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12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5 : 그녀를 위하여

랜덤 이미지

퇴마록 세계편 1권 12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5 : 그녀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현암의 몸에서 폭발된 것처럼 솟아 나온 광채에 연희는 얼떨 결에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연희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부동심결의 발휘로 쏟아져 나온 광채는 사방을 가득 메웠고, 달려들던 남자의 유체는 눈사람처럼 그 빛에 휩쓸려 스러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아니면 감추어진 듯 오로지 강력하게 밝은 빛만이 사방을 메웠다.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람에 연희는 눈을 떴다. 연 희의 눈앞에는 남자가 멍하니 허수아비와 같은 몰골로 서 있었 고 열두 개의 분신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 보니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현암이 처음 의 자세대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마냥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목숨 을 걸고 전력을 다해 싸웠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 히 정지해 있었다. 연희는 할 말을 잊었다. 굉장히 밝은 빛이건 만 신기하게도 눈은 부시지 않았다. 연희는 문득 자신이 손에 쥐 고 있었던 닳은 십자가의 감촉을 느꼈다. 연희는 서서히 허수아 비처럼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몸은 삽시간에 오그라 든 것처럼 앙상해져 있었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으나, 그 눈 에는 이미 번뜩이는 분노나 흥분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마치고 난 안도감과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남자의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빗물이 아닌 눈물이라는 것을 연 희는 느낄 수 있었다. 연희의 입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 왔다.

“왜, 왜 이렇게까지……………..”

남자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듯했다. 단 시선만이 조용히, 그러나 몹시 힘들게 연희의 손으로 향했다. 연희의 손에 들려 있는 닳은 십자가로 연희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왜? 도대체 왜?”

현암이 간신히 눈을 떴다. 계속 쏟아져서 내린 비가 현암의 몸 을 식혀 주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현암은 기혈이 들끓어서 혼절했을 것이다. 현암은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이제………… 아이를………… 내놓으시오…….”

연희도 소리쳤다.

“아아! 왜 그랬나요? 그 애를 왜, 도대체 왜!”

남자의 몸이 짚단처럼 허물어지더니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남자의 눈에 스쳐 가는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의 표 정을 연희는 읽을 수 있었다.

“당, 당신이 한 짓이 아니었나요?”

남자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현암도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현암이 앞으로 풀썩 무릎을 꿇으면서 동시에 외쳤다.

“아니, 그러면……”

“케, 케이…… 케이인…………….”

남자의 입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꾸르륵거리면서 흘러나왔다. 연희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냉정을 되찾았다. 연희가 물었다.

“케인 사람 이름인가요?”

남자가 힘없이 눈동자만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연희는 사태를 판단하려 애썼다. 그렇다면 케인이라는 자가 수정을 납치해 간 사람이란 말인가? 이 남자는 여태껏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속해 있는 곳이라면 단 하나……………. 

“블랙서클 사람인가요? 그 사람도 당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남자가 슬프게 허공을 향하면서 눈을 위아래로 떴다 감았다 했다. 연희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제삼의 인물이 있었다는 말인가? 이 남자와 같은 능력을 가진,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 고 있던 사람이? 이 남자는 단순히 예전에 수정을 납치하려 했던 일을 추궁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 모든 것이 오 해였다. 연희는 가슴속에서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아아! 내가 나빴어요.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현암이 힘겹게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독백에 가까운 연희의 말을 듣고 사태를 대강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이제 남자는 말 할 기력도 없는 듯했다. 남자는 현암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마 치 시합에서 깨끗이 진 자가 쑥스럽고 멋쩍어서 웃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현암은 남자의 등에 손을 대고 이를 악물며 마지막 으로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남자의 몸에 밀어 넣었다. 남자의 입 에서 다소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하아…… 그, 그것・・・・・・ 받, 받아…………….”

연희는 남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 다. 연희의 손에 들려 있던 닳은 십자가……………. 남자의 눈은 어린 아이가 친구의 눈을 가릴 때와 같은 장난기와 기대감이 어린 미 소를 머금고 있었다.

