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8화 (8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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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내린 눈 때문에 하얗게 변해 버린 헬턴트 영지의 지붕들 위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왔어! 그가 왔어!”
양조장의 막내아들 미티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 그러자 몰려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사람들의 얼굴에서 참을 수 없는 희열 이 떠올랐다.
“왔구나!”
“우와아, 왔어! 드디어 그가 왔어!”
남자들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괴성을 질렀지만 여자들은 그보다 더한 괴성을 질렀다. 깜짝 놀란 강아지는 대로의 끝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집 앞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아주머니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 나 보다.
“후치다! 후치 네드발이 왔어! 이제 됐어!”
“후치! 후치! 후치이이!”
소녀들은 자지러질 듯이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고 그러자 머리가 좀 굵은 사내아이들의 눈은 전부 소녀들의 흩날리는 치맛자락으로 집중되었다. 말 들은 히힝거렸고 대로의 끝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던 강아지는 이제 달리던 목적을 잊어버리고는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늘을 날아가던 참새마저도 나의 등장을 축복하듯 힘차게 똥을 내갈겼다. 대로는 그야말로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어 갔다.
절대로 거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나같이 고아한 인품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내 발걸음은 너무나 당당하단 말이 야. 아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겸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턴트의 자랑스러운 시민들이여. 무슨 역경이 당신들의 앞을 가로막았는지 모르나 이제 내가…………….” “뭐?”
이크! 이게 아니구나. 사람들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떠오르기 직전, 나는 빠르게 말했다.
“아, 아니, 이런. 조금 전에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말이 잘못 나왔어요. 저, 그런데 무슨 일인데요?”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원래의 반가움과 감격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을 힘겹게 헤치면서 터너가 걸어나왔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걸어나 온 터너는 이마의 땀을 거칠게 훔치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후, 후욱. 이제야 와주었구나, 후치!”
“예. 터너. 늦어서 죄송합니다.”
터너의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그 코에 위치한 두 콧구멍에서는 사태의 불길함과 위험을 나타내는 증거, 즉 피처럼 붉은 코피가 흐르 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나서야 간신히 말했다.
“후우. 헬턴트의 안보를 책임지는 경비 대장 대리로서 부탁한다! 후치 네드발.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너에게 위험을 떠맡기는 것 같아 미 안하지만…….”
나는 떨리는 턱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간신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이 있는데요.”
터너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네가 자랑스럽게 죽어갔다고 전해 주겠다. 다른 것은?”
“……그걸로 충분해요.”
“그럼, 부탁한다!”
나와 터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이제 비장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들은 좌우로 갈라졌고 그 사이로 산트렐라의 노래가 나타났다. 나는 터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터너는 차마 하기 힘든 말을 꺼내듯 몇 번이나 주저하더니 기어코 말했다. “제미니가……………”
제미니가? 설마? 나는 침을 삼켰다. 터너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취했어.”
“맙소사! 왜! 도대체 누가!”
그러자 터너는 두 눈에 가득 분노를 담고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나처럼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사 람이었는데 복장이나 허리에 찬 검, 그리고 걸치고 있는 가죽 갑옷이 길이 잘 든 것으로 보아 영락없는 모험가였다. 터너의 뒤를 이어 주위의 모든 사 람들의 눈이 그 사람에게 집중되자 그 모험가의 두 뺨은 창백해져버렸다. 터너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저 사람이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제미니에게 몇 잔 건네었던 모양이야. 하필이면 해너 아주머니는 뭘 만드느라 그것을 못 봤
고.”
“이런, 안 돼………..”
이윽고 나 역시 주위의 모든 사람의 뒤를 이어 그 모험가를 쏘아보기 시작했고 그 모험가의 얼굴에서는 이제 핏기가 다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변하 고 보니 더 미인인데?
그 모험가는 20대 중반을 넘겼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처음 봤을 때는 이루릴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을 정도로 새카만 머릿결을 가지 고 있는 여자였는데 그 신장에 이르러서는 데미 공주께서 헬턴트 영지에 왕림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가능할 지경이었다. 꽤나 장신인 데다가 잘 짜인 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 허리에 매인 롱소드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차면 좀 거북하게 보이는 것이 롱소드인데. 내가 바라보 자 그 여자 모험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들게 말했다.
