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6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6화

6

아버지는 끝까지 남겠다고 고함을 지르시다가 겨우 터너에 의해 끌려갔다. 아버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시간 을 끄니까 고블린들이 점점 짜증을 내는 것 같지 않아요? 난 쓸데없는 생각을 집어치운 다음 제미니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뱃속 깊숙 한 곳까지 숨을 들이마신 다음 단숨에 고함을 질렀다.

“야이, 망할 계집애야! 타이번을 태우고 가는 것까지는 별로 무리가 없지만 너까지 태우면 빨리 달릴 수가 없다구!”

계곡 아래쪽으로 사라지는 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미니는 내 고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미니는 해죽 웃으면서 말했다.

“나 가벼운데.”

“그래도 한 사람 몸무게가 늘어나는 거잖아! 게다가 한 사람 엉덩이도 늘어나는 거고! 말 위에 세 사람이 앉는 것이 쉬운 일인 것 같아?”

“네가 안아라?”

·고삐는 어떻게 잡고!”

“어, 흔히 그러잖아. 타이번 씨는 뒤에 태우고 나는…………… 네가 겨드랑이에 날 끼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으면 되잖아. 나 불평 안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흔히 그러기는 누가 흔히 그래! 그건 옛날 이야기에서나 그렇고!”

“응? 그럼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니?”

제미니는 아주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저렇게 물어왔다. 왠지 고함을 빽빽 지르는 것이 바보처럼 여겨지는데.

“이봐, 제미니. 어, 그러려고 들면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OPG도 끼고 있으니까 네 몸무게가 그렇게 부담되는 것도 아 니긴 하지만, 그래도 한 손으로 말을 조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거짓말이다. 으윽. 말 위의 싸움이라는 것은 어차피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다른 손에 검을 쥐는 것이니까. 제미니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정말 그 래?”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제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난 얼굴을 구기면서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없군. 젠장.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헤에. 잘 부탁해?”

“그만해!”

우리들의 이 웃기는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 타이번은 태평하게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고블린들이 보기엔 눈 뜨고 못 봐줄 장면이겠군. 말싸움을 벌 이는 소년 소녀와 그 옆에 앉아 쉬고 있는 장님 노인이라니. 그들이 우리들을 제대로 된 인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지휘자 고블린은 고함을 질렀다.

“키, 케륵! 보석은 어디 있느냐? 만일 거짓말이라면, 케르르르! 말해 주겠는데 지금 당장 저놈들을 쫓아가는 것은 간단하다! 켈, 켈, 케륵! 게다가 아 무르타트께서 너희 영지를 가만 내버려둘…………….”

난 손을 휘저어 고블린 지휘자의 외침을 막았다.

“알았어. 알았다구. 전해 주겠어.”

고블린들은 으르렁거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난 사방에서 내려꽂히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선더라이더로 걸어갔다. 선더라이더. 여기 까지 이 무거운 것 가지고 오느라 정말 수고했다.

난 안장에 매달아둔 보석 주머니들을 풀어냈다. 모두 다섯 개. 난 그것들을 들고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 앞쪽의 커다란 바위로 걸어갔다. 내가 바 위 위에 주머니를 내려놓자 고블린 지휘자는 고함을 빽 질렀다.

“크카각! 날 속여?”

“속이기는 누가 속여!”

“그럼 그게 보석이란 말이냐! 키케르! 보석이 그렇게 가벼울 리가 없다!”

“멍청아. 내가 엄청나게 힘이 센 거야! 네가 말했듯이 너희들을 속이면 아무르타트가 우릴 가만 내버려둘 리가 있겠냐! 아니, 내려와서 이걸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난 물러나 있을 테니까!”

고블린 지휘자는 한참 동안 날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파이크를 들어올려 신호를 보냈다. 아까처럼 좌우에서 몇 마리의 고블린들이 뛰 어내려 왔다.

난 뒤로 물러서서 제미니와 타이번을 가리고 섰다. 계곡 바닥에 내려온 고블린들은 파이크를 들어 우리를 겨냥하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놈들은 마치

소나 개를 위협하듯이 쉭쉭거리며 파이크를 내찔러 왔지만 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른 다음, 고블린들은 내가 내려놓은 주머니에 접근했다. 놈들은 주머니 옆에 주욱 늘어서더니 먼저 그들 중 하나가 파이크를 거꾸 로 든 다음 주머니를 툭 건드렸다. 하지만 주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서로를 바라본 다음 조금 더 세게 주머니를 찔렀지만 주머니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파이크로 주머니를 찌르던 고블린은 그제야 파이크를 옆에 내려놓더니 주머니로 다가섰다. 놈은 서툰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고 그 동안 제미니는 내 목 뒤에 김이 서릴 정도로 입김을 불어댔다.

