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6화 – 방황하는 유대인 6 : 칼키파의 고수들
칼키파의 고수들
정신없이 반대쪽으로 달리다 보니 통로의 막다른 곳에 다다 랐다. 그곳의 천장은 상당히 높았는데, 천장의 한 귀퉁이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줄사다리 한 가닥이 걸려 있었다.
“저기요!”
해밀튼이 외쳤다. 아마도 성소 쪽 통로인 것 같았다. 해밀튼은 성소 쪽 통로가 이미 막힌 게 아닐까 했지만 아직 괜찮은 것 같 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도인들은 성당 기사단의 입구 쪽으로 들어와 지키는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언약궤를 훔쳐낸다 음 성소 쪽 통로를 이용해 탈출한 듯했다. 이 줄사다리는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이리라.
먼저 동작이 빠른 우 사부가 줄사다리를 붙잡고 재빠르게 위 로 올라가는 순간, 갑자기 천장에서 낯선 사람의 얼굴이 불쑥 튀 어나왔다. 거무튀튀한 얼굴이지만 흑인만큼 검지는 않고, 머리 에는 흰 터번인지 모자인지를 썼으며, 부리부리한 눈에 구레나룻을 기른 거대한 덩치의 장한(漢)이었다. 얼굴을 내밀자마자 그는 음침하게 웃으면서 번쩍이는 뭔가를 휙 휘둘렀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줄사다리가 잘렸고, 매달려 있던 우 사부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 사부는 고수답게 재빨 리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면서 중심을 잡아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 했지만 줄사다리가 없어진 이상 그곳을 탈출할 길은 끊어진 것 이나 다름없었다.
정체불명의 인도인이 줄사다리를 끊으려 할 때 마하딥은 재빨 리 단검을 던졌고, 시켈도 소리를 질렀으나 인도인은 그 단검마 저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음침한 웃음소리만 남기고 인도 인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이제 어떡하죠?”
백호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현암은 그때까지 이를 악물고 만 서 있다가 곧 힘을 모아 공중으로 뛰어올라 보았다. 비록 현 암이 천정개혈대법을 익혀 공력이 막강하고 다리의 힘이 세다고 는 해도, 경신술(輕身術)이나 비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서 공 중으로 몸을 날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천장의 구멍은 오미터 이상의 높이여서 사람의 힘으로 뛰어오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다 죽었군!”
이런 와중에도 우 사부가 시니컬하게 소리쳤다. 현암이 입을 꼭 다물고 무서운 눈빛으로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외쳤다.
“백호 씨! 나에게 와요!”
그때 다시 폭발음이 들려왔고, 언약궤의 방은 더 이상의 충격 을 이기지 못할 듯 우르릉 하고 흔들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현암은 공력을 돋우고 다짜고짜 백호의 옷깃을 잡아 천 장 쪽으로 집어 던졌다.
백호도 처음에는 놀라는 것 같았지만 곧 사태를 파악하고 재 빨리 천장의 구멍을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다른 사람들은 현암 이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무거울 것 같은 사람을 한 손으로 가볍 게 집어 던지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탄성 같은 것을 지를 만큼 마음이 한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천장의 구멍으로 다시 인도인의 얼굴이 나타났고, 순 간 백호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호의 손 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는데, 인도인이 백호의 손을 칼로 그은 것 같았다.
“내가 저자를 막겠소!”
이번에는 우 사부와 시켈이 동시에 소리치며 나섰다. 현암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둘을 한꺼번에 잡아 한 명씩 위로 집어 던 졌다. 우 사부는 날아가면서도 양손을 휙휙 교차시키며 싸울 준 비를 갖추었다. 시켈도 쇠 손톱을 끼운 손을 휘둘러 댔다.
인도인은 그것을 보고 휙 몸을 뺐고, 다음 순간 쾅 하는 소리 와 함께 천장의 구멍이 막혔다. 두 사람이 만만치 않은 것 같자 아예 뚜껑을 덮어 버린 것이었다.
우 사부와 시켈은 둘 다 고수였지만 속절없이 땅으로 떨어지 는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뚜껑을 베어 내려고 월향검을 날리려했다. 하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언약궤의 방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앗!”
“아악!”
모든 사람은 이제야말로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어 비명을 질렀 다. 먼지구름이 해일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해밀튼은 오히려 붕 괴가 진행되고 있는 쪽을 막아서듯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심 각했고, 공포라고는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쪽으 로 천천히 몇 걸음을 옮기기까지 했다.
현암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이 빛났다. 현암과 해밀튼, 두 사람 만 공포에 질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먼지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사람들은 눈을 끔 벅이고 있었다. 붕괴는 기적적으로 그들이 있는 통로 끝까지 진 행되지 않고 불과 일이 미터 앞에서 멈추었다.
“살았군!”
사람들은 먼지투성이가 된 채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하지만 현암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월향검을 꺼내 검기를 주입한 다음 소리쳤다.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현암은 월향검을 날렸고, 검기가 실린 월향검은 구멍을 막은 철문을 단번에 관통했다. 그리고 현암은 방법을 바꿔 ‘흡’ 자결 의 수법으로 벽을 짚었다. 현암의 빨아들이는 힘에 의해 현암의 손은 흡반처럼 벽에 달라붙었으며 곧이어 그는 파리처럼 벽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장 위에서 인도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월향검을 보고 혼비백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챙챙 하는 소리와 몇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몇 번 들리 고는 월향검이 다시 튀어나왔다. 어떻게 했는지 볼 수는 없었지 만 여러 사람의 소리가 들린 것과 월향검을 튕겨 낸 것으로 보아 인도인들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현암은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로 올라가 있었는데, 그 상태로 는 양손이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만약을 대비해 몸을 뒤로 뒤집 어 발을 웅크리고 있었다.
과연 다음 순간, 다시 인도인이 구멍에서 나타나자 현암은 있 는 힘을 다해 물구나무 비슷한 자세로 발을 박차 양발차기로 인 도인의 얼굴을 걷어찼다.
인도인은 바로 천장 밑에 현암이 매달려 있을 줄 미처 짐작하 지 못했던 터라 고스란히 현암의 발차기에 얼굴을 걷어차이고 말았다. 비록 불안정한 자세도 걷어찼지만 현암의 다리에는 무시무시한 공력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인도인은 단번에 튕기듯 날아가 버렸다.
