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19화 – 생령 살인
“어서 오십시오.”
책상에 앉아 있는 백호가 정중하면서 엄하게 말했다. 막 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선 남자는 건들거리며 물었다.
“당신이 백호요?”
“그렇습니다.”
“이 방 번호가 100호실이던데…..”
“그렇습니다.”
“그래서 백호라 불리는 거요? 아니면……………”
그러자 백호는 웃으며 입에 물고 있는 빈 담배를 옆으로 능숙하게 돌리며 말했다.
“제 이름이 궁금하신가 보군요. 이름은 호우라고 합니다.”
백호가 자신이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살짝 건드려 보였다. ‘검사 백호우’라는 글자를 본 남자는 피식 웃었다.
“본명과 별명에 직책이 한 덩어리시네? 재미있군. 이렇게 젊은 나이에 높은 검사시고.”
남자가 말하자 백호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웃었다. 그리고 미소를 거두며 손짓으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켜 보았다. 남자는 역시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태연히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나 같은 사람은 왜 찾은 겁니까?”
백호는 조용하지만 빈틈없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상준 씨 맞으시죠?”
“그렇소.”
“보통 주기 선생이라고 불리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거 누구한테 들었소?”
상준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지금은 평범한 옷차림이다. 아니 어떻 게 보면 보통 사람보다 조금 튀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눈 에도 값비싸 보이는 황색 가죽점퍼를 입고, 신고 있는 구두나 하의 역시 돈깨나 들었을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조화가 잘 되지 않고, 간판처럼 명품을 두른 것 같아 미묘하게 속물스럽게 느 껴진다. 보통 사람과 다른 면이 있다면 코 밑은 깨끗하게 정리하고 턱 밑에만 기른 특이한 수염뿐, 그 외에는 조금도 특이한 기색이 느 껴지지 않는 평범한 얼굴이다. 백호는 그런 감상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탁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저는 잘 모릅니다만 십이지번이던가 요? 그런 주술을 사용하실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만…………….”
“허허, 그런 대체 누구한테 들었어? 나 평범한 사람이라니까?”
“이현암 씨 아시죠?”
백호의 말에 시치미를 떼던 상준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인상을 굳혔다.
“이현암? 그 자식이 나에 대해 말했소?”
그러자 백호가 말했다.
“조금도 거리끼실 것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준 씨가 무슨 일 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 을 섣불리 퍼뜨릴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으니까요. 안심하시기 바 랍니다.”
“아니, 그래도 여긴・・・・・・ 검사실 아니오? 혹시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게…….”
어딘가 모르게 꺼리는 듯한 눈빛이 느껴져 백호는 속으로 쓴웃음 을 지었다. 항상 당당하고 흔들림이 없던 현암의 눈동자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현암을 비롯한 퇴마사들은 일견 평범해 보이면서도 속 세의 때가 묻지 않았었다. 현실 세계에서 온 것 같지 않은 당당함과 떳떳한 기운이 느껴지는 데 비해 상준이라 불리는 남자는 오히려 어 둠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직업의 특성상 범죄자나 그 비슷한 사 람을 수도 없이 겪어 온 백호다. 오히려 상준의 이런 태도와 눈빛은 백호에게 쉽게 읽혔다.
백호는 생각했다.
‘현암 씨가 추천할 정도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하물며 그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 사람을 한번 믿어보는 수밖에. 특히 이 사건의 경우는……..
백호가 생각하자 상준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하쇼. 날 취조하겠다는 거요? 뭔가 청하는 게 있는 거요?”
상준이 말하자 백호는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참 단순한 사람이군. 오히려 이편이 편할지도…………..!’
백호는 차분하게 상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조금도 꺼리실 게 없습니다. 물론 꺼리실 바야 없으실 테지만요.”
상준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백호는 차분하게 책상 한편에 밀쳐놓은 서류철을 들어 상준에게 내밀며 말했다.
“한번 보시죠.”
“이게 뭔데요?”
상준이 묻자 백호가 대답했다.
“제가 요청하려는 일에 대한 서류들입니다.”
상준은 머뭇거리다가 파일을 받으며 말했다.
“현암 그 친구가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는데, 나 비쌉니다.”
백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의 일인데도 말입니까?”
“아, 그런 건 나는 모르고. 나랏일이면 당신 같은 공무원이 알아서 해야지. 왜 나 같은 사람한테 청하는 거요?”
“그럴 만한 특수한 상황이 있으니까 그런 거죠.”
“어쨌든 다시 말하겠소. 난 비싸.”
백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와 주시는 게 오히려 편합니다. 상준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는 이상 이쪽도 나름대로 각오는 하고 있으니 말이죠.”
“뭐, 나랏일이라니까 비싸게 부를 건 아니고. 그래도 말이오, 나도 살아야 되잖수. 주술 익히는 게 어떤 건지 당신들은 아쇼?”
“됐으니까 파일이나 보시죠.”
백호는 다소 차갑게 말했다. 상준은 내심 불만스러워져서 속으로 투덜댔다.
‘또 현암, 그 자식이야? 이런 제기랄. 여기서도 현암, 저기서도 현 암・・・・・・ . 도대체 내가 그놈하고 비교해서 뭐가 모자라는데! 왜 다들….’
부아가 치밀었으나 그래도 공식적으로 검사에게 일을 의뢰받는 것은 상준에게는 뿌듯한 일이다. 상준은 파일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늙수그레하고 눈빛이 음흉해 보이는, 반쯤 머리가 벗겨진 초로의 남자 사진이었 다. 상준은 그것을 보자마자 허! 소리를 내며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파일을 덮었다.
“이거・・・・・・ 최 교주 아니오?”
백호는 상준을 다소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람을 아십니까?”
“글쎄,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쪽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대충 알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제 말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그러니까 당신들이 주술 내지는 영능력이라 말하는…….”
“아, 주술 그런 거 아니고 이 사람은 그냥 괴물이오.”
“괴물요?”
“그렇소. 배워서 익힌 게 아니라 그냥 타고났으니 괴물이라 할 수 밖에. 왜 그런 거 있잖소. 초능력자 비슷한 거 아닐까 하고 우리 쪽에 서는 생각하고 있다오. 그런데 이 사람을 왜………….”
“서류를 좀 더 검토해 주시길 바랍니다만.”
“아, 나 이런 거 읽는 거 싫어하니까 그냥 말로 하쇼. 이 사람 원래 좀 안 좋다고 소문나긴 했는데 어째서 검찰까지 관심을 보이는지 모 르겠어서 말이오.”
“이 사람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아십니까?”
“그냥 소문으로 들은 거지 특별히 친한 것 아니라니까. 나 이런 부 류하고 어울리는 사람 아니오. 그래도 난 도가 쪽 정통 수련한 사람 이라고.”
“아시는 것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내가 최 교주라고 하는 걸 들으면 감이 안오슈?”
“상준 씨의 입을 통해 듣고 싶군요.”
백호가 날카롭게 말하자 상준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벌써 딱 들으면 감이 오잖소. 교주잖아, 교주, 교주라고 호칭할 정도니 당연히 사이비 종파의 우두머리인데, 말 더 할 필요 있나. 무 슨 교인들 등쳐 먹은 사건 조사하려고 하는 거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죽었나?”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가볍게 말씀하시는군요.”
“아, 세상에 죽어 나가는 놈들이 한둘인가 새삼스럽게…….”
여전히 건들거리는 태도를 보이며 몇 장을 심드렁하게 넘기던 상 준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살인?”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준은 눈썹을 다소 꿈틀거리며 말했다. “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독했구먼. 죽여도 이렇게 잔인하게……………. 응? 그런데 이게 뭐야? 무죄?”
상준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백호는 차분히 말했다.
“네. 벌써 몇 년 지난 사건입니다. 무죄 방면되었지요.”
“허이구, 웃기는구먼? 사람이 죽었고, 목격자도 많은데 무죄 방면되었다고?”
백호는 조용히 말했다.
