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20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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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5권 20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13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박 신부와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준후에게서 현암의 일을 전해 듣고 박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급히 고통을 호소하며 몸부림치는 바이올렛을 준후에게 업게 하 고 달려 나갔을 뿐이었다.

준후는 박 신부의 얼굴이 마치 송장처럼 핏기가 없어지고 안 경 테두리가 뿌옇게 흐려진 것을 보았다. 빗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는 준후 자신도 도저히 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현암 형은 죽었을 거야. 승희 누나도…………

생각하면 할수록 견디기 어렵고 미칠 것 같았다. 준후는 달리 면서 마구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으나 기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더구나 등에 업힌 바이올렛의 몸속 아기는 계속 미칠 것 같은 어두운 느낌으로 준후의 마음을 찔러 댔다.

차라리 죽어버려. 죽어! 모두 죽어 버려!

‘이런 악마 때문에………… 연희 누나도…. 승희 누나도, 현암형도………… 희생되었다는 건가? 응?’

준후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등에 업힌 바이올렛 을 내팽개치고 배를 짓밟아 곤죽을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 고는 스스로 폭탄이 되어 터져 나가 버리고 싶었다. ‘탄’ 자결의 천 배의 위력으로, 아니 천억 배의 위력으로 이 쓸모없는 세상, 저주받은 세상과 함께.

별안간 뒤에서 박 신부가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기이하게 그 소리는 요란한 비와 바람 소리를 뚫고 준후에게 똑똑히 들려왔다.

“준후야, 잠시만 멈추렴.”

준후는 미칠 것 같았지만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박 신부는 조용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준후에게 말했다. 

“네 기분은 알겠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렴.”

준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 신부는 조용히 성호를 긋더니 다 시 말을 이었다.

“너와 나는 종교가 다르고, 믿는 바, 생각하는 바도 다르지. 그 러나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다. 너는 너 나름대로 해도 좋단다.” 

그리고 박 신부는 조용히 짧은 기도문을 읊었다. 거창한 기도 문이 아니라, 가톨릭 교인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영광송이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주 짧은 기도였지만 준후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라앉았다. 특히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 었다. 현암이 들었더라면 이 구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다는 기분이 까닭 모르게 들었다.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 로 그 구절을 따라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조급해하면 안 된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그들은 처음에 출발 했을 때도 보상을 바라거나 고생을 마다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오로지 옳은 일만을 하려 했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옳은 일. 그 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돌아보지 않고 외길만을 달려왔다. 그 리고 수아나 준후 등을 통해 미래의 일까지 배려하려 해 왔다. 그러한 박 신부의 생애가 이 기도문 한 구절에 그대로 드러나 있 었다.

‘신부님은 그걸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준후는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상을 구한다는 자만에 자꾸 휩쓸리고, 근본을 잊고 자꾸만 다른 쪽 으로 생각이 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준후의 표정이 많이 풀어지자 박 신부는 조용히 다시 한번 성 호를 긋고는 미소를 지었다. 박 신부는 눈도 뜨지 않았고, 준후 쪽으로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모든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박신부가 천천히 일어서며 준후에게 말했다.

“현암 군이 ・・・・・・ 그리고 승희가……………. 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지?”

준후가 들은 그대로 말하면서도 마음이 조급하여 뒤를 돌아보 자박신부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현암 군을 믿는다. 아녜스 수녀는 절대 금방 우리 뒤를 쫓지 못할 거야.”

준후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현암이 했던 이야기를 전하자 박 신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준후가 마지막으로 승희 가 남긴 신부님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자 박 신부의 어깨가 가 늘게 떨렸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박신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현암 군이 잊은 모양이구나. 전에 현암 군이, 너에게 하고 싶다던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게 뭐죠?”

“너는 항상 네 수명에 대해 이야기했지? 현암 군은 그걸 믿지 않는다 했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고 현암 군은 항상 주 장했다. 그리고 네가 언제까지나 그런 생각을 하면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다고, 네가 스스로 과감하게 운명의 굴레를 깨야 한다고 말했어.”

준후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지만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박신부가 조용히 일어나서 말을 이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란다. 준후야, 그걸 잊지 마라.”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준후야, 어서 가렴.”

“예?”

준후가 놀라서 박 신부를 바라보자, 박 신부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또 다른 손님들이 있단다. 내가 맞아야 할 것 같구나. 그러니 어서………….”

준후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 변에서 오싹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기분 나쁘고 악의에 찬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웅웅 하는 기분 나쁜 울림도 느껴졌다. 준후는 그런 느낌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가 뒤에 남던 그때 느꼈 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신부님! 이건……!”

박 신부는 기도를 마치고 바이올렛을 업은 준후를 돌아보았 다. 그의 얼굴은 극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미소가 감돌 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폭우에 박 신부의 거의 백발이 된 머리칼 이 뒤헝클어졌고 흠뻑 젖은 옷 때문에 그의 모습은 몹시 처연하 고도 비장해 보였다.

“여길 피하거라.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마 너는 저들 을 대적할 수 없다. 저들은 거의 완전한 악마야. 저들에게는 나 같은 성직자가 제일 적합하단다.”

