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6화 – 용(龍)과 봉(鳳) 6 : 밝혀진 음모
밝혀진 음모
“정신이 드십니까?”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을 뜨자 박 신부가 조용히 물었다. 그 곳은 어느 호텔 방이었다. 박 신부는 아지트를 더 이상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기고 여자를 호텔로 옮긴 것이었다.
박 신부는 여자가 그런 중상을 입고도 불과 몇 시간 만에 깨어난 것에 다소 놀랐다.
여자는 눈을 뜨면서 준후에게 부상을 입은 자신의 어깨를 만져 보았다. 두툼하게 붕대가 감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치료를 받 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신이 치료했나요?”
여자가 묻자 박 신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난번 연희가 겪은 사건으로 그나마 박 신부가 알고 지내던 병원이 초 토화되어 박 신부는 과거 의사였을 때의 경험을 되살려 직접 치 료했던 것이다.
상황은 그럭저럭 수습이 된 듯했다. 아라는 불러냈던 동물들 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냈고, 덤으로 풀려난 사자 두 마리도 같 이 우리로 보냈다. 사상자는 상당히 많았지만 능력자들이 돌아 가면서 각자 수습을 해, 공원 측에서는 사자 두 마리가 돌아다닌 것치고는 이상하게 너무도 많은 기물이 부서졌다는 것과 사자를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고 기절한 일만 궁금하게 여길 뿐이었다.
박신부는 여전히 준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아 팠지만 그런 심정을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응급 치료일 뿐이오. 그러니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나를 그냥 놔줄 건가요?”
여자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박 신부는 태연하게 되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소? 당신은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는데, 내가 왜 당신을 해치겠소?”
“하지만…………… 나는・・・・・・ 나는……..”
박신부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건넸다.
“당신은 검은 편지 결사가 아니지요? 모두 깜빡 속을 뻔했지 요. 당신은 그들과 같이 싸웠으니까요. 당연히 그들과 한편이라 고 여길 수밖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게 하려 고 계속 자신이 검은 편지 결사라고 우리가 착각하게끔 그자들 을 처치했죠? 그러면서 점점 힘을 올려 마치 사람을 죽임으로써 강해지는 사악한 주술을 쓰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오.”
여자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꺼풀이 때때로 바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박 신부의 말이 의표를 찌른 것임에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머리 이야기에 이르면 정말・・・・・・ 누구나 당신을 보 면 미친 여자라고 믿었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머리 색깔에 무슨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인 것처럼 볼 테고요.
그러나 사실 당신은 검은 머리칼을 지녔소. 그 붉은 머리는 물 론 가발이지요. 머리칼을 감추고 그것을 보는 자는 죽인다고 한 것은 당신의 정체를 속이기 위한 위장 도구였겠지요? 당신이 어 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죠. 허나……..”
여자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머리를 더듬어 보았다. 과연 손에 잡히는 감촉은 가발이 아닌 자신의 원래 머리였다. 붉은 가발은 곱슬곱슬하고 다소 거칠었는데, 여자의 원래 머리칼은 매끈한 흑발이었다.
박신부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조용히 타이르듯 덧붙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해치지는 마시오.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 이 원래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그런 짓은 하지 마십시오. 아녜스 수녀.”
여자의 놀라움은 거의 까무러칠 정도였다. 그 여자는 이단 심 판소의 세븐 가디언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아녜스 수 녀였다.
“어, 어떻게 그걸 …………..”
박 신부는 미소만 지었을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녜스 수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박신부는 그녀를 달래듯이 나지막이 말했다.
“상처를 치료하면서, 나는 당신의 몸에 수없이 나 있는 고행 자국을 발견했소. 당신은 명령에 의해 그런 독한 행동들을 해 왔 겠지만, 당신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거요. 용서받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앞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충고뿐이오.”