“살인하는 장면을 본 목격자도 많지만 같은 시간에 그 사람이 다 른 장소에 있는 것을 본 목격자 또한 많습니다. 아랫부분에 적혀 있 을 텐데요.”
“아, 그런가. 허 이것 참 골치 아픈 일이었군그래.”
백호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증명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 사람이 쌍둥이였거나 다른 사람이 가장을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양쪽 다 본인이 틀림없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법체계에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은……”
상준이 말을 대신 받았다.
“무죄 방면될 수밖에 없었다 이거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사건을 왜 다시 파헤치려고 하는 거요? 일사부 재리의 원칙이라면 알고 있지 않소. 한 번 무죄로 끝나면 더 이상 다 룰 수 없을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동원하는 겁니다. 최 교주 의 살인 자체도 문제지만 법적 처벌을 적용할 수 없도록 능력을 이 용해 일을 저지른 것, 나아가서는 또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게 더 마 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해결하고 싶고요.”
“흠, 말은 그래도 법이 무시당한 것 같아 속 아픈 것 같은데?”
상준이 간단하게 짚어 내자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만.”
그러자 상준은 엉뚱하게 말했다.
“그 담배, 그렇게 물고만 지내오?”
“아, 연기 싫어하신다면 걱정 마십시오. 불은 붙이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상준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알지. 책상 위에 재떨이도 라이터도 없거든. 방에 담배 태 우는 냄새도 전혀 안 배어 있고.”
껄렁거리는 첫인상에 비해 생각보다 상준의 눈썰미가 날카로운 것 같다 생각하며 백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준은 다시 말했다.
“뭔 사연이 있소?”
백호는 조금 차갑게 말했다.
“궁금합니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사건에 집중하시죠.”
“아아, 알겠소. 더 말 안 해도 됩니다. 내가 괜한 걸 물은 것 같네. 미안허우.”
“천만에요.”
은근히 자신의 눈썰미를 과시한 상준은 파일로 눈을 돌리다 그것 을 책상 위에 툭 던지며 말했다.
“음. 이거 소문보다 더 대단하긴 한 모양인데・・・・・・ . 이게 무슨 속 임수나 마술 같은 트릭을 쓴 건 아니었소?”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입 끝에 물린 담배가 계속 조금씩 까딱거렸다.
“그런 증거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둘로 나뉘어졌 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 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인정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알겠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요.”
“상준 씨는 혹시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그러자 아까의 건들거리는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상준은 자못 냉 랭하고 빈틈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글쎄, 이게 사실이라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만약 이게 주술 이거나 타고난 어떤 능력이라면, 괴물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인 데……………. 아, 아까 내가 말한 괴물이라는 의미 말고 진짜 괴물 말이 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괴물 말이지.”
“추측되는 게 있으십니까?”
“뭐, 아직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소만, 이거, 소문으로 듣던 최교주의 능력하고는 너무 차이가 있어서.”
“짚이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한번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겠소. 우선 사람이 둘로 나뉘어 뭔가 한다는 건,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해요. 아무리 주술이니 뭐니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거요. 분신술은 질량 보존의 법 칙에도 위배되고 생명 자체의 원리에도 어긋나지. 둘로 나뉘는 건 어떻게든 가능은 한데, 그게 나중에 도로 합쳐진다는 게 말이 안 되 거든. 분신이라도 나눠져 행동하면 생명이 되는 셈이니까. 제아무리 주술이어도 그런 대원칙까지 무시할 수는 없거든.”
“그렇다면?”
“뭐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말이오. 둘 중의 하나는 허깨비였던 거 지. 말인즉슨, 본인이 움직이면서 뭔가의 주술적인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과 꼭 닮은 어떤 형체를 가시화했다 보는 게 맞겠지. 아마 한쪽 은 무게가 없었을 거요. 하지만 흉기를 휘둘러 사람을 해치려면 질 량을 가진 쪽이 움직이는 게 맞을 테니까, 직접 사람을 죽인 쪽이 최 교주 본인이고 나머지는………… 그러니까 뭐랄까, 생령(生)이라고 봐야 되겠군.”
“생령・・・・・・요?”
백호는 생소한 단어가 나오자 상준에게 물었다. 그러자 상준은 처 음과는 전혀 다른 빈틈없는 눈빛으로 백호를 보며 설명했다. 설명도 아까 건들거리는 말투가 섞였으되 전혀 다르게 꽉 짜여 있는 느낌이었다.
“생령이라는 건, 일단 임시로 내가 붙인 말이오. 그런 용어가 쓰이기도 하지만 최 교주의 경우는 일반적인 의미에 해당되지는 않은 듯 하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대충 아시겠지. 현암 일당과도 아는 사이니까.”
“퇴마사들 말이군요.”
“홍, 그냥 현암 일당이지. 퇴마사는 무슨 얼어죽을. 퇴마사가 어디 있어?”
“글쎄요. 근자에는 많이 쓰이곤 합니다만…….”
“아아, 그건 됐고. 영혼이라는 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 령처럼 단순한 게 아니오. 조선 시대에는 영혼이라는 말을 쓰지 않 고 혼백이라 했지. 왜 옛날 표현을 보면 혼백이 흩날리네 어쩌네 하 는 표현이 많지 않소.”
“그렇군요. 듣고 보니.”
“옛날 조선 시대 학자들, 그러니까 정도전이나 이익 같은 사람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혼과 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소. 혼은 위 로 올라가 하늘에 이르고 백은 땅에 남아 지상에서 얻었던 것들을 돌려주며 동화된다고 하지. 서양에서 말하는 영혼관보다는 한 단계 발전된 이론인 셈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묘를 쓰거나 사람을 안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지.”
“그쪽이 진실이라고 믿으십니까?”
상준은 코웃음을 쳤다.
“거, 진실은 누구도 모르지. 다만 그렇게 추측할 뿐이오. 이건 진실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뭘 선택하는가의 문제요. 믿건안 믿건 어떻게 보면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알 듯 모를 듯하군요.”
“어쨌든 됐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최 교주가 만들 어 낸 뭐랄까, 분신이라고 할까…………. 이건 아무래도 생령 계열인 것 같소. 보통 분신이라고 하는 건……..”
“전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상준은 말하는 도중에 백호가 끼어든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 을 표시했다.
“아, 그러니 막 설명하려던 참이지 않소. 흔히들 말하는 분신은 영 화 같은 데서 상상하여 마구잡이로 보여 주지만, 실제 주술로 그런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오. 아까 설명했잖소. 보통은 상대 의 심리나 감각을 공격해서 허상을 보이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실 제로 몸을 나누는 능력은 극히 드물지. 최 교주의 경우 환각이나 그 런 것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아까 말한 혼백 중 백을 이용해 자신의 뭔가를 만들어 낸 거요. 원래 자기 몸에 있는 백은 죽으면서 흩어지 게 되어 있는데, 살아 있는 채로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 닐까 나는 생각하오. 그걸 생백이라고 하긴 좀 그러니 생령이라 하 는 거지.”
“그러니까, 생령을 이용해 살인을 한 게 아니라 생령을 이용해 알 리바이를 만들고 직접 살인을 했다는 말이군요.”
“뭐, 나는 그렇게 보고 있소만.”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들거리는 모습을 봤을 때는 영 미덥지않았는데 의외로 상준의 논리는 정연했고 지적 수준도 결코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백호는 약간의 불신을 가졌던 처음과는 달리 상준을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좋습니다. 단번에 답답했던 것을 해결해 주시니 신뢰가 가는군요.”
상준은 비웃듯 대답했다.
“내 말을 믿는 거요?”
“믿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멋대로 떠든 거라면?”
“글쎄요. 그렇다면 할 수 없겠지만 상준 씨는 그렇게 헐거운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백호가 말하자 상준은 슬쩍 웃었는데 항상 자신만만하다 못해 건 달 같아 보이던 상준의 얼굴에 비감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 주 짧은 순간이었고 순식간에 건들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온 상준은 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뭘 해 주길 바라는 거요?”
