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5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8 : 악마의 계략
악마의 계략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사정없이 비가 퍼부어 댔다. 드디어 폭풍이 시작된 것이다. 하늘이 워낙 먹장 같은 구름으로 뒤덮여, 만약 일식이라 할지라도 해를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폭풍의 기세는 대단해서 사방에는 금방이라도 날려 버릴 것 같은 바람 이 불었고 빗물들이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져 흐르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맴돌았다.
몰아치는 강풍에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부서졌고 떨어 져 나뭇잎들이 공중에서 으깨어져 모래알처럼 얼굴을 때렸다. 그 조각이 얼굴에 박히듯이 스칠 때마다 아플 정도로 폭풍의 기 세는 심했다.
그런 폭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능선 부근의 마을이었다. 그곳 은 아마도 오래된 옛 도시인 것 같았으나, 너무도 많이 부서져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을 듯했다. 돌로 쌓은 담들과 뼈만 남은 건물들은 자못 웅장했고 규모가 컸지만 이미 모두 부서지 고 쇠락했으며 이끼와 풀이 덮여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 같지 않 았다. 몇 채의 오막살이집들도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 황폐하기만 했다.
“여기가 맞는가?”
박신부가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로 물었다.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았을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일행은 박 신부 와 현암, 준후, 승희, 그리고 연희의 다섯 명뿐이었다. 다섯 사람 은 흠뻑 젖었으며 휘몰아치는 강풍 때문에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앞장서 걷던 연희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아요.”
비행기 안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후, 연희의 행동은 어딘지 이상했다. 뭔가에 홀린 듯,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상태 같았다. 이 목을 숨기기 위해 페루 공항에는 밤에 내리게 되었는데, 연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들뜬 듯 방향을 가리켰고 박 신부 일행 은 그 뒤를 따랐다.
이틀 동안의 여행 끝에 그들은 마침내, 지도 한 번 살펴보지 않고 정글 사이를 뚫고 나와 산을 올랐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 았고, 누구도 어떻게 연희가 길을 안내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승희와 준후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 신부가 조용히 손짓으로 그들이 입을 여는 것을 막았다.
“저기…………….”
연희는 다 허물어져 가는 커다랗고 웅장한 어느 담벼락을 가 리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희는 잠들 듯 스르르 눈을 감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승희와 준후가 얼른 연희를 부축한 뒤, 준 후가 연희를 업었다. 비는 계속 쏟아졌으나 다행히 바람은 조금 잠잠해지기 시작해서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오히려 귀가 멍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주변의 경치가 더더욱 황량하게 느껴 졌다.
‘저기 정말 사람이 살까? 바이올렛이 있는 곳이라고는 보기 힘든데….’
준후가 혼자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박 신부가 절름거리면서도 뚜벅뚜벅 힘 있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 어서서 오라 막을 펼쳤다.
“준비하게.”
그 말에 현암은 금이 간 월향검을 꺼냈다. 승희는 준후에게서 연희를 받아 부축했다. 준후가 벽조선과 부적을 꺼내 손에 드는 순간 눈앞에 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두 여자였고, 한결같이 긴 검은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을 지 니고 있었다. 한 명은 아직 앳된 소녀였고, 한 명은 요염한 젊은 여인이었으며 한 명은 주름진 노파였다. 머리 길이는 소녀가 제 일 길어서 발끝까지 닿을 듯했고, 여인의 머리는 허리께까지 닿 을 정도였으며 노파의 머리는 어깨를 덮을 정도였다. 그 셋은 마 치한 사람인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갈 수 없다.”
“너희는…………? 바이올렛의 분신들?”
박 신부가 별로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묻자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어깨 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서는 빗물을 뚝뚝 떨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셋이 다시 동시에 말했다.
“누구도 그녀를 해칠 수는 없다.”
그 말에 박 신부는 천천히 되받았다.
“우리는 그녀를 해치지 않소.”
여자들이 말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오.”
셋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동시에 물었다.
“만약 정말이라면, 너희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단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 신부가 대답했다.
“그렇소.”
또다시 셋이 말했다.
“믿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믿겠소?”
“지금 그녀를 해치러 수많은 자들이 오고 있다. 정말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그들을 막아라.”
오고가는 대화를 듣다가 현암이 차분하게 여자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막지 그러오?”
