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24화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6 : 불의 결말
불의 결말
“뭐, 뭐라구? 승희를?”
현웅 화백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거칠게 날뛰던 염동력도 가라앉아 잠시나마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래, 자네가 그리는 저 그림을 자세히 보게나. 다른 그림들 과는 달라. 비슷하긴 하지만 저건 승희일세, 주희가 아냐!”
현웅 화백은 자신이 그리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려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알겠나, 현웅이 주희가 누구의 몸으로 되살아나려는 건지 이젠 알겠냐고!”
현웅 화백은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흑……. 난 난 어쩌면 좋지? 둘 다 내 딸들….”
갑자기 주희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빠! 아빠!”
현웅 화백이 고개를 들었다.
“오오 주희, 가련한 내 딸……………..”
“아빠……. 절, 절 살려 주세요. 제발요.”
박신부가 벼락같이 외쳤다.
“안 돼, 주희야! 승희는 네 동생이야! 어떻게 동생을 죽이고 살아나려는 거지?”
“아빠, 제가 가련하지도 않나요? 그렇게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제가요.”
“그만둬! 그렇다고 동생을 희생시킬・・・・・・ 윽!”
박 신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느새 현웅 화백이 무서운 눈으로 박 신부를 쏘아보고 있었고, 그가 발동한 염동력 으로 붓 한 자루가 날아와 박 신부의 어깨에 꽂혀 버린 것이다.
“박신부, 간섭 말게. 이건 우리 집안 문제야.”
박 신부는 아픔을 참으며 붓을 뽑아 꾹 쥐었다. 붓은 그대로 으스러졌다.
“세상의 섭리를 거역해선 안 돼! 주님만이 오직 주님만이 사망을 이길 권세를 얻으셨어. 이런 일은 절대로…………….”
다시 유화 나이프 하나가 날아와서 박 신부의 다리에 깊은 상 처를 내며 지나갔다. 박 신부는 신음을 울리며 무릎을 꿇었다. “신부, 당신이 나설 때가 아니야. 아빠, 어서 저를…………….”
현웅 화백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오오, 주희야. 차라리 나를…………….”
“안 돼요. 승희, 승희라야 해요. 그림만 완성하면……………”
“주희야, 걘 네 동생이야. 그건, 그것만은……………”
“아빠, 제게 약속하셨잖아요. 약속한 그림을 모두……………. 박신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현웅 화백을 쏘아보며 외쳤다.
“죽은 딸을 위해 산 딸을 희생할 참인가! 주희, 너 그렇게 해서 라도 살아나고 싶다는거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요. 그러면 아버지의 힘만 주세요. 승희의 그림은 완성시키지 않아도 좋아요.”
현웅 화백의 얼굴이 밝아지며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역시, 역시 착한 내 딸이다.”
박신부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제정신인가! 힘을 준다는 건 자네가 죽는다는 말이네!
주희야, 이번엔 아버지를 죽이고 힘을 얻겠다는 거냐? 힘을 얻어 서 무엇에 쓰려고・・・・・・ 윽!”
한쪽 벽이 갑자기 허물어지며 박 신부의 몸을 덮쳤다. 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나는 가운데 현웅 화백은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오 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저 친구는 이제 잠잠할 거야. 이 힘을 달라는 거냐? 오 냐, 주마, 주고말고.”
“윽! 형, 이건 너무 심해요! 불길이 강해서………….”
새카만 연기를 내뿜으며 붉게 날름거리는 불길을 쳐다보면서 준후가 콜록거렸다. 박 신부가 그림들을 없애기 위해 지른 불이 각종 물감과 기름 같은 인화물에 번져서 지하실은 완전히 불구 덩이였다. 현암은 기공으로 호흡을 줄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가야 해! 신부님과 현웅 화백이 위험해! 그 악령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승희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제발 우리 아버지를 구해 주세요.”