“받……을…… 거죠?”

연희는 간신히 미소를 짓고 십자가를 꼭 쥐면서 말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소중히……..”

남자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머리가 빙빙 도 는 것 같았다. 싸움도 싸움이었지만 공력을 있는 대로 운행하여 이미 소진한데다가 그나마 남아 있는 힘을 끝까지 끌어모아 남 자에게 불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수정을 찾아야 했다.

“그러면 수정이는? 누가 그랬는지 말해 주게.”

“케인, 나와 비슷한 자라면 케인밖에…………….”

남자는 말을 잇다 말고 갑자기 놀란 듯 비명 소리를 내며 연 희를 옆으로 휙 잡아당겼다. 현암도 남자의 등 뒤에 있던 참이라 미처 수를 쓰지 못했다. 한 덩어리의 검은 염체가 날아들어 연희 의 옆을 살짝 스치면서 남자의 가슴을 쳤고 남자는 자기의 뒤를 받치고 있던 현암과 한꺼번에 뒤로 주르르륵 밀려났다. 놀란 연 희가 몸을 일으켜서 뒤쪽을 보자, 옥상의 입구로 비쩍 마르고 검은 옷을 입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케……… 케인…………!”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케인이라 불린 외국 남 자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손을 위로 치켜들자 그의 등 뒤로 검은 색 염체들이 무더기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에서 알아 듣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외국어가 흘러나왔다. 현암은 한마디 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연희는 내용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이들은 에스페란토를 쓰고 있었다.

“배신자. 너는 블랙서클의 명령을 어기고 우리가 원하는 아이 들을 모으라는 사명을 저버렸다. 애당초 마스터는 너를 믿지 않 았어. 너의 장난기 많고 소심한 성격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 생각 하시고, 나를 같이 파견하여 감시하게 한 것이지. 후후후. 알겠느냐?”

연희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봇물처럼 떠오르면서 의심스러 웠던 부분들이 영화의 빠른 장면처럼 흘러갔다. 맨 처음 남자가 수정을 놔두고 사라진 후, 수정의 유체를 끌어당겼던 것은 바로 케인의 짓이었던 것이다. 유체를 자유롭게 운용할 줄 아는 사람 이 이 남자뿐이라고 믿은 연희는 남자에게 수정을 왜 데려갔느 냐고 물었으나, 그 남자는 아마도 자신이 처음에 수정을 데려가 려 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비로소 수정을 데려간 것이 케인의 짓으로 밝 혀졌다. 그러나 왜 남자는 현암과 싸우는 것을 피하지 않았을까? 연희가 자신과 대적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자신을 쫓아 버리려 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싸웠단 말인가?

현암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정신을 차 리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모양이었으나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았는 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는 빠른 에스페란토 가 흘러나왔다. 연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들의 억양은 특수하게 단련이 되었는지 속도가 매우 빠르고 악센트가 거의 없어 연희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 네가 애를 납치했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 일 밤 찾아가는 내가 귀찮거나 두려워서 저들이 나를 쫓아내러 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흐흐흐. 네놈의 능력은 마스터도 인정했듯이 나보다도 한 수 위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강한 자들이 매우 많더군. 내내 관찰 했었다. 바보 같은 놈. 그런 엄청난 힘을 쓰잘머리 없는 환영으 로 낭비하질 않나, 장난감 같은 염체들을 만들어 노는 데 쓰질 않나. 너는 스스로 가진 힘을 낭비하는 죄를 지은 거야. 거기다 가 마스터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저 따위 여자에게 홀려서 일을 그르쳐? 흐흐흐. 내 작전은 성공했지. 두 놈이 싸워서 내 손에 모두 죽게 되었으니. 하나는 배신의 대가고, 또 하나는 블랙서클의 진출에 방해가 될 자를 미리 제거하는 것이다. 으하하하핫!”

남자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돌며 눈썹이 위로 쫙 찢어졌다. 

“저 따위・・・・・・ 여자?”