여자들은 동시에 말했다.
“우리들로는 힘이 부족하다.”
“힘으로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시오?”
여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셋이 동시에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를 믿을 수 없다. 그녀는 만날 수 없다.”
준후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너희가 그녀를 지킨다고?”
셋은 지체 없이 동시에 말했다.
“그렇다.”
현암이 나섰다.
“우리가 그녀를 해치려는 자들과 싸워 주기를 바라는 건가?”
“그렇다.”
“그사이 너희는?”
“여기를 지킨다.”
느닷없이 현암이 껄껄껄 웃었다. 여자들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현암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현암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우리가 그녀를 죽이러 왔다면?”
그 말에 여자들이 긴장하며 외쳤다.
“너희는 우리 손에 죽는다.”
“너희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셋은 동시에 똑같이 코웃음을 치며 되받았다.
“너희의 힘을 과신하지 마라.”
그 말에 현암이 대꾸했다.
“물론 너희는 막강해. 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죽이려 한다면, 너희는 절대 우리를 이기지 않을 거야. 아마도 져 주겠지. 그렇지 않아?”
여자들은 그 말에 놀란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 틈에 현암이 다시 말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우리가 너희 말대로 각지에서 온 자들과 싸 우다가 죽으면, 너희는 알아서 없어지겠지? 그리고 그들은 필사 적으로 독이 올라 그녀를 죽일 테고.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그녀는 죽는다. 그게 너희들의 계획 아닌가? 안그래?”
셋은 노하여 동시에 부르짖었다.
“헛소리!”
그때 박 신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오지 않는다. 너희의 계획은 다 드러났어.”
그러자 셋이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들이 오고 있어! 수십, 수백 명의 능력자들이 다! 너희는 절대 그녀를 지켜 내지 못해! 절대!”
박신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오지 않을 거다. 이미 사람들을 보냈어. 너희의 계획은 모두에게 알려질 거고, 아무도 그녀를 해치려고 하지 않을 거야…….”
무색 화상 일행은 비와 바람을 무릅쓰고 산중턱에까지 도달했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대열의 뒤편에 있던 사람이 외쳤다.
“누가 옵니다!”
몇 시간 전에 호되게 당하고 난 다음이라 모두가 무섭게 긴장했다. 무색 화상이 곧 소리친 사람에게 외쳤다.
“몇 사람이냐?”
“한 사람입니다!”
“여자인가?”
“아닙니다. 남자입니다.”
“그래 ・・・・・・ “”
무색 화상은 바이올렛이 아닌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그대로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남은 열네 나한 중 다시 네 명을 직접 거느리고 대열의 뒤편으로 갔다. 다가오는 사람은 무 색 화상에게 몹시 낯선 자였다. 비를 잔뜩 맞아 후줄근하지만 밝 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그 남자가 보이지도 않았지만 느낌으로도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유유히 다가와서 무색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들 하시오?”
무색 화상이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들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당신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무색 스님이시지요?”
“중국인이시군.”
“그렇습니다.”
“조금 아까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소. 그리고 왜 우리에게 온 것인지도.”
“당신들을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려고 왔습니다.”
그는 황달지 교수였다.
“너희들, 여긴 또 웬일이냐?”
비슷한 시각, 산속으로 접어드는 또 다른 산길의 중턱쯤에서 현현일로는 낯익은 사람을 만나 깜짝 놀랐다. 그들 앞에 불쑥 튀 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준호와 아라, 수아 세 아이들이었던 것이 다. 아이들은 폭풍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비를 홀딱 맞고 몸을 떨고 있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현현일로와 이로는 아녜스 수녀와 협상하기로 하고 도인들을 이끌고 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 다. 그런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미의 산맥에서 느닷없이 사 라졌던 세 아이들이 코앞에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일행에는 현현파와 오의파, 무련 비구니와 사천왕에 승현 화상까지 모두 있었는데 그들 중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더 가시면 안 돼요.”
준호가 공손히 인사를 한 다음 현현일로에게 말했다. 일로는 급한 성답게 대뜸 화부터 냈다.
“네 이놈! 너 준후란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지? 썩 그 녀석이 있는 곳을 대라!”
일로가 소리치자 아라가 나섰다.
“준후 오빠를 왜 찾으시는지 알아요. 오빠가 한빈 거사님을 해 쳤다고 생각하시죠? 그렇죠?”
