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21화 – 하르마게돈 15 : 준후의 빛과 그림자
준후의 빛과 그림자
“이상하네요. 아무리 해도 안 돼요…..”
로파무드가 울상을 지으며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로파무드와 준후가 힘을 합하고 다른 사람들도 거 들었는데, 주술 막은 도저히 뚫리지 않았다.
“나가사의 힘이 아닌가 봐요. 이걸 어쩌죠?”
로파무드의 말에 준후가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저자가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로파무드는 다시 결계를 부술 준비를 했다. 그때 는 바이올렛과 수아, 준호 등도 모두 정신이 든 후였는데, 특히 바이올렛은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세상에, 우린 모두 죽었어. 끝이야!”
그러자 옆에 있던 황달지 교수가 화가 나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요? 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 가는 건지……………..
사실 황 교수는 한국에 그대로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황 교수를 혼자 놓아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다 니게 되었다. 황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발견이 될 수 있는 타보트를 한번 구경이라고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온 것에 불과했다. 그런 황 교수가 아하스 페르츠 가 누구인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아하스 페르츠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띠며 걸어왔다. 그 가 다가오자 바이올렛은 수아와 준호, 아라를 감싸 안는 듯하며 주저앉은 채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고 황 교수가 화가 나는지 씩씩거렸다.
“당신은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요?”
바이올렛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황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그런 황 교수를 돌아보지도 않고 로파 무드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아직 멀었나? 더 늦으면 귀찮아진다.”
로파무드는 겁먹은 눈치는 보이지 않았으나 뭐라고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하스 페르츠가 잘라 말했다.
“십 분만 더 기다려 주겠다.”
돌아서는 아하스 페르츠를 보며 로파무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 났어요. 십분내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요.”
그 말에 준후가 입술을 깨물면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힘으로라도 부숴 보죠.”
“될까?”
연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준후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안 될 것 같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잖아요.”
준후는 아라와 준호, 수아까지 모두 오게 한 뒤 제안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한 번에 저걸 뚫어 보자.”
“어떻게 힘을 합쳐?”
아라의 질문에 준후가 대답했다.
“이건 원래 신부님과 현암 형, 내가 한데 힘을 합치는 방법이야. 우리끼리 만들어 낸 거라 뭐, 정확한 이론은 없지만 대충 요 령을 말할 테니 잘 들어.”
그러고는 연희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로파무드 누나에게도 전해 주세요.”
준후는 간단하게 퇴마합진의 요령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먼저 각자의 상이한 힘을 공통된 성격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모두 이해하기 힘들었지 만 준후는 각자의 힘을 어떻게 합하는지 말해 주었다.
“아라는 조요경의 힘을 반대로 써야 돼. 그러니까 동물을 부리 는 게 아니라 동물들의 힘을 끌어모은다고나 할까? 조요경 자체 는 힘이 거의 없지만, 이렇게 힘을 반대로 사용하면 큰 힘을 모 을 수 있을 거야.”
“그게 될까?”
아라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묻자 준후가 대꾸했다.
“되도록 만들어야 해. 여기가 그나마 가능성이 많아. 동물이나 자연력이 많은 밀림이니까.”
별안간 아하스 페르츠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꿍꿍이들이냐!”
로파무드가 얼른 대답했다.
“주술 막을 뚫기 위해 힘을 모으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아하스 페르츠는 못마땅한 듯 뒤로 돌아섰다.
“허튼짓을 한다 해도 소용없다.”
준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준후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별다른 힘이 없는데……………. 공력도 없고………………”
“너도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어.”
“어, 내가?”
“그래. 공력이나 내가 가르쳐 준 것 말고도 말야.”
준후는 준호의 손을 펴 보게 한 뒤 대뜸 물었다.
“이건 언제 생긴 거지?”
“어……………. 이건 전에 하겐이라는 남자가…………….’”
그러자 이때껏 보고만 있던 바이올렛이 끼어들었다.
“하겐? 하겐이라고?”
“예.”
“어디 좀 보자.”
바이올렛은 하겐이 준호의 손에 새겨 준 문양을 보더니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이럴 수가! 하겐은 너희들만큼이나 대단한 남자야! 대마법사로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네 손에 새겨진 건 그의 흑마법 과 백마법의 문양이야!”
준후도 한마디 거들었다.
“네 손에 새겨진 이건 나도 잘은 모르지만 굉장한 힘을 지닌 것 같아. 그러니 이 문양의 힘을 이용하는 거야. 어때요, 바이올 렛 할머니?”
“할머니가 뭐야? 그냥 바이올렛이라 불러!”
“좋아요, 바이올렛, 이 문양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나요?”
“다는 모르지만, 나도 명색이 백마녀였으니 조금은 알지.”
그러면서 바이올렛은 준호에게 문양의 사용법을 대강 일러 주 었다. 물론 연희의 통역을 빌려서 그다음 준후는 수아에게 말했 다.
“너는 그냥 부탁하면 된다. 아주 간절하게 바라면 돼.”
“어떻게?”
“힘을 주세요. 라고만 하면 돼. 알았니?”
“알았어.”
수아는 그것도 어려운 것 같았지만 다급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린아이답지 않게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준후는 로파무드에게 지시했다.
“아스트라의 힘을 빌려 내게로 전해 주세요.”
로파무드도 다른 방법이 없던지라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얼굴에 살기를 띠면서 속삭였다.
“그 힘으로 아예 저자를 처치하면 안 될까?”
그 말에 준후는 고개를 저었다.
“맞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주술 막은 뚫릴까?”
그러자 준후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실 신부님과 현암 형과 승희 누나가 다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준후가 보기에, 수아의 정령력이 최대로 발휘된다면 박 신부 에 비견될 만큼 강하겠지만 아직 어린아이라 통제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준호와 로파무드의 힘을 극도로 끌어내어 합한다 해 도현암의 가공할 만한 공력에는 미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준호의 마법 문양과 로파무드의 아스트라가 현암의 공력이나 준후의 술법에 비해 떨어진다기보다는 배운 지 얼마 되지 않 았기 때문에 제대로 운용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아라가 조요경의 힘을 극도로 끌어 올리더라도 승희의 교묘한 염력과 증폭력에는 비견할 수 없었다.