“빨갛게 익지 않았냐?”

“뭐?”

“내 목 뒤가 빨갛게 익지 않았냐고. 그렇게 붙어서서 헉헉거리니까 너무 뜨겁잖아.”

“아, 미, 미안해, 후치야. 하지만 나 무서워서………….”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남기는 왜 남아. 그러니까 얌전히……, 악!”

난 제미니에게 꼬집힌 허리를 문지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구, 요 귀여운 계집애! (긴장이 너무 심했나? 내가 왜 이러지?)

그때 좌르르!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침내 고블린은 주머니 하나를 힘들게 연 모양이다. 놈의 서툰 손놀림 때문에 주머니 속에 있던 보석들이 한 꺼번에 쏟아지면서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고블린들은 질겁하며 물러나더니 곧 입을 쩍 벌렸다.

온통 무채색인 끝없는 계곡의 정경 속에서 보석들은 정말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을 뿜어댔다. 타이번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고블린들이 얼떨결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렸을 정도였다. 주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고블린들은 멍한 눈으로 보석을 바라보았고 절벽 위의 고블린들도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끼…… 끼깃!”

“크케르・・・・・・ 케르르르르!”

주머니를 둘러싼 고블린들이 기어코 파이크를 위로 들어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곧 절벽 위의 고블린들도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벽 아래쪽에 있던 고블린들은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아래로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케르르르르! 우케르르르!”

“케켁! 키, 키키키켁!”

귀가 먹어버릴 정도로 요란한 함성이었다. 절벽 곳곳에 있던 고블린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함성을 내질렀고 달려내려온 고블린들은 아귀처럼 보석에 달려들었다. 주위가 너무 요란해서 낮게 속삭이는 제미니의 목소리를 거의 못 들을 뻔했다.

“저 고블린들 왜 좋아하지? 저건 아무르타트 거잖아?”

“단순하다는 증거지, 뭐. 지금은 좋아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괜히 좋은 기분에 찬물 끼얹지는 말고.”

그때 절벽 위에서 모든 함성을 억누르는 괴성이 터져나왔다.

“케라라락! 건드리지 마!”

지휘자 고블린이었다. 지휘자 고블린은 다른 고블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더 고함을 질러야 했다.

“케라라락! 크케라라라락! 손대지 마! 만일 삼키는 놈이 있다면 배를 갈라놓겠다! 케케케켓!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네놈들 모두 배를 갈라놓을 거다!” 웃기는 협박이군. 마치 저 보석이 전부 몇 개인지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 협박은 보석을 들고 미쳐 날뛰던 고블린들의 동작을 멈추게 하는 데 충분했다. 게다가 제미니를 겁주는 데도 충분했다.

“후치야, 후치야! 이제 가자. 보석은 다 줬잖아? 고블린들이 알아서 챙겨갈 거잖아?”

제미니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칭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타이번도 바위에서 일어났다.

“그래. 후치. 이만 나가보자. 재물이 있는 곳에는 재앙이 있게 마련이야. 따라서 재물 근처에서는 도망치는 편이 낫지.”

재앙? 과연 몇몇 고블린들이 불만스러운 으르렁거림을 내기 시작했다. 지휘자 고블린의 말에 반항이라도 할 듯이 파이크를 거칠게 흔들어대는 고블 린의 모습도 보였다. 절벽에 늘어선 고블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상한 눈짓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자 고블린 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외쳤다.

“이 미친 놈들! 카랏! 모두들 꼼짝마라! 아무르타트가 가만 있을 거 같으냐? 네놈들이 보석에 침을 흘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케르르르르! 아무르타 트가 네놈들 머릿가죽을 벗기실 거다! 킥, 슈, 케키르! 아니, 아무르타트는 눈빛만으로 네놈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의 배를 갈라 보석을 내놓게 만 “들 거다!”

“그 말엔 전폭적으로 찬성이야.”

타이번의 중얼거림이었다. 타이번은 이미 제미니의 부축을 받아 선더라이더에 오른 다음이었다. 난 그들을 한 번 돌아본 다음 다시 주위의 절벽을 돌아보았다. 아무르타트의 이름을 빈 협박은 확실히 먹혀드는 모양인지 고블린들은 이제 수상한 짓을 그만두었다. 비록 기뻐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휘자 고블린은 그런 대로 고블린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 용건을 말해도 되겠군. 젠장. 이 용건 때문에 나 혼자서 남고 싶었는데. 제미니뿐만 아니라 타이번도 여기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난 속으로 투덜거린 다음, 조용해진 계곡을 향해 외쳤다.

