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9화 – 하르마게돈 3 : 아하스 페르츠의 출현
아하스 페르츠의 출현
현암과 긴 눈썹의 노승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지금 정신 을 차리고 있는 네 명 중 그 두 사람만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긴 눈썹의 노승이 동료들에게 해밀튼의 이야기를 옮기기도 전에 해밀튼은 발작하듯 몸을 무섭게 떨며 허리를 비 틀었다.
“그가………… 그가 나오려 하고 있소. 아까의 빛 때문에………… 아 하스 페르츠가…”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해밀튼의 몸에서 확 퍼져 나왔다. 그것은 너무도 어두운 느낌이었고, 그 기운을 쏘인 것만 으로도 현암을 비롯한 네 사람은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아하스 페르츠!”
작달막한 노승이 중국어 억양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러나 이내 그 무엇인가는 사라졌고, 해밀튼은 다시 고통스럽게 몸을 비꼬았다.
“어서…………! 어서 도망치란 말이오! 아니………… 나를………… 나 를 밖으로 던져……………”
해밀튼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다시 한번 기이한 기운이 확 쏘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현암과 세 노승이 나름대로 방비를 하 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또다시 뒤로 나가떨어져 사방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공력이 탈진된 상태였다고 해도 너무나 무서운 기세였다.
어서 나에게 부탁해!
갑자기 현암의 귀에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블랙엔젤의 목소리였다.
너 한 사람 정도는 옮겨 줄 수 있어! 어서!
‘무슨 소리야?’
저…………… 저자에게는 나도 어쩔 수 없어. 손댈 수 없거든. 어서 도망쳐! 이 멍청아! 너는 절대 적수가 못 돼!
현암은 조금 멍한 상태였지만 속으로 즉시 외쳤다.
‘싫다!’
뭔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악마인 나로서는 너를 도울 수 없어! 멍청 아! 하다못해 부탁이라도 하란 말야!
하지만 다음 순간, 해밀튼의 절규가 비행기 안에 울려 퍼지면 서 세 번째 충격이 닥쳐왔다. 이번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보다 훨씬 강한 기세였다.
현암을 비롯한 네 사람은 어지럽게 흐트러지면서 잘려 나간 좌석 모퉁이며 비행기 동체에 몸이 부딪혔다.
넷은 모두 무시무시한 충격을 받고 입가에 피를 흘렸다. 이번 에는 아까 현암에게 맞아 넘어졌던 두 남자와 우 사부의 몸까지 날아갔는데, 두 남자는 그 덕분에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움직였다.
그것을 본 눈썹 긴 노승이 크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까 현암에게 맞아 쓰러졌던 두 남자가 가까스로 일어나더니 해밀튼을 향해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곧이어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새우처럼 움츠리고 있는 해밀튼의 몸을 봉으로 두들겨 댔다.
미처 봉을 다 집지도 못해 해밀튼의 몸에 떨어지는 봉은 세 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도 아까보다 내력이 약해진 것 같았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금방이라도 해밀튼이 맞아 죽을 것 같아 현암은 어떻게든 해 보려 했지만 당장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자들을…………… 저자들을 말려줘!’
너, 미쳤냐? 죽는 건 저자들이야!
다음 순간 뚱보 노승이 체면이고 뭐고 없이 몸을 굴리면서 비 행기의 맨 뒤쪽으로 굴러 나갔다. 그러더니 비행기 맨 뒷좌석에 서 뭔가를 휙휙 던져 냈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을 잃은 채 꽁꽁 묶여 있던 마하딥과 시켈이었다.
이번에는 작달막한 노승이 급히 품에서 뭔가를 꺼내 그들의 얼굴에 갖다 댔고 마하딥과 시켈은 즉시 몸을 꿈틀거렸다. 아마 수면 가스의 해독제인 것 같았다.
그러나 해밀튼 주변의 광경은 처절했다. 아까 현암의 검기로 도 자르지 못한 단봉이 해밀튼의 몸을 두들기다가 한 개가 부러져 나갔다. 그리고 두 남자는 해밀튼을 때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붉게 부풀고 힘줄과 혈관까지 온 피부에 돌출되어 그 들의 얼굴은 흡사 악귀 같았다. 죽을힘을 다해 해밀튼을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정말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 서 정신없이 손을 놀려 대고 있었다.
현암은 지금까지 처참하고 끔찍한 광경을 많이 보았지만, 때 리는 자가 이처럼 비참한 지경인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 저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뭐지?’