승희는 염력이 생기면서 증폭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그 능 력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퇴마사들 각 자의 힘이 무서울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승희가 굳이 증폭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고, 사용해도 큰 도움이 될 만큼 효과가 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라면 퇴마사 네 명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사람 수는 한 명 더 많았지만, 정말 로 가능할지 알 수가 없어서 준후는 한숨을 쉬었다.
“오 년 정도 후의 일이었다면 문제없었을 텐데……. 좌우간 모두 내가 신호하면 힘을 극도로 끌어 올리고, 내가 그만두라면 멈춰야 해.”
모두에게 설명을 끝내고, 준후는 한번 시험 삼아 힘을 기울여 보라고 말했다. 모두들 반신반의하면서도 있는 힘을 모았다. 그 러자………………
“아앗!”
소리를 지르면서 준호가 뒤로 툭 튕겨 나갔고, 준후도 앞으로 비틀하면서 쓰러질 뻔했다. 또한 수아가 울상이 되며 얼굴이 붉 어졌지만, 수아는 울음을 애써 참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연희가 놀라서 묻자 준후가 몇 번 기침을 한 뒤 말했다.
“잘 안 되네요……………. 너무 힘이 상이해요. 준호의 마법 문양도・・・・・・ 수아의 정령력도…………… 나와는 너무 달라서…………….”
그러자 연희가 궁리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로파무드가 중간에 서는 건 어떻겠니? 그리고 네가 끝에 서면 되잖아?”
“흠……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로파무드의 아스트라는 순수한 것이니까. 아스트라와 밀법 진언은 원래 같은 뿌리를 가 지고 있고.”
준후도 잠시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순서를 바꾸어 보았다. 수아, 아라, 준호가 로파무드에게 힘을 보내고 로파무드가 준후에게 힘을 보냈더니 정말로 힘의 소통이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졌다.
“됐어! 그럼 힘을 극도로 올려.”
준후의 말에 모두가 기뻐하며 있는 힘을 다 끌어 올렸다. 아라 의 머리카락은 마치 안테나처럼 꼿꼿하게 일어섰고, 준호는 힘 이 백마법과 흑마법 사이를 오락가락하자 얼굴빛이 붉어졌다 희 어지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그냥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고 있었 으며, 로파무드는 쉴 새 없이 아스트라를 입으로 읊었다.
힘이 차오르자 부풀어 오르던 준후의 양손 소매와 앞섶이 투 둑 하고 저절로 터지면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그러나 준후는 정 신을 극도로 집중하고 있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돌연 준후가 외쳤다.
“더!”
더 용을 쓰자 준후의 옷자락이 다시 약간 더 부풀어 올랐다.
준후가 다시 소리쳤다.
“더!”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준후의 부푼 옷자락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순간 준후 가 괴로운 듯이 외쳤다.
“그만!”
준후의 외침에 모두는 힘을 보내기를 멈추었고, 힘을 쓴 뒤라 헐떡거리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나 준후는 힘을 쓰지 않고 도 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탈진한 것이 아니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준후가 괴로운 듯이 입을 열었다.
“안 돼…………. 이걸로는 안 될 것 같아………..”
그 말에 연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준후의 눈이 빛났다.
“최후로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지?”
“아하스 페르츠라면 이런 것 정도는 단번에 부술 수 있을 거예 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걸 부술 수 없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 런다면 우리도 가만두지 않을 테고.”
“그러니 도망쳐야죠. 그렇다면 아하스 페르츠는 이 주술 막을 부숴버릴 것이고, 그다음에 돌아와서 우리도 통과하면 돼요.”
연희와 준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라는 준후의 품에서 떨어진 수첩 같은 것을 주워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못했지만 아라는 역시 준후에 대해서만은 살뜰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준후가 급히 아라를 불렀다.
“어? 왜 그래? 오빠, 근데…….”
“잠깐! 어서 잘 들어! 시간이 없어!”
준후의 얼굴이 심각해서 아라는 수첩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 하고 무심결에 자신의 주머니에 수첩을 찔러 넣었다.
“조요경의 힘을 써서 이 근방의 동물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그러다가 이따가 내가 큰 소리로 ‘지금’이라고 소리치면 이쪽으 로 한꺼번에 불러. 알았지?”
“동물들을?”
“그래. 절대 잊거나 실수하면 안 돼! 알았어?”
“…”
“그리고 준호, 너는 그때 동시에 저거…………. 그래, 저게 좋겠구 나. 저기 있는 나무를 내리치라구. 아까처럼 있는 힘을 다해서.”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좌우간 내가 말하는 대로 해. 그리고 로파무드 누나는……. 그래요. 저기 있는 바위를 아스트라로 치세요. 무엇이든 좋으니 있는 힘을 다해서.”
“그냥 치란 말야?”
“그러면 돼요. 그리고…………… 수아는……………. 그래, 이렇게 생각하
렴. 광풍을 일으키라고…………….”
“광풍이 뭔데?”
수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준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바람이 쌩쌩 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렴. 그러니 까…………… 저기 저 물구덩이 같은 곳 있지? 저기에 바람이 불었으 면・・・・・・ 하고 바라란 말야.”
“그냥 그러면 돼?”
“그래. 그리고 연희 누나와 황 교수님, 그리고 바이올렛 할・・・・・・ 아니 바이올렛. 세 사람도 해 줄 일이 있어요.” “뭔데?”
“여기 부적 세장이 있으니 조금 있다가 내가 아하스 페르츠의 시선을 끌 때, 이걸 각각 방금 말한 나무와 바위, 물구덩이 주변 에 붙이세요.”