준후의 눈이 밝아졌다. 이상한 기운이 다시금 승희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력한 기운이다. 맞아, 승희 누나는 역시 애염명왕 라가라쟈 의 아바타라가 분명해! 이 힘은 증폭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누나의 덕이었군. 이 힘을 내가 빌린다면…………….’
“승희 누나, 날 도와줘요!”
“어떻게? 내가 뭘 할 수 있지?”
“집중하세요. 제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힘? 내가 어떻게? 무슨 힘을 주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눈을 감고 기원을 하세요. 간절하게요. 잡념이 들어가면 안 돼요!”
“너무 매워서 숨도 쉬기 어려워.”
현암이 승희에게 말을 건넸다.
“기해혈, 아니 단전에 힘을 주고 가부좌를 트세요! 도가 참선 법이니 아마 집중이 잘될 거예요.”
“단전? 가부좌는 또 뭐고요?”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예, 예! 그리고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배 속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엉거주춤 자세를 잡은 승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불길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 왜 이래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것이 분명했다.
“잘 안 돼요! 어색해요!”
현암이 정색을 했다.
“우릴 믿는다면, 그리고 아버님을 구하고 싶다면 해야 합니다.” 지하실에서 무엇인지 무너지는 소리가 불길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박신부는 무너진 돌더미를 헤치고 서둘러 나왔다. 다행히 기도력의 오라로 수호하고 있어서 별 탈은 없었으나, 정신없이 지 나간 몇 분 동안의 일이 궁금했다.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방 안 의 정경이 들어왔다.
현웅 화백이 의자에 맥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잠깐 사이에 나 이를 수십 살이나 먹은 듯 창백한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쪼글쪼글해져서 마치 미라와 같은 형상이 되었고, 손발도 새처 럼 가늘어져, 서글픈 몰골로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현웅, 이 바보야! 어째서 어째서 희생을…………….
현웅의 입에서 가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뭐든……………. 자네, 자네 도…………… 저 애를 탓하지만 말고………… 저 애를 저렇게 만든 이 세…..”
“으흐흑! 이게 주희를 위하는 거냐, 이 멍청아!”
박신부는 현웅의 손목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할 말 이 없었다.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붓이 스치는 듯한, 현웅 화백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 안 돼! 주희, 주희야!”
박신부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 뜬 붓 한 자루가 승희의 초상화를 완성시켜 가고 있었다.
“오, 된다! 역시 애염명왕의 화신이야!”
어느새 승희는 무아경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현암마저도 숨이 막힐 듯한 엄청난 영기가 쏟아져 나와 준후의 몸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암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그, 그렇다면 이분이 애염명왕의 아바타라?”
“예, 형, 굉장해요! 온몸에 힘이 솟구쳐요! 어떤 주문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준후야, 불을 끄려면 도가의 술수, 삼매신수를!”
“예, 알았어요!”
준후가 주문을 외우자 검은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들이 사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암은 넋을 잃고 그 광경 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설상의 술법을 이 세상에서 재현할 수 있다니. 백 년 공력 이 필요한 수법인데, 정말 승희라는 저 여자,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구나!’
“타핫!”
준후가 일갈하면서 양손을 앞으로 뻗자, 모여든 검은 구름이 뻗어 나갔고 사방의 불길이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검은 구름이 흩어지자 근처의 불길이 모두 잡혔다.
“장하다, 준후야!”
“헉헉, 이거 힘든데요.”
그러고 보니 근처의 불은 꺼졌으나 안쪽에서 다시 불이 살아 나고 있었다. 문득 승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헉헉…… 무슨일이죠? 아, 불이 꺼졌네!”
“어서 갑시다. 이만큼 불이 잡힌 것도 어딥니까!”
“안 돼, 주희! 약속이 틀리다! 아버지의 힘을 빼앗아 저 꼴로 만들어 놓고 이젠 동생의 몸마저도 빼앗을 셈이냐?”
방해하지 마, 신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는 승희의 몸이 필요하니까.
