣게 말해.”

“다 말했잖아?”

“다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전달되는 건 하나도 없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난 목적지도 없고, 돌아다닐 생각이니까, 이왕이면 센 사람들하고 같이 다니면 좋잖아? 그럼 안전할 테고 말이야.”

“그런데?”

“남부 최고의 검사하고 북부 최고의 검사가 같이 다니는 길이라면 무지무지하게 안전할 거 아냐?”

운차이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슬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웃기는군. 저 핫소드 자식이 북부 최고라구? 바이서스의 검술, 싹수가 노랗군.”

“이 자식아, 네 경우를 남에게 덮어씌우지 마라.”

“그까짓 OPG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의 한계를 느껴보고 싶냐?”

“이거 벗고 나무 작대기 들어도 네녀석 정도야 식후 운동거리지.”

“할래?”

“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곧장 임펠리아의 뒤뜰로 달려나가 버렸다. 나와 칼, 샌슨, 그리고 네리아 등 남겨진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베란다를 향해 걸 어가기 시작했다. 구경은 해야 할 거 아냐?

코다슈 씨는 바짝 흥분해서 말했다.

“어떻게 됐어? 응? 운차이가 이겼지?”

펠레일은 어이없는 눈으로 흥분한 코다슈 씨를 바라보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코다슈 씨는 헛기침을 시작했고 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뭐라구? 그럼 그 핫소드인가 하는 녀석이?”

코다슈 씨는 더욱 흥분해 버렸고 난 이번에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뭐라구? 그럼 누가 이겼단 말이야?”

“데미 공주가 이겼죠. 두 사람은 뒤뜰에서 참 볼 만하게 싸우다가 데미 공주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싸움을 멈추게 되었어요. 꽃과 나무와 풀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 존재를 느끼기 어려운 것들의 고귀함과 소중함에 대한 장시간의 설교가 결정타였지요. 두 사람은 완전히 뻗어버렸고 자 신들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쳇. 끝까지 싸웠다면 운차이가 이겼을 거야.”

펠레일은 이제 배를 움켜쥐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큭, 예. 크크큭! 아, 그렇게 해서 다들 헤어지게 된 것이군요.”

“예. 운차이와 하슬러, 그리고 네리아는 후작을 쫓아가게 되고 뭐 그렇게 다들 헤어지게 되었지요. 난 우리 일행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향 으로 돌아가는 길이죠.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들을 가지고서.”

“아, 그렇군요.”

“그리고 도중에 여기 메리안과 아까의 그 유랑민들을 만난 것이고. 아, 메리안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난 말을 멈추고 잠들어 있는 메리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메리안은 꼼짝도 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펠레일. 당신이 이 애의 보호자가 되어주지 않겠어요?”

“예?”

“51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이 되시라는 거예요. 음, 꼬마로는 좀 크지만. 뭐 다른 유랑민들을 받아들이듯이 이 애도 좀 받아달라는 말이죠. 여기서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 애는 아직 자기 손으로 자신을 돌볼 정도는 못 되니까 펠레일이 보호자가 되어주면 더 좋구요. 이를테면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인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후견인이라…………. 갑작스럽군요. 물론 전 이 아가씨의 교육과 장래를 책임질 정도의 역량은 되지 못합니다만.”

“예. 이 영지를 돌보는 것만 해도 힘겨우실 거라는 것은 잘 알아요. 금전적인 거라면 제가 메리안의 몫으로 충분한 돈을 내놓겠어요. 그저 메리안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달라는 것뿐이죠. 아, 당신 제자로 삼아주면 안 되나요? 후견인이 아니라 사부님이 되시는 것 말이에요.”

“하하하, 후치 군. 이 아가씨는 마법사가 되고 싶어합니까?”

“아뇨. 그건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위대한 펠로메이지의 곁에 있게 된다면 마법사가 될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요.”

펠레일은 위대한 펠로메이지라는 말에 한참 동안 웃고 나서 말했다.

“제자라…………, 어쩐지 쑥스럽군요. 전 아직 제자를 둘 만한 처지가 못 됩니다. 실력도, 연륜도 일천하지요. 차라리 코다슈 씨의 제자는 어떨까요?” 땡그랑! 나와 펠레일은 어안이 벙벙해진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바라보았다. 코다슈 씨는 떨어뜨린 술잔을 주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하얗게 된 얼굴로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그의 입이 열렸다.

“웃기지 마.”

펠레일의 눈동자가 아주 기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오갈 데 없는 소녀를 내팽개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후치 군.”

“아, 아? 예…….”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코다슈 씨가 굉장한 속도로 말했다.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데 말이야, 펠레일.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이봐!”

펠레일은 코다슈 씨를 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뭐, 이 마을에 성인 남성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부양 가족들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그중 몇몇은 부양 가족들을 잃거 나 해서 식구 하나쯤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후치 군이 생각한 대로 저 같은 경우도 있고…….”

코다슈 씨는 이제 나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그럼! 이 펠레일 자식은 가족은 절대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까 한 명쯤 받아들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구!”

“예? 아, 왜 가족을……”

“언제 나라에서 영주를 내려보낼지 모른다는 거야. 이 자식은 나라에서 영주만 내려보내면 곧장 여길 떠날 생각이거든? 그래서 가족을 안 만들고 있 어.”

“예. 코다슈 씨가 말씀하셨듯이 전 언제 여기를 떠나게 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후견인이 될 자격은 못 되지요?”

말을 마친 펠레일은 빙긋 웃으며 코다슈 씨를 바라보았고 코다슈 씨는 적의가 충만한 눈으로 펠레일을 마주보았다. 메리안을 여기 두고 떠나면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난 마법 검사의 전설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한 손으로는 마법을 쓰고 다른 손으론 자이펀 검술을 쓰는 신비롭고 우아한 강철 의 레이디 메리안…………. 관두자, 관둬. 메리안에게 퍽도 어울리겠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엔 내가 이 두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 차례로군.

“아, 그 영주 말이죠? 그 사람이라면 벌써 왔어요.”

“뭐? 무슨 말이야?”

“무슨 말입니까, 후치 군?”

“당신들 앞에 있잖아요. 후치 네드발 백작. 그리고 상속권자를 잃은 칼라일 영지를 계승하게 될 자. 영주가 부임했으니까 이제부터 이 영지의 이름 은 네드발 영지입니다.”

펠레일과 코다슈 씨는 입을 쩍 벌린 채 날 바라보았고 난 어깨를 으쓱였다.

“아, 잔혹한 영주와 혹독한 통치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마세요. 네드발 영지의 영주는 부임한 바로 다음날 영지를 떠날 생각이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훌륭한 대리인들에게 자신의 영지를 맡기고, 영지의 주민들은 아마 영주가 부임했는지도 모를 거예요. 전설의 영주가 될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 런데 왜 이렇게도 난 전설이 될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거지?”

펠레일의 입이 몇 번 뻐끔거렸다. 난 잠시 기다린 다음에야 그의 말 비슷한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대리인…………, 섭정이 되는 건가? 어쨌든 그 섭정들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영주님?”

“펠레일과 코다슈. 마나와 살기가 수호하는 멋진 영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 이러면 되겠군요. 제가 메리안의 후견인이 되 지요. 그리고 그 후견인의 의무도……섭정이라구요? 아, 예. 그 사람들에게 몽땅 떠넘기면 되겠군요.”

“마치 방금 생각난 것처럼 말하는데…………… 정말 방금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겁니까?”

“코다슈 씨의 경우는 방금 떠올린 거죠. 나머지는 지금까지 오면서 계속 생각한 거예요. 내 영지의 주민들에겐 나보다 펠레일이 더 익숙하고 친근하 겠죠? 내 영지의 주민들을, 그리고 나의 피보호자인 메리안을 맡아주겠어요?”

코다슈 씨는 험상궂은 얼굴을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펠레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펠레일은 일하다가 긁힌 듯한 팔의 상처를 긁적거리며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했다.

“왜죠?”

“예?”

펠레일은 눈을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예전에 보았던 펠레일을 볼 수 있었다. 험한 노동마저도 빼앗아가지 못한 그의 눈빛 속에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후치 군에게는 영주의 지위에 이끌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두려워서?”

“바보 같은 말입니다. 지위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평생 동안 변화하며 사는 겁니다. 초보 마법사 펠레일이 펠로메 이지 펠레일이 되듯이? 하하하. 사람은 동적 생명체입니다. 후치 군이 그걸 모르지는 않겠죠. 영주의 지위를 포기할 수 있는 그 행동력을 볼 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을 때 갈팡질팡할 수는 있겠지만 쉽사리 포기하지는 못합니다.”

“지금의 내가 보다 마음에 드니까?”

“비슷한 말을 바꿔 말한 것에 불과하지만 어감은 좋군요.”

“전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을 만났어요.”

“들었습니다.”

“크라드메서는 치열하게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더군요. 미치도록 사랑하는 인간과 관계를 끊으려고 들면서까지. 그런데 왜 인간은 변화하려고 할까 요? 적당히 자기 모습에 만족할 순 없나요?”

느닷없이 코다슈 씨가 입을 열었다.

“유배된 자신을 알기에………….”

“예?”

“신에 의해 유배된, 대지에 버려진 자신을 알기에.”

너무 무거운 분위기인데. 나와 펠레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다슈 씨를 바라보았다. 코다슈 씨는 잘 안 이어지는 말을 억지로 잇듯이 말했다.

“우리 말에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인데요?”

“별 의미 없어. 한 인간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는 거야.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바뀌는 걸 의미하지. 그런데 그 뉘앙스가 재미있지. 환골탈태라는 말 을 들으면 대개 좋은 기분이 들게 된다.”

“좋은 기분…………. 변화했기 때문에?”

“그래. 우리가 변신의 기능을 두려워하고 경외스러워하듯. 헤게모니아의 무녀들이 흰 가면을 쓰는 것, 자이펀의 제사에서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것, 다 변신이지. 뱀파이어가 시시한 흡혈 몬스터와 달리 몬스터들의 귀족인 이유는? 불사체라든가, 생명을 빨아내는 흡혈, 다 무섭지만 뱀파이어의 초절 적 공포는 역시 그 막강한 변신 능력이겠지. 변신은 무섭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것이지.”

펠레일은 그윽한 눈으로 코다슈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다슈 씨는 무겁게 말했다.

“쳇. 신으로 변화하고 싶은 거야. 영원한 욕구 불만의 종족 같으니라구.”

“자이펀인도…………, 우리와 별 차이는 없군요. 엘프는 조화, 인간은 변화인 셈인가요.”

“그래. 그러므로 자네가 말한 두려워서라는 이유는 말이 안 된다. 혹시 네가 너희 나라 귀족의 악덕이나 악행 때문에 환멸감을 느낄지도 모르지. 그 러나 나쁜 방향의 변화라고 해도, 변화 자체의 매력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겠지요.”

“왜 변화를 포기하지? 그게 펠레일의 질문인 것 같군.”

정말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생각을 위해선 안주를, 그리고 그 생각을 풀어낼 매끄러운 혀를 위해선 술 한잔을.

“말씀하신 대로…………, 전 귀족에 대해선 많은 실망을 느꼈어요. 우리 영주님은 도대체 무슨 축복을 받아 태어나신 분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렇다 고 유치하게시리 ‘저런 더러운 귀족 따위는 되지 않겠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어요. 말씀하신 대로 변화 자체의 매력은 변화 이후의 모습에 대한 불안 보다 더 큰 것이 보통이니까 그건 거짓말이 될 공산이 크겠죠.”

