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1화 – ‘해동감결’의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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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1권 1화 – ‘해동감결’의 서(序)


기원전 2674년, 단기전 341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넓디넓은 만주의 평원 이 끝을 모르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사방을 위압할 듯 자리 잡은 커다란 성이 있었다. 아직 문명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 성은 언뜻 보아도 수천 호 이상을 수용할 만 한 큰 규모였다. 그 성이 바로 하늘 아래 눈 미치는 곳을 모두 관 할한다는 대제국 주신의 성 가운데 하나인 미루한성(桓成)이었다. 비록 변경이라 하나 요충지를 차지한 상당한 규모의 그 성은 주신 제국의 요새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성안은 온통 슬픔의 곡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 천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백성이거나 무사이거나 관리이거나 가리지 않고 성문 앞에 모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주신의 상징인 신수(神) 봉황*을 조각 한성문 앞 솟대 밑에 서 있는 한 남자를 향해 있었다. 남자는 중 년을 넘어선 듯 보였으나 이목구비가 청수하여 나이답지 않게 빼어난 용모였다. 다만 그의 머리카락만은 마치 노인처럼 백발 이었다. 사람들의 맨 앞에 서서 그를 만류하는 흰머리의 늙은 관 리(官吏)보다 오히려 더 희었다. 그를 붙잡는 화려한 옷의 백발 노인은 위신마저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엎드려 울며 간곡히 애 원하고 있었다.

괄하는 일종의 연합 제국으로서, 만주 전체와 시베리아 지방까지 판도를 뻗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 우리나라의 고조선의 명칭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조선이라는 한문 표 기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실제의 이름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 채호 선생은 고조선의 옛 이름을 ‘주신’이라 단정 짓는바, 본인의 견해와도 일치 되는 점이 많아 그 이름을 사용했다. 물론 정확히 논증되지 않은 가설들이라 하 겠지만 창작물인 본편에서는 상관없다 본다. 진위 여부는 여기서 결론 내릴 수 없으나 혹 궁금하다면 자세한 내용은 신채호 선생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주 신은 이후의 여진, 말갈, 숙신, 선비 등등의 동북방 비(非) 중화 민족을 모두 포함.

*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새, 즉 봉황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 이는 용을 숭배한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는 문화적 특징으로 중국의 신수가 용이라면 우리나라의 신수는 봉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고대부터 있어 왔고, 조선조에 사용 된 흉배계급을 알려 주는 관복의 배 부분에 넣은 문양)에도 상감과 중전 만이 봉황의 무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다섯 발가락을 지닌 오조룡(五爪龍) 이 상감의 흉배 문양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봉황도 그에 못지않은 상징으로 기억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장도 두 마리의 봉황이다. 대통령이 사용하는 연단에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대부분 보셨을 것이다.


“한웅께서 가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합니까? 제발, 제발 생각 을 돌리시옵소서.”

지금 말안장에 앉아 있는 백발의 중년은 주신은 물론 동북아 시아의 맹주로서 많은 부족들이 받들고 있는 주신 제국의 14대 자오지 한웅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중국에서 크게 일어 났던 황제의 팽창을 저지하여 천하의 정세를 가라앉힌 이 후, ‘자오지 한웅’이라는 공칭(公稱)보다 그의 성을 따라 치우천 왕(王)이라 부르기를 즐겼다.

늙은 관리의 말이 끝나자 마치 뒤를 잇듯이 백성들의 목소리 가파도처럼 밀려왔다.

“치우천왕님! 생각을 돌리소서!”

“한웅님! 마음을 돌리소서!”

그러나 자오지 한웅, 치우천왕은 수려한 얼굴에 쓸쓸한 미소 를 띠며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해진 일일세. 모든 것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일세.”


*여기서의 치우는 후에 중국 사서에서 한자로 기록되었기에 좋지 않은 뜻을 지 니게 되나, 이는 주변 민족을 비하하는 중국인의 글자로 적었기 때문이지, 원래 뜻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몽골을 비하의 의미로 몽고라 적고, 동남아인을 오랑 캐로 여겨 남만이라 부르는 등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본인의 세 계관에서 ‘우’란 말은 주신의 성씨로 설정되어 있으며 뜻보다는 음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생각하기를 바란다. ‘김(金)’를 굳이 ‘쇠’의 의미를 지녔다고 억지 로 해석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뿔이 돋은 철제 투구를 쓴 장수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감히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행여 한웅께서는 맥달 님의 죽음 때문에 떠나시려는 것이 아니옵니까?”