“이봐! 약속대로 보석은 내주었다!”

“좋아! 케르, 켁! 꺼져라! 내 부하놈들이 인간 고기맛을 떠올리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헤에. 꽤나 무서운 말이군. 그런데 말이다! 나에겐 다른 용건이 있는데!”

“키키키르! 용건이라고!”

“그래! 나는 아무르타트를 만나고 싶다!”

계곡을 가득 메운 불길한 침묵은 제미니의 울음소리로 깨졌다.

“우왕! 타이번 씨! 저 녀석 좀 어떻게 해주세요! 조금 전에 한 말 들으셨죠?”

“아, 그, 그래. 제미니. 그런데 좀 흔들지 말아주겠나? 난 장님이라구. 말 위에 있는 장님을 그렇게 흔들어대는 법이 아냐.”

“아,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저 완전히 돌아버린 녀석 좀 어떻게 해달라구요! 이잉!”

완전히 돌아버린 녀석이라구? 내가 도대체 왜 제미니에게 미쳐 있는 것일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이봐, 후치 네드발. 너 정말 팔자가 따분 무쌍하다. 제미니가 너를 걱정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은 알겠는데 말이야, 저렇게 말해 가지고서 어디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겠어? 저런 계집애 따위 걷어차 버려. 뭐라구? 닥쳐랏! 제미니를 험담하지 마! 더 이상 입을 그런 식으로 놀리면 내가 너를……………. 맙소사, 제미니. 네가 맞았어. 난 완전히 돌았나 봐.

그리고 그 사실은 고블린들의 태도에서도 확실히 증명되었다. 고블린들은 미친 놈 보듯이 날 바라보았던 것이다.

“뭐, 케레레, 뭐라구?”

“아무르타트를 만나고 싶다구!”

“누가?”

“내가!”

“누구를?”

“아무르타트를! 그리고 혹시 ‘어쩐다고?”라고 물을 거라면 미리 대답하지. 만나겠다구!”

“왜?”

확신하는데 저 고블린은 틀림없이 고블린들 중에 천재에 해당하는 녀석일 것이다. 내가 인간들 중에서 바보에 해당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저 녀석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편이 낫겠어.

“너희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아니다! 내 용건은 아무르타트에게 있지 너희들에게 있지 않다. 아무르타트는 자신에게 돌아와야 되는 것을 그 수하 가 가로채는 것에 대해 관대하다는 말이냐!”

고블린들의 지휘자는 잠시 아무런 말없이 서 있었다. 그 틈을 타서 타이번이 내게 말했다.

“후치, 잠시만. 아무르타트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건가?”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수많은 고블린들이 손에 무기를 든 채 내려다보고 있는 장소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웠다. 타이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번의 눈은 희다. 모진 풍상이 그의 얼굴빛을 검게 물들여왔고 목에서 거뭇하게 올라오는 문신이 그 어두움을 더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희게 빛나고 있는 눈은 섬뜩한 것이었다. 나는 힘들게 침을 삼킨 다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알려줄 일이 아닙니다. 내 용건은 아무르타트에게만 있으니까요.”

타이번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그러나 침착하게 말했다.

“그 용건이 뭔지 모르니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어. 하지만 넌 위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거냐?”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드래곤에 대해서는 철자만 알고 있는 소년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드래곤과 직접 만나본 소년의 생각이 지요.”

제미니는 이제 타이번에게 매달리던 짓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내게로 달려들더니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후치야, 후치야! 그러지 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왜 그러는 거야? 아무르타트를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제미니. 날 믿어달라고 말하면 어쩔래?”

“널 믿느니 내 코가 더 높아질 거라고 믿겠어!”

“음? 글쎄다. 너 별로 코가 낮지는 않은데? 아니, 딱 적당하다고 생각해.”

“고마워…………. 아, 아니! 어쨌든 나 절대로 너 못 믿어! 어서 돌아가자, 응! 제발 이러지 마아아! 그렇게 벌쭉벌쭉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 어서 취소하 란 말이야!”

그래도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으니 히죽히죽 웃는 도리밖에. 어떻게 하면 제미니에게 내 결심이 굳은 것이며, 내가 아무르타트를 만나는 것이 중요 한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난 제미니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다음 진지한 얼굴로 제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미니. 어떻게 하면 너에게 내 결심이 굳은 것이며, 내가 아무르타트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납득 안 할래!”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나 보다. 이그!

