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4화 어머니의 자장가 2 : 동몽주
동몽주(同)
현암은 이틀 동안 준후를 찾아 헤맸다. 준후는 설악산 어딘가 로 수련하러 간다는 말만 한마디 던져 놓고 떠났다. 그 큰 산을 뒤져서 한 사람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 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준후에게 동몽주를 배워야 했기 때문이 다. 그것만이 현재 윤영의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이었다.
동몽주는 잠들어 있는 사람의 꿈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하 는 주술이었다. 별로 어려운 주술은 아니라고 준후에게 들은 적 있지만, 꿈의 내용이 강렬하거나 잠든 사람이 깨지 않으면 주술 시전자도 깨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스승은 준후에 게 이 주술은 앞뒤를 잘 가린 후에 사용하라고 생전에 당부했던 것이다.
이틀간 무지막지하게 헤맨 끝에 현암은 준후가 수련하고 있는 산비탈의 동굴을 찾아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해 파김치가 되어 버린 현암을 준후는 수련을 방해한다고 막무가내로 내쫓으려 했다. 결국 현암은 자신이 왜 준후를 찾아왔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 밖에 없었고 사정 얘기를 다 듣고 난 후에야 준후의 얼굴은 비로소 풀어졌다.
“형, 믿어도 돼요?”
“뭘?”
“이상한 일에 써먹으려는 거 아니지?”
“무슨 이상한 일?”
“아니, 있잖수. 왜, 그 아가씨 미인이라면서? 그러니 현몽해서”
“뭐? 현몽이라구? 주문을 외우면 상대 꿈속에 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소리냐?”
“그것도 가능하죠. 근데 형은 아무래도 엉큼하니까 동몽주를 가르쳐 주기가 뭣한걸?”
“뭐? 준후 너 날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뭘로 보긴 뭘로 보우? 늑대지.”
“이게!”
“아이고, 아동 학대한다!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진짜 조심 해야 돼요. 현암 형이야 기공이 쪼끔 있으니 괜찮겠지만, 사심을 갖거나 만약 형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쪽 영이 눈치채고 해코 지를 하려고 들면 당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배울래요?”
“배우는 수밖에……………. 그 여자는 내가 돕지 않으면 안 돼.”
“그럼 이걸 보고 익혀요. 진짜 조심하구요.”
준후는 보따리를 뒤적뒤적하더니 현암에게 케케묵은 작은 책 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제목은 『몽몽(夢夢訣)』이었다.
현암이 주술을 익히는 데 꼬박 삼 일이 걸렸다. 실습해 볼 시 간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준후는 잠을 자지 않고 계속해 서 염불인지 범어인지 모를 소리만 읊조리고 있었다. 잠을 자는 상대가 주변에 있어야 같은 꿈을 꾸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현암은 고속버스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기분이 좋았다. 본의 아니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꿈을 구경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잠든 사람에게 가볍게 손가락 끝만 대고 조용히 운기의 상태로 들어간 후 주문만 나직이 외우면 되었다. 그 사람 꿈에서 목마를 타고 총싸움을 하며 노는 것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별 꿈을 다 꾼다고 생각하 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동몽주의 효능도 확인했으니 이제 준비 는 된 셈이었다. 일이 생각대로만 풀려 준다면 말이다.
금요일이 돌아왔다. 현암은 전에 알아 두었던 윤영의 집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윤영의 할머니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귀신을 쫓는 사람치고는 너무 젊었기 때문이리라. 할머니는 윤영이 잠들어 있다고 말해 주었다. 현암은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약간 넘어 있었다.
꿈을 꾸는 시간은 채 십 분도 안 될 것이나, 세시 조금 못 돼서 윤영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해도 두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은 남아 있었다.
현암은 우선 집 안의 기운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요기나 마기 는 느낄 수 없었다. 집 안 곳곳에 조금은 낡은 듯한, 그러나 예쁜 장식물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자 둘만이 사는 집이라 퀴퀴한 현암의 방과는 냄새부터 달랐다. 현암은 싱겁게 웃다가 벽에 붙은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윤영이 어릴 적에 어머니와 찍은 사진인 듯했다. 어린 윤영의 모습은 꽤 깜찍했다. 자상해 보이지만 눈가에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 윤영의 어머니가 귀여운 딸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윤 영의 뒤에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비쳤다.
현암은 사진을 눈에 바짝 들이대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윤영 의 모습 뒤에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푸르스름하게, 마치 윤영의 몸에서 발산되는 듯한, 아니 안으로 갈무리하려는 듯한 흔적이 있었다.
“윤영이 어미라오. 저 가엾은 것만 남겨 두고 혼자 훌쩍 가버 렸지. 무정한 것……..”
눈치 없는 할머니의 말이 사진에서 현암의 시선을 거두게 했다.
“아, 예.”
“그나저나 우리 윤영이는 어떻게 해야 되겠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내가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라오.”
“그러시겠죠. 이제 염려 마세요. 윤영 씨 방을 둘러봐도 되겠 습니까? 마침 잠이 들었다니 다행이군요.”
“아까부터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양이우. 불쌍한 것 같으니……”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와 같이 가시되 소리는 내 시면 안 됩니다. 윤영 씨가 잠에서 깨면 허사니까요.”
현암은 조심스레 아직도 의아해하는 할머니와 함께 윤영의 방 으로 들어갔다. 윤영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벽에 기대어 앉은 채 로 잠들어 있었다. 호흡도 가지런했고, 편안히 잠에 취해 있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잠들었어요. 통 잠을 못 이루다가…………..”