아녜스 수녀는 지독하게 신앙심이 강한 여자로, 자신이 지닌 원소력을 사용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주교는 그녀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깨닫고 그녀의 희생심을 자아 내 그녀의 능력을 사용해 왔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매우 순진했으며, 대부분의 계획은 프란체스코 주교가 직접 내린 것이었다. 아녜스 수녀의 성격을 잘 아는 주교 는 아녜스 수녀에게는 절대로 기독교인들을 상대하지 못하게 했 다. 아녜스 수녀는 자신이 죽더라도 기독교도를 해치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성전이나 십자군과 비유돼 그와 같은 것 이라는 설득에 넘어가, 이교도들이긴 했지만 사람을 해칠 때마 다 아녜스 수녀는 마음속 깊이 슬퍼하고 고행으로라도 그 죄를 속죄하기를 바랐다.
박 신부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옷을 풀었을 때, 끔찍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수많은 고행의 상처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의 상처가 스스로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고행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박 신부는 진심으로 아녜스 수녀를 용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주교님께 전해 주십시오.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어도 그런 일을 꾸미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일뿐더 러 십자가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입니다.”
아녜스 수녀는 그 말에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박 신부의 온화한 표정을 보고 심한 갈등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아녜스 수녀 는 주교보다도 박 신부의 표정과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에서 훨 씬 더 따뜻한, 진짜 성직자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아녜스 수녀는 마음을 놓았는지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더 울었고, 박 신부는 그런 아녜스 수녀를 가만히 놓아두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한참을 울고 난 뒤, 아녜스 수녀는 마치 소녀처럼 수줍은 목소 리로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미소만 지을 뿐 대 답하지 않았다. 아녜스 수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술술 털어놓았고, 그 때문에 박 신부도 좀 더 상세 하게 일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박 신부는 세 가지 정보를 얻어 이 일의 전모를 깨닫게 된 셈이다.
우선 첫 번째 정보는 박 신부가 직접 얻은 것이었다. 승희에 비하면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박 신부는 직접 접촉한 상 대방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는 것이 가능했다. 지난번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 프란체스코 주교의 마음을 읽은 것도 그러한 것이 었다.
그때 프란체스코 주교는 아녜스 수녀의 생각도 아주 잠시 했 는데, 박 신부는 그렇게 막강한 사람이 정말 있을까 할 정도로 놀랐다. 그런데 그때 읽어 냈던 아녜스 수녀의 모습은 검은 머리였다. 그 후 붉은 머리의 여자를 만났는데 아무리 봐도 그녀의 능력은 아녜스 수녀의 원소력과 똑같았다.
더구나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점토판에 대한 프란체스코 주 교의 생각대로 이 여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프란체 스코 주교는 각지에서 능력자들이 벌 떼같이 일어나는 것을 말 세의 징조라 여기고, 그들을 어떻게든 모두 물리치지 않으면 자 신이 뜻하는 대로 일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그처럼 사악한 계 획은 꾸몄던 것이다. 그것도 성당 기사단과 함께.
그다음 두 번째 정보는 아슬아슬하게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현암에게서 입수한 정보였다. 현암의 활약으로 비록 원본은 아 니었지만 여섯 개의 점토판을 얻을 수 있었을뿐더러, 현암이 승 희와의 통신도 마다하고 구해 낸 성당 기사단의 기사들 중 몇몇 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해밀튼의 권고에 마음을 돌리고 현 암에게 점토판 제작에 대한 비밀의 일부를 알려 주었다.
물론 그들은 해밀튼이 아하스 페르츠인 것은 아직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승희에 의해 눈이 먼 키건만은 현암이 승희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자 앙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밤중에 병 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박신부가 현암과 소통이 된 것은 입간판 안에 있을 때였는데 그때 마침 준후가 아지트에서 메모지를 보고 이곳으로 달려왔 다. 준후는 은신술을 사용해 움직인 까닭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않고 세크메트의 눈을 박 신부에게서 건네받아 연희와 황 교수에게로 가서 해독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정보는 지금 아녜스 수녀가 말해 준 것이었다. 이단심판소와 성당 기사단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라 할 수 있 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래도 비슷한 기독교 계열의 종파라 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코 주교는 성당 기사단과 손잡고서라도 회교도 인 어새신이나 힌두교의 일파인 칼키파, 그리고 미륵신앙의 용 화교 등을 무력화해야 했으며, 그것을 십자군 원정과 비견되는 성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단 심판소와 성당 기사단 에만 진짜 점토판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프란체스코 주교야말로 점토판을 일곱 조각으로 나눈 사 람이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주교는 세븐 가디언에게도 이 사 실을 숨기고, 오히려 점토판들을 찾아오라고 명령함으로써 세상 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세븐 가디언은 그것도 모르고 전력으로 목숨을 걸고 점토판들을 다시 모아 왔는데, 그 와중에 퇴마사들 이 이 일에 얽혀 들게 된 것이었다.
