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20화 – 세크메트의 분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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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20화 – 세크메트의 분노 8


세크메트의 분노

“신부님, 이제 어떻게 하죠?”

현암마저도 별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죽을 고생을 하여 간신히 미라를 물리쳤는데 이제부터 세크메트 의 분노가 시작된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박 신부가 한숨을 쉬고 안경을 고쳐 쓰면서 말했다.

“일단 세크메트의 분노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할 것 같군. 그러려면 블랙서클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지.”

준후가 뭔가 언짢은 게 있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해가 가질 않아요. 세크메트라고 하면 비록 고대에서일망정 신의 반열에 드는 존재일 테고, 신력이 깃든 존재일 텐데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는 땅에서 분노를 터뜨리다뇨. 믿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뭐지?”

준후가 어지럽혀진 전시회장의 깨어진 유리창 하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까 나타났던 네 영의 기운들. 그것들은 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어요.”

현암이 문득, 홍 박사의 영의 뒤에 이끌려 나왔던 아누비스의 모습을 보고 준후가 중얼거렸던 말을 생각해 냈다.

“그렇다면 준후야. 전에 홍 박사의 영을 소혼할 적에 나타났던 아누비스의 영과 방금 사라진 사자 형상의 영이 비슷한 존재란 말이니?”

“예, 틀림없어요. 보통 사람의 영보다는 세지만, 신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절대로요.”

“그렇다면 뭐지? 그런 영들이 천재지변을 일으키거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술수를 부릴 수 있겠니?”

준후가 씩 웃었다.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요즈음은 고대에 비해 상상할 수 없 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서 영들의 힘으로 그렇게 큰일 을 벌이지는 못해요. 예전에 브리트라가 출몰하였을 때도 직접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려 했을 정도예 요. 하물며 방금 사라진 영들 정도의 힘으로는………………”

현암, 백호와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하는 눈빛으로 준 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박 신부는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블랙서클에서도 그런 사실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물 론 그들의 목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사람을 바꿔치기하고 전시회까지 열리게 할 만큼 준비를 하면 서, 그런 정도의 투시를 행하지 않았을까? 그들 하나하나는 아마 도 우리와 맞먹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들일 거야. 그런데 그들이 설마………………”

연희가 검은 눈을 깜박였다.

“그렇지만 준후의 말을 듣고 보면, 영들이 세상에 나갔다 하더 라도 별반 큰 짓은 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 해도 몇몇 사람은 해칠 수 있지. 어쨌거나 이번 일에 어떤 음모가 개입되어 있는지 꼭 알아내야 해.”

“그렇습니다. 일단 저 가짜 커크 교수도 숨이 넘어가지는 않았으니, 뭔가를 알아낼 수 있겠죠. 그러나 그자를 경계하려면…………….”

백호가 조금 켕기는 듯한 눈치를 보냈다. 가짜 커크 교수도 상 당한 주술력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경계를 한다 해도 도망치거나 다른 짓을 꾸밀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 신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심하게 다친 사람이 또 주술을 부릴 수는 없을 걸 세. 주술력도 건강한 몸에서야 나오는 것이지. 살아날지가 의문 이로군.”

박 신부가 말하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자세를 취 하고 있는데 승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이리 와 보세요. 뭔가가 있어요!”

승희는 부서진 석관 사이에서 솟아나와 있는 원통 같은 것을 가리키면서 일행을 불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원통은 금으로 만 들어진 듯, 불길 속에서도 그을리지 않은 채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단단하게 새겨진 봉인이 아직도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승희가 재가 되어 버린 미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라에 대한 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건 아마 파 피루스를 담았던 문서통인 것 같군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을 거예요.”

연희가 다가가서 통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통은 이제 따 뜻한 온기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연희는 통을 집어서 주변의 무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세크메트의 문장이에요. 암사자의 머리………….”

현암이 물었다.

“겉에 씌어 있는 것도 상형문자입니까?”

“네. 음, 세크메트의 딸, 사토니 우쟈 티의 기록이라 씌어 있군요.”

연희가 통을 뜯어 개봉하려고 하자 승희가 말렸다.

“저 통은 오래 묵었고, 게다가 불로 달구어졌었어요. 함부로 열면 혹시 안의 파피루스가 바스러질지도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일단 여기서 통을 열지는 말고, 또 시간도 늦었으니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고고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에서 여는 것이 안전할 거예요. 통을 흔들지 말고요.”

일행은 승희의 말에 동의했다. 한시가 급했지만 통 안의 내용 을 잃으면 더욱 막막해질 테니 조금은 기다려야 했다. 연희는 그 통을 꺼낸 석관 내부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여기에도 글자가 있군요.”

“읽을 수 있어요?”

“잠시만요.”

연희가 글자를 해독하는 동안에 현암은 백호, 박 신부와 함께 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블랙서클 사람들은 저 관을 열어 본 것일까요?”

현암이 묻자 백호도 눈을 찌푸리고 입에 문 맨 담배를 빙글빙 글 돌리며 깨어진 관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그랬던 것 같군요. 여기 이 부분, 금이 가 있고 자국이 남아 있지요? 그라인더 자국입니다. 분명 그라인더로 관을 먼저 열었 던 것이 틀림없군요.”

“그런데 돌로 만들어진 관을 어떻게 다시 봉했을까요?” 

백호는 면밀하게 갈라진 부분을 살피더니 말했다.

“관 전체가 돌로 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 블랙서클인지 뭔지가 관을 그라인더로 잘라서 아랫부분을 뚫은 것 같군요. 그리고 힘 을 받치려고 이 쇠막대를 끼우고 비슷한 색깔의 점토로 갈라진 곳을 메운 뒤, 열을 가해서 갈라진 곳에 메운 흙을 도자기로 만들 어 표가 안 나게 만들었군요. 솜씨가 좋네요. 후후.”

준후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우샤브티들이 튀어나온 곳은 그런 도자기로 메워지지 않은 부분이었어요. 거기 붙어 있던 건 정말 같은 돌이었는데.” 

백호는 그 부분도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 더니 입을 열었다.

“제 전공은 아니지만, 수사하는 일을 좀 하다 보니 우연히 이런 것도 알게 되었죠. 이 관은 용암이 굳어서 된 돌로 만든 겁니다. 아마도 고대 이집트인들은 관을 부분부분 따로 만들어 맞춘 뒤, 그 틈을 같은 용암으로 메웠을 겁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죠.”

박신부와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 외에는 관 을 흠 없이 만들 방법이 없었을 것 같았고, 고대 이집트인이 얼 마나 정성을 기울여서 관을 만든 것인지를 알게 되자 오히려 불 안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도대체 여기에 감추어진 비밀이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신경을 썼을까. 일행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 는데 연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해석했어요. 이해하기 쉽게 의역한 건데, 읽어 볼게요. 세크 메트의 딸, 사토니 우쟈 티 세크메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세 크메트의 네 사도를 부려 그 힘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하토르의 덕을 이어서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여기에 눕다. 영원한 안식과 희생의 날을 기다리며 사자의 영혼은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고 세크메트의 네 사도가 영원히 함께하리라.”

박신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가만, 적군을 물리쳤는데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누웠 다고? 이상하게 들리는데?”

“해석은 맞아요. 제가 약간 의역을 했지만, 그 외 다른 뜻은 없을 겁니다.”

현암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사자의 영혼이 강을 건너지 않는다니? 그건 무슨 뜻이지?”

이번엔 승희가 답했다. 아까 싸우느라 마구 내팽겨쳐져서 구 겨진 책을 어느새 주워 들고 뒤적거리는 승희의 모습은 꼭 학구 파 같아 보였다.

“글쎄, 이집트의 믿음 체계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강을 건너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피라미드에도 태양의 배 같 은 유물이 나오잖아.”

“그런데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말은 뭐야? 그건 결국 승천하 지 않고 그냥 살아 있었다는, 아니 적어도 이승에 놔두고 있었다 는 말이 되잖아.”

“그래서 저렇게 움직이고 술수를 부렸잖아.”

박신부가 나섰다.

“가만가만 우리 차근차근 생각해 보세. 내 생각으로는 세크 메트의 네 사도라는 것이 아까 나타났던 네 명의 영이었던 것 같 아. 그리고 이 여자, 누구라고 했지?”

“사토니 우쟈 티예요.”

“그래. 그 사토니 우쟈 티는 세크메트의 대여사제로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여자였을 게야. 세크메트의 네 사도를 부려서 적군 을 물리쳤다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 그러나 하토르의 덕을 이 어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누웠다는 구절은……?”

“힘, 너무 엄청난 힘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고 그랬던 것일까요?”

적군을 물리치는 데 힘을 썼다면, 당연히 그 힘은 사토니 우쟈티가 통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현암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힘, 남들이 갖지 않은 힘이 라…………. 지난번 연희와의 일로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기 회가 많이 있었던 현암으로서는 그 구절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지요. 스스로 얻은 힘에 도취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면 그 힘을 다른 사람들이 겁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래서 왕쯤 되는 자가 위협을 느끼고 죽으라고, 아니 영원히 쉬라고 한 뒤 저렇게 공들여 관을 밀봉했는지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하려고요.”