“그렇다. 그러니 어서 그 녀석이 있는 곳을 썩 대란 말여.”
“준후 오빠는 그분을 해치지 않았어요! 그분은 천지공사를 실 패하여 기운이 쇠해지자, 시해법을 써서 원신을 내보내신 것뿐 이에요.”
“네가 어찌 아느냐?”
“준후 오빠에게서 직접 들었어요! 그때 그분의 시신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던 것은 기억하시죠? 사십 일이 지나면, 그분은 원신으로 환생해서 돌아오실 거라구요! 기다려 보면 알 거 아니 에요!”
“하지만 그분은 공격당한 흔적이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준후 녀석이 한 짓이었다!”
“그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
“일부러? 아니, 무엇을 위해서 일부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응?”
“전부를 이리 모이게 하기 위해서요! 지금 여기 얼마나 큰일 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아시죠? 그래서 ………… 준후 오빠는 자신 은 위험해지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게 하 려고 그런거라구요! 그런데 ・・・・・・ 그런데 아저씨들은…….. “
아라가 울먹이자 준호가 나서서 말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에요. 여러분은 가셔선 안돼요.”
“너는 만날 때마다 계속 그 이야기만 되풀이한다만, 말하려거든 증거를 대봐!”
그러자 준호가 말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그러면 납득하실 거예요.”
“꼬맹이들 이야기나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이번에는 수아가 앞으로 나서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못 가요. 이야기를 들어 줘요.”
그때 별안간 주변의 나무며 벼랑 같은 것들이 무섭게 자라나 서 그들 일행은 마치 독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물론 수아가 부리는 정령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현현일로는 단계가 높은 도인답게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 잡술 따위에 홀릴 내가 아녀. 수작 부리지 말어.”
그때 이로가 일로에게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형님, 아무래도 이 아이들도 무슨 내력이 있는 듯합니다. 뭐 몇 시간이 걸릴 것도 아니니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는 것도 나쁘 지 않다고 보는데요.”
승현 화상이 절룩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야기도 듣지 못할 만큼 급한 것은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 니 잠시만 짬을 내는 것이…………….”
승현 화상은 지난번 큰 부상으로 기절했으나 며칠이 지난 지금 은 어느 정도 운신을 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는 전부터 퇴마사 들과 준후에게 호의적인 편이라 이번에도 애써 주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도인들도 퇴마사들을 믿고 있었고, 전에 준호가 한 말과 지금 아라가 하는 말이 은근히 사리에 맞다고 여 겼기 때문에 아이들의 말을 들어 보려는 눈치였다. 시해법의 내 용 같을 것을 아라가 알 리가 없었으니 아무래도 아이들의 말에 신뢰가 갔다. 할 수 없다고 느낀 일로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 등을 돌렸다.
“빨리 혀! 헛소리는 하지 말구.”
먼저 이로가 물었다.
“누가 너희를 보냈느냐?”
“우리가 스스로 왔어요.”
“왜? 그리고 우리가 이리로 올 것이란 건 누가 가르쳐 줬지?”
그것을 알려준 것은 아하스 페르츠였다. 그는 성당 기사단과 프리메이슨, 장미 십자회에 걸친 방대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 기에 아녜스 수녀의 행동도 전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 나 그 말을 하기가 민망해서 준호가 잠시 머뭇거리자 수아가 나 서면서 영리하게 한마디 했다.
“어른들이 가르쳐 줬어요.”
다행히 이로는 이 부분에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냐? 그리고 너희를 어떻게 믿지?”
이번에는 아라가 무련 비구니를 보며 말을 건넸다.
“저기………… 예쁜 비구니 언니?”
무련 비구니가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아라는 뒤에 메고 있던 기다란 보따리를 꺼내어 그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걸 돌려드리랬어요. 그러면 증거가 될 거라고………….”
무련 비구니는 그것을 풀어 보지도 않고 손에 잡자마자 무엇 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예전에 현암에게 주었던 청홍검이었다.
“이걸…? 그렇다면 현암시주가?”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련 비구니는 일로와 이로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이 아이들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아저씨가 이걸 가지고 언니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랬어요. 그래도 되나요?”
무련 비구니는 당돌한 아라의 눈동자를 보고 쓸쓸한 듯 당혹한듯 한 번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우선 이야기부터 해 보겠니?”
