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9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12 :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깨달음
“잠깐 멈추시오!”
정신없이 뒤엉켜 싸우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들려온 커다란 호 통에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 소리에는 사람을 위압하는 기운이 가득 실려 있어서 현현이로나 어새신의 하산조차도 손을 멈추 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하스 페르츠, 즉 해밀 튼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하겐과 파치, 그리고 거대한 덩치 의 한 남자가 작고 땅딸막한 여자를 안고 서 있었는데, 그는 성난큰곰이었다.
“아?”
황달지 교수와 로파무드 등은 성난큰곰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을 더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참혹 할 정도로 흙투성이가 된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이올렛 이었다.
“모두들 멈추시오! 당신들은 모두 속았소!”
해밀튼이 다시 한번 크게 호통을 쳤다. 성난큰곰의 품에 안긴 바이올렛이 가늘고 힘없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모두 아녜스 수녀를 잡아요. 그녀…………… 그녀야말로…….”
“뭐요?”
“무슨 소리요?”
칼키파와 용화교, 어새신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그녀를 바 라보았다. 그들은 이 뚱뚱하고 작은 노파가 아녜스 수녀에게 이 장소를 알려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녀 가 만신창이의 몰골로 나타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녀가 품에 꼭 안고 있는 물건이었다. 타보트 상자였다. 진흙투성이였지만 바이올렛이 손 으로 문질러 닦았는지 안의 타보트는 똑똑히 보였다.
“이걸・・・・・・ 보세요……………. 타보트의 글씨는 위조된 것…………. 아녜스 수녀가 모두를 속이고…………….”
아녜스 수녀는 주술로 라파엘 주교와 직속 사제들을 죽였을 때 타보트 상자도 박살 나 버렸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타보 트는 성물답게 무엇인가 힘이 있었던 듯, 그 지독한 폭발 속에서 도망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녜스 수녀에 밀려 헬기에 서 거꾸로 떨어진 바이올렛은 몸의 뼈가 온통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죽을힘을 다해 그 장소로 기어 가서 타보트 상자를 찾아냈다.
그곳은 아녜스 수녀의 힘에 의해 큰 구덩이로 변해 있었고, 비 때문에 수렁이 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 진흙 구덩이로 굴러 들어가 온 힘을 다해 타보트 상자를 건져냈다.
그리고 타보트의 뒷면의 글자가 새로 새겨진 것을 보고는 후 회의 눈물을 흘렸지만 탈진하여 진흙탕에 빠져 죽어 갔다. 그런 그녀를 급히 구한 사람이 있었다.
아녜스 수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라파엘 주교가 죽을 때 의 혼란을 틈타 성난큰곰이 도망쳐 근방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가브리엘 수사가 놓아준 것이지만……………. 성난큰곰도 갇 혀 있다가 도망쳤기 때문에 타보트가 그곳에 버려진 채로 있다 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헬기에서 바이올렛이 산 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 또한 극히 중상을 입은 터였지만 간신히 달려와 일단 바이올렛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죽어 가는 것을 건져 낸 것이다. 때마침 하겐과 파치 등을 제압하고 달려온 해밀튼이 그들을 발견했다. 해밀튼은 하겐에게서 아녜스 수녀의 반응을 듣고, 아 녜스 수녀가 일을 저지를 것 같아 그녀가 간 코스를 추적해서 따 라오다가 두 사람을 구한 것이다. 해밀튼은 바이올렛이 아녜스 수녀가 모두를 속인 증거인 타보트를 얻은 사실을 알고 하겐과 파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급히 이곳으로 달려온 것 이다.
“그들은・・・・・・ 그들은…………… 이제 안전한가요?”
바이올렛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으나 애타게 그 말만을 되풀 이했다. 성난큰곰은 이미 아녜스 수녀가 완전무장한 부하들을 데리고 그들을 쫓아 떠났다는 것을 듣고는 아연해 있었다. 그러 나 마지막까지 눈을 감지 못하는 바이올렛에게 차마 그런 사실 을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는 바이올렛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럴 거요.”
“정말요? 아…………. 그럼 ………… 그럼 됐어요. 직접 만나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 내 죄가 정말 큰데…………….”
바이올렛의 의식이 꺼질 듯하자 성난큰곰은 급히 말했다.
