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22화 – 드래곤의 유희

드래곤의 유희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정식 궁정 마법사 복장을 한 인물은 화려하고 거대한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방 안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법사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방의 한쪽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곧이어 마법사는 환한 햇빛 때문에 눈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은 발코니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발코니는 거대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단히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넓은 발코니 위에는 널찍한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네 명의 젊은이들이 간편한 복장을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법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 자신의 눈이 빛에 적응이 되자 곧장 발코니를 가로질러 갔다. 마법사는 그 사람들 중 에서 한 인물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 인물은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겨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대공 전하, 후작 각하의 중간보고가 있었사옵니다.”

대공전하라 불린 그 인물은 자신의 탐스러운 긴 금발머리를 살짝 뒤로 넘겼다.

“보고하라.”

“예.”

마법사는 즉시 자신이 가져온 큼직한 수정구(水晶球)를 테이블 위에 올린 후 주문을 외웠고, 곧 수정구 안에는 은백색, 적색 그리고 금색이 화려하게 칠해진 타이 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 각하의 보고로는 이것이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이라고 하옵니다. 무게는 거의 110톤 정도이옵고,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될 정도 로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다고 하옵니다.”

“헬프로네인가?”

대공이라 불린 자가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한 인물이 끼어들었다.

“크루마라면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쯤이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전투의 결과는?”

“예, 상대 타이탄 일곱 대와 본국의 흑기사 다섯 대, 적기사 두 대의 격투 결과 적들은 도주했다고 하옵니다. 상대방에 루엔 공작으로 추측되는 마스터급의 검객이 있었던 관계로 적 타이탄의 포획은 불가능했다고 하옵니다. 대신 그들이 운반 중인 화물선은 포획했으니, 인양 후 드래곤 본의 분량을 알아본 후 차후에 보고하겠다 고 하셨사옵니다.”

“좋아, 잘되었군. 좋은 소식이야. 자네는 가 보게나.”

“옛! 대공 전하.”

마법사가 문을 열고 사라지자 대공이라 불린 젊은이는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감히 크루마 놈들이 본국에 도전할 생각을 품고 있는 모양이군. 까뮤 자네는 어떻게 하는게 좋겠나?”

역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까뮤라는 젊은이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바로 이 젊은이가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으로,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코린트의 세 명뿐인 마스터들 중 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키에리, 자네의 뜻대로 할 텐데 왜 물어 보나?”

이죽거리는 까뮤의 말에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은 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왜냐하면 이 네 명, 현재 코린트를 이끌어 나가는 네 개의 기둥인 이들은 젊었을 때 모두 함께 무예 수업을 하며 오랜 친분을 쌓은 친우들이었다.

“무슨 당치 않은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자네들의 뜻을 어기고 독선적으로 행동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자, 모두들 의견을 말해 보게.”

“흠, 나는 가급적이면 녀석들이 커지기 전에 박살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녀석들이 드래곤 본을 획득하기 위해 무리수까지 쓰는 것을 보면 신형 타이탄은 몇 대 없을 거야. 있다고 해 봐야 10대 안팎. 그것들이 흑기사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30대나 되는 흑기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 어차피 드래곤 본은 우리가 빼앗 았으니, 녀석들은 신형 타이탄 생산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하는 데 상당한 압박을 받을 게 분명해. 본국이 이 정도나 되는 흑기사를 마련하는 데는 크라레스 제국 침략이 커다란 공헌을 했지 않았나? 크라레스 침략 때 세 대도 안 되던 흑기사가 이제는 30대나 될 정도니까 말이야. 그러고도 돈이 남아서 백기사를 만들었고 말이 지. 또 이번에 만든 적기사의 경우 전 대륙에서 적을 찾기 힘든 타이탄이잖아? 지금 공격한다면 별 피해 없이 녀석들을 멸망시킬 수 있을 거야.”

까뮤의 옆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상큼한 인상의 여자가 까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흑발을 길게 기른 3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그 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위엄이 느껴지는 특이한 인상이었다.