“그래서?”

“하하하. 코다슈 씨. 난 바이서스 국민이라구요. 바이서스 국민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죠?”

코다슈 씨는 그저 묵묵히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펠레일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바로 그 짝이죠. 루트에리노─핸드레이크 페어. 아마도 사상 최강의 페어가 아닌가 싶군요. 1 더하기 1이 2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 히 보여주는, 바로 그분들 때문이죠.”

“가는 거야? 어, 가?”

난 웃으며 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쪽에선 펠레일과 코다슈, 그리고 메리안이 서 있었다. 영지의 다른 주민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살짝 떠나는 작별이다.

슈는 한 손에 내가 선물한 인형을 들고 다른 손으론 내 바지의 혁대를 쥐고 있었다. 난 허리를 숙여 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슈는 얼굴을 찌푸린 채 날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이 말했다.

“또 와?”

“슈가 멋진 어른이 되면 돌아올게.”

“어른? 몇 밤 자면 어른 되는데?”

계산을 좀 해봐야겠는데. 난 잠시 눈썹을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 곧 대답이 나왔다. 난 역시 비상해.

“백밤.”

“백 밤? 백 밤만 자면 되는 거야?”

슈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저렇게 물어서 내 양심을 몹시 아프게 만들었고, 그래서 난 양심의 고통에 떨며 말했다.

“응. 물론이지! 그러면 돼.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 특히 펠레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히죽 웃고서는 슈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가르쳐준 노래 잘 기억하지?”

슈는 간지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내가 떠나고 나서 곧 다른 아이들한테도 가르쳐줘야 해?”

“알았어.”

긴 겨울 동안, 펠레일은 영지 곳곳에서 들려오는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의 노래를 들으며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하하하. 난 다시 한번 슈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메리안이 다가왔다.

메리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가만히 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난 웃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메리안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힘없이 웃으며 그 손을 마주쥐었다.

“펠레일 씨가 널 잘 보살펴줄 거야. 말씀 잘 듣고 슈처럼 멋진 어른이 되면 좋겠어.”

“그래? 음…………. 나도 백 밤만 자면 어른이 되는 거야?”

윽! 메리안 너마저도 나의 양심을 공격하는 거냐! 할 수 없군.

“틀림없이 그럴 거야.”

또 거짓말을 했어. 으으.

펠레일과 코다슈 씨와도 인사를 나눈 다음, 난 선더라이더에 올라탔다. 슈는 품에 인형을 꼭 끌어안고는 날 바라보고 있었고 메리안은 그저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할말도 생각 안 나는군. 그래서 난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만 휘저어주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가자, 선더라이더. 해를 따라 서쪽으로…………….

“야이, 후치 자식아! 100일 후엔 어른이 되어서 널 찾아갈 거야!”

·출발하기도 전에 낙마할 뻔했다. 난 그렇게 메리안의 앙칼진 작별 인사를 들으며 네드발 영지를 떠났다. ‘그리하여 영주는 떠나고 대대로 네드 발 영지는 섭정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그 영지의 주민들은 언젠가 그들이 위기에 닥쳤을 때 그들의 영주가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는 전설의 시작 인 것이다. 하하하!

이봐요, 내 영지의 주민들이여. 난 우리 헬턴트 영주님만한 그릇은 못 되지만, 그래도 대왕과 대마법사가 바이서스에 선물한 것과 같은 것을 당신들 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정도면 영주의 책임은 다한 것 아닙니까? 행복하세요!

“임마. 넌 발이 너무 빠르다. 그거 아냐? 난 분명 오늘 저녁 때쯤 도착할 것으로 생각했단 말이다. 이게 뭐야? 햇님은 아직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높이라구.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도착하니까 지나가기도 그렇고 안 지나가기에도 그렇잖냐.”

선더라이더는 대답이 없었다. 하긴 말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드는 내가 웃기는 놈이지.

“흠. 호스 라자가 있었다면 난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관두자. 네가 너무나 훌륭한 주인을 모시게 되어 넘치는 부담감을 감 당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안 듣는 것이 낫겠어. 나의 겸손한 성격이 훼손될지도 모르거든? ・이놈이! 너 지금 고개를 흔들며 푸르릉거린 행 동의 의미가 뭐냐?”

역시…………, 우수를 벗삼아 여행하는 모험가는 자신 속의 고독을 달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법. 내가 그 좋은 예지. 가만 놔둬도 혼자 잘 노는 성격이라 구. 그리고, 조만간 혼자가 아니게 될 테니 모험가의 발걸음은 가벼운 법이지.

레너스 시의 외곽은 겨울 향취가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겨울 바람은 벌판을 거침없이 내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야를 순 시하고 있던 한 무리의 경비 대원들은 먼저 입을 쩍 벌린 다음 눈을 가늘게 떴다.

“좋은 아침이죠? 레너스 시의 경비 대원이십니까?”

경비대원들은 피식 웃었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 그렇다. 그런데 넌 뭐냐? 무슨 심부름이라도 다니는 길이냐? 그런데 웬 무장에 짐은 그렇게 많고?”

“저, 모험가처럼 보이지 않아요?”

“글쎄. 그 말은 모험가의 말처럼 보인다만.”

윽! 경비 대원들 틈에서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병사 하나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런 거짓말이 꼭 하고 싶다면 턱 밑에 말꼬리라도 좀 잘라 붙이지 그러느냐.”

미치겠군. 뭐 특별히 신분 이야기 할 것도 없으니 그냥 통과할까? 그때였다. 경비 대원들 중 하나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가는 눈으로 날 쏘아보고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야! 너, 너, 너!”

“예? 저, 저, 저요?”

흉내를 내서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병사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고함을 질렀다.

“너, 그 오거 슬레이어!”

“어? 잠깐, 잠깐. 난 특별히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한다는 평은 듣지 못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빠지는 수준도 아니니까…………, 그런데 누구시더라?”

오거 슬레이어라는 말에 다른 경비 대원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함을 지른 경비 대원을 바라보았다. 그 경비 대원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더니 말했다.

“임마, 기억 안 나? 난 실리키안 남작의 사병이었다. 대마법사 아프나이델한테 죽을 뻔했을 때 네가 그 엘프와 함께 날 구해줬잖아!”

“한스덱! 와, 경비 대원이 됐군요!”

한스덱은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다른 경비 대원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너, 너 이 자식! 그러면 그때 그 엘프를 빼내서 도망갔던…………, 머리 잘 굴리던 그 꼬마!”

“윽. 혹시 당신, 그때 그 지하 감옥의 간수였어요?”

두 번째로 고함을 질렀던 그 경비대원은 재빨리 손에 든 핼버드를 두 손으로 꼬나들어 날 겨냥했다.

“요놈! 겁도 없이 여기로 돌아와? 이봐! 이 꼬마, 탈옥범이다. 체포해!”

다른 경비 대원들은 갑작스런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나와 그 병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핼버드가 올라오는 것 을 보며 난 재빨리 외쳤다.

“이봐요! 그때 우린 억울하게 갇혔던 거잖아요! 그리고 분명히 우린 죄수 명부에도 없을 텐데? 날 체포해서 데려가면 재판을 할 겁니까, 어쩔 겁니 까? 만일 재판을 하면 그때 당신네 시청에서 억울한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사실이 낱낱이 까발려질 텐데 그거 정말 볼 만하겠군요.”

“뭐……, 아차!”

경비 대원들의 핼버드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경비 대원은 이를 갈더니 다시 외쳤다.

“이 자식! 억울하게 갇혔든 어쨌든 그래도 넌 탈옥범이야. 억울하게 갇혔던 것은 참작이 되겠지만 탈옥에 대해선 벌을 받아야 해! 그리고 레너스 시 경비대원을 구타한 것에 대해서도!”

주위의 경비 대원들은 다시 핼버드를 들어올리기 시작했으나 나 역시 재빨리 외쳤다.

“뭐 이렇게 답답한 사람이 다 있나…………… 당신 지금 무효 감금에 의해 발생한 무효 탈옥에 대한 무효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무효 체포를 하려는 건가 요?”

“뭐라구?”

“아, 쉽게 말하지요. 내가 억울하게 갇혔던 것이라는 명제를 수용하면 내 감금은 무효가 되고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가 무효가 된다면 탈옥 역시 무 효가 되는 것이니까 탈옥에 대한 벌을 받으라는 것은 무효 사실에 대한 벌을 받으라는 말이 되는 것이므로 역시 그 벌은 무효 형벌이 되는 것인데 당 신이 나로 하여금 무효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날 체포하려고 드는 것 역시 무효가 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당신이 수행하려 드는 행위는 무효 체포라

는 이름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내 주장이니 의심되는 점이나 반대 의견 있다면 말해 보시고 그런 점이 없다면 그렇다 아니다 둘 중 에 하나로 셋 셀 동안에 대답해 보세요. 하나, 둘.”

“그렇다!”

레너스 시의 외곽, 그런 대로 황량한 아름다움이 있는 겨울 벌판은 잠시 고요의 영토가 되었다. 무턱대고 고함을 질러버린 그 병사는 긴장된 시선으 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윗입술 위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니다…인가?”

핼버드들의 고갯짓은 이미 멈춰져 있었고 싸늘한 적막만이 우리를 휘감아 돌았다. 좀 도와줘야겠군. 킥킥.

“이봐요. 괜한 짓 하지 말자구요. 그때 나랑 내 동료들이 당신을 쥐어박아가며 탈출한 것은 내가 사과하지요. 하지만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일단 빠져나가고 봐야 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억울하게 갇혀 재판도 못 받을 지경인데 당신이라면 가만히 있겠어요? 우리가 억울하다는 것은 시청 에서도 잘 알고 있는 일일 텐데.”

경비대원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경비 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난 고함을 지른 경비 대원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말했다.

“그냥 잊읍시다. 뭐, 당신이 손해 보는 느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라고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에 대해 사과 이상의 뭐 다른 걸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사과하겠습니다요. 예?”

결국 지하 감옥의 간수였던 그 경비 대원은 뻣뻣한 목으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들과 헤어지기 전, 나는 이 추운 아침에 뭣하러 도시 바깥을 돌아다 니느냐고 질문했고 그 대답은 우울한 것이었다. 사우스 그레이드의 유민들이 조직적인 산적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외곽을 순시한다는 것이다. 사 람들도 참. 곧 끔찍한 겨울이 올 텐데 산적질이라니. 펠레일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후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활동이라고 비판했겠지.

“원래 남부 녀석들, 피가 끓을 정도로 정열적인 거야 유명하지 않냐. 100명의 데스나이트 이야기에 나오는 그 아가씨 모르냐? 그래서 그 친구들은 겨울 채비니 뭐니 하는 것도 신경 안 쓰는 모양이다.”

“에휴…………… 시청에선 무슨 대책이 없어요? 유민 흡수 정책 같은 것.”

“유민 흡수? 아,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냐? 어려워. 일손이 많이 필요한 계절이라면 모르지만 이 겨울철에 인력 소모가 뭐 그리 많겠냐.” “어? 레너스 시는 농업보다는 상업 인구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레너스 강이 얼면 상거래도 어렵거든. 아직은 안 얼었지만…………. 어쨌든 그 점에선 농업 도시나 마찬가지야.”