박 신부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암의 추리는 비약적 인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순 없었다.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희가 입을 열었다.

“사토니 우쟈 티는 분명 비전의 수련자였을 거예요. 이집트의 비전, 그건 영생을 추구하여 생사의 경계를 없애는 수단이었지요. 그리고 그 능력은, 호호호. 저는 요즈음 믿어지지 않는 광경 을 많이 보는군요.”

준후가 어느새 저만치에 가서 뭔가를 주워 들고 있었다. 현암 이 보니 꽤 커다란 붉은 보석이었다. 준후가 보석을 주워 든 곳은 미라의 심장이 타 버렸던 곳이었다. 승희가 이제야 생각났다 는 듯 말을 꺼냈다.

“맞아요. 미라는 아까 자신의 심장, 그리고 세크메트의 눈을 잃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어요. 저것이 혹시 세크메트의 눈이 아닐까요?”

보석은 엄지손가락만 했으며 길쭉한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 다. 준후는 그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보통 보석이 아니네요.”

“음, 그러면?”

“어떤 힘이 깃들어 있어요. 아주 기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준후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보석의 힘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보석에 실 같은 금이 가 있는 것 으로 보아 본디 두 개의 보석을 하나로 붙인 듯했다. 준후는 가 만히 보석을 들여다보다가 툭 떨어뜨렸다.

“어엇! 뭐 하니?”

보석이 땅에 떨어지며 탁 하고 깨지자 놀란 승희가 소리를 쳤 다. 그걸 보고 있던 백호가 웃으며 말해 주었다.

“원래 보석은 떨어뜨린다고 해서 깨지진 않습니다. 가짜가 아 니라면 저건 원래부터 갈라져 있던 거죠.”

승희는 그래도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 길쭉하게 갈라진 보석 하나를 주워들었다. 보석은 똑같은 크기의 길쭉한 두 개의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준후가 나머지 하나를 주웠다. 보석을 든 준후가 승희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희 누나, 왜 날 욕해요? 그냥 떨어뜨려 본 건데.”

오히려 승희가 화들짝 놀랐다.

“어? 준후야, 너 어떻게 알았지? 난 말도 안 했는데?”

“음? 어, 정말!”

준후의 작은 눈이 놀란 것처럼 동그래졌다.

“그냥 들렸어요. 말하는 것처럼. 이상하다. 난 누나 같은 능력이 없는데.”

박신부와 현암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이 말했다.

“준후야,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몰라요. 형 생각은 안들리는데?”

승희가 다시 나섰다.

“그러면 나는?”

“음, 어? 준후야 들려? 하고 말했어요. 승희 누나?”

승희는 자신이 들고 있는 작은 보석 조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른 그 조각을 땅에 내려놓고 물었다.

“지금은?”

“어? 몰라요. 안 들리네.”

승희가 보석 조각을 집어서 현암에게 주었다.

“자, 준후야, 현암군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승희 누나가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을……. 어어! 그러면 이 보석이!”

희한한 일이었다. 보석 조각을 들고 있으면 들고 있는 사람들 끼리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우왕좌왕하며 보석 조각으로 여러 차례 시험해 보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 조각을 누가 들고 있어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었다.

“와! 세상에 이런 희한한 물건이 있다니.”

준후가 기쁜 듯 고함을 쳤고 박 신부와 현암도 만면에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이 있으면 연희 씨를 통해 외국어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 고, 또는 승희를 통해 다른 자의 마음을 알 수도 있겠군.”

잠시 흥분 상태에 있던 일행은 박 신부의 주재로 행동을 결정 했다.

“일단 가짜 커크 교수가 있는 병원으로 가 보자꾸나. 그자가 의식을 차리지는 못하더라도, 투시를 계속하면 단서가 잡힐 수 도 있어.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날이 밝으면 좀 피곤하더라도 승희와 연희 양은 통 안의 문서를 해독하러 가는 것이 좋겠어. 당장은 조용하지만, 세크메트의 사도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 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보다도요………….”

준후가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홍 박사님의 영을 불러 보는 것이 어떨까요? 저번에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을 듣질 못했으니 이번에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불러 보면…………….”

현암이 눈을 부라렸다.

“준후야, 자꾸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럴 때마다 네 명이며 칠씩 깎인다는 것 몰라?”

“치이, 그 정도야 뭐 어때서요. 전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됐다구요.”

“언제까지나 열네 살이겠니?”

“그래도요. 지금은 급하잖아요.”

“아니야, 가짜 커크 교수를 투시하고 통에 든 문서를 해독한다면……”

박신부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결심한 듯 한마디 했다.

“이번만은 준후에게 부탁함세. 현암군,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예?”

“단, 가짜 커크 교수와 저 통 안에 들었을지 모르는 파피루스 로도 일의 전모를 밝히기 어려워진다면, 그때 가서 한다는 조건 일세. 그러니 준후야, 너도 기다려 다오. 함부로 소혼술을 쓰지는 마라. 알겠지?”

박 신부의 말에 준후가 씩 웃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박 신부가 말을 마치면서 준후에게 보이지 않도록 현암에게 살짝 윙크했다. 현암이 그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짓다가 얼른 표정을 굳혔다.


가짜 커크 교수는 몸이 시커멓게 탄데다 인공호흡기와 각종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공포 영화에 나오는 괴물 같아 보 였다. 호흡과 맥박을 그리는 장비의 화면이 불규칙적으로 흔들 리고 있었고 뇌파 곡선도 불안하다는 의사의 말이 언뜻 들렸다. 현암이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차라리 잠들어 있는 것이라면 동몽주라도 써서 살펴보겠지만 의식을 잃고 있는 상황이니.”

박 신부도 실망한 듯 승희를 돌아보았다.

“승희야, 뭔가 읽히나 시도해 보렴.”

승희는 꼬박 밤을 새우고 난 참이라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가 정신을 모으려는 승희를 중지 시키더니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 손에 들고 있으라 하고 다른 하나는 연희에게 주었다.

“이래야 서로 통하고, 못 알아들을 말도 연희 누나가 해석을 해주죠.”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고 연희도 미소를 지으며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들었다. 승희는 몹시 피곤했던지 땀을 줄줄 흘리면서 투 시를 행하기 시작했다.

“아, 보여요. 그의 임무……………. 모두 완수해서………… 편안한 심 정………… 인도인의 얼굴………… 아, 그자가 블랙서클의 마스터예요! 그런데 그 말은 ・・・・・・ 무슨 소리인지………….”

블랙서클의 마스터 이야기가 나오자 현암이 눈에 띄게 긴장하 기 시작했다. 승희가 말을 더 이상 해석하지 못하자 연희가 대신 승희가 읽어 낸 것들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에스페란토예요. 스스로의 힘에 도취된 인간들을 벌하고 세상을 정화하리라는…………….”

“그래요. 그건 그의 가르침이었나 봐요. 매우 흡족해하고 있어 요. 일은 다 이루어졌다고………… 모든 것이 계, 계획대로 되었……………” 

승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자는 지금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어요. 드디어 이 땅에 피 바다를 몰아치게 한다고, 정화하기 시작한다고, 가장 위험한 땅 에・・・・・・ 그리고 고국이 아닌 곳에…”

“무슨 소리야?”

현암이 무의식중에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 땅이 가장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곳이기 때문에 세크메트의 분노를 퍼부을 곳으로 선정했다는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이야 기일까? 그리고 고국이 아닌 곳이라니, 이자의 고국이라면 이집트. 그렇다면 이자는?

“이젠 알겠어요. 원래 자신의 고국에 퍼부어지기로 계획된 분 노를 이자가 우리나라로 돌린 거예요! 이 모든 일들은 이자의 계 획에 의해 나온 것이었고 마스터가 응낙을…………. 따라서 계획대 로 단서를 흘리고………… 미라를 깨어나게 하고, 또 파괴하게 하 고・・・・・・ 아! 갑자기 기억이 바뀌고 있어요. 과거의 영광, 파라오 의 영광, 이건……”

승희를 중계역으로 가짜 커크 교수의 말을 듣고 있던 연희의 얼굴도 해쓱해졌다.

“이집트 고대의 죽음의 기도문이에요. 이자는 곧 죽을 거예요.” 

병상에서 파파팍 하는 검은 기류가 일어나면서 가짜 커크 교 수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링거 줄이며 전극 선들이 사방으로 튀 었다. 검은 기류는 순식간에 둥근 원 모양이 되어 가짜 커크 교 수의 몸 위에서 소용돌이쳤고, 방 안은 원이 뿜어내는 기류에 휘 말려서 물건들이 날리고 유리가 깨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블랙서클! 이번에도 또!”

현암이 소리치며 습관처럼 월향검을 쥐었다. 그러나 왠지 불 안하여 머뭇거리고 있는데 준후가 재빨리 힘을 모아서 뇌전 한 방을 원을 향해 갈겼다. 그러나 블랙서클은 준후의 뇌전을 마치 흙탕물 구덩이에 돌이 떨어진 것처럼 삼켜 버렸다.

“어어어!”

준후가 놀라서 소리치는 사이에 블랙서클은 더욱더 강하게 소 용돌이쳤고, 가짜 커크 교수의 몸뚱이는 짚으로 만든 인형이 흩 어지듯이 분해되어서 조각조각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 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연희가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것을 승희가 재빨리 부축 해 안았다.