“에잇,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
박 신부가 두 손을 모으자 이제까지는 현웅 화백을 생각해서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던 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갔다. 그림은 완성 직전이었다. 한쪽 눈썹만 그리면……….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하게 퍼져 나가는 오라가 초상화 가 그려지는 이젤에 집중되고, 이젤이 바닥에 털썩 넘어지면서 붓이 날아가 벽에 부딪히더니 땅에 굴렀다.
신부, 죽고 싶은가?
“이 사악한 것! 어릴 때, 아니 살아생전의 착한 모습은 어딜 가 고 이런 악귀가 되었……………”
말을 이어 가던 박 신부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혹 시, 혹시・・・・・・・ 박 신부는 정신을 가다듬고 붓끝을 뒤적이고 있는 영의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영사를 행하는 것이었다. 붓이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박 신부의 눈이 떠지며 호랑이가 우는 듯한 노호가 터져 나왔다.
“너! 너는 주희가 아니지? 이 사악한!”
박신부가 그때까지 꺼내지 않았던 성수 뿌리개를 꺼내 들었다. 번쩍이는 은 십자가가 다른 손에 쥐어졌다.
호호호……. 눈치 한번 빠르시군, 이제야 알다니.
이를 가는 박 신부의 눈에서 분노의 눈물이 어른거렸다.
“이런 흉악한 마물! 현웅이의 어버이로서의 정마저 이용해 먹는 이 못된……..”
눈치 없는 영감탱이, 그래도 능력은 쓸 만하더군.
“닥쳐라! 현웅이의 복수다!”
박신부가 움켜쥔 은 십자가에서 성령의 불이 파랗게 이글거 리기 시작했다. 오라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는 빛깔이 연녹색에 서 새파란 빛으로 변해 갔다. 극한의 기도력이었다.
오호, 대단하군!
불안해진 악령이 염력을 이용해 돌덩어리들을 날렸으나, 박 신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부서졌다. 박 신부는 눈물을 뿌리며, 평소와 다른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하늘에 계신 주이시여!”
악!
악령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박신부의 힘에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듯했다.
“그대 왕국의 양들을 보살피시어……..”
불길에 달아오른 벽이며 천장에 금이 가면서 잔돌과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바닥마저도 엄청난 힘으로 몹시 흔들리고 있 었다.
“사악함으로부터 구원하옵시고………….”
크아아!
악령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갑자기 현웅 화백이 벌떡 일어섰다. 박 신부는 깜짝 놀라 기도를 외던 것을 중단하고 현웅 화백에게 물었다.
“현웅이 괜찮은가?”
현웅의 눈은 여전히 힘없이 풀려 있었다. 악령이 염동력을 이 용해서 현웅의 정신을 흐트러뜨린 것이 분명했다.
“네, 네놈이 끝까지!”
분노로 얼굴을 돌리는 박 신부의 눈에 초상화의 마지막 부분 을 그리는 붓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 된다!”
마지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승희가 풀썩 쓰러졌다. 현암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승희 씨! 왜…….”
준후가 승희의 얼굴을 짚더니 경악에 찬 소리를 냈다.
“승희 누나의 몸에서, 유체가・・・・・・ 유체가 빠져나갔어요!”
“뭐라고?”
놀란 현암이 문을 쳐다보았다.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박 신부의 힘과는 또 다른 힘이었다.
“신부님이에요! 그리고 다른 힘이…”
현암은 기공을 손에 모아 단번에 문을 박살 냈다. 안의 광경 은 차마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박 신부가 눈물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엄청난 오라를 뿜어 대고 있었다. 오라는 허공의 한 점에 집중되어 뭉클거리며 형상을 갖추어 가는 거대한 영을 안간힘을 다해서 붙잡고 있었다. 그 영은 아직 뚜렷한 형체가 보이지는 않 았으나, 전신이 붉고 여섯 개의 팔과 세 개의 번쩍이는 눈을 갖 추고 있었다.
현암의 입이 딱 벌어지고 있는데 준후가 외쳤다.
“라가라쟈 애염명왕 라가라쟈의 현신이………… 누군가 때문에 승희 누나의 몸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어요.”