“으으.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래. 어쨌든 그 사람들 도시로 끌어들여 봐야 밥벌이할 것도 없으니 꼼짝없이 거지 신세지. 못 끌어들여, 아, 경비대원 일이라면 턱없이 모자라지 만 유민들을 데려다 경비 대원으로 쓰기도 어려워. 대민 봉사할 만한 품성도 못 되고, 실력도 그렇고.”

“경비 대원이 모자란다구요?”

동절기에는 시민들도 별 일이 없기 때문에 경비 대원 숫자를 채우는 것은 쉬운 경우가 태반이지만, 어이없게도 이번 겨울에는 경비 대원이 꽤나 모 자라다는 것이 경비 대원 한스덱의 대답이었다. 유민들이 그렇게나 극성인가? 하긴 본격적으로 눈발 날리기 시작하면 산속에서 살기도 쉬운 일이 아 닐 테니 산적질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겠지. 어쨌든 그래서 경비 대원은 많이 모자라고 한스덱도 그래서 경비대에 들어왔다고 한다.

“참 수고가 많습니다. 이거 받아두겠습니까?”

한스덱은 내가 내민 금화를 받아들고는 입을 쩍 벌렸다.

“응? 어라, 웬 금화냐?”

“순찰 끝나면 어디 따뜻한 펍에서 술이라도 한잔 하세요. 내 사과의 표시고, 동시에 여러분들의 수고에 대한 격려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경비 대원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한스덱은 감탄한 표정으로 금화를 보더니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건 뭐야. 이런 금화는 처음 보는데? 뭐가 이렇게 두꺼워?”

“아, 그거 300년 전의 금화라서 그래요. 괜찮아요. 재무부 장관한테 물어봤는데 그건 액면가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리고 고서적이 나 유물 수집하는 사람에게 팔면 액면가의 몇 배도 받을 수 있다더군요.”

한스덱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다른 경비 대원들도 일치단결하여 입을 벌렸다. 입김 때문에 안개가 서릴 정도로군.

“히야, 300년 전의 금화? 재무부 장관? 너 정말 멋진 모험이라도 했던 모양이구나?”

“하하하. 무지개의 솔로처가 그랬잖아요? 생존한 모험가들은 모두 부자라고.”

모험가들은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고, 따라서 생존한 모험가들은 목숨을 가지고 돌아왔으니까 부자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필요 없다………는 말이다. 한스덱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 피식 웃었다.

음. 언젠가 탈옥했던 곳인지라 위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뿌듯하구나!

난 레너스 시의 시청 건물을 바라보며 감회에 빠져 망연히 서 있었다. 그래. 여기였어. 음. 그날 밤 나와 칼, 샌슨, 그리고 이루릴이 살금살금 기어나 왔지. 그리고 저쪽으로 엑셀핸드와 버터핑거가 있었고, 주위의 시민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나는 한참 동안 시청

정문을 바라보았다. 결국 보다못한 정문 경비 대원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이, 꼬마. 왜 시청 앞에 그렇게 서 있는 거냐? 시청에 볼일이라도 있는 거냐?”

정문 경비 대원의 질문에는 ‘네까짓 게 시청에 무슨 볼일이 있겠냐?’ 하는 느낌이 많이 섞여 있었다. 난 그를 향해 방그레 웃어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예. 들어가야죠.”

“뭐야? 들어온다고? 하하! 그럼, 레너스 시청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에다 어떻게 알릴깝쇼?”

“네드발 백작가의 후치 네드발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면 고맙겠네요.”

“뭐야?”

“음. 다시 말하죠. 네드발 백작가의 후치 네드발이 여행 도중 레너스 시를 지나게 되어 그 시의 책임자 되는 분께 안부 인사라도 여쭙기 위해 방문하 는 길이라고 전해 달라는 말입니다.”

경비대원의 얼굴엔 먼저 불신감이 가득 피어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엔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즉시 그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거 의 달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청 건물 안에서는 낯익은 얼굴이 달려나왔다. 그는 정신없는 걸음 걸이로 달려나오더니 곧 내 앞에 서서는 입을 쩍 벌렸다.

“너! 너 그때 그 꼬마!”

“오, 이게 누굽니까. 실리키안 남작님! 하하하!”

아하. 실리키안 남작은 시청을 위해 일하고 있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군. 어쨌든 실리키안 남작과 나는 오래간만에 만나서 화려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그는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보여준 훈장과 선더라이더 등을 보고서는 내가 백작임을 완전히 믿게 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날 맞이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시장실을 찾아뵙자 늙수그레하고 인상 좋게 생긴 시장님이 나를 맞이했다. 나와 실리키안 남작, 그리고 시장님은 서로 통성명을 하고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 동안에도 실리키안 남작은 계속해서 나의 급격한 신분 상승에 감탄했다.

“놀랍군요. 참 굉장합니다. 어떻게 백작의 지위를 얻으신 것인지.”

“아, 이거 참 기분이 낯설군요. 실리키안 남작님이 이렇듯 정중하게 말씀해 주시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발 남작님이란 말씀 좀 그만하십시오. 너무 짓궂으십니다.”

레너스 시의 시장님은 나와 실리키안 씨의 대화를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두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지난번 저희 도시에 들르셨을 때의 일,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아, 몇 번씩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괜찮습니다. 아, 그런데 그 듀칸 버터핑거라는 하플링은 아직 이 도시에 있습니까?”

“아뇨. 그 사건 이후로 달아나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아 참, 실리키안 씨. 아프나이델이 당신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더군요.”

“예? 아프나이델을 만나셨습니까?”

“만난 정도가 아니죠. 아프나이델은 여길 떠나서 수도에서 저희 일행이랑 만났지요. 그리고 함께 꽤 많은 모험을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 겁니까? 혹시?”

“죽었냐구요? 아뇨. 지금 그는 대미궁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예?”

“이야아아! 그래, 한 녀석도 없단 말이야! 안내는 해줘야 할 거 아냐!”

엑셀핸드의 고함소리에 칼은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인델프 님. 저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바이서스 임펠로 달려가야 합니다. 후작이 저희들보다 먼저 도착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 다.”

그러자 엑셀핸드는 노기가 등등해서 말했다.

“이런 젠장! 알았어. 알았다구! 바일하프! 네녀석이 노커 해라!”

바일하프 씨는 파이프를 물어뜯고는 입을 잡고 펄쩍펄쩍 뛴 다음에야 간신히 말했다.

“이놈아.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엑셀핸드는 온통 붕대에 감긴 몸을 깨끗이 잊은 채로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난 지금부터 영원의 숲으로 간다! 반드시 이 두 눈으로 대미궁을 봐야겠어. 인간들도 들어간 곳인데 내가 못 들어간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어쨌든 돌아온다고는 기약할 수 없으니 네녀석이 노커를 하란 말이다. 그게 싫다면 네녀석이 알아서 회의를 하든가 해서 새로 뽑고.”

“엑셀핸드 님. 혼자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나이델의 조용한 목소리에 엑셀핸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뭐야?”

“저도 드래곤 로드를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엑셀핸드 님 혼자 그런 몸으로 가시게 할 수야 없지요. 그리고 대미궁에 있다는 그 엄청난 서적과 마법 물품 같은 것에 끌린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군요.”

“그래! 역시 네녀석뿐이다, 이놈아. 푸하하하!”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으며 칼을 바라보았다.

“약도라도 대략 그려주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영원의 숲에서 일어나는 그 자기 분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두 분이서 가신다면 저도 안심이군요. 퍼시발 군? 자네가 지도를 그려드리게. 지형을 잘 기억할 테지?”

“예. 알겠습니다.”

“지도 그릴 필요 없어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자크의 것이었다. 일행은 자크를 바라보았고 하슬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나도 거기 들어가 봤으니까. 내가 안내하지요.”

엑셀핸드는 펄쩍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자크 씨?”

“이유? 뭐, 돈이죠.”

“돈이오?”

“대장은 죽었고, 수도로 돌아가 봐야 교수대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고, 좋아하는 여자는 날 바라봐 주지도 않으니…………. 신세 따분하죠, 뭐.”

네리아는 흠칫하면서 자크를 바라보았지만 자크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운 도둑질이니 계속 그 짓이나 하는 수밖에. 대미궁에서 돈이나 실컷 가져와서 길드나 다시 세울까 생각중이죠.”

네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크. 드래곤 로드가 가만히 자기 보물을 내어줄 것 같니? 우린 그분의 허락을 얻었으니까 그걸 가져온 거라구.”

자크는 찌푸린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헹.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도 정말 갈 데까지 갔군. 나이트호크가 허락이 어쩌니 하는 말을 다 하시네? 주인한테 허락받고 물건 가져오는 도둑도 있 “나?”

“이 자식아! 그게 어디 보통 주인이야? 드래곤 로드라구!”

자크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말했다.

“썅. 그럼 난 드래곤 로드 것을 훔친 도둑이 되는 거지, 뭐. 이왕 이 짓 해먹으면서 제대로 깃발 날리려면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 순간 네리아의 눈 속 가득히 불안감이 나타났다. 네리아는 입술을 잔뜩 오므렸다가 자크에게 말했다.

“너 이 자식…………,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거야?”

자크는 눈을 크게 뜨고 네리아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눈은 가늘게 바뀌었다.

“킥킥! 웃기시네?”

“뭐야?”

“얼씨구, 누님. 정말 못 봐주겠네. 지금 날 실연의 아픔 때문에 자살하려고 드는 골빈 자식 취급하는 겁니까? 정말 갈 데까지 갔군요. 나 그런 데 전 혀 관심 없어. 오히려 떵떵거리며 돌아와 나 싫다고 떠난 여자 후회하게 만들어주자는 주의지. 그리고 그 때문에 떵떵거릴 준비하러 떠나는 것이고.” 네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크는 짓궂게 웃으며 코를 쓱 닦았다.

“아시겠어? 조금만 기다려 보라구요.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 자크가 부활할 테니까.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을걸?”

“자식아, 후회는 누가 후회를………….”

“후회하게 될걸?”

갑자기 자크의 몸이 앞으로 휘익 미끄러졌다. 네리아의 눈이 커졌지만 그 이상의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다. 자크의 팔이 네리아의 몸을 완전무결하게 감싸안았고 곧 방 안의 사람들 모두의 시선 속에 자크는 네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으악!

네리아는 몸부림을 치려는 모양이지만 자크는 네리아가 꼼짝할 수 없도록 단단히 부둥켜안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네리아는 자크의 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네리아는 풀려나고도 한참 동안 멍한 눈으로 자크를 바라보았고 자크는 킬킬 웃으며 말했 다.

“킥킥킥! 내 소망은 달성이야.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진하게 키스해 버리는 거.”

“너, 너, 너 이 자식………….”

“어허! 허락받고 훔치는 도둑은 없어. 입술 훔칠 때도 마찬가지지. 핫하하! 기다려요, 누님! 난 포기 안해!”

그리고 자크는 방을 뛰쳐나가 버렸다. 남겨진 우리들은 도대체 네리아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모두 애꿎은 천장이나 바닥을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했 다. 그러나 잠시 후 네리아가 입술을 닦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때는 우리들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양치질이나 하고 키스를 하지…………….”

“대미궁이라니…………. 그게 정말 있는 것이군요! 놀랍습니다.”

시장님과 실리키안 씨는 한참 동안이나 감탄했고 곧 보다 경외하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멋쩍기 짝이 없는 노릇이로고. 시장님은 한참 후에야 경탄의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백작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래, 여행길은 순탄하신지요? 레너스 시에 도움이라도 요청하실 것이 있다면 기탄 없이 말씀해 보십시오. 네드발 백작님.”

