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2화 하늘이 불타던 날 2 : 만남
만남
현암은 호기를 부리며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소? 도혜 스님의 소개로 온 사람이오!”
박 신부와 허허자는 토굴로 뛰어드는 데 성공했으나 나머지 네 명의 호법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틈 을 이용해 장로들과 다른 사람들을 제압해 놓으려고 했는데, 누 가문 앞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전부 잠 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제 허허자와 박 신부에게 연락을 취할 수 도 없었고, 승려들이 벽공 도인에게 와서 밖에서 벌어지는 소란 이 무슨 일이며 누구인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봐 달라고 부탁 까지 하여 더더욱 곤란한 지경이었다. 상좌 호법의 위치에 있는 벽공도인으로서는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상 황을 다시 역전시켜 일을 계획대로 끌어 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장 호법, 장 호법이 나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시오. 가능하 다면 소동을 확대시켜서 모든 승려들의 주의가 그리로 쏠리도록 만드시오. 그사이 우리는 교주를 붙들어 놓겠소.”
벽공 도인이 장 호법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뜻밖의 사건을 이 용하여 승려들의 주의를 한쪽에 집중시키자는 생각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도인다운 기발한 착상이었다. 장호법은 승려들을 몰 고 정문으로 나갔다. 한편 마가 호법과 을련 호법, 벽공 도인은 마치 교주에게 보고하러 가는 양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문밖으로 나온 장 호법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소리를 질 러 대고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이십 대에 불과해 보이는 청년이 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별다른 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들린 태극패나 부러진 창을 볼 때, 청년은 서 교주가 풀어 놓은 야차들과 싸우며 운무진을 뚫고 온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 정도의 힘은 장 호법이나 다른 호법이라면 충분히 발휘할 수 있 는 수준이었다. 태극패를 든 것으로 보아 도가(道)의 일원이 분명한데, 도가에 저렇게 젊은 나이에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청년을 자세히 살피던 장호법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울 러 영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내공은 보통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청년의 내공은 단전과 오른팔에만 몰 려 있었고, 다른 곳은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못한 듯했다. 기이 한 체질이었다.
문이 열리고 승려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자 현암은 긴장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는데 야차들과 맞닥 뜨리고 난 다음 성질을 이기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맨 앞에 나선 사람은 현암이 보았던 사람이었다. 차 안에서 영력 을 풍기던 두 사람 중 허리가 굽은 사람이었다.
“아하! 안녕하십니까? 알고 보니 해동밀교의 높은 분이셨군요!”
그제야 장 호법은 박 신부와 같이 오던 차 안에서 청년을 본 기억이 났다.
“아, 그렇구먼. 나도 자네를 본 듯하이.”
현암은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태도를 겸허하게 바꾸었다.
“저는 이현암이라고 합니다. 도혜 스님의 소개로 해동밀교에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는 해동밀교의 제이 호법이고, 성은 장이라 하네.”
“예, 그러시면 아까 차 안에 같이 계셨던 분도 이곳의 호법이 시겠군요?”
‘아차!’
장호법은 당황했다. 저 친구는 박 신부와 자신이 같이 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장호법이 외인(外人)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에 차질이 생긴다. 더 이상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입 을 막아야 했다. 장 호법은 급한 김에, 또 소란을 피워야 하는 자 신의 임무 때문에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며 다짜고짜 쏘아 붙였다.
“그런데 자네는 누구이기에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가?” 장호법의 응대를 받고 간신히 울화를 억누르려던 현암은 약간 눈을 떴다.
“예? 막혀 있는 길을 뚫느라 약간 소란을 피우기는 했습니다만…….”
“소란? 이게 어디 소란 정도인가? 도혜인지 뭔지 나는 알지도 못하네! 그 이름이 뭐가 대단하다고 소리를 질러 대는 건가?”
장호법은 도혜 스님을 몰랐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을 욕할 만큼 수양이 얕은 것도 아니었으나, 일을 크게 벌일 생각에 함부 로 말을 했다. 현암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혜 스님은 자신에 게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그런 분에게 감히!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뭐가 지나쳐! 네놈이야말로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진과 비석 을 부수고 소란을 피우지 않았는가?”
“놈?”
드디어 성질이 폭발했다. 장 호법은 겉으로는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내심 현암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이 단순한 젊은이는 그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반응 해 주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자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할 불가에서 사람 해 치는 악귀를 사방에 풀어 지나가는 사람을 위협하는 건 괜찮고요?”
“입 다물어라!”
“흥!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도움을 받을까 해서 왔는데, 조 금만 더 말하면 죽어 나가게 생겼군. 여기가 그렇게 대단한 곳이
오? 한번 해보겠소?”
장호법과 현암의 말싸움을 들으면서 일반 승려들은 갈팡질팡 했다. 평소 온화한 장 호법이 말을 막하는 것도 이상했고, 정체 모를 청년도 너무 무례했다. 한참을 현암과 옥신각신 다투던 장 호법이 외쳤다.
“네 이놈! 도움을 얻으러 왔다면서 방자하구나!”
현암은 표정을 풀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정말로 화났다는 표시였다.
“이젠 알거 없소. 도움도 필요 없고, 오히려 내가 당신들을 도 와야겠군. 자만심이 없어지는 고행을 시켜 드리지.”
현암의 입에서 존댓말조차 사라졌다. 말싸움 소리가 커지면서 승려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희한한 구경거리 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해동밀교에는 서 교주나 오대 호법 같은 영력이 강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백여 명에 이르는 일반 승려들 은 대부분 영력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용한 산 중 생활에서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흥분하고 있었다.
토굴은 보기보다 꽤 넓었다. 토굴 안쪽의 벽에 빽빽이 붙어 있 는 복잡한 그림과 경전, 그리고 부적이 왠지 썰렁한 분위기를 풍 겼다. 허허자는 토굴의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박 신부를 안내 해 들어갔다. 방 안은 촛불 몇 개와 여러 가지 이상한 물건들이 장난감처럼 구석에 엉켜서 쌓여 있었다. 보통 아이들이 갖고 놀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장난감 대신 으스스한 귀면상이나 신 상들이 그림책 대신 표지만으로도 난해해 보이는 낡은 고서들 이 동화 속 그림 대신 커다란 만다라도(曼陀羅圖)와 붉은 부적 글자들이 사방의 흙벽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의 방이 아니라 이단심판을 하는 종교 감옥 분위기에 가까웠다. 구석에 마련된 돌 침상에는 한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박 신부는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가 그토록 중요하고 강 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홉 살이라고 했으나 키가 작았고, 사내아이인데도 몸이 가늘고 야리야리했 다. 긴 머리는 잘 빗질이 되어 있었고, 얼굴 생김새도 곱상하고 똘똘해 보였다. 눈이 위로 찢어지고 눈썹은 아래로 처져 있어 묘 한 기분을 느끼게 했으나, 전반적으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허허 자가 눈짓을 하더니 박 신부의 귀에 입을 갖다 댔다.
“신부님, 잘되었습니다. 잠들어 있군요.”
허허자는 조용히 다가가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러나 아이 의 다리에 묶여 있는 줄은 미처 보지 못했다. 아이는 영악하게도 침상에 자신의 다리를 묶어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눈을 번 쩍 뜨면서 몸을 갑자기 와락 밀어내자. 허허자는 엉겁결에 아이 를 놓치고 말았다. 아이는 떨어지면서도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몸을 돌려서 침상 위로 내려앉았다. 민첩한 동작이었다. 박 신부가 흠칫하자 아이는 고양이처럼 눈을 흘겨 경계의 눈빛을 보내다가 침상 뒤로 숨어 버렸다.
“허허, 준후야, 이리 나와 보렴.”
그러자 아이의 소리만 들려왔다.