“사악한 악의 힘이여, 즉각 사라져라!”

박 신부가 십자가를 꺼내 블랙서클을 향해 달려들면서 푸른 성령의 불길이 일고 있는 십자가를 들이밀었다.

콰쾅!

방 안에 불꽃 없는 강한 폭발이 일어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각각 뒤로 튕겨서 벽에 부딪혔다. 병실 의 창문도 모조리 박살 나 버렸고, 쌓여 있던 의료 기기들도 부 서지고 전기 스파크를 튀기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박 신 부가 이를 악물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블랙서클의 모습은 어디 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고, 가짜 커크 교수의 몸도 감쪽같이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블랙서클..”

현암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노여운 듯,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짜 커크 교수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 외에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블랙서클 소속의 사람이 죽으면 예 외 없이 나타나서 죽은 자의 몸을 깨끗이 흡수해 버리고 사라지 는 검은 원 모양의 기류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승희가 아쉬운 것이 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남은 단서는 원통에 든 파피루스뿐이야. 날도 거의 밝았으니 그걸 해독하러 가는 것이 좋겠군.”

박신부가 말하자 승희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죠. 제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거나 대학 후배들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 그런데 같이 가시게요?”

눈치 빠른 준후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같이 못가나요?”

“글쎄다. 꼭 가려면 못 갈 것도 없지만………………”

연희가 말했다.

“승희 씨가 원통을 조심스럽게 취급하고 제가 내용을 해독하 면 되니까, 둘만 가도 충분할 것 같아요. 나머지 분들은 밤을 꼬박새우셨는데 쉬시는 게 어때요?”

밤을 새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박 신부와 현암, 준후 세 명은 그 와중에도 잠재된 힘을 쏟아 가며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일 부러라도 쉴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요.”

승희도 선선히 연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원통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막 문을 벗어나려는데 백호가 승희에게 휴대전화 를 쥐어 주었다.

“이 전화의 1번 메모리는 저쪽에 있는 다른 휴대전화 번호이 고, 6번이 병원 전화번호, 7, 8번이 현암 씨와 박 신부님의 카폰 번호입니다. 알아낸 사항이 있으면 즉각 연락해 주세요.”

연희와 승희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나섰다. 준후는 둘 다 눈이 빨간 게 꼭 토끼 눈 같다고 생각했다.

“자.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여기서 좀 쉬세나.”

박 신부가 소파에 드러눕자 준후는 비어 있는 이동 침대 위 에 기어 올라갔고 백호는 밖으로 나갔다. 현암도 몹시 피곤했으 나, 그냥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블랙서클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아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블랙서클이 라. 현암은 가짜 커크 교수의 마음속에서 승희가 읽어 낸 내용들을 떠올려 보았다.

-스스로의 힘에 도취된 인간들을 벌하고 세상을 정화하라. 그리고 과거에 유체 이탈을 하는 남자와 대적할 적에 그 남자가 중얼거렸던 말도 다시 떠올렸다.

-복수의 단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단체! 미움과 증오의 단체! 재창조의 단체!

‘블랙서클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 일까? 과거의 그 남자도 그리 악인은 아니었는데. 가짜 커크 교수 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거기에 집착할 정도라면 분명 보통 볼 수 있는 악인이나 정신병자들의 모임 같지는 않은데.’

일반적인 악인이라면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일을 달성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종교적인 신뢰에서 비롯되 어야만 그것도 겨우겨우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또 한 가지가 있을 수 있지. 미움, 그리고 복수심에 뿌리를 둔 집단이라면………….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왜 아무런 관련 도 없는 우리나라를 목표로 삼은 것일까?’

현암의 생각은 정리되지 않고 두서없이 맴맴 돌았다.

세크메트의 분노를 이 땅에 덮어씌우다니, 대체 겨우 넷밖에 되지 않는 영의 힘만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짜 커크 교수는 이 땅에 피바다가 몰아칠 것으로 확신하며 죽 어갔다. 도대체 블랙서클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홍수 해일 지진? 기근 대화재?’

현암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재난들을 하나씩 염두에 올려보았으나 그런 대규모의 자연력을 몇몇의 영이 조작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승희와 연희 씨가 뭔가를 알아내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현암의 눈꺼풀이 지쳤는지 슬며시 내 려앉았다. 현암이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눈을 감자, 저쪽에서 누워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준후가 반짝하고 눈을 빛내며 소 리 없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중얼거렸다.

“헤헤헤. 미안해요. 신부님, 현암 형. 하지만 너무 궁금해서요.”

준후는 지난번같이 소혼하다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또 영기 를 느끼고 박 신부가 현암이 깨어나지 않도록 땅에 둥글게 도형 을, 그리고 부적들까지 배치하여 결계를 만들어 놓고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홍 박사님의 영에게 잘 물어보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준후는 자신이 최근에 개발한 소혼술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물론 지난번처럼 충격을 받지 않도록 단단히 대비를 해 놓고서.


어느덧 승희와 연희는 승희의 모교인 ᄋᄋ대의 캠퍼스로 접어 들고 있었다. 차를 태워다 준 요원을 교문 밖에 대기시키고 둘은 승희의 후배가 조교로 있는 고고학 연구실로 들어갔다. 승희의 후배인 민지라는 예쁘장한 조교가 둘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둘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승희는 가지고 온 금으로 된 원통을 꺼냈다.

“이 안에 분명히 원서가 있을 거야. 손상되었을지도 모르니 조심스럽게 꺼내서 펴 줘. 부스러지지 않도록 말야.”

민지는 원통을 보더니 자그맣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집트 거 같은데・・・・・・ 진짜예요? 굉장해 보여!”

“응. 중요한 거야.”

“훔쳤어요? 호호호.”

“이걸 내가 가지고 왔다는 사실은 절대 비밀이야. 알았지?”

“호호호. 어디서 훔쳐 왔는진 모르지만 무지 값나가 보이는데요?”

“하하하. 껍질보다도 지금은 안의 내용이 중요해. 빨리 서둘러 줘.”

“오케이.”

민지는 군말없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원통을 들고 별실로 들어갔고 승희와 연희도 뒤를 따랐다.

민지가 확대경을 눈에 낀 채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핀셋 과 약품병을 꺼내는 것을 보면서, 승희와 연희는 피로가 왈칵 몰 려오는 것을 느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피로에 지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별실 구석에 있는 소파에 기대앉은 채 눈을 감았다.


박 신부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슬며시 일 어나 눈을 떠 보니, 준후가 땀을 흘리며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방의 건너편에는 현암이 곯아떨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 다. 중앙에는 둥근 도형이 두 개 그려져 있었는데 부적들이 꺼져 가고 있었다.

“음? 준후야, 너 혹시………….”

박신부가 말을 꺼내자 방 중앙의 도형 위쪽에서 어른어른한 형체가 나타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그 형체는 두 개의 영인 듯했다. 박 신부는 소리를 질러 준후가 소혼술을 쓰는 것을 중단시키려다가, 나타난 영의 모습에 놀라서 소리를 지르 지 못하고 눈만 부릅뜬 채 돌아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너울거리 는 두 개의 형체 중 하나는 어떤 남자의 형상으로, 또 하나는 개 의 머리를 한 기괴한 형상으로 바뀌어 갔다. 아누비스였다. 준후 는 박 신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과 마음속으 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영적인 대화는 정신을 집중하 고 있는 박 신부의 마음에도 전달되어 왔다.

홍 박사님 맞나요?

아, 세크메트의 분노가………….

홍 박사의 영 뒤에서 늑대 머리를 한 아누비스가 검은 갈기털 을 솟구치며 분노를 터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누비스의 생각도 말이 아닌 순수한 사념으로 전달되어 와서 박 신부와 준후 둘 다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벌을 받으리라. 신성한 잠을 방해하고 사도들의 분노를 몇 번씩이나 일으키다니…………….

준후가 마음속으로 물었다.

몇 번씩이라뇨? 미라를 불태운 것 말고 또 다른 일이 있었나요?

홍 박사의 영이 주춤하는 듯했다.

아아, 카프너. 그자는 악마야. 커크 교수를 죽이고 제단을 파손해서 미라의 심장을…..

당시의 정경이 준후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전달되어 재현되었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영문 모를 기계 소리. 인부들은 멀리 떨어 져 있는 숙소로 들어가 잠든 지 오래였고, 홍 박사만이 집에 보 낼 편지를 쓰느라 잠을 자지 않고 있다. 발굴중인 석실 쪽에서 낮지만 끊이지 않고 울려오는 뭔가를 갈고 있는 소리. 이상했다. 홍 박사는 쓰고 있던 편지와 펜을 손에 든 채로 다급하게 석실로 가기 위해 뚫어 놓은 통로로 뛰어든다. 통로 안은 어둡지만 저 멀리서 불빛이 비쳐 나오고 있다. 그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암암 리에 뚫어 놨다가 눈에 안 보이게 가려 놓은 또 다른 비밀통로인 듯하다. 낮에는 돌로 막아 감춰 놓았다가 밤에 조금씩 뚫어 간 통로, 도굴범일까? 홍 박사는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그 통로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

어느 사이에 석실 문 앞까지 통로를 뚫어 놓은 것을 보고 홍 박사는 경악한다. 석실의 문 언저리에는 인부인 듯한 몇몇 사람 들이 시체가 되어 누워 있다. 비밀스럽게 굴을 파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자 비밀 유지를 위해 인부들을 처치한 것이 틀림없다. 통 로 주변에 폭약이 매설되어 있는 것도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석실 문으로 들어서는데 또 하나의 낯익 은 얼굴이 시체가 되어 누워 있다. 자신의 동료 커크 교수다. 알 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싹 말라서 거의 미라가 되어 버린 참혹한 모습이다. 안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스페란토 다. 에스페란토라 홍 박사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계획은 완벽하다. 분명 세크메트의 분노는 다시 한 국 땅에 퍼부어질 것이다.”