맥달은 얼마 전에 죽은 치우천왕의 정비(正)이자 삼사(三 *중의 하나인 우사이기도 했다.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그 녀의 예언술은 궐천년(年) 역대 우사 중에서 제일이라는 평 이었으며, 황제와 싸워 이기고 정비로 간택된 후에도 백성들을 몹시 아껴 만인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외모마저 빼어 나 백성들에게는 치우천왕과 함께 숭배의 대상이었으니, 백성들 은 그녀의 죽음을 몹시 애달파했다. 치우천왕은 맥달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을 감았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렇다면 아니 되옵니다. 그것은…… 그것은 대단히 외람 되옵니다만, 한웅님, 스스로만을 위한 생각이옵니다. 온 세상의 백성을 생각하소서! 한웅께옵서는 뭇 백성의 어버이십니다! 그 리고・・・・・・ 그리고……?”


*삼사는 풍백(風, 운사, 우사(師)로 나뉘며 단군 신화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사나 운사의 경우는 고대 중국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치우와 싸웠던 황제의 우사는 ‘적송자(子)’라는 신선이었으며 운사 나풍백, 뇌공(公) 등의 직함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장수는 무장 출신이라 그런지 말을 썩 잘하지는 못했다. 치우천왕은 그를 조용히 손으로 제지하였다.

“치우광, 자네의 말은 잘 알겠네. 그러나 그렇기 때문 에 나는 가야만 하는 것일세.”

“어찌하여, 어찌하여 그렇사옵니까?”

“바로 백성들을 위하여 가는 것일세.”

이번에는 백발의 노신(臣)이 말했다.

“한웅께서 급작스레 떠나 버리시는 것이 어찌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옵니까?”

노신의 말에 치우천왕은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의 백성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네. 그러나 내가 가는 것 은 지금의 백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네. 반만 년 뒤의 백성들을 위해서이네.”

순간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의 표정이 떠올 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아직 만(萬)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렇게 먼 후대의 백성들 을 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하지 만 다른 사람도 아닌 치우천왕의 말이 허튼소리일 리도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한웅의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치우천왕이 눈을 뜨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모든 것이 맥달의 당부였네………….”

치우천왕의 마음속으로부터 가슴 벅찬 기억이 솟구쳐 올라 서서히 눈앞에 펼쳐졌다. 과거 맥달과의 추억…………. 치우천의 이 름으로 그녀와 살아왔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십 년의 시 간.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맥달 왔소. 아우비(飛)의 혼령이 녹비와 더불어 왔소.’

장당경(唐, 티베트)에 새 도읍을 열고 나라를 세운* 동생 치우비(飛)에게 부탁해 이루었던 대역사(役事). 천하의 보 물인 녹옥(에메랄드), 그것도 아주 커다란 녹옥만 천 개를 모아 그 위에 치수(水)의 가르침을 적어 만방에 알려야 한다는** 그


* 일반적인 중국의 신화에 의하면 치우천왕은 황제와의 탁록 전투에서 패해 목이 잘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붕(鵬) 서경보(徐스님의 설에 의하면 치 우천왕은 황제와의 전투에서 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장당경으로 들어가서 나라 를 개척하여 왕이 되었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치우천왕기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바, 치우천왕, 곧 자오지 한웅은 한 사람이 아니라 치우 가문에서 한응을 맡 았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탁록에서 황제와 싸운 치우를 치우천, 치우비의 쌍둥이 형제로 설정했다. 그래서 치우천은 주신에 남아 한웅이 되고, 치우비는 장당경으 로 떠나 새 나라를 건국하였다고 가정해 두 가지 설을 맞추어 본 것이다.

