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13화 – 세크메트의 분노 1 : 프롤로그 – 덴데라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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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13화 – 세크메트의 분노 1 : 프롤로그 – 덴데라의 폐허


프롤로그: 덴데라의 폐허

덴데라의 거대한 하토르 사원의 지하 이십 미터 지점에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석실이 발견된 것, 그것도 우연히 그곳을 답사하던 한국인 학자에 의하여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세 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B.C. 3000년 이상 된 고이집트 시대에 만들어진 석실, 이 석실은 아마도 사원이 지어 지기 전에 건축되었던 건물의 일부였던 듯했으며, 원래 그 자리 에 있던 건물을 허물고 나서 그 위에 하토르의 사원이 오랜 시간 을 들여서 다시 건축된 것으로 보였다.

홍 박사와 고고학자인 커크 교수가 유적을 발견한 것은 우연 이었다. 실로 우연한 기회에 엎지른 물이 스며들어 가는 궤적을 보다가 힌트를 얻고, 음파 탐지기로 석실의 존재를 확인한 두 사 람에게 그것은 거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약속해 주는 하나의 성과였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밝혀내기 어려운 고대 이집트 의 유적, 그것도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가 아닌 사원의 비밀 석실 은 온갖 낭만적인 억측과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갖은 어려움 끝 에 최신 공법으로 석실을 발견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두 사람 의 기사는 세계 매스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집트 정부 는 자칫 원래의 사원에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발굴 작업의 허가를 내 주면서 발굴된 유물의 소유권을 철저히 자국 정부의 소유로 하되, 최초 발굴의 영예만큼은 두 학자에게 돌리기로 합의했다.


신전 뒤편에 거대한 구조물로 건물의 지반을 받치고, 모래로 이루어진 지반을 파고 들어가는 다소 위험한 계획이 수립되었 고, 독일인 기술자 오토 카프너의 지휘하에 공사는 착착 진행되 었다. 삼 개월에 걸쳐 막대한 자재와 중장비를 동원한 끝에 원래 의 사원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은 채, 비밀 석실이 있는 지하 이 십 미터 지점까지 파들어 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마침내 초음파 탐지기를 이용하여 아직도 수북이 쌓여 있는 모래 바로 저편에 돌로 된 벽의 존재를 확인한 홍 박사와 커크 교수는 붉게 그을고 피곤에 지친 얼굴로 안경 너머의 서로를 들여다보면서 밝게 미 소지었다.

철골과 알루미늄 자재를 이용하여 만든 어둠 속의 긴 터널에 서 신형 굴착기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오고, 이제는 세심한 솔을 이용하여 행여 유물에 흠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굴을 할 차례였다. 홍 박사는 잠시 발굴 과정을 늦추자고 제안하였으나, 커크 교수는 인부들을 교대로 작업시켜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려는 생각에 계속 작업을 독려했다.

마침내 어느 날 밤 늦은 시각에 석실의 돌 벽이 모습을 드러냈 다. 커크 교수와 홍 박사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전등 빛 아래에 서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돌 벽을 쓰다듬었다. 돌 벽의 벽돌 하 나하나에는 정성들인 히에로글리프의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집트에 권위가 있는 커크 교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글귀 들을 읽어 나갔다.

‘그날엔 미소를 짓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지?’

모든 벽돌에 똑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문구 같았다. 하기야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워낙 많이 다루어 온 커크 교수에게는 그 정도의 짧은 문구는 수도 없이 많이 보아 왔 던 터였다. 커크 교수는 석실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옆쪽으 로 발굴을 해 나가도록 지시하고 홍 박사와 함께 굴을 나왔다. 이 개월에 걸친 재발굴로 덴데라 대사원 지하에 있는 또 다른 비밀 석실이 공개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 박사는 급한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공개 직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해야 된 다며 그곳을 떠났다. 고고학자에게 필생의 영광이 될 수 있는 자 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후 이상하게도 홍 박사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귀국을 했는지의 여부도 분명치 않았다. 사람들은 홍 박사가 무슨 사고를 당한 것으로 믿었고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갔다.

발굴은 계속 진행되어 덴데라 대사원 밑의 비밀 석실이 드디 어 고대의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성과였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금제 세공물들과 거대한 보석들, 그리고 수천 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특이한 형태의 제단과 기이하게 생긴 많 은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모든 유물들은 이집트 당국의 엄중 한 감시하에 세밀히 촬영되고 조사되어서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수천 장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조심스럽게 복제되어 커크 교수 가 재직중인 케임브리지 대학에 해독을 의뢰했다. 커크 교수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고 이 영광을 실종된 홍 박사와 같이 나눈 다고 하여서 미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세계의 매스컴들은 이미 담과 함께 발굴 소식을 보도했으나 실제로 석실 내부의 자료들 에 대해서는 발표된 바가 없었다. 고대 하토르 숭배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만 알려졌을 뿐.

두세 달의 시간이 지나고 일단 발굴된 유물 중의 일부가 원래 의 계약에 따라 먼저 영국에 전시되고, 그 이후에 한국에서 전시 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종된 홍 박사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 다는 커크 교수의 바람에 따라 한국에서 먼저 전시될 것이라고 수정 발표되었다. 항간의 외신에서는 발굴이 이루어진 직후부터 여럿의 인부들과 발굴 책임자들이 실종 혹은 변사체가 되어 발 견된 일을 ‘새로운 저주’라고 떠들기도 했으나 이집트 정부는 이 런 사실들을 낭설이라고 발표하였고, 실제로 발굴 책임자인 커 크 교수와 기술 담당인 오토 카프너도 ‘그런 일은 없다’는 성명을 냈다.

세월은 다시 한 달여가 흘러서 사람들은 신전의 작은 방이 발 굴된 사실 같은 것은 거의 잊어 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새로 운 이집트의 유물’이 곧 전시회를 가진다는 포스터가 나붙기 시 작했다. 준비를 끝내고 유럽행을 시작하려던 퇴마사 일행에게 홍 박사의 아들이 찾아온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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