“나, 난 아무것도 몰라서………….”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바로 그때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기에 그 말은 꺼내놓지 못했다.
“꺄아아악!”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달려나오는 해너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해너 아주머니는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지 못한 듯이 마 구 달려오다가 터너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터너는 해너 아주머니를 붙잡으며 그대로 눈 내린 대로 위를 좌악 미끄러져나갔다. 콰당탕! 잠시 후 터너 는 대로 위에 크게 드러누워 버렸고 해너 아주머니는 그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되었다.
혼란에 빠져 있어서 자신이 넘어진 줄도 모르던 해너 아주머니는 자신이 타고 앉아 있는 상대가 터너인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의 멱살을 붙잡고 고 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 돼! 그것은 절대 안 돼! 막아줘, 터너, 터너! 제발 막아줘요!”
터너는 눈구덩이 속에 머리를 박은 채 씩씩하게 외쳤다.
“맞습니다! 그건 막아야 됩니다. 그럼요! 그리고 그것이 뭔지 알게 된다면 후치가 반드시 막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뮤러카인 사보네, 뮤러카인 사보네! 타이번 씨가 다 거덜내고 나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간신히 구해 둔 건데! 제미니가 그걸 발견했어. 아아, 그 게 없어지면 난 죽어버릴 거야!”
아이고, 하필이면 제미니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 그래봐야 제미니는 뮤러카인 사보네 이외엔 제대로 이름을 아는 술도 없지만, 어쨌든! 안 되겠어. 저 모험가는 조금 있다가 닦달해야겠군. 나는 허리를 낮추면서 돌격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나를 쏘아보고 있는 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여왕과 같은 도도함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미니의 모친, 스마인타그 부인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 내었고 스마인타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정하게 말했다.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도 좋아.”
“진심이십니까?”
“네게 시집보내면 되니까.”
“안녕히 계세요. 읽던 책이 있어서……………. 으아아! 터너! 이거 놔요! 내가 미쳤다고 그 계집애를…
결국 나는 터너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산트렐라의 노래에 진입하게 되었다. 아이고 맙소사! 눈앞으로 다가오는 산트렐라의 노래의 정문이 마치 임펠리아의 성문처럼 보였다. 나는 슬며시 뒤로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터너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부부는 서로의 행동을 책임지는 법이야.”
“누가 들으면 제미니가 내 아내인 줄 알 거 아니에요!”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건데, 뭐.”
딱 한 사람만 빼놓고 모든 사람들이 터너의 말에 깊은 동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가련한 나의 청춘이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은 그 이름 모를 여자뿐이었다. 그 여자는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이제 산트렐라의 노래의 정문은 대미궁의 입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긴 저 안에 취해 버린 제미니가 있으니 대미 궁만큼이나 무서운 곳이지.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바로 그 순간 무시무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히히힛! 히힛!”
순간 다리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 돼. 정신차려, 후치! 이 미친 자식아. 제미니가 아무리 졸라댔다고는 하지만, 그런다 고 제미니에게 OPG를 주다니 그런 미친 짓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이건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야.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좋았어!”
나는 일생의 힘을 끌어모아 산트렐라의 노래를 향해 돌격했다. 남달리 혀가 매끄러운 음유 시인이 있어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드래곤 로드를 향해 돌격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모습을 여기에 비교했을 것이다.
“죽어보자!”
“어머나! 이 상처 좀 봐. 아프지 않아?”
“누가 들으면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만든 줄 알겠어.”
“이…… 씨. 사과했잖아! 자꾸 미안하게 만들래?”
“사과고 뭐고 간에 그거 어서 내놔.”
“응? 아이, 다른 사람들도 다 보는데 어떻게 입술을 주니?”
“우습지도 않은 말로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내놔!”
제미니는 구시렁거리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 후치야. 며칠만 더 가지고 있으면…………….”
“칵!”
