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7화 – 보이지 않는 적 1 : 초라한 첫 퇴마행
초라한 첫 퇴마행
“우리가 싸울 때 뭘 제일 조심해야 하는 줄 아나?”
말없이 운전을 하던 박 신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옆자리의 현암에 게 말했다.
현암은 가만히 박 신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인간 아닌 존재들이 많으니까 영적인 문제나 그런……………..”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인내심일세.”
“인내심요?”
“그래, 인내심.”
현암이 갸웃하자 박 신부가 설명했다.
“현암 자네, 사람들하고 싸워 본 경험이 꽤 있겠지?”
현암은 살짝 웃었다.
“제가 공력이 있다고 아무하고나 싸우는 건 아닌데요.”
“다른 뜻이 있어서 물은 것이 아니니 그냥 있는 대로 대답해 보게.”
“뭐, 솔직히 공력 생기기 전에도 싸운 일이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공력을 얻은 뒤로는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
현암이 머리를 긁적이자 박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 보통 싸움을 말한 걸세. 그때 싸움이 보통 얼마나 걸리든가?”
“뭐, 글쎄요. 지금의 저는 내력이 받쳐 주니 거의 지치지 않습니다만 보통 사람들이야 일이 분도 싸우기 어렵죠.”
“맞네. 그래서 인내심이 중요한 걸세.”
“체력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상대하는 적들은 체력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 보통이거 든. 하지만 사람은 지치지. 직접 타격을 입는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지치니, 인내심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거야.”
“그렇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박신부가 현암을 걱정해서 한 말이리라.
“걱정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남에 비해 인내심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이번에는 자네와 함께 가기로 한 거야. 믿음직하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상대가 그렇게 강합니까?”
현암이 넌지시 묻자 박 신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글쎄, 뭐라고 할까, 나도 아직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게.”
“예. 알겠습니다.”
현암이 열의를 불태우자 박 신부가 그게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말하는 인내심은 다른 뜻도 있어.”
“뭔데요?”
“가급적 힘을 발휘할 때 차분하라는 뜻도 포함해 한 말일세. 자네의 힘은 내가 보기에도 두려울 정도니까.”
“그런 말씀하시면 쑥스러운데요. 전 신부님의 능력이야말로………….”
“피차 낯부끄러운 말은 그만하세.”
박신부가 말을 자르자 머쓱해진 현암이 말했다.
“저는 퇴마사로서 첫 퇴마행을 나가는 셈인가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 퇴마라는 말………… 내가 만든 거지만 자네가 말하니 새삼스럽네.”
“쑥스러우십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나쁘지는 않군. 허허허.”
박신부가 긴장을 풀려는 듯 가볍게 말하자 현암도 웃었다.
“뭐 저도 왔다 갔다 하는 놈들을 몇 번 건드린 적은 있습니다만 이 렇게 신부님처럼 정식으로 계획을 짜고 움직인 적은 없습니다. 그런 데 신부님 혼자서 그런 걸 조사하고 다니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 사람아. 나도 몸은 하나야.”
“그러면 어디서 정보를 얻으십니까?”
“글쎄. 뭐, 여기저기지.”
박 신부는 잠시 운전에 집중하다가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 은근히 나와 인연을 맺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
“박신부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가요?”
현암이 캐묻자 박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아, 자네에게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해 놓고 이런 말 하면 우습긴 하네만……”
“아닙니다. 믿을 만한 분들이라면 도움을 많이 받을수록 좋겠지요.”
“뭐 도움이라고 해 봐야 특별한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지. 거의 보 통 사람들, 친구, 지인이야. 그래도 주변에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겼다 정도는 알려 주는 편이지.”
“그래서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있는 거군요. 좋은 일입니다.”
박 신부는 가볍게 웃었다.
“좋은 일은 무슨. 난 위험한 일에 자네를 끌고 다니는 거야. 월급 도 안 주고 말야.”
“어차피 전 취직 같은 거 할 성격이 못 됩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마운걸요.”