윽. 닭살스럽기 짝이 없군. 빨리 용건을 말하고 나가야겠다. 난 탁자 아래의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예…… 부탁이랄 것까지는 없고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군요, 시장님.”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시죠.”

“요즘 들어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대량 발생한 유민들 때문에 고초가 심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시장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예. 정말 난감한 일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들도 바이서스의 국민인데, 어떻게 도시로 유입시키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인원이 어디 한둘이라야지요. 레너스 시의 시민으로 등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 많은 인원들의 일자리나 잠자 리를 해결할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쟁 때문에 오른 세금도 세금이거니와…………. 다들 고통스러운 시기지요. 어쨌든 시청 재정으 론 그 많은 유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예.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레너스 시에서 대규모 사업이라도 벌이면 어떻겠습니까?”

“대규모 사업이라구요?”

“예. 유민들을 인부로 고용해서 사업을 벌이면 그들의 호구지책은 마련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농번기도 끝났고, 또 듣자니 레너스 강이 얼면 상거래도 적다고 하던데요. 따라서 시민들 중에서도 인원을 뽑을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동절기니만큼 시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거나 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건 펠레일이라는 마법사에게 배운 수법이지. 일거리를 만드는 방법 말이야. 그런데 난 왜 마법사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으면서도 마법은 하나도 쓸 줄 모르는 거지? 실리키안 씨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고 시장님의 눈은 반대로 가늘어졌다.

“예. 흔히 사용되곤 하는 방법이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너스 시에는 지금 당장 그 많은 유민들을 끌어들일 만큼의 대규모 공사를 벌일 일은 없 습니다. 게다가 그런 재원도 없고요. 네드발 백작님과 그 일행분들이 커다란 선물을 주셨는데도 이런 말씀 드리자니 참 면구스럽습니다만.”

어라? 내가 레너스 시에 무슨 선물을 했던가? 아! 그 투기장. 맞아. 실리키안 씨의 소유였던 그 투기장을 시청에 넘겨줬지. 난 쓴웃음을 짓고 실리키 안 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군요. 실리키안 씨.”

실리키안 씨는 풀 죽은 미소를 지었다. 난 다시 시장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전에도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어서 아는 것입니다만 저 휴다인 계곡에는 유명한 다리가 있지 않습니까?”

“12인의 다리 말씀입니까?”

“예. 그런데 그것이 꽤나 불편한 다리이지 않습니까? 열두 명이 모여야만 지나다닐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합니다. 아쉬운 대로 이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 옆에 새로운 다리를 하나 놓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예?”

“12인의 다리 옆에 새로운 다리를 하나 만드는 겁니다. 시시한 나무 다리가 아니라 몇 백 년이 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한 돌다리를 놓는 거죠. 그 계곡에 다리를 놓는 정도의 일이라면 상당한 공사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겨울 동안 계속 할 수 있는 공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정도의 공사라면

상당히 많은 유민들을 인부로 고용할 수도 있을 테고.”

시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 다리라…………, 물론 그렇겠지요. 그건 엄청난 공사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사를 무슨 재원으로 감당하겠습니까?”

난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 간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툭. 조그마한 주머니에 비해 꽤나 묵직한 소리가 나자 시장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내가 열어보라는 시늉을 하자 시장님은 그것을 열어보았고, 곧 시장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실리키안 씨는 놀라서 그 주 머니를 들여다보았고 그의 얼굴은 곧 하얗게 변했다.

“그 정도의 보석이라면 공사를 감당할 수 있겠지요?”

“마, 마, 맙소사…………!”

시장님은 그 말만 남기고 기절해 버렸다. 아이고, 맙소사!

잠시 시청이 떠들썩해지는 소란이 있는 후 시장님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의외로 심장이 약한 시장님인가 본데. 뭐, 시장실로 몰려든 다른 시청 직 원들도 보석을 보고 연쇄 기절이라도 일으킬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장님은 간신히 위엄을 되찾아 질문했다.

“도, 도, 도대체…….”

위엄만 되찾았지 화술은 되찾지 못하신 모양이다. 으윽.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보석을 구했냐고요? 그야 대미궁에서…

“아, 아, 아니, 도, 도, 도대체………….”

“아닌가? 그럼 도대체 왜 레너스 시에 이런 도움을 주느냐고요?”

시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시청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날 쏘아보았다. 어라, 그거 기분이 괴상하네. 너무 큰 친절이라 의심부터 앞서는 모 양인데.

“뭐 저도 좋은 일이니까 그렇죠.”

“예?”

“레너스 시에서 서쪽으로는 황량한 웨스트 그레이드잖아요. 아직까지도 별로 개척이 안 된 땅. 하지만 12인의 다리의 교통이 더 편리해지면 웨스트 그레이드로 넘어오는 상인들도 많아질 테고, 그럼 웨스트 그레이드도 좀더 발전할 수 있겠죠?”

“아…………, 예. 그렇군요.”

“그러니까 이건 제 고향을 생각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레너스 시의 유민들도 처리하고, 일석이조인 셈이죠.”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난 잠시 동안 시장님과 시청 직원들의 열렬한 감사 인사에 시달리게 되었고 곧이어 그 다리의 이름을 네드발 교(橋)라고 붙이겠다는 말에 기막혀해 야 했다. 난 상당한 노력 끝에 그냥 휴다인 다리라고 붙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기도 쉬울 거라고 납득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밟 고 다니는 것은 관심 없어. 푸하하! 어쨌든 샌슨, 결국 내 말이 맞게 되었지? 휴다인 계곡의 휴다인 강이라면 휴다인 다리가 되어야 한다구. 어쨌든 그 모든 소란이 끝난 다음에야 난 내 마지막 용건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용건은 시장님을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레너스 시의 시청 앞에선 진귀한 장면이 벌어져 오가는 시민들을 당혹케 했다. 이 추운 겨울날에 시장님과 시청 직원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와 한 모 험가를 붙잡으려 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모험가는 나다.

“이대로 떠나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식사라도 한 끼 하시지 않고…….”

“아, 괜찮습니다. 급하게 만나볼 사람이 있거든요.”

“약속을 조정하실 수 없겠습니까?”

“뭐 꼭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괜찮다면 시간을 아끼고 싶군요.”

“아무리 그래도 도리가 아닌지라………….”

뭐 이런 식의 대화가 한참 오간 다음, 난 간신히 시장님과 시청 직원들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참, 부탁한 것은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시장님은 울상이 되었다.

“네드발 백작님의 부탁이긴 합니다만…………. 그게 참 짐작하기가 어려운 일이군요. 경비 대원들을 모조리 풀어서 탐색해 보겠습니다만.”

난 잠시 얼이 빠진 채로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고, 곧 시장님과 나 모두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킥! 그거 봐줄 만하겠네. 그럴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흐음. 나중에 오후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난 시청을 떠나왔다. 레너스 시 경비 대원들은 오늘 참 황당한 한나절을 보내게 되겠군.

잠시 후, 나는 상가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가다가 12인의 여관이 있는 골목길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아직 마음

속에 회의가 남아 있는데, 과연 유스네를 만나봐야 될 것인가? 유스네에게 나는 떠나간 방랑자인 셈이니까 꼭 돌아와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 야. 흐음. 이 노릇을 어찌한다. 특별하게 만나볼 이유가 있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그냥 이대로 돌아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경비 대원들에게, 그리고 시청에서도 내 이름을 다 말했으니 내가 레너스 시에 들렀다는 소식은 분명히 유스네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에 들렀으면서도 한번 찾아오지도 않고 지나갔냐고 화를 내게 되면?

그런데 화를 낼까? 겉으로야 화를 내겠지만…………, 글쎄올시다. 인생이 옛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비슷하게 꾸며나가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 후치 네드 발에 대한 유스네의 추억이 그 이별 장면으로 완결되었다면 쓸데없는 막간극, 아니 막후극이 되나? 어쨌든 그걸 삽입시킬, 아니 붙일 필요는 없겠지? 한 모퉁이만 돌면 되는데. 나는 12인의 여관이 있는 골목 바로 바깥에 선 채 바로 그 한 모퉁이를 돌지 않고 있었다. 이거 고민되네.

그때였다.

“유스네! 어이.”

고함 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나는 고삐를 확 끌어당기며 몸을 옆으로 눕혔다.

“히히힝.”

“쉿! 조용히 해!”

선더라이더를 달래며 부리나케 뒤로 돌아 달렸다. 조금 지나자 또 다른 골목이 보였고 난 그 속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어두운 골목이다. 휴우. 그렇 게 나는 골목에 숨어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왜 부르는 거야? 외상값이라도 갚아주려고?”

이 목소리………. 톡 쏘는 목소리. 유스네의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먼 느낌의 다른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원 계집애, 어지간히 쏘아댄다. 그게 아니고 말이다. 쉐린이 주문한 것들 20일까지 되겠다고 좀 전해 다오.”

“20일? 그럼 너무 늦어! 지금 재고품이 간당간당하단 말이야. 죽어도 18일까지야. 알겠어?”

잠시 후 오른쪽에서 손에 빨래 바구니 비슷한 커다란 바구니를 든 유스네의 모습이 나타났다. 난 급히 머리를 옆으로 치우다가 담벼락에 머리를 박 고는 소리없는 비명을 좀 질렀다. 다행히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청년 하나가 걸어오며 불평스러운 표정으로 말 했다.

“좀 억지를 부릴 걸 부려라. 지금 중부 대로 사정이 얼마나 엉망인 줄 몰라? 곳곳에서 산적들이 출몰하고 있다구. 전쟁이 말도 아닌가 봐. 그래 H…….”

“몰라! 나 무식해! 나 무식해서 그런 거 모르니까 무조건 18일까지야.”

“그런 어거지가 어디 있냐? 네가 투정부린다고 세상 일이 다 해결되는 줄 아냐?”

“난 해결될 수 있는 일에 투정 부려. 해결 안 되는 일이면 거들떠 보지도 않아. 그러니까 18일이야. 하늘이 두 쪽 나도. 알았지?”

킥킥. 난 어두운 골목에 몸을 숨긴 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광경을 감상했다. 유스네의 뒤를 따라오던 그 청년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이것 참…….”

“좀 봐주라. 응? 응? 18일까지 안 되면 장사 놀아야 한다구. 그게 말이 돼? 눈이 쌓여서 겨울 상단이 지나가려면 아직아직 멀었단 말이야. 오빠나 나 나 굶어죽을 지경이라구.”

“12인의 여관 주인이 굶어죽어?”

“안 보여? 볼 홀쭉해진 거?”

유스네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볼을 홀쭉하게 만들어보였다. 청년은 그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원 계집애도 고집 하나는. 어떻게 알아봐 주기는 하겠지만 기대는………….”

“창고 치워놓고 있을게!”

“이봐, 유스네!”

“걱정 마, 걱정 마. 18일날 물건 안 들어오면 치워놓은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리지, 뭐? 굶어죽는 거보단 나을 거야. 알았지?”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구. 그래가지고 시집이나 갈지 정말 의문스럽다.”

“시집? 어, 너 지금 나를 연애 한 번 못해 본 여자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한테도 멋진 과거가 있다구! 그러니까…………”

“그만해라, 그만해! 한 번만 더 들으면 100번이다.”

“어? 너한테도 들려줬어?”