이어 현암은 재빨리 몸을 날려 천장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자마자 현암은 기세를 제압할 목 적으로 사자후 한 방을 날렸다. 그러면서 현암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 위쪽은 상당히 넓은 방이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 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다른 쪽 구석에서는 또 몇 명의 사람이 곡괭이와 브레이커 등의 장비로 굴을 파는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이었던 듯, 현암의 사자후 한 방에 넘어 지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등 단박에 무력화되었다. 모두 흑인으 로, 현지에서 고용된 인부들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쓰 러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덩치가 큰 사람들이 간간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그들이 성당 기사단의 여섯 기사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네 명의 인도인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현암에게 걷어 차여 저만치 쓰러져 있었고, 세 명은 각각 이상한 물건을 손에 들고 현암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치렁치렁하 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여자, 한 사람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남자였다. 넘어진 인도인은 천으로 둘둘 만 깃발 같은 것을 어깨에 둘러멘 덩치가 큰 남자였는데, 네 명 모두 요가 수행자들이 입는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덩치 큰 남자는 어느새 다시 일어나 있었다. 그는 얼굴이 벌겋 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화가 치밀어 그런지 얻어맞아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현암의 사자후에 놀라 조금씩 뒤로 물러섰 지만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방금 현암의 사자후는 급하게 발출한 나머지 사성(四)가량 의 공력이 실렸을 뿐이었지만 저 정도밖에 반응이 없다면 저들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우 사부가 휙 하고 구멍 위로 뛰어올라 왔다. 그들은 현암처 럼 도약력은 없었지만 마하딥이 제일 밑을 받치고, 그 위를 시킬 이 무등을 타고, 그 위를 다시 우 사부가 짚고 올라오는 식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어서 백호도 겨우겨우 천장 위로 올라왔다. 백호는 올라오면서 총을 겨누려 했지만, 아까 정신없이 달리다 가 떨어뜨렸는지 총이 없었다.
해밀튼 일행이 왜 올라오지 않는지 알 수 없었으나, 당장은 눈 앞에 있는 적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터라 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사부는 올라오자마자 인도인들을 보고 소리쳤다.
“타보트를 내놔라!”
그러나 우 사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인도인 노인은 현암에게 인도 억양이 강한, 억센 영어로 물었다.
“꼬레아에서 오신 분?”
현암은 이자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고 흠칫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굴 붕괴를 막아 내다니, 정말 대단들 하군.”
동굴 붕괴가 멈춘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왜 막아 낸 것이라 말하는지 현암 일행이 의아해하는데, 노인이 현암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로파무드의 친구요?”
“당신은 누구요? 당신도 로파무드를 아시오?”
현암이 되물었지만 노인은 계속 고개만 끄덕일 뿐, 현암의 말 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의 심하나다는 정말 대단하군.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않소.”
심하나다는 인도의 전설에서 전해지는 음공(功)으로, 사자 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암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사이 백호가 눈치 빠르게 밧줄을 하나 주워 던지자 마하 시켈이 차례로 올라왔다. 그러나 해밀튼은 올라오지 않았다.
“잔소리 말고 타보트를 어서.”
우 사부가 욕을 하려는데, 노인이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너는 입을 열 자격이 없다!”
그 소리는 현암의 사자후만큼이나 커서 석실 전체가 우르르 떨렸다. 우사부나 마하딥, 시켈 같은 고수들조차 움찔하면서 비 틀거리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아 넘어 지지 않았다. 물론 현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노인도 사자후 같은 심하나다를 할 줄 아는구나. 그러나 나보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
다만 지금 상황으로는 사 대사의 대결이 벌어질 공산이 컸다. 그런데 현암의 사자후에 적들은 조금 움찔하고 말았지만 노인의 심하나다에 현암 쪽 사람들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막상막하일까?’
인도인 노인이 가장 고수인 것 같았지만 현암보다 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현암은 공력이 충만한데다 월향검과 청홍검 을 모두 갖고 있어서 겁낼 것이 없었다. 하지만 현암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다른 세 명의 인도인을 상대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 렇다면 상황은 비슷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노인은 현암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을 해치기는 싫소. 그러니 그냥 물러가시오.”
“당신은 누구죠?”
현암이 묻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당신들은 칼키파요?”
현암이 다시 묻고 노인이 고개를 젓기도 전에 우 사부가 먼저 고함을 지르면서 노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이에 노인은 탄식인지 뭔지 알기 힘든 한숨을 다시 내쉬면서 지팡이를 까닥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세 사람 이 무기를 꺼냈다. 키가 큰 남자는 품 안에서 쇠붙이 같은 것을 꺼내 들었고, 덩치 큰 남자는 어깨에 둘러멨던 깃발 같은 것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겉을 둘러쌌던 천이 풀어지면서 쇠로 만들어진 듯한 테이프 뭉치가 채찍처럼 주르륵 풀어졌다.
그리고 여자는 옷자락을 한 번 떨쳤는데 그녀의 팔과 다리와 온몸에서 자두만 한 물건들이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 들은 모두 그녀의 몸과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고 난 다음 키가 큰 남자는 품에서 꺼낸 물건을 손가락에 끼우고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둥근 고리 모양의 칼 날 같아 보였는데 두 개는 양손 검지에서 살아 있는 듯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고, 나머지는 손에 쥔 채였다.
덩치 큰 남자는 마치 기다란 총채 같아 보이는 그 무기를 허공 에 휘둘렀다. 날카로운 쇠 테이프들은 허공에서 한 올도 흐트러 지지 않고 우르릉우르릉 울리는 소리를 내면서 춤추었다. 이어 서 기이하고도 요염한 동작으로 여자가 춤을 추자 그녀의 몸에 매달린 추들이 그녀의 몸 주위를 무섭게 회전했다.
‘대단한 자들이구나.’
현암은 그들의 몸놀림을 보자 바짝 긴장되었다. 셋 다 처음 보 는 무기들이었지만 그들의 솜씨는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면서도 물 샐 틈이 없어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시켈도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 지막한 소리로 백호에게 말했다.
“저 둥근 고리는 차크람. 쇠채찍은 우르민. 차크람은 던지는 것이고, 우르민은 휘두르는 것. 셋 중엔 여자가 가장 강할 것 같 은데…………….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저 노인이야.”