“고맙다는 말 좀 하지 말라니까. 언젠가 마음이 바뀌어서 이 사기 꾼아!’ 하고 멱살이나 잡지 말라고. 난 자네의 공력이 정말 무서우니 까.”
“원, 신부님도 참. 제가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현암은 조금 웃다가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해 주십시오. 상대가 무척 강한가 보죠? 제 힘이 필요한 정도라면…………….”
그러자 박 신부는 살짝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현암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박 신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냐. 찾지 못할 가능성도 높고, 찾더라도 엄청나게 약할걸, 아마?”
현암은 조금 실망스러워서 말했다.
“네? 아니 왜 그러면 굳이………”
“현암 군. 서두르지 말게. 자네의 능력이 엄청난 건 알지만 뭐든지 섣불리 단정하다가는 큰코다쳐. 경험도 없이 성급하게 뛰어들어서 는 안 돼. 하나하나 확실히 짚어 보기 위해서 우선 쉬운 상대부터 찾 는 거야.”
“쉬운 상대부터 찾는다고요? 그러면 어려운 상대도 있습니까?”
“이 사람아. 영적인 일로 사고가 벌어지는 게 그렇게 흔한 줄 알 아? 그렇게 영혼의 순리가 엉망이면 벌써 세상 망했게?”
“그래도 일이 벌어지긴 하잖습니까.”
“벌어지긴 하지. 그러나 세상에 영향을 줄 만큼 큰일은 잘 벌어지 지 않아. 작은 일들조차 상당히 드물고, 하지만 쉬운 상대건 어려운 상대건 어쨌든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으면 찾아가 봐야지. 그래야하지 않겠나?”
“그렇죠.”
현암이 수긍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별것 아닌 느낌이니 자네 연습 삼아 몸도 풀겸, 그리고 자네하고 나하고 손발도 맞추어 볼 겸 같이 나가자고 한 거 “야.”
“그런 겁니까? 하지만 방심하고 섣불리 단정하면 큰코다친다고 말씀하신 건 신부님이셨는데요?”
“허허. 그랬던가? 내가 한 방 먹었군.”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하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판잣집들이 다닥다 닥 붙어 있는데도 묘하게 인적이 뜸한, 어느 가난해 보이는 산비탈 위의 판자촌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군.”
박 신부가 비탈길에 위태위태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던 현암이 박 신부에게 말했다.
“차 엔진, 손 좀 봐야겠는데요?”
“자네 운전할 줄 아나?”
“예, 할 줄 압니다. 차는 없지만요.”
“다음에는 그럼 운전, 아니 주차만이라도 부탁함세. 나는 주차하 기가 힘들어. 이런 좁은 언덕길에선 더하고. 나이가 먹어서 말이지.”
“정정하신 분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체구도 건장하시고………….”
“아, 그런 소리 말게. 많이 늙었어.”
박신부가 잡담처럼 말하며 앞장서서 걷자 현암은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판자촌에서도 가장 후미진 꼭대기에 위치한, 정말 금방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초라한 집이었다. 물론 실제로 몇 군데 는 무너져 있기도 했다. 거기다 여기저기 심하게 칠이 벗겨지고 훼 손되어 글자 그대로 당장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한때는 꽤나 좋은 집이었던 것처럼 널찍하고 건물의 토대는 단단해 보였다. 박 신부가 그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현암 이 물었다.
“여기 맞습니까?”
박신부는 끄덕이며 문 앞으로 갔다. 잔뜩 녹슨 철문이었는데 오른 편 구석으로는 똑같이 녹이 심하게 슨 작은 쪽문도 달려 있었다. 문 왼편 위의 담벼락에는 동사무소에서 붙인 번지수 표식이 있었다.
“여기가 맞는 것 같군. 어디 보자, 번지수가・・・・・・ 음, 맞네.”
박 신부가 다가가 문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가느다란 실금처럼 우 편물 투입구가 있을 뿐 초인종조차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박신 부는 문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계십니까?”
