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2화 – 하르마게돈 6 : 한빈 거사의 죽음
한빈 거사의 죽음
지리산의 깊은 산골짜기를 힘겹게 걸어 올라가는 아홉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여덟 사람이었지만, 아주 작은 여자아이가 어떤 이의 품에 안겨 있어 일행은 모두 아홉이었다.
그들 중 여섯 명이 승려였는데, 다섯 명은 비구였고 한 명은 비구니였다. 비구와 비구니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조금 기이 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계룡산 산자락에서도 약 초꾼이나 사진작가나 간간이 찾을 법한, 외지고 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눈여겨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은 여자아이를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은 역시 키가 자그마한 소년과 소녀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사천왕과 승현 화상, 무련 비구니와 아라, 준호, 수아였다.
“힘들지 않니?”
사천왕 중 증장 화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네 명의 승려 들은 체구가 크고 건장했지만, 산길을 가는 데는 큰 체구가 오히 려 걸림돌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날렵하고 작은 체구의 무련 비구니에 비해 땀을 더 많이 흘리고 있었다.
아라와 준호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말없이 걷고 있었다. 준호 는 산길에 익숙한 듯 그리 땀을 많이 흘리지 않았다. 반면 아라 는 거의 세수를 한 꼴이었으나 독기로 버티느라 가쁜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안 힘들어요.”
아라가 약간 되바라지게 쏘아붙였다. 화상들은 지금까지 준 호와 아라에게 그들을 왜 갑자기 데려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산을 오른 지 한참 지났지만 아라와 준호가 의심을 풀지 않아, 그들은 퇴마사들과 만났던 지난날의 이야기 를 들려주는 데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 정말인가요?”
준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지국 화상이 땀에 젖은 까까머 리를 한 번 쓰다듬으면서 웃으며 말했다.
“화상이 거짓말을 하면 지옥 불 중 가장 뜨거운 자리에 떨어진다네.”
“저도 한번 거사님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우리들을 찾으시는 걸까요?”
“그건 우리도 모르네. 다만 인연이 있는 자가 있으니 데려와야 한다고 하셨어. 아주 큰일이 달렸다고 말이야.”
“그런데 ・・・・・・ 그 인연이 있는 사람이란 게 우리 셋이 정말 맞 나요? 난 아무래도……………..”
“거사님의 말씀이시니 틀림없을 거야. 너무 급해서 조금 무례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기 바라네.”
한빈 거사는 도방에서 배분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경 지에 오른 반신선(神仙) 격인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번 도혜 선사의 죽음 때 한 번 모습을 드러낸 뒤 다시는 인간 세상에 모 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도혜 선사의 임 종시 그를 모시고 있던 사천왕의 꿈속에 나타난 것이 이틀 전이었다. 더불어 무련 비구니도 같은 꿈을 꾸었다.
어서 나에게 와라. 급한 일이다…………..
그들은 모두 한날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 그들은 한번 거사 의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꿈에서 본 계룡산의 깊은 산골짜기로 한빈 거사를 찾아갔다. 승현 화상이 사천왕과 동행 했고, 무련 비구니는 다른 경로로 계룡산을 찾아와 결국 같은 장 소에서 만나게 되었다.
계룡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미 사색이 되어서 희미하게 숨만 붙어 있는 듯 초췌한 한빈 거사의 모습이 었다. 일행은 놀라기도 하고, 그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 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는 이 대도인(大道人)이 어째서 이렇게 힘없는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단 말인가? 일행을 보며 한빈 거사가 어울리지 않게 미소 띤 표정으로 한 마디를 하는 순간, 그들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 었다.
“천지 공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한빈 거사는 대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천운(運)을 바꾸는 천지 공사를 드리기 위하여 이 산에 은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실패했다니! 한빈 거사는 비록 대도인이었지만, 천지 공사와 같이 대단한 일은 그야말로 그의 수백 년 도력을 모두 기울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실패했다면 한빈 거사는 필시 모든 도력을 잃게 되었 을 것이며, 사천왕을 부른 것도 그나마 남아 있던 도력을 모조리 희생한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선에서 말하는 우화등선의 경지까지 다다를 수 있을 정도의 대도인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천지 공사를 올려 다가올 위기를 넘 겨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천지 공사가 실패했다는 말을 들은 사천왕의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면 이제 말세는 정해진 것이란 말인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일행을 보며 한빈 거사는 다시 부드러운 낯빛으로 천천히 말했다.