** 「퇴마록 말세편」 전편인 「퇴마록-혼세편」의 「홍수」에서는 에메랄드 태블릿이 치수의 비결과 인간의 가르침인 천부경』의 내용을 적은 것이라 나온다. 아울러 치우천왕의 모습이 포탈라궁의 지하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앞에 언급된 치우천왕의 동생 치우비가 만든 것이며, 대홍수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치수의 가르침을 천 개의 녹비에 적어 천 개의 나라에 알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정설이라 할 수는 없으며 본인의 소설 세계에서 다루는 가설임을 밝혀둔다.


녀의 소원. 그녀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 다 하였고, 치우천의 충실한 아우 치우비는 그 역사를 드디어 해 냈다. 비록 치우비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지만, 인륜 의 가르침인 천부경(天符經)과 치수의 비결을 적은 천 개의 녹 비는 천 명의 현인과 더불어 천 개의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랬다. 그것은 맥달의 커다란 소원이었다.

맥달은 천고의 기녀(女)로 사백 년 내로 인류의 씨를 말릴 수 있는 대홍수가 다가온다는 것을 예지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치우천은 그녀의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그리고 천하의 백성들 을 위해 이 거대한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맥달 의 명은 이미 기름 다한 등잔불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다만 그 때까지 치우천은 모르고 있었다. 맥달의 엄청난 예지를…………… 부드러운 목소리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중년의 여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중년이었지만 몇 개의 잔주름 외에는 전혀 나이가 들 지 않아 처녀처럼 고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몸은 마치 인형과 같아서 생명력이 남은 기척이라고는 거의 없 었다. 그 머리맡에 앉아 있는 남자는 치우천이었다. 치우천 외에 는 넓은 방에 아무도 없어 일세의 재녀이자 왕후인 맥달의 임종 치고는 다소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맥달이 원하는 바이 기도 했다.

“드디어………… 왔습니까?”

“왔소. 치우비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지만…………. 그 녀석은 끝 까지 성실했소. 천 개의 녹비를 만들어서 세상 천 개 나라에 가 르침을 전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냈다오. 그대의 소원대로 되었 으니 기운을 내시오!”

“녹비를…………… 천 개의 녹비를…………… 완성하였습니까?”

여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금방이라도 멎어 버릴 듯했다. 그렇더라도 말을 하는 여인의 안색은 조금 환하게 밝아 지고 있었다.

“그렇소! 그렇소! 이제 되었소. 이제 세상은 망하지 않을 것이 오. 이제 세상은 물을 다스리는 가르침과 함께 삶의 원리를 깨우 쳐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그러니 힘을 내시오. 힘을…!”

여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녹비가…………… 녹비가 비록 천 개일지라도…………… 하나도……………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때에는……” “맥달! 힘을 내시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소. 이제 사백 년 후의 홍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녹석(에메랄드)은 으뜸가는 보석이자, 가장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보석이기도 했다. 그러한 녹석에 가르침을 담은 이유는 귀 하게 여기라는 뜻과 깨뜨리지 않도록 소중히 다루라는 이중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는 모두 맥달이 의도했던 일이었다. 천기를 한없이 짚어 볼 수 있었던 맥달은 인간의 멸망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대사건을 예견하고 몹시 괴로워하며 치우천에게 그런 일 을 부탁했던 것이다.

맥달이 힘겹게 입을 떼었다.

“그러나 ・・・・・・ 그러나 사천칠백 년 후의 홍수…….. 그것 치우천왕, 아니 치우천은 눈물을 흘렸다.

“아아…………… 정 많은 사람. 어찌하여 반만 년이나 뒤의 일을 지 금 염려하시오? 어찌 그리도 정이 많고 사람들을 어여삐 여길 수 있단 말이오?”

치우천이 말을 이었다.

“이 녹비는 분명 수천 년을 갈 것이오! 아무리 반만년 후라 하 나. 적어도 하나의 녹비는 남아 두 번째 홍수를 막을 것이오! 분 명 그리되도록 내 약조하리다!”

맥달이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옵니다. 홍수는・・・・・・ 홍수는 막아도 그때 닥쳐올 일은・・・・・・ 그 직후에 올 세상의 끝은…………….”

“무리하지 마시오! 홍수를 막는데 왜 세상의 끝이 온단 말이 오?”

“아니옵니다. 세상의 끝은…………… 정해지지 않은 일. 그때 ………… 그때 세상을 지키려면 반드시 ……………?