프란체스코 주교는 일곱 개의 점토판을 나누고 복사본을 만들 면서 가장 중요한 ‘어느 때, 어느 장소’에 대한 구절만 다른 것으 로 새로 만들어 넣도록 했다. 이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 는데, 일곱 개의 점토판은 번갈아가면서 한 글자씩 읽어야 해독 이 되었으므로 7의 배수에 해당되는 철자만 바꾸어 다른 말을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프란체스코 주교는 성당 기사단과 더불어 그 일을 해냈고, 그 다음에는 성당 기사단의 힘을 빌려 수백 개의 점토판을 만들어 세상에 뿌려 왔다. 성당 기사단의 사람들 중에 새로 만든 물건을 오래된 물건으로 둔갑시키는 기막힌 솜씨를 가진 자가 있어 그 일이 가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점토판들 대부분은 골동품상이나 개인 소장 가에게 들어가 쓸모없어졌지만, 소수의 판들은 용화교나 칼키파 같은 곳으로 흘러들어가 이 난리를 겪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교와 성당 기사단은 다른 모든 곳에서 그 점토판을 찾느라 혈안이 되도록 하기 위해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곱 개의 점토판 중 변조된 최후의 것은 복사본조차 풀지 않고 있었다. 그 래서 현암이 발견했던 복사본들은 여섯 종류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각파에서 점토판을 빼앗고 되빼앗는 혈전 이 벌어져도 그 안의 내용만은 결코 누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러다가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박 신부가 이단심판 소를 방문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이 공격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상 상할수 없는 일이었던 까닭에 주교는 점토판 원본을 빼앗길까 봐 상당히 조바심을 내다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베드로 수사에게 그 것을 맡겼던 것이다. 되짚어 보면 당시 주교는 박 신부 앞에서 모조품인 점토판을 분쇄하는 쇼도 해 보인 바 있는데, 그것도 그가 진작부터 복사본의 존재에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베드로 수사가 죽음을 당하고 아직 내용이 전 혀 알려지지 않았던 마지막 점토판이 탈취되자, 프란체스코 주 교는 미친 듯이 분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최후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아녜스 수녀를 파견하여 이 일을 벌인 것이었다.
물론 각지의 능력자들에게 정보를 흘려 연락을 취한 것은 이 단 심판소의 조직이었지, 아녜스 수녀 혼자의 힘이 아니었다. 각 지에 하부 조직을 두고 있는 이단 심판소가 아니라면, 그 어느 곳도 고작 몇 시간 내에 그 많은 곳에 편지를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박신부가 묻자 아녜스 수녀는 눈을 감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황달지 교수가 본 점토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아마도 성당 기사단과 관련이 있는 자 들이 아닐까요? 그들 말고는 점토판 전부를 소유한 자들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아녜스 수녀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녀는 다른 세븐 가디언과는 달리 점토판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 신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머리가 매우 비상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박 신부가 물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두 집단만이 진짜 점토판의 예언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글쎄요…………….”
아녜스 수녀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봅니다. 우리 주교님은 이번 일에 서 노렸던 두 가지 목표 모두 실패하셨어요. 각 파의 영능력자들 을 처리하지 못했고, 점토판의 비밀을 지키지도 못했죠. 제가 말 씀드리자면, 아마 주교님은 원본 점토판의 내용을 만천하에 공 개해 버릴 겁니다. 주교님은 늑장을 부리는 분이 아니시니 지금 쯤 이단심판소의 조직을 통해 각지에 그 내용이 전달되었겠죠.”