“실패한 것은 아니다. 천운이…………… 이번 일은 천운이 아니었 어! 하하……………. 이것은 순리였기 때문이다!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자격이 없는 것도 맞겠지만………………”
“예?”
모두가 한빈 거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빈 거 사는 말할 기력조차 없는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내 다섯 사람의 마음속에 한빈 거사의 목소리가 생생히 울려왔다.
물론 천에 하나도 가망이 없을지 모르지만…… 포기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너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연이 닿지를 않으니…. 나는…………… 이제는………….
한빈 거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를 쓸쓸히 중얼거리더니 감았던 눈을 힘없이 뜨고 무련 비구니를 손짓하여 불렀다. 무 련 비구니는 곧 달려가서 한빈 거사의 커다란 몸을 부축하여 조 금 일으켰다.
모두가 박복하구나. 모두가 연이 없고, 시간이 없다. 보름도 채 남지않았다. 그래서 부른 것이다………….
“대체 무슨…………….”
초췌해진 한빈 거사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현암 그 아이 말이다………….. 그 아이가 걱정된다. 나는 이제 세상과 연 이 없지만, 그 아이만은 걱정이 되는구나. 그런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 어……………. 이것밖에는 가능성이 없구나……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만, 할 수 있겠느냐?
“무슨 일을 말입니까? 현암 시주를 찾아 도우라는 말씀입니까?”
이내 한빈 거사가 대꾸했다. 그의 기력은 차츰 잦아들어 가는 것 같았다.
찾아라. 그를 찾아서…………… 이리로 데려오거라………….
“현암 시주를 말씀하십니까? 어디서 찾습니까?
좌우간 인연 있는 자를……………. 전에 현암 녀석이 있던 곳을 가 보면 자 연 알게 될 거야. 찾아보면 표가 날 게다. 그러나 서둘러라………….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느니……. 서두르지 않으면 당부할 말도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지금 저희에게 알려 주시면……………”
데려오지 않으면 말할 수 없구나. 어서・・・・・・ 어서 데려오거라…………….
“그때까지 여기에 계실 겁니까?”
그렇다. 그러나 서둘러라………………
그 전언만 남기고 한빈 거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 다. 그는 몸을 추스른 뒤에 담담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석 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도방의 하늘 같은 어르신의 말씀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빈 거사의 목숨이 풍전등화 같은지라 서두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급히 산을 구르듯 내려와 부랴부랴 퇴 마사들의 아지트를 찾았고, 마침내 아라와 준호, 수아를 데리고 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 십 리 남짓이나 남았을까?”
이야기를 다 해 주고는 승현 화상이 준호를 보면서 씩 웃었다. 그때였다. 돌연 광목 화상이 걸음을 멈추면서 승현 화상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사고다.”
광목 화상은 사천왕 중에서도 가장 비상한 시각과 청각을 지니고 있어서 심상치 않은 기척을 알아낸 것이다.
“무슨 사고입니까?”
“급하다. 우리가 먼저 가마.”
광목 화상은 그 한마디만 하고는 얼른 나머지 사천왕에게 눈 짓을 한 다음 비호같이 몸을 날려 달려갔다. 그것을 보고 무련 비구니도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수아를 땅에 내려놓고는 역 시 휙휙 날렵하게 몸을 날려 달려갔다.
그러나 준호와 아라는 그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준호는 그 래도 어설프게나마 기를 쓰고 달리면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겠지만, 아라와 수아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러지 않았다.
다섯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승현 화상이 맥없이 양팔을 올렸다가 늘어뜨려 보였다.
“어쩌겠느냐? 우린 걸어서 천천히 따라가 보자.”