백호가 말했다.
“최소한 증거나 증언 확보 조금 더 나아가서 체포까지 해 주시기바랍니다. 증인은…… 이 경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니.”
“어, 체포? 나 경찰 아닌데.”
“어떻게든 잡아서 데리고 와 주시면 그 후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뭐, 상준 씨에게 직권을 부여해 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날 공무원으로 채용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냥 형식상으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백호는 말을 하다가 일순 멈추었다. 처음 보기와는 다르게 신뢰도 가고 믿음직스러워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고 생각해서였다. 지금 백호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 팀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런 보이지 않는 능력은 국가에 핵무 기를 능가하는 힘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구상을 처음 보는 상준에게 섣불리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일단은 두고 보기로 하고, 백호는 그 선에서 말을 멈춘 것이다. 상 준은 거기까지 눈치채지는 못했으나 상관없다 생각하고 말했다.
“나는 방법이 좀 거친데…………. 다칠 수도 있소. 괜찮겠소?”
“체포만 할 수 있다면 어지간한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했지만 나는 좀 비쌉니다.”
“어느 정도를 원하십니까?”
“글쎄, 이것 참. 낯부끄러워서 이야기하기도 뭐하고.”
“대강이라도 말씀해 보시죠.”
상준은 오른손을 쳐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오천.”
백호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움직여 주시는 것치고는 너무 많군요.”
“최 교주가 괴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더군다나 그거 아시나?”
“뭘 말입니까?”
“아까도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이 사람 교주요 교주, 이 자식 능력을 보고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신도가 몇천 명은 안 돼도 몇십명, 혹은 몇백 명은 될지 몰라요. 이걸 뚫고 들어가서 최 교주를 닦달하는 데 이 정도는 헐값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이번엔 백호가 담배를 빙글 돌리며 상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박상준 씨, 희망 복지원, 정릉 양로원, 마리아 고아원…………. 잘 아시는 이름이겠죠?”
“내 뒷조사 했소?”
“결코 악의는 아니었습니다. 뒷조사라고 할 건 아니지만, 그냥 상 준 씨에 대해 궁금해서 알아본 것에 불과하니 화내지 않으셨으면 좋 겠습니다. 이 단체들에 꾸준히 기부를 하고 계시더군요.”
“뭐,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어차피 상준 씨는 세금 신고를 하거나, 소득 신고를 하는 입장도 아니시니 저희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제한적인 방법밖에 없 었죠. 그런데 여기 기부액으로 대강 추산해서 상준 씨가 제시할 금 액을 예측했습니다만…….”
백호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생각 외로 크게 부르시네요…………….?”
상준은 화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내 나름대로 그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부른 거요. 그럼 뭐요? 그만큼 벌면 기부도 더 했어야 된다는 거요?”
상준의 어조가 다소 거칠어지자 백호는 아니라는 듯 정색을 했다.
“아닙니다. 그건 개인의 자유죠. 그냥 저희가 멋대로 생각한 것이 니 화내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거, 나랏일 하면서 쫀쫀하게 구는 거 아니오. 어차피 당신 돈도아니고 나랏돈인데…………….”
“나랏돈이니까 더 확실하게 해야죠. 사실…………….”
백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정도면 제 이 년 치 판공비에 해당됩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제가 어떻게든 털어 넣어야 할 지경이죠.”
“뭐, 그거야 당신 사정이고, 100호실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메울 수 있지 않소?”
“검찰 조직이라는 것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
백호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또 실언할 뻔했습니다. 상준 씨는 제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시 는 걸로 해 둡시다. 당연히 비밀로 해 두시고………….”
“뭐, 그러겠소. 설마 100호실까지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중에 딴소리하진 않겠지. 나도 이 정도 되는 일이라면 목숨 걸고 하는 거 란 말이오.”
백호는 의혹이 섞인 듯한 눈으로 상준을 바라보았다.
“전에 듣기로는 현암 씨와도 겨뤄 본 경험이 있다던데요? 강화도에서.”
“아, 그 이야긴 하지도 마요. 짜증 나니까. 죽을 뻔하고 돈만 날리고, 다시 말 꺼내지 마쇼. 알았소?”
백호는 그럼에도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암 씨와 맞상대할 정도라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일반인 들은 얼마든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요. 보통 사람은 위험할지 몰라도 상준 씨 입장에서는 양 떼 속을 누비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는지요?”
그러자 상준은 얼굴까지 조금 붉어진 채 버럭 화를 냈다.
“아, 내가 현암 그 자식한테 졌어. 내가 걔보다 약했다고, 적어도 그때는 그러니 그 기준으로 보려고 하지 마쇼. 이건 위험한 일이고. 내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니 특별히 맡은 것뿐이야. 당신이야말로 비 밀 엄수하고 조건 절대 잊지 말라고, 알았어?”
“왜 화를 내십니까?”
백호가 차분히 말하자 상준은 조소하며 양팔을 크게 벌려 보였다.
“내가? 나 화 안 났소.”
“상준 씨는 굉장히 냉정하고 이지적인 타입 같은데 왜 그런 모습 을 숨기려 하시죠?”
“하…… 당신은 이미 안다고 하니 말하는 거지만, 세상에는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소. 주술이니 뭐니 구체적인 건 이야기하지 맙시다. 아마 당신 같은 일반인들은 나나 이쪽 계열 사람들을 이렇게 생각할 거요.”
상준은 이를 악문 채 일부러 길게 발음을 끌며 말했다.
“서언하고 순박한 일반인들, 그런 양 떼들 속에 숨은, 그랬다 가 언제 발톱 드러낼지 모르는 늑대들. 우리가 그런 늑대라고.”
백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상준은 거칠게 말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틀려먹었어. 우린 양이야. 그거 알아. 당신? 우리가 양이라고. 알겠냐고? 검사 양반!”
그리고 상준은 거칠게 몸을 돌려 문 밖을 나섰다. 백호는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않고 상준이 나간 빈자리만 공허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100호실을 나와 거친 발걸음으로 상준은 복도를 걸어갔다. 한쪽 방은 줄을 지어 검사와 사무관들의 방이 죽 이어져 있고, 그 맞은편 은 해당 검사의 취조실이다. 당연히 한쪽은 조용하지만 한쪽에서는 검사들이나 사무관들이 용의자를 취조하거나 자백을 받아 내느라 호통소리와 어르는 소리 들이 뒤섞여 들려온다. 그 속을 혼자 걷고 있자니 마치 한쪽 귀는 천국, 한쪽 귀는 지옥을 향해 열어 놓은 채 걸 어가는 기분이었다. 상준은 상당히 언짢은 상태였다.
백호가 뒷조사를 해서도 아니고, 그로 인해 자기의 사생활이 드러 났기 때문도 아니다. 백호가 어줍지 않게 뒷조사를 한 것쯤 어쩌면 당 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양과 늑대의 비유 때문도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꿀꿀하지?’
어쩌면 천국과 지옥을 복도 하나를 두고 양쪽에 늘어놓은 것 같은 이 건물 자체가 애당초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100호실로 들어갈 때는 오른쪽 귀가 지옥에 면해 있었는데, 나올 때는 반대 방향으로 걷다 보니 왼쪽 귀가 지옥을 향했다.
‘천국과 지옥이라…………. 이런 데 있으니 콧대들이 높겠지. 흥.’
-상준 씨는 굉장히 냉정하고 이지적인 타입 같은데 왜 그런 모습을 숨기려 하시죠?
상준은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기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인 것 같아서?
‘아, 그게 뭘. 아, 내가 왜 그랬지? 이러다 검사 나리 빽 날리는 거 아냐? 아, 씨.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냐고.’
도대체 스스로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어 상준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누가 양이고 누가 늑댄데 이런 주술 나부랭이,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배웠어. 내 다리가 왜……………… 내가 왜 그 꼴을 당하 면서 이런 걸 연마했는데, 흥. 난 양이 될 거다. 제일 타락하고 제일 썩어빠진 양이 될 거야. 그래서 양 속에 파묻혀 살 거다. 높으신 검 사양반 그런 거 알어? 이런 기분 모르겠지?’