준호는 긴장을 풀기 위해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시작했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한 이야기죠. 결론부 터 말씀드리자면, 여러분들은 더 가시면 안 돼요. 악마들의 함정 에 빠지게 되어요.”
비슷한 시각 시타 교수는 로파무드를 업은 채 또 다른 장소에 서 칼키파의 잔당들과 어새신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로 파무드는 아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의 식이 돌아와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바바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혔다.
“여러분들은 고반다에게 속았고, 악마에게 속았습니다. 악마 가 바라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징벌자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고반다가 칼키를 자처했 던 것은 그가 이 계획의 주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맨 처음,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이 나와서 세상에 떠돌게 되면서 말세의 비밀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점토판은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점토판은 가짜였다. 하지만 그 원본은 분명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진짜였어! 누가 그걸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자이나교도였다가 칼키파로 개종한 구레나룻을 기른 요기가 반론을 제기하자 로파무드가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조작할 수는 없겠지요. 인간 이라면 말이죠.’
“뭐?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수천 년을 살 수 없지만, 악마들은 가능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처음부터 존재해 왔어요. 그들은 오늘의 이때를 노리고 수천 년 전부터 인간에게 영향력을 끼쳐 이런 조 작을 해 왔던 겁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해밀튼이 하겐 일행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속에 우뚝 서 있는 해밀튼의 모습은 마 치 산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하겐과 파치 등은 아하스 페르츠와 직 접 싸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거부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해밀튼은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그들에게 설명했다.
“나도 속을 뻔했소. 수천 년을 존재해 왔으면서도 말이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음모가 진행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소.” “하지만 점토판이 가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소. 그러나 그 예언의 내용 때문에 알 수 있었소. 예언을 하는 자는 누구나 이런 문제에 부닥치게 되오. 즉,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변하는가에 대한 번민 말이 오. 이것은 누구도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요. 물론 사람들 개개인 은 각자의 소신대로 행동하면 그만이지만, 예언가들은 그럴 수 없소. 만약 미래가 결정지어진 것이라면 문제가 없으나 미래가 변동되는 것이라면 자신이 예언한 것 때문에 다시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결론적으로는 예언이 틀려질 수 있기 때문이오.”
“그건 납득할 수 있소.”
의외로 정규 교육 같은 것과는 아예 상관이 없어 보이는 파치 가 제일 먼저 말했다.
“그 때문에 예언은 지난 후에야 알아볼 수 있도록, 또는 아주 깊은 고찰 끝에야 풀어 볼 수 있도록 알아보기 어렵게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오. 노스트라다무스도 그랬고, 성서의 요한묵시록 도 그러하며, 그 외의 모든 예언서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무나 미리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지는 것이오. 굳이 말하자면 인연 이 있는 자에게만 전하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요?”
하겐이 묻자 해밀튼이 대답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은 그렇지 않았소. 너무도 분 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너무나 명확하게, 수천 년 후의 날짜 까지도 나와 있소. 이것은 거의 광고에 가깝소. 허나 그것이 몇 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이기에 지금의 우리는 놀라고도 두려워서, 그 예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 이게 바로 악마들의 주의 깊은 함정이오.”
“그러나 타보트 뒤편의 예언은요? 모세가 남겼다는 그 내용은…….”
“그것도 거짓이오.”
해밀튼이 딱 잘라 말하자 하겐이 소리쳤다.
“그건 거짓일 수 없소! 랍비 안나스는 좋은 자는 아니지만, 그 것에 일생을 걸었소. 절대 거짓일 수 없단 말이오!”
“거짓일 수 있소.”
그래도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하겐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면 타보트의 글귀가 위조된 것이란 말이오? 타보트는 신 성한 물건이오. 더욱이 그것을 직접 만지거나 접하는 자는 누구 나 죽는데, 누가 그것을 위조할 수 있겠소? 더구나 그것은 당신 의 손으로 봉인해 두지 않았소?”
“물론 그랬소. 그러나 그것을 봉인해 둔 자는 지금의 내가 아 닌 악한 아하스 페르츠였소. 나는 이중인격이었기 때문에 그것 을 알지 못했고, 타보트의 행방을 추적해 내는 데 수백 년의 세 월을 보냈소.”