긴장한 백호가 현암에게 시켈의 말을 전해 주자 현암은 말없 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우사부는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통배권의 수법으로 양손을 휘두르면서 우르민을 휘두르는 자에게 덤벼들었다가 다 시 번쩍 몸을 날려 차크람을 든 자를 덮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각각 무기를 휘두르고 몸을 날려 우 사부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 아직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우사부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여긴 듯, 뒤로 물러나 현암과 마하, 시켈 등과 나란히 섰다.
그때 마하딥이 소리쳤다.
“성당 기사단 친구들도 당신들이 해쳤나?”
인도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켈이 외쳤다.
“타보트는?”
노인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한번 아주 실망스러운 듯, 슬픈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돌아가시오.”
그 말에 현암은 천천히 등에 진 배낭을 풀고 그곳에 꽂힌 청홍 검을 빼 들었다. 그사이에도 현암의 머리는 무섭게 돌아가고 있 었다.
우르민과 여자의 추는 거리가 멀면 공격할 수 없다. 던지는 차크람을 월향으로 막고, 청홍검으로 우르민을 막으면서 파고들 어 먼저 덩치 큰 남자를 쓰러뜨리고 여자를 막으면 승산이 있다! 일대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우선 세 사람이 각각 한 명씩 맡아 시간을 끌어 주는 동안 내가 전력으로 하나씩 각개격파를 한다 면 단시간 내에 이길 수도 있겠다.’
승산이 보이자 현암은 간단히 대답했다.
“갈 수 없소.”
“당신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이길 수는 없을 거요. 우리도 솔직히 피해를 전혀 보지 않고 당신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소. 그런데도 굳이 싸워야만 하겠소?”
현암은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나직하게 백호에게 속삭였다. “세 사람에게 각각 하나씩 맡아 시간을 끌라고 전해 주세요. 노인은 피하고요. 그때 내가 약한 자부터 전력으로 각개격파하 면 승산이 있습니다.”
백호는 즉각 그 말을 나머지 세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
현암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세 사람이 일제히 현암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현암도 재빨리 행동에 들 어갔다. 그런데 현암의 예측과 달리, 노인을 제외한 세 사람은 한꺼번에 무섭게 현암에게 덤벼들었다. 우 사부나 마하딥 등이 각각 한 사람에게 덤벼들려 했으나 그보다는 저쪽의 동작이 더 빨랐다.
‘제길!’
현암은 속으로 혀를 찼다. 현암보다 인도인들 쪽이 더 노련했 던 것이다. 좌우간 이자들의 최초의 맹공을 막아 내야만 했기에 현암은 있는 힘을 다 끌어 올렸다.
키 큰 남자는 현암에게 두 개의 차크람을 날렸다. 예상했던 공 격이었다. 현암은 곧장 왼팔을 뻗어 월향검을 날렸다. 차크람은 기이하게도 현암에게 직접 날아오지 않고 반원을 그리면서 살아 서 조종되는 듯 현암의 배후를 파고들었으나 의지를 지닌 월향 검만큼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두 개의 차크람이 탁탁 소리를 내며 월향검에 맞아 떨어지는 순간, 현암은 크게 기합을 넣으면서 우르민을 휘두르는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청홍검의 날은 예리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우르민의 얇은 칼날을 말아 한 번에 잘라 볼 요량이었다.
그 순간, 우르민이 넓게 퍼지면서 청홍검의 날을 감아 들어왔 다. 동시에 남자는 왼팔을 휘둘러 현암의 얼굴을 치려고 했다. 현암은 곧 자신도 왼손을 들어 남자의 주먹을 막으면서 청홍검 을 돌려 쥐어 우르민의 날을 절단하려 했다.
남자의 힘은 엄청났지만 현암의 공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펑 하면서 마치 커다란 돌이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이 나면서 남자 의 어깨가 뒤로 휘청 밀렸다.
현암은 양쪽 어깨에 전해 오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우르 민의 칼날은 열 가닥이 넘었고, 남자는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조 종할 수 있었다. 청홍검을 감은 날 말고도 두 개의 날이 숨어 있 다가 현암의 목을 노리고 뒤에서 감겨든 것인데, 남자가 균형을 잃는 바람에 어깨만 스친 것이었다.
비록 남자의 왼팔에 타격을 주었지만 자신도 상처를 입자 현 암은 분노해 청홍검에 사성(四)의 공력을 가했다. 월향검 말고 현암의 공력을 버텨 낼 수 있는 무기는 드물었지만 청홍검은 지 극히 보기 힘든 보검이라 현암의 공력을 받을 수 있었다.
청홍검에 검기가 맺히자 곧 우르민의 날 두 개가 끊어져 나갔 다. 남자는 상처를 입었지만 우르민의 날이 잘리는 것을 보고 급 히 청홍검에서 우르민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현암은 내친김에 우르민의 날을 모조리 잘라 버릴 셈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현암은 우르민 말고 또 무엇인가가 등 뒤를 덮쳐 오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어쩔 수 없이 현암은 우르민이 감긴 채로 청홍검을 등 뒤로 돌려 날아오는 살기를 쳐냈다. 그것 은 여자가 날려 보낸 추였다.
‘여자는 상당한 거리에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추를 날렸을까?’
그 틈에 남자는 우르민을 회수했고, 현암도 균형을 잡으면서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돌려 보니 여자는 여전히 먼 거리에서 무섭도록 빠른 동작으로 몸을 돌리며 춤을 추고 있었 다. 그런데 그사이 다시 서너 개의 추가 현암을 향해 날아들었 고, 다급해진 현암은 파사신(邪神劍) 중의 보호식인 파사 호검(破邪守護劍)을 써 간신히 청홍검으로 추들을 막아낼 수 있 었다. 그녀의 몸에 연결된 추는 보통 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질긴 고무줄 같은 신축성이 있는 줄로 연결되어 있었던 터라 멀 리까지도 자유롭게 추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하딥을 비롯한 세 사람은 각각 한 사람씩 맡으려 했으나 세 인도인의 무기는 근거리와 원거리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것 들이었다. 때문에 세 인도인은 각자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공격 을 방어하면서 현암을 공격했다. 우 사부 등은 별로 안중에 두지 않는 듯 그들은 대부분의 힘을 현암을 공격하는 데 쓰고, 자신들 의 방어에는 중점을 두지 않았다.