케인은 대꾸하지 않고 흉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검은 염체들을 쏘아 냈고 이를 본 현암이 입술을 깨물고는 월향을 불러 파사신 검 제4식으로 맞섰다.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으나, 그래도 월향 은 귀곡성을 내고 허공에 날카롭게 회오리처럼 돌아서 날아오는 염체들과 부딪쳐 나갔다.

월향의 귀곡성과 함께 검기에 휩쓸린 염체들이 허공에서 불꽃 놀이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나 그중의 몇 개는 세포 분열을 하듯 이 갈라져서 현암에게로 짓쳐들었고 두 가닥의 검은 염체는 연 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희 쪽으로 염체가 뱀처럼 날아가는 것 을 보고는 쓰러져 있는 남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극심한 상처를 입은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현암은 그나마 몸에 남아 있던 진기를 끌어 올려서 염체들을 몸 으로라도 막아내면서 연희 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몸에 부딪 쳐 오는 염체들의 힘은 생각보다도 강했다. 현암은 마음과 달리 연희가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염체들에게 밀려서 우당탕 구 석으로 나가떨어졌다. 월향은 염체의 무리들과 공중전을 벌이느 라 여념이 없었다.

연희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염체들을 쳐다보 았다. 그리고 케인이라는 남자를 계속 응시했다. 케인은 연희가 두려움 없이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왠지 켕기고 부끄 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인정사정없는 케인이 보 통 여자인 연희와 눈이 마주치는 것에 왜 저리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케인의 입에서 이를 가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 

“심연의 눈. 망할, 그래서 저놈도 홀린 거였구나.”

케인이 연희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자 두 가닥의 염체가 아슬아슬하게 연희를 피해 지나갔다. 연희는 케인이 왜 자신의 눈을 피하는지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현암과 남자 둘 다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맞서서 무슨 수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연희의 입에서 에스페란토가 흘러나왔다.

“내 동생을 돌려줘.”

주춤거리던 케인이 자세를 추스르면서 악을 썼다.

“돌려 달라고? 하하핫!”

케인이 소리를 치자 남아 있던 염체들 무리가 일제히 연희에 게 향했다. 쓰러졌던 현암이 간신히 손짓을 하자 월향이 날아왔 다. 일부의 염체들은 월향에 의해 가로막혔으나 나머지 염체들 은 연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현암으로서도 더 쓸 힘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푸른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형상을 한 유체가 기다란 은 선을 이은 채 연희의 앞을 막아섰다. 유체는 날아드는 염체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염체들은 유체의 속으로 삼켜지듯이 흡수되어 갔 다. 케인의 입에서 어억! 하는 의문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희 는 영력이 없어서 자신의 앞을 막아선 유체를 눈으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뭔가 친숙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그건 분명 남자 의 기운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연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번에 나타난 남자의 유체에서는 어딘가 결 연하고 엄숙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아아!”

안명부의 효력이 남아 있는 현암의 눈에는 모든 정황이 또렷 이 보였다. 남자의 몸은 이제 미라같이 빼빼 마른 채 쓰러져 있 었고, 이번에 남자의 몸에서 뻗어 나온 것은 아까처럼 길게 늘어 난 형태의 유체가 아닌, 은줄로 몸과 연결되어 있는 유체였다. 분신이 아닌 남자 자신의 순수한 유체로 연희를 구하기 위해 자 신의 생명 에너지를 모두 쏟은 것이 분명했다. 희미한 의식 속에 서도 뭉클한 것이 가슴을 후볐다. 저렇게까지 육체를 쇠잔하게 해서 유체를 끌어내어 힘을 쓴다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자의 순수 유체에게 달려들던 염체들은 그 즉시 남자의 유 체로 녹아 들어갔다. 순수한 사념의 에너지로만 만들어진 염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남자는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케인이 만들어 낸 염체들은 남자의 유체 앞에서 맥없이 기운을 잃고 흐트러졌다.

”아아아…..”

케인은 자신의 염체들이 스러지자 분노의 고함을 지르면서 눈 을 감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케인의 몸에서도 회색빛을 띤 음 울한 유체가 분리되어 나왔다. 케인은 남자에 비하면 약간 능력 이 떨어지는 듯, 정신을 유지한 채 유체의 분신을 만들 줄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유체의 기세만은 현암과 싸우던 남자에 못지 않게 기세등등했다.