분명 커크 교수의 목소리다. 커크 교수는 죽었는데 어째서 그 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인가?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석실 안으 로 뛰어들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카프너는 그라인더로 제 단을 자르고 그 안에서 미라를 반쯤 끄집어낸다. 그리고 미라의 심장 부분을 손으로 꺼내 맞은편에 미소를 흘리고 있는 또 하나 의 커크 교수에게 막 건네주고 있는 참이다.

“이 안에 세크메트의 눈이 있을…………. 앗!”

카프너와 가짜임이 분명한 커크 교수가 홍 박사를 돌아본다.

홍 박사는 그만두라고 소리를 치며 비상용으로 준비했던 권총을 꺼내 든다. 그러나 가짜 커크 교수가 이상한 눈빛으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권총이 갑자기 손에서 없어진다.

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간 이동. 역시 대단한 자로군.”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홍 박사의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도 대체 저항할 수가 없다. 뼈마디가 부딪히며 금방이라도 짓눌린 고깃덩어리가 될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고대의 사악한 힘일까? 언뜻 죽음의 신 아누비스의 조각상이 보인다.

“너는 무엇 하고 있느냐? 평화로운 안식의 수호자로서 이런 사악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참이냐?”

몸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친다.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의 몸속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같이 있는 것 같다.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원을 했기 때문에 아누비스의 영이 홍 박사의 몸으로 들어간 거구나.”

그 후의 기억은 매우 혼돈되어서 거친 일이 있었다는 것 외에 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지, 아니면 준후가 딴생각을 하느라 힘을 집중하지 않아서인지 홍박 사와 아누비스의 영은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준후는 한숨을 내쉬면서 방금 본 것과 들었던 이야기를 한데 엮어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 보았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블랙서클은 그 석실이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세크 메트 신을 숭배하는 곳임을 알고 자신들의 하수인 카프너를 그 곳에 침투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석실의 문을 여는 것을 지 연시키며 비밀리에 다른 통로를 파서 먼저 석실에 들어가 지금 퇴마사들이 알아내고 있는 사실들을 먼저 알아낸 뒤, 미라의 심 장을 떼어 훼손함으로써 세크메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준비 작업을 마치고 커크 교수를 살해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나서 이집트인 주술사로 하여금 커크 교수로 변장하게 하여 계 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홍 박사는 그 와중에 뛰어들었다가 전모 를 파악하게 되고 아누비스의 영과 함께 그 일을 막아 보려 했지 만, 역부족으로 도리어 블랙서클의 하수인들에게 당하게 된 것 이다.

그 이후의 일은 자세히 준후의 눈에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충 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홍 박사와 홍 박사의 몸에 빙의된 아누 비스의 영은 같이 저들에게 대적하다가 쓰러져서 마침 가지고 있던 편지를 손에 들고, 마지막 부분에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문이 이미 열려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발견한 카프너 또는 가짜 커크 교수는 계획에 없었던 홍 박사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편지의 겉봉을 써서 대신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준후는 생각을 마치고 눈을 떠서 주위를 돌아보다가 박 신부 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준후는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치켜 올렸다. 박 신부는 떨떠 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으나, 내심 궁금했 던 문제들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아 약간은 개운하기도 했다.


“일어나요. 일어나. 다 됐어요.”

민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승희는 눈을 떴다. 조금 더 자면 원이 없을 것 같았지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승희는 감기려 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연희는 이미 일어나 연구 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민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 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먼지 부스러기만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보존이 잘돼 있어서 일이 쉬웠네요. 그런데 문장이 길어서 해석 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요.”

승희가 눈을 비비며 씩 웃었다.

“금방 될 거야.”

승희가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연희의 탄성이 들려왔다.

“와우!”

민지가 어느새 약품 처리를 한 파피루스를 테이블 위에 넓게 펴 놓은 것이 보였다. 몇 군데 귀퉁이가 해지고 불에 그은 자국 과 삭아버린 구멍들이 있었지만 파피루스 위에 씌어 있는 문자 들은 대부분 또렷해서 식별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사토니 우쟈티의 생애………….”

연희는 파피루스의 문구들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글자 수가 많아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승희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파피루스와 침착해 보이는 연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살살 웃으면서 말했다.

“연희 씨, 나는 별로 필요 없지요?”

연희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꼭 필요한데요.”

승희가 입맛을 다시며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멀리 가지만 않는다면 주무셔도 돼요. 승희 씨에게 도움을 받아야할 문구나 사건들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깨울게요.” 

“그러세요. 헤헤헤.”

승희는 연희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테이블 한쪽 구석에 앉아 팔베개를 하고 금세 곯아떨어졌다. 연희는 그런 승 희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승희는 눈을 떴다.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에서 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승희는 입맛을 다시며 휴대전화를 귀에 갖 다 댔다. 연희는 온 정신을 몰두해서 상형문자를 해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보세요?”

“승희냐? 뭔가 알아낸 것이 있니?”

승희는 연희를 쳐다보았다. 연희에게 진척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시키면 방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해독이 끝나지 않았어요.”

“음! 여기선 준후가 소혼술을 써서 알아낸 것이 좀 있지.”

“아, 예, 그렇군요.”

“대강이라도 윤곽이 잡히면 바로 알려 주겠니? 어쩌면 지금껏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보다 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예, 알았어요.”

승희는 전화를 끊고는 연희가 계속 휘갈겨 써 내려 가고 있는 종이들을 살며시 집어 들었다. 잠을 더 청하기도 뭐했고, 파피루 스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다. 언뜻 보니 한두 시간 가지고 될 일도 아니었다. 연희의 실력으로도 한두 시간 동안 겨우 십오분 의 일도 번역하지 못했으니. 아무리 언어에 능통한 연희로서도 하루 이상의 작업이 필요할 만큼 그 내용은 길었다.


박신부는 잠에서 깨어난 현암, 준후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앉 아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백호는 난장판 이 되어 버린 박물관 쪽의 일을 수습하느라 눈 한번 붙이지 못하 고 아직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일은 이제 대강 정리가 되고 있었다. 그동안 알아낸 사실들 과, 준후의 소혼술로 홍 박사와 커크 교수의 실종에 관한 내용은 거의 완벽하게 파악이 되었고, 블랙서클의 음모도 뒤늦은 감이 있었지만 밝혀내기는 한 셈이었다. 즉, 여태껏 퇴마사들은 블랙 서클의 계획을 근본적으로 뒤엎지 못한 채 뒤만 따라다닌 꼴이 었다.

애당초 석실이 공개되기 전부터 카프너와 가짜 커크 교수의 손에 의해 미라가 훼손되어 세크메트의 분노를 이끌어 내는 1차 적인 작업은 마친 셈이었고, 그 후 전시회를 한국에서 열리게 만 든 후 미라를 소생시키고, 다시 미라가 파괴되도록 하기까지 모 든 것이 블랙서클의 계획대로 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계획은 교묘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홍 박사의 편지에 쓰인 상형문자 를 그대로 놔둔 것, 박물관의 토기 더미 중에서 깨어진 카노프스 단지의 조각을 넣어 미라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든 것 등도 그들 의 계획대로였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커크 교수의 정체를 미리 알고 붙잡았을 때는 아직 인간의 내장을 제물로 바치기 전이어 서 어쩌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공간 이동의 수법 때문 에 미라는 살아났고 그다음에도 미라의 심장을 돌려줌으로써 미 라를 진정시킬 수도 있었으나, 가짜 커크 교수가 목숨을 버리면 서까지 심장을 파괴함으로써 결국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 분명 했다.

“제기랄! 이번에는 왜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는거지?”

현암이 화가 난 듯 소리치자 박 신부가 고개를 저으며 현암을 달랬다.

“실망하기는 이르네. 아직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니니까. 내 생 각으로는 그 가짜 커크 교수는 전시회가 개막될 때 제물을 바치 고 미라를 되살림으로써, 미라가 파괴되고 분노가 쏟아지기를 바랐던 것 같아. 그러면 더욱 큰 혼란이 올 테니까. 어쨌든 그런 사태는 막지 않았는가?”

“그러나 세크메트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알아내야지. 나 혼자 생각일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아 까 준후가 읽어 낸 대로 그건 네 사도의 영이었지 세크메트라는 신의 영은 아닐 거야. 물론 세크메트의 힘을 끌어다 쓰는 자들의 영이고 또 고대 영들이니만큼 강하겠지만, 그들의 의도를 안다. 면 어떤 양상으로 덮쳐 올 것인지 생각해 내야만 해.”