“물구덩이에 부적을 어떻게 붙여?”
“그냥 물 위에 띄우면 돼요. 아무튼 빨리 해야 하죠, 아셨죠? 그러고 나서 신호를 하면 일제히 힘을 쓰고 그다음에는 뒤도 돌 아보지 말고 도망쳐요. 저 앞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쫓아오지 못 할 거예요. 알았나요?”
“그럼 어디서 모이지? 숲 속에서는 길을 잃기 쉬운데?”
준호가 묻자 준후가 이내 대답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여기 오래 있지 않을 거야. 그도 시간이 없다니까 우리를 놓치면 주술 막을 스스로 부수고 들어가겠지. 그 러니 한 삼십 분 정도 숨어 있다가 그가 없어지면 다시 이곳에 모이자고.”
그때 연희가 나섰다.
“너, 아하스 페르츠와 말할 수 있어? 내가 부적을 붙이러 가면 누가 말을 통역해주지?”
그 말에 준후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까지는 미처 염두 에 두지 않았다. 연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하스 페르츠 옆으로 갈 테니 네가 부적을 붙이고 신호해. 그러면 되잖아.”
“하지만…….”
“염려 마. 잘 둘러댈 자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연희는 아하스 페르츠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준후는 연희를 말리려고 했지만 연희는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준후가 걱정스러운 듯 연희에게 외쳤다.
“우리가 위치에 서면 즉각 도망가요! 알았죠?”
하지만 연희는 대답하지 않고 똑바로 아하스 페르츠 앞에 가서 섰다. 아하스 페르츠는 여전히 그 소름끼칠 듯한 무표정한 얼 굴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뭐냐?”
연희는 속으로는 떨리고 조마조마했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힘을 모아 보았는데……………… 음, 그러니까 한 번 실패했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써야겠는데요.”
연희의 말에 아하스 페르츠가 담담히 대꾸했다.
“이 분 남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때 황달지 교수가 걸어 나가 물구덩이에 부적을 띄웠다. 자 꾸 가라앉으려고 해서 몇 번이나 애를 쓰다가 나뭇가지를 집어 그 위에 부적을 올려 간신히 부적을 띄울 수 있었다. 너무도 서 툰 모습이라 자못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하스 페르츠가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연희는 가슴이 철렁해서 급히 둘러댔다.
“지금 쓰려는 방법은 주술로 진법을 치려는 거예요. 그러니 당 신은 놀라지 말아요.”
“내가…………… 놀라?”
“아니, 아니. 그러니 오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최후 의 방법을 써 보고, 안 된다면 깨끗이 포기하겠어요. 알겠죠?”
그때 바이올렛과 준후도 제각기 부적을 위치에 놓았고, 준호 와 로파무드는 수아와 아라의 주변에 모였다. 그리고 준후는 연 희가 도망가기만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연희는 도망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속 아하스 페르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의심이 든 듯, 재빨리 연희의 손목을 잡았다.
“이상한걸? 진법을 쓴다면서 왜 나를 중심에 놓는 거지?”
연희는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아하스 페르츠에게 잡혔다. 처음 부터 연희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희는 손목이 잡힌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모두가 일 을 마친 것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준후야! 어서!”
그러나 후는 연희가 잡힌 것을 보고 차마 신호를 보낼 수 없 어 주저했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준후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하스 페르츠도 뭔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연희 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허튼수작하면……?”
그래도 연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준후야! 어서! 그래야……… 그래야 시간을……………!”
연희는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모두가 도망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준후는 차마 연희를 희생시킬 수 없었 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비슷했지만, 더 주저한다면 아하스 페 르츠가 주술을 쓸 테고, 그렇게 된다면 전멸이었다.
그렇다고 눈을 뻔히 뜨고 연희의 머리가 박살 나는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그때 별안간 황 교수가 소리를 지르면서 아하스 페르츠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바이올렛이 비명을 질렀지만 황 교수는 벌써 아하스 페르츠의 몸에 자신의 몸을 힘껏 들이받았다.
사실 황 교수는 상당히 대담한 성격이었다. 더구나 아무도 황 교수에게 아하스 페르츠의 내력을 설명해 줄 경황이 없었던데다 아까 아하스 페르츠에게 호되게 한 번 당한 터라 그에 대해 감정 도 매우 나빴는데 연희가 잡힌 것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만약 아하스 페르츠가 어떤 자인지 알았다면 황 교수도 주저했을지도 모르지만.
벌어진 결과는 정말 의외였다. 그 막강한 아하스 페르츠가 황 교수의 몸에 부딪히자 주춤거리며 비틀거렸고, 그 틈에 연희는 아하스 페르츠의 손을 뿌리쳤다.
연희는 재빨리 땅바닥에 넘어지려는 황 교수를 급한 나머지 발로 걷어차면서 자신도 몸을 굴렸다.
준후는 지체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그러자 로파무드는 간디바로 바위에 화살을 쏘았고, 준호는 나무를 내리쳤으며, 수아는 정령력으로 물구덩이에 바람을 몰아 치게 했다. 순간 바위는 조각나면서 아하스 페르츠 쪽으로 파편 을 내쏘았고, 준후가 붙였던 부적은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파편들이 그 부적을 따라 돌의 화살이 되어 날아갔 다. 비슷하게 나무는 조각나면서 불이 붙어 부적을 따라 불화살 이 되어 날았으며, 물구덩이의 물은 물줄기로 바뀌어 부적을 따 라 회오리치면서 역시 아하스 페르츠에게로 쏘아져 날아갔다. 순간,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 우보법의 방위로 힘차게 발을 디 뎠다.
아하스 페르츠는 금세 몸을 가다듬고 냉소하면서 팔을 휘저었 지만, 준후가 죽을 각오로 발휘하는 우보법 때문에 한순간 발이 붙어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하스 페르츠의 몸 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무섭게 그의 몸 주위를 돌면서 퍼져 나 갔다.