“레너스 시에서 그 위대하시다는 네 애인 이야기 안 들은 사람은 귀머거리 론밖에 없을 거야. 레너스에 도착하자마자 트롤일곱 마리를 쓸어버리고 실리키안 남작 때문에 억울하게 갇히자 감옥 벽을 부수고 뛰쳐나와 실리키안 남작 저택을 박살내고 그 투기장은 통째로 시청에 선물해 버리고. 뭐 빠 진거 있냐?”

서, 선더라이더. 나 좀 잡아줘…………. 아, 넌 팔이 없지?

“빠진 거 있지! 너희 촌 무지렁이들은 죽었다 깨도 상상 못할 정도로 중요한 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룻밤 휴식도 못하신 채 늦은 밤에 떠나시고.”

“아, 그래. 궁금한 거 있다. 그날 밤에 너와 그 위대하시다는 그분, 키스라도 했던 거냐?”

“이 저질! 생각하는 게 그런 거밖에 없지!”

유스네는 바구니를 휘둘러 멋지게 청년의 가슴을 후려갈기고는 몸을 홱 돌렸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곧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유스네는 걸어가다가 갑자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분은 자기 이름을 주셨을 뿐이야! 멍청아. 넌 그런 고상한 행동도 모르지? 아는 거라고는 끌어안고 입 맞추고 하는 것밖에 모르지?”

“그래, 인석아. 나 무식하다.”

청년은 두 팔을 들어올리면서 계속 낄낄거렸다. 그리고 나도 숨죽여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알겠어. 이젠 확실히 결정했다구.

난 선더라이더의 고삐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내가 숨어 있던 골목에 반대쪽 출구가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오후가 될 때까지 어디서 시간을 때운 담? 12인의 여관에서 그 멋진 흑맥주나 좀 마시면서 시간 때우려고 했더니, 쩝, 아쉽게 됐네.

꽤나 싸늘한 날씨로군. 그런데 좀더 속력을 내지 않으면 휴다인 고개에 채 올라서지도 못한 채 밤을 맞이하겠는데? 태양은 이미 서쪽을 과녁으로 삼 아빠른 추락을 결심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선더라이더는 지칠 줄도 모르고 달려갔다. 이 녀석은 혹시 원래가 지친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난 괜스레 미안해져서 말했 다.

“선더라이더, 임마. 이게 다 네가, 발이 너무 빠른 탓이다. 결국 레너스 시에서, 하루쯤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달려가게 되었단 말이야. 불만 있냐? 불 만 있으면, 말해 봐. 말 못하지? 푸하하하. 그럼 어서 가자!”

“이힝힝힝!”

위이이이잉! 고갯머리를 쓰다듬는 겨울 바람은 앙상한 겨울 가지들을 짓밟아 뭉개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무니안의 가슴에 발붙이지 못하는 저 바 람은 대지에 발붙인 나무들에게 항상 질 수밖에 없다. 결국 최후에 이기는 것은 나무다.

움직이지 않는 바람은 없으니까.

변화하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까.

바람은 영원히 시무니안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시무니안의 가슴에 몸을 누이고 약속된 휴식을 받을 수 있다.

“선더라이더, 바람을 앞서라!”

정신없이 흔들리던 허리와 어깨가 이젠 차라리 정지해 버린다. 무서운 속도 속에서 몸은 흔들림을 멈추었고 나는 휴다인 고개 위를 유영하고 있다. 선더라이더의 발굽 소리도, 귓가를 매섭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사라져버리고, 주위는 한없이 고요하다. 그리고 내 몸은 멎어 있다. 결국 이거 야.

움직이는 바람은 없지.

변화하는 인간은 없지.

상대적으로 말하면 간단한 것이 될까. 움직인다는 것은 멎어 있는 상태에 대비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멎어 있는 바람은 없다. 따라서 움직이는 바람도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고정된 본질을 가졌을 때만이 설명될 수 있는 말이지. 하지만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변화하는 인간은 없다.

그리고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는………….

쿠쿠쿠쿠쿵!

겨울철인데도 휴다인 계곡의 수량은 많이 줄어들지 않은 모양이다. 휴다인 강은 여전히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주위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바람마저도 휴다인 강에 경의를 표하며 그 수다스러운 입을 벌리지 못하는 계곡. 그리고 그 계곡 위 허공엔 아무것에도 고정되지 않은, 하지만 허공 에 고정된 12인의 다리가 떠 있었다.

“이힝힝힝!”

선더라이더가 급히 멈추면서 투레질을 좀 했다. 그리고 나는 재빠른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고정 된 그 다리를 바라보았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움직여도 꼼짝을 하지 않는, 마치 세상의 중심이나 된 것처럼 가만히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지금 이마를 따사롭게 내리비치는 태양이 향하고 있는 땅, 웨스트 그레이드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회색 산맥의 산봉우리들과 고원들 틈으로 멀리멀리 보이는 웨스트 그레이드는 석양의 땅이었다. 청회색의 산과 봉우리들 사이에 번뜩이는 황금의 땅. 바알간 대지의 모습이 이채롭다. 저녁의 땅, 귀환의 땅. 결국 나의 모든 것은 저기로 돌아가게 되는군.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을 타고 출발했을 때 의 내 모습 그대로, 동쪽과 북쪽과 남쪽에서 겪었던 모든 추억들은 그곳에 남겨두고 결국 같은 모습, 같은 발걸음으로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인

가.

태양. 아침에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을 약속받았고 그래서 곁눈질할 사이도 없이 서쪽으로만 달려간다. 후치 네드발. 미친 척하고 동쪽으로 달려가 보았지. 하지만 결국 태양을 따라 돌아오게 되는군. 하하하!

“쓸데없는 망상들. 이것도 휴다인 계곡 이쪽에 남겨두자. 이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선더라이더의 고삐를 쥔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약속대로 여기 12명이 모였습니다. 계곡 좀 건넙시다. 예?”

다리는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속이라는 것이 없는 움직임은 최면적이야. 다리는 정지 상태에서 서서히 속도를 높인다거나 하지도 않고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저 녀석 도 변화를 모르는 다리로군? 정지, 똑같은 속도, 그리고 다리는 내 앞에 정지했다.

난 선더라이더를 끌고 다리에 올랐다. 다리는 충실하게도 나와 선더라이더가 올라탈 때까지 기다린 다음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서쪽을 바라보았다. 선더라이더 녀석은 내 기대를 물리치지 않고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멋진 녀석. 그래 서 난 아무런 부담 없이 서서히 다가오는 계곡 반대편과, 그리고 그 너머 반짝반짝 빛나는 웨스트 그레이드의 파편을 볼 수 있었다.

다리는 고요히 멈추었다. 으잉? 벌써 끝이야? 왜 이 다리는 탈 때마다 한 번 더 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게 되는 거지? 할 수 없지, 뭐. 

“내리자, 선더라이더.”

나와 선더라이더가 내리자마자 다리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는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는 척하기 시작했다.

난 다리를 향해 피식 웃어주고는 선더라이더의 안장 뒤에 실린 짐 중에서 상자를 꺼내었다.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것을 열었다. 잠시 고요했지만 곧 바깥의 냄새를 맡은 쥐들이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열 마리의 쥐들은 찍찍거리는 소리만 남겨두고서는 순식간에 주위의 숲으로 뛰어가 버렸다.

이 추운 계절에 열 마리의 쥐를 잡겠답시고 건물 천장과 지하를 뒤지고 다니느라 수고하신 레너스 시 경비 대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난 잠 시 동쪽을 향해 서서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저 다리가 쥐처럼 작은 생물까지도 인식하게끔 만들어둔 타이번 하이시커 씨를 향해서도.

경례를 마치고, 난 다시 선더라이더에 올라탔다. 이거 추위가 예사롭지 않군. 대충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때는 단풍잎이 떨어지는 계절이었 고 지금은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있지만 말이야.

“가자구! 선더라이더! 이젠 계곡도, 다리도, 도시도, 영지도, 아무것도 필요없어. 그냥 헬턴트 마을로, 돌아가면 된다구! 그리고, 그 너머, 그 너머 로!”

선더라이더의 배를 걷어찼다. 선더라이더는 곧 맹렬한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난 반짝거리는 웨스트 그레이드를 향해 있는 힘껏 고함질렀다. 

“아무르타트, 기다려라!”

아침 바람은 이슬의 임종을 정확히 지켰다.

겨울 아침의 게으른 태양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위는 그런 대로 환하다. 이슬을 말려버린 바람이 다시 불 때마다 밀기울 같은 흙먼지 가 일어난다. 텁텁한 먼지들이 푸르른 겨울 아침의 대기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러고 보니 이 굵고 거친 먼지마저도 반갑군. 미드 그레이드나 이스트 그레이드의 먼지는 밀가루나 모래 같았지.

웨스트 그레이드의 토양은 메마르다.

동부의 땅의 흙들, 특히 기억나는 것은 영원의 숲의 흙이었는데, 비옥도가 지나쳐 끈적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스트 그레이드의 칸 아디움 주변의 흙 먼지들은 곱게 빻은 밀가루들에 노란 물을 들인 것 같은 먼지였다.

하지만 웨스트 그레이드, 내 고향의 땅은 메마르다. 흙알갱이는 그렇게 가늘지 않지만 비옥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다. 뭐 그래서 가벼운 쟁기를 사용 해도 충분히 갈아엎을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그래, 그렇다구. 이 땅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말이야, 그 사람들은 농기구에 대해서는 커다란 부담이 없을 거란 말이야. 말 여러 마리 세워서 탠덤 하 네싱으로 십자쟁기를 끌게 할 필요도 없어. 소 한 마리면 이 땅은 갈고도 남거든?

난 선더라이더의 은빛 갈기를 헤집으며 말했다.

“어이, 한때 소였던 말로서 한마디 해봐라. 말이 왜 소보다 비싼 거냐?”

선더라이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놈. 살살 약이 오르지? 하하하. 뭐 말이 더 힘도 좋고 속력도 빠르고, 달리는 속도야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일하는 속도도 말이 훨씬 빠르지. 그리고 먹는 것도 고급이니까 더 비싼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이 땅에선 말이 아니라 소로도 충분하거든?

물? 물이야 많아. 회색 산맥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물들은 맑고 차갑지. 중부 대로는 정확하게 이 땅까지 이어져 있고 말이야. 땅도 얼마나 많은가. 사우스 그레이드의 유민들을 모조리 여기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왜 대륙의 서부는 개척되지 못하는 거지.

이봐요, 칼, 어차피 북으로는 헤게모니아가 막고 있고 남으로는 자이펀이 막고 있지 않습니까? 동쪽으로는 바다가 떡하니 막고 있고. 그러니까 말입 니다. 이번 전쟁은 결국 바이서스로 하여금 서부 진출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드는 전쟁이 될 거라고 보는데, 칼 당신 생각은 어때요? 드래곤들도 없어 진 마당에 바이서스가 자이펀을 합병하거나 하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결국 대답은 서부 진출이라는 말입니다.

하! 하! 하!

하지만 나 후치 네드발은, 서부 탐사 같은 것 때문에 등에 해를 진 채 이 땅으로 걸어온 것은 아니지. 그런 시시한 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구. “어머? 어머?”

그래, 바로 이거라구.

