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10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3 : 수정의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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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10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3 : 수정의 증발


수정의 증발

연호와 연희는 극도로 피곤했는지 곧바로 잠이 들었다가 수 정이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바람에 잠을 깼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셋이 같이 지냈다. 뻐꾸기시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때를 맞춰 째깍거리며 가고 있었다. 수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진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하루의 낮이 지 나갔다.

어둠이 짙어 오자 연호와 연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연희 는 수정과 같이 자기로 했고 연호는 마루 소파에서 자면서 만약 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둘 다 머리맡에 전화기를 놓 고 여차하면 현암이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하기 위해 만반의 준 비를 했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수정의 뒤를 따라다니던 연희 는 밤이 되자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수정을 자신의 침대에 눕히 고재우다가 옷까지 그대로 입은 채 깜박 잠이 들었다.

품에 안겨 있던 수정이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연희는 잠을 깼 다. 눈을 번쩍 떠 봤지만 사방은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연희는 수정의 등을 다독거려 주고는 눈을 감았다.

남자, 유체, 도대체 알 수 없는 일들………….

연희는 다시 눈을 뜨고 자고 있는 수정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유체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수정의 숨소리가 평온하게 느껴졌다. 연희는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옆으로 돌리려다가 그만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방의 반대편 귀퉁이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조용히 자신과 수정 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남자와 연 희는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남자의 모습은 반투명하게 반대쪽 이 비쳐 보이는 것을 빼면 거의 보통 사람과 같았다. 살짝 미소 를 띠고 있는 입, 그리고 장난기가 어린 크게 뜬 눈이 오히려 연 희의 공포감을 부추겼다.

연희는 속으로 다짐했다. 침착하자, 침착.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연희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는 오히려 미소를 띠며 천천히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대었다. 마치 조용히 하 라는 듯. 그러고는 수정을 가리키고는 설레설레 양손을 저었다. 그 행동이 퍽이나 코믹해 보였으나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마루 에 연호가 있고 머리맡에는 전화가 있었으나 남자도 바로 두어 발짝 너머에 있었다.

소리 지르면 안 돼, 하며 연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았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 도둑이 들었을 때 바로 소리를 지 르면 도둑은 강도로 변한다. 도둑이 나가려고 반쯤 나섰을 때 소 리를 지르면 그대로 달아난다고 한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안 된 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연희는 슬며시 손을 움직여서 머리의 수화기를 들려 했다.

속으로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남 자의 눈은 연희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남자의 시선을 연희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연희는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연희는 원 망과 분노, 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 었다. 남자가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순간, 연희는 다른 한켠에 자리 잡은 남자에 대한 무서운 생각이 점점 옅어져 가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연희는 계속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주눅이 든 표 정을 지으면서 몸을 오그렸다. 아니, 몸을 오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난쟁이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은 조그맣게 변해서 수정 정도의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연희는 그 와중에 도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씨익 미소를 짓더니 천장에 닿을 듯 커지는 것이었다. 연희는 깜짝 놀 라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이상하게 소리 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본래의 크기로 돌아오더니 장난기가 철철 흐르는 표정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 들었다. 작별 인사라고 연희는 생각했다. 그러더니 남자의 모습 은 푸른 불꽃으로 변하면서 꺼지듯이 사라져갔다.

한참 동안이나 연희는 망연하게 남자가 있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무섭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아아, 저건 귀신이 분 명해.

잠시나마 귀신이 그 남자와 같이 장난을 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가 그랬을까? 아니, 내가 꿈을 꾼 것 이 아닐까?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아냐! 연희는 후다닥 수화기 를 들고 번호를 눌러 댔다. 번호의 마지막 숫자를 누르려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과 장난을 쳤다고? 그리고 자신이 째려보니 바이바이를 하면서 사라졌다 고? 연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왠지 모르 게 연희의 뇌리에 남자의 웃는 모습이 엇갈려 지나갔다. 연희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수정의 유체를 빼 앗아가려던 자가 저렇게 장난만 치고 가 버렸을 리가 없다. 이 건 꿈일 것이다. 그래, 꿈…………. 헛것을 본 거겠지. 이상하게 피 곤해졌다. 연희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잠에 빠져들었다. 마루에 서 뻐꾸기시계 우는 소리가 연희의 귓전에 조그맣게 들려왔다. 마치 산속 깊은 곳에서 우는 것처럼………….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간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수정은 여전히 깔깔거리면서 뛰어다녔다. 연호도 일 때문에 나 갔다. 연호에게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날 겪은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일이었으니까.

