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23화 – 희미한 용언의 힘
희미한 용언의 힘
퍽! 쿠당.
처음에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은 새로운 인재를 구해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매우 유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보고가 이어지자 키에리 나으리는 마스터라 는 그 이름값을 뽐내고 싶다는 듯 느긋하게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나, 자신이 사랑하는 셋째 아들의 뺨을 사정없이 날려 버렸다. 그야말로 전 광석화(電光石)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한 대 맞고 거의 3미터는 날아가서 책장에 처박힌 후 뻗어 버린 아들을 향해 살기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키에리 는 으르렁거렸다.
“다시 한 번 더 말해 봐!”
한 방에 기절해 버렸는지 미동도 하지 못하는 제임스를 대신해서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재빨리 대답했다. 굳건하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다리는 미세하게 떨 리고 있었다. 겨우 드래곤 본 탈취 실패에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또 키에리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살기는 정말 자신들을 죽일 것 같았 기 때문이다.
“드, 드래곤 본의 포획은 실패했사옵니다, 대공 전하. 최신형 타이탄 일곱 대에 호위되고 있던 선박은 격침했지만, 인양해 본 결과 그 안에 드래곤 본은 없었사옵니 다. 도중에 어딘가로 빼돌린 것… 같사옵니다.”
도중에 까미유의 말이 멈춘 것은 키에리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까미유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키에리는 멱살을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천천 히 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신의 동료의 아들이자 명문인 크로데인 가문의 후계자를 두들겨 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속마음 같으면 이 둘을 갈아 죽여도 시원치 않 겠지만, 사실 가짜 미끼에 현혹되어 따라간 것은 제임스이지 까미유가 아니었다. 까미유는 마지막 순간에 지원을 하기 위해 나갔을 뿐 죄가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 이 들자 키에리 나으리는 까미유의 멱살을 풀어 준 후 성질이 풀릴 때까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지근지근 밟았다.
퍽! 퍽! 퍽!
“멍청한 자식들! 겨우 그런 것에 속다니.”
한참 제임스를 지근지근 밟아 대던 키에리는 이제 적당히 화가 풀리자 밖에 대고 외쳤다.
“우즈크를 불러 와라!”
그러자 방 밖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옛!”
곧이어 60세 정도의 노련해 보이는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우즈크는 발렌시아드 가문의 주치의(主治醫)이자 발렌시아드 공국(公國)의 궁정마법사였다. 발 렌시아드 공국은 코린트 외곽에 있는 커다란 국가였고, 발렌시아드 기사단이라는 웬만한 국가들을 상회하는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궁정 마법사도 몇 명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의 공국에 있는 것보다는 이곳 황궁의 한쪽 구석에 지어진 자신의 궁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대신에 자신의 영지는 지금 첫째 아들이 다 스리고 있었다.
키에리는 방 안에 들어와서 자신에게 인사를 올린 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제임스를 향해 안 됐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우즈크를 보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을 좀 치료해 주게.”
“예, 대공 전하.”
우즈크는 치료 마법에 매우 정통한 마법사인 듯 마법을 걸고, 포션을 쓰자 제임스는 곧 깨어났다. 제임스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키에리는 우즈크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치료를 좀 더 해 주게나. 지금은 이 녀석들과 의논을 할 게 있으니까 자리 좀 피해 주겠나?”
“예, 대공 전하. 그럼 말씀 나누소서.”
제임스가 비틀비틀 일어서서는 까미유의 옆에 서자, 키에리는 한숨을 푹 쉬면서 평상시와 같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그의 화는 다 풀린 상태였다. 키에리 는 엄청나게 다혈질인 인물이었는데, 그 자신도 화가 나면 절대로 참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의 성질을 건드린 인물은 언제나 피를 보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마 음껏 자신의 아들을 두들겨 팬 것도 마법사가 주위에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패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 더 경험 있는 놈들을 보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처리한 것 같군. 이제 몸은 좀 괜찮느냐?”
“아직도 뼈마디가 쑤신다고 대답하면, 수련이 모자란다며 더 두들겨 팰 거면서 왜 물어요?”하는 말이 거의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제임스는 초인적인 노력을 통 해 그 말을 다시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이것도 몇 번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고 얻은 소중한 지식이요, 경험이었다. 제임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예, 괜찮습니다, 아버님.”
“좋아. 데려온 애가 정령술사라고 했느냐?”
“예, 상당한 실력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령술사인 지레느가 보장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관계하고 있는 정령은 아마도 뇌전의 정령일 것이라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실력을 확실히 알아보려면 좀 더 뛰어난 정령술사를 데려가야 합니다.”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는 정령술사라……. 뇌전을 다스리는 정령술사가…, 으음 그렇군. 코타스가 뇌전의 정령을 다스릴 줄 아니까 그에게 부탁해 보거라. 하지 만 그가 바쁘다고 하면 딴 정령술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라. 나는 마법사 쪽으로는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예, 아버님.”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아버님.”
“예, 대공 전하.”