“싫어요. 수련중이에요.”
아이의 말투는 뜻밖이었다. 앙칼지게 소리를 칠 줄 알았는데 상상 외로 아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자가 대답했다.
“허, 준후야, 너는 지금 잠시 어디로 가야 할 곳이 있단다. 이 아저씨를 따라서…………….”
“가요?”
“그래.”
“어디로요?”
“같이 나가보면 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말씀 하시지 않았어요.”
준후의 목소리는 아이답게 높았지만, 갑자기 말투가 노학자나 쓰는 건조한 투로 바뀌었다. 여간 노회한 말투가 아니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
“급해도 수련중일 때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법도입니다.”
“정말 급해서 그러는데………….”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언질을 주셨을 것입니다.”
아홉 살짜리 아이치곤 차근차근 순서를 따지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허허자는 안 되겠다는 듯 돌 침상 뒤로 돌아가 준후의 손목이라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준후는 고양이처럼 재빨리 몸 을 피해 반대편 방구석으로 가서 섰다. 박 신부가 보니 준후의 가늘고 작은 눈은 꼬리가 새침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지만 까만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준후는 다시 영감 처럼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전후를 따져 보아야겠습니다.”
준후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허허자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허허자가 한숨을 쉬며 교단에 급한 일이 생겨서 교주의 명을 받고 온 것이라 변명을 늘어놓자 준후가 시무룩해졌다. 박 신부와 허허자는 어리둥절했다. 저 아이가 왜 갑자기 시무룩해 진 것일까?
“준후야, 그러니 이 아저씨의 말을 들어라. 응?”
“정말이십니까?”
“그럼! 여기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와 같이 가면 되는 거야.”
준후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박 신부가 허허자를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허허자는 말을 이었다.
“준후야, 꼭 가야 해. 아저씨의 말을 들어라, 응?”
준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는 다시 아이답게 울려 왔다.
“아, 아저씨…… 허허자 아저씨…….”
“왜 그러니, 준후야?”
“미, 미안해요.”
준후가 품속에 지니고 있던 부적 세 장을 꺼내 던지면서 박 신 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놀란 허허자가 뒤로 물러 서려는 순간 부적들이 허공에서 타오르며 불기운이 순식간에 번 져 나갔다. 부적들은 그대로 불기둥으로 변해 뱀 같은 형상으로 허허자와 박 신부의 주변을 에워싸고 뱅뱅 돌았다. 허허자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준후야, 이게 무슨 짓이냐!”
준후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또 다른 부적을 던졌다. 서두르지 않았지만 여러 번 연습한 듯 숙달된 행동이었다. 이번에는 부적 에서 번쩍이는 빛줄기가 쏟아져 나와 불기둥 주변에 창살처럼 박혔다. 허허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어디서 이런 술수를…………….”
준후는 입을 몇 번 움찔거리다가 으앙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박 신부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상에, 부적 몇 장 으로 이런 엄청난 힘을 부를 수 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고, 지독하고 무서운 수법인 반면 아이의 마음이 착하고 여린 것에 또한 놀랐다.
“아, 아버지가…….”
“뭐? 교주님 말이야?”
“그래요. 아버지가 이럴 거라고………… 흐흑………….. 아저씨들이 나를 잡아도…………… 도망갈 거라고…………..”
박신부가 끼어들었다.
“교주가 이러라고 시켰느냐? 그렇게 나오면 이러라고?”
준후는 양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엉엉 흐느끼면서 고개만 끄 덕여 보였다.
허허자와 박 신부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렇다면 서 교주는 다섯 호법의 계획을 이미 눈치채고 대비책을 세워 놓았다는 이 야기가 된다. 박 신부는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준후의 행동으 로 보아 다섯 호법의 계획은 오래전에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이 분 명했다. 자기와 허허자만이 아니라 교주에게 달려간 벽공 도인 과 다른 호법들도 위험할 것이 틀림없었다.
할 수 없이 허허자도 부적을 꺼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러자 땅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땅속에서 솟아오른 힘이 불기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힘들은 무서운 속도로 맵을 돌고 있 는 불기운에 닿기가 무섭게 흩어지고 말았다. 불기둥은 서서히 맴을 돌면서 둘을 태워 버릴 기세로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 허자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런 지독한 술수를…………. 이건 분명 부동명왕(不明王)*의 불꽃.”
불기둥이 좁혀져 들어가자 준후도 놀란 듯 울면서 소리쳤다.
“어, 어, 이…… 이건!”
준후는 불기둥이 그저 돌기만 하면서 두 사람을 가둘 것으로 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준후는 깜짝 놀란 듯 눈물 젖은 얼굴 그 대로 수인(手印)**을 맺으며 용을 썼다.
박신부는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이런 짓을 시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서 교수는 정말……………”
일이 급해지자 박 신부도 양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읊으면서 기도력을 발하기 시작했다. 박 신부의 몸 주위에 연녹색 영력인 오라(AURA)가 뿜어져 나오면서 둥근 구형으로 번져 나갔다. 박 신부의 오라 막은 계속 커져 주위를 맴돌던 불기운과 부딪혔다. 준후는 예기치 못했던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박 신부의 기도력 은 근본적으로 밀법의 주술과는 달리 파괴력은 없었지만 성스러 운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의 오라 막으로도 불 시키는 분노의 표정을 짓고 오른손에는 항마의 검을, 왼손에는 오라를 지닌 채 큰 불꽃 위에 앉아 있다고 전해진다.
[*불교 5대 명왕의 하나로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현신 일체의 악마, 번뇌를 항복]
[** 밀교에서 이용되는 인장법, 무드라(Mudra)라고도 하며 여러 가지 종류가 있 다. 주로 부처의 손 모양을 본뜬 것으로 손만으로 하는 것과 전신을 이용하는 것 이 있다.]
기둥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불기둥이 안으로 좁혀 들어가는 것을 상당히 늦추었지만 그뿐이었다.
불기둥이 계속 좁혀 들어가자 준후는 다시 울며 소리쳤다.
“엉엉…… 미안해요. 아저씨! 이・・・・・・ 이건 가두기만 하는 부 적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
허허자가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불기둥은 창살과 같은 빛줄 기와 함께 서서히 안으로 좁혀 들어왔다. 불기둥의 원이 점점 작 아지자 준후는 다시 이것저것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부적을 꺼 내어 던져 보기도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마도 서 교주가 준후를 속여 악독한 술수를 쓰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허허자는 급히 부적을 꺼내 양손에 붙인 뒤 밀고 들어오는 불기둥을 버텨 막았다. 그러나 그게 고작이었다.
현암은 더 이상 참을 기분이 아니었다. 장호법이라는 사람은 말끝마다 현암의 비위를 뒤집어 놓고 있었다.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라왔다. 치료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게제가 아니었다.
“뭐, 당신들 맘대로 하시지. 난 내 맘대로 할 테니까. 빌리려던 것도 아예 빼앗아 주지!”
현암은 말을 마치고는 뚜벅뚜벅 장호법을 향해 걸어왔다. 장 호법은 당황했다. 용케 시간을 잘 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호법은 몸을 날려 현암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현암의 귀에 대고 말했다.
“싸우는 척해 주게. 나는 도혜 스님과 잘 알아.”
말을 마친 장 호법은 목소리를 바꾸어 크게 외치며 현암에게 덤벼들었다. 사실 장호법은 도혜 스님을 알지 못했으나 급한 나머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어딜 들어오려는 거냐!”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장호법은 자신에게 맹렬히 공격 을 해 오고 있었지만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물론 떨어진 곳에 서 보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이건 뭐야? 나하고 영화라도 찍자는 건가?’
다시 장호법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나중에 일단 나와 다투는 척해 주게 부탁하네. 어서!”