제아무리 현암의 공력이 강하다 해도 이 기이한 무기들의 합 공은 정말 막기 어려웠다. 월향검으로 차크람을 간신히 거둬 내 고, 청홍검으로 우르민을 막아 내더라도 벼락같이 덮치는 여자 의 추는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검이 묶인 셈이니 현암 의 나머지 수단은 기공술뿐이었는데, 저들은 모두 원거리 공격 을 주로 하는 판이라 손이 닿을 수가 없었다.
월향검은 잠깐 사이에 여섯 번이나 현암에게로 날아드는 차크 람을 튕겨 냈고, 현암도 파사신검의 초식을 유감없이 사용해 우 르민의 날을 두 개 더 잘랐지만 여자가 날려 보내는 철추는 진땀 이 흐르게 만들었다. 때때로 현암에게로 추가 날아드는 것을 마 하딥이 중력파를 써서 간신히 억제해주는 판이었다.
현암은 점점 손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싸우다간 삼분도 못 버티겠다.’
다행히도 마하덥과 우 사부와 시켈 등이 점차 상대를 파악하 고 정확하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인도인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으뜸가는 고수들이었다. 우 사부는 차크람을 날리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월향검이 차크람을 쳐 내는 동안 남자는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적확한 선택이었다. 우 사부가 강렬한 통배권으로 손바닥을 획 휙 휘두르자 바람 소리만이 아니라 실제 장풍처럼 바람이 일어 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월향검이 계속해서 차크람을 번개같이 튕겨 내자 남자는 안색이 변하면서 우 사부의 무서운 손바닥을 피해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시켈은 쇠손톱을 펼쳐 재빨리 바닥에 몸을 뒹굴면서 우르민을 든 자를 공격했다. 다만 우르민이 춤추고 있을 동안은 몸을 날리 거나 굴려서 멀어졌다가 청홍검과 우르민이 얽히는 순간에만 집 요하게 파고들었다.
남자는 우르민을 쌌던 천 깃발을 휘둘러 시켈의 쇠 손톱을 막 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대여섯 군데나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자는 무척이나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한데다 고집이 대 단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한편, 마하딥은 중력파를 최대한 발하면서 여자에게 계속 단 검을 던졌다. 여자의 추도 중력파는 벗어날 수 없어, 여자는 이 미추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데 퍽 어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 여자의 춤은 매끄럽고 요염하기 그지없었는데, 중력파가 가해지자 여자는 조금씩 땀투성이가 되어 갔다. 거기에 마하 의 단검이 꽤 신경 쓰이게 날아들어 여자는 현암을 제대로 공격 하기 어려운 듯했다.
세 사람이 안정을 찾자 현암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현암은 크 게 소리를 지르면서 공력을 돋우어 훌쩍 우르민의 자루를 잘라 버리려고 청홍검을 휘둘렀다. 그때 노인이 다시 크게 심하나다 를 외쳤다. 순간적으로 마하딥을 비롯한 세 사람이 충격을 받아 움찔하는 사이 세 인도인의 무기가 벼락같이 현암만을 노리고 집중되었다. 전광석화 같은 기세였으며, 무척이나 많은 수련을 쌓은 솜씨임에 분명했다.
현암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추와 차크람과 우르민 에 휩싸여 도저히 피할 수도, 움츠릴 수도 없었다. 그때 월향검 이 미친 듯 회전하면서 벼락같이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 다. 사람이었다면 목숨을 버리는 결사적인 방어였다. 두 개의 차 크람과 우르민 세 가닥이 월향검에 의해 튕겼다. 그 틈에 현암은 청홍검으로 우르민 두 가닥과 추 세 개를 휘감았고, 추 한 개는 급한 나머지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추 하나가 현암의 가슴을 쳤다. 비록 공력으로 보호 되고 있었지만 현암의 몸은 무쇠가 아니었다. 한 방으로 죽거나 중상을 입진 않더라도 도망칠 곳도 없는데 상처를 입으면 가뜩 이나 버티기 어려운 판에 더 많은 상처를 입을 것이고, 그러면 끝장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이상하게도 쨍 소리와 함께 타격감이 그리 크지 않았 다. 정말 천행으로 추가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뭔가에 부딪 힌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해 보기도 전에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이번에는 사자후를 발했다.
공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좀 위험하겠지만, 그것 말고는 이 연속 공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십성) 전력을 사용하면 보통 사람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판단에 마지막 순간 에 힘을 줄여 팔성(八)의 공력만 사용했다.
“어허엉……!!”
석실 안이 무섭게 흔들렸다. 이것은 아까 현암이 발했던 사 (四) 공력의 사자후나 노인의 심하나다와 비할 것이 아니었다. 팔성 공력을 사용했다고 사성 공력을 사용했을 때보다 두 배 더 위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보다 두 배 더 힘센 어른은 어린아이 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듯이 두 배의 공력이란 산술적인 두 배보 다 훨씬 넘는 거의 다른 차원의 힘을 발하는 것이다.
현암의 무지무지한 사자후에 대부분의 인부들은 그만 까무러 쳐 픽픽 쓰러져 버렸다. 백호는 비록 공력을 수련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무술을 익힌 건장한 남자였는데도 정신이 아득 해지고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을 느끼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하딥과 시켈, 우 사부 등도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자신 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렸다. 셋 중 다소 약한 시켈은 풀썩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그리고 현암을 공격하던 세 인도인 도 비틀거리면서 제 풀에 공격이 흐트러졌다.
그 와중에 여인의 추와 우르민이 한데 얽힌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얽힌 것을 풀려고 했지만 금방 풀리지 않았다.
차크람을 조종하던 남자는 돌아오는 차크람을 받다가 놀라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손가락 끝 마디가 베어 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어깨를 한 번 부르르 떨었을 뿐이었다.
만약 마하덥이나 우 사부가 정신을 차렸다면 이 순간을 놓치 지 않고 덤벼 세 인도인을 순식간에 해치웠겠지만 그들이 받은 타격은 인도인들보다 더 심했다. 그리고 현암도 숨을 들이마시 고 공력을 조종하느라 일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여태 껏 움직이지 않고 있던 노인이 몸을 움직였다.
노인은 귀신처럼, 무릎도 굽히지 않았는데 갑자기 현암의 옆 으로 이동해 왔다. 이어 그의 지팡이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당신은 너무 강하군! 큰 화가 미치겠어! 내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만은 해치워야겠소.”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는 기술은 기괴망측하면서도 번개 같 았다. 현암은 삽시간에 아까 세 인도인을 상대할 때보다 더 큰 압박감을 느꼈다. 더구나 노인은 계속 현암에게 떠들어 대면서 도 지팡이를 휘두르는 솜씨에는 한 점 착오가 없었다.
