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25화 태극기공 1 : 두 번째 구원
두 번째 구원
시리도록 맑은 여름날이다.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었 고, 이따금 지나는 산들바람도 열기를 식히지 못하겠다는 듯 슬 며시 더위를 머금고 물러갔다.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일어나 풍 경을 가물거리게 만들고, 길게 끄는 매미 소리가 지루하고 나른 한 느낌을 더했다. 간헐적으로 부는 남풍에 실려 넓은 나무 잎사 귀들이 신나게 펄럭이다가는 다시 잠잠해지곤 했다. 그때마다 벌레 먹은 잎사귀가 떨어져 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청년의 등을 덮었다.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청년의 허리는 뒤로 꺾여 있었다. 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송충이 한 마리가 비슷 하게 몸을 꼬았다. 청년의 왼팔은 누가 붙들고 있기라도 한 것처 럼 등 뒤로 비틀린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리도 이상하게 꼬여 있었다. 청년은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을 반쯤 땅에 파묻고 있었고, 얼굴빛도 새카맸다.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청년이 얼굴을 처박고 있는 자리에는 피가 고여 작은 웅덩이를 이루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반사했다. 청년의 몸 이 한차례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가고 있 었다. 청년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 두 줄기의 궤적을 그 리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아,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송충이가 몸을 비틀던 것을 멈추고 다시 기기 시작했다. 서서 히 굳어 가는 청년의 몸을 나무둥치로 생각한 양, 송충이는 겁 없이 청년의 얼굴 쪽으로 기어갔다.
‘미안하다, 현아야.’
청년의 머릿속은 점점 컴컴해지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두서없이 뒤섞이며 파노라마를 이루고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유 독 커다란 음성, 마치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걸걸하고 우렁찬 음성이 뇌리를 울렸다.
네 이놈! 이런 곳에 뭐 찾아먹을 게 있다고 육갑을 떠는 거냐? 원더럽게도 재수 없는 놈이구나!
그분이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일 년 전에 지금과 같은 꼴로 죽어갔을 것이다.
재수도 더럽구먼! 차라리 똥을 밟는 게 낫지. 다 죽어가는 쓸모없는 놈을 구해 줘야 하다니! 한빈아, 한빈아! 너는 왜 편할 날이 없는 게냐?
한빈 거사. 일 년 전에 지금처럼 몸이 뒤틀려 죽어 가던 나를 발견하고 구해 주신 분. 말은 거칠어도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스 하셨던 분…….
-네이놈! 이 태극기공은 어디서 훔쳤느냐? 쥐뿔도 모르는 놈이 이런 상고의 비급을 수련하다니! 차라리 섶을 지고 불에 뛰 어들거라. 이 육실할 놈아!
태극기공. 현아의 복수를 위해서 나는 어릴 적부터 기공을 수련했던 도관의 비밀 서재에서 그 책을 움켜쥐고 나왔다. 그리 고 무작정 산에 틀어박혀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미타불. 이런 곳에 사람이 있다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을 희미하게 울렸다. 송충이가 얼굴 위를 기어오르는데도 감촉이 없었다.
청년의 몸이 위로 들려 올라갔다. 그 바람에 얼굴에 붙어 있던 송충이가 떨어졌다. 뒤로 뒤틀린 청년의 왼팔을 누가 앞으로 휙 돌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몸에서 고통의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몸의 마디마디가 엄청나게 아파왔다.
“우와!”
현암은 시커먼 핏덩이를 토했다.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지난날의 일들이 마구 뒤섞여 회오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놈. 이걸 보겠느냐? 전설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검기라는 것이다.
호탕하게 웃어 대는 시뻘건 얼굴의 이인 한빈 거사・・・・・・ 그가 든 칼에서 파란 기운이 싸늘하게 어렸다. 칼끝에 일렁이는 푸른 빛이 시퍼런 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오빠!
파란물이었다. 살아 있는 듯한 파란 물이 현아의 몸을 감쌌 다. 현아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호수처럼 맑고 깊던 두 눈 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현암은 또다시 시커먼 피를 토해 냈다. 무엇인지 현암의 등에 철썩 붙더니 강력한 힘이 현암의 등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이 후끈해지면서 뜨거운 것이 내장을 훑고 위로 솟구치려 했다. 그러나 그 힘은 다 올라가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부딪혀 맴 을 돌았다. 엄청난 고통이 전신에 퍼졌다. 지금 자신의 몸에 무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래. 이와 비슷한 고통을 전에도 겪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를 살리려 하고 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제대로 해석조차 하지 못하는 태극 기공을 멋대로 수련하려다가 몸이 뒤틀리고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 일이 있었다. 한빈 거사는 그런 자신의 몸에 거대한 공을 들여 현암으로서는 영문 모를 수백 대의 주먹질을 했고, 그럼으로 써 간신히 현암의 몸을 풀었다. 그러나 상단으로 가는 혈도가 완전히 뒤틀려 버렸기 때문에 현암은 앞으로 외공만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한빈 거사는 현암에게 왜 이런 일에 뛰어들었느냐 고 물었다. 처음에 현암은 다만 복수를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한 빈 거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리고 현암을 윽박지르면서 복수 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에 대한 인과응보의 형벌 또한 가혹 한 것이라며 나무랐다. 한빈 거사에게 숨겨진 막강한 능력을 짐 작한 현암은 복수심을 숨기고 한빈 거사의 가르침을 요청했다. 현암의 몸에서 다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몸 안 으로 힘이 봇물처럼 밀려들어 이대로 가다가는 터져 버릴 것 같 았다. 현암의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등에서 밀려오는 힘에 저항하기 위해 몸을 뒤틀려 했으나, 뒤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 리가 현암의 동작을 제지했다.