그러나 준후의 노림수는 다른 데 있었다. 부적들은 아하스 페 르츠의 몸을 직접 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을 막아선 것이었 다. 불기둥이 가장 안쪽을 돌면서 아하스 페르츠의 몸을 에워 쌌고, 그다음은 물기둥, 그다음은 돌로 된 벽이 아하스 페르츠 의 겉을 에워쌌다. 세 가지 벽으로 아하스 페르츠를 차단한 셈이 었다.
준후 혼자라면 이런 진법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아까 힘 을 모아 진세를 연습하면서, 준후는 다른 사람들의 힘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그래도 아하스 페르츠를 해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직접 공격보다는 차라리 아하스 페르츠를 잠시 움 직이지 못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물론 아하스 페르츠가 몸을 피 했다면 이 벽들은 그를 에워싸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준후는 자신이 그를 붙잡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그러나 연희가 그 역할 을 자청하는 바람에 우보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벽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하스 페르츠는 무서운 힘으로 발을 떼었다. 순간 준후는 땅에 튕기면서 나가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준후는 목청껏 소리쳤다.
“도망쳐! 어서!”
그때 아라가 불러들인 동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맹수들은 모이지 않았고, 새떼나 조그마한 동물들이 많았 지만, 그들은 무섭게 아하스 페르츠를 가운데 두고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앞다투어 도망쳤지만, 아라는 계속 조요경을 쥐 고 있어 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연희가 아라를 덥석 안아 올렸다. 그리고 준후와 로파 무드는 그들의 뒤를 엄호하면서 뒷걸음질로 달렸다. 채 이십 초 도 되지 않아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첫 번째 불기둥이 부서진 것을 알고 준후가 외쳤다.
“더 달려! 아라야! 더 힘을 써 봐!”
아라는 막 눈을 뜨려다가 준후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용을 썼다. 뭔가 큼지막한 놈들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았는데, 곧 도착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십초 정도 지났을 때, 두 번째 물기둥이 부서지는 느낌이 왔다. 일행은 이백 미터가량 도망친 것 같았다.
“우리도 뛰어요!”
준후는 로파무드에게 말하고는 자신도 뒤로 돌아 전력으로 달 렸다. 그런데 세 번째 진이 바로 직후에 부서져 버렸다. 예상보 다 너무 빨리 진법이 부서지자 준후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 다. 어쨌거나 전력을 다해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진법에서 빠져나와 화가 치민 듯 소리를 질 러 댔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새들과 조무래기 짐승 들이 떼죽음을 당해 사방으로 낙엽처럼 떨어졌다.
네 번째 방벽이라 여겼던 짐승들이 일순간에 떼죽음을 당하자 준후는 다급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밀림으로 어느 정도 몸을 숨 겼지만, 정작 그 자신은 뒤를 경계하느라 아직 그의 시선에서 벗 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큰일 났네!’
바로 그때 몇 그루의 나무를 무너뜨리면서 거대한 그림자가 다시 아하스 페르츠를 덮쳤다. 세 마리의 코끼리였다.
‘천만다행이다! 여기는 인도라 코끼리가 있구나!’
안장이 얹힌 것으로 보아, 그 코끼리들은 야생이 아니라 근처 의 농장 같은 곳에서 기르던 놈들 같았다. 그런 코끼리들도 조종 을 받으니 무서웠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아하스 페르츠를 밟아 죽일 듯 달려들었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코끼리들은 아하스 페르츠를 향해 달려가다가 밟지 못하고 이 상하게 방향을 바꾸어 나무를 들이받았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코끼리들은 계속 아하스 페르츠에게 덤벼들었다. 그 러나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헛되 이 옆의 나무들만 들이받고 있었다.
그를 해치지는 못한다 해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거기 까지 보고 난 다음 준후는 로파무드의 뒤를 따라 계속 도망치다 문득 의아해졌다.
아까 황 교수는 아하스 페르츠를 들이받았는데, 코끼리는 왜 들이받지 못하는 걸까? 그의 몸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고 어떤 주술도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황 교수는 아하스 페르츠를 비틀 거리게 한 걸까?”
그러고 보니 황 교수가 아하스 페르츠를 들이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까 아하스 페르츠가 수아를 죽이려 할 때도 황 교수는 그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뭔가 있어! 어쩌면 그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잘 생각해 보니 준후의 주술은 한 번도 아하스 페르츠를 적중 시킬 수 없었지만, 우보법은 아하스 페르츠에게 일순간이나마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하스 페르츠도 무적은 아니라는 말인가?
문득 코끼리들의 단말마의 외침이 들렸다. 코끼리들도 아하스 페르츠의 상대가 되지 못해 모두 죽음을 당한 모양이었다.
‘일 분도 안 되는 사이 세 가지 진법을 모두 부수고 코끼리를 세 마리나 단숨에 죽이다니!’
준후는 아하스 페르츠의 무서움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이 미 다른 사람들은 한참 떨어져 있는 듯했기에 준후는 행여 추적 을 당할까 봐 그들이 가지 않았을 만한 길로 빙빙 돌아 도망쳤 다. 다행히도 아하스 페르츠가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식사를 끝내자 이반 교수가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근차근 이야기해 봅시다. 처음부터 말이죠. 우선 칼키파의 목적이 뭔지부터 생각해 봅시다.”
“그건 간단합니다. 아하스 페르츠를 잡는 거겠죠.”
윌리엄스 신부가 대답하자 이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건 틀림없는 듯합니다. 고반다가 유일하게 겁내는 것이 아하스 페르츠 같더군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짚 어 봅시다. 가장 전제가 되는 건 그들이 타보트를 훔쳤다는 겁니 다. 그건 분명 아하스 페르츠를 자극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그들의 목적대로 되었고, 그래서 아하스 페르츠는 성당 기사단을 움직였죠. 성당 기사단은 밀약을 맺었던 이단 심판소를 끌어들이고 검은 편지 결사까지 끌어들였어요. 이건 며칠 전 의 상황일 겁니다. 미스터 현암이 실종된 직후 정도가 되겠지요. 그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할 때까지는, 아하스 페르츠는 해밀튼의 모습이었고 조용히 인도를 향하고 있었으니까요.”