현암에게도 아직 연락이 없었다.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연희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당분간 이대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며칠이 지났다. 현암은 연희의 집에 다시 방문한다는 것이 지 쑥스러웠지만 준후의 부적을 가지고 찾아가기로 했다. 준후가 만들어 준 부적은 몽몽결의 구절을 응용하여 만든 것 으로 몸에서 유체가 벗어나지 않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이라 했다. 현암도 희미하게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연희는 지방에 계신 부모님에게 내려가 있어서 연호가 현암을 맞이했다. 현암은 별일이 없느냐고 물었고 연호는 요즈음은 별 다른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수정도 아무 일 없이 잘 놀고 학 교에 다니고 있었다. 연호는 현암에게 며칠 내에 수정의 부모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므로 수정이 돌아갈 것이라고 했고, 현암은 준후가 만들어 준 부적을 조그맣게 접어서 수정에게 꼭 지니고 다니게 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집을 나섰다. 연호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연희의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가 눈앞에 아 른거리며 떠올랐으나 잠시뿐이었다.

며칠 동안 현암은 연희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접어 둔 채 박 신부를 간호하는 한편, 공력을 수련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연호 에게서 아무 일 없다는 전화가 한 번 걸려 왔고 승희를 시켜서 수정에 대해 투시를 해 보라고 했으나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다 고 했다. 미심쩍은 면은 있었으나 유체가 파괴되자 겁을 집어먹 거나 아니면 타격을 입어서 포기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현암은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박 신부와도 상의를 했는데 박 신부의 말 에 의하면 현암이 파괴한 것은 유체라기보다는 염체에 가까운 것일 거라며 그런 염체를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의를 늦추지 말라고 당부했다. 준후는 현암에게 안명 부를 몇 개 만들어 주었다. 지난번처럼 유체를 보느라고 괜한 공 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암이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은지 사오일쯤 지나서였다. 수련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현암 씨?”

수화기에서 울리는 것은 연희의 목소리였다. 다급했는지 목소리가 무척 떨리고 있었다.

“예. 연희 씨?”

“맞아요. 아아! 어떻게 하나요………….”

연희가 말을 하다 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요? 말씀을 해 주세요.”

“수정이가 내일이면 엄마 아빠에게 가는데…………….”

수정에게 분명 부적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무슨 일이 생긴 것 일까? 현암의 머릿속이 걷잡을 수 없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수정이요? 천천히 말씀하세요. 무슨 일입니까?”

“수정이가 아아… 그 유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도와주 세요! 제발요!”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현암은 조금만 침착하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태극패와 월향검, 그 리고 준후가 만들어 준 안명부를 챙겨 들고 후다닥 일어섰다. 저 녁 무렵의 일이었다. 창밖은 금방이라도 비가 몰아쳐 내릴 듯 하 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덮여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준후와 승희 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으나 하필 모두 박 신부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떠나고 없었다.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는 숙소를 나 섰다.

연희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 멍한 상태로 문을 열어 주었다. 현암이 다짜고짜 물었다.

“수정이가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일입니까?”


연희는 말없이 마루의 큰 유리창을 가리켰다. 유리창은 산산 이 박살이 나 있었고 커튼은 비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창밖에 서는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폭우라도 쏟아부을 듯 어두컴컴해지 기 시작했다.

현암은 대강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정은 저번처럼 유체에 의해 납치된 것이 틀림없었다.

“부적은요? 수정이가 갖고 있지 않았습니까?”

“모, 모르겠어요. 아아, 모두 제 탓, 제 탓이에요.”

현암은 준후의 부적이 무력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암은 수정의 방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준후가 만들어 준 부적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수정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줄 달 린 작은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연호가 부적을 주머 니에 넣어서 수정의 목에 걸어 주었던 것 같았고, 수정이 오늘은 그것을 깜박 잊고 걸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현암은 안타깝게 고 개를 저으면서 부적이 든 주머니를 손에 들었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흐흐흑.”

연희는 참고 있었던 울음을 터뜨리면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제 탓이에요. 그 남자 그 남자가…..”

“예? 그 남자라뇨?”

“제가 속은 거예요. 하지만 믿었는데…………”

현암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믿다니?