“스님은 왜 가지 않으시나요?”
준호가 묻자 승현 화상은 약간 긴장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공부는 좀 했지만 무예를 닦진 않았거든. 그렇게 달려갈 재주가 없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아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승현 화상은 그저 수아를 번쩍 안아 올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할 수 없이 준호와 아라도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십리 정도라고는 해도 산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는 삼십 분 이상 걸렸다. 그리고 그들이 한빈 거사 가 있던 곳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본 것은, 흰옷과 검은 옷을 입 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광경이었다.
“저 사람들은…….”
준호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는 그들이 무슨 수상한 사람들이어서 싸움을 거는 게 아닐까 걱 정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들은 한결같이 몹시 슬프고 원통한 표 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 가운데 유난히 덩치가 큰 네 화상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 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아까 그리로 달려간 백제암의 사천왕 이었다.
“무슨 일・・・・・・ “
승현 화상은 수아를 아라에게 맡기고 그리로 달려가면서 입을 열려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네 사람 앞에는 체구가 크지만 다소 초췌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바로 한번 거 사였다.
한빈 거사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납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숨을 거둔 것이 분명했다.
“거・・・・・・ 거사님께서…………”
그러자 한빈 거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여러 사람들 중 검 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는 현현파의 한 사람인 근호로 승현 화상, 사천왕과도 인연이 있었다. 근호의 나이는 현 암보다 약간 많았지만 내공이 충실한 현암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여 마치 중년 남자 같았다.
“이미 숨을 거두셨네. 아마도……..”
근호는 예전에 수아와 만난 적이 있었지만 수아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근호가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 있던 노인이 호통을 쳤다. “아마도가 아니여! 이분은 이렇게 그냥 가실 분이 아니야! 살 해당하신 게 분명혀!”
그 노인은 근호처럼 검은 옷을 입고 손때가 반질반질한 지팡 이를 짚고 있었는데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아 보였 다. 그러나 한빈 거사처럼 선풍도골 (仙風道骨)의 용모가 아니라 괴죄죄한 시골영감 같은 용모였다.
“살해라니요? 감히 누가……………!”
승현 화상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면서 물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 노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알아? 하지만 그놈은 무척이나 술법에 능한 놈이여!”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이 박혔는데도 몰러? 주변을 좀 봐!”
노인이 다시 호통 치자 승현 화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 고 보니 한빈 거사의 몸은 건드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가 앉은 곳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풀이며 나무뿌리 등이 온통 그슬리고 박살 나 있었고, 주변의 흙이며 돌부리도 모두 튀어나와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 광경에 승현 화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노인이 지팡 이를 땅에 쿵 소리가 나게 짚으며 외쳤다.
“어떤 놈인가가 지독한 술수로 이분을 습격한 게 분명혀! 그 리고 거사님은 안 그래도 지치셨는데, 놈의 습격 때문에 공력이 고갈되어서 그만 돌아가신 게구!”
무척 화가 난 노인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어서 알아봅시다. 형님.”
그 말을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몹시 뚱뚱한, 얼굴빛이 발그레한 동안(童顔)의 노인이었는데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원래 웃는 상인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왠지 어울 리지 않아 보였다.
“저 할아버지는 누구야?”
아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준호에게 물었지만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 두 사람은 한빈 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던 터라 그다지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도방에 계신 분 같아.”
“도방은 또 뭐야?”
“도를 닦는 분들이 모인 곳이지.”
그때 꾀죄죄한 노인이 힐끗 아라와 준호, 수아를 쳐다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뭐여?”
준호와 아라, 수아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승현 화상이 그 앞을 감싸듯 막아서더니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거사님께서 마지막으로 불러오라 말씀하신 아이들입니다.”
“뭐라고, 거사님이?”
“예?”
“하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옆에 있던 동글동글한 얼굴의 노인이 꾀죄죄한 노인에게 말했다.
“아직 애들 아니우, 형님.”
그 말에 꾀죄죄한 노인은 매서운 눈으로 준호와 아라를 한 번 쏘아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준호와 아라는 그 노인의 매서운 눈 초리에 거의 얼어붙다시피 되어 버렸다.