“좋습니다. 계속하세요.”
“그러나 미스터 현암의 소식이 끊어졌고, 그 이후 아하스 페 르츠가 본모습을 드러냈다고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전면적으로 성당 기사단 등을 움직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 승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윌리엄스 신부 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요?”
“그다음 카르나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칼키파도 그들의 움 직임을 눈치챘겠죠. 아마 타보트를 훔쳐 냈을 때부터 주술 막을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타보트를 넘겨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의문이 좀 생깁니다.”
이반 교수는 얼굴에 주름을 잡아 가며 깊이 고심하다가 박 신 부에게 물었다.
“고반다는 분명 준비가 부족하여 이 상황이 되었다고 말했죠?”
“그래요.”
“고반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러자 박 신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거짓말 따위를 늘어놓고 있기 에는 그의 오라 막이 너무 밝았습니다.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오 라의 빛이 조금이나마 변했을 겁니다. 그건 믿어도 될 겁니다.”
그러고는 이내 덧붙였다.
“그리고 타보트가 정말 아하스 페르츠를 쓰러뜨릴 수 있느냐 는 말에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거짓 말을 하지 않으려면 그런 답변을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일단 고반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고 봅시다. 그렇다면 …………….”
이반 교수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들의 준비가 부족해진 건 미스터 현암 때문이겠군. 그들은 원래 타보트를 훔치고 동굴을 무너뜨림으로써 시간을 벌려 했는 데, 미스터 현암 덕분에 현장에서 잡히게 된 걸 테니까요.”
“그렇겠죠.”
“그래서 그들이 급히 우리에게 연락한 거라 볼 수 있겠군요. 우리에게 타보트를 넘겨줘서 시간을 벌려고 말이죠.”
그러자 박 신부가 말했다.
“아마 그들이 우리에게 넘겨주려고 한 건 가짜 타보트였을 겁니다.”
“분명 그렇겠죠. 그래서 시간을 벌려던 거겠죠. 타보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이반 교수의 말에 승희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타보트가 정말 아하스 페르츠를 상대하는 데 효과가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박신부는 승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고반다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단다. 사실 타보트는 누구도 열어 볼 수 없어. 뚜껑 뒤에 숨 더라도 정말 타보트가 사람을 죽이는지는 확인할 수 없겠지.”
“고반다 정도 되는 자라면,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타보트 가 정말 사람을 즉사시키는 힘이 있는지 확인했을 건데요?”
“하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보통 사람이라 할 수 없잖니? 죽지 않는 자니까 말야. 전설대로라면, 이건 하느님과 하느님 아들의 권능 대결이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니?”
그 말에 윌리엄스 신부는 아연한 듯 ‘아멘’ 하고 외쳤다. 그모 습을 보고 박 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확실히 파문당해도 싸군. 이런 불경스러운 소리를 태연히 할 정도가 되었으니. 아멘. 용서하소서.”
“만약…………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하죠?”
“그러면 그를 물리칠 확실한 방법은 있니? 일단 이 방법을 쓰는 수밖에.”
“정말로 그 방법을 쓰실 건가요?”
그 말에 박 신부가 안색을 조금 굳혔다.
“모르겠다. 그를 만나 보아야 결정할 수 있겠구나.”
그때 승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그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닐까요?”
“모르겠구나. 그러니 그를 만나 보아야 알겠다는 거야. 내 짐작대로라면, 그는 내심 죽는 것을 지독하게 원하고 있을지도 몰 라.”
“현암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모르는 거란다. 만약 그렇다면 타보 트를 쓰고 ・・・・・・ 그렇지 않다면………..”
박 신부는 뭔가 주저하는 듯이 보였다. 그때 승희가 외쳤다.
“내가 할게요. 신부님.”
대뜸 승희가 박 신부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의 눈이 돌연 붉어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신부님…………… 아하스 페르츠가 여기 와 있다면………”
“아닐 게다. 승희야.”
“아니에요. 그렇다면 현암군은 아마도…………….”
그 말에 박 신부도 한숨을 내쉬었다. 현암은 아하스 페르츠의 착한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해밀튼과 함께 인도로 오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그런데 이제 아하스 페르츠가 이곳에 나타났다면 그 것은 십중팔구 아하스 페르츠가 현암을 죽였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박신부는 승희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내가 무슨 점쟁이는 아니다만, 현암 군은 아직 죽지 않았어. 내 느낌이 그래. 그러니 공연한 생각은 하지 말거라.”
승희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 그자는…………… 그자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승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현암 군은 아직 무사하다. 틀림없단다. 그리고 승희야, 너는 절대 그렇게 흉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 아무리 슬프거나 힘든 일이 생겨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
그 말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사람에게 맹목적인 증오나 복수의 감 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꼭 명심하렴.”
승희는 잠시 생각해 보고는 박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증거는 없었지만 박 신부가 단호하게 하는 말이 니 믿을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 는 일이지만…………….
그러자 윌리엄스 신부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말 을 꺼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준비가 부족한 걸까요? 여기는 대단한 주술사들도 수없이 많고, 주술 막도 준비가 모자라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걸 알고 싶은 겁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머리 아픈 거죠. 일단 준비가 되었든 말든 습격은 행해졌습니다. 우리에게 타보 트를 넘겨주기 전에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 었을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가짜 타보트를 지고 나가서 아하스 페르츠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시간을 버는 것이었는데, 습격 은 생각보다도 훨씬 일찍 행해졌어요.”
이반 교수가 한참 궁리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맨 처음 습격이 벌어졌을 때, 카르나는 고반다만 업고 사라졌 을 뿐 우리가 죽거나 말거나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그가 다시 우리를 찾은 것은 한참 지난 후였죠.”