현암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악을 쓰다시피 하는 블랙 엔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나에게 부탁해! 살려 달라고! 그러면 널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겠어! 더 늦으면 나도 어쩔 수 없으니…………….
‘제발 좀 닥쳐!’
현암은 이를 악물고 일단 공력을 회복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 했다. 그러나 공력은 회복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아무리 공력이 탈진되었어도 전 혀 회복이 되지 않는다니! 아니…………… 혹시…….’
그때 현암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천정개혈대법에 관한 것이었다. 현암은 현재 칠 단계의 천정개혈대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팔 단계로 넘어가려면 남의 도움이 필요했다. 즉 현암 자신의 것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외부 공력을 받아 공력을 지우고 텅 빈 단전에 새로운 공력을 쌓아야 했다.
물론 스스로 공력을 지워도 되지만 그러려면 공력을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수련 과정의 진도가 빠르 다고 해도 십 년 이상의 수련 기간이 새로 필요하게 되는 셈이 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백 년 공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어디에 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말세가 다가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공력을 지우고 십 년 이상의 수련을 새로 한단 말인가?
결국 현암은 팔 단계 이상의 수련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는 데 아까 노승들의 공력과 현암의 공력이 부딪혀 없어지는 바람 에 자동으로 팔 단계의 수련 단계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드문 우연의 일치였고, 천행이라 할 만했 다. 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천정개혈대법 팔 단계의 상태로 들어갔다 면 공력을 쓸 수 없다! 일주일 이상 조용히 운기행공을 해야만 약간의 공력이라도 쓸 수 있는데……………. 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것 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현암은 벼랑 끝에서 또 맹수를 만난 셈이었다. 그때 마하딥과 시켈이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그러더니 해밀튼을 보고 크게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때 눈썹 긴 노승이 손가락을 한 번 긋자 그들의 밧줄은 전부 잘려 나갔다. 마하덥과 시켈은 즉시 자신을 속여 묶은 노승이고 뭐고 돌아보지도 않고 비행기 뒤편으로 달려 나가 커다란 철제 상자를 우당탕 소리가 나도록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그들은 뭐 라고 복잡하게 떠들어 댔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 현암은 짐작조 차 할 수 없었다. 세 노승은 즉시 고요하게 정좌하더니 운기행공 을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마하딥과 시켈이 왜 해밀튼을 구하지 않고….’
그러자 블랙 엔젤이 외쳤다.
이런 바보! 저들은 지금 싸우고 뭐고 할 틈이 없어! 아하스 페르츠가 눈을 뜨면 여기 있는 자들은 몰살이야! 저들은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아 하스 페르츠를 없애 버리려고 하는 거야! 하여간 네가 죽으면 내 계획 이・・・・・・ 그러니 어서 나에게…………….
‘나는 무력하니 네 멋대로 해! 그러나 절대 너 따위에게 부탁 할 수는 없어!’
이 멍청아! 네가 빌지 않으면 난 도울 수 없어! 악마가 인간에게 선 의를 베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네가 입을 닥쳐 주는 게 나에겐 최대의 선의지만, 못한다니 계속 떠들든지!’
현암이 속으로 악을 쓰는 사이 해밀튼을 두들겨 패던 남자 중 한 명의 몸이 퍽 소리와 함께 붉은 안개로 변해 버렸다.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순식간에 남자의 상반신은 비명조차 지 르지 못하고 폭발하듯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다른 한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뒤로 젖혔는데, 이미 한쪽 팔은 보이지 않고 거기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만 허공에 어지럽게 흩뿌려졌다.
피 안개 속에서 해밀튼, 아니 아하스 페르츠는 조금도 서두르 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 한쪽을 잃은 남자 따 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용히 시선을 세 노승과 현암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때 철제 캐비닛이 덜컹하고 열리더니 철컥거리며 육중한 쇳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마하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현암은 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그 소리에서 무시무시 한 절규를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렸다. 그러자 투탕탕 하는 날카롭고도 둔중한 총성이 좁은 비행기 안을 어지럽게 메 아리치면서 가득 채웠다. 중기관총 같았다. 마하딥이 해밀튼에 게 저런 무식한 무기를 난사하다니, 현암으로서는 미처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삽시간에 비행기 안은 벌집같이 구멍이 펑펑 뚫렸고, 시트며 짐짝 등은 벌집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가 조각조각 박살 나 가 루가 되었다. 비행기 동체에 수없이 구멍이 뚫리자 공기가 새어나가면서 비행기 안의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그래도 기관총의 난사는 계속되었다.