박신부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왜 공개를 한다는 거요?”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박 신부님 일행의 능력은 우리 이 단심판소의 힘만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박 신부님 일행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죠. 그렇다면 맞부딪쳐 봤자 주교님 쪽이 질 것은 뻔한 이치. 그럴 바에는 다 시 한번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아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편이 낫다 고 여길지도 모르죠.”
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더구나 말세의 운명을 틀어쥔 아이의 탄생을 둔 각축이라면 이번이야말로 전 세계의 모든 강자들이 모조리 몰려올 것이다.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의 이름은 박 신부로서는 현암에게 처 음 들었지만, 검은 바이올렛만 해도 보통의 강적이 아니었다. 아 녜스 수녀의 말에 따르면, 교황청에서 만났던 검은 바이올렛은 그녀와 닮은 부하일 뿐, 본인은 아니었다지 않은가? 그 모든 자 들이 한데 모여서 각축을 벌인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인가?
“그래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침통한 표정을 짓는 박 신부를 보며 아녜스 수녀는 조용히 말 했다.
“그자들 중에는 대악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자들을 서 로 싸우게 하지 않고는, 절대로 뿌리 뽑을 수 없습니다. 박 신부 님은 아직 모르시겠지만,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 같은 이들은 누구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것이 열 명 합세해도 이기 지 못합니다.”
그 말에 박 신부는 침울하게 대꾸했다.
“악인의 피도 붉은 법이오.”
“신부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죄를 짓지 않고는 이 일을 수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교님의 행동이나 생각이 신앙인답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저 또한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아녜스 수녀의 말이 확고한 것처럼 들려서 박 신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장래에 다가올 하르마게돈의 싸움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암담할 뿐이었다.
박신부가 번민에 빠져 있다가 눈을 돌려 보니 아녜스 수녀가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저는 가 보렵니다. 신부님. 같은 신앙인으로서 다른 길을 걷 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저는 아무래도 주교님을 그냥 버릴 수는 없습니다. 주교님을 설득해 가급적 피가 덜 흐르도록 말해 보겠 습니다.”
박 신부는 앞으로의 일이 암담하여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 다. 아녜스 수녀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내가 폭탄을 묻어 둔 사실까지 추리해서 제거하신 분이니 금 방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겠지요.”
그 말에 박 신부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심코 대답했다.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었소. 제거는 무슨 제거를 했겠소? 사실 이 추리들도 거의가 내 동료가 해 준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 라오.”
아녜스 수녀는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꼭 다시 만나게 되기를, 나쁜 뜻이 아니라, 저는 박 신부님을 존경하게 되었답니다.”
아녜스 수녀는 규율상 파문당한 박 신부를 신부(father)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줄곧 박 신부에게 미스터 대신 파더를 붙여 불렀다.
박 신부가 아녜스 수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께 모든 진실을 제 의지대로 고한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돕겠습 니다만, 만약 주교님이 실패하시게 된다면 박 신부님은 꼭 뜻을 이루게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박 신부는 아녜스 수녀의 진의가 무엇인지 얼른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윽고 그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녜스 수녀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박 신부님에게 맞서지 않겠 습니다. 그럼 ………….”
그러고는 아녜스 수녀는 놀랍게도 훌쩍 창밖으로 뛰어내려 사 라졌다. 그곳이 오층이었는데도 말이다. 박 신부는 다만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아래층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은 징벌자의 탄생에 대해 상세히 기록 하고 있는 듯했지만 지금 당장은 완벽하게 해독이 된 것이 아니었다. 글자 자체는 해독되었지만 이것을 낱낱이 풀어내 숨은 뜻을 알아야만 보다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으 리라. 그러고 나면 이제 앞으로의 일을 상의할 순서였다.
모든 일은 밝혀졌으며 그들이 해야 할 일도 이제는 분명해졌 다. 다만 남은 것이라면 준후에 대한 문제였다. 준후가 왜 갑자 기 돌출된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변 한 것인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박 신부는 준후를 믿었고, 아무리 준후가 변했다 하더 라도 그를 이해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박신부는 힘 있게 연희 등이 정밀 해독을 준비하고 있는 방의 문손잡이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