“야! 이! 고집 센! 계집애야! 난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무르타트를 만나보고서야 돌아갈 거야. 그만! 일부러 울려고 들지 좀 마! 얼굴 펴! 너 울어도 나 는 고개도 안 돌릴 거야. 그럼 너도 괴롭고 나도 괴롭기만 할 뿐 아무것도 건질 게 없으니까 울지 마. 알았어?”

제미니는 입을 쩍 벌리고 날 올려다보았다. 요, 계집애. 눈이 동그래져서 그렇게 올려다보니 마음이 다 풀어져버리는군. 제미니의 입술이 몇 번 오물 거리더니 간신히 말 비슷한 것이 나왔다.

“울어도?”

“그럼!”

“정말?”

“저어엉말!”

“와아아아앙!”

“으아! 제미니, 잘못했어. 용서해 줘!”

제미니는 가장 편한 자세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채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갖가지 귀여운 짓을 해야만 했다. 타이번은 묵묵히 자신의 소외된 위치를 감수했지만 고블린 지휘자는 그러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함을 빽 질렀다.

“케르! 케르! 이놈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키키키깃!”

간신히 제미니를 진정시켜 놓고(그 동안 나는 겉으로는 제미니에게 꽤 많은 거짓말을 했고 속으로는 그랑엘베르에게 엄청난 저주를 퍼부어 댔다), 난 이마를 닦으며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 의견 조정이 잘 안 되어서 말이야.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했는데? 괜찮다면 지금 당장 아무르타트에게 가서 전해.”

“케? 전하라구?”

“그래. 후치 네드발이 아무르타트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아무르타트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그가 날 모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 아.”

아무르타트는 분명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나를 지명하여 아버지를 내려보내 우리들을 맞이하게 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 일행 중에 나 같은 꼬마가 있으니까 그 아버지를 보낸다는 것은 이유로서는 많이 모자란다. 결국 그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겪으며 여기 까지 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니, 그가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난 그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니까. 드래곤 라자? 그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어!

그때였다.

“이키후!”

절벽 위의 고블린 지휘자가 크게 메아리치는 함성을 질렀다. 그놈은 함성을 지르면서 동시에 파이크를 거세게 휘저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다른 고 블린이 대답하듯 외쳤다.

“이키후!”

“이키후!”

몇 번 더 대답이 뒤따르고 나서 고블린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절벽 위에 있던 놈들은 절벽 뒤로 걸어가 버렸고 절벽의 틈 사이에 서 있던 놈들은 빠르게 위나 아 래로 움직이더니 계곡 안쪽으로 뛰어갔다. 굉장한 몸놀림들인데, 고블린들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달려갔다.

잠시 후 보석을 가지러 온 놈들을 가장 마지막으로, 계곡에 빽빽이 들어차 있던 고블린들은 언제 나타났냐는 듯이 사라졌다. 이게 뭐야? 아예 상종 을 안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블린들의 지휘자는 제자리에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절벽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놈이 절벽을 찰 때마다 돌멩이가 몇 개 퉁겨지고 작은 바위들이 흔들거렸지만 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식 으로 놈은 몇 십 초도 걸리지 않아서, 나라면 내려오는 데 한 시간은 걸렸을지도 모르는 절벽을 다 내려왔다. 그러더니 그놈은 파이크를 한 손에 늘어 뜨린 채 천천히 내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놈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그 발놀림은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지만 튼튼했다. 놈은 그렇게 가볍게 뛰면서 계곡 바닥에 널려 있는 바위들 위를 지나 내게로 다가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제미니는 그제야 고블린을 본 것인지 후다닥 일어났다.

고블린 지휘자는 15큐빗쯤 되는 거리에서 멈춰 섰다.

바닥에 내려온 것을 보니 확실히 지휘자 노릇을 할 만한 녀석이었다. 웬만한 오크보다도 더 큰 덩치였으며 그 몸에서 느낄 수 있는 탄력성이나 강인 함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대단히 질겨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크켁!”

고블린이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자 제미니는 기겁하면서 내 팔에 안겨들었다. 그러나 놈은 들고 있던 파이크를 옆의 땅에 박아넣을 뿐이었다. 그러고 는 놈은 두 팔을 앞으로 모아 팔짱을 꼈다. 이게 뭐지? 아, 무장은 치우라는 말인가? 난 천천히 바스타드를 검집에 꽂아넣고는 똑같이 팔짱을 꼈다. 덕분에 제미니는 내 팔을 놓치고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타이번이 뒤에서 걸어오더니 제미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미니는 흠칫했지만 타이번은 따스하게 말했다.

“가만히 기다려, 제미니,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고블린 지휘자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놈은 갑자기 눈을 감으며 턱을 조금 들어올렸다. 저것도 턱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으응?