유체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자 현암은 기운이 빠졌음에도 불 구하고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쓰러진 현암의 몸을 향하여 남아 있던 케인의 염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귀곡성 을 울리면서 월향검이 현암에게 날아왔으나 공력을 주입받은 지 오래되어서인지, 아니면 계속 폭발하는 염체들과의 싸움에서 충 격을 입어서인지 월향의 기세도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월향은 현암의 몸 주위로 닥쳐드는 염체들과 공중전을 벌 이기 시작했다. 현암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공력을 끌어모 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케인과 남자의 두 유체는 허공에서 대치했다. 아무리 유체여도 중상을 입고 쓰러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쪽이 불리한 것은 자명했으나, 남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케인 이 빠르게 에스페란토로 지껄이는 것을 연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바보! 이제 목숨까지 걸어? 여자가 그리 좋은가? 위대한 블 랙서클의 명령마저 거스르고 이젠 나와 대적까지? 죽는 것이 두 렵지 않으냐?”

“내가 좋을 대로 한다. 블랙서클이니 뭐니 애당초 내가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그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도 내 편은 아니었다. 아무도…………….”

남자의 유체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희를 향해 맑은 눈으로 미 소를 보낸 남자의 유체는 연희에게 속삭였다.

“어서 피해요. 그리고 아이를 찾아보세요. 놈은 호텔에 묵고 있 을 테니 도움을 받아 조사하면 될 거예요. 별일은 없을 겁니다.” 

“싫어요! 당신은…… 아아!”

“어서 가요. 염려 말아요. 지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당신이 있으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남자는 말을 하다가 말고 푸른 광채를 몸에서 뿜어내면서 움 츠렸다. 앞쪽에서 케인이 문어발 같은 촉수를 만들어서 뻗어 냈 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회색의 촉수들을 피하지 않고 몸에서 불 꽃을 일으키면서 그대로 맞받았다.

“어서 가요!”

연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남자가 마음 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방금도 분명 남자는 그냥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 있는 연희 때문에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던 것이 다. 저쪽에서는 현암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고, 잘 보 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들과 은빛 칼이 허공에서 무섭게 엉켜 싸 우고 있었다. 이런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을 버려 두고는 차마 발 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연희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만치에 앉아 있는 케인의 몸을 보고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지지 말아요. 꼭!”

연희는 남자의 유체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남자가 주었던 닳 은 십자가를 꺼내 보인 다음 서둘러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남자 는 비로소 만족한 듯 오므렸던 유체를 넓게 펴면서 푸른 불꽃을 사방에 흩뿌렸다. 케인의 회색빛 유체도 지지 않고 남자의 유체 를 덮치려다가 방향을 돌려 연희를 뒤쫓았다. 그러나 남자의 푸 른 유체는 종이처럼 넓게 퍼져 가면서 케인의 유체를 온통 둘러 쌌다.

허공에서 두 개의 유체가 뒤엉켜 싸우는 동안 연희는 문 너머 로 사라졌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유체가 힘이 빠진 듯 펑! 하 면서 뒤로 밀려났다. 한때 밝았던 푸른빛은 힘을 다 소모했는지 점차 하늘색으로엷어져 갔다. 케인의 회색 유체가 분노한 듯 서서히 몸을 폈다.

현암은 펑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공력은 하나도 끌어 모으지 못했으나 사태가 급박한지라 더 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 없었다. 염체들은 거의 월향이 처치한 후였으나 이제 너무도 기진맥진하여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현 암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왼손을 내밀었고 월향은 희미한 소리 를 내면서 현암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월향 을 건네 잡고는 왼손의 식지 끝을 힘껏 깨물었다.