상준은 자기 마음속에 백호가 들어앉은 것처럼 자문자답하며 계 속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도달하자 몇 명의 사람들이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각종 서류를 든 사람들이 상준의 주변에 몇 있 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에 타는 대신 한쪽으로 비켜서 물러났다. 그러자 그들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하지만 단 정한 차림의 척 보기에도 검사 급으로 보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먼저 탔고, 그 후에야 다른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법원의 관습적인 행동이었으나 상준은 그마저도 기분 나쁘게 보였다.
‘흥, 높으신 양반들…………….’
그러면 그럴수록 스스로 못났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지만 뒤틀리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 장 입을 열어 뭐라고 하거나 행동을 취할 만큼 아둔한 상준은 아니 다. 슬쩍 시선을 돌려 보니 그 검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깊이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아마 골치 아픈 사건이라도 수임한 모양이리라. 상준은 자기도 모르게 솟구쳐 오르는 자기 비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시 공부하느라 꽤나 힘들었겠지? 물론 힘들었을 거 안다. 하지 만 나에 비하겠어? 다리가 여섯 번이나 생으로 분질러지는 고통, 너 희가 알아?’
상준이 전매특허로 사용하는 주술 내지 도가의 능력은 십이지신 술 말고도 힐기보법이라는 것이 있다.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주어서 몸의 이동을 신속하게 하고 종잡을 수 없이 달려 나가는, 일종의 보 법이다.
겉으로는 유려하고 물 흐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에 엄청난 힘을 가하는 수법이라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것을 단련하느라 고상준은 무려 여섯 번이나 오른쪽 다리뼈가 생으로 부러지는 고통 을 겪어야 했다. 힘을 모아 정확한 순간에 강력하게 땅을 디뎌 가격 하는데, 약했던 오른쪽 다리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부러 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다 붙을 때까지 끙끙 앓아야만 했고 그 고통 에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럼에도 힐기보법을 배우겠다는 강한 집념은 여섯 번이나 다리 를 부러뜨린 이후에야 결실을 맺었다.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의 연 속. 하지만 부러진 뼈가 아물면 더 단단하다는 말이 있듯 결국 상준 은 이겨 냈다. 처음은 스승의 성화로, 두 번째는 혹시나 싶어 하다가, 세 번째부터는 그냥 독기가 솟아 죽을 각오로 계속 덤벼 해냈다. 물 론 그가 전매특허로 삼은 십이지신술도 겉으로 보기에는 깃발을 휙 휙 휘두를 뿐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 내부에 엄청난 무리가 따르고 고통이 가해진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사람이 낼 수 없는 힘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 다. 그런 힘을 끌어내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며 그것을 초인 적인 노력으로 이겨 내서 아예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숙달하지 않 으면 이런 주술은 애당초 쓸 수조차 없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누 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양이야. 나는 양이 될 거야. 제일 썩고 제일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양이 될 거야.’
상준은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었다. 십이지신술. 그리고 강화도에 서 현암에게 참패한 이후 이를 갈면서 완성한 십이지신술을 한 단계 능가하는 제황사신번. 자신의 능력도 이 계열에서는 누구에게 뒤지 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현암의 무시무시하고도 가공스러운 공력 앞 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해 연마하지 않고 처박아 두었던 제황사신의 비결을 재차 고통의 시간을 겪으며 수련해 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이걸 어디에 써?’
현암과의 대결, 대결이 안 되면 시비라도 걸어서 싸울 때 쓰는 것 외에는 써 볼 상대도 마땅히 없다. 게다가 제아무리 제황사신이니 힐기보법이니 해 봐야 총 한 방 맞으면 똑같이 죽는다.
‘나는 양이야, 양. 잊지 말자. 양으로 살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생각에 빠져든 탓에 검사들 무리가 내린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서 지하 주차장에 내린 상준은 자신 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보아도 눈에 확 뜨이는 차다. 빨간색의 스포츠카. 비록 중 고품이긴 하지만 국내에서 시판되지 않는 모델이다. 밀수입상에게 돈을 얹어 주고 반쯤은 협박까지 해 가면서 억지로 밀수해 오다시피 했다. 이 차는 상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이 차를 타고 달릴 때는 기 분이 상쾌하다. 주술로 얻은 돈으로 장만했지만 그것으로 이런 새빨 간 색에 싸구려 과시용 장식까지 처바른, 눈에 띄도록 날건달 티가 풀풀 나는 차를 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 술과 고대의 능력들을 덮어 버릴 수 있는 위장이다.
시동 키를 돌리자 기분 좋은 우르릉 소리가 났다. 8기통에 400마 력이 넘는 엔진이 그르렁대는 소리는 어떤 주술의 신비한 울림보다 도 아름답게 들린다.
상준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자조적으로 말했다.
“백호 그 망할 자식! 내가 번 돈 다 기부하라는 거냐? 응? 그럼 난 뭐 먹고 살고, 나도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썅, 그리고 뭐? 이럴 줄 몰랐다고? 내가 그 현암 거지 새끼 같은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병신같이 살 거 같으냐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화난 말투로 중얼거리던 상준은 문득 입 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본색을 감추려 일부러 건달처럼 건들거리며 살았다. 그리고 겉으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자신이 입은 도교 계열 의 도가 복장이나 십이지번 대신 이런 스포츠카와 졸부 티가 줄줄 흐르는 명품 옷으로 겉을 덮으려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게 자신의 진짜 모습인지, 아니면 위장에 적응 된 것인지 이제는 자신도 구분하기 힘들다. 사실 백호의 행동은 정중했고, 자신을 특별히 기분 나쁘게 한 것도 아니다. 검사실의 분위 기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 정도의 뒷조사나 떠보기는 거래할 때 항상 해 오던 정도일 뿐, 아니, 다른 거래보다는 도리어 훨씬 양호했 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쾌할까・・・・・・ .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불쾌감 의 원인은 백호가 자신의 뒷조사를 하거나 권위를 보여서나 뭐 그런 종류의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유는 한 가지.
‘빌어먹을, 현암 새끼. 다 그 자식 때문이야.’
스스로 못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진정으로 맞겨루 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단박에 깨졌다. 현암에게 그야말로 무참하게 깨졌다. 처음 백호를 만날 때는 단순한 위장이었 으나, 백호의 입에서 현암이 언급되는 순간 자신이 허물어진 것 같 다. 꼭 승부에서 져서만이 아니다. 불쾌할 정도로 느껴지는 패배감. 현암에게는 그 무식한 공력 말고도 뭔가 다른 것이 있는지 모른다.
‘도대체 뭘까. 가진 힘 써 먹을 줄도 모르는 병신 같은 자식이 뭐가 있어서’
상준은 백호에게서 슬쩍 보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속으로는 냉철하고 생각이 깊은 축에 속했다. 그 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변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성격이기도 했다.
원인을 알았음에도 불쾌하다. ‘현암’ 이름 두 자만으로 자신이 덮 어쓰고 있던 위장막이 한꺼번에 홀딱 젖혀진 기분이다. 패배감일까. 아니면 자격지심일까. 지금 자신이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현암 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느끼게 된 때문일까.
“아. 몰라, 제기랄!”
상준은 거칠게 내뱉으며 일부러 억세게 애마의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넘치는 엔진의 힘을 못 이겨 끼기긱 하며 급회전하는 타이어의 울림이 날카롭지만 기분 좋게 들렸다. 한데 그런 좋은 소 리를 들어 봐도 기분이 안 풀린다. 그럭저럭 크게 한 건 했으니 오늘 밤은 한잔 꺾어야겠다.
“하아…… 너희 말이다. 오빠 무서운 사람이거든?”
“어머 그래? 무섭네~. 호호호호.”