기압 차이에 의한 폭풍이나 무섭게 날아다니는 총알과 파편보 다 더 무서운 것은 귀청을 찢어 버리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총성 이었다.
현암은 엎드렸지만 폭풍 때문에 몸이 떠올랐다. 조금만 몸이 떠오르면 기관총탄에 벌집이 될 판이었다. 그때 무엇인가가 자 신의 몸을 지그시 누르는 바람에 현암은 간신히 박살 나는 꼴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적게 잡아도 수백 발의 기관총탄이 발사되고 나자 탄약이 떨 어졌는지 철컥 하는 빈 쇳소리가 한 번 나고는 돌연 사방이 조용 해졌다. 비행기 안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아직도 공기가 빠져나가느라 폭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 쳤다. 게다가 동체가 너무 많이 파손되어서인지 고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울렁거림까지 닥쳐왔다.
현암은 간신히 고개를 드는 순간, 여유 있게 똑바로 서 있는 아하스 페르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총탄을 쏘 아댔는데도 그가 서 있는 곳의 반경 약 오십 센티미터 정도에는 한 발의 총탄도 치고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대신 그 주변에 구 멍이 뚫려 벌집같이 되어서, 그가 서 있는 곳은 검은색의 후광이 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하게 조준했을 리 만무하니 모든 총알이 그를 피해갔다고 봐야 옳았다.
“아하스 페르츠…….”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분명 해밀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하스 페 르츠였다. 그의 얼굴은 시체보다도 더 무표정했는데, 현암은 그 렇게 끔찍한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피범벅이 되 었거나 반쪽으로 떨어져 나간 얼굴도 이렇듯 완전한 무표정과 비교하면 절세미녀의 얼굴로 보일 것 같았다.
그는 이쪽으로 다가오려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 넘어져 있는 남자가 한개밖에 남지 않은 팔로 아하스 페르츠의 다리를 필사 적으로 움켜쥐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놀라지도 않고, 서두르는 기미도 없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리고 아주 또박또박하고 밝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무시무시 한, 정확한 발음의 영어로 말했다.
“벌레 ・・・・・・ “
아하스 페르츠는 슬로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려 자신의 다리를 움켜쥔 남자의 몸을 조금씩 밟아 나갔다. 놀랍게 도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아하스 페르츠의 발이 닿은 곳의 남자의 몸은 그대로 찌부러지면서 종잇장처럼 납작하 게 으깨어졌다.
그러는 아하스 페르츠의 얼굴에는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짜증 같은 표정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남자는 죽을힘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하스 페르츠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남자의 몸을 말단에서부터 서서히 짓밟아 없앴다. 아주 싫증하고 지루 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암은 놀라서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으나 몸이 누군가에게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그때 시켈이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의 수류탄을 던 졌다. 비행기 안에서 수류탄을 던진다는 것은 곧 자폭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시켈은 수류탄을 던지자마자 다시 다른 수류 탄을 연달아 집어 들고 무서운 속도로 안전핀을 뺀 다음 계속 던 져댔다.
그렇게 십여 개의 수류탄은 줄을 이어 아하스 페르츠에게 날 아갔다. 그리고 마하딥은 품 안에 감추고 있었던 것 같은 둥글게 휜 단도를 계속해서 아하스 페르츠에게 날렸다.
‘이젠 죽나 보다.’
현암은 오초 후에는 수류탄이 연달아 터지고 모두가 죽겠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류탄은 폭발하지 않았다. 처음 던진 두 개도 그러했고 연달아 던진 수류탄도 모두 터지지 않았다.
하물며 정확히 아하스 페르츠를 겨냥하고 던진 수류탄임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페르츠의 몸에 맞지도 않았다. 변화구 투수가 던진 마구처럼 수류탄들의 궤도가 뚝뚝 꺾이면서 열몇 개의 수 류탄들이 하나도 폭발하지 않고 모두 아하스 페르츠 앞에 떨어 져 굴렀다.
마하이 던진 단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단도들은 모두 휙휙 방향을 바꿔 비행기 동체에 난 중기관총 구멍으로 빠져나가 버 렸다. 그 와중에도 아하스 페르츠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 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남자의 몸을 꼼꼼히 밟 아 부수는 데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머리도, 하나 남았던 팔도 모두 부서져 핏물이 되어 버리고 몸만 남았는데도 아하스 페르츠는 계속 꼼꼼하게 남자의 몸을 밟아 납작하게 박 살을 내어 갔다.