“까뮤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나는 전쟁은 반대야. 사신을 파견하든지 해서 천천히 외교적으로 압력을 가해 그들이 가진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 설계도를 뺏고, 더 이상 그것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 내기만 하면 돼. 그들은 힘에서 밀리니까 어쩔 수 없이 이쪽의 제안에 따르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까뮤는 그 여자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곧장 대꾸해 왔다.

“리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설계도 한 장 뺏고 군비 증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 따위 얻어 내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지? 설계도 따위 얼마든 지 복사본을 만들 수 있다구.”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 그녀는 크로데인가를 대표하는 검객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크로데인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크로데인 가문에서 검술 수업을 쌓았고, 코린트에서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마스터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의 남편은 이제 고인이 되어 버린 쟈크 드 크로데인 후작이었다. 전통적인 검가에서 태어나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마법사의 길을 택한 그는 겨우 5사이클 정도밖에 안 되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뛰어난 실력의 음유 시인이었던 그의 구애의 노래 한 방에 이성을 상실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그 덕분에 크로데인 가문은 중간에 맥이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린트 3대 무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까미유 드 크로데인 이 그녀의 바람대로 우수한 검객으로 자라나 주었기에, 크로데인 가문의 앞날은 상당히 밝았다.

“우리가 드래곤 본을 확보한 이상, 그들은 우리의 적이 될 수 없어. 그 드래곤 본으로 적기사급 엑스시온을 만들어 새로운 전쟁용 타이탄을 대량 생산한다면, 그들 도 무리한 군비 확장의 꿈을 버릴 거야. 이봐, 그라세리안. 사실상 획기적인 새로운 핵(核)이 개발되지 않고서는 현재 출력 2.3이 최고잖아? 우리는 그걸 개발해 냈 고 말이야. 그런데 왜 까뮤는 타국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지?”

리사의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되어 보이는 미녀가 답했다. 하지만 그 미녀의 목소리는 매우 굵직했다. 왜냐하면 그는 미녀가 아니 라 황당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엘프만큼이나 잘생긴 미남이었는데, 엘프는 결코 아니었다. 바로 그가 그 라세리안 코타스로 코린트 제국 최고의 대마도사였다.

“리사의 말이 맞아. 루비를 핵으로 삼았을 때 엑스시온 출력의 한계는 2.3이야. 더 이상 출력을 내려고 했다가는 엑스시온의 출력이 대단히 불안정해지고, 곧이어 폭주하기 시작, 대 폭발로 이어지지. 핑크 다이아몬드도 써 봤는데, 그건 효과가 괜찮더군. 하지만 그것도 2.5 이상은 무리였어. 핑크 다이아몬드는 구하기가 어려우 니까 엄청난 양을 집어넣어야 하는 엑스시온의 핵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지금 본국의 엑스시온 제작 기술은 그 어떤 나라보다 앞서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들이 2.2짜리 엑스시온을 생산한다고 하지만, 그건 헬 프로네의 설계 도대로 만든 것뿐이야. 설계도만 뺏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걸 생산할 능력이 없을 거야. 그 정도 실력자도 없을 거고 말이야. 그리고 나도 쓸모없는 전쟁은 반대 야. 될 수 있다면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보네. 드래곤 본을 판 돈으로 출력 2.3짜리 신형 전투용 타이탄을 한 30대 정도 더 만들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크루 마가 본국을 넘볼 수는 없을 거야.”

그라세리안의 말을 다 듣고 난 키에리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의견도 그럴듯하군. 하지만 크루마에는 두 명의 대마법사가 있어. 둘 다 엘프지. 과거 엘프들이 모여 골든 나이트를 만든 것을 모르나? 엘프들은 그 나름 대로 대단한 기술이 있어. 그 엘프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크루마지. 아마도 크루마는 엘프들의 힘을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한번 맛을 보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키에리의 말에 리사가 반박했다.