아직 검푸른 어스름이 남아 있는 서쪽 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소녀. 어깨를 두른 숄 끄트머리를 가슴 앞에 모아쥔 채 서 있지. 그녀의 뒤는 검푸른 하 늘이지만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그 얼굴은 희다. 아침 바람이 그 빨강머리를 짓궂게 휘날리게 만들지. 그리고 난 이제 등 뒤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받 으며 그 소녀에게로 걸어가고 있어.

언덕 위의 소녀는 조용히 서서 날 기다리고 있어. 입술을 꽉 깨문 채. 빨간 머리칼은 어지럽게 날리고 있고 어깨의 숄도 살짝살짝 떠오르고 있지만 소녀의 하얀 얼굴은 꼼짝도 하지 않아. 난 손을 들어올리지. 아마 내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거야. 등 뒤의 태양 때문에 내 얼굴은 시커멓게 보일 테지? 하지만 소녀의 눈은 점점 동그랗게 변해 간다.

“후치?”

하하하.

“후치?”

하하하하.

“후치!”

물 속에 빠졌다가 급히 뛰쳐나와 몰아쉬는 숨처럼, 참을 수 없는 외침이 가슴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온다. 난 목이 아니라 가슴으로 외쳤다.

“제미니!”

선더라이더에서 뛰어내린다. 박명의 서녘 하늘을 이고 서 있는 언덕으로 달음질쳐 올라간다. 나부끼는 붉은 머리. 치마가 찢어질 듯 뒤로 부풀어오 르고. 놓쳐버린 숄은 등 뒤로 날아오른다. 하얀 숄은 서녘 하늘로 깃발처럼 나부껴 올라간다.

“후치야아!”

숨이 막히도록 격렬한 충돌. 가슴에 제미니를 안은 채 그대로 빙글빙글 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동쪽 하늘의 밝은 아침놀과 거무스름한 서녘 하늘이 번갈아 자리바꿈을 한다. 극명과 극암이 회전하지만, 코 아래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붉은 머리카락의 폭포뿐이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 는 바람 소리를 뚫고 제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 줄 알았어! 응! 응! 올 줄 알았다구! 후치, 후치, 후치!”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내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게 누구일 줄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 지.

제미니의 어깨에서 날아오른 하얀 숄은 어지러이 춤추며 한없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숄은 영원히 춤추고 있 었다.

315년 12월 18일. 날씨? 흥! 날씨가 중요한가? 기억 안 나!

타이번 씨의 말이 맞았다. 너무 놀랐다! 타이번 씨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후치의 말마따나 노인이 지나온 1년은 어린애나 청년의 1년과는 비교할 수 없 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돌아온 후치는 어려운 말을 잘한다. 이상하게 바뀐 거 같다.) 어제 저녁 일기에 전술한 바와 같이………………

킥킥. 이건 그저께 내가 돌아오던 날의 일기로군. ‘전술한 바와 같이’라고? 하하. 제미니. 나 따라서 어려운 말 쓰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그 전날 저녁 일기엔 뭐라고 썼는데? 어디, 앞으로 넘겨보자.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타이번 씨를 만났다. 타이번 씨는 산트렐라의 노래로 향하다가 내 발소리만 듣고(정말 놀랍게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미니? 오늘도 후치 기다리다 온 거냐?”

‘산책 다녀온 거예요.’

‘꼭 한쪽 방향으로만 산책을 다니는구나?”

‘사람마다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 아, 참. 저녁 산책 말고 아침 산책은 어떠냐?”

‘아침 잠이 많아서…………….’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좋아하던 그 산책로로 나가봐.’

아. 하하하. 그렇게 된 것이군. 난 침대 위에 드러누운 제미니를 바라보며 킬킬거렸다. 제미니는 쌔근거리는 숨소리만 내면서 뒤척거리지도 않고 잠 들어 있었다. 참 고요하게도 자는데. 어디 보자. 다시 다음날 일기로 넘어가 볼까? 내가 돌아오던 날이지?

…나는 타이번 씨의 말대로 아침에 동구 밖 언덕 위로 나가보았다. 날씨는 무지무지 추웠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시리지 않았다. 해가 떠올라 눈이 부셔서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때도 이상하게 얼굴이 돌려지지 않았다. 그때 햇님의 얼굴 앞으로 새카만 그림자가 보였다…………….

“이힛히히히! ……………냐아암, 쩝.”

기절하는 줄 알았네. 아이고, 이 망할 계집애야! 난 투덜거리며 제미니가 걷어차 버린 시트를 끌어올려 다시 목까지 덮어주었다. 이렇게 추운데 배 내놓고 자봐라.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그래, 옆에서 권하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마시더니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지!

그리고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제미니의 일기를 들어올렸다.

315년 12월 19일. 꽤 추웠지만 구름은 별로 없었고 화창했던 것 같다.

이 못된 후치! 그래, 우리 집엔 찾아오지도 않아? 후치는 오늘 아침부터 언덕 위의 성에 틀어박혀서는 오후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오후에 경비 대원 터너 씨가 마을로 내려온 김에 후치 소식을 물어보았다. 터너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응? 아, 집사님한테 그 동안의 일을 보고하느라 그러는 걸 거야.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타이번 씨와 집사님, 그리고 후치만 안에 틀어박혀 있어. 뭐라고 말이라도 좀 전해 줄까?’

아직까지도 화가 나 죽겠네. 무슨 말을 전하란 말이야? 저녁이 될 때까지 언덕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았지만 후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들어오 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후치가 저녁 무렵에 타이번 씨와 함께 칼 씨의 집으로 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화가 나도 꾹꾹 참고 있었지만 저녁 식사 시간에는 무의식 중에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다가 어머니한테 크게 꾸중을 들었다. 속상해서 밥맛도 없어 저녁을 안 먹었더니 배가 너무너무 고프다. 지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일기 를 쓰고 있다. 요 녀석, 후치, 내일 두고 보자! 어디서 귀까지 잘라먹고 돌아와서는 얼굴도 안 보여줘? 망할 녀석! 왜 몸을 함부로 굴리냐구!

하하하. 그래서 오늘 저녁 그렇게 신나서 술을 마셔댄 것이로군? 흐음.

난 제미니의 일기를 덮어두고는 제미니가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장소, 즉 제미니의 침대 밑에 다시 숨겨두었다. 요 녀석아. 네가 침대 밑에 네 일기랑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너의 보물들을 숨겨두는 거, 너희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모르지?

다시 한번 제미니의 시트를 정돈해 놓고 나는 제미니의 방을 나왔다. 밖에서는 제미니의 어머니께서 제미니의 아버지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계셨다. 제미니의 어머니는 날 보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아이고, 후치야. 좀 도와줘.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시고 온 거람? 도대체 해너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제미니의 아버지 스마인타그 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뭐라고 중얼거리기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하하. 제가 오늘 저녁에 해너 아주머니 술창고를 거의 비워버렸거든요.”

“세상에. 후치 너 정말 손 크구나? 아무리 젊은 혈기라지만 그렇게 헤프게 쓰면 못써요. 아니, 내 정신 좀 봐. 이 양반 좀 들어다주겠니?”

난 웃으며 스마인타그 씨를 들어서 방 안으로 모셨다. 스마인타그 씨를 침대에 눕혀놓고 밖으로 나오자 스마인타그 부인은 물잔을 내밀었다. 스마인 타그 부인은 안쓰러운 눈으로 내 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미니에게 듣긴 들었다만, 귀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냐?”

“꿀꺽꿀꺽. 이야기하면 길어요. 여행중에 오크놈들하고 싸울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베였죠.”

“저런, 큰일날 뻔했구나. 젬이 어제 저녁에 얼마나 울었는지.”

“울어요? 이런, 하하하…….”

“울다가 울다가 잠이 들어서 밤새도록 잠꼬대를 하는데. 그래도 살아서 돌아왔으니 다행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더구나. 그래서 난 네가 완전히 반병 신이 되어 돌아온 줄 알았단다. 그 정도는 괜찮지. 듣거나 하는 데 이상 없니?”

“예. 까딱 없어요.”

“그래. 여기까지 저 정신 나간 부녀 데리고 오느라고 정말 수고했다, 후치야. 그런데 넌 별로 취하지 않은 거 같네?”

“아, 예. 전 많이 안 마셨거든요. 사실 술 마실 틈도 없었어요. 계속 이야기만 하느라고.”

“이런, 주정뱅이들이 먼길 다녀온 사람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했구나. 며칠 푹 쉬어야 할 텐데 어제는 집사님에게 보고하느라, 그리고 오늘은 주정 뱅이들에게 끌려다니느라 고생했네. 그리고 우리집 양반이랑 젬이랑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내, 방 치워줄 테니 여기서 자고 가 “렴.”

“아, 괜찮습니다. 어머님. 피곤하지 않아요. 집에서 쉬고 싶네요.”

“그러니? 그래도 늦었잖니. 집까지 돌아가려면 피곤해서 되겠니?”

“하하. 눈 감고도 다니는 길인데요. 몇 달 떠나 있었다고 우리 집을 못 찾아가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난 제미니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스마인타그 씨의 집을 나왔다.

헬턴트 마을이 10년 동안은 떠들썩할 큼직한 술판을 벌였는데 난 별로 마신 것이 없군. 억울해라. 그러나 고향의 공기부터가 날 취하게 만드니 술 못 마신 것쯤은 참아주지. 어쨌든 내일 아침에 해너 아주머니는 홀 가득 널브러져 있는 주당들 정리하느라 꽤나 고생하겠는데.

사람들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황당해했다. 내 이야기는 많은 부분 삭제된 이야기였다. 들려줘선 안 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섞여 있으니까. 게다가 칼이 말했듯 우리 영지는 아무르타트와 균형을 이룬 마을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할슈타일 후작의 야심이라든지 넥슨의 비극, 크라 드메서의 고뇌 같은 것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 부분들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 걸쳐서 빼버렸다.

하지만 남은 이야기만으로도 헬턴트의 주민들을 당혹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요즘 미드 그레이드 쪽에서 들려오는 세이크럴라이즈에 대한 흉 흉한 소문을 들었고, 내가, 헬턴트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이 그것을 두 번이나 경험했으며 그 시작부터 잘 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들은 아련 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대미궁에 대한 기억을 건져낼 수 있었으며 내가 그곳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기막혀했다. 하지만 그들이 대미궁에 들어가기 전 에 밧줄을 밖에 묶어두고 들어갔으면 길 찾느라 고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핀잔을 줬을 때는 나도 기막혀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사람들의 머릿속의 대미궁이라는 것은 곰 굴보다 조금 더 큰 구조인가 보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난 선더라이더를 작업장에 묶어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집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던 불빛은 벽난로에 피워놓은 장작불의 빛이 었다. 그리고 벽난로 정면의 침대, 아버지가 쓰시던 그 침대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타이번이었다.

타이번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후치냐?”

“예. 오래 기다리셨어요?”

촛불이라도 켜놓고 있지 그랬냐고 말하려다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타이번이 필요한 것은 빛이 아니라 벽난로의 온기였겠지. 난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타이번은 여전히 벽난로를 향한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반쯤 비운 술병이 세워져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자 타이번은 싱긋 웃더니 술병을 들 어 정확하게 나에게 건넸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팔만 뻗어서.

“귀신 같네요. 정말 안 보이는 것 맞아요?”

“흐음. 누군가가 술병을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우와! 뮤러카인 사보네다! 하하하. 난 입을 닦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병을 도로 내밀었다. 하지만 타이번은 고개 를 가로저었다.