맥달의 야위고 흰 손가락이 꿈틀했다. 손가락은 방 한쪽에 놓인 밋밋하고 장식은 없지만 깔끔하게 손질을 한 바구니를 가리 켰다. 치우천은 의아해하며 떨리는 손으로 바구니를 열었다. 안 에는 한 개의 큰 두루마리와 한 개의 작은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 다. 아주 단단한 나무를 소금에 절인 다음 납작하게 깎아 엮어서 둘둘 만 것이다.

“이것 말이오?”

치우천이 두루마리를 들어 보이자, 맥달이 힘없이 눈을 깜빡 하며 말했다.

“훗날에는 책이라 불리겠지요…………. 글자를 적은 물건을……………. “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맥달의 말을 끊었다.

“이따위 물건이 뭐라 불리건 상관없소! 글자의 힘이란 것을 내 모르는 바도 아니고…………. 그대의 뜻이 먼 훗날로 전해지리라 는 것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오. 허나 나는 이것들이 밉소. 이것 때문에 당신이 고생하여 병이 …………….”

그러자 맥달은 몇 번 호흡을 가다듬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 큰 책은 쇤네가 마지막 명을 걸고 천기를 누설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모든 일이 그 안에 있으니 없어지지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듣자 치우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다면 맥달의 병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된 것은 천기를 누설한 탓이란 말인가? 천기를 누설하여 미래의 일을 알리고자 했기에 그 대가 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이란 말인가?

“맥달! 그러면…. 그러면 이것 때문에………… 이것 때문에 그 대의 목숨을 버렸단 말이오? 천기누설을 하여 몸이 이 지경이 된 것이란 말이오?”

당장이라도 나무 두루마리들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맥달의 서글픈 눈빛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치우천은 필사적으 로 자제해 그것을 팽개치고는 대신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 다. 그러한 치우천을 보며 맥달이 기쁘게 이야기를 토해 냈다. 

“반드시 …………… 반드시 전해지도록…… 방법은………. 방법은 그 뿐이옵니다. 반만 년 후의 위기…………. 그것은 홍수가 아니옵니 다.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저는 그것이 무엇인 지도 알 수 없습니다. 볼 수는 있지만 알지는 못하옵니다. 방법 은………… 방법은 다른 것과 아울러 수천 년의 예언을 기록으로 남 겨야 하는 것뿐……. 그래야………… 그래야………… 후세들이 그 기 록을 믿게 됩니다. 아아……………. 더 명확히 하고 싶으나……………. 더 명확히 하고 싶으나…………… 오천 년의 시간은 너무도 큰 터울이옵 니다. 너무도 크옵니다……………..”


*후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동양에서는 이런 형태의 문서가 보편적이었다. 중국에서 대나무를 재료로 썼기에 그런 경우는 죽간(竹簡)이라고 불렀다. 이것 은 시기를 수천 년이나 앞선 것이지만 맥달의 예지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왜……… 왜! 어찌하여 그대가! 어찌 그대가 오천 년 후의 자 손들까지 걱정하여 목숨을 버려야 한단 말이오! 왜! 도대체 왜!” 치우천왕의 분노와 절망은 거의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러 나 맥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웅께서는 모든 이들의 어버이십니다……………. 제발………… 제 ……”

“아니오. 다 필요없소! 나는 다 필요 없소! 그대 외에는 한웅 자리도 후손들도 다 필요 없소! 지금이라도 이것들을 모두 없애 버립시다! 그래서 다시 건강을…”

맥달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미는 어린 것을 위해 사는 법, 비록 알아볼 수도 없을 아득 한 후손들을 위해서라 하나, 후회는 없습니다…………. 제발 한웅께 서는 그것을………… 그것을 후세에까지………… 그리고…………… 그리고 작은 책…………. 그것은…….”

“맥달!”

“그것은 바로 큰 책에 숨겨 둔 비밀의 열쇠 ・・・・・・ 역시 소중히………… 소중히………….”

그러나 두루마리들을 보는 치우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 것이 과연 맥달의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 치우천의 마음을 읽은 듯 맥달이 간곡히 말했다.