준후가 울부짖듯 외쳤다.

“그럴 순 없어요! 신부님! 돌아가시면 …………….”

“왜 그러는 거냐? 누가 죽는다는 거지?”

박신부는 애써 웃어 보였다.

“여기서 버틴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어서 가거라. 시간이 없으니…………….”

“하지만………! 하지만…………! 현암 형도 갔고 승희 누나도…………!”

“그들도 죽지는 않았을 거다. 왜 너는 자꾸 불길한 소리를 하 는거냐?”

“하지만 승희 누나가…………… 나한테 신부님을…………… 신부님을 부 탁했는데…………!”

준후는 거의 악을 쓰다시피 했다. 박 신부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다. 저들은 나를 어쩌지 못해.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아기가 태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일 은 모두 제대로 될 거다.”

“아니에요! 속이지 마세요!”

준후는 엉엉 목을 놓아 울었다.

“모두 나를 두고 가 버리는 건가요? 모두 죽었어요! 모두 죽었 어! 이제는…………… 이제는 신부님밖에 남지 않았는데…………! 신부 님밖에는……………. 차라리 내가 죽을래요! 내가!”

준후는 처절하게 울다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질 듯 주저앉 아버렸다. 준후의 등에서는 산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거의 혼 수상태가 된 바이올렛이 준후의 어깨를 움켜쥐고 쥐어뜯었으나 준후는 느끼지도 못했다.

다시 박 신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준후야, 믿음을 가져라. 왜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냐? 아직 수아가 있고 아라가 있고 준호가 있다. 그 아이들을 네가 아니면 누가 이끌고 돌본단 말이냐?”

“난・・・・・・ 난 할수 없어요!”

“너는 할 수 있다. 아니, 네가 해야만 해!”

“이 꼴을 또 당하려고 그 아이들을 가르친단 말인가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있어야 한다. 그 아이들은 자질이 충분하고, 너 아니면 가르칠 수가 없단다.”

“나도 못해요! 나는…………… 나는…….”

준후는 자신의 생명이 이제는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방금 박 신부에게서 현암이 전했다는 이야기 를 들은 터라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뒤에서 웅웅 하는 기분 나쁜 울림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러자 박 신부는 황급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네 어깨에 짐을 하나 더 얹고 있는 거다. 준후야, 우리가 이제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애써 왔지? 준후야. 현암 군을 비롯해서 승희도, 연희도, 백호 씨도, 윌리엄 스 신부님도 이반 교수님도…………… 그리고 나도・・・・・・ 모두가 남은 사람을 믿고, 남은 사람에게 미래를 맡긴 덕분에 홀가분하게 상 대를 맞을 수 있었던 거다. 그 짐을, 제발 벗어 던지려 하지 말아 다오……………..

준후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더욱 크게 엉엉 울었다. 그때 준후 의 등에 업힌 바이올렛이 다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박 신부가 다시 외쳤다.

“어서! 급하다! 준후야, 솔직히 지금 내 다리로는 그 여자를 업고 걸을 수 없단 말이다. 어서 가라. 어서!”

준후는 마침내 박 신부의 호령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 고는 울음이 섞여서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목소리로 박 신부에게 울부짖었다.

“약속해줘요! 죽지 않겠다고요!”

박신부가 즉시 외쳤다.

“약속하마! 죽지 않겠다. 되었느냐?”

웅웅 하는 소리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산비탈을 뒤흔들 정도 가 되었다. 준후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겨 가파른 산 위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박 신부가 준후의 등에 대고 외쳤다.

“더 빨리! 더 빨리 가거라!”

준후는 점차 힘을 내어 힐기보법의 기운을 써 달렸다. 준후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이 되었다가 사라져 가자 박 신부는 조용히 슬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마음만은 죽지 않을 거다. 준후야…………….”

‘준후가 잘해 주겠지. 이제는 아이들의 시대가 될 거야. 나는 물러날 때가 되었어. 이미 오래전에 ……………..’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박 신부는 몸을 돌렸다. 산 아래쪽의 비 탈에서 들려오던 웅웅 하는 소리는 어느덧 사라졌지만, 그 대신 수많은 기괴한 형상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아스타로트가 불 러낸, 반은 사람이고 반은 악마인 것들이 분명했다. 그들 중에는 늑대 인간도 있는 것 같았고 좀비 같은 것들도, 이반 교수를 해 친 노스페라투 비슷한 흡혈귀도 끼어 있을 터였다. 그 숫자는 거 의 헤아릴 수조차 없어서 산비탈이 까맣게 메워지는 것 같았다.

박신부는 다리가 아파서 서 있을 기운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애당초 이겨 낼 자신은 별로 없었으니 까. 박 신부는 다리가 불편해져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으면서 오라 막을 펼쳤다.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제 후회는 없다.”

박 신부는 그 빛나는 분과의 만남을 다시 떠올렸다. 그분은 박 신부에게 말했다. 자신을 대신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돌 아와 다시 한번 수난을 받아야 할 거라고…………….

‘준후는 믿을 수 있어. 준후는 잘해 낼 거야.’

박 신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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