장호법은 자기가 시간을 끄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는 안쪽이 잠잠한 것이 더욱 불안했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허허 자의 신호가 있거나 벽공 도인의 전갈 내지는 포고령이 내려졌 어야 했다. 그래서 장호법은 자연스럽게 안의 일을 살펴보기 위 해 현암을 끌어들였다. 안쪽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다시 현암 과 싸우는 척하면서 밖으로 나올 심산이었다.
현암은 장호법의 말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장호법은 다시 급히 속삭였다.
“날 믿어 주게나. 도혜 스님의 내공을 받은 것이 자네인가?”
현암은 깜짝 놀랐다. 그 사실은 한 번도 남에게 떠든 적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안다면 장 호법을 도혜 스님의 지인이라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현암의 인상이 조금 풀리자 장 호법은 덤벼 오며 속삭였다.
“나와 겨루며 안으로 밀고 가 주게. 중요한 일이니 나중에 설명함세!”
현암은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싶어 그 말에 응하기로 했다. 혈 도를 고치러 왔다가 난데없이 무협 영화 속으로 빠져든 기분이 었다. 그와 동시에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장 호법은 본래 밀교에서도 주로 외공(外功)을 연마한 사람이라 권법에 능했다. 현암은 절묘한 수법으로 장호법이 공격해 오자 장난을 쳐 볼 생 각도 들었다.
현암이 손에 든 부러진 창에 기공력을 가하자 창이 푸르게 빛 나면서 검기(氣)가 일그러진 형태로 창끝에 맺혔다. 현암은 파 사신검의 검초를 발휘하여 장호법을 몰아붙였다. 장 호법은 깜 짝 놀랐다. 요즘 세상에 전설로만 내려오던 검기를, 그것도 칼도 아닌 부러진 창 조각에 맺게 하여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을 몰랐다. 밀교에서 고수로 손꼽히는 장 호법이었지만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장호법 혼자의 연극으로는 모든 승려를 속이기 힘들었는데, 현암의 창에서 검기가 솟아오르자 몇몇 상급 승려들의 입에서도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암과 장 호법은 반 장난이면서도 서로에 대해 감탄을 거듭하면서 문을 통과했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어느덧 대웅전 앞뜰로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난질 치는 것들이 누구냐!”
장호법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현암 도 영문을 모른 채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란색 가사를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푸른색으로 질려 있었고 입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에는 사람의 머리가 둘이나 들려 있었다. 마가 호법과 을련 호 법의 머리였다.
장호법이 이를 갈면서 눈초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의 입에서 쥐어짜듯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서 교주!”
박 신부는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그의 힘에는 한계가 있어서 주술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기둥을 계속 막을 수는 없 었다. 허허자도 주술을 발휘하고 밖에서는 준후가 애를 쓰고 있 었지만 서 교주가 직접 전수한 부적에는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 했다. 준후가 이번에는 밀교의 수인을 맺었다. 그러고는 주술을 발하자 사방에서 안개 같은 영의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허자도 부적을 꺼내어 불을 붙이며 있는 힘을 다하기 시작했 다. 박 신부가 뿜어낸 오라와 준후가 불러낸 영의 기운, 거기에 허허자의 부적술까지 세 가지의 힘이 각기 힘을 발휘하자 맴돌 던 불기둥의 속도가 조금 늦춰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뿐이 었다. 허허자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신부님! 난 저 애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어요. 그러니 신부님 준후를 부탁합니다.”
박 신부는 놀라면서 허허자에게 말을 하려 했으나 기도를 중 단했다가는 밀려드는 불기둥에 타 버릴 판이었다. 허허자가 좁 혀드는 불기둥을 막아 내던 손을 놓아 버리고 품에서 부적 뭉치 를 꺼냈다. 그리고 부적을 뿌리자 저절로 불이 붙은 부적들이 허 허자의 몸에 와르르 달라붙었다. 허허자는 다른 손으로 박 신부 의 팔을 억세게 쥐더니 불기둥을 향하여 뛰어들었다. 허허자의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염부나락(閻那)! 육도구천(九 天)!삼세제불(三世諸佛)!”
준후의 놀란 소리가 깨질 듯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안 돼요!”
장호법은 이를 갈면서 똑바로 서서 서 교주를 노려보았다. 서 교주의 얼굴이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갔다. 서 교주는 입에 흘리던 피를 한 손으로 쓱 닦았다. 서 교주의 말에는 비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배반자 놈들,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흐흐……………. 나를 몰 아내고 밀교의 주인이 되려고 했지? 꼴좋군. 해동감』의 해석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이제 똑똑히 알았느냐?”
“이, 악랄한 교주. 왜 그렇게까지! 호법들은 너를 멈추려고만했을 뿐인데!”
“나의 숙원을 꺾는 것과 목숨을 빼앗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 냐? 나는 교주다! 흐흐……………. 나에게 대드는 자는 모두 이 꼴이 되리라!”
장호법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현암은 멍했다. 사람의 머리를 잘라 들고 나타나는 인간이라니! 대체 현실같이 느껴지지가 않아서 충격을 받은 것 이다. 허나 서서히 머릿속이 꽉 차 오르며 머리가 맑아져 갔다. 몸 안의 내공이 팽창하고 격렬하게 날뛰었다. 현암은 정말로 화 났다. 서 교주라는 남자의 정신 상태도, 그 끔찍한 행동도.
‘용서할 수…… 없다.’
문득 현암은 서 교주가 들고 있는 호법들의 머리를 보았다. 끔 찍한 일이었으나 두 사람은 죽어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표 정마저 온화했다.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 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높은 수양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현암은 두 개의 머리에서 한빈 거사와 도혜 스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암은 싸늘한 눈빛이 되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네가 교주냐? 아니,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악귀나 야차 못지않은 쓰레기 같은데?”
싸늘하기 그지없는 소리였지만 내공의 울림 때문에 사방이 저 르릉 떨렸다. 난데없는 욕설에 서 교주는 꿈틀하면서 현암에게 눈을 돌렸다. 정상적인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푸른빛의 요기 (氣)가 도는 쭉 찢어진 눈이 현암과 장호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장호법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서 교주는 악의 힘 에 혼령을 지배당하고 있었다. 힘을 추구하며 안타까워하던 서 교주는 힘을 얻는 대신 자신의 몸을 잠식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 리고 호법들을 죽인 지금 그의 광기는 극도에 달해 있었으며 수 하로 부리던 호법들의 배신까지 알게 되자 이성마저 상실한 것 이 분명했다.
장호법이 물었다.
“벽공도인은 어찌했느냐?”
“벽공? 벽공도 너희와 한패거리였느냐?”
뭔가 이상했다. 서 교주는 어째서 벽공 도인과 다른 호법이 한 패냐고 묻는 것일까? 벽공 도인을 보지 못했다는 말인가? 벽공 도인은 두 호법과 같이 교주에게 간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벽공 도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서 교주는 멍한 눈으로 소리를 질러 댔다. 입가에 선혈이 계속 흐르는 것을 보아 상처가 가벼워 보이지 않은데도 서 교주는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두 놈이 처음엔 말로 어쩌고저쩌고 내 힘이 빠졌을 테니 포기 하라 마라 하더군. 내 힘이 빠져? 흐흐흐……….. 대자재천의 힘을 업은 내가 왜 힘이 빠진단 말인가. 그래도 놈들은 꽤 발악을 해 서 내게도 약간의 상처를 입혔지. 허나 그런 수법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놈들이 다 덤빈다고 나를 당해 낼 듯싶으냐?”
장호법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벽공 도인은 분명 약을 사용하여 서 교주의 공력을 반 이상 흩어 놓았다고 했는데………….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서 교주의 손에 들려 있는 두 사람의 머리가 장호법의 눈에 들어왔다.
“야아아아!”