결국 제미니는 투덜거리며 OPG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옆의 의자에 앉아 있던 터너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헬턴트 마을의 위 기는 사라졌어. 비록 그 대가가 가혹하긴 하지만. 아이고, 내 눈! 눈 주위가 퍼렇게 되었을 거야. 젠장.
터너는 맥주잔을 들어올리며(해너 아주머니가 뮤러카인 사보네가 작살나기 직전 제미니를 말리는 데 성공한 나의 공적을 높이 사서 하사하신 공짜 맥주다), 근엄한 표 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네 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이 영지의 안녕 질서를 위험에 빠뜨린 데 대한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당신으로선 알지 못하고 한 행동이며, 또한 질서 파괴의 상당 부분 이 이 영지의 주민에 의해 이루어진 점을 참작해 당신에겐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비록 콧구멍을 막은 채 말해서 코 막힌 목소리였지만 터너의 표정은 헬턴트 경비 대장 대리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 얼굴에 가득한 근엄성은 여자로 하여금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가공스런 것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터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닙니다. 농담한 겁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예? 아, 예. 예………….”
여자는 아직까지도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터너는 그 모습을 보더니 다시 한번 웃고는 맥주잔을 마저 비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며 말했다.
“난 가서 좀 누워야겠다. 아까 제미니가 집어던졌을 때 허리가 좀 삐끗한 모양이야.”
제미니는 빨개진 얼굴을 숙이며 가늘게 말했다.
“죄송해요오…….”
“괜찮아, 괜찮아. 후치 잘못이지 뭐. 아, 그렇지. 제미니. 부탁이 있는데.”
“예?”
“술 좀 줄여라.”
“…….”
누가 들으면 제미니가 끔찍한 주정뱅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제미니는 저지른 소행이 있는지라 화도 못 내고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터너는 다시 크게 웃었지만 곧 자신의 허리를 부여잡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터너가 나가고 나서 나는 다시 OPG를 끼고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제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혼잣말로 궁시렁거렸지만 나는 싹 무시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거 혹시 OPG인가요?”
“예? 아아, 잘 아시는군요. 관록 있는 모험가이신가 보네요.”
“모험가? 아아, 모험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못 되지요.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관록 있는 모험가인가요? 미안하지만 나이로 볼 때는 그렇게 생각되 지 않는데, 그런 희귀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으니………….”
“아, 제가 관록 있는 마법사를 하나 알거든요. 그 사람에게서 얻었지요.”
“마법사? 이름이 뭔가요?”
“저요? 아니면 그 마법사요?”
여자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퍽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뜰 때는 그런 인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희한한 얼굴 이었다. 원래 웃을 때나 놀랐을 때도 날카롭게 보이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만 이 여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아, 둘 다 알려주면 좋겠군요.”
“저는 후치 네드발, 초장이입니다. 아까 사람들이 외치는 것을 들으셨죠? 그리고 제게 이걸 준 사람은 타이번이라고 하는 마법사이고요.”
내가 대답을 끝내자 여자의 눈은 다시 가늘어졌고 그러자 원래의 날카로운 표정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펍 안에 있는 사람 은 현재 나와 제미니, 그리고 그 여자뿐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모두들 제미니가 부끄러워할까 봐 자리를 비켜주기라도 한 것인가? 아냐. 그렇지만 이런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한잔 하면서 떠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군. 부엌 쪽에서 해너 아주 머니가 뭐라고 흥얼거리는 것을 제외한다면 펍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 여자는 주위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이번이라고 했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 사람은 어디 있죠?”
“예? 아, 저기 숲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자기 집에 있습니다만. 아니, 자기 집은 아닌가?”
자기 집은 아니지. 칼의 집이니까.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맥주잔을 들어올렸고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가요. 그런데 타이번이라. 그 사람의 본명인가요?”
맥주잔을 씹어먹을 뻔했다.
뭐야? 본명이라구? 설마 이 여자는 핸드레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난 여자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 다. 여자의 얼굴 전체에는 화사한 미소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되도록 느리게 맥주잔을 내려놓은 다음 음색에 주의하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건 본명이 아니라 별명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그걸 어떻게 짐작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때 가만히 있던 제미니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후치야. 타이번 씨의 이름이 별명이라구?”