“아마 무슨 꿍꿍이를 굴렸을 겁니다.”
“그런데 좀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습격이 일찍 되었 건 늦게 되었건, 칼키파는 주술 막을 펼쳤어요. 그리고 저들 모 두를 가둬 버리는 데 성공했고요. 그런데도 뭔가 잘못된게 있었 던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도 우리가 타보트를 지고 나가야 할 만 큼 크게 잘못된 것이 있는 거란 말입니다.”
“준비가 부족했다면 저들의 지원군이 오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박신부의 말에 이반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인도에 도착하고 카르나가 찾아온 건 이미 며칠 전의 일입니다. 그들이 조력자들을 불러오려면 얼마든지 불러올 시 간이 있었어요. 비행기만 잘 타면, 세계 어디서든 하루 이틀이면 여기 올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건 그렇군요.”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논리적으로 판단을 내리던 현암이 없는 상황에서 이반 교수가 의외로 아주 날카로운 두뇌 를 번득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진짜 타보트까지 우리에게 주면서, 우리더러 아 하스 페르츠를 상대하라고 하고 있어요. 자신들이 가두어 준 자 들을 풀어 주려고까지 하면서 말이죠. 그게 납득이 안 되는 점입니다.”
“그건 할 수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윌리엄스 신부가 지적했다.
“원래 그들은 우리에게 아하스 페르츠만을 상대하게 하려 했 습니다. 그런데 박 신부님이 교묘하게 먼저 도안을 얻어 내게 되 자그들은 할 수 없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잡는 것을 포기했 을지도 몰라요. 그들에게는 백 명의 능력자들보다 아하스 페르츠가 더 큰 목표이니까요.”
이반 교수가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난 거지만, 그들이 증원군을 불러올 시간은 충분히 있었어요. 승희 양이나 성난큰곰도 이 주변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능력자들이 있다 고 했고요.”
“그들이 모두 검은 편지 결사나 이단 심판소, 성당 기사단 사 람들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이 주술 막을 풀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갇 혀서 죽는 수밖에 없어요. 칼키파가 전멸하더라도 말이죠.” “고반다도 갇힌 것 아닙니까?”
“칼키파 사람들은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왜 고반다 를 가두어 두겠어요? 주술을 조종하는 사람들 몇몇만 남겨 놓고 고반다를 빼돌리면 그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반 교수가 말을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반다는 왜 빠져나가지 않는 거죠? 그 이유도 모르겠군요. 분명 검은 편지나 이단 심판소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어요. 공격 이 중지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빠져나가려면 지금뿐일 텐데.”
윌리엄스 신부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도대체가…………. 처음으로 모든 걸 되돌리자는 것 같군 요. 공격해 온 자들을 놓아주고, 타보트를 내놓고…………. 칼키파는 도대체 뭘 원하기에 ……………..”
별안간 이반 교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구나!”
“뭡니까?”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가 이반 교수를 쳐다보자 이반 교수가 말했다.
“아까 신부님이 물으셨을 때 고반다가 무엇이라 말했죠? 그러 니까………… 우리를 대신할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가 덜 되었느냐던 그 질문에.”
그 말에 박 신부도 눈을 크게 떴다.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고반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비슷하다고 한 건 완전한 긍정이 아닙니다.”
이반 교수의 말에 박 신부도 무릎을 쳤다.
“아하!”
그제야 이반 교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맞아요. 감사하오, 윌리엄스 신부. 덕분에 알았어요. 오지 않 은 것은 증원군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아하스 페르츠였 던 겁니다! 그렇소. 고반다가 떠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죠. 타 보트가 아하스 페르츠의 목표일 테지만, 고반다도 또 다른 목표 일 테니까요.”
윌리엄스 신부는 뭔가 석연치 않는 듯했다.
“아하스 페르츠가 오지 않았다면 왜 우리에게 타보트를 내줘서 그를 상대하게 하는 거죠? 그것도 이건 진짜 타보트라면서요?”
“그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타보트를 내준 겁니다.”
“어째서요?”
“이제 그들은 있는 밑천을 다 보였어요. 그런데 정작 아하스 페르츠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을 모두 내보 내는 게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라 여겼겠죠. 우리가 그걸 가지고 나가면 처음의 목적대로 당연히 모두가 우리를 쫓을 테니까.”
“하지만 가두어 둔 적들을 그냥 내보내는 건………….”
윌리엄스 신부가 말끝을 흐리자 이반 교수가 날카롭게 말했다. “어차피 아하스 페르츠를 우리가 상대해야 할 텐데, 원한을 맺 어 무엇하겠습니까?”
의기양양하게 말을 하던 이반 교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헛고생을 한 것 같군.”
“예?”
“그래 봐야 달라질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오.”
이반 교수의 말에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성난큰곰이 조용히 말했다.
달라질 게 없다 해도 헛고생을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행동하는 것과 모르고 행동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
승희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뭐가 헛고생이란거죠?”
승희의 질문에 이반 교수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아무리 분석해 본들 어차피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단 소 리요. 타보트를 가지고 나가 놈들의 표적이 되고, 여기 있는 사 람들을 풀어 주는 역할밖에 할 수 없단 소리지. 결국 우리는 고 반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타보트를 안 가지고 간다면…..”
“그럴 수는 없단다.”
박 신부는 승희에게 말했다.
“이것은 칼키파같이 야심만만한 자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물건이야.”
그러자 이반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 성당 기사단에게 도로 넘겨줄 수도 없겠지요?”
“아하스 페르츠 또한 너무도 위험한 자입니다.”
“교황청에 넘겨준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윌리엄스 신부가 말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프란체스코 주교 역시 위험한 사람이오. 비록 교황청에 적을 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을 맹신하고 있어요.” “다 나쁜 자들뿐이라면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네요.”