“준후야, 현암 군! 어서 그림, 그림을! 이 악령은 승희의 몸에 있는 라가라쟈의 힘을 가지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거야, 어서!” 박신부가 힘겹게 말을 잇기도 전에 준후가 부적들을 허공에 휙 뿌리며 가부좌를 틀고 수인을 어지럽게 교차시키며 앉았다.
“만부원진! 부적들아, 라쟈를, 라쟈를 진정시켜라!”
허공으로 총총 떠오르는 부적들은 라가라쟈 영 주위에 붙어 박 신부의 오라와 합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흐를수 록 둘의 능력만으로는 애염명왕이라는 엄청난 힘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다.
현암은 그림을 살폈다. 그림 안에는 승희의 얼굴, 아니 꿈틀거 리며 추한 몰골로 변해 가는 악귀의 얼굴이 꿈틀대고 있었다. 현 웅 화백에게서 앗은 염동력으로 빗발 같은 잡동사니가 현암의 몸에 집중되어 거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방해하지 마라. 이를 위해, 라가라쟈의 힘을 차지하기 위해 극심한 고통과 번민 속에서 여덟 영을 죽게 하여 제물로 바치고, 초능력을 지닌 화가에게까지 필생의 영력을 쏟아부은 그림을 그리게 했다. 거의 완성 된 계획을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네놈의 욕심은 지옥에나 떨어져서 채워라!”
현암이 월향을 뽑아 들고 노호성을 질렀다. 검기가 네 자를 뻗 어 허공을 가르자 날아오던 잡동사니들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받아라!”
현암의 몸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검과 일체가 된 듯 그림을 향 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붉은 물체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현암은 그대로 튕겨 나가 반대편 벽에 부딪히고는 데굴데굴 굴렀다. 현암은 선혈을 한 모금 뿜어내고는 다시 눈을 들었다. 바닥에는 부 적이 어지럽게 뒹굴었고, 박 신부와 준후가 간신히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라가라가라의 현신이…………….”
두 퇴마사의 영력을 뿌리친 라가라쟈의 붉은 몸체가 그림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정체를 드러낸 사악한 얼굴 이 그림 속에서 웃어 대고 있었다.
호호호……. 이제 나를 막을 자, 아무도 없다!
“개소리 마라!”
현암이 피를 한 움큼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신부님, 준후야! 퇴마진, 퇴마진을 펼쳐야!”
“현암군, 지금 자넨 그럴 상태가 아니네.”
“죽어도 좋습니다! 저놈이 그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면 세상 이 위험합니다!”
현암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어 손등을 깨물고 기공 을 모았다. 박 신부의 몸에서도 오라가 뻗어 나가고 준후의 몸에 서도 흰 기운이 솟아올랐다. 이미 미라같이 되어 버린 현웅 화백 의 몸이 힘겹게 그림 뒤로 기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이시여, 어떤 하늘이라도 좋습니다. 이 더러운 세상이나마 구원하기 위해 힘을 주소서!’
셋은 죽을 각오로 합진(合)을 펼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으 로 애염명왕 같은 거대한 신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 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해야 했다.
현암이 몸을 날렸다. 준후의 손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다섯 줄기 오행의 번개가 솟아 현암의 손에 들린 월향의 끝에 맺히고, 박 신부의 오라가 팽창하여 현암의 뒤를 받쳤다. 그림 속으로 아 직 채 다 들어가지 않은 애염명왕 라가라쟈의 여섯 손이 악령의 조종을 받아 한데 모아져서 빛살처럼 날아오는 현암의 검 끝을 맞받아쳤다.
감히 신에게 도전을・・・・・・ 으윽!
그림의 악령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방심한 사이 현웅 화 백의 깡마른 손이 그림의 한 귀퉁이를 움켜쥐어 찢어 버렸고 그 러자 승희도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림 속 악령이 공포와 경악으 로 눈을 부릅떴다. 라가라쟈의 현신은 그림의 주술이 깨어지자 순식간에 승희의 몸으로 돌아가 버렸다.