순식간에 현암은 몸 여기저기에 세 대를 얻어맞았는데, 지팡 이의 위력은 쇠몽둥이보다도 강했다. 공력을 극도로 돌린 상태 의 현암에게도 별이 보일 정도였으니 보통 사람 같으면 한 대에 뼈가 부서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다행히 월향검이 날아와 노인의 배후를 집요하게 견제해 주었 기에 망정이지, 자칫했다가 현암은 그 기괴한 지팡이의 그림자 에 갇혀 순식간에 박살 날 판이었다. 더구나 노인은 조금도 자신 을 방어하지 않고 오로지 현암을 노리는 데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현암이 만약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노인의 공격을 세 번 정 도 몸으로 버티면서 노인을 청홍검으로 꿰뚫어 버릴 수도 있었 다. 그러나 현암은 사람을 죽일 마음이 없었던지라 식은땀을 흘 리면서 노인의 공격을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좋다! 해보자!’
현암은 기를 쓰면서 파사신검의 기기묘묘한 초식을 발휘해 무 서운 검막을 형성했다. 청홍검은 굳이 검기를 크게 쓰지 않아도 월향검에 비해 길고 대단히 예리하기 때문에 파사신검의 수법을 눈부신 속도로 시전하기에는 아주 알맞았다.
그렇게 되자 노인의 지팡이는 청홍검과 눈 깜짝할 사이에 타 타타탁 소리를 내며 열댓 번이나 부딪혔고, 노인의 지팡이는 아 주 견고해 잘리지는 않았지만 수십 군데 칼자국이 나 볼썽사납 게 되어 버렸다. 지금 현암은 검술에서도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바랄 수도 없는 극도의 경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통 사 람이 수련을 하더라도 무지무지한 공력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검법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한 방향으로 검을 무섭게 휘두르고, 다음 순간 방향을 바 꾸려면 검의 무게와 가속이 있기 때문에 반대의 힘을 지속적으 로 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그 순간 이 만약 상대방이 공격하기 위해 무기를 돌리는 시간보다 길다 면허점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 때문에 모든 검법은 원초적으 로 상대의 그러한 허점을 찌르면서 내 쪽의 방어를 극대화하는 수법을 모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암이 청홍검을 휘두르는 것은 모든 공력을 검기가 아니라 검을 휘두르는 기세에 쏟는 것이라 검을 자유자재로 조 종할 수 있었다. 언제라도 위치와 방향을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 는 힘이 항상 있다면 검법의 위력은 몇 배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현암이 사용하는 초식은 파사신검이라는 정교한 검법 이었다. 현암도 눈이 빠르기는 했지만, 무시무시하게 회전하는 노인의 지팡이를 꿰뚫어 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암은 그 냥 검법의 순서대로 무조건 최대로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노인의 지팡이술은 보도 듣도 못할 정도로 정교하고 위력이 엄청났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두르는 현암의 검술은 노인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현암은 벌써 순식간에 대여섯 번이나 검초를 반복하고 있었고, 노인은 진작 현암의 검법을 파악한 상 태였다.
그런데도 노인이 현암의 검을 돌파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무지한 속도와 힘 때문이었다. 아무리 검법의 틈새를 알고 찔러 들어 가려 해도 현암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 이상으로 지팡이를 휘두 를 수가 없었다.
사실 이 노인은 지팡이의 무예로만 따진다면 전 세계에서 다 섯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무지무지한 고수라 할 수 있었다. 노 인의 한평생 동안 그의 지팡이를 삼 초 이상 막아 낸 자가 없었 다. 그런데도 비록 정교하기는 하지만 같은 검초를 끊임없이 반 복하는 현암을 이겨 내지 못하니 그는 내심 분통이 터졌다.
게다가 현암이 휘두르는 칼은 무서울 정도로 예리해 감히 정 통으로 맞부딪칠 수도 없었다. 노인이 여유 있게 공격하고, 현암 이 힘겹게 막아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노인이야말로 지 팡이가 부러지지 않도록 비지땀을 흘리는 판이었다. 검날이 아 니라 옆으로 부딪혀도 지팡이에 흠집이 생기는 정도니 검날에 찍혔다가는 즉시 두 토막이 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죽은 목숨 이나 다름없었다.
또 노인은 현암이 같은 검초를 반복하는 것이 일종의 속임수 라고 믿었다. 그토록 무서운 힘을 지닌 명검을 가진데다 등 뒤로 검을 날려 자신을 공격하기까지 하고, 이토록 정밀한 초식을 쓰 는 사람이 알고 있는 초식이 한 가지뿐이라고는 누구도 짐작하 지 못할 것이었다.
노인은 현암이 계속 같은 초식을 반복하면서 자신을 가지고 놀다가 틈을 봐 일격에 처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에 식은땀 이 흐르는 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는 술수를 변 화시켜 가면서 느닷없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현암의 일격에 대비 하려 했다.
여기에 등 뒤의 월향검을 막는 데까지 신경을 집중해야 했으 니 실제로 위기에 몰린 것은 노인 쪽이었다.
이런 것을 짐작할 리 없는 현암은 그냥 파사신검의 위력이 정 말 절묘하다는 마음으로 죽으라고 그 검초만 반복하는 중이었 다. 현암은 자신의 공력과 청홍검, 월향검의 위력에다 파사신검 의 정밀한 검초를 막아냈던 자가 여태 없었으니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현암이 펼쳐 내는 반복적인 검초는 초식을 초 월한 무예의 극단에 이른 것이었다. 그에 대응하는 노인의 지팡 이 또한 기교에 있어서는 또 다른 무술의 한 극단이라 할 수 있 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공전절후(絶)의 싸움이었다. 아주 옛 날이라면 몰라도, 총알이 난무하는 21세기에 이토록 신기에 가 까운 무예의 대결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 으리라.
무술을 익히긴 했지만 고수라고까지 할 수 없는 백호마저 모 든 것을 잊고 넋을 잃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정도였다.
하물며 마하딥과 시켈, 우사부와 세 인도인은 무기를 휘두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무시무시한 대결을 눈으로 좇느라 자신의 목숨마저 잊은 상태였다. 심지어 우 사부는 냉혹하고 조소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솟구쳐 나올 정도였다.