“가만히 있게나. 그러지 않으면 위험하네.”
목소리는 은은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엄청난 힘을 쓰고 있을 때 나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현암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빈 거사는 현암의 마음속에서 복수심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번 거사는 꾸준히 현암을 설득하려 고 애썼다. 물론 거침없는 욕설을 통해서이긴 했지만 한빈 거사 가 현암에게 시키는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 훈련이었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버티기 어려운 훈련들을 현암은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러한 현암의 근성에 한빈 거사도 고개를 내두르곤 했다.
이놈아, 네놈은 전혀 자질이 없어! 둔하디둔하고 혈도까지 뒤틀려 버린 놈이야! 그런데 왜 죽기를 무릅쓰고 계속하려 드는 거냐? 힘들지도 않느냐?
한빈 거사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 번 씩 찾아와 수련의 성과를 봐 주고, 올 때마다 희귀한 무술과 수 련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한빈 거사가 가르쳐 준 파사신검, 사자후, 부동심결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룰 수가 없었다. 현암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네는 태극기공의 수련인이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암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 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으나 그런 것을 물어보기에는 고통이 너무 심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주화입마되면 온몸의 혈도가 비틀리고 몸이 꼬이면서 마비되 는 게 태극기공의 특질이지. 선재, 선재라…………….”
목소리가 끊기더니 등 뒤의 혈도 부위에 타타탁 하고 빠른 타격이 왔다. 그러나 현암의 몸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미타불, 혈도가 완전히 기능을 잃었는데 어떻게 숨이 붙어 있었을꼬? 이상한 일이군.”
등을 가격하는 손놀림이 현암의 요혈을 훑으면서 아래로 향해 갔다. 요추 부근의 한 혈도에 타격이 오자 순간적으로 시원한 기분이 들면서 현암은 몸을 움찔했다. 뒤에서 의아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이하다. 이상한 일이로다. 아미타불.”
중얼거리던 소리가 잠시 끊겼다가 이내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기해혈로 자네 몸속의 모든 기운을 모으게 온 힘을, 전력을 다해서 잡념을 가지면 안 되네!”
기해혈에 기운을 모으라고? 내게 그런 힘이 공력이 남아 있을 까? 파사신검, 사자후∙∙∙∙∙∙. 한빈 거사가 가르쳐 준 무공들은 내 공의 힘이 없으면 실현시킬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번 거사께서 는 미리 계획해 둔 바가 있었다. 우선 수법만을 가르쳐 주고, 마 음속에 남아 있는 복수심이 없어진 다음 차차 내공을 쌓게끔 유 도한 것이다. 그렇게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던 최고의 무공들을 가르쳐 주었다. 공력이 없으면 결코 발휘될 수 없는 수법만을 그러나 공력이란 하루아침에 맺어지는 게 아니다. 십 년이고 이 십 년이고 수련을 거듭해야 그만한 힘을 얻을까 말까 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수련만 하라고? 현아는 어떻게 하고? 물론 한빈 거 사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내 동생 현아를 앗아간 그놈에게 복수도 못했는데 한가하게 수련만 하 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복수를 하려면 살아나야 한다. 무슨 수가 있더라도 살아나야 한다. 기해혈? 기해혈에 기운을 모으라고? 내게 공력이 있든 없든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몸 안에 떠도는 폭풍 같은 기운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여라, 제발 모여 달라고………….
“이야아!”
현암의 목에서 고통에 짓눌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 에 폭풍처럼 떠돌던 기운이 뜨겁게 변하면서 현암의 기해혈을 향해 몰아쳐 갔다. 기운들은 서로 부딪히면서 태풍의 핵처럼 단 단하게 뭉치고 있었다. 배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느낌 을 받았다. 현암은 그것이 바로 공력이란 것을 알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공력・・・・・・・ 있지도 않은 공 력으로 무리하게 검술을 행하려다가 이 꼴이 되지 않았던가. 그 런데 공력이 갑자기 어디서 생겼다는 말인가? 현암은 궁금하게 생각한 것도 잠시뿐, 엄청난 기운들이 엉키면서 현암의 몸은 불 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앞이 흐릿해지다가 환하게 밝아 지더니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