“쉿!”
윤영은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천진한 표정이었다. 퇴마행 이 후 여러 경험을 했지만 낯모르는 규수의 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잡념은 금물이었다. 현 암은 잡생각을 지우고 준후에게서 얻은 부적을 눈 주위에 문질 렀다. 눈을 밝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상한 것이 보였다. 윤영의 몸을 둘러싼 수상한 기운이 서서 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무 의도도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현암은 당혹했다.
‘음? 저게 윤영 씨를 악몽으로 몰아넣는 범인 같은데 왜 아무런 살기나 요기가 보이지 않지? 윤영 씨 말로는 지독한 악몽일 텐데…….’
악몽을 꾸게 만드는 것은 주로 목적이 있는 원한령이나 장난 을 좋아하는 부유령이었다. 가끔은 자신이 유체 이탈되어 가위 에 짓눌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윤영이 아닌 다른 영의 짓이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침범한다면 무슨 의도가 있 는 게 분명하건만, 아무런 의도나 의지를 느낄 수 없으니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일단 윤영 씨 꿈속으로 들어가 보자. 현암은 손수건을 꺼내 손에 들고 결가부좌를 틀고서 윤영 옆 에 앉았다. 그리고 손짓으로 할머니를 불러 준비한 금줄을 주며 귓속말로 당부했다.
“전 윤영 씨의 꿈으로 들어갈 겁니다. 잘 보고 계시다가 제가 손수건을 떨어뜨리면 저도 잠이 든 것이니, 이 금줄을 사방 벽에 둘러 주세요.”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면서도 긴장한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문제가 되는 꿈을 꾸기도 전 에 윤영 씨가 잠을 깨거나 그 귀신이 제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실을 알아낼 수 없으니까요. 윤영 씨가 그런 꿈을 계속 꾸게 되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할머니는 겁에 잔뜩 질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제대로 해 줄지 의문이었다. 일단 귀신이 수작을 부리게 놔둔 후 금줄을 쳐야 귀신이 마음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이 방에서 맴돌 게 될 것이다. 그다음 잠에서 깨어 놈을 퇴치하면 일은 끝이었다.
“절대 겁먹지 마시고, 혹 저나 윤영 씨가 잠꼬대를 하거나 몸 부림을 치더라도 깨우시면 안 됩니다. 다만 이…………….”
현암은 월향을 꺼내 앞에 놓았다.
“이 칼이 소리 내어 울면 제가 위험에 빠진 것이니, 그땐 저를, 꼭 저만 깨우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칼을 무서워하지 마시고요…….”
현암은 당부를 마치고 한 손에 손수건을 든 채 눈을 감고 동몽 주를 외우기 시작했다.
밝은 빛과 어두움이 몇 차례 교차하더니 평안함과 안온함이 이어졌다.
윤영의 꿈은 단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현암에게는 아까의 기운이 윤영의 꿈으로 점점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조만간 무 슨 일이 벌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돌연 현암의 눈에 윤영이 말했던 어둡고 붉은 동굴의 광경이 들어왔다. 저 아래에 줄다리가 있고, 그 위를 달리고 있는 윤영의 모습도 보였다.
‘시작이구나.’
현암은 허공에 몸을 숨긴 채 윤영의 뒤를 따라갔다. 꿈은 의식 의 세계이므로 상상하는 것이 모두 가능하다. 단, 꿈을 꾸고 있 는 사람 자신은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므로 마 음대로 자기 의도를 발휘하지 못할 뿐이다. 동몽주는 타인의 꿈 을 볼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꿈속에서 평상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노랫소리. 아니, 노랫소리 비슷한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윤영 이 말한 대로였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겹겹이 장막이 둘러쳐진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현암 은 곡조를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다.
아래쪽의 윤영은 전에 말했던 대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윤영이 자리에 멈추어 섰다. 갑자기 뒤에서 핏빛 해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윤영이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 이 안쓰러워서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윤영에게 다가가려고 하다 가 간신히 준후의 말을 상기하고는 얼른 멈추었다.
줄다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윤영은 기를 쓰고 밖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가는 떨어져 내렸다.
현암은 떨어지는 윤영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떨어지고 있는 윤영과 저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또 하나의 윤영이 있었다. 또 한 명의 윤영이라니……. 현 암은 의외의 광경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윤영은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윤영의 머리를 잡았다. 위로 올라가던 윤영의 몸이 찢어져 나갔다. 찢긴 몸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윤영 씨가 본 것이 저거였구나. 그래서 자기 몸이 찢어진 걸 로 착각했군! 그럼 저게 아까의 그 기운?’
현암은 의식을 조종해 눈부시게 흰 빛을 발하는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거대한 검은 손이 떨어진 윤영을 받쳐 들고 있었다. 하반신만 떨어진 것 같았는데 부서진 몸이 거의 다 보였다. 그곳에 뒹구는 것은 분명 윤영의 얼굴이었다. 현암은 치를 떨며 산산이 부서진 윤영의 몸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때 위에서 다른 윤영의 비명이 들려왔다.
현암의 의식은 어떤 힘에 밀려 다시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잠에서 깬 윤영은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현암 은 망연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월향은 울지 않았다는 것이 다. 그럼 사악한 기운이 없었다는 말인가?
“뭐라고 설명을 해 봐요! 윤영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할머니가 현암을 다그쳤다.
“말씀드리죠. 저도 완전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꿈의 내용은 대강 감이 잡힙니다.”
현암은 윗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어 갔다.
시각은 세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