안에서 대답이 없자 박 신부는 몇 번 더 문을 두드리다가 바로 옆 에 보이는 녹슨 쪽문을 슬쩍 밀어 보았다. 잠겨 있지 않은 듯 문이 스 르륵 열리자 박 신부는 조금 비척거리더니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 어섰다. 현암도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집 안에서 요란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박 신부가 금방 뒷걸음질로 나왔다. 박 신부 의 눈에 다소 공포의 빛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현암은 긴장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생뚱맞게 말했다.
“개가 있어.”
현암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네?”
“이봐, 현암 군. 안에 개가 있다고.”
“그래서요?”
현암이 이해하지 못해서 되묻자 박 신부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 안에 개가 있단 말야. 목줄도 안 매 놨어. 그리고 송아지만큼 커.”
그러면서 박 신부는 방금 닫은 쪽문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꽉 쥐었 다. 혹시라도 개가 문을 밀치고 뛰쳐나올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신부님. 개가 무서우세요?”
“아니, 그럼 자넨 안 무서운가?”
현암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닥해 보이고는 서슴없이 쪽문 안으로 들어섰다. 현암이 들어가서 보니 과연 개가 있었다. 그 런데 송아지만큼 크지는 않았다. 어지간한 크기의 누렁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어 댈 뿐이었다.
현암은 생각했다.
‘송아지만 하다더니 이건 원……. 신부님, 은근히 담이 작으시네………….’
현암은 요란하게 짖어 대는 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살 짝, 아주 조금의 공력을 몸에 돌렸다. 겉으로 특이한 변화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물이라 보이지 않는 힘의 차이를 더 민감하게 느꼈는지 개는 갑자기 ‘깽’ 하고 꼬리를 말며 구석으로 재빨리 도망 갔다. 도망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개집에 틀어박혀 낑낑거리며 반쯤 죽는 소리를 냈다. 당분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것 같았다. 현암이 박 신부를 부르려 뒤돌아 나오려는데 어느새 박 신부가 쪽문 뒤에서 얼굴만 내민 채 말했다.
“자네 혹시・・・・・・ 개 때렸나?”
현암은 부끄러워서 얼른 쪽문 밖으로 나와 박 신부에게 따졌다.
“아니, 무슨 말씀을! 왜 남의 개를 때려요? 제가 그럴 인간 같아 보이세요?”
“그런데 개가 왜 저래?”
“모르겠어요. 제가 무서운가 보죠.”
현암이 씩 웃자 박 신부는 조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현암도 박 신부를 마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신부님은 개가 무서우세요?”
“그・・・・・・ 그런 건 아니고・・・・・・ . “”
“몸에서 기도력인지 오라인지를 뿜어내는 분이?”
“무섭다기보다는…… 그게…… 남의 개를 어쩌난 말야. 개도 생명이 있고, 주인을 섬기는 반려 동물인데 어찌…….”
“그래서 무섭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라니까. 내 오라와 기도력이 개 겁주라고 있는 겐가.”
“아니, 그럼 제 공력은요?”
박신부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그냥, 어렸을 때 개에 심하게 물린 적이 있거든.”
현암에게 짓궂게 놀리려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박신부의 인간적인 면이 재미있어서 계속 물고 늘어졌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왜 굳이 둘러대시려고………….”
박 신부는 대답하지 않고 딴전을 피웠다.
“자자. 그만. 이제 방해물도 사라졌으니 들어가 보세나.”
현암은 웃는 표정으로 말없이 박 신부의 뒤를 따랐다.
“계십니까?”
박신부가 안쪽의 문을 톡톡 쳤는데도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흠.”
박신부가 실망스러운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현암이 말했다.
“집주인 이름을 불러 보죠?”
박 신부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예?”
“여기 누가 사는지 나도 모른다고.”
“그러면 여기 왜 오신 겁니까?”
“여기서 뭔가 느껴져서 봐뒀다가 찾아온 거지, 주인이 청해서 온 건 아니거든.”
“그・・・・・・ 그러면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뭐, 글쎄.”
박 신부는 다시 한번 아쉬운 듯이 문을 조금 더 세게 툭툭 두들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그러자 안에서 심술궂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째지듯 울려 나왔다.