술은 비싼 고급 양주다. 더군다나 비싼 집이다. 상준이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지만 이런 곳은 그야말로 꽤 큰 건이 생겼을 때 아니면 들르지 않는다. 사실 도가 계열의 주술을 연마한 상준에게 술은 원 래 맞지 않는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술이 주술에 방해가 되어서 결 정적일 때 위험해질 수도 있다. 미리 마셔 두지 않으면 일 끝날 때까 지 마실 수 없다.
솔직히 지금도 마시지 않는 편이 컨디션을 조절하는 데는 훨씬 좋 다. 그러나 상준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랫동 안 들르지 않았던 비싼 룸살롱에 가서 여자도 불렀다. 여자 손 빌릴 것도 없이 혼자 술을 계속 따라 마시고 취해 갔다. 여자도 별 관심 없 다. 다만 연극의 무대가 허전해질까 봐 비싼 돈 주고 갖다 놓은 소품 일 뿐이니까. 자기가 정체를 숨기고 돈을 벌려고 위장하는 건지, 이 렇게 위장하려고 숨어서 돈을 버는 건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얼큰 해진 상준은 계속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오빠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알어?”
“어~ 안다니까? 이렇게 무서운걸? 호호호호.’
여자가 달라붙으려 하자 상준은 갑자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쳐서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붙지 마라!”
“엄마야. 오빠, 왜 이래?”
“이야기하자, 이야기만 들어 주면 된다. 어디서 누굴 건드리려 고・・・・・・ 부정 타게…………….”
맨 끝부분을 작게 속으로 말한다는 것이 술 탓에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여자의 표정이 단박에 샐쭉해졌다. 닳고 닳은 여자라 겉으 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고 있을 것이 다.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상준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싫고 역겹다. 피 흘려 번 돈을 털어 욕이나 처먹고, 그러면서 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순환이 역겹다. 살아갈수록 더더욱 뭐가 뭔 지 모르겠다.
“오빠가 무서운 사람이야, 그런데 오빠는 양이다. 양 알아?”
“양?”
“메~ 하는 양. 하하하. 메~ 메~.”
“오빠 이상해. 취했어?”
“아니 안 취했다. 메~ 메~.”
“어, 몰라, 뭐야. 무서워~”
여자는 상준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저만치 떨어져 앉았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었고 오히려 그편이 편했다.
“그래, 나는 양이다. 메~ 메~ 메~.”
상준은 계속 술을 마셨다. 술만 들이켰다.
추할 정도로 스티커가 더덕더덕 붙은 새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달 리던 사람이 택시 옆에 붙어서 그 옆을 따라 달리며 손짓을 했을 때 까지만 해도, 택시 기사는 무슨 일인가 했다. 손짓하는 대로 창문을 열어 보니,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지방 갈 수 있어요?”
“네? 지방요?”
“강원도요. 강원도, 미터대로 찍을게.”
“아…… 아니, 당신 지금 차 타고 있잖소?”
“됐수, 가자고!”
상준은 그 말만 남기고 창문을 휙 올려 버렸다. 상준이 하자는 대 로 택시는 뒤를 따랐다. 머지않아 후미진 골목길에 차를 세운 상준 은 차에서 내려 문을 잠근 뒤, 트렁크에서 낚시 가방 같은 것을 꺼내 들고, 따라온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아까 다 못한 말 을 계속했다.
“아니, 저렇게 좋은 차에 타고 계시면서 왜?”
“아 됐고! 어서 가 주기나 하쇼. 아오, 이거 술 좀 작작 먹었어야 했는데…………….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 숙취 때문에 운전이 힘들어서요?”
그러자 상준이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일 보러 가거든. 근데 차 상하면 안 되잖아. 저거 비싼 거라고.”
“거 딱 봐도 비싸 보입니다만, 대체 무슨 일을 하러…………….”
“그냥 가슴, 난 좀 잘게.”
상준은 그 말만 남기고 뒷자리가 마치 자기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 럼 천연덕스럽게 코까지 골며 잠들어 버렸다. 택시 기사는 기가 막 혔지만 미터대로 요금을 준다 하니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상준이 자신의 비싼 차를 놔두고 간 것은 이번 일이 험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차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팔다리가 부러지고 상 처가 나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픈 상준이었다. 그래서 일을 나갈 때 는 자기 차를 타지 못한다. 아까워서 못 타는 것이다. 겉치장에 불과 할지언정 비싸기도 하고 이제는 이것이 나름대로 사랑스러워져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상준이다.
택시에서 내린 상준은 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낚시 가방을 품에 안 아 들고 좁은 시골길을 걸어갔다. 몇 시간이나 차를 타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숙취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원래는 이렇게 서두르면 절 대안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부아가 솟구쳐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 다. 원래 이렇게 술을 퍼마신 뒤면 자신이 연마한 도가의 주술들이 제 위력을 발하지 못했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럴 때 최 교주처럼 부하 많은 자와 싸우려는 것은 절대 피했을 것이다.
허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묘한 오기 같은 것이 상준을 일부러 그 렇게 몰아붙이게 만들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고 주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잘해 낼 수 있고 또한 해야만 한다고 제멋대로 압박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묘한 압박감을 상준은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믿는 바도 있었다. 현암을 이기기 위해 연마했던 비장의 승부 수 십이지번을 능가하는 제황사신번의 깃발들이 낚시 가방 안에 잘 포개진 채 들어 있었다. 백호 앞에서는 최 교주가 괴물이니 뭐니 허 풍을 떨었지만 그래 봤자 생령을 끌어내는 분신술 정도일 것이 분명 하다. 그까짓 것들은 술 덜 깬 상태라도 한 방에 가볍게 처리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굳이 제황사신번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것을 실전에 한 번도 사용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돈도 벌고 100호 검사실의 검사님 에게 연줄도 만들어 두고, 실전 테스트까지 해 보는 셈이니 상준으 로서는 머리를 잘 굴린 편이다. 한동안 좁은 산길을 돌아 돌아 최교 주가 있는 곳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가면서도 상준은 계 속 구시렁대며 불평했다.
“아, 빌어먹을 최 교주 놈은 왜 이런 험한 곳에 처박혀 사냐고. 가 기 힘들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이비 종교도 어느 정도여야지, 열락교 정도 되는 교단이면 사람들 눈에 많이 띄는 도심에 터를 잡기가 어 렵다. 이런 광신도 집단은 보통 사람이면 상상도 못 할 짓을 태연하 게 해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외진 곳에 처박히기 마련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상준은 계속 불평을 해 댔다. 숙취 때문 에 띵한 상준의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이 현암 때문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밝을 때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해가 거의 저문 후에야 최교주가 둥지를 틀고 있는, 열락교라는 종교 집단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상준은 일단 거친 숨을 고르고 앉아서 쉬다가 옷부터 갈아입었다. 입고 온 옷은 이래 봬도 돈깨나 처바른 명품이다. 자신의 눈으로 봐 도 어울리지 않게 졸부처럼 보이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옷이 퍽 마음에 들어서 아끼고 있다.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양의 탈이자 바라 마지 않는 동경의 모습이다.
상준은 ‘양의 껍질’을 벗고 이럴 때만 입는 특유의 도사 복장을 걸 치고 등에 깃발을 멨다. 무슨 의식적인 의미로 도가 복장을 하는 것 이 아니다. 상준이 주술을 발휘할 정도로 힘든 일이나 싸움을 할 때 면 부상을 입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에, 입은 옷은 찢어지고 해져 못 쓰게 되는 일이 많다.