“한웅……. 한웅 외에는 아무도 없사옵니다. 이것을 그리 오랫동안 보존하여 지킬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은……………”

달리 없사옵니다. 한웅을 믿사옵니다. 한웅을……………. 한웅………….” 치우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 자 맥달이 다시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천・・・・・・ 제청을……… 제 청을 들어주소서…………….”

맥달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치우천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 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그들이 초연(超然)을 익히고 미래를 다짐하던 젊은 시절에 부르던 호칭이 아니었던가? 치우 천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넘 치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묵묵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약속하리다…………. 그러나………… 그러나 어찌하 여… 어찌하여 …………….”

미칠 것 같은 슬픔과 비통함 속에서도 치우천은 이를 악물고 승낙한 것이다. 잠시 후 맥달의 얼굴에 희미하고 힘없지만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감사・・・・・・ 하옵니다…………. 저의 청일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뒤 의 수많은 후손들을 위하여 ……………. 감사………… 감사합니다………………. 천…… 천…….”

말끝을 흐리는 맥달은 어느덧 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듯했다. 치우천은 놀라서 맥달을 잡고 흔들었다.

“맥달! 맥달!”

그러자 맥달이 파리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며 조용히 말했다.

“아아…………… 천……………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하시오! 마지막이란 말은 하지 말고 어서 하시오!”

맥달은 미소를 지었다. 일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화색을 찾아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밝게 빛났다. 그녀는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천녀 맥달은 천을…………… 정녕, 정녕 사랑했습니다…………..”

“아아, 맥달!”

그 말을 끝으로 일세의 재녀 맥달은 스르르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대(大) 한웅의 울음소리만 이 그 방을 가득 메우고, 밖으로까지 울려 넘쳤다. 놀란 신하들 과 여도인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 그 방에는 맥달의 시체와 한 명의 백발노인이 있었다.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 여 치우천의 머리와 수염은 삽시간에 노인처럼 하얗게 되어 버 린 것이다.


그렇게 맥달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불과 한두 달 전의 일이었 으나 치우천에게는 그 일이 마치 수백 년이나 지난 오래전의 일 같았다. 사람들의 아우성에 가까운 울음소리에 치우천은 회상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한웅…”한웅…….”

치우천은 통곡하는 군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가야만 하오. 그래야만 큰일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 이 주신은 장차 수백 년 동안 평온할 것이라 맥달이 예언하였소. 내 가 없다 하나 나라에 뛰어난 자들이 많고, 천기도 순조로워 걱정 하실 것은 없소. 누리가 한웅의 자리를 넘겨받을 것이니……….” “이제는 누리 님이 아니라 치우(蚩尤) 님이옵니다.” 

치우천은 그 말에 입가에 약간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지, 이제는 치우할이지.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와서인 지 자꾸 옛이름이 나오는구려. 그 아이는 내 친아들은 아니지만 역시 치우씨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자오지 한웅의 두 번째 대를 잇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나보다도 마음이 고운 사람이니 백성들을 잘 아껴 줄 것이오. 치우광, 그대는 치우비의 뒤를 이 은 주신의 칼이고, 비렴은 주신의 방패이니 앞으로도 그래 주시 오.”

“하오나 한웅……..”

백발의 노신이 눈물을 흘리자 치우천이 말을 이었다.

“비렴, 그대는 삼사의 우두머리인 풍백(風伯)이자, 둘도 없이 현명한 사람이오. 내가 떠나는 것도 예정된 일임을 그대가 모를리 없지 않소.”

치우천은 말머리를 돌렸다. 수많은 백성들과 군사들, 장수들 이 그를 전송하러 따랐으나 치우천은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 단 한 사람, 풍백 비렴만을 따라오게 하였다. 하지만 이십 리도 가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비렴에게 말했다.

“이제 헤어질 때가 왔나 보오. 나라 일을 잘 보살펴 주시기 바라오.”

비렴이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장당경으로 가 볼까 하오. 아우의 혼백이 거기에 잠들어 있을 것이오. 그가 정한 땅이야말로 기나긴 세월 동안 예언을 보존하 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오…………….”