“생각 없네. 자네가 다 마시게.”

참 굉장하다, 굉장해. 술병 속의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라도 들으셨나? 난 킬킬거리며 탁자 위에 술병을 세워놓았다. 타이번은 물끄러미 벽난로를 바 라보며, 아니, 그냥 그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말했다.

“허, 참. 먼지 타는 냄새가 굉장하군.”

“오랫동안 불을 안 피웠으니까요. ………핸드레이크.”

핸드레이크는 무표정했다. 시력이 없기에 눈꺼풀은 그냥 고요히 감겨 있어 흡사 깊은 생각에라도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벽에는 나와 핸드레이 크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일렁거릴 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어제 들려줬던 이야기에서 자네가 대충 짐작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다. 왜 오늘에서야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냐?”

“제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래? 으흠. 혹시 다른 사람에게 말했느냐?”

“글쎄요. 칼은 아마 짐작할 거예요. 내가 아는 건 칼도 거의 다 아니까. 샌슨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겠죠. 그런데 에델린이 여기 다녀갔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더군요?”

“음. 그 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그의 눈꺼풀이 열리며 하얀 눈동자가 드러났다.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한쪽 눈을 찡긋했 다.

“앞으로도…………….”

“비밀이겠죠. 알았어요.”

“똑똑한 조수 녀석이로군. 하하. 사물을 보는 눈은 잃어버렸지만 사람 보는 눈은 그대로 남아 있단 말이야.”

“그 눈은, 뱀파이어의 부작용인가요?”

“비슷해. 무리하게 낮에 돌아다니다가 시력을 많이 잃었지. 몸도 엉망이 되었고. 무녀의 마을에서 문신 시술을 받은 덕분에 몸은 그런대로 되찾았고 흡혈도 꽤 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눈은 완전히 거덜났지. 여기, 왼쪽 가슴…………, 심장 쪽에 있는 문신은 뱀파이어의 봉인이야.”

“흐음. 무녀들은 별 희한한 재주가 다 있네요. 그런데 그거 여자만 받는 거라고 하던데?”

“예외는 다 있잖아.”

“아, 예. 그렇죠.”

핸드레이크는 몸을 쭉 펴면서 말했다.

“그럼, 어제 듣던 이야기나 계속 들었으면 하는구나. 레니는 무슨 선택을 했지? 네가 이렇게 돌아온 것을 보니 레니는 지골레이드를 선택한 모양인 데.”

난 피식 웃으며 다시 술병을 들어올렸다. 헤헷.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못 마셨던 술을 여기서 다 마시게 되겠군.

“내가 말하기 전에 당신이 말해 보세요.”

“뭐?”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레니를 델하파로 데려갔던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핸드레이크는 두 손을 깍지 끼더니 무릎에 올려놓았다. 마치 자신을 정리하는 듯한 동작이군.

“몇 가지 해명되어야 할 게 있다고요. 당신이 델하파로 데리고 간 것은 어린 레니지요. 그런데 레니의 어머니는 요 근래까지 살아 있었지요. 그럼 당 신은 레니의 어머니로부터 그녀를 빼앗아서 데리고 간 것입니까?”

“전혀 사실과 다르다. 조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늦지 않았나 불안한데.”

“씨이. 그럼 설명해 주세요.”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없어. 내가 만났던 것은 레니야. 우연히 한두 살 정도 된 레니를 만나게 되었지. 그 옆에 어머니는 없었고, 내 추측이지만, 아 마도 레니의 어머니 되는 여자는 후작에게 아기를 빼앗길까 봐 임신하자마자 후작의 저택을 나와버린 모양이다.”

“이상하군요. 후작의 저택에 남아 있었다면 결국 후작의 딸이 될 테고 그럼 레니의 미래는 괜찮은 것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덩달아 그 여자 도・・・・・・ . “

“아냐.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후작이 필요한 것은 라자의 혈통을 가진 자식이지 아내가 아니야. 아내는 이미 있었으니까. 아마 자식만 빼앗 기고 그 불쌍한 여자는 쫓겨나게 되었을걸. 생각해 보게. 정식 부인이 아니라 하녀를 통해 자식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밝혀지면 후작가의 명예는? 또 는 라자의 명예는 어떻게 될까?”

“이런 제기랄…….”

“그래서 임신 사실을 숨기고 후작의 집에서 빠져나온 것일 테지. 하지만 그 여자는 그렇게 강한 여자는 못 되었을 게고. 그래서 결국 레니를 후작 저 택 앞에 버려둔 것이었겠지.”

“아하.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래. 난 후작의 저택 앞에서 레니를 주웠다. 보기 딱해서 데리고 다녔지. 델하파까지 어떻게 흘러갔는데 그때 급히 남쪽으로 내려갈 일이 있었어. 시오네 녀석 때문이었지. 그 녀석의 정보를 붙잡았거든. 그래서 레니를 델하파의 그 주점에 맡기고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갔던 거다.”

“흐음. 이제 알겠군요.”

“그러니 레니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나더러 짐작하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말이야.”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면서요?”

핸드레이크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난 불빛을 받아 마치 반지처럼 빛나는 술병의 주둥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 내가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기막힌 말이 바로 이것이라구요. 이 모든 사건 은 결국 드래곤 라자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핸드레이크가 바로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니. 바이서스의 은인이었던 핸드레이크가 바이서스의 비극의 씨앗을 잉태한 사람이라니.”

“요놈아. 눈앞에 있는 사람을 3인칭으로 말하지 마라. 여행 돌아다니다가 못된 물만 들었구나.”

“아, 죄송합니다. 나 지금 무지무지 혼동되는 머리를 부여잡고 헬턴트 마을까지 힘들게 참아가며 온 뒤라서 그래요. 그러고 나서도 또다시 이틀이나 참았기 때문에 지금 머릿속에선 폭발할 정도라구요. 그럼 뭐죠? 당신이 드래곤 라자를 만들어냈다면, 당신이 할슈타일 가문의 부흥의 원인이고, 크라 드메서의 비극의 원인이고, 드래곤 라자들의 슬픔의 원인이고……………, 젠장!”

쾅!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고 탁자는 단숨에 박살나 버렸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박살난 탁자의 조각들을 벽난로 안으로 차넣었다.

“설명해 보라구요! 왜 드래곤 라자를 만든 거죠?”

“짐작하는 바라도 있는 거냐? 자네가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짐작하는 바가 있어요.”

“말해 봐.”

탁자가 없어지니 술병 내려놓을 곳이 없군. 난 술병을 든 손을 의자 옆으로 늘어뜨린 채 맥풀린 모습으로 앉았다. 하지만 핸드레이크의 앉은 자세는 아까부터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내가 주정뱅이가 된 것 같군. 모습도,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별이 몇 개죠?”

“여덟 개지.”

“그래요. 여덟 별. 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 하플링, 페어리, 오크. 나머지 하나는 모르고. 어쨌든 드래곤의 별만 남았지요. 그런데 정말 드래곤의 별만 남았나요?”

“뭐?”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별… 그건 어떻게 된 거죠?”

핸드레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난 핸드레이크의 화법에 말려들어 버렸군. 핸드레이크는 아까부터 나에게만 말을 시키고 대답하고 싶 은 부분에서만 대답하고 있어. 아, 좋으실 대로, 난 떠들 테니까.

“좋아요. 일단 알려진 종족들의 알려진 별 중에서 남은 것은 드래곤의 별뿐이죠. 그리고 내가 들어왔던 이야기가 옳다면, 별이 사라진 종족들은 그 불완전성을 영원히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좀더 완전한 종족인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선 라자가 필요하다는.”

다시 술병을 들이켠다. 하지만 목이 마르다.

“퍽 웃기는 이야기죠.”

“웃긴다고?”

“그건 조건일 뿐이에요. 이유가 아니라.”

“설명해 봐.”

“조건과 이유는 다르죠. 우리가 완전에 가까운, 우리의 반대쪽 극단인 드래곤과 교류하려면 드래곤 라자가 필요하다. 이건 조건이죠. 하지만 드래곤 과 교류할 필요는 뭐죠? 행동은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유에서 나오는 거죠. 식탁이 잘 차려졌다고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거예요. 우리가 드래곤과 교류할 조건은 드래곤 라자로써 갖추어졌다고 보고, 그런데 교류할 필요성은 뭐죠?”

다시 한 모금. 위대한 크라드메서를 위해.

“난 크라드메서를 만났지요.”

핸드레이크는 그 하얀 눈으로 장작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눈은 새빨갛게 보였다. 문득 뱀파이어라는 게 핸드레이크에게 얼마나 어울리는 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크라드메서는 라자의 계약을 꺼리고 있었어요. 그때 나는 깨닫게 되었죠. 크라드메서는 이렇게 말했죠.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접촉하면, 분명 변화 는 일어나는 법. 바다를 그리워하며 달려간 강물은 결국 바다가 되어버리지.’ 인간들은 그에겐 너무 벅찬 존재들이었고, 라자가 찾아옴으로써 그는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다.”

술이 다 떨어졌나? 하지만 정신은 맑기만 하고 목은 바싹 타오르는데. 난 술병을 거꾸로 쥐고 한참 흔들어서 마지막 몇 방울을 입에 떨어뜨렸다. 입 술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군.

“인간은 드래곤 라자를 통해 드래곤을 변화시킬 수 있지요.”

그래. 바로 이거야. 드래곤의 별이 보호하는 드래곤들이었지만 인간은 라자를 통해 드래곤에게 접근할 수 있지.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행했던 일을 드래곤에게도 행할 수 있게 되었지.

“간단한, 너무나 간단한 것이죠. 인간들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변화시켜 왔던 자들이지만, 저 위대한 종족, 자신의 별을 끝까지 지켜온 종족인 드래곤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드래곤 라자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드래곤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거죠.”

난 비어버린 술병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 만세.”

핸드레이크는 말하지 않았다.

“이거 보세요. 내가 선창했으면 당신도 따라하라구요. 루트에리노 대왕 만세! 마침내 드래곤마저도 인간의 신전에 바쳐지게 되었도다! 인간의 발길 이 닿으매 숲에는 오솔길이 생기고 인간의 눈길이 닿으매 밤하늘엔 별자리가 생기는도다. 인간이 비웃으매 엘프는 자멸할 것이며, 인간이 깔보니 드 워프는 퇴화할 것이다. 자신의 별을 지닌 드래곤은 인간의 손길에서 안전하리라 믿었으나 드래곤 라자 있으매 마침내 그 별의 보호도 퇴색하였음이 니. 두 발로 서서 하늘을 쏘아보는 저 인간은 마침내 드래곤 라자로써 별의 보호를 깨뜨리고 드래곤마저 굴복시켰도다. 인간 만세, 루트에리노 대왕 만세! 하하하하!”

위이이잉! 바깥의 바람들이 내 웃음소리에 호응하듯 거칠게 불었다. 굴뚝 위에서 연기가 역류하는 것인지 벽난로의 불길이 기이하게 흔들린다. 그리 고 불길의 흔들림에 따라 벽에 떠오른 핸드레이크와 나의 그림자들도 기이한 춤을 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핸드레이크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처음 오두막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지금껏 핸드레이크의 음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으으으아!”

난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머리를 가슴에 푹 파묻은 채, 난 길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으후후후………… 후우우…….”

그렇게 머리를 늘어뜨린 채, 발끝을 바라보며 나는 힘없이 말했다. 

“이루릴이라는 엘프가 말했죠.”