“그러면 그 글귀를 위조한 것은 당신이오?”
“그건 아니오. 악한 아하스 페르츠는 죽고 싶지 않아 했소. 그러니 타보트를 악숨에서 발견하자마자 그것을 깊숙이 감추고 믿을 만한 부하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만들어서 그의 또 다른 분신 인 나조차도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지. 악한 아하스 페르츠는 그 것을 결코 열어 보지 않았소.”
“그러면?”
“고반다가 한 짓이오.”
“고반다가?”
“그렇소. 생각해 보시오. 나, 과거의 아하스 페르츠는 비록 악 마들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들의 부하는 아니었소. 무엇보다 도 악마들이 나를 믿을 수 없었을 거요. 아하스 페르츠는 강하기 는 했지만, 변덕스러울 뿐 아니라 자주 지금의 나, 해밀튼의 인 격으로 돌아오곤 했소. 그러니 내가 맡은 역할은 타보트를 깊숙 이 봉인하는 것 정도였을 거요.
그러다 타보트를 공개할 시기가 되자 악마들은 고반다를 부추 겨 타보트를 훔쳐 내게 한 거요. 아하스 페르츠도, 고반다도 같 은 악마의 수하에 있었는데도 굳이 그런 도둑질을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소. 그리고 물론 그런 사실이 나 해밀튼의 귀에 들어 오게 한 것도, 그래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만든 것도 그들의 계략이었소. 그렇게 하면 타보트가 세상에 다시 나왔다는 소문 이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거지?”
오의파의 성곤이 신음 소리를 내며 묻자 준호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건・・・・・・ 그러니까 이래요. 일단 타보트가 세상에 알려지는 건 악마들 입장에서는 꼭 필요해요. 그래야 그 뒤에 있는 글귀를 읽을 테고, 그것을 믿을 테니까요.”
“하지만 고반다는 주술 막을 치고 그것을 지키려 하지 않았나?”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고반다는 그것을 순순히 신부님에 게 내주었어요. 이미 위조는 끝났으니까요.”
“고반다는 어떻게 타보트를 만질 수 있었을까?”
“고반다가 한 게 아니라 부하들을 시킨 거겠죠.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혹은 고반다의 오라가 성스러운 것이라 타보트로 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아니면 수많은 부하들 의 희생을 치르면서 조금씩 새겼거나, 무슨 기계를 사용했을 수 도 있고요.”
“하지만 의문점이 있어.”
현현파의 근호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타보트는 지금껏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어 떻게 안나스는 그 전설을 들은거지?”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수천 년 전부터 꾸며진 음모예요. 그 런 소문이 퍼지게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죠. 그 소문이나, 모세의 무덤에 남았다는 기록도 악마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조작해 둔 것이라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죠.”
“그렇다면 악마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무색 화상이 신음하듯 말끝을 흐리자 황달지 교수는 마치 강 의라도 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설명했다.
“물론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우리들이 말세를 열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믿고, 그 아이를 죽이게 되면 정말로 그 징벌이 내려지는 거죠.”
“그렇다면 악마들은 왜 직접 그 아기를 죽이지 않는 거요?”
“그것은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아마도 세상의 법칙에 그 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마들이 직접 나타나면 우리보다 훨 씬 강력하죠. 그러니 그들이 만약 직접 나타나 손을 쓴다면 세상 은 벌써 오래전에 망하거나 지옥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직접 적으로 손을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군요. 그 리고 거기에도 한계가 있고요. 즉, 악마도 어느 정도 인간을 해 칠 수는 있지만, 세상일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 도록 극도로 통제받는다고나 할까요?”
“그러면 왜 하필 지금 이때에 이런 일을 벌이는 거죠?”
제사나한이 탄식하듯 묻자 황 교수가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천기의 운행에서 지금이야말로 틈이 드러나는 때일 수도 있고, 인간의 죄악과 도덕의 타락이 이런 일 이 벌어지기 알맞을 정도로 무르익었는지도 모르죠. 사실 모든 사람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전쟁, 핵무기, 환경오염, 도덕적 타락, 불 임, 생태계 파괴, 복합적인 지구의 노쇠 ・・・・・・ . 어느 것 하나 세상 이 망한다는 위협을 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위 기지요. 그건 맞습니다만…………….”