비렴은 치우천이 왜 장당경으로 가려 하는지 그 이유까지는 미처 생각할 수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일세 의 뛰어난 지도자를 잃는 안타까운 마음만이 가득했다. 더구나 치우천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늘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재주에 탄복하고 아껴 오던 인재가 아니었던가. 주신의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한웅이었고 그의 나이 아직 오십도 되지 않은 젊음이었으니…….

“한웅! 마음을 돌리시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어찌 …………….”

“아니오. 나는 가야 하오. 내가 가야만 맥달의 뜻을 이을 수 있으니 …………….”

“하오나…… 한웅.”

비렴은 나이 여든에 가까운 노신이었으나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치우천이 조용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주신은 적어도 오백 년은 태평이니, 내가 없어도 별일은 없을 것이오.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오. 그리고 맥달이 남긴 두 개의 책이 결코 잃어버리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무엇보다 후일 까지 보존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이는 맥달의 유지일 뿐 아니 라 나의 소원이기도 하오. 아시겠소?”

“알겠사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오리다.”

비렴이 고개를 숙이자 치우천이 다시 천천히 말했다. 

“그 책은 천기를 누설한 것이오. 어지러이 흩뜨려 아무나 보게 하면 이 또한 세상에 큰 앙화를 부르는 일이 될 것이고, 깊숙이 감추기만 한다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오. 이는 앞으로 대 대로 풍백 가문에서 맡아 지키도록 하오. 그대를 가장 믿기에 당 부하는 것이오.”

그 말을 하면서 치우천은 미소를 머금었다.

“맥달이 내게 남긴 소원은 너무나도 막중한 것이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생각해 보시오. 백 년은 고사 하고 하루 뒤도 모르는 한갓 사람이 어찌 죽고 난 반만 년 뒤까 지책을 지켜 내겠소? 그만큼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오. 내 이제 남은 생은 이것을 지키는 도를 이루는 데 쓸 것이오. 그대는 이 책들을 천부인(印)*만큼이나 소중히 다루어 야 할 것이오. 맥달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예가 없으니, 이는 당장에 소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만 년 후에 이르러 큰 소용 이 될 것이오.”

말을 끝내고 치우천은 머나먼 석양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토록 사랑했던 맥달이 있는 것처럼.

“바・・・・・・ 반만년이라고요? 하… 하오면 이 책의 이름은?” 

비렴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으나 치우천은 대답하지 않고 하늘 끝만 바라보았다.

“책의 이름이라도 지어 주소서…….”

비렴이 다시 한번 말하자 치우천은 그제야 비렴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십 년 전, 그가 한창때에 황제의 군을 격파하 였을 적에 보여 준 것 같은 밝은 미소였다.

“이천 년이 지나면 우리의 글자는 없어질 것이라 맥달이 예언 했소. 책의 내용은 천기누설이니 번역할 필요가 없겠지만, 제목 만은 중원의 글자(한자)로 짓는 것도 좋겠구려.”

그 말에 비렴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비천한 중원의 다듬어지지도 않은 글 자로 이토록 고귀한 책의 이름을 짓다니요! 더구나 ・・・・・・ 더구나 우리의 신지 문자(神)가 이천 년 후에는 없어진다는 것입 니까? 아니, 아니 그렇다면 우리의 대주신이 이천 년 후에는 존 재하지 않고, 중원의 야만족이 패권을 잡는다는 것입니까?”


* 천부인에 대해서 세상의 억측이 구구한 바 있으나 「삼한관경본기(三韓管 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世傳桓雄天王巡駐於此佃獵以祭風伯天符刻鏡而進雨師迎鼓璟舞雲師佰劍陸衛蓋 天帝就山之儀 若是之盛也

이는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웅천왕이 이곳에 들러 머무르시며 사냥도 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풍백은 천부를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서 나아갔고, 우 사는 북을 쳐서 울리며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추었고, 운사는 백 명의 무사를 데리고 대장의 검으로 호위하였으니, 무릇 천제가 산으로 갈 때의 의장 행렬이 이와 같이 성대하고 엄중하였다”라는 의미이다. 이 문장에 따라 천부인 세 가지가 거 울과 북과 칼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거울에 ‘천부’를 새겼다는 점으로 보아 천 부는 상징성과 힘을 지닌 문양이나 고유의 물건일 것이고, 이를 인(印)으로 하였 다는 것은 그러한 힘을 집약시킨 물건일 것으로 생각하여, 본문에서는 거울이나 칼, 방울의 이미지로 천부인을 꾸미지 않았다. 여기서의 천부인의 이미지는 「퇴 마록국내편 3권 「초치검의 비밀」의 천부경의 이미지와 같은, 구체적인 형상물 이 아닌 상징적인 ‘빛’과 같은 성물이라고 보면 된다.