“응? 아아, 어, 그래. 그건 별명이야.”
“그래? 어어. 아, 그런데 저는 제미니라고 하는데요. 당신 이름은 뭐죠?”
제미니는 여자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으하하! 역시 제미니다. 그렇잖아도 질문하고 싶었던 거야. 여자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만 지은 채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검은 머릿결이 아찔하도록 물결쳤다.
“리타라고 불러주면 되겠군요.”
“리타? 리타. 예. 리타 씨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타이번 씨랑 잘 아세요?”
오오! 갈수록! 제미니는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모두 대신 물어줄 모양이군. 리타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아뇨. 잘 알지는 못합니다.”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말일까? 만일 거짓말이라면 이 리타라는 여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난 다시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잠시 그런 생각에 빠졌다. 그때 제미니는 다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짐작하시는데요?”
“예감이랄까요. 이름으로는 좀 이상해서.”
제미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미니는 곧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맥주잔을 내리며 말했다.
“나?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어.”
“헤에. 그래? 그럼 타이번 씨의 본명이 뭔데?”
제미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큰일이군. 제미니는 타이번의 본명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한 모양인데. 리타라는 이 여자는 왜 괜히 그런 말을 꺼낸 거야.
“제미니. 별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본명을 밝히기 싫은 이유가 있다는 거 아닐까?”
“귓속말로 해.”
“…………칵! 그 다른 사람에는 당연히 너도 포함된다구!”
“너는?”
“물론 나도 포함되지만 난 똑똑하니까 알아차린 거잖아! 게다가 나는 그의 뜻을 존중하여 누구에게도 말 안할 테고!”
“나도 똑똑해. 후치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타이번 씨의 뜻을 존중해서 누구에게도 말 안할 테니까 말해 줘. 자, 요 귀에 대고.” 그리고 누구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 안할 거라고 하면 다 말해 줄 거지? 그 사람 귀에 대고?”
제미니는 새실새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많이 궁금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렇잖으면 훨씬 더 졸라댔을 텐데. 제미니가 크게 하품을 할 때 그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다가 물릴 뻔한 다음, 나는 리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타 씨? 예. 그런데 이 도시에는 어쩐 일이신지? 만일 서쪽으로 오신 거라면 여기서 끝이에요. 서쪽으로 더 나아가도 마을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모험가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없는데요.”
“글쎄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자 모험 아닐까요. 저에게 지혜와 사상을 베풀어주실 분이 커다란 도시의 광장에 서 계시리라고 믿 지는 않아요.”
“아아, 그렇네요. 원하시는 것이 지혜인가요. 폭넓은 사고나, 시각 같은 것?”
“그렇습니다.”
“그럼 타이번 씨를 한번 만나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분은 관록이 깊고 많은 것을 보고 들으신 분이니까.”
리타는 히죽 웃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맥주를 마시지는 않고 그 가장자리의 거품을 살짝 핥고서는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어떨까요.”
“예?”
“후치 네드발. 당신에게 지혜를 구해 보면 어떨까요. 나리타에게 지혜를 선물하지 않겠어요?”
“예? 아아, 리타 씨는 현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지혜를 청한다는 이치의 신봉자이신 모양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해요.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지혜 가 있을 뿐이지요. 현자가 어린아이의 지혜를 배워 익히면 현자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되겠죠.”
“글쎄요. 현자와 어린아이도 교류는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상호 발전도 이루고…………? 쳇. 아, 미안해요. 당신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좋지 못한 추억이 하나 떠올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리타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미니는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인지 양쪽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며 얼굴 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리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초 만드는 방법이라도 알고 싶으세요?”
“초? 아니오.”
“그럼 뭐가 듣고 싶으세요? 전 아는 게 없어요.”
“그래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지요.”
“친절?”
“근래에 들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 하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해보세요.”
순간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내 눈은 재빨리 제미니를 향했다. 제미니는 이제 두 팔을 테이블에 포개고는 그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내 눈이 이번에는 펍 곳곳을 향했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해너 아주머니의 흥얼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가녀린 소리가 들려와서 창문을 바라보자 지붕에 쌓여 있던 눈들이 녹아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물방울들이 길에 쌓여 있던 눈에 부딪히면서 아주 약한 소리를 내고 있는 모양이다. 주위를 주욱 살피던 눈이 마침내 리타에게 돌아갔다.