크아아, 안 돼!
쏘아져 오는 퇴마사들의 합력과 악령이 묶여 있는 그림 사이 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이 엄청난 힘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현암의 눈에 언뜻 깡마른 현웅 화백의 웃는 얼굴이 보이 는 듯했다. 현암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검 끝을 현웅 화백에게서 떨어지게 하려 애썼다.
빛줄기가 햇살처럼 사방에 뻗치고 지하실을 가로막은 벽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넓은 지하실 전체에 엄청난 충격파가 퍼졌다. 세 퇴마사의 합력은 그림에 작렬하여 엄청난 불길을 사방에 뿌리며 지하실 벽을 차례로 부순 데 이어 흙과 축대를 무너뜨리 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축대의 바깥쪽은 마치 폭탄이 작렬하듯 터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현암의 눈 속에서 마지막 웃음을 띤 현웅 화백의 얼굴과 일그러진 그림 속의 악령, 박 신부, 준후, 승 희, 그리고 멀리 현아의 얼굴까지 한데 섞여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러고는 깜깜해졌다.
소방대와 언덕 아래의 동네 사람들, 불구경을 나온 사람들에 다가 의문의 변사체를 조사하러 온 사람들은 난데없이 폭발이 일어나며 한 남자의 몸이 튀어나오자 기겁을 했다. 그 뒤를 이어 하도 먼지를 뒤집어써서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신부와 아이, 무엇을 안은 여자 한 명이 돌무더기들을 비집고 구멍에서 달려 나오자, 와하고 도망쳐 버렸다. 구멍에서 나온 셋은 밖에 뒹굴던 남자를 들쳐 업고 홀연히 사라졌다. 소방대가 갖은 애를 써 보았 으나 타오르는 불길은 아무리 해도 잡히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불길은 벽돌 하나 남기지 않고 집을 태우고 급기 야 집 전체를 무너뜨렸다. 경찰은 현웅 화백의 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사고가 일어나 안에 있던 사람과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불에 타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후 사고가 있던 날,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거나 귀신이 날뛰었다는 소문, 변압기가 차례로 폭발하며 귀신이 날아다녔다 는 소문이 돌았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이 뇌리에서 그 사건은 금방 잊혀 갔다.
승희는 묘에 얼굴을 묻고 슬프게 울었다. 그 뒤에서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깁스를 풀지 않아 미라나 다를 바 없는 현암이 우 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현웅 화백의 일, 너무 안됐어요. 딸을 잃고 자신의 힘도 모두 악령에게 잃고, 결국 그분이 목숨을 건 덕분에 악령을 퇴치하기 는 했지만…………….”
현암이 중얼거렸다.
“그 악령은 대체 어떤 놈이었을까요?”
준후가 묻자 박 신부가 먼산을 보며 말했다.
“어디에나 있는, 결국은 인간의 욕심에서 유래된 것들이지. 어지러운 세상의 창조물이기도 하고…..”
현암이 탄식조로 말했다.
“도대체 우린 누굴 위해서 싸우는 거죠? 어지러운 세상은 마를 만들어 내고 우린 그 마를 제압하려고 싸우고………….”
“난들 알겠나? 하지만 우린 선을 위해 싸우는 거지. 아니, 꼭 선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은…….”
준후가 끼어들었다.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래, 맞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셋의 시선이 서럽게 울고 있는 승희의 뒷모습으로 모아졌다. 이럴 때면 언제나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지난날 받았던 고통의 기억이 남긴 상처가 새삼 느껴지곤 했다.
승희는 자신이 지닌 힘을 보태어 세 사람과 행동을 함께하기 로 결심을 밝혔다. 박 신부는 예전에 해동밀교에서 들었던 남방 신인의 예언을 떠올렸다.
저녁노을이 곱게 지고 있었다.
셋. 아니, 이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운명적으로 합류하게 된 승희까지 넷은 발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악과 마가 들끓고 있는 세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