장호법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장 호법이 수인을 빠른 속도 로 계속 교차시키자 양손에서 백색의 광휘가 뻗어 나왔다. 서 교 주의 눈이 찡그려졌다.
“금강살타의 금강수(手)! 네놈, 언제 그런 것 陀까지 익혔느냐?”
[*오른손에 금강, 왼손에 방울을 든 좌상으로 묘사된다. 보살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불타의 직능을 가지고 있어 ‘제6의 불타’로도 불린다.]
“악에 물들어 본분을 저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위태하게 하 는 자! 내 이제 너를 교주로, 아니 옛 동문으로도 인정하지 않겠 다! 네놈이 이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동안에 티베트에서 익힌 밀 교 본연의 술수다! 받아라!”
장호법은 이를 갈면서 서 교주를 쏘아보았다. 현암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사람 머리 를 잘라 들고 다니는 놈이라면 결코 좋은 자일 리 없다고 판단했 다. 검기를 발하며 합세하려는 현암에게 장 호법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몸을 피하게.”
현암은 꿈쩍도 않고 대답했다.
“저런 미친놈을 두고 피하라고요?”
“우리 교의 일이네.”
장호법은 말을 마치자마자 백색 광휘가 뻗어 나오는 양손을 어지럽게 교차시키면서 서 교주에게 달려들었다. 서 교주는 부 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피하기는커녕 괴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몸 에서 붉은 기운을 발하면서 장 호법에 맞서 갔다. 둘의 격돌은 엄청났다. 무예에 조예가 깊은 현암으로서도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술수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장 호법 의 금강수는 손을 마치 강철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서 교주의 붉은 기운도 만만치 않았다. 둘의 손발이 교차하기도 전에 챙! 챙! 하고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왔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장호법이 돌연 수법을 바꾸었다. 전혀 방어를 하지 않은 채 장 호법은 팔을 늘어뜨렸다. 서 교주도 돌연한 사태에 잠시 멈칫했다. 장호법이 말했다.
“아수라 신의 힘까지도 빌렸느냐? 아아………… 이제 정말 구제 할 길이 없구나! 서 교주・・・・・・ 과거의 친구로서, 내가 섬겼던 사 람으로서…………… 같이 지옥에 가자!”
장호법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발을 구르자 장 호법의 몸은 미끄러지듯이 무서운 속도로 서 교주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현 암의 입에서 짙은 신음 소리가 배어 나왔다. 방어가 전혀 없는 수법, 둘이 같이 죽자는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서 교주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양손을 크게 사방으로 휘둘러 댔다. 그와 동시 에서 교주의 손이 수십 개로 늘어난 듯 그림자가 허공을 메웠고 두 힘은 정통으로 충돌했다.
불기둥과 빛줄기가 한곳에 모이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 했다. 박 신부와 허허자는 겨우 포위망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허허자는 온 힘을 다해 최강의 주술을 사용했고, 박 신부를 바깥 으로 꺼내 주었다. 심한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허허자는 아직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숨은 꺼져 갔다. 지나치게 많 은 힘을 썼던 것이다. 옆에서 준후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니야, 이건 네 탓이 아니다…………… 신부님!”
“예? 무슨……..
박 신부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상처를 치료하려 했으나, 허 허자는 외상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사용한 수법 은 스스로의 생명을 태워서 뭇 신들에게서 최강의 힘을 끌어내 는 술수였다. 허허자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신부님, 바깥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계획이 실패했 나봅니다. 신부님, 저를 생각해서라도 준후를 지켜 주세요!”
“왜 준후만 지키라고 하시오?”
박 신부는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허허자는 그의 이름처럼 정 말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신부님, 서 교주가 행하려는 인신공양의 희생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준후입니다.”
박신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뭐, 뭐라고요?”
“그가 힘을 얻으려는 대자재천………… 시, 시바는 잔인한 신입니 다. 인신공양 받기를 좋아하는 신・・・・・・ . 서 교주는・・・・・・ 가장 큰 잠재력이 있는 아이를 희생물로 바침으로써………… 큰 힘을 얻으 려고…….”
준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외쳤다.
“아…… 아냐!”
허허자는 마치 고무풍선에서 김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 아버지는………… 준후야………… 너의………… 아, 아버지는…………… 장…… 장…….”
박 신부는 이제야 다섯 호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서 교주는 오래전부터 힘을 얻는 대가로 조금씩 몸과 정신 을 사악한 힘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서 교주는 아 주 귀한 사람을 인신공양으로 바쳐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구실을 붙여 장 호법의 아들 준후를 빼앗은 것이 분명했다. 그 는 마치 제물용 가축에게 여물을 주듯이 준후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고, 후에 그의 야심을 깨달은 오대 호법은 준후를 구하고 서 교주를 어떻게든 본정신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번 거사를 꾸몄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박 신부에게 준후가 제물이라고 밝히지 않 은 것은 밀교의 명예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준후를 생각했 기 때문일 것이다.
“아멘”
박신부는 나직하게 기도를 올렸다. 허허자가 웃음을 머금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자, 준후는 그의 손을 얼굴에 부비면서 목을 놓아 울었다. 준후의 처지가 너무도 가련했다.
‘불쌍한 아이, 저 나이에 벌써 이런 일들을 겪다니………….
박 신부는 준후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준후는 널 찍한 박 신부의 품에 안겨서 한없이 울었다. 박 신부는 난처했다. 이 어린아이에게 낳아 준 아버지와 길러 준 아버지의 의미를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하는가? 박 신부는 준후에게 떨리는 목소리 로 말을 했다.
장호법은 현암의 부축을 받아 헐떡였다. 그의 옷은 갈가리 찢어져 너덜너덜했고,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서 교주도 멀 쩡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화색이 돌던 얼굴빛이 다시 밀납처럼 창백해진 걸로 보아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서 교주의 얼굴에는 아직도 일그러진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우하하・・・・・・ 금강살타공・・・・・・・ 네놈도 강한 힘을 숨기고 있 었구나. 허나 내 상대는 못 된다. 아마 지금쯤 허허자 그놈도 네 아들놈의 손에 황천으로 갔을 것이니, 벽공이 도망쳤다면 이제 네 아들놈만 남았다.”
장호법은 다리를 휘청거리면서도 거칠게 현암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허허, 허허자가 준후에게?”
“바보 같은 놈들. 나는 네놈들의 계획을 다 알고 있었다. 흐흐 흐. 준후에게는 호법들이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쓰라고 최강의 부적을 주었지. 아마 허허자는 준후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그 꼬마 놈도…………….”
장호법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네, 네놈은 역시 주, 준후를 희생시키려고…………..”
장호법이 이를 악물며 수인을 맺자 가만히 있던 현암이 장호법을 제치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교의 일이건 뭐건 난 저런 살인자를 그냥 못 둡니다.”
“자…… 자네도 상대가 안 돼! 그는………….”
현암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구경이나 하세요.”
현암은 두려움도 없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손에 공력을 보 내 검기를 늘렸다. 그것을 보고 장호법도 더 말리지 않았다. 서 교주는 현암이 든 부러진 창끝에 몰려 있는 검기를 보더니 안색 이 변하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서 교주의 뒤편에서 짧은 칼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서 교주는 그 기운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몸을 돌리며 앞으로 누웠다. 그러나 칼은 벽 에 부딪힌 듯 공중에서 수직으로 떨어져서 교주의 가슴에 내리 꽂혔다.
“크아악!”