현암이 지금껏 본 것들 중 가장 욕지기가 나고 무서운 광경이 었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마하딥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단도를 한개 던졌다. 이번에 마하딥이 던진 단 도는 아하스 페르츠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아하스 페르츠의 뒤쪽에는 비상구가 있었는데 그 비상구에는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던 듯, 단도가 어느 부분을 치자 승강구가 저절로 활짝 열 렸다.
그 순간 시켈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면서 아하스 페르츠에게 달려들었다. 아하스 페르츠를 안고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멈춰!”
현암은 급히 소리쳤으나 시켈은 현암을 훌쩍 지나쳐 아하스 페르츠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하스 페르츠는 미동도 하지 않고 이제 하반신밖에 남지 않은 남자의 시체를 꼼 꼼히 밟아 부수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시켈의 손이 아하스 페르츠의 몸에 막 닿으려 는 순간 시켈은 굴러다니던 수류탄을 밟아 미끄러졌는지, 아하 스페르츠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반탄되었는지 아하스 페르 츠의 몸은 건드려 보지도 못한 채 자기 혼자만 승강구 밖으로 빨 려 나가 버렸다.
“으아아악……!”
시켈은 간신히 승강구를 한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아 무리 시켈이 강한 능력자라고 해도 비행기 밖의 모진 바람을 한 손으로 잡고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그때 아하스 페르츠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현암은 들었다.
“치우고 가.”
그러자 시켈이 던졌던 수류탄들이 튀어 오르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시켈의 몸으로 가서 달라붙었다. 시켈은 현암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어떻게든 그를 구해 보려고 월향검 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월향검이 현암의 손목에서 채 빠져나가 기도 전에 시켈에게 달라붙은 수류탄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런 폭발이 있었으니 비행기가 날아가 버려야 하는데도 비행 기의 동체는 조금도 망가지지 않았다. 다만 시켈의 몸만 폭발에 휘말려 박살이 난 채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승강구에는 힘껏 틀어쥔 시켈의 손목이 아직도 붙어 있었다. 현 암은 그 처참한 모습에 멍해져 버렸다.
‘이건 주술도 아니다……………. 마술이다……………. 아니, 내가 꿈을 꾸 는 것은 아닐까?’
물론 불행히도 꿈은 아니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남자의 시체 를 거의 다 밟아 짓이긴 상태였는데, 그는 슬쩍 몸을 돌리더니 역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시켈의 손목을 떼어 내 바닥에 놓고 똑같이 짓밟았다.
“으아아아!”
마하딥이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러나 현암은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 다. 현암은 자신을 뛰어넘어 달려 나가는 마하딥의 발을 간신히 걸어 마하딥을 넘어뜨렸다.
“안 됩니다!”
현암이 마하의 귀에 대고 크게 외쳤지만 마하딥은 여전히 버둥거리면서 알아듣지 못할,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만 계속 질 러 댔다. 그러다가 컥컥거리며 몸을 늘어뜨렸다. 격정을 이기지 못해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그때 세 명의 노승이 거의 동시에 천천히 눈을 뜨면서 몸을 일 으켰다. 그러면서 눈썹 긴 노승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현암을 향해 속삭였다. 세 명의 노승은 어느 정도 공력을 회복했는지, 일제히 운기를 하면서 독특한 자세를 취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여전히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시켈의 손 을 밟아 뭉개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현암은 이제 머릿속이 텅 빈 것같이 덤덤한 상태가 되었다. 기이하게도 웃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 어차피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다. 뭐가 그리 크게 다르겠어? 그나저나 누가 나를 누르는 거지?’
현암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 보니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것 은 바로 백호였다. 아니, 블랙 엔젤이었다. 현암은 백호가 벌집 이 되어 날아간 것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의 얼굴(비록 정신은 빼앗긴 상태였지만)을 보자 다소 마음이 놓였다.
아까 블랙 엔젤이 잠시 도망쳤지만, 백호는 해밀튼 옆에 있었 기 때문에 그의 후광으로 총알을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백호가 옆으로 왔을까?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안 돼! 좋아! 셈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몸의 기운을 빼! 내가 피신을 시켜 주지. 나는 인간의 몸을 원 거리로 이동시킬 수 있어. 너와 백호 둘 다 옮겨 주지. 말만 한다면!