놈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아무런 바람도 없었는데 놈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흔들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바람이 안 부네? 왜 이렇게 주위가 고요한 거지?

고블린의 떨림은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멎었다. 놈의 눈이 다시 열렸을 때 나는 운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찔릴 것처럼 예리한 눈빛. 고블린은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날 만나고 싶다고 했나?”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고블린의 몸처럼 작은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있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하마터면 팔 짱을 풀어버릴 뻔했지만 간신히 손가락으로 양쪽 팔을 꽉 움켜쥐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고, 팔이야! 제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목소리가 바뀌었어?”

“쉿. 제미니. 아무르타트야.”

제미니는 눈을 심하게 껌뻑거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르타트가 고블린이었어?”

타이번은 괴상한 기침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고 난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고블린은 폭소를 터뜨렸다.

“핫하하하!”

제미니는 고블린의 웃음소리를 듣더니 더욱 놀란 표정이 되어버렸다. 타이번은 간신히 그 괴상한 기침을 멈추고서는 제미니에게 설명했다. “마법이야, 제미니. 아무르타트가 마법을 써서 저 고블린을 통해 말하는 거야.”

“그래요?”

제미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난 힘들게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고블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반갑습니다. 위대한 드래곤 아무르타트.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넌 내 어머니의 원수야.”

제미니는 뜻 모를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절해 버렸지만 타이번이 용케 그녀를 부축한 모양이다. 그 동안에도 난 고블린의 눈에서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것은 아무르타트의 눈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랜 침묵 후 고블린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난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것이 네 용건인가?”

난 한참동안 호흡을 가다듬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저 침착하고 준엄한 목소리에 대해 열뜬 바보의 목소리로 대답하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 다. 잠시 후에야 나는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만큼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오. 이것은 당신에 대한 용건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용건입니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깊은 숙원을 풀어본 것이지요. 당신이 내 어 머니의 영전에 사죄하는 것까지 바랄 수는 없겠지만, 당신에게 직접 당신은 내 어머니의 원수라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확실히 너 자신을 위한 용건일 뿐이군.”

반응하지 않는다. 확실히. 난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럼 제 용건을………….”

“돌아가라.”

“예?”

난 당황해서 얼굴을 들어올리다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고블린의 얼굴에서 빛나는 아무르타트의 눈이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한 것이다. 네 용건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당장 돌아가라. 네가 입을 닥치도록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 다. 네가 스스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과 내가 널 죽여버리는 것. 난 양자 중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지만 너로선 상관이 많을 것 같군.”

고블린의 몸에서 울려져 나오는 아무르타트의 명령은 준엄했다. 난 얼굴을 찡그려보려고 애썼다. 안 되었다. 팔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소용없었다. 그야말로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난 눈알만 굴리면서 고블린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타이번의 말에 의해 나는 그 무서운 경직에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아무르타트.”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았다. 태풍이 불면 나무는 쓰러지는 법이다. 하지만 똑같은 정도의 태풍이 양쪽에서 동시에 몰아치면 나무는 곧바로 서 있 게 될 것이다. 나는 타이번의 말에서 고블린의 몸을 빈 아무르타트와 거의 같은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이 소년의 용건이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박정하게 거절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겠소?”

고블린은 우울한 눈으로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타이번은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론 제미니를 안아든 채 당당하게 고블린을 향해 서 있었 다. 자세히 보니 고블린은 나를 상대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아무르타트는 말했다.

“성급함이라는 말을 드래곤에게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성급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되오만.”

되오만? 알고 있군, 역시! 아무르타트는 타이번이 핸드레이크임을 알고 있었어.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누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소. 따라서 나는 당신이 당신의 주장을 철회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강요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오.”

“잘됐군. 나 또한 강요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요. 물론 살다 보면 부득이한 경우라는 것이 왕왕 발생하기도 하지만.”

흐음. 협박을 하고 있어. 목이 뒤로 꺾여버릴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도 난 고블린과 타이번을 바라보며 그 뒤에 있는 아무르타트와 핸드레이크를 바 라보고 있었다. 순간 무시무시한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불안한 느낌은 목에 걸린 뼛조각 같군.

혹시 핸드레이크는 이 장소를 다른 장소로, 여기 있는 사람과 드래곤을 다른 사람과 다른 드래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갈색 산맥에서의 카뮤와 크라드메서. 그리고 회색 산맥에서의 후치와 아무르타트. 쳇. 우습지도 않은 착각이군. 핸드레이크, 당신은 아직도 드래곤을 붙잡으려고 들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르타트도 크라드메서처럼 될지 모르는데?