현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몇 가지 단서들이 있어요. 우선 가짜 커크 교수가 한 말부터 생각하면 자신의 고국, 즉 이집트에 원래 퍼부어질 분노를 이리 로 옮긴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 피바다가 몰아칠 것이라는 말도 했어요. 그 말로 미루 어 보면 대규모로 사람들이 죽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박신부가 인상을 찌푸리며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너는 아까 세크메트의 네 사도의 영을 보았지? 그들 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을 해칠 수 있겠니?”

“글쎄요, 강한 영이기는 했지만 그런 물리력을 행사한다고 볼수는 없을 정도예요. 몇몇 사람이라면 몰라도.”

현암이 말했다.

“그러면 홍수나 해일, 지진이나 대화재 같은 것은?”

준후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돼요. 아주 높은 신의 힘과 의지가 있지 않으면 그런 일들은 불가능해요.”

“그러면 그 영들이 전에 아누비스의 영이 홍 박사의 몸에 붙 었듯 다른 사람에게 빙의될 수는 있니? 그래서 그 몸을 조작하는…..”

준후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능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아까 홍 박사님의 영을 소혼했 을 때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집트 고대 영들의 빙의는 우리의 빙의와 조금 다른 듯싶어요. 정신은 그대로 두고 몸만 움직이게 하는 것 같더군요.”

“어쨌거나 가능한건가?”

“예, 그렇겠지요.”

박신부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몇몇 사람에게 빙의된다고 해도 그렇게 특별한 힘을 부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현암이 인상을 찌푸리고 뭔가를 생각하면서 말했다.

“몇몇 사람……. 몇몇 사람이라고요?”

박신부가 말했다.

“다시 말하면 몇몇 사람에게 빙의되었다고 전 국토에 피바다가 몰아치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말일세.”

현암이 무슨 생각이 든 듯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요. 몇 사람에 대한 빙의라….”

준후가 눈이 똥그래져서 물었다.

“현암 형,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혹시………….”

현암이 몹시 흥분된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크메트…………. 세크메트는 전쟁과 살육의 신이지. 전쟁…………. 아까 가짜 커크 교수는 분명히 말했어. 이 땅이 아슬아슬하고 위 험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자신의 고국 대 신에 이 땅에 세크메트의 분노가 퍼지게 한 거야. 그래, 분명해. 아마 그자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는지도 몰라.”

박신부의 몸이 움찔했다.

“전쟁이라니? 몇 사람을 빙의시키는 정도로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단 말인가?”

현암이 흥분한 듯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 몇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 면 국가원수에게 빙의되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현암군, 지금은 전제 왕권 시대가 아니야. 국가 원수 한 사람 이 독단적으로 전쟁 결정을 내린다고 그게 곧바로 수행되리라는 법은 없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 하네. 절대로!”

현암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군요. 아무리 생 각해도 전쟁이 아닌 다른 일상적인 재해나 그런 일반적인 방법 으로는 세크메트의 분노라고 할 만한 큰일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아요.”

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 현암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전쟁만큼 참혹한 것 은 없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아까 석관에 씌어 있던 말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의 여사제가 세크메트의 힘을 이용하여 적군을 물리 쳤다고 되어 있었잖아요. 혹시 그 방법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을 까요?”

박신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글쎄, 나로서는 확신이 가질 않는구나. 그러나 생각을 해보니 그것도 분명히 타당성이 있는 말이기도 하군.”

현암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렇게 언제까지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면, 뭘 어쩌자는 거지?”

박신부가 묻는 말에 현암은 문 쪽으로 몸을 향하며 말했다. “연희 씨가 해석하고 있는 파피루스, 그걸 빨리 보고 싶군요. 조금이라도 빨리 그 내용을 봐야 감이 잡힐 것 같네요.”

박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 신부는 막 뛰쳐나가려 는 현암을 제지하고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구태여 찾아갈 필요 없이 이걸로 물어보면 되니까 서두르지 말게.”

박신부는 휴대전화의 단추를 누르기 시작했다. 다시 승희에 게 전화를 하자 아직도 진전은 없고 전반적인 내용을 다 해석하 려면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릴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면 현재까지 해석된 부분만이라도 알려 줄 수는 없어?”

현암이 박 신부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강권 하는 통에 승희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리고 답했다.

“앞뒤의 문맥을 맞추어서 해석을 하지 않으면 정확한 뜻이 나 오지 않는다고 해. 그리고 아직 극히 일부분밖에 해석되지 않았 어. 나도 보았지만 아직은 여사제 사토니 우쟈 티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여사제가 되기까지의 수련 과정밖에 나오지 않았어.” 현암으로서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현암은 휴대전 화를 끊고 이리저리를 초조하게 걸어 다녔다. 박 신부가 초조해 하는 현암을 보고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고개를 돌려 준후 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후야, 혹시 그 네 사도의 영이 어디로 갔는지 추적할 수는 없겠니?”

준후가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것 같아요. 네 사도의 정체를 알 수가 있어야죠.” 

준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박 신부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이면서 준후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소파에 길게 몸을 뉘었 다. 힘을 쓴 준후는 피곤했던지 연신 하품을 하며 침대로 갔다. 

“현암 군, 자네도 그렇게 어슬렁거리지 말고 시간이 있을 때 쉬어 두게나.”

현암은 박 신부의 권유에 하는 수 없이 소파에 몸을 묻기는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전쟁이라……. 고작 네 영 정도의 영력을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단 말인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볼 때 전쟁 유발 가능성은 세계에 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내에서는 전쟁의 위험을 크 게 우려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극히 위 험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전쟁이 어디 한두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어떤 방법을 써서 그들의 힘만 가지고 전 쟁을 일으키려 하는지는 도대체 알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 았으나 전쟁이라고 단언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또 어떻게 생각하면 전쟁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한참 현암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백호가 방 안 으로 들어섰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현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세크메트의 분노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군요.”

백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에 문 담배를 빙그르르 돌렸다.

“세크메트의 분노라는 것은 정말 그렇게 무서운 것일까요? 이제 대강 끝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겁니다. 블랙서클에서 그토록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가짜 커크 교수가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일을 제대로 수행했 으며, 또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 가 겪은 일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 “니다.”

백호의 안색이 변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백호가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종류의 일이지요?”

현암은 백호의 표정이 변한 것이 조금 이상했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글쎄요. 아직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상대는 네 영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니 홍수나 해일, 지진 같은 초자연적 인 일은 아마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추측에 불과할지 모르겠지 만 예를 들면 전쟁 같은 인위적인………..?”

평소 침착한 백호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현암은 놀라서 말을 끊었다.

“왜 그러십니까?”

백호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현암에게 이야기했다. 

“전쟁, 전쟁이라고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 신부가 말했다.

“백호 씨도 저희와 여러 번 같이 일을 했으니 영의 존재와 그 힘에 대해서는 믿는 바가 있으실 겁니다. 영에 빙의가 되면 그 사람은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있게 되지요. 즉, 그 영에 게 조종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물론 한두 사람을 해치는 정도의 일은 가능해질지도 모르고 더 많은 사람을 해칠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 운 일입니다. 그런 일은 여러 사람의 판단과 의사 결정이 합쳐져 야 되는 것이지, 정신 나간 상태의 빙의된 몇 사람이 전쟁을 일 으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호가 심각하게 담배를 이로 깨물었다. 항상 침착하던 백호 의 태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기에 박 신부와 현암, 준후까지 도 의아해했다. 백호는 그렇게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서 있 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지요. 물론 몇 사람의 힘만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뭐죠?”

“그 몇 사람이 혹시 기동 훈련중인 야전사령관일 때는 어떻겠습니까?”

“야전사령관이요?”

현암이 눈을 크게 떴다.

“기동 훈련중인 야전 사령관은 대개의 경우 독자적인 명령 수행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휘하의 부대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물론입니다.”

“그런데 백호 씨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백호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 이 흐르고 비로소 백호가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저는 지금 비공식 소식통으로부터 기동 훈련중 이던 제6기계화 여단이 갑자기 모든 통신을 두절시키고 서울 쪽 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 후방의 네 개 여단이 급히 진로를 차단시키기 위해 이동하는 중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리에 박 신부와 현암, 준후는 정신이 멍해 지는 것 같았다. 전쟁……. 이건 타국과의 전쟁이 아니다. 그러 나 하나의 여단 병력이 서울 쪽으로 진군을 하게 된다면 그 와중 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 었다.

“이것이 혹시 세크메트의 분노를 터뜨리는 방법? 이 땅에 피 바다를 몰고 오게 하는 바로………….”

준후가 중얼거리자 현암은 다급하게 백호에게 물었다.

“그 소식이 확실합니까? 제6기계화 여단이 다른 명령이나 특별 작전을 수행하는 것 아닙니까?”

백호는 떨리는 손으로 찢어진 팩스용지 한 장을 현암에게 내 밀었다. 거기에는 간략한 통신문을 옮겨 적은 것이 보였다.