케인의 회색 유체는 분노의 눈으로 사라져 가는 남자의 유체 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이제 체념한 듯했다. 케인의 양손에서 자 주색 불덩어리 같은 것이 이글거리면서 맺히기 시작했다. 불의 염체인 듯싶었다. 남자의 유체는 이제는 다시 돌아갈 기력도 없 는 듯,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케인의 유체가 불의 염체 를 내쏘려는 순간, 갑자기 출렁하면서 흔들거렸다. 케인의 유체 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뒤쪽에 있는 자신의 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희였다. 연희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척하다가 계단가의 창문 을 넘어 옥상 뒤쪽으로 돌아와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앉아 있는 케인의 몸에 달려들었다. 이곳은 오층 건물의 옥상. 몸을 아래 로 밀어 떨어뜨리면 케인의 유체도 온전할 리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케인의 유체는 분노의 고함을 지르면서 불덩어리의 염체를 내 쏘려 했으나, 어느새 남자의 유체가 날아와 케인의 팔에 엉겨 붙 었다. 자주색 염체는 케인의 손에 들린 채 폭발해 버렸고, 남자 의 유체와 케인의 유체는 충격을 받은 듯 뒤로 한참을 물러섰다. 그러는 와중에도 케인은 나머지 한 개의 염체를 연희를 향해 던 졌다.

현암은 월향에 피를 먹이는 최후의 방법을 쓰고 있었으나 연 희가 다급해진 것을 보고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미안, 월향, 한 번만 더!’

현암은 월향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날아가는 염 체를 향해 월향을 내쏘았다. 월향은 휘청거리는 듯하면서도 놓 치지 않고 염체를 향해 날아가더니 그 중심부에 깊숙이 박혔다. 공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만은 버티기 어려웠는지 월향 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튕겨져 나와 근처의 벽에 푹 박혀 버렸 다. 월향의 칼자루가 부르르 떨렸다. 연희는 이를 악물고 케인의 몸을 옥상 가장자리까지 밀어내고 있었다. 케인의 유체는 이상 한 비명을 지르면서 연희에게 다가갔으나 연희는 있는 힘껏 소 리를 지르면서 케인의 몸체를 건물 아래로 밀어 버렸다. 케인의 유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연희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이 사람을 해치다니.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건 정당방위야, 당연해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갑자기 케인의 몸뚱이가 아래에서 쑥 올라왔다.

연희가 내지른 비명 소리에 현암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케인 의 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가만 보니 케인의 유체가 재빠르게 떨어지는 케인의 몸을 받아 든 것이었 다. 케인의 유체는 몹시 힘겹게 케인의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 다. 그 눈길에는 차가운 조소와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기절할 듯 휘청하던 연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남자의 유체는 남자의 쓰러진 몸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이제 완 전히 탈진하여 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월향검도 벽에 박힌 채 날을 빼내지 못하고 여전히 파르르 떨고 있었다. 현암 역시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오른손이 간신히 꿈틀거릴 기 력이 있을 뿐, 도저히 케인과 맞서 싸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끝인가……………?’

현암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준후가 만들어 주었던 부적. 수정에게 걸어 주라고 연호에게 넘 겨주었다가 무심히 주머니에 넣고 온 부적 부적을 그려 주면서 하던 준후의 말이 떠올랐다.

-이건 몸에서 유체가 분리되지 않도록 해 주는 부적이에요. 

‘그래, 몸, 유체!’

케인의 유체는 자신의 몸을 지고 있는 힘을 다해 옥상으로 올 라오고 있었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케인의 몸을 도로 올려놓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현암은 간신히 움직 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부적을 꺼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케인의 몸을 향해 던졌다.

“아아아아악!”

부적이 몸에 닿자 케인의 유체는 비명을 지르면서 케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받쳐 주던 유체가 몸 안으로 빨려 들어 가자 케인의 몸은 돌덩어리처럼 아래로 떨어졌고 쿵 하는 소리 가 들렸다. 연희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케인의 몸은 공사를 하느 라 비죽비죽 솟아 있던 철근에 팔다리를 꿰뚫린 비참한 모습이 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할 것 같았 다. 처참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리려 하자, 갑자기 케 인 주변의 허공에서 검은 기류의 소용돌이가 물결치면서 일어났 다. 연희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도 눈을 떼지 않고 그 광경을 지 켜보았다. 케인의 죽은 몸은 갈기갈기 찢기면서 검은 원안으로 흡수되어 갔다. 연희는 무서움과 알 수 없는 비감으로 몸을 부르 르 떨었다.