로파무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 유가의 종말기*, 무르익어 썩어 가는 인간 세상, 그 모든 것이 말세와 가장 합당한 때이므로 그렇게 믿기 쉽습니다. 더구 나 과학 문명을 맹신하고 정신을 등한시하는 지금의 시대에 예 언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뇌리에 파고들기 쉽습니다. 종교도 우 스워지고 과학도 인간을 배신했고 도덕도 땅에 떨어져서 믿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대야말로 수천 년 전의 메시지는 공포감을 주기에 족합니다.
자,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물론 바이올렛은 용서받을 수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기도 죄가 있나요? 그 아기를 악마의 자식, 세상을 망하게 할 자라고 몰아붙여 그 아기를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나요? 세상 그 어디에 있나요?”
* 힌두교에서는 세상을 나누는 단위로 유가(Yuga)를 사용하며, 이는 힌두교의 우주론에 기초한 세계기다. 유가는 네 시기로 구분되는데 각각 크리타(Krita), 트레타(Treta), 드와파라(Dwapara), 칼리(Kali)로 구성된다. 그 전후에는 각 유 가의 십분의 일에 해당되는 휴가기간이 들어 있다.
크리타 유가는 정의의 시기로 사람들은 도덕적이며 세상은 평온 그 자체이다. 트 레타 유가는 정의가 약해져서 의무가 생기고 희생의 제례가 나타난다. 드와파라 유가는 정의가 확실히 쇠퇴하여 불균형이 증대하며 리그베다』 같은 가르침이 등장하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당한다. 마지막 칼리 유가는 오늘날의 암흑기로 인간 세상은 반목, 불화, 전쟁, 쟁의로 갈기갈기 찢어지며 사랑과 섹스 가 분리되고 진실을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정의가 아니라 부(富)가 지위를 가져 다주며 외적인 가식과 내적인 종교가 혼돈된다. 일설에 의하면 칼리 유가는 기원 전 3102년에 시작되어 앞으로 427세기 동안 계속되지만, 인간의 시대는 언제든 끝장날 수 있다.
해밀튼이 말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놓아둡시다. 악마들은 그것을 바 라고 있소.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을 자극하고, 마치 그들이 징벌 자를 힘을 다해 지키려는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소. 그러나 그것 은 모두 거짓이오. 그것에 홀려서 순수한 아기를 죽이면, 그런 아이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들면 그야말로 신의 분노가 징벌이 떨어질 것이오.”
황달지 교수가 말했다.
“이제껏 행해진 가장 큰 죄악들은 대부분 세상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행해졌소. 그런 과오를 범하지 맙시다. 그냥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놓아둡시다.”
로파무드와 시타 교수가 함께 말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준호와 아라도 입을 모아 말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수아도 조그만 소리로 덧붙였다.
“아기를 해치지 마세요. 아기는 죄가 없어요.”
“연극은 여기까지다. 블랙 엔젤, 그리고 아스타로트. 너희 는…………… 너희는 실패했어. 수천 년 동안 꾸며 온 계략도 이제는 끝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세 명의 여자들이 느닷없이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그리고 안개처럼 몸이 헝클어져 가다가 한데 엉겨 뭉쳤다. 잠시 후 세 명이 서 있던 자리에 여섯 장의 검은 날개를 지닌 악 마 블랙 엔젤이 서 있었다.
“너희 정말 대단하구나……………. 결국・・・・・・ 결국 그녀는 죽이지 않을 거야?”
박 신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돌연 블랙 엔젤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박신부는 조용히 서 있다가 블랙 엔젤에게 말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미혹시켜 온 악마, 더 이상은 속지 않는다. 너희는 졌어.”
“지금 내가 너희를 모두 죽이면?”
그 말에 박 신부는 차분히 말했다.
“우리가 너를 당해 내지 못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 너 는 절대로 아기를 죽일 수 없어. 아기는 아직 아무런 죄도 인과 도 없기 때문이지.”
블랙 엔젤의 날개 끝이 파르르 떨렸다. 박 신부는 그 모습을 보며 태연히 덧붙였다.
“네 마음을 나에게 보인 것이 실수였다. 너는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에게 징벌자를 해치라는 암시를 주려 한 것이겠지만, 세크 메트의 눈은 네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강했어.”
블랙 엔젤이 날카롭게 외쳤다.