수신 100호

긴급 사태

현재 제6기계화 여단은 외부와의 모든 통신을 차단시키고 자 체 통신망만을 가동한 채 서울 쪽으로 진로를 옮기고 있음. 제6 기계화 여단의 여단장인 장인석 소장 및 휘하 참모들의 여단 내 •부 메시지에 의하면 그들은 수도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였기 에 이를 급히 제압하기 위하여 진군하는 것이라고 휘하 장병들에 게 말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됨. 군에서는 이 뜻밖의 사태에 대 비하여 장인석 소장 및 휘하 참모들에게 가능한 수단을 다하여 통신 접촉을 시도해 보았으나 현재까지 전혀 반응이 없음. 제6기 계화 여단 휘하의 장병들은 실탄 및 무기를 장전한 채 이동 준비 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됨. 이에 군에서는 이 사실을 절대 비밀에 붙이는 한편, 근교에 있는 네 개 여단을 그 진로에 투입하 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음. 국민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 면 대규모의 혼란 및 공황 사태, 북의 남침 사태까지도 발생할 것 에 대비하여 작전을 서두르고 있는 중임. 장인석 소장이 어째서 그러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제6기계화 여단은 이번 기동 훈련을 이용해 각종의 특수한 최첨단 장비들을 시험하 는 중이라 만약 최악의 사태에 내전이 발발할 경우, 피해는 천문 학적 수치에 이를 것으로 보임.

현암은 망연히 팩스용지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기 우라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로 들어맞았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 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현암은 빠른 목소리로 준후에게 물 었다.

“준후야, 이집트 고대의 영들이 어떻게 서울의 정세 같은 것을 알 수가 있지? 장인석 소장이 우리가 염려하는 대로 세크메트의 사도들의 영들에게 빙의된 것이라면 어떻게 제정신을 가지고 부 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리며, 군을 지휘해서 서울로 몰고 갈 정 신을 가지고 있는거지?”

준후가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요. 빙의가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상실 하게 돼요. 언뜻 보기에도 빙의라고 볼 수는 없는데요.”

박신부가 말했다.

“도대체 뭐야? 그러면 이 일이 지금 우리가 겪었던 세크메트의 사도들과 상관이 없는 일이란 말인가?”

백호가 재빠르게 말했다.

“세크메트건 사도건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야말로 현재 당면한 국가의 가장 큰 위험 사태입니다. 제6기계 화 여단은 저도 시찰해 본 바 있어서 부대의 특성을 조금 압니다 만, 사단 병력 이상의 화력과 최신 장비들로 무장되어 있는 최첨 단 정예 부대입니다. 이 부대가 정말 서울로 진군을 한다면 걷잡 을 수 없는 파국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현암이 백호의 말을 가로챘다.

“이 일이 정말 세크메트의 분노와 관계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백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 다만,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 과 다니면서 이런 믿어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논리 적인 상황보다는 저 자신의 예감이나 추측을 더 믿고 있는 편입니다.”

백호는 잠시 말을 끊고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서 던졌다.

“그러나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할 순 없지요. 심증만 있을 뿐 물증 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누가 이 일을 믿어 주겠습니까?” 

현암이 초조한 듯 발을 굴렀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어떻게요?”

준후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세크메트의 네 사도들의 영에 대해서는 제가 투시 를 할 수는 없지만 그 장인석 장군이라는 사람을 투시를 해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승희 누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그대로 읽어 낼 수 있으니 말이에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승희, 승희에게 얼른 이리로 오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백호 씨, 당신은 장인석 소장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 사진이나 경력이라든가, 하여튼 그런 자료들을 가능한 한 빨리 준비해 주십시오.”

백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 저도 지금 명령받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지 금은 비상시국이니까요.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백호를 현암이 타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일은 제 예감으로도 분명 세크메트의 네 사도의 영들과 관 련이 있습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겠지만 서둘러야 하는 일입 니다. 승희에게 투시를 시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백호가 머뭇거리더니 결심이 섰는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좋습니다. 저도 믿어 보지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약의 사 태에 대비해야죠. 저도 이번 일은 이상하게 예감이 불길했어요. 그러나 만약, 정말로 고대 영들의 힘에 의해 이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여러분에게 수습을 부탁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능력을 다시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백호가 말하는 사이 박 신부는 어느새 휴대전화의 번호를 눌러 대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도 몹시 길고 지루하게 여겨졌다. 잠시 후 승희가 전화를 받자 박 신부는 빠른 소리로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야, 현재 우리나라 군대 중 제6기계화 여단이라는 곳의 사령관인 장인석 소장에 대해서 빨리 투시를 해 줄 수 있겠니? 급한 일이다.”

수화기 너머로 승희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 장인석 소장이라고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요. 너무 막 연해요. 고유의 특징이라거나 신상명세 같은 것을 알아야 감을 잡을 수 있어요.”

박 신부가 승희와의 통화 내용을 백호에게 전달해 주자 백호 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박 신부에게 말했다.

“그러면 제가 속히 자료를 수집해서 승희 씨에게 전달해 드리 겠습니다. 그런데 승희 씨, 지금 어디에 있죠?”

박신부가 아예 백호에게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백호는 휴대전화에 대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희는 백호에게 자신 이 있는 곳을 밝혔다.

“승희 씨? 가만, 자료를 준비하고 거기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그러면 승희 씨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사이에 제가 자료를 준비해 놓을 테니까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일 것 같군 요. 자료를 받는 즉시 장인석 소장에 대한 투시, 맞나요? 하여간 그 일을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수화기에서 승희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갑자기 군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을 투 시해 달라고 하시는 거죠?”

“자세한 설명은 도착하고 나서 해 드리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세크메트의 분노에 관한 일이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정말 예언대로 수만, 아니 수십만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인지 도 모릅니다. 물론 승희 씨의 답이 나와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요.”

“알았어요. 곧 출발하도록 하지요. 연희 씨의 일보다 그쪽의 일이 더 중요할 것 같군요.”

“그쪽에서도 승희 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까?” 백호는 얼굴을 돌려 눈앞에 앉아 있는 박 신부와 현암에게 빠 른 목소리로 물었다.

“저쪽에서도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일은 어떻습”니까?”

현암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 일도 중요하지만 투시를 빨리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할 것 같군요.”

그러자 백호가 잠시 인상을 쓰면서 생각을 하다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승희 씨, 그러면 그 자리에 그냥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 학교 문 앞에 저희 요원이가 있지요?”

“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됐습니다. 그러면 제가 자료를 구하는 즉시 요원에게 전달을 해 주지요. 그다음 그 자리에서 투시를 해서 결과만 알려 주십시오.”

“예, 알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투시를 하라는 거죠?”

백호가 주변을 살피고 인상을 찌푸렸다가 입을 열었다. 

“전화상으로는 보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내용을 적은 종이를 같이 전달해 드리죠.”

“알겠어요.”

백호가 통화를 마치자 돌아가는 상황을 눈을 굴리며 말똥말똥 바라만 보고 있던 준후가 말했다.

“이것을 승희 누나에게 전달해 주세요.”

준후는 백호에게 세크메트의 눈 한 조각을 내밀었다. 좋은 생각이었다.

“세크메트의 눈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마음속으로 대화가 가능하니까 있는 편이 좋을 거예요.”

박신부도 준후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 맞다, 준후야. 세크메트의 눈을 이용하면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많을 것 같아. 그리고 세크메트의 눈을 연희 씨에게 전해 주면 파피루스 해독 작업을 하면서 알아낸 사실들을 중간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알 수도 있지. 그렇지 않겠니?”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대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을 쳐다만 보고 있던 백호가 일행에게 말했다.

“그러면 어쨌거나 이 보석도 승희 씨에게 전달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현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호는 알았다는 듯이 세크메트의 눈 을 받아들고 고개를 까딱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준후는 세크메트의 눈을 전달하는 사람이 놀랄까 봐 일부러 세크메트의 눈을 몸에서 떼어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백호가 나가고 나자 셋 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내전이라……………. 이 일이 정말 세크메트의 네 사도들의 영력에 의한 일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현암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 신부님?”

박 신부가 안경을 벗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 같은 숨소리를 내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만약에 이 사태가 영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 그러나 만약 영들의 힘에 의해 장 인석 소장이 빙의되어서 기계화 여단이 진군하고 있는 것이라 면, 우리가 막아야 해.”

준후가 말했다.

“어떻게 막지요? 빙의된 사람은 영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영을 떼어 낼 수 있지만 그러한 방법은 멀리 떨어져선 쓸 수가 없어 요. 그 사람의 바로 옆으로 가야 하는데.”

현암이 준후의 말에 덧붙였다.

“맞습니다. 첩첩이 보호되고 있는 야전 사령관, 그것도 실전 태세로 진군하고 있는 기계화 여단의 중앙에 위치해 있을 사령 관에게 어떻게 접근한단 말입니까?”

박신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힘든 일이라는 건 아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해내야지.”

준후가 나름대로 한참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군부대의 경비를 뚫고 들어가 장인석 소장을 직접 만 나야 하는데요. 아, 그래요! 그 뭐더라? 음…………… 면회 신청을 하 면 받아 줄지도 몰라요!”