“저, 저것이・・・・・・ 블랙서클?”

어느덧 케인의 몸을 자취 하나 없이 흡수해 버린 검은 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계속 퍼 붓던 비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몸을 움 직이지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도 못하고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호흡만을 간신히 잇고 있었다. 남자의 몸 바로 위에 곧게 누운 자세로 죽은 듯 떠 있는 남자의 유체 또한 쇠잔해져 있기는 마찬 가지였다. 유체와 몸을 연결하는 은줄이 실낱처럼 가늘어져서 금세라도 끊어질 듯한 것을 보고는 현암도 뭐라 말할 수 없는 비감한 심정이었다. 연희는 남자의 손을 잡고 깊은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을 떠요…… 제발……………”

연희의 눈물이 얼굴에 떨어지자 남자의 유체가 조금씩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희미해서 안명부를 이용하 고 있는 현암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암은 조용히 하나 의 부적을 꺼내어 연희의 손에 들려 주었다. 연희의 눈이 잠시나 마 환히 빛났다.

“아!”

남자의 유체는 이제 물리력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이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했다. 다만 얼굴에 슬픔과 특유의 포기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연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희는 울먹거리면서 말을 했다.

“내가…………… 나 때문에………….”

남자의 유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최후로 힘을 짜내는 듯, 푸른빛으로 일렁이면서 허공에 커다랗게 퍼져 갔다. 현암도 그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위하여 저 남자는 최후로 무언가를 영상으로 보여 주려 하고 있었다. 현암은 블랙서클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지금 이 순간을 방해한다면 자신이 영원히 죄를 짓는 것만 같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허공에 커다란 영상이 실물과 같이 나타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암은 남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은 그 영상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모든 힘을 발전시켜 온 것 이라 했던 그 말이…………. 남자는 어쩌면 진짜 예술가였는지도 모 른다. 스스로를 소외시킨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 을 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현암은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가 보여 주는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영상이 지나가 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아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남자가 최후 로 많은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작업인지도 몰랐다.


남자의 얼굴. 그리고 버림받은 어린아이의 모습. 영상 속에 영 상이 겹치고, 환영 속에 환영이 겹쳐 갔다. 연희는 무아지경의 상태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 었다. 현암도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기억의 색채들이었고, 아름답고 비장했고 미어지도 록 슬펐으며, 소리 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환영 은 계속 흘러갔다. 낙조, 계절의 바뀜, 외로움, 비 오는 밤, 장난 삼아 만들어 낸 염체들의 춤. 자기가 지닌 모든 기억을 한꺼번에 보여 주려는 듯 환영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극명하게 나타났 다가 사라지고 또 어우러졌다. 연희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비 오 듯 흘리면서도 환하게 미소를 띠었다. 보여 주는 자와 보고 있는 자. 둘의 모습이 우주의 완전한 일체감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현암은 환희에 찬 전율에 몸이 짜릿해옴을 느꼈다.

허공의 환영이 하나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그려 내면서 슬로모션처럼 느려지기 시작했다. 비장한 순간이었다. 연희는 직감적으로 남자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을 보여 주고 있다 는 것을 영혼으로 느낄 수 있었다. 궁핍, 고독감, 피곤함. 이루 말 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상황. 어울리는 색채와 모습을 분간하기 어려운 부정형의 형체들이 어우러지며 숙연한 분위기 를 만들어 갔다. 영상 가운데로 하나의 고운 손이 나타났다. 희 고 고운 손. 당시 남자가 처해 있던 어려움과 궁핍의 분위기를 갑자기 뒤바꿔 버릴 것 같은 그런 손. 그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연 희에게 낯익은 작은 구리 십자가였다. 그리고 하나의 미소가 나타났다. 그윽하고 깊은 안온함을 절로 느끼게 하는 눈동자. 그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의 일이었던 듯, 오로지 눈동자의 이미지만이 생생하게 남아 있 었고 그 눈은 연희의 깊은 눈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처음 으로 어느 여인의 고운 목소리가 환영 속에서 울렸다.