그러나 나는 타이번을 저지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무르타트로 하여금 내 말을 듣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타이번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그 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둘의 모습에서는 이제 내 눈으로도 느낄 수 있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타이번은 산트렐라의 노래에 앉아 있을 때만큼이나 여유로워 보였지만 고블 린의 표정에는 꽤나 그럴 듯한 불안감과 증오가 나타나고 있었다. 거의 인간처럼 보일 지경이군. 그때 고블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당신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블린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말 사람 같은데.

“나에게는 석양의 감시자라는 이름이 있소.”

“그건 알고 있소만?”

고블린은 천천히 뒤로 걷기 시작했다. 타이번은 그 미세한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고블린은 뒤로 물러나면서 천천 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나는 석양을 감시하며 석양에서 감시하오. 내 앞에서 만물이 끝나고, 동시에 만물의 끝에서 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소. 나는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딸인 시간의 충실한 종이오.”

“……그런데?”

고블린은 뒤로 걷다가 그대로 훌쩍 뛰어 바위 위에 섰다. 고블린이 바위 위에 섰을 때 들려온 낮은 소리 때문에 타이번은 움찔했지만 그가 뭐라고 말 할 기회는 없었다. 고블린은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나의 기다림은 이미 길었거늘, 당신의 황혼은 너무 길군.”

순간 타이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의 얼굴이 굳은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장님처럼 몇 번 주춤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진짜 장님이긴 하지만 지금껏 그는 전혀 장님처럼 행동하지 않았는데?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서 제미니를 받아들었다. 내가 제미니를 받아들자마자 타이번은 두 손으 로 지팡이를 쥐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지팡이에 기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바위 위에 선 아무르타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왜 당신은 당신의 약속된 휴식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이오?”

“나, 나는…………….”

300년 전 드래곤 로드 이후로, 사람이든 드래곤이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간에 핸드레이크의 다리가 이 정도로 흔들리게 만든 자가 또 있을까? 아무래도 아무르타트가 300년 만에 처음으로 그것을 성공시킨 것처럼 보였다. 당황해서 두 사람을 바라보느라 자칫 제미니를 놓칠 뻔했다. 난 제미 니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다음 다시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인간에게 있어 충실한 생에 대한 보답은 약속된 휴식이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당신들은 죽을 수 있고, 죽을 때를 모르오. 드래곤도 그러 한 선물은 받지 못했소.”

드래곤 로드의 말이었지. ‘나는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 같은 것은 받지 못했다네.’ 고블린의 얼굴에 번뜩이던 아무르타트의 눈은 이제 타이번을 꿰뚫 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었지. 우리는 단수가 아니다. 그 복수성에서 비롯되는 불사성은 죽음과 망각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겠지. 시간의 종인 나는 잘 알고 있 소. 죽음을 무시하는 자가 인간이오? 단수로서 불사하고 있는 당신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소?”

“아니오.”

부러질 듯 흔들리는 지팡이에 힘겹게 기대어선 장님 노인의 말 치고는…………, 꽤나 침착한 대답이었다. 타이번은 그 불안스러운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 어떻게 들으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오. 뱀파이어, 아니 뱀파이어라고도 할 수 없을 거요. 나는 죽은 채로 사는 자요.”

타이번의 눈꺼풀이 심하게 껌벅거렸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꽉 누르면서 말했다.

“내 눈은 석양을 보지 못하오. 그래서 나는 밤 속에서 황혼을 살아가오.”

아무르타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끝없는 계곡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하늘이 마치 끝없는 계곡을 덮고 있는 천장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꼭 동굴 같은 곳이로군.

그때였다.

갑자기 계곡 한편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날이 밝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워낙 깊은 계곡이라 이제야 태양의 모습이 하늘에 나타난 것이다. 절벽 위는 순식간에 금실처럼 반짝거렸고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계곡이 밝아지면서 바위 위에 서 있던 고블린의 모습도 보다 환하게 비춰졌다.

고블린은 태양이 떠올랐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일까? 지금 고블린의 눈은 아무르타트의 눈이기 때문일까? 만물 에게 공평한 태양은 300세의 마법사에게도 그 아름다운 빛을 똑같이 내려비췄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타이번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고블린과 타이번, 그리고 제미니에게는 희한한 공통점이 있었다. 높은 절벽이 감추고 있던 태양이 이제야 떠올랐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느끼면서 눈 이 부셔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독특한 위치도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후 태양을 뒤따라 나타난 구름이 해를 가려버렸다. 계곡은 다시 어둡고 음침한 신비를 간직 한 동굴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아무르타트는 말했다.

“당신의 눈이 밤을 보게 되면, 나를 찾아오시오. 지금은 당신과 내가 함께할 시간이 아니오. 그리고…………….”