“정말 이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우 사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모두의 환각은 깨졌다. 그제야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데 엉겨 최대한의 힘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한편, 노인은 도저히 이대로는 현암을 당할 수 없다 싶자 최후 의 방법을 썼다.
“고반다 님을 위해서라도 너는 없어져야 한다! 너는 반드시 우리 일을 방해할 테니까. 어서 날 죽여라! 우리 같이 죽자!”
노인은 미친 듯이 자신의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떠들 어 대며 현암에게 파고들었다. 현암은 기이했다. 이 노인은 왜 구태여 묻지도 않는 것을 떠드는 것일까? 그러나 고반다가 도 대체 누구이며, 왜 이 노인이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자신을 없앤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칼키파의 수석 사제다! 우리는 모두 고반다 님을 받든 다. 고반다 님이 누구신지 아느냐? 내가 목숨을 바치려는 그분을 너는 아느냐?”
“그게 누구냐?”
현암은 너무 궁금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순간, 노인의 지팡이가 현암의 어깨를 일곱 번이나 내리쳤다. 공력이 도는데 도 불구하고 현암은 어깨를 휘청하며 하마터면 청홍검을 떨어뜨 릴 뻔했다. 천만다행히도 월향검이 죽을힘을 다해 노인의 등 뒤 를 엄습하고, 노인의 지팡이가 현암의 공력에 반탄되는 바람에 노인은 그 호기를 살리지 못한 채 몇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시오!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우사부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기묘한 무술을 썼는데, 이는 상대가 알고 싶어 하는 비밀을 자꾸 들려줘 상대방 의 정신을 헛갈리게 하는 특이하고도 다소 치사한 수법이었다. 노인은 그렇게 떠들면서도 자신의 공격을 전혀 완화시키지 않 는 특이한 무술을 젊었을 때 익혔는데, 이후 무지무지한 고수로 변하면서 그러한 치사하고 창피한 방법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 았다. 그런데 현암은 노인이 평생 써 보지도 못한 기이한 술수를 총동원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우세한 것 같아도 실 제로는 초조하기 짝이 없어지자 노인은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쓰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틈도 용 납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정신을 아주 조금이라도 분산시킬 수 있다면 성공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현암은 비록 공력을 아낌없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초식을 변화시키는 데 별반 신 경을 쓰지 않고 손 가는 대로, 몸이 익힌 대로만 하고 있다는 사 실이었다.
만약 현암이 초식 하나하나를 변화시키며 대응했다면 노인의 이 수법에 금방 파탄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현암은 애당초 그런 변법(法)을 사용할 줄도 모르거니와, 지금은 그냥 검법대로만 휘두르는 것 외에는 대응할 다른 방법도 없는 상황였다.
방금 당할 뻔한 것도 무심코 말을 하느라 손이 흐트러진 탓이 지, 말만 하지 않았다면 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해도 조금도 흐트 러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제 현암은 한 번 당할 뻔한 다음에는 넘치는 공력으로 부동심결의 무념무상의 경지로 들어가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외우고 있는 검초만 휘둘렀다. 노인에게 한 번의 기회는 있었지만 다음 기회는 없는 셈이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자 현암의 검초는 똑같은 반복이라도 속도와 기세가 더해져 노인에게 광풍같이 밀어닥쳤다. 이제 노인은 겉 으로 보기에도 땀투성이가 되어 갔고, 평생 걸려 쌓은 무시무시 하며 외부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비장의 술법까지 총동원하 면서도 현암의 기세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또 월향검은 현암이 맞는 것을 보고는 죽기 살기로 노인에게 대들었다. 노인은 워낙 엄청난 고수라 검기가 실리지 않은 월향검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그것을 쳐 내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손이 더 어지러워지고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은 아까 한 번 통했던 수법을 떠올리고는 물에 빠진 사람 이 지푸라기 잡는 셈으로 자신의 비밀을 마구 술술 털어놓기 시 작했다. 욕설이나 거짓말로는 고수들을 격동시킬 수 없다.
진정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비밀을 외치는 것이 최 고의 방법이라고 그는 배웠다. 지금은 자신의 정체나 자신이 속 한 곳의 정보가 최선의 비밀이었으므로,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 데 비밀을 털어놓는 셈이 되어 버렸다.
평상시 같으면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그런 비밀 을 누설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기고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무참한 패배를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목숨보다 진다는 괴로움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렇기에 그는 이기기 위해 목숨보다도 소중한 비밀을 모조리 술술 털어 놓았다.
노인으로서는 자신이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 다. 어떻게든 이기고 난 다음 모조리 죽여 버리면 비밀이고 뭐고 상관없지 않겠는가 하는 독한 심산이었다.
“고반다 님은 칼키시다! 세상을 평정하시고 다시 만드실 것이 다! 그분이 왜 언약궤 같은 물건을 원하시는지 아느냐? 세상에 고반다 님의 적수가 될 수 있는 녀석은 둘뿐이다! 그 녀석을 없애려고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싸워야 하느냐? 네가 그 걸 찾는 이유는 뭐냐? 너도 아하스 페르츠를 아느냐?”
한편, 우사부와 마하딥 등은 다른 세 인도인과 목숨을 건 혈 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여섯 사람은 피투성이에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모두들 조금도 물러서지 않 았다.
지금 현암과 노인이 팽팽하게 대적하는 상황에서 어느 편이 가세한다면 현암이나 노인 둘 중 한 명은 쓰러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그들과 차원이 다른 두 명의 대고수 앞에 나머지는 우르 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싸움은 집단으로 얽히는 것이라 현암과 노인의 대결만 큼 오묘하지는 않았지만, 험악하고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만들 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노인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누 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져 갔다.
우사부나 마하딥, 시켈은 인도인들의 비밀을 듣자 자신도 모 르게 놀라고 궁금해져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인도인들은 자신들 의 윗사람인 노인이 비밀을 술술 털어놓는 것에 경악해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평소에 사용하던, 놀랍고 화 려한 수법들을 차츰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헛손질이 잦아지자 실수가 늘어났고, 실수를 만회하려다 보니 마구잡이식으로 치사하고 비겁한 술수까지 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소 잘 사용하지 않았던, 극도로 험악하고 치사한 수 까지 남김없이 사용했다. 눈이나 발을 찌르려 하거나, 먼지를 집어 던지고 머리로 들이받으며 물어뜯고 할퀸다든지 여자가 남 자의 아랫도리를 공격한다든지 하는 등의 얼굴이 붉어지는 수법 까지 총동원해 악투를 벌이는 판이었다.