“힘을 내요. 그리고 좋은 기억만 떠올려요.”

연희는 터져 나오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 자신에게 주었던 것은 너무도 오래 어루만져서 가지가 닳아 버린 바로 그 십자가였다. 연희를 처음 보고 남자는 어리고 힘들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었을까? 남자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울렸다.

“내 단 하나의 좋은 기억, 그 십자가・・・・・・ 고운 눈매를 가진…………… 그리고 스스로의 분노에서 빚어진 악행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원 할 수 있게 해준・・・・・・ 연희 씨 감사……… 그러나 이제는…………… 이 제는 너무 늦은 일……..”

목소리가 울리는 사이 남자가 만들어 낸 환영들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고 남자의 유체만이 불면 꺼질 것처럼 남아서 창백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연희는 고개를 크게 좌우로 흔들며 울부짖었다.

“아니에요. 가면 안 돼요. 가면………….”

“내 마지막 쇼, 잘 보셨나요?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후후.”

“아아! 이름, 이름이라도!”

“아니에요. 부질없죠. 이름 같은 건 기억할 것 없어요. 후후…….”

남자의 유체가 스르르 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호 흡이 멎으려 하고 있었다. 현암도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 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남자의 머리 쪽에서 조그마한 염체 하나가 튀어 나와서 연희가 들고 있던 십자가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이 보 였다. 남자의 몸은 식어 가고 있었고 최후의 호흡을 고르고 있었 다. 현암은 눈을 감았고 연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연희는 닳은 십자가를 어루만지며 이별을 고하듯 중얼거렸다. 

“잘가요. 부디… 부디…………….”

연희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자 현암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월향을 찾아들고 계단을 내려섰다. 마지막 인사는 둘만이 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납치되었던 수정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승희의 투시로 별 상처 없이 정신을 잃고 있던 수정을 발견했고, 백호를 통해 케인의 신원과 입국 경로 등이 조사에 들어갔다. 박 신부도 이제 거의 쾌유되었다. 박 신부는 연희의 이야기를 듣고는 기도를 올려 주었다. 승희는 남자의 최후가 아름답다고 말했고 준후는 몹시 아쉬워했다. 어쨌든 일은 다 끝났다. 문제는 블랙서클. 아직 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 것이 분명 했다. 모두들 모인 자리에서 현암이 말했다.

“블랙서클은 복수의 단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미움과 증오 와 재창조의 단체라고 했어요. 그리고 케인이 죽었을 때는 호웅 간 때와 비슷한 검은 원이 나타나 그자의 몸을 삼켜 버렸다고 했 구요. 우리가 모르는 새에 뭔가 알 수 없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박신부도 중얼거렸다.

“밝혀내야지, 밝혀내야만 하네. 현암 군, 백호에 의하면 케인 의 국적은 불가리아라고 했어. 분명 유럽 전체에 걸쳐서 무슨 일 이 일어나고 있는 걸세.”

승희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리아? 아이고, 말도 통하지 않겠네요.”

“아무래도 연희 누나 같은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죠. 다시 생각 해 보겠다고 했다면서요? 왜 연락이 없을까.”

“글쎄다. 워낙 험한 일을 겪은 뒤이니……. 우리가 요청한 일 은 그 아가씨의 판단에 맡기자꾸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니?”

불만스러웠는지 양 볼이 부은 준후를 박 신부가 달래는 동안 현암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자에게서 튀어나와 십자가로 들어간 염체는 무엇일까? 케인이 연희에게 말했다 던 ‘심연의 눈’이란 건 무엇일까? 그리고 블랙서클의 정체와, 그 부하들이 자꾸 한국에 나타난 이유는?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결에 전화를 받은 현암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주저하는 듯한, 그러나 결심을 한 것 같은 단 호한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현암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연희가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