“아무도 없어!!!”
분명 소리친 사람이 있으니 아무도 없을 리는 없다. 당혹스러웠지 만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 신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여기 주인분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만.”
“없다구!”
이제는 확실히 구별할 수 있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지고 쨍쨍한 것 이 늙은 노파의 목소리였다. 박 신부는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할머님께 말씀 좀 여쭤 봐도 되겠 습니까? 별건 아니고…….”
“아, 볼일 없다니깐 왜 귀찮게 하고 지랄이야!”
고함과 동시에 문 바로 위쪽에서 뭔가가 휙 날아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박 신부나 현암을 노리고 날린 것이지만 맞진 않았다. 날아 든 그것은 마당에 떨어지자마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깨졌다. 보통 그릇 같았는데 부엌에서 집어 던진 것 같았다. 그릇 조각이 튄 것도 아니고 직접 맞은 것도 아니지만 대번에 물건을 집어 던질 만 큼 노파의 성질이 드세다는 점이 두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현 암이 슬며시 박 신부에게 말했다.
“무서운 할머니네요. 우리 그만・・・・・・ 그만 가죠?”
“아냐, 아냐. 현암군, 이런 정도로 물러나면 어찌…..”
박 신부가 버텨 보려는데 안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문에 맞을 뻔했다. 박 신부가 움찔하면서 피하는데 문을 열고 누가 나왔 다. 나온 것은 목소리에서 예상한 것처럼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 머 리는 하얗게 세고 허리도 꼬부라진 노파였다. 몹시 늙은데다 눈빛도 흐리고 이빨이 다 빠져 합죽이가 되었지만 앙다문 입술이 옴팡하여 심술궂기 이를 데 없었다. 동화에서 나온 마귀할멈 같아 보였다. 내 로라하는 현암과 박 신부 모두 은근히 두려움에 떨었다. 죽음의 공 포 같은 것은 아니지만 망신당할지 모른다’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 이었다.
“거 왜 자꾸 귀찮게 하고 지랄들이여!!!! 조막만 한 것들이! 뭐 찾 아 먹을 게 있다구 얼씬거려? 그리고・・・・・・ 어라?”
노파가 박 신부를 향해 곱지 않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 박 신부는 종교를 신봉하는 몸이라 자신의 전투복이라 할 수 있는 사제복을 입 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목사 새끼가 와서 지랄이여!!”
이러다가는 박 신부의 정체성 근본이 흔들릴 것 같아 현암이 큰 용 기를 내어 말했다.
“저・・・・・・ 할머님・・・・・・ 이분은 목사가 아니라 가톨릭 사제십니다. 신부님・・・・・・ “
“신부우? 이 망할 것들이 늙은이를 희롱해! 내가 새색시처럼 보이냐?”
이제 보니 귀까지 먹은 것 같았다. 현암은 더욱 당황했다.
“아…… 아니, 저희는 그런 말씀을 드리려 한 게 아니…………….”
“이 우라질 것들이 늙은이 혼자 산다고 얕보는거여?”
노파가 외치면서 짚고 있는 지팡이를 협박하듯 휘둘러 보이자 박 신부와 현암은 아차 싶어서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런 지팡이에 맞 을 현암은 아니지만 한없이 무서웠다. 거의 울상이 되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신부님! 그냥 가요!”
하지만 박 신부는 피하기는 했으되 경험자답게 물러서지 않고 자 못 당당히 버티며 물었다.
“할머님, 요즘 이상한 일 겪지 않으셨어요?”
“에라이. 약팔러 왔냐. 어린놈의 새끼가!”
박 신부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은데도 노파는 서슴없이 막말과 욕 을 해대며 지팡이를 휘둘러 댔다. 물론 박 신부도 맞지는 않았지만 노파의 퍼런 서슬에 주눅 든 것 같았다. 하지만 박 신부는 그래도 물 러서지 않았다.
“할머님. 저희 정말로 뭘 팔거나 요구하러 온 것 아닙니다.”
“난・・・・・・ 난 교회 같은 데 안 나가!!!!”