바위 위에 선 고블린은 고개를 내리지 않은 채 나에게 말했다.

“후치 네드발. 너와 내가 함께할 시간도 아니다. 물러가라. 이 고블린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때가 되면 일어날 것이니.”

고블린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렸다. “카아…….” 잠시 후 고블린의 몸이 갑자기 무너졌다. 털썩. 나는 뜨거워지는 눈 주위를 비빈 다음 바위 위의 고 블린을 바라보았다. 고블린은 바위 위에 쓰러져 입에서 기다란 침을 흘리고 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입이 아주 어렵게 열렸다.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는 없었다.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는 없었고, 다만 바위 위에 늘어져 있는 고블린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르타트는 나를 거부하고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 는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말하지 못했는데.

“으……음.”

내 품에 안긴 제미니가 약한 신음소리를 내는 순간, 나는 제미니를 꽉 끌어안았다. 제미니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 목에서 느껴지는 조금 비릿한 듯하면서도 약한 소금기가 어린 냄새를 맡으며 나는 간신히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어깨가 부서질 듯이 떨려왔다.

누군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미니의 눈이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에 떨리는 미소를 담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내 등뒤로 돌아와 마구 떨리고 있는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충혈되어 발갛게 도드라진 그녀의 입술이 떨리듯 열렸다.

“후치야…….”

“제미니. 나는……”

“괜찮니? 괜찮은 거지?”

“말을, 말을 못했어. 아무르타트에게 꼭 할 말이, 그런 말이 있었는데…………… 아무르타트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어.”

제미니는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러자 그녀의 머리가 내 턱에 톡톡 부딪혔다. 그녀는 그렇게 질책하듯 이마 로 내 턱을 톡톡 건드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바보 후치야. 걱정 마. 다 괜찮아. 아무르타트는 알 거야.”

“아무르타트가?”

“그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상심해하지 마. 헤에. 안 어울린다, 너?”

“치. 네가 어떻게 알아? 아무르타트가 어떻게 내가 할 말을 짐작한다는 거야?”

“짐작하지 못할 거라는 증거도 없지. 그렇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할말이 없어.”

“그럼, 그럼. 그런데 나는 할말이 더 있는데.”

“뭔데?”

“나 지금 숨막혀……. 이 바보야! 그만 좀 놓으라구!”

제미니가 내 정강이를 걷어차고 나서야 나는 ‘후치 네드발 군이 제미니 스마인타그 양을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 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으랏차차차!”

나는 거의 내팽개치듯 제미니를 놓아주었다. 제미니는 재빨리 뒤로 몇 걸음 걷더니 어깨에 힘을 지나치게 넣어서는 옷맵시를 고르기 시작했다. 탁탁 탁! 저러다가 옷 찢어지겠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제미니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타이번은 장님이니까 결과적으로 이건 아무 도 못 본 것이 된다. 틀림없다. 아이고, 살았다.

“이제 고개를 돌려도 되나? 포옹은 끝났어?”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옷을 찢어먹을 듯이 쓸어내리던 제미니는 흠칫 하더니 눈을 부릅뜬 채로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최선을 다했다는 점만으로도 무서워 보여 야 할 제미니의 표정은 눈이 보이지 않는 타이번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고 눈이 보이는 나에게는 웃음을 일으켰다.

“으핫! 제미니, 그런 얼굴, 그런 얼굴!”

“뭐야! 왜 웃는 거야, 웃지 마!”

“아, 아냐. 이힛히히히! 이건 웃는 것이 아니라고, 으헷헤헤! 나 안 웃어, 킬킬킬킬!”

잠시 후 그윽한 표정으로 내가 제미니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는 광경을 감상하는 척하고 있던 타이번이 말했다.

“돌아가세. 주인이 가라고 하면 예절바른 손님은 나가야지.”

나는 선더라이더에 타이번과 제미니를 태운 다음 느긋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길에서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선더라이더에 올라타면 선더라이 더는 10년쯤 후엔 관절염에 시달리게 될지도 몰라.

끝없는 계곡은 길었고 그 위를 뒤덮은 구름은 점점 짙어졌다. 아까 내가 봤던 것이 진짜 태양인지도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그러나 그 끝을 향해 걸어 가면서 점점 계곡은 넓어졌고, 그래서 음침한 동굴처럼 보이던 끝없는 계곡은 이제 범상한 사물의 느낌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더군다나 집에 돌아 가게 되었다는 것에 즐거워진 제미니가 계속 떠들어대고 있어서 내가 아무르타트가 있는 끝없는 계곡을 걷고 있는 것인지 우리 마을 대로를 걷고 있 는 것인지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있잖아, 후치야. 아버지 돌아오셨는데 뭐 만들 거니? 나도 도와줄게. 맛있는 걸 만들자. 응? 네 아버지는 몇 달 동안이나 사람이 먹는 음식 같은 걸 못 드셨을 거잖아. 아버지께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뭐니?”