승희가 허망한 듯 중얼거리자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는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라 툭 내뱉었다.
“그럼 우리, 이것만 가지고 나가고, 칼키파건 이단 심판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 말에 박 신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있겠니?”
“왜 안 되나요? 어차피 다 좋은 자들이 아닌데?”
“그렇다고 서로 죽고 죽이도록 놓아두라는 거냐?”
“신부님! 신부님은 이용당하고 있는 거예요! 저자들은 신부님이 사람이 죽는 것을 결코 그냥 보고만 있지 않으실 걸 알기 때 문에 이런……”
“나도 안다.”
“물론 신부님의 마음은 알지만…. 이건…… 이건 그들이 자초한 일이에요. 더구나 그들의 속셈을 알고도 이용당한다는 건 너무…….”
승희가 말을 잇지 못하자 박 신부는 담담하게 되받았다.
“고반다가 어떤 음모를 꾸미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없단다. 우 리가 신념을 잃지 않고 행동한다면 거리낄 것이 무엇 있겠니? 우리가 움직임으로써 사람들이 덜 죽고 덜 다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란다.”
그때 카르나가 문을 노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박 신부가 간단히 대답했다.
“타보트를 가지고 가겠소.”
그러자 카르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박 신부님은 선량하신 분인데, 이런 참상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승희는 카르나가 너무도 뻔뻔스러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래서 그에게 조그마한 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신들은 너무도 선량하지 않아서, 이런 참상을 일으키려 했 고요.”
승희의 말에 카르나가 웃는 표정을 거두고 얼굴빛을 약간 흐 리며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는 다르마(Dharma)*에 의해 움직일 뿐이죠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에서처럼 말이죠. 아……………. 인간 세상에서는 서글픈 일이 많이 벌어지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 고대 인도인들은 운명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그것이 다르마와 카르마 다. 이 개념은 상당히 고차원적이지만 대략 카르마는 일종의 숙명, 즉 절대로 벗 어날 수 없는 정해진 상태의 운명을 뜻하며, 다르마는 카르마 안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개선시키거나 바꿀 수 있는 운명을 말하거나 혹은 카르마를 인격적 존재 로서 당당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의무와 미덕의 정신, 혹은 그 화 신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카르나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이 가식적인 것 같지 않아 승희는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를 여기서 내보내 줄 거요?”
“물론이죠.”
카르나가 대답하자 박 신부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나갑시다. 카르나 씨, 안내를 부탁합니다.”
카르나는 선선히 그들을 안내하여 문밖으로 나섰다. 문밖에는 여전히 고반다가 앉아 있었고, 상당히 많은 인도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힌두교의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옥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거룩한 이의 노래’라는 뜻이 된 다. 여기서의 거룩한 이는 힌두교의 영웅이자 비슈누의 아바타라이기도 한 크리 슈나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인도의 유명한 순례지인 쿠루 들판에서 벌어질 판다 바(두)과 카우라바(카우라족)의 친족끼리의 전쟁을 앞두고 또 다른 대영웅 인 아쥬르나의 번민을 크리슈나가 노래로 깨우쳐 다르마의 길을 열어 준다는 것 이다. 이 부분은 원래 마하바라타의 일부였으나 워낙 뛰어난 작품이라 별개의 작품으로 인정받아 수없이 찬송되고 암송되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인도 사상이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시로 응집되어 있기 때문에 힌두교권에서는 거의 성경만 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카르나가 타보트 상자를 가리키자 성난큰곰은 거대한 타보트 상자를 가볍게 어깨에 짊어졌다. 그때, 밖에서 한 인도인이 헐레 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급히 카르나에게 가서 귓속말로 무 어라고 한참을 속삭였다.
그 말을 듣던 카르나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박 신부 일행 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급히 고반다에게로 가서 역시 귓속말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고 나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갑자기 박신부에게로 돌아섰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무슨 소리요?”
박신부가 묻자 카르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타보트를 내려놓으시오!”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요?”
이반 교수가 말하자마자 갑자기 신전 전체가 우르릉 하면서 크게 흔들렸다. 뭔가가 위에서 크게 폭발한 것 같았다.
“습격받고 있는 거요?”
이반 교수가 묻자 카르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느닷없이 외쳤다.
“어서 내놔!”
카르나가 소리치자 저쪽 문에서 인도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박신부가 카르나의 앞을 막아서면서 물었다.
“혹시…………? 그가 온 거요?”
그러나 대답을 들을 틈조차 주지 않고 많은 숫자의 인도인들 이 박 신부 일행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너무도 험악하게 변하자 박신 부 일행도 긴장했다.
그때 다시 신전이 흔들리더니 한쪽 천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 며 뚫렸고, 돌 조각과 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박 신부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인도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쪽을 주시했고, 카르나도 놀라서 고반다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뚫린 천장으로부터 두어 사람의 형체가 떨어져 내렸 다. 그 사람들은 피투성이였는데, 땅바닥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 았다. 둘 다 칼키파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 천장에서 다른 한 사람이 훌쩍 뛰어내 렸으나 바닥에 내리면서도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를 보자 인도인들은 경악하면서 뒤로 물러서 고반다의 앞을 벽을 쌓듯 막아섰다.
“아하스 페르츠!”
카르나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신전 내부를 울렸다.
준후는 밀림을 헤매며 약간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아하스 페르 츠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만에 하나, 아하스 페르츠도 주술 막을 뚫지 못했다면? 아니, 준후의 짐작대로라면 아하스 페르츠 정도라면 무난히 주술 막을 뚫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계획대로 해야만 해! 절대로!’
준후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준후가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오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희와 로파무드, 바이올렛을 비롯해 수아와 준호, 아라도 있었고 황달지 교수도 있었다. 바이올렛은 황달지 교수와 한참 입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당신, 너무 무모했어요. 정 날뛰고 싶으면 자기 분수를 알고 난 뒤 날뛰란 말이에요. 이번에는 천만다행으로 일이 잘 풀렸지 만, 만에 하나 잘못되었으면 우리 모두의 목숨을 내놓는 결과가 되지 않았겠어요?”