그렇게 혼전 양상으로 바뀌자 서로 간에 점차 얻어맞는 횟수 는 많아졌지만 마구잡이식으로 가해진 공격이 많아 치명타를 입 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엉켜 싸우는 것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와중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은 백호였다. 백호는 여기 있는 사람들과 엉켜 싸울 만한 실력이 없는데다 총마저 없어진 터라 멍하니 있을 따름이었다. 저쪽에 성당 기사단원들이 묶여 있는 것이 보였지만 성당 기사단원들도 같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처지 아닌가?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백호는 우사부의 외침과 현암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화 가 나서 노인의 말을 새겨듣는 한편 목소리를 높여 꼬박꼬박 대 꾸했다. 백호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판이라 비밀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스스로 귀를 막고 정신을 헛갈 리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실정이었다.
그중 현암은 부동심결의 심법을 써 아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노인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건 하나도 알아듣 거나 기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다! 너희가 언약궤를 가져간 건 아하스 페르츠를 상대하기 위해서냐?”
노인은 비록 현암을 직접 상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현암 의 입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오색영롱한 빛을 그리는 청홍 검의 궤적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런 차에 현암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그 말이 현암의 입에서 나 온 줄 알고, 현암이 이제 곧 말려들겠구나 싶어 신이 나 지껄이 면서 지팡이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다! 그는 고반다 님의 가장 큰 적수라 할 수 있다! 그 악 독한 녀석은 죽지도 않으니, 그것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 언약궤는 지금 너희들 손에 있는 거냐?”
“이미 옮겨졌다. 지금쯤 인도양 상공을 날고 있을 거다!”
“고반다는 누구지?”
“망령되게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그분은 대성인이시 며, 대기이시다!”
백호는 지난번 홍수 사건 때 바바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즉시 물었다.
“대성인, 대기는 바바지 님 아니신가? 너희의 고반다는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하라고 시키는데, 그게 무슨 성인이 할 짓이냐?”
그 말에 노인이 무섭게 화를 냈다.
“바바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바지는 죽었다!”
“뭐? 바바지 님이……………?”
“고반다 님이야말로 세상을 평안케 하실 분이다! 큰일을 하려 면 작은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법! 그분이야말로 모든 악을 소멸 시키는 능력을 지니신 …….”
노인은 그 순간 아차 하면서 손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자 기가 자기 무덤을 판 꼴이었다. 순간적으로 고반다와 바바지가 비교되자 노인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퇴마사들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대성인 바바지는 노인도 알고 있었고, 노인도 바바지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책임 이 있는 자였다. 물론 그는 바바지보다 고반다를 더 신봉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그러한 성인의 죽음에 일조를 했다는 것에는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양심의 앙금 때문에 스스로 분노해 손이 어지러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백호는 염장을 지르는 소리를 계속 해 댔다.
“정말로 악한 놈들치고 자기가 나쁘다는 놈 보지 못했다! 더 구나 선의의 탈을 쓰고 악행을 한다면 그야말로 개자식이 아니 고 뭐냐!”
백호는 평상시 입에도 올리지 않았던 비속어로 끝도 한도 없 이 고반다를 욕해 댔다. 그러고 보니 백호의 욕 실력도 수준급 이었다. 노인이 종교 단체인 칼키파의 수뇌급이자 그 일원인 만 큼 자신이나 자기 어머니에 대한 욕은 참을 수 있어도 그들이 추 앙하는 고반다에 대한 욕을 듣는 것은 못 참으리라는 판단에서 였다.
백호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인 도어로 욕을 해 대면서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노인의 입장에서, 백호 같은 자는 손 한번 놀리면 그냥 황천으로 보내 버릴 수 있는 터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자신이 추앙하는 대상에 게 욕을 퍼붓는 것을 두 눈 뻔히 뜨고 보고만 있자니 수치도 이 만저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말발로 현암을 격동시키려다 반대로 자신이 분노하게 되자 노 인은 차차 실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현암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서 차분히 계속 파사신검의 검법을 그대로 펼칠 뿐이었다.
현암이 검술을 이 정도로 발휘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 다. 검법을 계속 반복하면서 현암은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검법 에 대한 감을 점점 더 분명하게 느껴 갔다. 그래서 현암은 노인 에 대한 분노나 모든 일조차 잊은 채 검을 휘두르는 데만 전념했 고 이에 노인의 손은 더욱더 어지러워져 갔다.
그래도 노인은 막강한 고수라 실수를 해도 기발한 변초(變招)로 지탱해 나가면서 크게 패세를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노인은 인도어로 뭐라 고 크게 외쳤다. 그러자 일행 중 유일하게 인도어를 알아듣는 시 켈이 놀라서 외쳤다.
“이자들은 이길 수 없게 되면 자폭할 작정이오! 이 방에도 폭 Eto…….”
순간 시켈의 손목에 우르민이 스치고 지나가 시켈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시켈의 손에서 피가 솟구치자 시켈이 사용하는 쇠 손톱의 위력은 눈에 띌 정도로 약해졌다.
노인은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현암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현암의 검법은 점점 기세를 더해 가는 데 반해 자신은 점점 기운 이 빠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 부하와 함께 현암을 상대하더 라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수많은 비밀을 현 암에게 말했으므로 현암을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노인은 괴로운 결단을 내렸다. 물론 아직까지 노인에게는 부 하가 기폭 장치를 작동시키는 동안 현암을 붙잡아 놓을 충분한 힘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면 언제 자신 이 당할지 모르는 까닭에 그는 서둘러 동시에 모두 자폭하는 길 을 택하기로 한 것이었다.
악전고투를 벌이던 세 인도인은 이런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 했다. 여자와 우르민의 거한은 분위기를 일신시켜 강하게 공격을 개시했고, 차크람을 던지는 남자도 차크람을 무섭게 회전시켜 던진 다음 훌쩍 뛰어 뒤로 몸을 빼냈다.
그자가 폭발물을 기폭시키려는 것이 분명해 마하딥과 우사 부, 시켈은 그를 막으려 악을 썼지만 여자와 우르민의 방해로 막 을 수 없자 백호에게 외쳤다.
“어떻게든 해 보시오!”