리타는 여전히 무의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그 입술뿐이었다. 그 시선은 연마된 칼날처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 시선 을, 저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에서 본 적이 있었지.
일어서야 하나? 아냐. 볼품없는 일이 되겠어. 그래서 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리타는 눈꼬리를 조금 꿈틀거렸을 뿐 별다른 표정 없이 내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 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암파린 씨. 당신이 말한 것이 이것입니까?
‘자네의 현재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 조력자가 자네의 미래에선 자네의 옆에 있게 될 것이네. 모든 준비는 완료되겠지. 그리고 그 시점에서 유피넬 과 헬카네스도 자네에게선 손을 뗄 거야. 자넨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혜로만 그 중요한 선택을 수행해야 되겠지.’
확실히 그 조력자는 인간이군요. 하하하. 설마, 설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이제 선택을 해야 하는군요.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도움도 없이.
나는 선택했다.
벌컥!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불안하게 잠들어 있던 제미니는 타이번이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에 기겁하면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의자째로 뒤로 넘 어갈 뻔했지만 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의자를 붙잡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이번은 펍 안으로 뛰어들어 오며 그대로 외쳤다.
“어디 있어!”
“바로 발 앞에!”
“뭐? 으아!”
300년의 마법 수련이 허황되도다. 타이번은 의자에 발이 걸려 그대로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바이서스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가 멋들어 진 동작으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제미니를 똑바로 앉힌 다음,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기 어려워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당신이 그러면 어떻게 해 요?”
“뭐? 아, 그래. 맞아! 나는 장님이었지?”
“다음부턴 잊지 않으시도록 조심하세요.”
타이번은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며 벌쭉 웃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웃음을 싹 지우더니 내 어깨를 마구 잡아당기며 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 있냐구! 이 코에 콧물 대신 촛농 묻은 꼬마 녀석아, 어디 있어?”
“당신 손 안에.”
“그 여자 말이다!”
“제미니? 타이번이 널 찾으시는 것 같은데…
“으아아악! 파워 워드 히컵! 파워 워드 스니즈!”
“으아악!”
타이번의 특기는 주문의 연결이라고 했지. 그건 그렇고 의외로 잔인한 면이 있는데. 나는 딸꾹질과 재채기를 동시에 하는 것이 이다지도 괴로운 일 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마, 맙소, 딸꾹! 맙소사, 에추! 이, 이런 잔인한, 딸꾹! 에취!”
결국 3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히 늘어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자지러지듯 웃어대던 제미니 역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파워 워드 헤모로이드(절대 명령 치질)를 쓰겠다고 으름장을 탕탕 놓던 타이번의 모습은…………….
“당신은 악마야!”
“파워 워드 임포텐………….”
“무엇이든지 물어만 주십시오.”
타이번은 내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으며 맥없이 말했다.
“그 여자, 벌써 갔어?”
타이번의 하얀 눈은 내 가슴 쪽을 향해 있었다. 내 키를 짐작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정확하게 시선을 주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정신없 이 웃던 제미니도 그제야 눈을 닦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 나 잠든 사이에 가신 모양이네?”
“그래.”
타이번은 씁쓰레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안 돌아오는 거야?”
“그런 말은 없었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제길…………. 할 수 없군! 내가 찾아가 봐야겠어. 어이, 조수. 겨울 여행이다.”
“겨울 여행?”
“목적지는 너도 짐작할 테지.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오늘처럼 안타까울 때가 없군.”
글쎄. 적어도 내가 아는 경우 중에 당신이 오늘만큼이나 안타까워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우가 하나는 있지. 아마 그때 카뮤 휴리첼은 타이번의 눈 노릇을 하면서 갈색 산맥을 걸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게다가 말이야,
“타이번. 당신은 볼 수 없는 사실 한 가지 말해 드릴까요?”
나는 몹시 당기는 뱃가죽의 고통에도 불구하며 씨익 웃었다. 나는 눈이 보이거든? 타이번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되물어 왔다.