엄청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현암이 보니 서 교주는 심장 언저 리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있었고, 거기에 칼자루 끝이 보였다. 칼 자루에는 황금색의 실이 희미하게 달려 있었다. 칼을 던진 사람 은 실을 통해 내력을 전달하여 칼을 조종한 것 같았다. 곧이어 황금색 실을 따라서 엄청난 기운이 몰려왔다. 그 기운이 몸을 강타하자 서 교주는 미친 듯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제이, 제삼의 기운이 연달아 몸을 후려갈기자 서 교주는 가슴에 꽂힌 칼을 움 켜쥔 채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휙 몸을 날려 쓰러진 서 교주와 장호법 사이에 날아들었다. 노도인 벽공이었다.
“상좌호법님!”
벽공은 쓰러진 서 교주를 힐끗 보고는 중얼거렸다.
“내 칼을 심장에 맞고 내장에 황사공(黃)을 세 번이나 맞 았으니 제아무리 밀교의 교주라고 해도 살아날 순 없을 것이다.” 장호법은 긴장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벽공에게 다가갔다. 그리 고 땅에 떨어져 버린 마가 호법과 을련 호법의 머리를 가리켰다.
“상좌호법님, 어, 어디를 가셨기에………… 저 두 사람을…….”
“나는 서 교주의 심복들을 상대하고 있었네. 모두 처치해 버렸 지. 두 호법은 정말 안되었네, 정말”
장호법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심복들은 서 교주를 무 력화한 뒤에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태여 벽공 이 서 교주와의 대결에서 몸을 뺀 것도 이상했고, 지금 서 교주 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그 수법도 비열하고 잔혹한 데가 있었다. 더구나 서 교주의 공력을 줄였다는 약의 이야기 같은 것은…………….
“상좌호법님, 서 교주는 중독되지 않았습니다.”
“음, 그건 이유가 있네. 좀 있다가 이야기해 줌세. 그런데 말이야…….”
“예? 상좌 호법님.”
“내 자네에게 죄를 지은 게 있네. 용서해 줄 수 있나?”
“예? 무슨? 그야 물론…………….”
벽공은 낮은 음성으로 빠르게 말했다.
“내가 서 교주에게 복용시킨 약은 공력을 줄이는 약이 아니라 이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약이었다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벽공은 엄청난 힘으로 장 호법의 허리 를 휩쓸 듯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장호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가랑잎처럼 구석으로 날아갔다. 현암 은 깜짝 놀라면서도 재빨리 몸을 날려 벽에 머리를 부딪히려는 장호법의 몸을 받았다. 벽공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대⋯⋯⋯⋯ 대체…. 왜………….”
“허허허. 용서한다고 했으니, 더 감정 갖지 말고 저세상으로 가시게나.”
장호법은 눈만 크게 떴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현암이 대신 소리를 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응?”
벽공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힐끗 바라보자 현암은 다시 소리쳤다.
“이놈의 밀교는 지옥이나 다름없구나! 미친놈에 살인자 천지니. 너. 이 정신 나간 늙은이! 너 같은 쓰레기도 도를 닦냐? 그러 고도 도인이야?”
벽공은 현암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결과가 흡족한 듯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교주도 죽었고 호법도 없어졌다. 영특한 후계자가 있으며, 태고부터 내려온 좋은 사원과 보화가 그득하다! 하하 하…………. 나 벽공, 이제 새로운 일파의 창시자가 될 것이다! 하하하!”
장호법은 무서운 충격을 받았다. 벽공 도인은 오래전부터 계 획을 꾸민 것이 분명했다. 밀교 터전을 송두리째 집어삼켜 자신 의 도맥을 이으려는…………. 서 교주와 사대 호법을 서로 싸우게 하여 모두 살해하고, 준후라는 영특한 아이를 후계자로 삼아 천 오백 년 이상 이어진 밀교 도량과 비축된 보화를 이용한다면 그 의 일파는 새롭게 융성할 것이 분명했다. 아, 그렇게 믿고 섬겼 던 벽공이 어찌 저런 짓을…………….
장호법의 뇌리에 과거에 벽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거라네. 수련이 깊을수록 욕심 도 많아지고 유혹도 깊어질 수 있는 게야.
벽공도인은 자신의 도맥을 빛내려는 명예욕의 포로가 되어 버 렸다. 서 교주가 힘의 노예가 되어 이성마저 상실한 것처럼………….
장호법은 현암의 품 안에서 피를 토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인간은 인간은….. 어째서, 어째서…………’
벽공이 눈에서 잔인한 빛을 뿜어내더니 장 호법의 이마를 향해 작은 동전 세 개를 날렸다. 아니, 그 가운데 하나는 현암을 향 하고 있었다.
“이거 환장하겠구만.”
현암은 싸늘히 웃으며 창에서 검기를 뿜어 세 개의 동전을 후 려갈겼다. 검기에 맞은 동전은 그에 실린 내력과 검기의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서져 버렸다. 벽공이 흠칫하며 한 걸 음 물러섰다.
“검기라니………… 젊은 친구가 굉장하군!”
현암은 날카롭게 외쳤다.
“네놈 죽는 꼴이 더 굉장할 거다. 너,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벽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시뻘건 불 덩이가 날아와 벽공의 등에 작렬했다. 벽공은 입을 벌리고 끔찍 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제이, 제삼의 불덩이가 벽공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그럴 때마 다 벽공 도인의 허리가 뒤로 계속 꺾였다. 벽공은 더 이상의 소 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뒤집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등 에는 아까 벽공이 던졌던 단검이 꽂혀 있었고, 그 뒤에 황금색
줄을 손에 쥐고 히죽히죽 웃으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서 교주 였다.
준후는 박 신부의 품 안에서 고개를 내저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녜요! 아녜요! 다 거짓말이에요! 어떻게 아버지가 둘이 될 수 있단 말이죠? 아녜요!”
박 신부의 가슴도 미어졌다. 이미 설명을 다 했고 준후도 알아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세상 의 복잡함을 이해할 것이며,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선뜻 받 아들일 수 있겠는가. 준후가 박 신부의 품으로 기어들면서 사제 복을 축축이 적셨다. 가엾은 아이…. 너무 총명한 것이 죄였을 까? 박 신부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져 준후의 하얀 목덜미에 흘 렀다. 한참을 울고 난 준후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아니, 신부님이라 그러셨죠? 신부님이 뭔지는 잘 모 르지만…………….”
“그래, 준후야.”
“아버지 아니 교주님도, 장 호법님 아니 아버지도………… 그리고 세상 사람이 너무 불쌍해요. 왜 그래야만 하죠? 왜요?”
박 신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준후를 부여안고 스스로 도 이유를 알지 못할 서러움에 휩싸여서 같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준후는 한참을 서럽게 울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모양이었다.
현암은 뜻밖에 사태에 놀라 중얼거렸다.
“이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죽고 죽이고………… 다 미쳤어!”
장호법이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떨렸다. 서 교주 의 형상은 더욱더 흉악해져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은 백지 같았고, 눈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
“서서 교주, 당신은…………..!”
“킬킬킬.’
듣는 이의 소름을 오싹 돋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건 평소 엄 격했던 서 교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지 광기로 가득 찬 짐승 의 목소리였다.
“킬킬킬. 내가 그 따위 것에 맞아 죽을 줄 알았더냐? 킬킬 킬・・・・・・ 그사이에 휴식을 취했지. 시바와 칼리와 아수라를 불렀 다. 배신자들 다 죽여 버리겠다. 그런 연후에 네놈들의 피를 시 바신에게 바치겠다. 킬킬킬……”
서 교주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벽공의 목덜미를 잡고 몸 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등에 꽂힌 칼을 그대로 아래로 긁어내 리자 벽공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피가 봇물처럼 퍼져 나와 주위에 튀었다. 현암과 장 호법은 넋이 나갔다. 아무 힘도 쓸 수가 없었다.
“킬킬킬・・・・・・ 시바 신이여, 받으소서!”
서 교주가 벽공의 두 조각 난 시체를 장난감처럼 뒤로 던졌다.