아무리 차크람의 남자가 맨손이라고 해도 백호는 그를 막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백호는 물불을 가리 지 않고 나름대로 특공무술 실력을 발휘하면서 그에게 덤벼들 었다.
차크람의 남자는 계속 차크람을 받아 던지면서 그 사이사이에 기이한 동작의 무술로 상대를 공격하는 고수였다. 그런 남자가 백호 정도의 솜씨에 당할 리 없었다.
타타탁 소리와 함께 백호는 차크람의 남자에게 두 번의 발차 기와 세 번의 주먹질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백호가 보 지도 못한 순간에 전부 막혀 버렸고, 백호는 아랫배와 아래턱에 강렬한 타격을 받고 저만치로 나가떨어졌다.
그 틈을 타 차크람의 남자는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배낭 같 은 것을 꺼내 들었다. 기폭 장치임이 분명했다.
“고반다 님을 위하여 …………!”
남자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크게 부르짖었고, 현암과 노인을 제외한 모두는 이제 끝장이다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념 무상의 경지에 있는 현암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검법에만 열 중하고 있었다. 만약 현암이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노인에게 여 러 대의 타격을 입을지언정 급히 남자를 제지했을 것이다. 그러 나 현암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가 있어 남자를 제지할 수 없 었다.
그때였다. 소름끼치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 다. 너무도 처절한 비명이었는데, 물론 철추를 조종하는 인도 여 자의 비명은 아니었다.
그것은 월향검이 낸 소리였다. 현암이나 백호는 그 소리를 모 르지 않았지만 다른 자들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대고수인 노인을 제외한 인도인들이 순간적으로 손을 멈칫했 다. 그 순간, 월향검은 쏜살같이 날아들어 차크람의 남자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내며 배낭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차크람의 남자도 월향검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기폭장치를 잡고 득의만면해 있었고, 아무도 자신을 말릴 수 없 다며 방심하고 있었다. 남자의 상처는 상당히 심해 양손가락을 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배낭에서 쇠로 된 상자 같은 것 이 툭 떨어졌다. 기폭 장치였다.
쓰러졌던 백호는 그것을 보고 서둘러 몸을 날렸다. 양손을 다 친 남자도 급히 몸으로 기폭 장치를 얼싸안으려 했다. 월향검이 공중을 회전해 다시 차크람의 남자를 공격하려는데, 저쪽에서 마하딥과 싸우던 여자가 추 한 개를 날려 보내 월향검을 정통으로 맞혔다.
월향검이 튕겨 날아가자 남자가 먼저 기폭 장치를 안았다. 기 폭 장치의 스위치는 손가락이 부자유스러워도 누를 수 있는 구 조였다. 그것을 보고 백호는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 었다.
남자는 그 와중에도 발을 귀신같이 놀려 연달아 네 번이나 백 호를 걷어찼다. 백호는 죽을 각오로 기폭 장치에 매달렸지만 네 번의 발길질에 버티지 못하고 코피를 쏟으며 다시 쓰러졌다. 남 자는 백호를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중상을 입은 몸으로 백호를 쓰러뜨리느라 무척이나 힘을 썼는지 숨을 헐떡이며 씹어뱉듯 말했다.
“이 끈질긴 놈…….”
순간, 남자의 눈에 자신이 던진 차크람이 다시 던져지기 위 해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암담해졌다. 차크람의 날 은 예리하기 짝이 없어 그것을 손상 없이 잡는 데만 수십 년 동 안 수련을 해야 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놀려지지 않는 상황에서 돌아오는 차크람을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남자는 자신의 차크람에 맞아 다치는 길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자는 기폭장치를 내버려 두고 풀쩍 몸을 날려 차크람을 피하려 했다.
그때, 쓰러졌던 백호가 끈질기게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 졌다. 얻어맞은 것 때문에 상황 판단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백호는 무작정 남자를 잡고 늘어졌다. 뛰어오르는 순간 다리를 잡히자 남자의 몸은 더 이상 떠오르지 못했다. 이어 남자의 눈에 득달같이 날아드는 두 개의 차크람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으아악!”
남자의 비명 소리가 이어지다가 뚝 끊겼다.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두 개의 차크람 중 하나는 남자의 팔을 끊어 냈고, 다른 하 나는 오른쪽 가슴을 관통해 버렸다. 남자는 더 볼 것도 없이 그대 로 즉사했고, 남자의 시체는 백호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주인 잃은 두 개의 차크람은 챙 소리를 내며 돌벽으로 가 박혔다.
동료 한 명이 죽자 남은 두 명의 인도인들은 눈에 불을 켰다. 둘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한 것 같았다. 우르민을 휘두르던 거한 은 우 사부가 통배권으로 공격해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커다랗 게 고함을 지르면서 양팔을 크게 벌렸다. 퍽퍽 소리가 나며 갑옷 을 입은 키건을 쓰러뜨릴 뻔했던 강렬한 통배권이 적중했는데 도 거한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렀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곧이 어마하덥이 두 개의 단검을 여자 쪽으로 날렸지만 거한은 그것 도 우르민과 맨손으로 막아 냈다. 우르민으로 한 개의 단검을 쳐 냈지만 다른 한 개는 자기 손바닥에 깊숙이 박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시켈의 쇠 손톱이 얼굴을 긁어 선혈이 솟구치는데도 거한은 비명만 지를 뿐, 앞을 막아선 채 물러서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여자는 철추를 모조리 허공으로 퍼부어 날리고는 귀신같은 동작으로 몸을 휙 날려 백호의 옆으로 왔다. 백호는 운 이 좋아 한 명을 처치한 셈이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여자의 발 차기 한 방에 벽까지 날아가 기절한 채 넘어져 버렸다.
여자는 몸매가 호리호리했지만 무시무시한 힘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 한 방울을 글썽이면서 기폭 장치를 손에 쥐 었다.
세 사람에게 동시에 공격을 당한 거한은 선 자세 그대로 우르 민을 놓치며 나무 등걸처럼 뻣뻣하게 뒤로 넘어져 버렸다. 마하 딥과 우사부, 시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한은 얼마든지 더 싸우면서 버틸 수 있었지만 자폭하라는 노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 맞아 죽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거한이 목숨을 버리는 통에 기폭 장치를 움켜쥔 여자도 이제 는 더 이상 미련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긴말도 하지 않 고 기폭 장치를 손에 쥐는 즉시 스위치를 눌렀다.
그 순간 장내의 모든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좁은 방 안에 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살아날 사람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