상준은 이것이 자신에게 길을 잘못 들게 해 묘한 꼴이 되게 만든 그 빌어먹을 사문, 도가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배 운 은덕을 잊을 정도로 나쁜 놈이 아닌지라 대놓고 할 수는 없지만 꼭 이렇게 한바탕 뒹군 후에 도저히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진 옷을 불에 태우며 일그러진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보는 사람은 충실하고 근본을 잊지 않는 태도라고 멋대 로 이해해 주니 더더욱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싸울 준비를 마친 상준은 그나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최 교주인 열락교인지 뭔지 모를 잡스러운 집단 따위야 사실 백 호가 꿰뚫어 본 대로 십이지번 정도만 휘둘러도 한숨에 쓸어버릴 수 있다. 숙취에 컨디션 바닥이어도 자신 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조 마조마하게 마음을 줄일 필요도 없다. 검사의 요청에 의한 일이니 행동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주술은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며 되지도 않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던 현암의 얼굴 이 떠올라 상준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흥, 병신 같은 놈. 안쓸거면 대체 왜 힘들게 배웠냐고.’
이런 생각을 하며 상준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머리엔 도사들이 쓰 는 윤건을 얹고 등에는 열두 깃발을 공작새처럼 활짝 편 기이한 모 양새를 한 채,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서 열락교의 정문 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보아도 버려진 별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물로 상준이 다가서자, 문가에서 몇몇의 사내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어라? 지키고 있었네?’
상준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마치 옛날의 도사가 환생한 듯이 늠름 하고도 고풍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몇몇 사내들이 말했다.
“거, 누구요?”
“뭐야, 당신!”
상준은 일부러 껄껄 웃어 보이며 TV 사극에서 들은 말투로 외쳤다.
“내가 누구냐니? 이런 고얀놈!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뭐, 뭐야 저건? 저거 또라이 아냐?”
사내들이 수군거리자 상준은 짐짓 재미있어서 버럭 호통을 쳤다.
“네 이놈! 감히 옥황상제님을 못 알아보고!”
“어이, 어이! 거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여기 가까이 오지 마. 가훠이가! 가까이 오면 다쳐 응?”
사내 중 하나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몽둥이를 꺼내 보이며 상준을 개 쫓듯 쫓아 버리려 했다. 누가 보아도 상준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 처럼 보일 것이다. 상준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자 연스럽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반쯤 미친 척 실실 거리는 표정이었지만 상준의 눈은 빈틈없이 돌아갔다. ‘저것들 봐라, 등 뒤에 뭐 하나씩 감추고 있네?’
상준은 더 막나가기로 작정을 했다.
“네 이놈들! 옥황상제님을 못 알아본단 말이냐?”
“어이, 어이! 저리 가라니까. 에이, 재수 없어서.”
사내 중 하나는 바닥에 침까지 뱉어 짓이기며 덧붙였다.
“옥황상제가 세상에 어디 있어, 이 미친놈아.”
사내의 말에 상준은 눈을 부라렸다.
“옥황상제가 없다고?”
사내는 재미있다는 듯 다시 말했다.
“그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제발 저리 좀 가라고. 훠이. 훠이.”
그러자 상준은 말했다.
“그럼 아틀란티스에서 왔다.”
“뭐? 뭐라고?”
사내들 몇몇은 웃었고,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딱 벌린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상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살인마 새끼가 교주 해 먹는 열락교 같은 쓰레기 집단도 있는데, 아틀란티스가 없으란 법 있어?”
그러면서 상준은 등 뒤에 매달고 있던 깃발 중 두 개를 눈부시게 빠른 손놀림으로 집어 들어 휘둘렀다. 하나는 주작, 상준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마한 제황사신번 중에 두 번째 수였다. 일반인에 불과한데다 방심한 상태였던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더불어 육중한 철창으로 이루어진 문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이 나 흩어져 버렸다. 비록 화약같이 불이 솟구치거나 한 것은 아니 지만 굉장한 파괴력이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 상준 스스로도 은근히 뿌듯한 자부심 같은 것이 차올랐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나 오면 처치 곤란해지기에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상준의 생각대로 사 망자는 없었다. 인간의 몸은 예상외로 튼튼해서 불이나 파편이 튀지 않는 이상 단순한 타격만 가지고서는 죽음에 이르기 어려운 법이다.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문 지키는 녀석들도 정신을 잃고 기 절했지만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난 너무 자비롭단 말씀이야. 이런 새끼들도 안 죽이잖아.’
상준은 유쾌한 기분이 되어 입가로 좋아하는 팝송을 흥얼거리며 제황사신번 중 나머지 두 개를 들고 열락교의 부서진 정문을 통과하 여 서슴없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상준이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에서 들린 굉음을 듣고 몰려나온 듯 무기를 든 몇몇 사람이 나타났다. 문을 지키던 자들이 몽둥이 같은 단순한 무기를 들고 있었던 데 반해, 이들은 낫이나 쇠스랑처럼 농기구에 가깝지만 날붙이가 있고 상당히 흉악해 보이는 무기들을 들 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일일이 그런 것까지 귀찮게 상대할 마음은 없었다. 항상 마음껏 주술을 펼치지 못해 답 답했는데, 이 기회에 속 시원히 한번 풀어나 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너・・・・・・ 넌 도대체 누구냐? 웬 놈이야?”
쇠스랑을 꼬나든 남자가 묻자 상준은 씩 웃으며 현무의 기를 휘둘 렀다. 다시 한번 요란한 폭발이 일어나며, 그 남자와 더불어 몇 사람 의 몸이 허공을 날아 우박처럼 여기저기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제 황사신번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상준은 씩 웃으며 놀리듯 대답 했다.
“나? 염라대왕.”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상준의 앞을 또다시 일단의 장정들이 막아섰다. 그런데 이번에 막아서는 자들은 칼이며 목도, 죽검 등으 로 무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도인지 장검인지 실제로 번들거리 는 칼을 빼든 남자도 하나 있었다.
“어, 이거 뭐야? 무슨 던전이냐? 왜 안으로 갈수록 세져? 씨발.”
여태까지는 여유만만했지만 이렇게 좁은 통로에서 사람들이 칼 을 휘둘러 대면 자신이라도 다칠지 모른다. 상준은 다리를 여섯 번 이나 분지르면서 배운 힐기보법으로 유연하고도 날렵하게 뒤로 물 러서며 쏟아지는 칼질을 피했다. 그리고 제황사신번 중 하나 남은 청룡의 깃발을 휘둘렀다.
비좁은 공간이라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자기 코가 석자인데 그런 것을 신경 써 줄 아량 따위는 상준에게 없었다. 폭발물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리며 복도 전체가 흔들렸다.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다른자들만 날린 것이 아니라, 상준 자신도 타격을 입었다. 한정된 공간 에서의 폭발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직격당한 자들과 달리 상준의 부상은 가벼운 정도였지만 그 래도 날아가 등을 호되게 부딪히는 바람에 한동안 허리가 아파서 등 을 펴지도 못했다.
“아, 제기랄. 어이쿠, 허리야. 이게 뭐야, 망할 놈들. 사람 놀랐잖아.”
상준이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일본도를 쥐고 있었던 남 자가 채 정신을 잃지 않았는지 신음 소리와 함께 손을 뻗어 상준의 발목을 잡았다.
“너・・・・・・ 너는 대체 누구? 세…………… 세상에 어떻게…….”
남자가 더듬거리자 상준은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발을 들 어 남자의 손을 지그시 그러나 단호하고도 확실하게 밟아 버렸다.
“못 봤냐? 나 바주카포 쏜거?”
“뭐? 네…………… 네가 언제…………….”
“아, 못 봤으면 할 수 없고 얌전히 있다가 잡혀나가셔.”
상준은 남자의 손을 짓밟은 채 휘적거리며 아래로 내려섰다. 복도 의 끝에는 양쪽에 방이 있었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아래로 내려 가는 계단이 있었다. 상준은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교주 놈이 은밀히 수상한 짓을 꾸미는 것 같으니 지하실에 있을 공산이 높다고 생각되어 계단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상준이 발을 막 떼자마자 복도 양옆의 문이 벼락처럼 열리 며 기다렸다는 듯이 두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남자들보다도 조금 앞서서 커다란 꽃병과 묵직한 재떨이 같은 것이 날아들었다. 자 신도 모르는 새 힐기보법을 발동하여 묵직한 재떨이의 일격은 피했 지만 커다란 꽃병이 날아와 뒤통수에 부딪히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쾅 하고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리는 듯하더니 어느새 상준은 아래 층 지하실의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떨어져 갔다.