승현 화상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준호에게 말했다.
“저분들은 모두 도방에 계신 분들이다. 현현파와 오의파이시지.”
“현현파는 뭐고, 오의파는 또 뭔데요?”
“자세한 건 알 것 없다만, 둘 다 도를 닦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란다. 저 노인 분들은 ‘현현이로(二老)’라고 부르는데 원로 이시고, 오의파 분들은 도방의 감찰 역을 맡고 계신 분들이란다. 아마 거사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이렇게 몰려온 듯하구나.”
“이런 일이 있으면 경찰에 알려야하는거 아닌가요?”
아라의 말에 승현 화상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런 일에는 경찰도 도움이 될 수 없단다. 그래서 도방에서 자율적으로 이런 일들을 조사하곤 하지. 감찰은 도방에서 경찰 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수행하는 분들이란다.”
오의 사람들은 도가의 맥을 이었지만 무속의 맥도 같이 전 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투시력과 흡사한 술수를 익히고 있어 감찰과 같은 일에 적합했다.
“그런데…………….”
준호가 주저주저하면서 말을 이었다.
“거사님이 돌아가셨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죠?”
“글쎄다……………..”
승현 화상도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분위기는 몹시 답답했다. 사천왕과 무련 비구니는 계속 합장한 채 독경을 외고 있었고, 현 현이는 뭔가 기다리는 듯 초초하게 주변을 휘적휘적 걸어 다 니고 있었다. 그리고 현현파의 네 제자들은 현현이로 앞이라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서있었는데, 아라는 그 사람들을 보더니 준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쩜……………”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사람들도 다 있니? 도 닦으면 다 저렇게 돼?”
사실 그 사람들의 용모는 지독할 정도였다. 옷은 너덜너덜하 고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기운데다가 한 번도 빨지 않았는지 때가 눌어붙어 찌든 색이 울긋불긋하기까지 했다. 머리카락과 수염도 깎거나 다듬지 않은 듯 덥수룩해서 생김새조차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거지 중에도 상거지 꼴이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은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의 뒤 에 서서 역시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오의파라고 했으니 더러운 옷을 입는다는 뜻 아 니겠니? 규율이 그런가 보지, 뭐.”
“도를 닦으면 닦는 거지, 꼭 저렇게 해야만 하나? 난 가까이 가기도 싫어.”
“그건 ・・・・・・ “”
그때 눈을 감고 앉아 있던 사람이 눈을 떴다.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덥수룩해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용모였는데, 그의 목 소리는 의외로 무척 맑고 차분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오의파 중 한 명인 성곤이었다.
“사용된 수법은 오행술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약 하루 전에 사용된 술법인 듯합니다.”
그러자 꾀죄죄한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겨우 그것뿐이여? 다른 건?”
“그 외에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제기랄! 다 쓰잘데 없는 놈들뿐이여! 도방의 감찰이라는 놈이 보는 눈이 그 정도면 뭣에 쓴단 말이냐!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는감?”
“기이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주술력이 상당한 놈의 짓인 것 같 습니다만……………..”
“상당하니까 거사님이 이 지경이 되셨지! 젠장.”
꾀죄죄한 노인은 씩씩거리며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했다. 그 때 현현이로 중 얼굴이 동그란 노인이 끼어들었다.
“오행술을 사용해 이 정도 난리를 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있겠나?”
그 말에 성곤이 왠지 좀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나섰다.
“몇 안 될 겁니다. 요즘 오행술을 수련하는 사람 자체가 드물어서. 아니 ・・・・・・ 거의 없다고 보셔도…….”
그 말을 듣던 준호는 순간 자기도 배웠던 그 술수가 그리 보기 힘든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둥근 얼굴의 노인이 말했다.
“그렇겠지! 요즘 세상에 그런 술수를 이 정도로 연마한 사람 이 많을 리가 없지. 이 근방이 죄다 불타고 뒤집어진 것으로 보 아 화(火)와 토(土)의 기운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이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사실 형님과 나도 아까부 터 그 생각을 했다네.”