*신지 혁덕이 한응 조선(주신) 때에 만들었다는 우리의 고대 글자이며 신시 문 자라고도 불린다. 신지는 벼슬의 이름인 것으로 보이며, 신시 문자라는 말은 고 대조선에서 글자를 주관하는 성씨가 ‘신시’ 씨였다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 울러 녹도문(文)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두 가지가 다 르다고 여긴다. 즉 신지, 혹은 신시 문자는 일종의 표음문자로서 후에 가림토로 변형되고 한글의 원류가 된 문자이며, 녹도문은 상형 문자, 또는 표훈 문자로서 중국의 한자에 영향을 주어 한자로 발전된 문자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역시 본 인의 소설에만가설로 등장할 뿐, 정설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두는 바이다.


대답 대신, 치우천은 정신없이 석양을 보면서 딴소리를 했다.

“비렴, 저 석양을 보시오. 해가 지고 있소. 해는 매일 지고 매 일 뜨오. 그런데 매일 뜨는 해는 같은 해겠소. 다른 해겠소?” “예?”

“인간 세상, 고작해야 백 년을 살 뿐, 천년 후, 이천 년 후는 아득하여 생각조차 미치지 않는구려. 그런데 맥달은 오천 년 후 의 후손들을 걱정하여 꽃 같은 목숨을 버렸다오. 그래, 이제는 알겠소. 그렇소. 모든 것이 저 해와 같은 것이오.”

어리둥절한 비렴을 놓아둔 채로 치우천은 석양을 돌아보며 노래처럼 읊었다.

태어난 모든 것 언젠가 죽으니, 

목숨이 없어도 태어나 죽도다. 

세상의 모든 것 돌고 또 도는 것. 

기나긴 이 시간 나 홀로 어쩌리. 

아아, 맥달이여, 맥달이여, 

그대의 높은 뜻 이제야 알겠네.

앞으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이보다 높은 이 나오지 않으리.

노래를 마친 치우천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다 느닷없이 치우천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석양 속에서 크게 웃으며 말을 몰아, 마치 지는 해 속으로 뛰어 드는 것처럼 서쪽으로 달려갔다. 비렴은 놀라서 말고삐라도 잡 으려 했으나 어느새 치우천은 사라져 버리고 그의 웃음소리만이 메아리가 되어 크게 울려 퍼졌다.

“비렴! 비렴! 그 책의 이름은 ‘해동감결(海東鑑)』이라 하시 오! 꼭 중국 글자로 기록하여야 하오! 하하하!”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영웅 치우천왕, 치우천의 모습은 석 양으로 뛰어들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비렴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망연히 서서 치우천이 사라진 석양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해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 으나 그의 눈에는 그때의 광경이 그렇게 보였다. 불가능한 일이 었지만 달리 표현할 말도 없었다. 그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서 있 다가 해가 완전히 진 다음에야 비렴은 그 자리에 엎어져 밤을 꼬 박새우며 통곡을 했다.

다음 날, 날이 샌 뒤에 비렴은 늙은 몸을 이끌고 무거운 발걸 음을 옮겨 돌아갔다. 어찌 미개한 중국의 문자로 책 이름을 붙이 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았지만 한웅의 뜻을 어길 마 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두 개의 두루마리가 있었다. 큰 것은 『해동감결이라 이름 붙인다 해도, 작은 것은 무어라 해야 할까? 중국의 글자를 사용하기는 싫었지만, 치우천왕의 명인이상 따라야 했다. 조금 고민해 보던 그는 홀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사경이라 하자. 맥달 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라 맥달 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우사이셨으니………….”

중얼거리면서 비렴은 두 권의 두루마리를 꼭 움켜쥐었다. 머 릿속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 두 권의 책을 수천 년 뒤에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하는 궁리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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