“그게 뭔데?”
“지금 창밖으로는 입을 딱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제미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타이번은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는 보이지도 않는 그 하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타이번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펍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 장님 치고는 꽤 빨랐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르타트다!”
제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나에게 돌렸다. 나는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제미니의 눈이 살포시 가늘어지는 순간, 그녀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 어, 후치야. 리타라는 이름은……?”
“물론 아무르타트의 애칭이지. 재미있는 센스지? 자, 제미니. 나가서 구경하자구. 아무르타트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야. 그리고 지금 안 보면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미니에게 팔을 내밀었다.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테니까. 가실까요, 레이디?”
거리는 온통 하얀 눈이 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백의 공간 속에 점점이 흩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더욱 그렇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는 사람들. 타이번은 애처로운 얼굴을 한 채 거리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하늘을 바라보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하늘의 이쪽과 저쪽을 쉴새없이 오가고 있었다. 타이번에게로 다가서려고 했을 때 펍의 문 기둥을 부여잡고 있던 제미니가 속삭였다.
“이, 있어?”
아, 그래. 하늘을 봐야지.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내리 눈을 퍼붓고 난 뒤 지친 것처럼 게으르게 흐르는 은회색 구름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구름의 단말마는 소리도 없다. 갈라진 구름들의 긴 틈 사이로 블랙 드래곤의 거체가 고정되어 있었다.
거칠 것 없는 하늘을 흐르고 있던 구름들이 아무르타트에 부딪히자 마치 짜증을 부리듯 그녀의 날개를 휘감아돌았다. 그러나 아무르타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구름들의 흐름 때문에 아무르타트의 전체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하늘의 상당 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어떤 횃불을 가져다 비춘다고 해도 그 반사광을 얻기 어려울 것처럼 새카만 날개는 놀랍게도 네 개. 그 날개의 폭은 엄청났지만 그 길 이는 더욱 엄청나서 저 몸을 지탱하는 날개 치고는 가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르타트의 모습은 긴 목과 긴 꼬리를 더해서 마치 수레바퀴 처럼 보였다. 바큇살이 여섯 개인 수레바퀴.
크라드메서와는 달라. 크라드메서의 모습에서는 균형 잡힌 힘이 있었다. 그 한량 없는 힘이 더하고 뺄 것 없이 완벽하게 정리된 몸에 잘 갈무리되어 있던 크라드메서의 모습에는 품격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모습 역시 크라드메서처럼 더하고 뺄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더하고 빼봤자 정리가 안 되는 몸이었으니까. 아무르타트의 몸은 그녀의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마구 소용돌이쳐 폭발하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 날개들은 너무 강해 보이고 너무 길어 보인다. 마치 그녀의 몸이 감당하지 못한 맹렬한 힘이 몸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잘 연마된 검의 차가운 매서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무르타트의 모습은 하얗게 끓는 쇳물의 역동성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녀가 허공에 멈춰 선 채 헬턴트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모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꼬리 한번만, 날개 하나만 휘 저어도 여기 서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게 되지 않을까.
나는 제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저히 큰소리를 낼 수가 없었으니까.
“응, 있어.”
“얼마나 높이?”
조금만 기다리면 기둥을 쥐어뜯는 제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대략………, 천 큐빗 정도?”
고개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고 있던 타이번은 귀가 솔깃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미니는 여전히 나무 기둥을 긁어내리며 속 삭였다.
“어, 어, 어느쪽인데?”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몸놀림을 보면서 대충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 나와서 보는 것이 낫지 않겠어?”
“싫어!”
“글쎄, 제미니, 아무르타트가 헬턴트 영지를 식탁으로 삼고 싶어한다면 그 안에 있는다고 해서 특별히 안전할 게 있을까? 내 옆으로 와.”
제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드디어 문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뽀드득. 제미니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기겁하더니 곧 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탁탁탁탁.
쓰러질 듯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달려온 제미니는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면서 말했다.
“어, 어, 어느쪽이야?”
“고개를 들어봐.”
“히이잉. 나 꽉 잡아. 기절할지도 몰라.”