“그렇다면 …………….”
그때 꾀죄죄한 얼굴의 노인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더 긴말 할 것 없어! 여기 있는 녀석들! 모두 몰려가서 얼른 그 녀석을 잡아와!”
그 호통에 오의파의 성곤과 상렬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달리 누가 있겠느냐! 그 후인지 뭔지 하는 녀석 아니면 이 럴 수 있는 자가 또 어디 있겠느냐!”
그 소리에 준호와 아라는 하마터면 털썩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그때 승현 화상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꾀죄죄한 얼굴의 노인 앞으로 가서 말했다.
“준후는 아마 아닐 겁니다. 그가 왜 거사님을 해친단 말입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하지만 이런 오행술을 펼쳐서 이 근 방을 이토록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녀석이 그놈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하지만 증거가 있어야………….”
말끝을 흐리는 승현 화상을 노려보며 꾀죄죄한 얼굴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면서 발을 굴렀다.
“이 주변의 풍경이 모조리 증거여! 더 이상 뭐가 필요하단 말 “여!”
그때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쪽에 서 있던 잘생긴 젊은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흰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울리 지 않게 무당들이 들고 다니는 방울과 부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는 그 아이를 본 적은 없습니다만,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천성이 곧은 아이라 들었는데 이런 짓을 할 이유 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청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누구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신아버님께 들었습니다.”
“은기 영감님헌테? 그럼 몇 년 전이겠구먼.”
그 청년은 퇴마사들도 익히 아는 철기옹과 은기옹의 후계자격인 박수무당이었다.
청년의 대답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여.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거니깐 지난 일 갖고는 판단할 수 없어. 좌우간 범인은 준후 그 녀석밖에는 없어.”
그러자 성질 급한 아라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에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준호도 내심 화가 났지만 도방이 어떤 곳인지 어떤 기인들이 모인 곳인지 아는 처지라, 얼른 아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 지만 아라는 눈에 뵈는 게 없어진 판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난데없이 나이도 어린 여자아이가 소리를 지르 자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각양각색이었고, 대부분 남루하거나 조금 이상한 차림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해 서 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기가 질렸다. 하지만 남도 아닌 준후가 누명을 쓰는 상황이라, 아라는 내친김에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못박듯이 말했다.
“준후 오빠는 절대 사람을 안 해친다고요! 그런 짓을 할 사람 이 절대 ………….”
그때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근 호와 같은 현현파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근호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듯 초로에 가까웠다.
“사람을 안 해친다고? 네가 뭐기에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난・・・・・・ 난…… 준후 오빠를 잘 안단 말이에요!”
“나도 그 아이의 재주가 대단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 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난번 과천에서 그 아이를 보았지. 거기서 그 아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떤 여자의 목을 베려고 했어. 그것도 아주 거침없이…………..”
아라와 준호는 그때 아녜스 수녀에게 잡혀 있다가 막 풀려난 상황이라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라와 준호가 혹시라 도 상심할까 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 그들은 그런 사실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나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술사들이 그 광경을 보 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급히 말리지 않았다면 그 여자의 목은 틀림없이 날아갔을 거야!”
“아냐! 그럴 리 없어!”
아라가 소리를 지르자 노인이 다시 지팡이를 구르면서 호통을 쳤다.
“어린것이 함부로 끼어들 계제가 아니야! 이봐, 승현이! 시끄 러우니 저 계집애를 썩 내치거라!”
느닷없이 저만치에서 덩치가 무지무지하게 크고 험상궂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한 하나가 쿵쿵거리면서 나타났다. 그는 차 력사인 병수였다.
“어찌된 거유! 이게 웬일이우!”
그러자 둥근 얼굴의 노인이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병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건넸다.
“자네는 또 웬일인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아니, 거사님이…………….”
병수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한빈 거사의 죽음을 보고는 흑흑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모습에 노인은 기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병수에게 물었다.
“자네는 도방이나 선방 소속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 건가? 여긴 자네가 올 곳이 아닌데!”