뒤에서 현암이 말했다.
“저・・・・・・ 교회가 아니라 성당…..”
그러자 이번에는 박 신부가 현암의 말을 반박했다.
“가톨릭에서는 성당도 교회라고 하네. 교회라고 굳이 구분 지어 말하는 것은 개신교 사람들…………..”
지팡이에도 맞아 주지 않자 노파는 노인 특유의 필살기를 사용했다.
“어이구, 이…… 이놈들이 완전히 불한당들이여……………! 늙으면 죽어야지!”
“저, 할머님. 고정하시고 제발 이야기를 좀………….”
“늙은이 혼자 사는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이 무슨 행패야, 행패가! 응?”
노파가 지팡이를 휘둘러 대는데, 보는 현암은 기가 막혔다. 이쪽은 좋은 말로 묻고만 있는데 행패를 부리는 것은 노파가 아니던가? 현 암은 속으로 절규했다.
‘인내심, 인내심 하시더니 이런 걸 말하신 건가? 아이구야, 내가 미쳐.’
그런데 노파가 지팡이를 휘두르는데도 박 신부는 슬쩍 현암에게 말했다.
“현암군, 잠시 부탁하네.”
“예에?”
현암이 너무도 놀라서 눈을 치떴다. 차라리 지옥의 악마나 거대한 괴물과 혼자 맞서라고 했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박신부는 한 술 더 떠서 현암을 슬쩍 밀어 노파의 앞에 던져 놓고는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현암은 어이가 없어서 멍하게 서 있는데 노 파는 계속 악을 쓰며 지팡이를 휘둘러 댔다.
“아이고, 이놈들아. 이놈들 보게나. 아이고, 늙은이 잡네.”
“할머니, 지금 저희가 아니라 할머님이 우릴 잡는…… 어이쿠.”
노파가 휘두른 지팡이 끝에 맞을 뻔한 현암은 쩔쩔맸다. 한마디로 미칠 지경이다.
판자촌을 뒤로 하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현암의 볼은 퉁퉁 부어 있었다. 맞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노파가 지팡이를 휘둘러 댔어도, 현암 정도 되는 사람이 그것에 맞을 일은 없다. 불만스러워
서 그런 것이다.
“신부님・・・・・・ “
“응? 왜 그러나, 현암 군.”
“다・・・・・・ 된 겁니까?”
“웅・・・・・・ 글쎄, 다 되었다기보다는……”
“일 다 못 보셨습니까?”
“내일 한번 더 와야지.”
차분하게 말하려 애쓰던 현암은 입을 딱 벌렸다.
“예?! 또 온다구요?”
“음, 글쎄, 그래야 될 것 같은데?”
“신부님 도대체 뭐 하셨어요?”
현암이 불만스럽게 말하자 박 신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응? 그냥 집 안을 한번 둘러봤네. 직접 들어가면 할머니가 더 싫 어하실 것 같아서, 뒤뜰 창문으로 집 안에 뭐가 있나 둘러본 정도?”
“저를 그 지팡이 앞에 던져 놓으시고요?”
“원, 자네가 그런 정도에 맞을 사람은 아니잖나. 공력이 있잖나, 공력.”
박신부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자 현암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어, 알지, 알아. 수고했어. 현암 군.”
그러나 여전히 볼이 부은 현암은 박 신부에게 말했다.
“이게 제 첫 퇴마행이었나요?”
“응? 그・・・・・・ 그런가? 흠. 그렇다면 그런 셈이지.”
현암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첫 퇴마행에서 참패했네요.”
“참패라니?”
“할머니에게도 졌는데요. 아주 참패, 완패죠. 절대로 이길 수가 없잖아요.”
“할머님이 상대도 아니었는데 꼭 졌다고 말할 건……. 아니, 애당 초승부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잖나. 자네가 앤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현암은 아니지만 기분이 너무도 침울했다. “퇴마행이라. 마를 물리친다고 했는데, 제가 오늘 뭘 물리쳤죠?” 현암이 은근히 비꼬듯 말하자 박 신부는 딱 잘라 말했다.