제미니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자마자 고개를 들어올리던 속도보다 수십 배는 빠른 속도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기절했어?”
“후아, 후아,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
“응?”
“잉, 저러면 저렇다고 말해 줬어야지.”
좀 말이 되는 투정을 부려라, 으이그. 나는 제미니의 어깨를 바싹 끌어당기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아무르타트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 다.
“후치 네드발. 너희는 어떻게 작별하지?”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대장장이 조이스가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대로의 분위기가 일대 혼란으로 진행되지 않는 까닭은 위압감이 너무 강 하기 때문일까. 주저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이번은 그제야 아무르타트의 정확한 위 치를 파악하여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상대에 따라 다르지요.”
제미니는 내가 대답을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듯이 헐떡거리며 내 허리를 꽉 잡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쳐준 다음 계속 말했 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등 뒤, 언덕 위의 성 쪽에서 아스라하게 발소리와 고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마도 경비 대원들이 달려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르타트 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추억 속에서 즐거울 것입니다. 당신 속의 나를 아껴주시길.”
아무르타트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알았다. 내 속에 함께하는 너를 잘 보살피겠다. 이제 너와 나의 길이 갈렸군.”
하지만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의 말대로라면, 그녀와 나의 길은 갈렸지만 그 길 중 어느 것에도 정답은 없을 것이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 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굳은 채 서 있던 헬턴트의 주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아무르타트의 네 개의 날개가 세찬 동작으로 떨쳐졌다. 순간, 그녀의 몸은 쏘아진 화살처럼 퉁겨나갔고 짜증을 부리듯, 투정을 부리듯 그녀의 몸에 엉기던 구름들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가네?”
제미니는 숄처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내 팔을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아무르타트는 서쪽으로 맹렬히 날아갔고 그녀의 뒤로 구름들이 거대하 게 찢어졌다. 그러자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후치!”
타이번이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르타트의 모습을 놓치기 싫어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후치, 그에게 무슨 말을 했지?”
“특별한 말은 없었지요. 그저 내가 겪었던 일들을 들려줬지요. 그리고………….”
“그리고?”
“극서를 향해 떠나달라고 말했어요.”
이것이 나의 선택이다. 옆에 없어서 듣지 못했던 타이번과, 잠들어 있어서 듣지 못했던 제미니는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타이번 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 뭐, 아니 무슨 뜻이지?”
“나는 그래도 인간을 사랑하니까요.”
“그래서! 헤,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을 괴롭히지 말고 떠나라고, 떠나라고 했단 말이냐! 이 철부지 꼬마 녀석잇!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고…
“조용히 들으세요. 타이번.”
타이번이 입을 닫은 것은 내 협박성 담긴 어투 때문이라기보다는 너무 흥분해서 할말을 잘 떠올리지 못한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아무르타 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드래곤이지요. 적어도 드래곤으로서 사물을 바라보는 드래곤을 찾아보라면 그녀가 마지막이지요.”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아무르타트의 뒷모습을 조금이라도 오래 보려고 서쪽으로 달리기도 했다. 대로는 서 서히 소란스러워졌지만 동시에 서서히 고요해졌다.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저도 인간이니까요. 그렇지만 정답은 없으니까요.”
“무슨 말이지?”
“앞으로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 완전한 인간의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드래곤 라자가 없으니 드래곤은 우리들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갔고, 드워프들은 그들의 광산으로 도피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요. 그리고 엘프들은 이제 그들의 숲에서 나오기 더욱 어려워지겠지요.”
이루릴을 떠올리면서 침착하게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인간은 저지당한 발전을 이제야 이룩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아무르타트는 방해가 되겠지요. 따라서 나는 우리 자손들을 위해 장애물을 치워준 것이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타이번을 쳐다보았다.
“300년의 꿈은 끝났어요.”
타이번은 그 입술이 하얗게 변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의 드래곤 라자는 없어요.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을 강제적으로 인간과 교류짓게 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드래곤을 보호 한 거나 마찬가지지요.”
“보호라고?”