현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우리 같은 사람이 그런 비상 기지에 면 회신청을 한다고 만나 주겠니? 잡아서 구금시켜 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박신부도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어떻게든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어. 그러나 정상적인 방법 으로는 첩첩이 보호되고 있는 장인석 소장과 직접 만날 수 없을 것 같군. 제6기계화 여단은 장인석 소장의 명령하에 진군중이기 때문에 아마 전시 태세와 똑같은 경비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거 야. 내가 옛날에 군에 있을 적에 비슷한 훈련을 많이 해서 알고 있지. 더구나 그 부대 장병들은 서울에서 발생된 모종의 쿠데타 를 막기 위해 진군하는 것으로 믿고 있을 테니, 전시에 준한 상 태로 알고서 사령관의 명령만을 듣고 있을 거야. 그러나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장인석 소장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일이 진전되다니. 아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야전 사령 관한 사람의 생각이 변했다고 전 부대가 미친 짓을…… 흠!”

준후가 말했다.

“장인석 소장 혼자는 아니지 않을까요? 세크메트의 사도들은 수가 네 명이나 된다는데?”

현암이 덧붙였다.

“맞습니다. 아마 한 명은 장인석 소장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머 지 셋은 휘하의 주요 참모들에게 씌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군 요.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그들이 상황을 알고 지시를 내리는 것 을 보면 분명 제정신을 가지고 있을 텐데…………. 영들에 의해 빙의 되었다면 그러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잖습니까?”

준후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맞아요. 빙의는 아닐지 모르지만 환영, 환영술을 쓰면…….”

박신부가 준후 쪽을 쳐다보았다.

“그건 뭐지?”

준후가 말했다.

“글쎄요. 그들은 분명 이집트 쪽의 주술을 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을 꼭 빙의시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오감만을 지배하여 상황을 비뚜 로 보이게 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은 주술로도 가능해 요. 즉, 정말로 서울에 쿠데타가 일어났다거나 마주한 군대가 아 군이 아니라 적군으로 보이게끔 만든다면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저렇게 만들 수 있겠죠.’

박신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환영을 보이게 하는 영들도 상대의 사정을 아주 소상 히 알아야 할 것 아니겠니? 고대에서 막 깨어난 영들이 우리나라 의 사정이나 군 체제, 작전 상황 같은 것을 다 알고 있지는 못할 텐데.”

준후가 말했다.

“꼭 그런 것은 아녜요. 장인석 소장에게 수도로 진군해야 한다 는 단순한 생각, 아니, 신념만 심어 주고 나면 나머지는 장인석 소장의 이성과 판단에 따라서 알맞은 상황을 환영으로 스스로 만들어서 보게 될 거예요. 원래 환영 상태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요.”

현암과 박 신부는 망연하게 생각에 잠겼다. 준후의 말이 사실 이라면 제6기계화 여단이 영들의 조종을 받아 서울로 진군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환영 내지는 강렬한 의식으로 헛것을 보 는 상태와 비슷하게 되면, 세부적인 상황을 알려 주지 않더라도 나머지는 자신의 판단하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 가며 환 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은 오히려 빙의 상태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단순한 빙 의 상태라면 장인석 소장의 판단력이 떨어진 것을 부하들도 눈 치챌 것이고, 그런 경우라면 혹시 부하들이 장인석 소장의 명령 을 듣지 않게 되어 맹목적인 진군을 멈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장인석 소장이 그러한 환영에 현혹된 채 자신의 능 력을 다하여 서울로 진군하고 있다면, 휘하의 부하들에게도 명 령이 합리적이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게끔 장인석 소장 자신 이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군 체계에서는 사령관 이 내린 명령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증거가 발 생되지 않는 한, 아니, 증거가 있더라도 어지간해서는 항명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은 초조하게 삼십 분가량이나 기다렸으나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삼엄하게 보호되고 있는 군부대, 그것도 전시 상태에 돌입한 부대의 내부로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 었다. 박 신부는 두어 번 승희에게 전화를 했으나 작업도 별로 진전이 없고 자료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전갈뿐이었다.

박 신부는 승희에게 자료가 도착해서 투시가 끝나는 대로 바 로 이쪽으로 연락해 달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아까 백호가 휴대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은 통신상 보안의 문제가 된다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해 내고, 이쪽으로의 연락은 휴대전화가 아닌 세크메 트의 눈으로 하라고 했다.

승희가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고 박 신부는 현암 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세크메트의 눈의 정 확한 사용법은 잘 알 수가 없었으나 마음을 통하고자 하는 양측 의 사람이 각각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들고 있으면 서로 마음이 전달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박 신부가 현암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들고 있으라고 한 이유 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현암이 지금 금방이라도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갈 기세였기 때문이다. 현암에게 일을 맡겨 놓으 면 일단 자제하고 승희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기다릴 것이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이는 어리지만 준후가 도리어 훨씬 침착했다.

박신부도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승희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현암은 세크메트의 눈 을 손에 들고 계속 초조하게 정신을 집중하면서 “제기랄”이라 “거나 “아직도 뭐 하는 거야” 등의 푸념 섞인 소리들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머릿속에 퍼뜩 뭔가가 스쳐 지나가는지 긴장된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승희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요.”

박 신부와 준후는 후다닥 현암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몸을 굽 혔다. 준후가 물었다.

“뭐라고 해요. 현암 형? 장인석 소장의 상태는?”

현암이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장인석 소장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는군. 그러니까 그 사람의 감각이 마비, 아니 꼭 마비는 아니고, 뭐라고 할까. 꿈속 에서 헤매는 상태라고나 할까? 장인석 소장은 서울이 불법 쿠데 타 내지는 걷잡을 수 없는 폭동 상태로 치닫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 빨리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다는군. 그 래서 참모들하고도 의견 교환을 자주 하고 있는 모양이야. 참모 들도 장인석 소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군. 참모 들이 하는 소리를 승희가 장인석 소장을 통해서 엿들을 수는 있 는 모양이야.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진로를 막고 있는 다른 부대 들을 이적 단체나 완전한 적군으로 상정하고 진격을 할 것이냐 말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중이래. 큰일 났군.”

박 신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비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멘, 최악의 사태야. 우리가 추측했던 것이 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암은 들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박 신부에게 건네주었다. 박 신부가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들자 승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 옆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신부님! 신부님이세요?

응. 그래, 승희야, 우리의 생각엔 장 소장은 지금 환영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준후가 얘기해 주었지.

환영 상태요? 그건・・・・・・・

박 신부는 문장으로 전하려다가 아까 준후가 해준 얘기를 기 억에 떠올렸다. 그러자 내용이 승희에게도 전달된 모양이었다. 

아, 예. 알겠어요. 그렇다면 큰일이네요. 어떻게 할까요?

승희야, 일단은 거기서 연희 씨와 해독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라. 그 리고 뭔가 알아낸 사실이 있으면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서 우리와 연락 하자꾸나. 파피루스의 내용을 해독해서 세크메트의 네 사도들의 정체를 알아내고, 장인석 소장과 참모들을 환영에 빠뜨리게 한 수법이나 이유 에 대한 단서를 잡지 않으면 안 돼.

신부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현암 군과 준후는?

이쪽의 일은 일단 우리에게 맡겨 두렴. 뭔가 방법을 생각해 내야지.

일단 너는 그 파피루스를 해석하는 데 최선을 다해. 알았지?

하지만 제가 여기서 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가 그리로 갈게요. 해독 작업은 대부분 연희 씨가 하고 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요.

연희 씨 일을 네가 도와야지. 너는 고고학을 전공했고 아무래도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많잖아. 이집트학 책도 가지고 갔을 것이고.

승희가 마지못한 듯 승낙했다.

예, 알겠어요. 뭔가 알아낸 사실이 생기면 수시로 연락을 할 테니까 세크메트의 눈을 꼭 들고 계세요. 일단 제 생각이 읽히면 그쪽에서 판단 하기가 혼란스러울 테니 제가 세크메트의 눈을 내려놓고 있지요.

응, 알았다. 최선을 다해서 해독 작업을 하렴. 딴생각일랑 일절 하지 말고. 알았지?

박신부는 승희에게 그곳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두 번 세 번 다짐을 했다. 사실 승희의 투시 실력이라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관이 없었고 또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이제는 어쩌면 제6기계화 여단에 침투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어린 준후까지도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 렸지만 준후 없이는 일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신부는 세크메트의 눈을 든 채, 현암과 준후의 얼굴을 보았 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현암과 준후에게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린 준후까지도 그곳으로 가서 세크메트의 분노를 거두고 장인석 소장의 환영 상태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신부는 한숨을 쉬며 연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 하기는 어렵네만 솔직하게 말하겠네.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 같이 가세나.”

현암이 즉시 답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준후는.”

준후가 인상을 쓰면서 현암을 째려보았다.

“현암 형, 내가 혼자 남아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가진 재주들이 그렇게 보잘 것 없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현암은 더 이상 참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현암은 재빨리 일어나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안쪽을 감시하고 있던 요 원에게 백호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요원은 무전기를 작동하여 백호를 바꿔 주었다. 현암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백호 씨, 급히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백호가 말하기도 전에 현암은 무전기를 꺼 버렸다. 잠시 후에 백호가 헐떡이며 올라왔다.