“말씀하세요, 연희 씨! 무슨 말입니까?”

연희는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떠듬떠듬 연희의 말이 이어졌다.

종잡을 수 없는 연희의 이야기에 현암은 갈피를 잡기 어려웠 다. 화제를 바꾸기 위해 현암은 연호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연호는 부모님을 뵈러 밤차를 타고 있을 시각이라고 했다. 연희 의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현암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번져 갔 다. 현암이 찾아왔던 바로 다음 날부터 이름 모를 남자는 매일 밤 연희의 방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그 남자가 제 방 구석에 서서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그 눈빛. 그런데…….”

그러나 그 남자는 연희나 수정을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가만 히 서서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다가 연희가 잠에 서 깨어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리면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현암 씨에게 전화를 드리려고 했어요. 그 러나 그 남자가 별다른 해를 끼친 것도 없고 해서 저 혼자의 착 각이나 꿈인 것으로 믿었죠. 아아……………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 지…….”

며칠 동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연희는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무섭다기보다는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희는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제발 사라져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측은한 모습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미워하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행여 수정이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말이죠. 말도 나눠 봤지만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제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까지 했어요.”

현암은 말없이 연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경악 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 아가씨가 제정신인가. 말이 몇 번이 나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일단은 연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 로 마음먹었다. 현암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민이라뇨?”

“그 남자의 과거요. 그런데도 이런 짓을 하다니……. 그 말은 모두 거짓이었을까요? 전부 지어낸 말이었다는 건가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그 남자의 어린 시절, 그리고 불행 했던 과거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절실했다. 나면서부터 남과 다 른 능력을 타고난 사람, 그러나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남에게 따돌림당하고 배척받는 사람, 현암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서커스 의 동물을 보듯 자신의 공력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 그리고 자 신의 일을 할 때 행여 노출될까 싶어 얼마나 조심을 해야만 했던 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대적하는 영들보다도 그 능력을 본 사람들의 무분별한 호기심과 더 힘겹게 싸워야 했고, 자신이 구 해준 사람들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피해야 했다. 그건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얻은 능력 때문에 파문까지 당하고 배척받았던 박 신부,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같이 지내 보지도 못하고, 적응하지도 못해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게 된 준후,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 때문에 오히려 몸조심을 해야 하는 승희. 연희 가 말하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몸에서 유체를 자유로이 분리시키고 그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 그로 인해 그 남자는 어린 시절에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서까 지 버림을 받게 되어 해외로 강제 입양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능력도 발휘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엾은 사람이에요. 잠이 들어 꿈만 꾸어도 그 사람의 능력은 저절로 발휘된다는 거예요.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저절로 찾아가 게 되고, 그래서 저한테 오게 되었다고 하구요.”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남자의 힘은 자 신의 의지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단계에 온 것이 분명했다.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이고, 힘을 사용하다 보면 힘에 오히려 자신이 얽매이게 되는 법이다.

“아아! 가련했어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남 자는 솔직히 내게 말했죠. 나를 매일 찾는 것은 이제 자신도 어 찌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구요. 그래서・・・・・・ 그래서 그 남자는 매 일 밤마다 내게 왔어요. 매일 자정만 되면………..”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아가씨는 어느새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세상에! 그리고 연희도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결국 수정이를 데려갔습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했는데, 절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도 그 남자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아! 모르겠어요. 그 남자는 원래 블랙서클의 명령으로 자 질이 있는 아이들을…………….”

연희의 말을 듣던 도중에 갑자기 현암은 흠칫하면서 몸을 떨 었다. 블랙서클? 그건 지난번 좀비들을 부리던 호웅간이 내뱉은 말이 아니던가?

“잠깐만요, 연희 씨! 그자가 블랙서클이라는 말을 했단 말입 니까? 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그냥 그 이야기만 했어요. 분명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남 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을 했는데………….”

“아아, 연희 씨. 블랙서클, 저도 그 단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 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외국까지 나가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자가 블랙서클에 속해 있는 자라니!”

“블랙서클이 어떤 것인지 아세요? 오, 물론 저도 모릅니다. 그 러나 지난번에 그곳의 주술사와 한 번 싸운 적이 있습니다. 아 아! 이거 정말 큰일이군요.”

연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현암은 불같이 성질이 달아올랐다. 지금 사건을 일으키는 남자의 영적 능력도 엄청난 것인데 그마저도 블랙서클과 연관이 있다니!