악인이었을망정 너무나도 끔찍한 최후였다. 현암이 소리쳤다.
“멈춰!”
현암의 호통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으나 서 교주는 오히려 현암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킬킬킬.”
장호법의 쥐어짜는 듯한 탄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 가엾은 자. 그대가 찾던 힘이 정녕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크하하하.”
서 교주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 다. 승려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넋이 나간 인형처럼 장호 법과 현암, 그리고 서 교주의 주위를 그저 둘러싸고 있었다. 공 력이 없는 그들은 서 교주의 주술력이 깃든 웃음소리에 넋을 빼 앗긴 것이 분명했다.
“너희 놈들, 세상에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 크흐흐…… 오로 지 내 몸에 모든 힘을 지니고, 세상을 지배해 나갈 뿐이다…………! 시바 신이여! 다 드리겠나이다. 히히히∙∙∙∙∙ 피를, 여기 있는 모든 놈들의 피를, 히히, 그 꼬마의 피까지 드리겠나이다. 히히 …….”
현암이 이를 갈았다.
“네 녀석부터 바치지그래? 이 살인마!”
장호법은 진작부터 서 교주가 준후를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 치려 하는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하는 생각에 다 른 호법과 함께 어떻게든 서 교주를 회개시키려 했다. 장호법은 허무하게 죽어 간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오열했다. 비로소 저간 의 사정을 약간 알게 된 현암도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가 평범 한 생활을 버리고 이 길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 가 몸을 치료하여 얻으려던 힘은 무엇이었던가? 힘이란 과연 무 엇이란 말인가? 현암은 소리를 질렀다.
“힘을 얻고 싶다고? 힘을 주지. 힘으로 아주 박살을 내 주마!” 현암의 손에 들린 창이 푸른빛을 더해 갔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 고막 덤벼드려는 현암의 앞을 장호법이 비틀거리며 막아섰다. “자네는 피하게. 자네는 또 다른 숙명이 있는 사람이네. 자네 야말로 『감결』에서 말하던 북방 도인이 틀림없어. 개죽음당하지 말고 어서 도망치게나!”
현암은 씩 웃으면서 손에 든 창을 털어 냈다.
“북방 도인이 뭔지도 모르겠고, 숙명이니 하는 어려운 것도 저는 모릅니다. 저런 자식을 어떻게 그냥 둡니까?”
“자네의 상대가 아니야! 저자는 이미…………….”
그러자 현암은 쓸쓸히 웃어 보였다.
“전 겁나는 게 없습니다. 이젠 세상에 남아 있는 것도 없고요. 내가 여기서 죽든 살든, 저놈은 확실히 죽습니다. 약속하죠.”
그때 뒤쪽에서 박 신부와 준후가 달려 나왔다. 아무 소리도 내 지 못하고 인형같이 굳어 버린 승려들을 헤치고 달려온 준후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두려운 듯이 서 교주와 장호법을 번갈아 보았다.
서 교주가 이미 초점이 뒤엉킨 눈을 깜박거리더니 흉한 미소 를 지으면서 온화한 소리를 냈다.
“준후야, 아버지에게 온. 착하지?”
현암과 장호법은 소름이 돋았다. 서 교주의 목소리에는 기묘 한 힘이 있었다. 준후는 주춤거리면서 뒷걸음질을 하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버지라고 불러 왔 던서 교주의 말에 길들여진 아이였다.
“아, 아버지? 아니, 장호법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인데…………..”
“아니야, 준후야, 너 그 말을 믿니?”
“아, 아니요, 아버지.”
“그래, 어서 이리로 오너라.”
준후는 홀린 듯이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멍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박 신부도, 현암도, 장 호법도 정신이 나른해졌다. 서 교주는 낮은 소리로 흉악한 주문을 외우며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돌연 박 신부가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미라의 영상이 스쳐 지 나갔다. 거의 동시에 현암도 현아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현암 은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차렸다. 박 신부가 소리를 질렀다.
“준후야, 안 돼! 최면술이야! 정신을 차려야 해!”
장호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 교주의 손이 준후의 목덜미 로 가고 있었다. 준후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 었다. 서 교주의 오른손에서 칼이 번쩍였다.
“안돼!”
현암과 박 신부는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에 정신을 차리기 못했다. 서 교주의 칼이 준후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드는 순간 장 호법이 몸을 날려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장호법의 손에도 짤막 한 칼이 들려 있었다.
“윽, 너, 이놈이!”
준후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장호법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서 교주가 휘두 른 칼이 박혀 있었다. 서 교주도 배에 칼을 맞고 비틀거렸다. 장 호법은 몸에 박힌 칼을 뽑지도 못하고 준후 쪽으로 힘겹게 고개 를 돌렸다. 장 호법의 눈과 준후의 눈이 마주쳤다. 준후는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준후와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했던 아저씨, 그
러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뒤에서 훔쳐보며 즐거워했던 아저씨, 겉으로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도 틈날 때마다 자기의 방으로 찾아와 잠든 척하고 있던 자신을 말없이 몇 시간이고 쳐다보던 아저씨…………. 그랬다. 틀림없었다.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
준후는 큰 소리로 불렀다. 준후를 바라보는 장 호법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희미 하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순간 준후는 장호법의 기이한 용 모가 더 이상 추하게 보이지 않았다.
장호법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이 광경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던 현 암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현암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나 싶 더니, 부러진 창이 갑자기 빛을 발하면서 산산이 터져 나갔다. 박 신부의 안경도 축축이 흐려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도 오라의 색 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목에서 십자가를 풀어 들었다. 서 교주는 휘청거리며 배에서 칼을 빼려다 그만두고 준후에게 다가갔다. 준후는 눈물을 펑펑 흘리던 눈으로서 교주를 휙 돌아 보았다. 교주…… 자신이 짧은 평생 동안 아버지라 불러 왔던 자의 흉악한 몰골을 바라보는 작은 눈은 눈물과 함께 분노의 빛 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준후가 손을 움켜쥐자 전기처럼 바지직 소리를 내면서 손 안에 무언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서 교주가 안색을 흉 하게 일그러뜨렸다.
“제, 제석천(天)의 뇌전! 너, 너 같은 꼬마가 어떻게 그런 힘을!”
“야아아앗!”
준후는 입에서 앙칼진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작은 양손에서 나온 이글거리는 두 가닥의 번개가 서 교주의 배에 꽂힌 칼에 적중했다. 순간 번개가 전신으로 넘쳐들면서 서 교주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암과 박 신부가 동시 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박 신부가 소리쳤다.
“안 돼!”
어린아이의 몸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박 신부로서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현암도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서 교주만 노 리고 있던 현암은 기공을 가득 실은 주먹을 날렸다.
‘내 손으로 먼저 죽이면 저 애의 손은 더러워지지 않겠지. 죽어라!’
[* 천제석, 제석이라고도 하며 범왕과 더불어 불법을 지키는 신. 십이천의 하나로
서동쪽의 수호신이며 수미산 꼭대기에 산다고 한다.]
현암의 주먹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서 교주의 얼굴에 명중 했다. 순간 주먹을 통해 뇌전이 돌았으나 기이하게도 현암에게 는 고통을 주지 않고 도리어 힘을 북돋는 것 같았다. 박 신부도 오라를 십자가에 집중시켜 푸른 성령의 불길을 만들어 내고 있 었다. 박 신부의 오라력도 준후의 번개와 아무 저항감이 없이 서 로 겹쳐 위세가 강해졌다. 박 신부의 십자가가서 교주의 어깨를 내리쳤다.
“끄아아악!”