“이…… 이 비겁한!”
양쪽에서 각각 튀어나온 네 사람의 장정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는 듯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을 상준은 쓰러진 채 십이지번 의 깃발 여러 개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주술력을 끌어내 쏘았다. 뒤통수가 띵한데다가 계단까지 구르는 바람에 냉정하게 대응할 정신이 없어서였다. 너무 과하게 주술을 쓴 탓에 남자들은 헝겊 인 형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이미 쓰러졌던 상준도 또다시 타 격을 입고 아래층 계단으로 볼품없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그러 면서 하필이면 바닥에 얼굴을 찧어 광대뼈가 시큰한 것이 눈에서 불 이 튀는 것 같았다.
“어이쿠! 어우 아파라.”
광대뼈를 감싸 쥐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상준의 이마에서 끈끈 한 것이 흘러내렸다. 아까 꽃병에 맞아 머리 가죽이 찢어져 피가 흘 러내리는 것 같았다. 이미 도사용 윤건도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나름 갖추어 입었던 도복도 한쪽 소매가 통째로 찢어져 없어진데다 다른 곳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숙취는 안 깬다.
‘어우. 이게 뭔 꼴이야.’
자기 도복이 찢어지는 것에 묘한 복수 같은 것을 느껴 왔던 상준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데다
너무 가까이서 큰 주술을 쓰는 바람에 정신이 띵한데, 코앞에서 여 럿의 남자가 몽둥이를 휘둘러 대며 달려드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씨발, 뭐가 이렇게 많어?”
상준이 거의 절규하며 급히 등 뒤로 손을 올리는데, 아뿔싸, 십이 지번을 다 써 버렸는지 혹은 아까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다 놓쳤는지. 등에 남아 있는 깃발이 하나도 없었다.
“어, 망했다……”
상준이 울상이 되는 순간 앞장선 남자의 몽둥이가 상준의 어깻죽 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는 상준의 왼쪽 어깻죽지에 적중했다. 그러나 상준은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을 때린 자를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아팠다. 아프기는 아픈데, 그보다는 열이 끓 어오른다. 그러다 보니 독기가 터져 나와 줄줄 흐른다.
‘양, 잠시 잊는다. 지금은 늑대 차례다. 우라질.’
변신까지는 아니다. 그냥 독기 해방. 마음가짐만 변하는 거다. 카 멜레온처럼 순식간에 성공, 마음 바뀐 상준이 악귀처럼 씩 웃었다. 일격을 성공시키고 좋아하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여기저기 찢어진 옷을 걸친 채 핏발이 가득한 눈을 부릅뜬 상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 웠다. 특히나 오랜 수련을 통해 길러진 분위기와 독기가 보이지 않 게 뿜어져 나와 주위 사람들을 압도했다.
“아, 근데 이 자식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려? 교활한 놈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상준이 중얼거리자 몽둥이를 들고 있던 남자는 오히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 무슨 함정을………….”
“치사한 자식들! 감히 태상노군님을 건드려?”
상준은 힐기보법을 발동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몸을 회전 시키며 자신을 내리친 몽둥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두 바퀴나 몸을 화려하게 돌리면서 자기 어깨를 내리쳤던 남자의 뒤통수를 사 정없이 몽둥이로 후려갈겼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뒤통수에 일격을 맞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고 공처럼 튕겨 나와 자빠져 의식을 잃었다.
상준은 이를 악문 채 소맷자락이 찢어져 앙상한 팔이 드러난 왼손 으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쳐서 땅바닥에 뿌리며 말했다.
“깃발 없으면 내가 못 싸울 것 같지. 개새끼들아?”
상준의 기세에 남자들이 주춤거린 사이 상준은 보이지 않을 정도 로 재빠르게 힐기보법을 운용하여 몸을 현란하게 돌리면서 눈앞에 보이는 녀석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평상시 같으면 크게 잘 못될 수 있는 머리 부분은 어느 정도 피했을 테지만 자신도 굴러떨 어져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쓸 수 있는 십이지번도 잃어버린 터라 인정사정 봐줄 생각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썩은 호박을 깨부수듯 남자들을 두들겨 팬 상준은 씩씩거리면서 몽둥이를 둘러메고 앞으 로 걸어갔다.
“허, 이거 도대체 몇 층까지 뚫어 놓은 거야? 돈도 많아, 최 교주 이 새끼.”
혼자 실없이 중얼거리며 상준은 아래층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비척거리며 내려갔다. 아무래도 머리를 잘못 맞아 가벼운 뇌진탕이 라도 일어났는지 자꾸 욕지기가 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물론 온갖 주술을 극기로 버텨 이겨 낼 정도의 정신력을 지닌 상준이었기에 망 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상준을 지탱하는 것은 그런 정신력이 아니라 알 수 없 는 오기와 독기였다.
“아, 제기랄! 이거 편한 일이 아니었네그려. 하긴, 세상에 눈먼 돈 이 없지.”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상준의 앞을 또다시 몇 명의 남자들 이 막아섰다. 이제는 심드렁하다 못해 짜증까지 났다. 그래 봐야 일 반인이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주술력을 주로 사용해 왔지만 힐기 보법 하나와 몽둥이 하나를 든 것만으로도 일반인은 얼마든지 상대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다시 두 사람의 남자를 쉽게 쓰러뜨린 상준은 머리에서 흘러내리 는 피를 조금이라도 멎게 하려고 아예 왼쪽 손바닥을 펴서 머리를 감싸 쥔 채문 하나를 걷어차버렸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우 하는 함성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 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은 철창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감옥처럼 보였는데, 양옆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와 손을 내밀며 구해 달라 외치고 있었다.
“어, 이게 뭐야? 근데 최 교주 이 새끼, 이거 볼수록 개새끼일세.”
상준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욕이 터져 나왔다. 양쪽 철창에는 각각 스무 명도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모두가 여자들이었 다. 침침해진 상준의 눈에도 예쁘장한 여자만 갇혀 있는 것으로 보 아 최 교주가 무슨 심산으로 이들을 가두어 놓았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최 교주 이 새끼, 교 이름부터 열락이라더니 열나게 헐떡거리는 놈일세? 무슨 아방궁 짓냐? 하렘 만들어?”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가만히 머리를 굴려 보니 꼭 그런 목 적으로 여자들을 가두어 두었을 리는 없다. 더 끔찍하고 암담한 생 각이 등골을 스쳤다.
“인신매매……?”
생각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상준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남들에게 오해도 많이 사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자기 가정의파이고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상 준으로서 이런 악행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었다. 물론 악행을 걷어 치우려면 다른데 눈을 돌릴 겨를은 없다.
지나가는 상준에게 여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말했다.
“구해 줘요. 제발 좀 풀어 줘요!”
상준은 여자들의 저주 같은 울음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아, 나중에…….”
상준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지나가자 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해요!”
그러자 상준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 채 그 여자를 째려보았다.
“야. 구해 줘? 니네가 나를 구해야 될 것 같지 않냐? 내 꼴 좀 보란 말이야.”
상준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말하자 겁을 먹은 여자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구신데요?”
“나? 레무리아 대륙에서 왔어.”
“네?”
여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상준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멋대로 걷기 시작했다.
‘아, 쪽팔려. 여자들 앞에서 레무리아……………. 씨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였지만 장난으로만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상준이 일을 해결할 때 쓰는 일종의 수법이었 는데 듣기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입 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그들의 기억에서 자기의 존재 자체를 지우 는 상준 나름의 고등 수법이었다.
용궁이니 아틀란티스니 레무리아 대륙이니(그것도 사람마다 다르 게) 제멋대로 떠들어 대면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해서 증언이나 이야 기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직접 들은 사람조차도 남에게 함부로 털어놓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속 이게 되는 것이다.