“그 남자는 분명 악인입니다. 간사한 말로 연희 씨를 속인 것 이 틀림없………….”

“아니에요!”

연희가 고함을 질렀다. 현암은 말을 하다 말고 양미간을 찡그렸다.

“아니에요. 그 사람의 눈은 맑았어요.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절대로………………”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자신이 연희의 믿음에 눌리 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의 눈이 눈물에 젖어 빛났다. 현 암 자신의 눈매는 원래가 날카로워 사람들에게 쏘는 듯한 느낌 을 준다고 해서 웬만해서는 남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연 희의 눈과 마주하자 자신의 시선이 그대로 빨려드는 기분이 들 었다. 냉랭한 현암마저도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을 만큼 연희 눈에는 선량함과 깊은 안온함이 있었다.

“믿어요. 분명히 나는, 나는…….”

현암은 마음을 다잡고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현실을 직시하세요. 수정이는 분명 유체에게 통째로 들려서 납치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연희는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현암은 가 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할 정도로 선량함 이 배어 나오고 있어서 바위 같은 현암도 가슴이 뭉클했다. ‘세상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구나. 이렇게 선량하고 똑똑한 아가씨가……………..

그러면서 현암은 이런 여자를 속인 그자를 용서할 수 없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현암은 승희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자신이 박 신부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제 친구의 힘을 빌면 됩니다. 반드시 수정이를 데려오겠습니다.”

“잠시만요!”

“예?”

현암이 돌아보자 어떤 결심을 한 듯 싸늘한 기운이 어린 연희 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그 남자가 있는 곳을 알아요.”

현암은 연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희는 애써 냉정한 표정 을 하고 있었으나 고통의 기색이 역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자신의 믿음이 배신당한 데 대한 복수의 감정 같은 게 아니 었다. 아마도 수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를 납치하면서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밝힌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알았죠?”

“그 남자가 말했어요. 저와 같이 가요.”

“연희 씨가요? 안 됩니다! 위험해요. 남자의 힘이 어떤지는 보셨지 않습니까?”

“꼭 가고 싶어요. 제발요! 안 그러면 그곳을 알려 주지 않겠어요!”

“그 남자가 정말 그곳에 있을지 확신도 없잖습니까?”

“분명 그곳에 있어요. 틀림없어요!”

연희의 눈이 현암을 향하자 현암은 연희의 말이 맞을 것이라 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연희의 눈빛에서 현암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승희에게 물어보면 정확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준후의 도움 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시간 은 단축할 수 있지만 혼자 싸워야 한다. 아니, 혼자는 아니다. 왼 팔에는 언제나 월향검이 있으니…….

“좋아요, 갑시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현암의 차에 올라탄 다음 길을 묻는 현암에게 방향만 을 손짓으로 일러 줄 뿐 더 이상 울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현 암은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운전을 하면서도 간간이 연희의 표정을 살폈다. 연희의 눈은 슬픔과 결심이 반복되어 묻어나고 있었다. 현암은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저 아가씨는 그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했구나.’

현암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매일 밤 벽을 뚫고 들어오는 유체와의 사랑이라니. 그러나 제아무리 사 람의 마음이란 것이 종잡을 수가 없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납치 하려고 했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서 그렇게 빨 리 연민의 정을 느꼈다는 것이 현암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현암은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기에 바로 옆에 앉 아 있는 연희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서클과 연관이 있다면 분명 악한 일을 꾸미고 있는 자일 텐 데 이런 아가씨가 어쩌다가………………

연희가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자 현암은 정신을 차리고 가리 키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한참 가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머리 를 스쳤다. 거리상으로는 그다지 먼 것 같지 않은데도 연희가 지 시하는 방향은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게 되어 있어서 빙빙 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방향이 맞습니까?”

연희는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연희의 얼굴은 마치 석고 조각마냥 하얘졌고 표정을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빨리 올 수 있는데도 계속 이렇게 비좁은 길로 가는 이유가 뭡니까?”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연희가 조용히 말했다. 현암은 불만스러웠지만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차를 몰았다. 연희는 현암의 얼굴을 힐끗 보더 니 차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길을 괜히 도는 것 같나요? 저를 못 믿나 보군요? 후후후.”

“그런 게 아닙니다. 믿지요. 그런데.”