“예. 레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느꼈지요. 드래곤 라자는 보다 직접적인 교류의 손길이 다가서는 것으로부터 드래곤을 보호했지요. 장장 300번의 가을이 흘러가는 동안. 하지만 더 이상의 라자는 없고, 이제 인간은 드래곤에게도 직접 다가서겠지요. 그리고 마침내 모든 종족을 인간화시 켜 버리고 나서야 우리들은 미래를 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미래를………….”
“타이번, 모든 숲을 태워버린 불길은 죽는 법 아닐까요. 우리들의 폭주를 견제하던 엘프라는 언덕도, 드워프라는 바위도, 그리고 드래곤이라는 절벽 까지도 모두 파괴되고 나면 우리들, 시무니안의 아들들은 거침없이 달려가겠지요. 마부 없는 마차처럼.”
“그러기에 그를 붙잡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신이 될 수 없다면, 우리들은 서로를 비춰볼 거울로서 함께…”
“크라드메서의 실수로 모자라세요!”
타이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 불쌍한 마법사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크라드메서, 그 최강의 드래곤도 두 번만에, 라자의 죽음을 겨우 두 번 버티고는 자살했어요. 아무르타트는? 아무르타트, 그 시간의 종이자 석양의 감시자는 어땠어요? 드래곤 라자가 없었기에! 아무르타트는 드래곤 라자가 없었기에 지금껏 간신히 보호되어 왔어요! 하지만 동시에 드래곤 라자가 없으므로 그녀는 보호받지도 못해요!”
“후, 후치…….”
“동업자 선생!”
“뭐라구?”
“동업자 선생! 당신과 루트에리노 대왕은 인간이라는 초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불길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불길이니까 스스로마저도 태워 버리는 초가 되겠지요. 우리가 이룩하는 번영은 목적 잃은 폭주가 되고 말 테죠! 그래서 나는 이제 아무르타트를 도피시키겠어요.”
타이번은 한대 맞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피라구?”
“예! 나는 그녀를 인간의 석양으로 도피시키겠어요.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거기서 인간을 기다리게끔 할 생각이에요. 우리가 스스로를 바로잡아 새 로운 종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면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럴 가능성은 있지요. 그녀가 우리에게 베푼 선물이 있으니까. 스스 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아무르타트의 뒷모습을 쫓았다. 참을 수 없는 격정에 목이 메이지만, 나는 간신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에게 우리의 미 래를 들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놓치고 석양을 향해 치달아간다면, 또 다른 자신을 모두 잃고 죽음을 향해 치달은 넥슨처럼, 자신을 모두 나눠주 고 죽어버린 길시언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자신만을 부여잡은 채 멸망을 향해 치달아간 할슈타일 후작처럼, 우리가 석양을 향해 치달아 간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때였다. 아무르타트의 비행에 따라 길게 찢어지던 구름들이 마침내 하늘 양편으로 모두 갈라졌다. 보랏빛 하늘의 모습은 어두웠으나 아무르타트 의 비행을 쫓는 내 눈은 석양을 볼 수 있었다. 불길처럼 붉은 석양,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검은 몸은 불덩어리처럼 타오르면서 태양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어깨가 시려왔다.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이 그제야 눈앞을 어지럽혔다. 나는 바짝 굳어버린 제미니의 손을 잡아올려 입김을 불어주었다. 나 는 제미니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타이번에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황혼에 서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기다려온 아무르타트의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녀가 우리 헬턴트에 베푼 것 과 같은 것을, 우리의 자손에게 베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반대로 인간의 황혼과 함께 그녀도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때까지 기 다렸다가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녀를 보내고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녀를…………, 그녀를 우리 자손들에게 선물한다는 말이냐?”
타이번은 이제야 300년의 피로를 한꺼번에 느끼는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정답은 없지요. 아까 말했듯이 나는 우리 자손을 위해 장애물을 치워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자손을 징계할 교사를 미래로 파견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것은 시간이 결정할 일이지요. 그러니………….”
제미니는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왔다.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 역할은 여기서 끝났어요. 첫눈을 그 만가로 삼아 떠나간 내 마법의 가을처럼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죠.” 나는 고개 돌려 타이번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석양을 향해 날아가는 드래곤을 보았다.
<드래곤 라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