“우리 아버지? 물.”

“이이이! 불이 닿는 것 말이야! 아, 불이 안 닿는 것도 있지만 겨울이니까………….”

“끓인 물.”

“몇 대 맞을래?”

“……두 대면 되겠냐?”

“아니, 세 대!”

제미니는 계속 수다스러웠지만 반대로 타이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주로 제미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타이번을 관찰했고, 결과적으 로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타이번은 그제야 애잔한 즐거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외롭지 않아. 바로 옆에 또 다른 장님이 있으니까.”

제미니는 까르르 했고 나는 으르렁 했다.

그런 식으로 올라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계곡의 끝에 도달했을 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계곡은 계곡일 따름 이었다.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가 있는 곳이라는 무서운 이름은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어울리지 않았다. 겨울의 계곡일 뿐이다.

겨울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저게 그러니까, 에, 분명히 내가 아는 거였는데?

“어머? 눈이다?”

역시 나보다는 제미니가 확실히 사람을 잘 알아본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음. 맞았어. 저거 이름이 눈이었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단순히 눈이라는 것으로는 모자라. 그러니까 다른 말이 필요한데…………… 다시 한번 제미니가 나를 도왔다.

“와! 첫눈이다!”

제미니! 요 깨물어주고 싶은 계집애야! 맞았어. 첫눈이다.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미니의 외침을 들은 타이번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와 제미니는 동시에 입을 다문 채로 타이번의 손에 눈송이가 떨어져 내 리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쩌면 선더라이더까지도?

우리들의 소망을 들은 것인지, 가볍게 떨어져 내리던 눈송이 하나가 천천히 타이번의 손으로 향했다. 제미니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 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 시작했다. 떨어져라! 그대로! 아, 이런 흔들리지 마! 조금 왼쪽으로, 우와, 옆에서 입김이라도 불까? 그렇지! 됐어. 그대로 떨어져라. 이젠 바람 불지 마!

마침내 타이번의 앙상한 손에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고 타이번은 손가락 끝을 움찔했다. 그리고 나와 제미니는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만 세라도 외치고 싶어지는데, 눈송이는 타이번의 손에 닿자마자 빠르게 녹았다. 타이번은 천천히 손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그 손바닥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구나. 눈님이 오시네.”

타이번의 말이 마치 허락이나 되는 것처럼 눈송이는 더욱 소담스럽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정확히 지적할 수 없는 하늘의 한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눈송이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얼굴에 닿는 눈송이 때문에 볼이 선뜻했다. 고개를 내려 다시 끝없는 계곡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커튼처럼 끝없는 계곡을 가리는 눈송이들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제미니는 말 위에 앉은 채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제미니는 두 손바닥을 모아 그릇처럼 만들고는 눈송이를 담아 모으려고 치켜들고 있었다. 기어코 눈송이 몇 개가 그녀의 모아쥔 손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제미니는 재빨리 손을 얼굴 앞으로 당겼다. 제미니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손바닥의 눈송이들은 녹은 모양이었다. 제미니는 눈을 찡그리더니 손바닥으로 양볼을 문질렀다.

“앗, 차거!”

그럼 눈 녹은 물이 뜨거울까. 이런, 계집애. 제미니도 자기 말에 스스로 웃더니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와아, 멋있다. 후치야. 네 아버지가 돌아오시게 된 것을 축하해 주는 것 같잖아?”

“돌아오시게 된….., 그래. 이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제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응? 어, 그렇지. 첫눈을 맞으며 돌아가는 거지.”

첫눈을 맞으며,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떨어지는 단풍잎을 맞으며 집을 떠났지. 어두운 숲속, 발걸음마다 부서지는 낙엽의 바스락거림을 들으며 산과 들, 그리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만 어디로든 이어지는 길 위를 배회했지. 맑고 싸늘한 가을 밤하늘 아래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 고향을 가리키는 별자리를 더듬어보았던가. 그리고 이 제 첫눈이 내리는군.

그래. 이젠 끝이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어어이!”

터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먼저 떠난 우리 일행들은 계곡 바깥에 모여 서 있었다. 제미니는 두 손을 모아 나팔처럼 만들더니 마주 고함질렀다. “오오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계곡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나는 달려오는 아버지를 향해 미소지으며, 동시에 떠나간 내 한 시절을 향해 미소지었다.

내 마법의 가을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