현암은 연희의 웃음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 웃음은 차갑 다 못해 처절하게 들렸다.

“그래요. 저도 믿어요. 믿고 있지요. 지금도………….’

연희가 말을 끊었다. 현암은 연희의 감정이 이성을 넘어서 위 험할 정도로 증폭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나 지금 자신으 로서는 달리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저도 그 남자가 어디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몰라요. 다만 전 에 한 번 내게 보여 주었어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을 말이에 요. 아주 쓸쓸한 곳이었죠. 그 남자는 나를 믿었던 거예요.”

“보여 주었다고요?”

“그 사람은 못 만들어 내는 것이 없어요. 환영이랄까? 신기루랄까요? 후후후……..”

연희는 메마른 웃음을 짓더니 이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힘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았으면 만날 수도 없었겠지.”

연희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 남자가 만들어 낸 영상 속에서 건물을 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뒷산으로 넘어가는 저녁노을……………”

현암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녁노을?”

저녁노을을 방 안에서 보여 줬다는 말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 저녁노을요. 붉게 넘어가는 저녁노을…………. 나는 보았어 요. 그건 마치…………..”

현암은 혹시 연희의 유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남자와 함께 빠져나간 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그것도 아니 었다. 그 남자는 매일 밤 자정에 연희에게 찾아왔다고 하지 않는 가 노을이 질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유체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연기 같은 것이 방에 퍼지고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비추어졌어요. 자신의 어린 시절, 그리고 기억의 편린들…………….”

연희의 말이 정말이라면 남자는 자신의 유체를 스크린처럼 펼 쳐서 기억을 거기에 투사하는 능력까지 있다는 이야기다. 생각 해 보니 영능력자 중에는 자신이 본 것을 사진 필름에 그대로 찍 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그 남자 정도의 능력 이라면 자신의 유체를 이용하여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 했다. 연희는 지나간 며칠 동안의 추억에 잠기듯 시선을 위로 하 고 중얼거렸다.

“해지는 모습, 무심한 군중들. 그러나 그 안에 아는 사람은 하 나도없었고, 자신이 숨어 있는 건물 너머로 매일같이 오가는 사 람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건 완 전히 바깥의 세상. 자신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사람 은・・・・・・ 그리고 나는………………”

연희의 말을 들으며 현암은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힘을 가진 자의 고독이라고나 할까? 현암도 공감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연 희도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각 나라의 언어에 통달한 언어학의 천재, 백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연희는 조용하지만 무척 까다 롭게 일을 고른다고 했다. 연희가 일을 잘 맡지 않는 습관도 바 로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현암이 연희가 하는 말 을 들으려고 귀를 곤두세웠지만 연희는 냉정을 찾아가는 듯 말을 맺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저 산, 그 부근이에요. 이제는 곧 보일 것 같네 요. 수정이를 구해야 해요.”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산이 검게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낡아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금이 가고 낡은 벽에 박혀 있는 유리창이 깨진 퀭한 창문들이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것 같았다. 연희의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변했고, 그와 반대로 표정은 오히려 이상하게 상기되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산, 어둡죠? 그러나 그때는…………… 아름다웠어요. 저녁노을 과 그리고………….”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연희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의 착잡한 생각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현암은 알 수 있 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좋아하게 된 남자. 그에 대한 마음. 그 리고 귀여운 동생 수정의 납치. 그에 대한 분노, 배신당한 데에 대한 슬픔. 연희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었 고 지금 거의 절정에 다다른 듯싶었다. 현암의 마음은 이 아가씨 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어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선량한 마음을 위해서라도…………….

“저 건물도 한때는 새것이었겠죠? 깨끗하고 흠간 데 없는……………그러나…………….”

현암은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여자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저곳입니까?”

현암은 나직하게 연희에게 물어보았다. 현암도 저곳이 그 남 자가 은신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미 현암은 준후에게서 얻은 안명부를 사용했고 희미한 영기가 텅 비었음 직한 건물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럼에 도 연희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하나 의 승낙을 얻는 것이었다. 연희의 흰 얼굴이 더 이상 희어질 수 없으리만치 희게 변하면서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곳이에요.”

현암은 더 이상 연희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 아 있는 연희를 차에 남겨 둔 채 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빠른 걸 음걸이로 건물에 들어섰다. 현암의 왼팔에서 월향이 조용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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