“뭐죠? 장인석 소장에 대한 자료는 아까 주신 이상한 보석과 함께 승희 씨에게 도착했을 텐데요.”

현암은 백호의 말을 듣다가 말고 중단시켰다.

“그건 압니다. 연락을 받았지요. 그런데 잠깐만요.”

“또 무슨 일입니까? 하도 놀라는 일이 많아서 이제는 여러분 목소리 듣기도 겁나는군요. 하하하.”

박신부는 주변을 살펴본 후 낮은 목소리로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 씨, 지금 이야기를 좀 해도 상관없겠습니까?”

“예. 상관없습니다.”

박 신부는 현암과 준후의 얼굴을 힘든 듯이 바라보다가 숨을 가다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호 씨, 저희를 제6기계화 여단 부근으로 속히 데려다 주십시오.”

백호는 깜짝 놀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긴장된 목소 리로 말했다.

“왜 그러시죠? 그 근방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현재 제6여단은 아직까지는 전투태세에 돌입해 있진 않지만 전방의 다른 네 개 여단과 강력하게 대치중입니다. 군의 상황을 탐지해 보니 군 수뇌부에서도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장인석 소장 이외는 외부 와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어 있고, 장 소장은 외부의 통신에 대 해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승희 씨에게 부탁을 해 보아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여하튼 현 재 상태로 보아 장인석 소장의 정신 상태가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만은 분명합니다.”

현암이 승희가 이미 투시를 마쳤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백호가 탄식을 채 발하기도 전에 현암이 말했다.

“말을 이상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요? 헛소리를 한다는 뜻인가요?”

“저도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다 만 상황을 완전히 곡해해서 듣고 있는 듯한, 그런 상황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동문서답을 한다고나 할까요?”

이미 승희에게 장 소장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 셋은 장인석 소장이 환영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거의 확 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급했다. 분명 제6기계화 여단 이 서울로 진군중이라면 조금이라도 서울에서 멀리 있을 때 사 태를 해결해야만 했다. 현암은 준후의 보충 설명을 받으며 백호 에게 장 소장이 현재 환영에 홀린 상태라는 것을 간략히 이야기 하고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백호 씨, 만약 그 일이 환영에 의한 것이라면 저희가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군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걸 알 수는 없을까요?”

백호는 주저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런 군 내부의 최고 기밀에 해당하는 것은 저도 알지 못할뿐 더러, 설령 알고 있다 해도, 또 아무리 여러분이라 해도 말씀드 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의 사태가 지속되고 제6기계화 여단이 계속 진군하려 한다면 단호한 방법을 사용하겠죠.”

박신부가 긴장하며 물었다.

“그건 어떤 방법을 말하죠?”

“이러한 일을 주도한 것은 장인석 소장 이하 소수 참모들에 불 과할 것으로 군 수뇌부에서도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 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방법을 택하려 하겠지요. 저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라구요? 그렇다면 그건 어떤 방 법을 의미합니까?”

“정밀한 폭격이나 포격 또는 미사일 공격 등의 방법으로 사령 부만을 와해시키는 방법이 되겠지요.”

일행은 묵묵히 백호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성공한다면 장인 석 소장 이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억울한 희생자가 되겠지만, 그 이상의 피해 없이 일이 진정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억울한 몇몇을 그대로 희생시켜도 되는 것인가? 그들도 나름대로의 인 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현암은 생각했다. 그들도 알고 보면 충성스러운 군인이었고 외부의 악랄한 힘에 의하여 반쯤 조종되 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을 억울하게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백호 씨, 저희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저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영들을 제거해 보겠습니다.”

퇴마사들의 좌장 격인 박 신부의 말에도 백호가 고개를 젓자 현암은 맥이 풀렸다. 백호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그 일은 제 권한을 넘어도 이만저만 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투입하고 그 시간 동안 군 작전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군에서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무조건 일 을 수행해 낼 겁니다. 영능력이나 주술력, 초능력 같은 것을 저 도 이제야 믿게 되었습니다만, 고위층에서 그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군 수뇌부라면 더 심할 테고 요. 여러분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현암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까는 분명히 백호 씨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나서서 성공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피 해 없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요. 우리 말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군부대의 작전을 지연시킬 수는 없습니 다. 제게도 그런 힘은 없어요. 설혹 힘이 있어도 그런 일은 아무 도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현암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군부대에서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폭격이나 미사일을 통해서 사령부를 부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렇죠?”

“아니요. 그건 저의 추측이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런 작전이 수행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백호 씨는 사법부뿐만 아니라 군 쪽으로도 상당히 영향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군부 쪽에서 백호 씨에게 계속해 서 상황을 모니터링해 줄 리가 없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백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현암의 말을 무언중에 수 긍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현암은 계속 말했다.

“백호 씨, 꼭 군부대의 작전을 지연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 장 서둘러서 그곳에 도달하고 우리가 재빨리 그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일은 잘 풀릴 겁니다. 잘되기만 한다면 아무 도 다치지 않아요. 아무도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백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을 억제하는 듯이 상당히 냉정 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실패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지요?”

“실패했을 경우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 도 저희만이 당할 뿐입니다. 성공했을 경우는 아무도 다치지 않 아요. 백호 씨,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군부에서 행하려는 작 전이 요행히 성공한다 해도 장인석 소장을 위시한 주위의 참모 들, 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병사들까지 같이 희생될지도 모릅니 다. 아니, 장인석 소장과 고위 참모들이 죽더라도 그 공격으로 인해 제6기계화 여단은 장 소장의 말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전면적으로 공격을 계속할지도 모릅니다. 장인석 소장이라고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겠습니까? 만약 군부의 공격이 실패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분명 제6기계화 여단은 계속 서울로 진 군할 것이고 아군 병력끼리 피 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것입 니다. 그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지켜만 볼 것입니까? 군부에서는 다른 대책이 있습니까?”

백호는 계속 말이 없었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 계속 열변을 토했다.

“최악의 경우 제6기계화 여단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제6기계 화 여단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아니, 제6기계화 여단이 패하는 경우에도 철수하고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려 하겠죠. 그럴 때 필연적으로 민간인들이 입는 손해는 엄청날 겁니다. 더 군다나 최악의 경우, 제6기계화 여단이 다른 부대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로 진군하게 되면 시가전이 벌어질 테고, 그로 인해서 벌어지는 혼란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서울 시민들 을 대피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군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정 도는 간단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백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박 신부가 말 을 이었다.

“세크메트의 분노. 그건 블랙서클의 음모에 의해 지금 당장 우 리 앞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지만 여태까지는 그들의 음모를 하나도 막아낼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가야만 합니다. 최소한 장인석 소장 이하 몇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최대로 잡아서는 이러한 음 모 때문에 죄 없이 희생당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요.”

백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이 겪을 위험은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들이 가진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 혼자만이 인정하는 것이지요. 몇 번씩이나 이야기했지만 다른 누구도 그 러한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주술이나 초능력 같은 능력만으로 기계화된 대병력 속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고대의 영에 의한 술수로 인해 거대한 기계 화 여단 자체가 무모하게 자국의 수도로 진군한다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백호 씨,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건 현실입니다. 적어도 백호 씨만이라도 믿어 주시고 저희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건 구십구 퍼센트 당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길입니다. 당신들은 그래도 갈 겁니까?”

현암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겁니다. 저희는 이미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 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 도 살려 낼 수 있다면, 애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것 만 막아낼 수 있다면 저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백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백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느라 세 명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백호는 고민스러 운 듯 셋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갑자기 껄껄껄 너털웃음 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휘휘 젓다가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행동이 몹시 장난스럽고 들 뜬 것 같아 보였다.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앉자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반으로 꺾은 뒤 뒤쪽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던졌다. 

“당신들은 미쳤군요.”

현암이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현암과 박 신부 그리고 준후와 백호는 한참 동안을 서로 바라 보고 있었다. 백호가 먼저 얼굴에 웃음을 띠기 시작했고, 나머지 세 명도 덩달아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백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제가 뭘 해 드리면 되지요? 제게 많은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작전 상황을 변경할 권리도 없고 어떻게 개입할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박신부가 말했다.

“다만 어떻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지 현재 제6기계화 여단이 포진하고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것, 그리고 제6기계화 여단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알 려 주는 것, 그것뿐입니다.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백호가 박 신부를 한동안 뚫어지듯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현암이 말했다.

“제6기계화 여단의 주변에는 여러 군부대가 포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군부대의 포위망을 저희 같은 민간인이 통과해 서 지나가기도 쉽지 않을 거구요. 그 일도 보장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것도 가능할 겁니다.”

백호는 말을 하다 말고 약간 어두운 표정을 보이더니 준후를 바라보았다.

“이 애도 같이 갑니까? 아직 어린데요.”

준후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백호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하고 현암 형이 가는 곳이면 저도 가요. 저도 도움이 돼 드릴 수 있어요. 제가 없으면 힘들걸요?”

백호는 평온을 가장하려 했으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새로 담배를 물면서 백호가 말했다.

“정말 당신들은 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모험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현암이 말했다.

“빨리 데려다 주십시오. 전투가 벌어지면 일은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백호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음을 현암과 박 신부, 그리고 준후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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