서 교주가 세 번이나 강한 타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것을 현암 이 달려들며 기공이 가득 실린 주먹으로서 교주의 얼굴과 상체 를 미친 듯 두들겼다. 서 교주의 몸이 뒤로 밀리다가 급기야는 현암의 회심의 일격에 허공을 몇 미터나 날아서 벽에 부딪힌 다 음 뒤로 넘어졌다. 제석천의 뇌전을 맞은 칼은 어느새 서 교주의 배에서 튀어나와 현암의 옆에 떨어져 있었다. 현암이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저세상에서나 교주 노릇하시든가. 그나저나 꼬마야, 너 대단하구나.”
준후도 손을 늘어뜨리더니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니 교주님 보여 드리려고 열심히 수련했던 건데………….”
현암과 박 신부는 이겼다는 기쁨보다 준후의 중얼거림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몸을 숙여 준후를 달래기 시작했다.
불현듯 현암의 뒤에서 화끈한 열기가 감지되었다. 현암은 급 한 나머지 준후를 안고 몸을 굴리면서 박 신부를 발로 찼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아슬아슬하게 현암과 박 신부를 스치고 지 나가서 인형처럼 서 있던 승려들에게 부딪혔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불덩이를 맞은 승려들의 몸이 숯덩이처럼 타 버렸다. 제이, 제삼의 불덩이가 계속 날아들었다.
서 교주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신이 불타오르는 악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서 교주의 눈은 붉은색으로 뒤집혀 있었고, 입이며 코에서도 불이 뿜어져 나오 고 있었다. 현암과 박 신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저럴 수가!”
준후가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저.. 저건 파극염(波極炎)!”
“그게 뭔데?”
현암이 묻자 준후가 급히 말했다.
“혼을 팔아 얻는다는 아수라 마왕의 주술이라구요!”
“뭐? 혼을 팔았다고?”
박신부가 소리쳤다. 서 교주는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입에서 불덩이를 뿜어냈다. 현암이 날쌔게 밀어낸 덕분에 박 신부는 간신히 불덩이를 피할 수 있었다. 불덩이는 승려들의 몸을 산산이 부수고 뒤켠의 건물마저 무너뜨렸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준후는 얼이 빠진 듯 계속 중얼거렸다.
“아, 아수라 아수라가 인드라에게 패한 뒤로 자신의 혼을 불사르는 파극을 만들어 내었으니…………….”
현암과 박 신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서 교주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불길이 번져 나오는 눈은 이 미 의지를 상실한 마귀의 눈매였다. 준후가 중얼거렸다.
“남을 멸망시키려 힘을 얻는 자, 자신의 혼을 먼저 불태워야하리…….”
현암이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서며 박 신부에게 외쳤다.
“신부님! 어떻게 할 거요?”
박 신부도 오라력을 잔뜩 돋우고 있었으나 저토록 엄청난 위 세 앞에 별다른 대응책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박 신 부의 머릿속에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준후나 현암이나 강한 힘 이 있었고, 더구나 서로 유파가 다른데도 신기하게 상충하지를 않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것은 세 명의 영의 파장이 거의 같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이봐, 젊은이! 우리 힘을 합쳐 보세!”
현암의 머리 위로 불덩이 하나가 또 날아들었다. 현암은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외쳤다.
“뭐라고요?”
“힘을 합치자는 말일세! 내 기도력을 자네에게 불어넣을 테니!”
현암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박 신부를 힐끗 보았다. 완전 히 유래가 다른 영력을 합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현암의 눈에 다른 광경이 들어왔다. 박 신부와 준후가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뒤편에서 꼿꼿이 선 채로 불에 타 쓰러져 가고 있는 승려들…………. 그들은 서 교주의 수법에 말려들어 무의미하게 죽 어 가고 있었다. 이미 많은 승려들이 불에 휩쓸려 버렸지만 살아 있는 한 사람이라도 더 생명을 건져야 했다.
현암이 기합을 넣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현암이 오른손에 태 극패를 들고 기공력을 불어넣자 태극패에 푸른 기운이 돌기 시 작했다. 현암은 잠시 뒤를 보더니 이를 악물고 아직 불에 휩쓸리 지 않은 승려들의 앞을 막아섰다.
“신부님! 뭘 하려거든 어서 해요!”
박신부는 청년을 보고 퍽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의 몸 놀림이라면 혼자 여기서 벗어나는 것쯤은 쉬운 일일 텐데………… 청년은 죽기를 각오하고 괴물같이 변해 버린 서 교주와 맞서고 있다! 박 신부가 십자가를 가슴에 대자 오라가 단단한 공처럼 선 명한 빛을 내면서 박 신부의 주위에 서렸다.
“가세!”
박신부가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특별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시화된 둘의 영력을 엉기게 만들려는 것이 었다. 자칫 둘의 영력이 충돌하는 일이 생긴다면 굉장한 영력을 지닌 두 사람은 그대로 폭발해 버릴지도 몰랐다. 박 신부는 기도 성을 내면서 눈을 감았고, 현암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고는 서 교주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서 교주의 눈만큼이나 타오르 고 있었다.
박 신부의 몸이 현암에게 가까이 가자 박 신부의 몸에 구형으 로 엉겨 있던 오라가 현암의 등 아래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 암의 손에 들린 태극패에서 폭발하듯 광채가 터져 나오면서 그 빛이 몸을 비추자 서 교주는 비명을 질렀다. 현암은 계속 밀어 붙였다.
“제발 좀 쓰러져라!”
서 교주의 몸이 뒤로 질질 밀려났다. 강한 바람을 맞은 듯이, 서 교주의 발이 땅을 긁으며 미끄러지다가 급기야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준후는 이 광경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노에 못 이겨 인 드라의 뇌전을 날려서 부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자기 를 키워 주고 아버지라 불렀던 사람과, 다른 한편에는 자신과 승 려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땅에는 친아버지인 장호법의 시신이 보였다. 장호법의 눈은 감겨 있었 다. 따스했던 시선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없었다.
“좋다! 썩을 놈의 혼을 꽤 비싸게 팔았나 보구나, 사기꾼아!
어디 한번 같이 죽어 보자!”
현암은 성난 사자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필생의 내력을 뿜어냈 다. 뒤에 버티고 선 박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힘은 한데 뭉 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 위력은 힘을 쓰고 있는 자신들조 차 믿지 못할 만큼 강했으나, 밀교 진전을 이어받아 혼까지 팔아 넘긴 서 교주의 파극염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서 교주가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짐승 소리를 내면서 몸을 곧추세 웠다. 이번에는 입이 아닌 양손에서 불길이 일렁이더니 갑자기 굉음을 내면서 손목이 폭발하듯 떨어져 나갔다. 깜짝 놀란 현암 과 박 신부의 힘이 순간적으로 약해졌다. 서 교주는 손목이 잘려 나간 팔을 치켜들었다. 손목에서는 피 대신 불길만이 용트림하 며 솟구치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현암과 박 신부를 겨냥해 날 아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 교주는 고대의 사술을 이용 하여 온몸이 불로 화한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후는 마음을 굳혔다. 저기서 날뛰고 있는 서 교주는 이제 아 버지도, 존경받는 밀교의 교주도 아니었다. 시바나 아수라 같은 사악한 힘에 혼을 팔아넘기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게 된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준후는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준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선은 몸이 굳어 있는 승려들을 풀어 주기 위해 열심히 힘을 썼지만, 서 교주의 금제(禁制)가 심해서 술법이 먹혀들지 않았다.