바이올렛은 아까 황 교수가 아하스 페르츠에게 덤볐던 것을 두고 닦달하는 것 같았다. 이제 황 교수도 아하스 페르츠의 무서 움을 알았는지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지만, 그래도 고집을 부리 며 바이올렛을 말로 이겨 보려고 애썼다.
황 교수도 알고 보니 중국인답게 입심이 무척 셌다. 이 두 사람 은 실로 입으로 겨루는 데 가히 호적수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후가 가까이 오자 로파무드가 웃으며 준후에게 말을 건넸다.
“아하스 페르츠가 이미 주술 막을 뚫어 놓았어. 넌 정말 대단하구나.”
곁에 있던 연희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어서 들어가야죠. 안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을 거예요.”
“모두 다?”
“먼저 들어가요. 나는 연희 누나와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요. 부탁할 것도 좀 있고.”
준후는 연희만 빼고 다른 사람들을 주술 막 안으로 들어가게 한 뒤 연희를 데리고 반대쪽 숲으로 걸어갔다. 연희는 무슨 일인 가 싶어 준후를 따라가면서도, 이상하게 준후가 음침해 보인다 고 생각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준후가 서글픈 표 정을 지으면서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누나, 아까 내가 부탁했던 것 기억나요?”
“응?”
“내가 아까 한 가지만 부탁할 게 있다고 했잖아요. 비록 누나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응? 아, 그랬지. 그게 뭔데? 지금 부탁하려고?”
“예.”
그러면서도 준후가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듯하자 연희가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망설이고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줄 테니……….”
순간 준후가 번개같이 움직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느닷없이 준후는 연희의 배를 세게 쳤다. 연희가 놀라며 고개 를 숙이자 그녀의 뒤통수를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연희는 의 혹에 가득 찬 눈길로 준후를 힘겹게 바라보다가 기절해 쓰러지 고 말았다.
준후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해쓱한 얼굴로 뒤쪽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한편, 주술 막 안으로 들어갔던 일행은 준후와 연희가 오지 않 자 멀리 가지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준후 혼자 돌아왔는데, 준후는 몹시 숨을 헐떡였고 옷 이 조금 찢긴데다 작은 생채기가 하나 나 있었다.
“연희 씨는?”
로파무드가 물었다. 그러자 준후는 애써 서툰 영어로, 자신이 뭔가 부탁할 게 있어서 먼저 돌아갔다고 말했다. 하도 말이 통하 지 않자 아라가 나서서 통역을 해 주었다. 아라는 그래도 준후보다 훨씬 더 영어 실력이 나은 편이었다.
연희가 없는 탓에 이제 서로 간에 복잡한 대화는 통하지 않았 다. 로파무드와 황 교수, 바이올렛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었지 만, 준후와 아라, 준호, 수아는 자신들끼리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저쪽 그룹과 복잡한 의사 전달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행 중에 준호가 없었다. 준후는 준호가 보이지 않자 아라에게 물었다.
“준호는?”
그러자 아라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볼일.”
그때 준호가 부스럭거리며 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며 준후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두에게 말했다.
“어서 갑시다. 싸워야 할지도 모르니 방심하지 말고요.”
“근데………… 왜 상처가 늘었지? 다쳤어?”
아라가 준후에게 묻자 준후는 서둘러 대꾸했다.
“추적자들이 있었어. 그들도 이리로 들어오려 할 테니 어서 서둘러 떠나야 해.”
“연희 언니는 괜찮아?”
“먼저 떠났으니 괜찮아.”
아라는 석연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추적자를 만났으면 언니도 만날 수 있는데, 어떻게 안전하다고만 해?”
“연희 누나는 먼저 갔어. 추적자들이 오기 훨씬 전에.”
“그럼 그동안 뭐했어? 왜 이리 시간이 걸렸지?”
아라가 집요하게 캐묻자 준후가 소리를 빽 질렀다.
“네가 뭔데 따지고 들어? 일일이 너한테 보고해야 돼?”
아라는 준후가 화를 내자 너무 놀라 뒷걸음치다가 준호에게 부딪혀 멈추어 섰다. 그러자 준후도 다시 목소리를 다듬더니 어 색하게 말했다.
“미안해. 너무 급해서 ………. 어서 가자.”
그러면서 준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음질쳤다. 다 른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준후의 뒤를 따랐다.
급기야 아라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준호가 아라를 위로해 주 려 했지만 아라는 구슬프게 계속 울기만 했다.
“오빤…… 변했어! 변했어! 나한테 나한테 화를 냈어!”
그러자 준호의 안색이 침울하게 변했다. 준호는 아라를 달래 주려 어깨를 토닥였지만, 시선은 멍하니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준호도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부는…………… 변했어! 확실히 변했어…………! 나는 믿었는데………… 정말 믿었는데!’
준호가 받은 충격은 아라보다도 더 심했다. 준호는 볼일을 보 러 가는 척하며 준후의 뒤를 따라갔다가 보았던 것이다. 준후가 연희를 느닷없이 쳐서 쓰러뜨리는 광경을…………. 그것을 보고 준 호는 너무 놀라 다급히 숲에 숨었고 한참 후에야 두근거림이 멎 었다.
잠시 뒤에 그곳을 다시 보았을 때는 연희도, 준후도 없었다. 물론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옷자락이 찢어진 것이나 생 채기는 준후가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연희는? 한 가지 결론뿐이었다.
‘사부가 연희 누나를 죽였다!’
준후가 연희를 죽였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다음은 누구인 가? 그러나 준호는 너무도 두려워 그런 사실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준후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다고 생각 했다.
우선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믿을 것 같지 않았고, 믿어 준다 할지라도 준후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후 가 눈치를 챈다면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준호는 슬픔 과 배신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