“무력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 왜 꼭 무력을 쓰려고 하지? 설혹 그들이 대폭적으로 군비 증강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거야? 너도 벌써 피 냄새에 찌들어 버렸니?”

리사의 말투가 점차적으로 고음이 되기 시작하자, 키에리는 이쯤에서 회의를 마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지들끼리 싸워 봐야 하나도 좋을 게 없었다. “자자,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기로 하지. 나중에 아들 녀석이 돌아온 후 다시 의논해 보자구. 그때쯤이면 모두들 생각이 정리될 테니까 말이야.”

“좋아.”

그라세리안은 동료들이 발코니를 떠나는 것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60년쯤 전 자신이 좋아하는 이 세 명의 동료들을 자신의 레어 근처에서 만났다. 처음에 는 웬 간 큰 놈들인가 싶어서 그냥 가지고 놀다가 간식(?)으로 삼을 예정이었는데,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발랄한 패기에 어느덧 마음이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이다. 그라세리안은 발코니 옆의 난간에 기대어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빛나고 있는 코린티아 시가지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나의 짧은 유희(遊戱)의 결과치고는 제법 근사하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처음의 그 순수한 열정과 발랄한 패기는 어디로 갔을까? 인간이란 동물들은 짧은 시간 동안에 너무나도 많이 변하는군. 탐욕…….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도 이제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런데, 응?” 그라세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시가지의 한쪽 구석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희미하지만 그곳에서 용언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짧은 유희를 즐기는 녀석인가? 저 녀석은 좀 더 나은 결과를 얻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큭큭큭…….”

시가지의 한 부분을 쳐다보며 슬며시 웃음 짓는 그라세리안이었다.

소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은 후 백포도주잔을 들어 입가심을 했다. 소녀의 생김새 자체가 원체 아름다운 데다가 행동 하나하나가 꽤나 우아 했기에 모두들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으음, 아주 맛있는 점심 식사였어. 나는 원래 소식주의자(小食主意者)인데……. 오늘은 조금 과식을 했군.”

소녀의 말에 일행은 물론이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현기증이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뻔뻔스레 내숭을 떨다니. 웬만한 대식가인 남자라도 두 마리면 식사 끝인데, 송어찜 두 마리, 송어구이 한 마리, 메기찜 한 마리, 메기구이 한 마리에 디저트로 수플레를 세 개나 퍼 먹은 후, 반주로 백포도주 한 병 반을 마셨다. 도대체가 그 많은 음식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먹는 걸 보고 있는 사람들의 뱃속이 다 느글거 릴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할까? 그런데도 한다는 말이 조금 과식했다니, 말이 되느냔 말이다.

“저, 이제 식사는 끝내신 모양인데, 어디로 가실 건가요?”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했잖아? 당연히 그걸 보러 가야지.”

“예, 우리나라는 살기가 매우 좋은 곳이죠.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너희들은 저 녀석을 데리고 돌아가라.”

제임스가 턱으로 슬쩍 가리킨 인물은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매우 쓸모 있는 존재였기에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아마 여기서 끌려간다면 죽을 때까지 노예로서 피땀 흘려 각종 장신구나 무기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파이어해머는 자신을 도와줄 가능성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있는 소녀

를 향해 절망적인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녀에게 시선을 보낸 것이었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소녀는 즉시 응답을 해 줬다.

“잠깐, 제임스.”

“왜 그러십니까?”

“저 녀석은 내 동료야. 그를 데려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물론 제임스는 그녀의 말을 안 들어도 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우선 소녀를 꼬드긴 다음 나중에 드워프를 압수해도 되는 일이었고, 또 소녀의 직위가 올라간다면 소녀의 노예로서 드워프 한 마리 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녀도 여자니까 드워프가 만든 아름다운 장신구를 가질 권리가 있기 때 문이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너희들은 돌아가 봐라. 그리고 아버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할 테니까 그렇게 전해라.”

“옛!”