그 말에 병수가 주춤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 나는……………. 이상하다. 준후는 어딨소?”
그 소리를 듣자 노인이 눈을 매섭게 치떴다.
“준후?”
“그래요, 준후, 걔가 날 이리로 데리고 왔었는데……………. 준후는 지금 어디 갔지요?”
모든 사람이 한숨을 내쉬고, 혹은 이를 갈며 분해하는 것 같았 다. 그러나 상렬이 침착하려 애쓰면서 물었다.
“잠시만. 준후가 여기 있었다는 건가?”
“그렇소. 거사님이 퍽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자기가 모시고 있겠다고 했는데…………….”
“그게 언제지?”
“어제까지 같이 있었소. 그러다가 준후가 나한테 뭘 좀 부탁해서 내려갔다가 오는 길인데…………….”
“그때도 이 주위가 이렇게 엉망진창이었는가?”
“어? 안 그랬는데……. 뭔 싸움이 벌어진 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꾀죄죄한 얼굴의 노인이 지팡이를 쿵 하고 굴렸다. 이번에는 흥분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게 도력을 발휘했는지 주변의 땅이 저르렁 울렸다.
“그럼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군!”
아라와 준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준호가 주저주저하면서 가까스로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직 몰라요!”
“뭘 모른단 말이냐!”
노인이 버럭 호통을 치자 준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사부가……………. 아니 준후………… 사부가…………… 거사님을 지키다 가……… 누군가・・・・・・ 누군가 습격을 해서………… 지키려고 싸운 건지도…”
“헛소리!”
노인이 또다시 호통을 치자 준호는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듯 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랬다면 왜 거사님의 시신을 그냥 두었겠느냐! 그리고 왜 자취도 없이 사라졌겠느냐! 그리고 또 어떤 놈이 이유도 없이 거 사님 같은 분에게 덤벼들겠느냐!”
“저 사람이 수상해요!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아라가 갑자기 병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병수는 대번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되받아 소리쳤다.
“아니, 이런 조그마한 계집애가 감히 나를 모함해!”
그러자 성곤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병수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네.”
아라는 필사적으로 발악하듯 외쳤다.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성곤은 슬픈 듯한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나는 알 수 있단다.”
아라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승현 화상의 가사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니에요. 예? 스님. 아닐 거예요! 스님은 준호 오빠를 잘 알 고 있다고 했잖아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예?”
그러나 승현 화상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침울한 얼굴 로 아라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준후를 아는 사천왕과 무련 비구니, 근호 등의 사대 제자, 그리고 오의파의 두 사람과 병수 등도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무 도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때 꾀죄죄한 얼굴의 현현이로 맏이가 소리쳤다.
“모든 도방 사람들에게 전하라! 준후는 도방의 제일 웃어른이신 거사님을 해친 흡수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녀석을 잡아와라! 일단 신중을 기하려면 녀석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야 할 것이나…….”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저에 현현파의 근호가 조심스레 나섰다.
“하지만…………….”
근호는 준후를 위해 무슨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노인이 딱 잘라 말했다.
“그렇지! 녀석의 술수가 대단하니 저항을 한다면 가차 없이 응징해서 잡아 와라! 죽여도 할 수 없다.”
“안 돼욧!”
아라가 쇳소리를 지르자 노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다가왔다. 그러자 승현 화상이 급히 아라 의 혈도를 찍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준호도 그 광경 을 보았지만 제지할 수가 없었다. 아라를 그냥 내버려 두면 노인 에게 혼찌검이 날 것이 뻔했으니까.
일단 손을 쓴 다음 승현 화상이 노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저희 선방에서도 최대한 애를 써서 흉수를 찾아내고, 그자를 잡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아라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도방과 선방의 술객들이 준후의 뒤를 쫓는다면 지난번 첩보 기관의 추격보다도 훨씬 무서울 터였다. 준후 혼자서 그들을 어 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아니, 그 문제를 떠나 준후가 정말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꾸 일었다. 아라는 그것이 더 괴로웠다.
준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고, 수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이답지 않게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