발 옆으로 뻗어나가는 긴 그림자가 불길의 일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그리고 내 다리의 명암도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다리가 꿈틀 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후우우. 조화를 이루려면 서로 달라야 한다고. 엘프들은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때 난 당신의 계획이, 당신의 야망이 말도 안 된다는 것 을 깨달았죠. 혹은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어떻게 다르지?”

“당신은 모든 종족들을 완전으로, 그들의 부조리를 뛰어넘어 신께로 인도하려고 했어요. 낭만적이고 야심만만한 계획이죠.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 로 말이 안 돼요. 완전성은 불완전성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난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손에 무엇을 든 듯한 모습을 취했다.

“똑같은 두 개의 돌멩이가 있어요. 무게도, 색깔도, 질감도 다 똑같아요. 그렇다면 그것들에 대해서 무겁다, 또는 가볍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두 개의 돌멩이의 무게가 서로 다를 때 하나가 무겁다, 또는 다른 하나가 가볍다고 말할 수 있죠.”

난 다시 손을 내렸다. 어차피 핸드레이크는 보지 못하는 것.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동작이었을 뿐이다.

“완전성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다른 점이 있을 때만이 하나는 완전하다, 다른 하나는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초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심지가 빠진 초가 완전한 것인지 불완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아니, 원래 세상에 있는 초라는 초가 모두 심지가 없다면 사람들은 심지가 없는 초가 완전한 것이라고 믿었겠죠. 비교해 볼 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에.”

완전이라는 거, 결국 존재하는 것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건 벌써 불안하다. 무의미한 것들이 의미를 가질 때까지 모인다는 것이 가능한가? 무의미한 것들이 모인다고 의미가 생기는 것일까? 천만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완전하고, 그것이 제아무리 모여봐야 완전해질 수 없다. 완전은 유일자의 의미이자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은 여덟 종족을 모두 완전으로 이끌려고 했지요. 만일 당신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여덟 종족은 똑같은 것이 되고 말겠죠. 그렇다면 거기에는 완 전이 없어요. 신들마저도 자신을 구현하기 위해 서로 달라져야 하는 우리 세상에서는 유피넬과 헬카네스!”

유피넬과 헬카네스. 항상 복수다. 단수가 없다. 유일자라는 것은 없다.

“유피넬은 헬카네스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헬카네스는 유피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요! 유피넬은 조화이기 때문에 혼돈을 갖지 못해서 불완 전하고, 헬카네스는 혼돈이기 때문에 조화를 갖지 못해서 불완전하지요. 따라서 당신의 계획은 엉터리예요. 혹은 당신 스스로가 완전의 의미를 잘못 알았든지. 당신의 계획을 굳이 실현시켰다면 당신은 유피넬과 헬카네스도 뛰어넘는 종족들을 만들어내야 되지요.”

핸드레이크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난 다시 질문했다.

“존재는 구별이고 구별은 다른 점이 있을 때 가능해요!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상관 없어요. 무엇이 무엇과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죽었다 깨도 여덟 별의 종족들을 완전으로 이끌 수가 없어요. 설령 그 별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내 말이 맞나요?”

“맞아.”

“자신의 실패를 곱씹으면서 우울해하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없어.”

“좋군요. 지금은 감정에 푹 빠진 대화 원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 사실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당신이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당신 의 이상을 포기하고 당신 자신이 인간의 편에 서겠다는 선언의 의미인가요? 대왕에 대한 회귀인가요?”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볼 수도 없는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로군.

“인간에 대한 판단 오류였지.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절대 헤어날 수 없는 덫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고. 자네가 판단해 보게.”

“들려주세요.”

핸드레이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1분 가량 핸드레이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 그는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300년을 거슬러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드래곤 라자를 만든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내가 드래곤 로드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그 이야기는 들어 알겠지?”

“예.

“루트에리노 대왕에 의해 별들이 파괴되었을 때.”

하마터면 페어리퀸 다레니안에 의해서… 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말한 거나 다름없어. 핸드레이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으니까. 난 헛기침을 좀 하고서 핸드레이크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별들이 파괴되고 나서 나는 하나 남은 드래곤의 별을 손에 넣기 위해 드래곤 로드를 찾아갔지. 물론 이때까지는 자네가 말한 그 완전성의 불 합리함을 모르고 있었다네. 난 하나 남은 드래곤들만이라도 완전으로 이끌어주고 싶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의 최강의 적을 찾아갔던 것이지. 하지만 자네가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다면 그때 나는 혼자서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야.”

“어? 혼자 찾아가지 않았어요?”

“천만에. 난 혼자서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분명히 바이서스 임펠을 떠나 단신으로 대미궁을 향해 찾아갔는데. 할슈타일 공이 지키고 있는 그 북방의 대미궁으로…….

할슈타일 공!”

“맞았어.”

“그랬군요. 당신은 혼자서 드래곤 로드를 만나지 않았어요. 할슈타일 공의 안내를 받아서 대미궁으로 들어갔었지요. 마치, 마치 인간이 라자를 통해 드래곤과 이야기하듯이!”

“그렇지. 옛 기억이 생생하군. 말하자면 할슈타일 공은 드래곤 라자 가문의 시조이자 최초의 드래곤 라자였던 셈이지. 인간 핸드레이크와 드래곤 로 드를 연결시켜 준.”

“굉장한 곳이군요. 할슈타일 공.”

지하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어지기 어려울 만큼 넓고 높은 통로들을 바라보며 핸드레이크는 유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앞에서 횃불을 들고 걸어가는 할슈타일의 어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횃불의 불빛이 다가감에 따라 뒤로 물러나는 그림자 속에서는 간혹 무시무시한 눈빛들이 번득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통로이거나 혹은 곁으로 갈라진 골목 등에서 끔찍스러운 비명소리나 포효소리들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대미궁에 거주하는 오크들이나 아니면 다른 몬스터들일 것이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태평하게 걸어갔다.

“역시 드워프가 만들어야 뭐든 제대로 된단 말입니다.”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 대왕과 다레니안이 별을 파괴하던 그 지하 제단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지만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할슈타일 공은 별 대답 이 없었다.

“아직 많이 남았습니까?”

“이제 초입이오.”

“와하! 역시 드워프들이 만든 곳답군요. 난 사실 이제 거의 다 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소?”

할슈타일 공은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말하고는 쉼없이 걸어갔다.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고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한 10분쯤 걸어갔을까. 핸드레이크는 가고일의 것으로 짐작되는 날카로운 포효를 들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만일 당신이 없이 나 혼자서 여기로 들어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횃불이 갑자기 멈추었다. 할슈타일 공은 멈춰 서서, 하지만 뒤로 돌지는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라도 죽고 말았을 거요. 반드시!”

“그렇게 믿습니까?”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소. 난 지금 시신을 안내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소. 당신은 정말 드래곤 로드의 앞에 가서도 당신이 죽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거요?”

할슈타일 공은 여전히 등만 보인 채 말했다. 핸드레이크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일까.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씨익 웃었다.

“알 수 없지요.”

할슈타일 공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할슈타일 공이 직접 안내하는 길이었기에 중간에 나와 방해를 하거나 하는 자는 없었다. 간혹 경비로 짐작되 는 가고일이나 트롤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은 지나가는 할슈타일 공과 핸드레이크를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중앙 폭포에 이르렀다. 할슈타일 공과 핸드레이크는 폭포 뒤의 통로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폭포 뒤에서 중앙 호수 쪽으로 걸어나오면서 핸드 레이크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중앙 호수의 맑은 물 속에는 드래곤 로드의 거체가 잠겨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날개를 접고 꼬리를 단단히 말아붙인 그 거대한 몸은 호수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호수 주위를 둘러싼 거대 한 원형 통로 곳곳에 피어 있는 횃불과 천장에 떠 있는 기괴한 빛무리들 때문에 중앙 호수는 낮처럼 밝았고 그래서 할슈타일 공은 들고 온 횃불을 옆 으로 집어던졌다. 그는 핸드레이크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일단 이곳에 서 있으시오. 폭포 뒤에 말이오. 당신의 모습을 갑자기 보여드려서 그분의 진노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소.”

핸드레이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할슈타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핸드레이크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슈타일 공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호수 가장자리 가까이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드래곤 로드여. 당신의 종 할슈타일이 뵙고자 청합니다.”

잠시 후 드래곤 로드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부지불식간에 ‘헛’하는 감탄사를 내면서 입을 쩍 벌렸다.

어깨 위에 올려둔 드래곤 로드의 그 기다란 목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중앙 호수 전체로 거대한 파문이 그려졌다. 쏴아아

아. 드래곤 로드의 기다란 목이 물 위로 완전히 올라오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았다. 그토록 천천히 움직였건만 호수 물은 몸서리를 치 며 출렁거렸다. 워낙 크기 때문에.

마침내 드래곤 로드의 머리가 호수 위로 완전히 솟아올랐다. 그 목의 절반 이상이 물 아래 잠겨 있었는데도, 물 위로 올라온 드래곤 로드의 머리는 바라보는 핸드레이크의 목이 꺾일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드래곤 로드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할슈타일 공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할슈타일인가.”

“평안하시온지오.”

“어리석은 질문이군, 할슈타일이여. 간특한 루트에리노의 발톱이 나에게 남긴 상처를 모르는가?”

“죄송합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부정을 의미하는 약한 동작이었지만 숨어서 보고 있는 핸드레이크로서는 대미궁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아니. 비유가 잘못되었군. 루트에리노 자신이 핸드레이크의 발톱인가. 하하하. 그렇다면 핸드레이크의 발톱이라고 말해야 옳겠군.”

그때 핸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똑똑히 울렸다.

“글쎄요. 제 발톱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발톱은 저에게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드래곤 로드.”

할슈타일 공은 기겁하면서 일어섰다.

“핸드레이크! 내 나오지 말라고…………!”

핸드레이크는 폭포 뒤쪽에서 걸어나오며 드래곤 로드를 올려다보았고 드래곤 로드는 그 거대한 목을 뻣뻣이 세운 채 핸드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중간에 선 할슈타일 공은 좌우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잠시 후 드래곤 로드의 말이 울려나왔다.

“왜 할슈타일을 먼저 보낸 것인가. 내 분노를 조금이라도 모면해 보려는 것이었나?”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럴 것 같더군. 네가 이곳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 몰래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너도 믿지 않았겠지.”

“물론 그러실 테지요. 루트에리노의 검이 아무리 날카로웠다 한들 당신의 힘까지 어쩌지는 못했을 테니까.” 드래곤 로드의 머리 각도가 아주 조금 바뀌었다.

“루트에리노의 검이라고 했는가? 자네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지?”

할슈타일 공은 그만 당황해 버렸다. 핸드레이크도, 드래곤 로드도 벌써 오래전부터 서로간의 만남을 대비해 온 사람들처럼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 들이었다. 핸드레이크의 말대로라면 드래곤 로드는 최소한 핸드레이크가 대미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저토록 침착한 것인가?

핸드레이크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좋은 대화를 위해, 제가 당신과 대적했던 일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둡시다. 나도 당신이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한 일을 잠시 접어둘 테니.”

드래곤 로드의 눈매가 급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드래곤 로드는 얼굴 전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를 내며 말했다.

“건방진 놈…………! 그러면 그까짓 페어리의 일로 나에게 힐난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더냐?”

“물론. 만일 다레니안이 죽었다면 이 대미궁은 세상에서 없어졌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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