까미유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제임스를 부축해서 우즈크가 있는 곳으로 갔다. 키에리 같은 엄청난 고수가 화풀이를 해 댔으니 몸이 멀쩡할 리 가 없었지만, 우즈크에게 간단한 치료만을 받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초인적인 정신력 덕분이었다.
제임스와 까미유는 일단 제임스의 치료를 끝낸 후 다음 날 아침 그라세리안 코타스 공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코타스 공작은 코린트 최고의 마도사로서 마법은 7사 이클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정령 마법을 구사하며, 뇌전의 정령왕 카르스타까지 불러낼 수 있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마도사였다. 하지만 그가 지금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마법의 강함 때문이 아닌, 코린트 최강의 타이탄들의 엑스시온을 설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너라. 오랜만이구나.”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가 그들을 반겼다. 까미유나 제임스는 이 남자를 볼 때마다 도저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간편하면서도 아 름다운 복장을 하고 있는 마법사는 60년쯤 전에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들과 만났고, 그때와 변함없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간이라고 생각 이 들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를 말이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옵니다, 코타스 공작 전하.”
“자, 이리 앉아라. 이봐, 차를 내오거라.”
그의 말에 답하는 하녀의 목소리가 곱게 들려왔다.
“예.”
그라세리안은 친우들의 아들들을 정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딱딱하게 궁정용 언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들과 오랜 시간 우정을 지켜왔다. 나에게는 너희들이 아들이나 다름없지. 알겠냐?” “예.”
“그래, 무슨 일이냐? 네 녀석들이 나한테 인사차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또 뭔가 부탁하려고 찾아왔지?”
정곡을 찌르는 그라세리안의 말에 두 젊은이(?)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들은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 그들의 생애 대부분을 무술수련에 보낸 덕분에 비교적 때가 덜 묻은, 아직도 순진한 청년들인 것이다.
“저, 공작 전하. 저희들이 이번에 매우 유능한,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상당히 장래가 촉망되는 정령술사를 한 명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추측뿐이 라서 정확하게 감정을 해 줄 정령술사가 필요합니다.”
“정령술사라, 정령술사는 매우 귀하지. 그래 어떤 정령들을 부리는 것을 봤느냐?”
그 말에 일순간 제임스는 주춤했다. 왜냐하면 소녀가 정령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한 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정령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았지?”
그 말에 옆에 앉아서 잠자코 있던 까미유가 대신 대답했다.
“예, 지난번 여행에서 지레느가 알려 줬습니다. 그 소녀에게서 정령의 냄새가 난다구요. 하지만 자신이 부리는 불과 바람의 정령도 아니고, 지레인이 부리는 대지 와 물의 정령도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뇌전의 정령뿐이죠.”
그라세리안은 꽤 흥미가 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는 아이는 극히 드문데. 그리고 뇌전의 정령 하나와만 친화력이 있다면 교육시켜 볼 가치가 있긴 하지. 그래 그 소녀는 어디에 있느 냐?”
“수정궁(水晶宮)이라는 고급 여관에 투숙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의 답변에 그라세리안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수정궁?”
“예, 아그립파 대로변에 있는 고급 여관 말입니다.”
물론 ‘수정궁’이라는 여관을 그라세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놀란 것이다. 드래곤이 성룡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야말로 생의 전성기에 들어서면 다 른 드래곤의 용언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상대 드래곤의 위치를 잡아내니까 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용언 마법으로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는 다른 드래곤을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드래곤들끼리 친분을 맺고 수다도 떨고 할 수 있는 것도 다 상대 드래곤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라세리안은 그 능력 덕분에 지금 이곳 코린티아시에 자신 외에 또 다른 드래곤이 한 마리 놀러 와 있다는 것과 그 드래곤이 아마도 ‘수정궁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멍청한 녀석들이 뛰어난 정령술사랍시고 모셔 온 아이는 드래곤. 그것도 자신과 같이 뇌전의 정령을 다스릴 줄 아는 블 루 드래곤일 가능성이 컸다.
그라세리안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너희들이 혹시 그 아이에게 뭐 원수질 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
“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쓸 만하다고 판정되면 그다음은 납치를 해서.
그라세리안은 그 뒷말을 들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몇몇 뛰어난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될 만한 재목을 납치해다가 키운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뛰어 난 친화력을 지닌 엘프도 납치해다 써 봤지만 드래곤은..
“안 돼!”
“예?”
“그 아이를 납치하거나 회유하는 것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그냥 여기 구경이나 시켜 주고 돌려보내라.”
“저, 하지만 전하께서 그 아이를 보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그 아이가 쓸모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십니까?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이던데요? 전하께서 감정 을 좀 해 주시든지, 아니면 다른 정령술사를 소개해 주십시오.”
그라세리안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드래곤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답한다면, 그에 따른 합당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걸 말했다가 잘못하면 자신의 정체도 탄로 날 우려가 있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 마법사보다 더 강한 존재인 드래곤의 정체를 단번에 원거리에 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좋다. 내가 직접 만나 보기로 하지. 안내하거라.”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