제임스와 까미유는 마법사 영감만 남겨 두고 부하들을 모두 성으로 돌려보낸 후 다크 일행을 안내했다. 코린트는 매우 부유하고 강력한 대국이었기에 볼거리가 엄 청나게 많았다. 거대한 신전들, 수많은 동상들, 또 분수대들……. 그 모든 곳에 영웅들의 모습을 멋있게 새긴 동상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었다. 아르곤의 동상들이 종교적인 것, 즉 사제들이라든지 유명한 성인들 혹은 천사들을 조각한 것이라면, 코린트는 신전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예술품들이 영웅들을 그리고 조 각한 것이었다.

이곳 수도 코린티아시는 외곽에서 봤을 때 마도 왕국 알카사스의 도시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으로 얽혀 있는,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였다. 물 론 마법진의 목적은 알카사스와 같이 방어와 실생활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코타스가 직접 설계한 것인 만큼 방어력은 세계의 각 도시를 감싸는 방어 마법진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9사이클급 공격 마법까지 방어가 가능할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사실 타이탄이 발달하면서 적대국의 도시를 마법으로 파괴하는 행동은 중지되었다. 마법으로 도시를 파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 그 도시를 뺏는다 고 해도 아무런 득이 될 게 없었다. 7사이클급 이상의 광범위 공격 마법으로 상대국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봐야 남는 것은 살아남은 시민들의 원성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시민들에게 비인도적인 공격을 가했다고 간섭해 올 여지도 있었다. 또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그 일대의 생산력을 고스란히 뺏는 것은 도시 외곽에서 타이탄들로 간단하게 한판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해결되었다. 그 때문에 요즘 들어서 도시를 방어 마법진으로 감싸는 것에 막대한 재화(財貨)를 낭비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수도나 몇몇 중요한 도시들의 경우 여전히 방어 마법진으로 감싸는데, 수도가 박살 나 버리면 타이탄의 전력이 아무리 강해도 말짱 헛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영웅의 전당입니다.”

그날 저녁 마지막으로 그들이 안내한 곳은 코린트의 ‘영웅의 전당’이었다. 제법 국력이 강한 나라들의 경우 일반인이 관람할 수 없는 명예의 전당―여기에 이름이 오르면 근위 기사단에 소속된 것과 같다ᅳ을 대신해서,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영웅의 전당을 지었다.

영웅의 전당에는 그 나라의 건국 영웅부터 시작해서 가장 최근에 사망한 영웅들까지 수많은 영웅들의 실물 크기 대리석 조각상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명예의 전당과 달리 그 영웅들 중에는 기사나 마법사 외에도 역대 황제들과 황후들, 시인, 정치가 등도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전당에는 현재의 황제, 황후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을 놔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인간이 황제 폐하와 같은 등급에 놓 인다는 것은 거의 모반에 해당될 정도의 커다란 죄였기 때문이다.

“코린트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코린트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제임스와 까미유는 영웅의 전당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그 인물들의 업적에 대해 설명해 줬다. 그러다 보니 밤이 서서히 깊었고, 그들은 영웅의 전당을 떠나 여관을 찾아 이동했다.

제임스가 선택한 여관은 엄청나게 호화로웠다. 물론 제임스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그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공이란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 자신은 후작인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온갖 수련으로 육체를 혹사시켰지만, 그것은 수련이었을 뿐 실생활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30명의 고용인과 3백여 명의 노예, 그리고 영지에 있는 5만 명이 넘는 농노(農奴)들이 있는데, 그 생활이 호화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은 저희들이 아침에 볼일이 있으니까 점심때 뵙기로 하죠.”

제임스는 소녀에게 인사를 건넨 후, 그녀의 방에서 나와 노마법사를 불렀다.

“죠드!”

“예, 후작 각하.”

“나는 까미유와 함께 궁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점심때쯤 돌아올 거다. 그동안 여기를 부탁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이제 일은 거의 80퍼센트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궁으로 돌아가는 제임스와 까미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