서 교주의 손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극의 엄청난 불길이 소방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뻗어 나와 현암과 박 신부 를 삽시간에 몰아붙였다. 현암이 손에 들고 있던 태극패에서 바 지직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가운데 동경(銅鏡)에 금이 갔다. 파극의 불길은 이제 태극패의 광채를 뚫고 두 사람에게로 더 뻗쳐 왔다. 준후는 그런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면서도 선뜻 도움 을 줄 수가 없었다. 왜 저 형과 아저씨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걸까? 부탁만 하면,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나도 도움을 줄 텐데 …
준후는 태어나면서부터 신통력이 있었다. 그래서 혼란스러 운 와중이지만 순간적으로나마 두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우리 말고는 빠지라 고, 어서 달아나라고. 그들은 아무 관계도 이유도 없는 사람들, 즉 준후나 승려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준후는 주 위를 돌아보았다. 백여 명에 달하던 해동밀교의 승려들은 서 교 주에 의해 꼿꼿이 몸이 굳은 채 아직도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고, 많은 수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재로 변해 있었다. 지금 밀교 본 산은 커다란 불구덩이나 다름없었다. 불상이며 각종 주술에 쓰 는 법기(器)에 깃들어 있던 영혼들이 헤매며 날고 있는 광경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해동밀교는 끝장이다. 그 속에서 두 명이서 교주를 막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준후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품에 들어 있던 부적 세 장을 꺼낸 뒤 왼손 무명지를 힘껏 깨물었다.
서 교주의 불길이 현암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현암의 머리카 락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슬리기 시작했고, 박 신부의 옷 에도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능력을 이렇게까지 발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힘을 합 쳐 더욱 가공할 힘을 내보였는데도 서 교주에게 압도당하고 있 었다. 현암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신부도 허탈한 마음에 기도문 소리가 나직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 순간 작은 형체가 달려들면서 박 신부의 등 뒤에 찰싹 들러 붙었다. 박 신부의 등골에서 차가운 기운이 꿰뚫듯이 올라왔다. 준후였다. 현암도 박 신부를 통해서 엄청난 기세로 밀려들어 오 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뒤에서 준후의 높은 소리가 들렸다.
“수(水)! 물의 기운을!”
유사 이래 불의 상극은 물이었다. 현암은 곧장 무슨 말인지 알 아차렸으나 현암에게는 특별히 물을 상징하는 무술도 없었고 그 런 물건도 없었다. 박 신부에게 성수 뿌리개가 있었다. 박 신부 가 재빨리 한 손으로 성수 뿌리개를 꺼내 현암에게 건네주자 현 암은 힘겹게 태극패를 뒤로 돌리며 성수 뿌리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뒤에서 준후가 범어로 소리를 치자 박 신부의 등 뒤에서 파도 같은 힘이 번져 나와 다시 현암의 등줄기를 통해 성수반에 몰렸다. 성수반의 주위에 선명하고 밝은 검은 아지랑이들이 모 여들면서 파랗게 빛이 솟아났다. 서 교주는 고함을 치면서 손목 을 휘둘렀다. 현암은 최후의 모든 힘을 성수 뿌리개에 모아 힘껏 던졌다.
성수 뿌리개가 서 교주의 아랫배에 명중했다. 화약이 폭발하 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아랫배가 폭발하고 커다란 구멍 이 뚫렸다. 곧이어 그 구멍에서 거센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서 교주는 괴성을 지르면서 미친 듯 몸을 비틀었고, 그때마다 몸에 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이 사방을 삽시간에 불로 뒤덮어 버렸다. 그 불길에 서 교주 자신의 몸도 촛농처럼 타 들어갔다. 현암이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꼬마야! 남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해 봐!”
준후는 발악하는 서 교주와 친아버지인 장호법의 시신을 처 량한 눈길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박 신부가 준후의 어깨에 살며 시 손을 얹었다. 푸근한 손길이었다. 정신을 차린 준후는 승려들 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박 신부와 현암의 생각을 알아챘다. 아 까는 불가능했지만 서 교주의 몸이 타 버린 지금은 술법이 먹혀 들 수도 있었다. 준후가 기합을 발하며 손을 교차시키자 그때까 지도 살아 있던 몇 안 되는 승려들의 몸이 우르르 마비에서 풀려났다. 서 교주의 몸은 거의 다 타서 뼈대밖에 남지 않았으면서도 여전히 몸부림을 치며 불을 뿜고 있었다. 준후가 날쌔게 장호법 의 시신으로 가서 얼굴을 한 번 쓰다듬고는, 허리에 걸려 있던 주머니를 끌러 손에 쥐고 뛰어왔다. 현암이 준후를 안아 올리고 박신부와 갈팡질팡하는 승려들과 함께 뛰어 나갔다. 하늘이 무 너지는 소리와 함께 대웅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암은 있 는 힘을 다해 박 신부를 밀어내고는 자신도 준후를 안은 채 몸을 날렸다. 박 신부는 나가떨어지면서 무너지는 대웅전을 지켜보 았다. 지붕이 뒤집어지면서 기둥이 파여 주춧돌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광경, 몇 명 남지 않았던 승려들마저 그 밑에 깔리는 모 습이 슬로 모션처럼 박 신부의 시야에 들어왔다. 박 신부는 전에 들었던 『해동감』의 마지막 구절을 생각했다.
‘절의 주춧돌이 지붕 위로 올라가리라……………. 절의 주춧돌이 지 붕 위로 올라가리라. 결국 아무런 비유나 상징도 아니었구나. 글 자 그대로였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아침 해돋이 속에서 해 동밀교의 본산은 해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까지 치 솟은 불길이 해돋이와 어우러져서 온 하늘을 불사르고 있었다. 해동밀교의 생존자는 오직 준후뿐이었다.
박 신부는 오열하는 준후를 말없이 안아들었다. 박 신부가 준후를 다독거리면서 애써 유쾌하게 말했다.
“준후야, 이제 그만 울거라. 이 신부 아저씨와 같이 가자꾸나.”
놀랄 만큼 총명하고 아는 것도 재주도 많았지만, 아이는 역시 아이였다. 준후는 재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 다. 현암도 아홉 살밖에 안 된 아이가 겪어야 했던 지독한 선택 과,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도와줄 일이 많단다. 어찌 보면 숙명인지도 모르지. 감 결에 나왔던 네 명의 큰 손님, 다 정해진 일이었는지도 몰라.”
박 신부는 『해동감결』에 나왔다는 네 명의 큰 손님에 대한 생 각을 떠올리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다만 사람들을 위하고 오늘과 같은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 다면 그만인걸. 뒤에서 머뭇거리던 현암이 준후를 안고서 걸음 을 옮기던 박 신부 앞에 섰다.
“저 불은 어쩌죠?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하는 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네.’
“그런가요.”
현암이 머뭇거리자 박 신부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같이 갈 텐가?”
현암이 씩 웃었다. 싸늘한 첫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시원한 웃음이었다.
“저 같은 놈을 뭐에 쓰시려고요.”
“쓰려고 그러는 게 아닐세. 그냥…… 같이 가자는 거지.”
현암은 조용히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그냥 가는 겁니까.”
그러다가 현암은 억지로 띄운 것이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퇴마행(魔行)・・・・ 마를 물리치러 가는 걸세.”
“뭘 물리친다고요? 그걸 물리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데요.”
“어디든 가는 거지.”
현암은 정색을 했다.
“그러면 오늘 같은 일을 막을 수 있는 겁니까?”
박신부는 조용히,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네.”
그러자 현암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도 마주 보 고 미소를 지었다. 준후는 지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박 신부 는 등을 포근하게 다독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현암이 말했다.
“전 이현암이라고 합니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 배운 도인 나부랭이입니다.”
“난 사제였네. 이름은 박윤규이고 박 신부라고도 많이 부르지. 본명은 베드로…………. 그리고 이 아이는 준후네. 장준후라고 해야겠지……”
담소를 나누며 걷는 그들의 등 뒤에서 해동밀교의 마지막 잔 해를 태우는 불길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불길은 하늘마저 태워 버릴 듯했다. 아니, 그날만큼은 정말 하늘이 불타오르는 날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