“심마(魔).”
“심마요?”
“그래, 간단히 말해서 자네의 망상을 깨뜨렸지 않는가.”
심마란 마음속에 있는 번민, 번뇌, 마귀를 의미한다. 그런 뜻을 모를 리 없는 현암이 멈칫하자 박 신부가 계속 말했다.
“퇴마행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큰 것을 상대할 줄 알았지? 은근히 기대도 했지 않은가?”
“솔직히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서 실망했나?”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너무…….”
박신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퇴마행이 특별한 게 아닐세. 백 번을 뒤지면 아흔아홉 번은 이래. 정말 연관이 있는 걸 찾아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지. 그러니 망상이 라는 심마를 물리친 것으로 첫 퇴마행의 위안을 삼게. 그러면 되지 않겠나.”
박 신부는 좋게 풀어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만족할 수 없었다.
“신부님, 그런데 어쩝니까. 신부님의 뜻, 잘 알겠는데도 자꾸 왜 제 귀에는 신부님의 핑계로 들릴까요?”
“으흠.”
박신부는 조금 무안한지 헛기침만 하며 고개를 돌렸다. 현암은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도 내일 가야 합니까?”
그러나 박 신부는 딱 잘라 말했다.
“가야 돼!”
현암이 실망에 빠져 물먹은 빨래처럼 방으로 돌아오자 심심했는
지현암의 방에서 기다리던 준후가 현암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현암 형, 어땠어요?”
현암은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심해 자리에 털썩 누우며 말했다.
“말 시키지 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 없는 준후는 눈을 빛내며 달라붙어 재잘댔다.
“현암 형! 다음번엔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현암은 피곤한 듯 말했다.
“준후야……”
“왜요?”
“넌 그냥 집에 있어. 정말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현암은 진심으로 말한 것인데 준후가 오해했다.
“그렇게 지칠 정도로 힘든 상대였으면서! 나도 도울 수 있다고요!”
현암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망신스러운 경험을 언급하기도 싫어서 평상시의 솔직함을 잠시 마음 깊이 밀어 넣고 적 당히 둘러댔다.
“상대할 만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약하지 않단다.”
그러자 준후는 더욱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나 혼자 심심하단 말이에요.”
“심심하다고 나가는 게 아니야. 퇴마행이니까.”
말은 엄숙하게 했지만 현암 스스로도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 너한테 할머니 지팡이 상대를 시킬까? 에휴. 이런 꼬마까지 끌어들이느니 내가 당하는 게 낫지.’
“나도 잘할 수 있다고요. 원래 이런 일…….”
“퇴마.”
현암이 정정해 주자 준후는 금방 바꿔 말했다.
“아, 그랬죠. 퇴마. 이런 퇴마 일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고요. 다들 나보고 신동이라고 했거든요?”
현암은 눈을 감고 돌아누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렇지. 너 신동이지, 맞아.”
“그럼요.”
“주술 말고라도 준후 너는 머리도 좋아. 그렇지?”
“네. 좀 부끄럽지만 그건 사실………..”
준후는 얼굴까지 붉히는데 현암은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니 공부나 해.”
준후는 단번에 토라졌다.
“흥! 학교도 안 보내 주면서!”
준후가 화를 내자 현암은 천천히 말했다.
“조금 더 세상에 적응되고 나면 학교 보내지 말라고 해도 보낼 거 다. 그러니 기다리고・・・・・・ 세상 공부나 하라니까? 하, 오늘 정말 피 곤하네.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
현암은 정말 슬픈 기분으로 한 말인데 준후는 또 오해했다. 호기심 이 드는 모양이었다.
“현암 형. 굉장한 걸 만난 거예요?”
현암은 부끄러워 이불 속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웅, 아주 굉장했어. 너무 무시무시해서 견디기도 힘들더구만. 그러니 그만해라. 나 피곤하다.”
현암은 속으로 (박 신부 눈에만 송아지만 했던) 개 한 마리와 지팡이를 휘두르던 할머니를 생각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