“당신이 아니어도 악마는 누군가를 이용했을 거요. 자책할 것 없소. 당신은 속절없이 싸우다 죽을 뻔한 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친구들에게 쓰인 오해를 풀어 주었소. 당신은……………. 어서 정신차리시오! 어서!”
“아………… 아…………. 그러고 싶은데 ・・・・・・ 미안하다고…… 말하 고 싶은데……………. 미안해요……………, 미안……………..”
그 말을 끝으로 바이올렛은 스르르 숨을 거두었다. 입심 좋고 떠들기만 잘해서 골칫덩어리였던 바이올렛이었지만, 그녀가 숨 을 거두자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성난큰곰은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한참이나 지르고 난 다음에야 눈물을 거두었고, 황달지 교수도 그녀와 아웅다웅하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무튼 진상이 밝혀지고 상황을 깨닫고 나자 모든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도인들은 속은 것보다도 준호와 아라 같은 아 이들의 생명을 속절없이 내맡기게 된 것이 억울하여 발을 굴렀 고, 용화교의 신도들은 무색 화상이 아녜스 수녀를 위해 자결까 지한 것을 억울해했다. 다른 파벌 사람들의 놀라움과 부끄러움 과 분노 또한 그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녜스 수녀는 벌써 오래전에 그들만을 남겨둔 채 자 신의 부하들만 이끌고 떠난 후였다. 과연 그들을 지금 추적한다 고 잡을 수 있을까? 아녜스 수녀의 행동을 막을 수 있을까? 그때 는 이미 현암 등을 향해 총탄을 내뿜은 후였지만 비가 심하게 퍼붓고 바람 소리가 거세서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 은 마음 급하게 분주히 움직일 뿐이었다. 해밀튼은 개탄했다.
“당신들은…… 모두・・・・・・ 모두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오. 엎 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오! 그들은 그런 와중에도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세상을 지키려 했고,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당신들까 지 구하려고 했소. 더구나 지금은……………. 아무튼 모두 기도라도 하 시오! 이제 세상의 운명이 그들에게 달렸소! 그들이 아녜스 수녀 를 막아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끝장이오!”
곁에 있던 파치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먼저 움직입시다! 늦었어도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밀튼은 급히 사람들에게 지시했 다. 지구상에 살아 있는 인간들 중 그보다 나이 많고 그보다 강 한자는 없었으므로 모두가 그의 지시에 따랐다.
“용화교도들은 아기들의 영혼에게 잡혀간 아이들을 찾으시오. 그리고 어새신은 북동쪽, 칼키파는 남동쪽, 그리고 한국 도인분 들과 하겐 씨 일행은 나를 따라 정동쪽을 수색하십시다. 어서 빨 리 아녜스 수녀가 바이올렛을 해치는 것을 막아야 하고, 박 신부 일행을 구해야 합니다.”
“너무 늦었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겐이 묻자 해밀튼은 무섭게 되받아쳤다.
“만약 늦었다면, 세상은 끝나겠지.”
“어떻게 망하게 될까요? 솔직히 나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간단하오. 우리가 지금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망할 거요. 틀림없소. 꼭 지금 당장 망하지는 않더라도 종말의 시계는 돌아 가는 거요. 그건・・・・・・ 그건 생각하지 맙시다……………..”
그러다가 해밀튼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이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소! 우리는 더 서둘러야 하오!”
“무슨 말입니까?”
“안 되겠소! 나 먼저 가겠소! 하겐 씨, 당신들이 인솔하시오!” 그러고는 해밀튼은 무서운 속도로 비바람 속을 뚫고 달려갔 다. 그의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왜?’
지금 아녜스 수녀의 무리들도 문제였지만, 더더욱 무서운 자 들이 있었다. 악마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해밀튼은 과거 악 마와도 손을 잡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느낄 수 있었다.
‘멍청이, 왜 그 생각을 못했는가? 악마가 직접 운명을 바꿀 수 는 없다 할지라도, 인간에 쓰인 하수인들을 시킨다면 적어도 박 신부 일행은 해치울 수도 있다. 아스타로트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전에도 놈들은 그들을 노렸는데……………. 지금 여기 와 있을 게 분명하다! 만약 박 신부 일행이 쓰러지면 아무도 앞서 간 아녜스 수녀 일행을 막을 수 없다. 아니, 악마들은 또 다른 하수인을 시켜서 바이올렛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그것만은……………!’
해밀튼은 무서운 속도로 정글을 달려갔지만 아무래도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