“내 계획을 눈치 챘어?”
“그건 아니지만, 네가 불안해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바로……………우리 때문에 말이다.”
“흥!”
코웃음을 치는 블랙 엔젤을 보며 현암이 나섰다.
“너는 왜 고집을 부렸지? 너는 그녀를 우리 손으로 죽이게 하기 위해 갖은 모험을 했어.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꼬리가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 말야.”
현암이 정확하게 지적했지만, 예상외로 블랙 엔젤은 태연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너희 손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지. 그리고……………그리고…………….”
블랙 엔젤은 갑자기 현암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놈을 파멸시키고 싶었어. 저놈 손으로 가장 큰 죄악을 짓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잠시 말을 끊고 블랙 엔젤이 미소를 지었다.
“…… 잘 안 되네. 그래도 뭐,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니까. 여전히 나는 이길 수 있어. 너희는 필요 이상으로 인간들의 마음 을 선하다고 믿는데, 정말 그럴까? 너희가 보낸 사람들이 과연 모두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들이 과연 전부 마음을 돌려 그녀를 죽이지 않으려고 할까?”
“그때는 우리가 막는다.”
“아, 그런 식으로 죽여 달라고 하는 거야? 세련되지 못하게.”
그때 승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너는 백호 씨를 죽게 했어! 그리고 윌리엄스 신부 님도! 이반 교수님도! 모두 네가 해친 것이나 마찬가지야! 결 코ᆞᆞᆞᆞᆞᆞ 결코 너에게 지지는 않아!”
박 신부는 오라 막을 부풀어 올렸고 준후는 만부원진을 펼쳤으며 현암은 공력을 끌어올렸다. 블랙 엔젤도 막 힘을 뿜어내려 고 하는 찰나, 돌연 손을 멈추었다. 연희가 부축하던 승희의 손 을 뿌리치고 일어나 퇴마사들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너……?”
연희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단호한 표정이 어려 있 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블랙 엔젤은 그녀의 얼 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순식간에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블랙 엔젤은 사라졌지만 악마가 남긴 말 은 주위를 메아리치며 계속 떠돌았다.
“기억해 둬. 나는 지지 않아. 너희가 이기는 것이 우리의 패배 를 의미한다고 생각해? 승패란 건 우리에겐 아무 의미도 없어. 그냥 너희가 고통받으면 즐거울 뿐이야. 너희는 아직도 우릴 몰 라. 더구나・・・・・・ 너희는 여전히 내가 계획한 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알았어?”
준후는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현암과 박 신부는 블랙 엔젤과 한판을 치러야 할 것이라 는 각오만 했을 뿐, 연희가 그 앞에 나설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 했다. 그리고 블랙 엔젤이 단지 연희가 앞을 막아선 것만으로 사 라져 버린 것도 뜻밖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준후가 묻자 현암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연희 씨가 라미드 우프닉스이기 때문에 블랙 엔젤이 해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악마가 직접 라미드 우프닉스를 해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준후가 말했다.
“난 불안해요. 아무래도………… 내가 죽었어야…………….”
그러자 현암이 나직하게 되받았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때 연희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행은 약간 놀랐지만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도 연희의 행동 에서 방해하지 못할 기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연희는 커다랗게 쌓여 있는 돌무더기 중 한 개의 돌을 손가락 으로 가리켰다. 현암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다른 돌무더기에 는 이끼가 잔뜩 얽혀 있었지만 그 돌만은 누군가가 손을 댄 듯한 흔적이 역력했다.
현암은 돌을 잡고 밀고 당겨 보았으나 돌은 전혀 움직이지 않 았다. 최후로 힘을 써서 돌을 옆으로 돌리자 갑자기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돌무더기의 한 켠이 교묘하게 열리면서 입구가 드 러났다.
“놀랍군요, 연희 씨.”
현암이 무심코 말하자 연희는 입구 쪽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연희의 행동이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녀를 따르는 수밖 에 없었다. 입구로 들어서면서 준후가 박 신부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이 잘해 줄까요?”
“글쎄다………….”
솔직히 박 신부는 자신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실패한다면 퇴 마사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들은 겨우 네 명인데다 부상이 심한 상태라서 그들 중 한 무리도 당해 내기 어려운 것만 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 신부는 최소한 다른 사람들 을 마지막 위험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