블랙 엔젤이 다시 속살거렸으나 현암은 천천히 눈을 뜨며 블 랙 엔젤에게 말했다.
‘아까 왜 나를 도와주었지?’
뭐?
‘무엇인가를 받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는다면서? 나는 분명 부 탁한 적이 없는데?’
아… 그건……. 그래. 그러니까 너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 아 주 희미하기는 했지만……. 음……. 그래. 나는 너에게 받은 것이 있어!
‘받은 게 있다고? 아까 나에게서 뭘 가져갔지?’
아……………. 걱정마! 별것 아닌……………
‘뭘 가져갔냐니까?’
현암이 다그치자 블랙 엔젤은 백호의 안주머니에서 은빛 나는 물건을 하나 꺼내 보였다.
이거야. 너에겐 쓸모없는 하잘것없는 물건 아냐?
그것은 오래전 승희가 생일선물로 현암에게 줬던 라이터였 다. 그 라이터의 중앙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지난번 칼키파의 고수들과 싸울 때, 현암의 가슴팍에서 추를 막아 준 것이 그 라이 터였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현암이 손을 뻗어 빼앗으며 말했다.
‘이건 못줘.’
아니? 계약으로 얻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 너는…………… 너는 몸의 일부로 변상해야 해!
‘난 계약한 적 없어.’
이미 내가 널 구했으니 안 돼!
블랙 엔젤의 말에 현암은 잠시 라이터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러면 내 몸의 일부를 가져가라.’
너, 미쳤구나! 내가 네 그 잘난 오른팔을 빼 가면? 눈을 빼 가면? 심장을 빼 가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건 줄 수 없다.’
현암은 승희의 선물인 라이터를 손에 꽉 쥐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블랙 엔젤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너무도 나를 무시하는군!
현암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희가 준 라이터와 월향검 을 한 번씩 만져 보고는 두 가지 물건을 양손에 꼭 쥐었다. 그때 백호가 아닌 누군가가 현암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영어를 조금 하던 눈썹 긴 노승이었다. 그의 공력이 가장 심한 듯, 그는 운 기를 하면서도 전음술로 현암에게 속삭였다.
“시간이 없네. 이리 오게.”
“뭘 하자는 건가요?”
현암이 묻자 노승은 잘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고르려는 듯 인 상까지 찌푸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끝이네. 우리는 공력이 반도 안 남았고, 자 네는 탈진한 것 같네. 아까는 서로 싸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네. 힘을 합치세.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아하스 페르츠 를 없앨 수 없네.”
현암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겁니다.”
“아직도 저 괴물을 살려 두자는 박애주의인가? 자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해 봐도 소용없을 겁니다.”
세 노승은 이제 자세를 다 갖춘 듯했지만 섣불리 아하스 페르 츠에게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도 아직 시켈 의 손을 다 밟지 않았는지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죽은 시켈 의 손이 대화의 시간을 벌어 주는 셈이었다.
“자넨 겁쟁이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자네,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살아날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기하게. 이제 우리는 모두 끝이네. 이 비행기에는 조종사도 없다네.”
“예?”
“조종사가 없다고 했네. 조종사는 이미 저세상에 가 있네. 비행기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었지.”
“그러면 누가 조종을 한 겁니까?”
“우가 했네.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아무도 비행기를 착륙시킬 사람이 없네. 자네는 할 줄 아나?”
암담한 기분에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현암은 공허하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런데도 살아날 궁리를 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힘을 합한다 해도 저자를 못 없앨 겁니다.”
노승은 점점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아마도 아주 옛날에 배운 것을 되돌리고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꼭 죽이자는 것만은 아니네. 보게. 지금 비행기는 부서져야 정상이지만 부서지지도 않고 있네. 아하스 페르츠의 힘 때문이 지. 여기는 대서양 상공이네. 정규 항로도 아니고 말일세. 그러 니 우리가 죽더라도 이 비행기를 추락시킬 수만 있다면, 그는 바 다에 빠지게 될 거고, 헤엄을 아주 잘 치더라도 상당히 오랜 기 간힘을 쓰지 못할 걸세. 그것만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글쎄요. 지나가는 배가 금방 나타나 구해 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순순히 저기 있는 시체 꼴이 되자는 말인가?”
“솔직히 저는 반 푼의 공력도 쓸 수 없습니다.”
현암은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말 아무리 고민해도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는구나 하는 실감만 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