상준의 장난스러운 행동에는 이런 복잡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물 론 그렇다 해도 사람이 이렇게 득실거리지 않았다면 이런 창피하고 얼굴 팔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생각보다 사람도 너무 많고 당장 해야 할 일도 따로 있으며 몸 상태를 보아 승리를 장 담할 수 없다. 때문에 상준은 창피함은 일단 접어 두고 그런 낯간지 러운 말을 계속 내뱉었다.
나중에는 새파랗게 질렸던 여자들조차 아예 미친 사람이라고 생 각했는지 구해 달라기는커녕 상준을 피해 구석으로 숨기까지 했다. 물 론 상준은 편해서 좋았다. 그 와중에도 어딘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 여자 하나가 가냘픈 신음을 내며 상준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제, 제발 사…… 살려 줘요. 구・・・・・・ 해 주세요.”
여자가 애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신음하자 상준은 일그러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딱 감고 말했다.
“기다려, 기다리랬잖아.”
그리고 상준은 가냘픈 여자의 손을 툭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들이 갇혀 있는 감옥을 매정하게 통과한 상준은 희미한 기운 을 느꼈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힘이 약해서인지 아주 미미하게 느껴 지는 힘이었으나 분명히 영적인 힘이 깃든 주술력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상준에게 이 정도 기운을 느 낄 능력은 충분했다. 아무리 머리가 깨지고 만신창이가 된 몸일지라 도 말이다.
‘최 교주겠지? 이 개놈의 새끼!’
속으로 욕을 하며 상준이 그쪽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또다시 바퀴벌레 떼처럼 몇 명의 남자들이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상준은 기가 막힌다는 듯 부릅떴던 눈을 풀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들아?”
남자들이 대답하지 않고 잔뜩 긴장한 채 몽둥이를 들고 상준만 바 라보고 있자, 상준이 귀찮다는 듯 몽둥이를 들어 올려 위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저 위에 몇 명 있었는지 아니? 근데 나 여기 내려왔어. 이거 보고 뭐 느끼는 거 없을까?”
남자들은 상준의 말뜻을 깨달은 듯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상준은 귀찮다는 듯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빨리 꺼져라.”
사실 상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눈을 부릅뜨는 것보다 이 렇게 여유를 풍기는 편이 훨씬 무서웠다. 처음의 당당했던 도사 복 장과는 달리 헝클어진 상준의 몰골이 흡사 공포 영화에서 막 튀어나 온 악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질려 들고 있던 것들을 떨구고 슬금슬금 도망치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상준은 이제 귀찮다는 듯 몽둥이도 내팽개치고 성큼성큼 지하실의 방 한쪽을 향했다. 물어보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영적인 기운을 쫓으면 그게 바로 최 교주가 있는 방이리라.
“야! 최 교주! 이 씨발!”
외치면서 문을 냅다 걷어차자 문짝이 경첩째 부서져 나가 요란하 게 엎어진 것까지는 기세가 좋았는데, 그 반대편으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을 마주한 상준은 흠칫했다.
“경찰?”
다른 것도 아닌 정복을 입은, 서른 살쯤 돼 보이는 경찰 한 명이 떨 리는 손으로 권총을 빼들고 똑바로 문을 겨냥하고 있지 않은가. 그 리고 그 옆에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머리가 반쯤 벗어지 고 음울해 보이는 눈을 한 작자는 바로 사진에서 본 최 교주가 틀림 없었다.
“와, 너 이 자식! 경찰 빽 뒀냐?”
상준이 외치자 최 교주는 능글거리며 말했다.
“세상에, 성질도 급하셔라.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너 이 새끼!”
상준이 이를 갈자 최 교주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안 그래도 백호라는 애송이 검사 놈이 나를 노린다는 건 익히 들 어 알고 있지. 그런데 대비할 시간도 없이 이렇게 빨리 오다니……………… 확실히 놀랐어.”
“알고 있었다고?”
상준은 되물었으나 그게 우문(愚問)이었다는 것은 옆에 총을 겨누 고 있는 정복 경찰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최 교주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상 일반 사이비교의 사기꾼들보다 훨씬 쉽게 사람들 을 조종할 수 있음은 빤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총을 가진 경찰까지 옆에 호위병처럼 붙일 정도니 검찰 내의 백호의 움직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더구나…..
“최 교주, 너 살인만 한 게 아니지?”
상준이 오히려 당돌하게 되묻자 최 교주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하지 않았다. 상준은 더 캐물었다.
“너 이 자식, 백호 검사는 널 살인 때문에 쫓고 있는 거야. 근데 나 오늘 훨씬 더 심한 걸 봤거든? 저 여자들 뭐냐? 이 새끼야. 삼천궁녀냐?”
최 교주는 그런 상준이 딱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애석하게 됐어. 웬만하면 혼만 내 쫓아 버리려고 했더니 그걸 보고 말이야. 이젠 그냥 보내 줄 수 없겠는걸?”
그러나 상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 이 새끼 인신매매하지? 안 그래도 아랫도리 부실해 보이는 배 튀어나온 새끼한테 저렇게 여자가 많이 필요할 리 없잖아? 어? 딱 봐도 알겠는걸?”
상준이 일부러 부아를 돋우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자 최 교주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김 경관, 쏴 버려!”
그러자 김 경관이라 불린 경찰은 손을 떨며 말했다.
“교・・・・・・ 교, 교주님. 아무리 그래도 저…………… 저 사람을 그냥…………….”
“쏘라고 했어!”
“교・・・・・・ 교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 그…… 어떻게 그냥 수 갑만 채우면 안 될까요?”
경관이 떨면서 이야기하자 교주는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김경관 늙으신 노모 생각도 해야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느 날 밤에 내가 어머니를 찾아뵐지도 몰라. 그렇게 되는 게 좋겠어?”
“아…… 아…… 아…… 그…… 그것만은 교주님 절대・・・”
그러자 상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와, 너 이 개자식! 그 알량한 분신술인지 생령인지 한다고 협박까 지? 거기에 인신매매?! 나,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다. 근데 넌, 사형 이야 이 인간쓰레기 새끼야.”
그러나 최 교주는 능글거리며 다시 외쳤다.
“김경관 뭐 해? 쏘라니까?”
상준도 지지 않고 똑바로 외쳤다.
“그래, 쏴 봐, 이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경찰이야? 죄지은 놈 잡 아가는 게 경찰이지, 옆에서 꼬붕질이나 하면서 멀쩡한 사람이나 쏴 죽이는 게 경찰이야?”
김경관은 상준의 말이 가슴에 찔리는지 손을 벌벌 떨면서 교주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교······ 교주…….”
상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섯 번이나 뼈가 부러질 정도로 단 련한상준의 오른발이 힐기보법의 공력으로 땅 대신 바로 앞에 굴러 다니던 의자를 후려쳤다. 의자는 상준의 발이 닿는 순간 박살이 나 긴 했지만 그 파편들은 기세가 줄어들지 않고 김 경관을 와르르 덮 쳤다. 나뭇조각에 여기저기를 맞은 김 경관은 비명조차 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으며 권총은 바닥에 데구르르 굴렀다. 상준은 꼴 좋다는 듯 외쳤다.
“경찰 빽? 씨발, 나는 검찰 빽 있다! 그깟 경관 한명한테 내가…………….”
말하던 상준은 아차 싶었다. 김 경관이 떨어뜨린 권총이 하필이면 최 교주의 앞으로 미끄러져 간 것 아닌가. 김 경관처럼 망설일 이유 가 없는 최 교주는 손을 뻗어 권총을 집을 터였다. 최 교주는 그것을 보고 주춤하는 상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거참, 소문대로 대단하군…….”
그러면서 넌지시 손을 뻗어 권총을 잡을 기색을 보였다. 상준은 지 금 힐기보법의 공력으로 의자를 걷어찬 터라 다시 힘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기세 좋게 악은 썼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이제는 눈 앞도 침침해지고 몸에서 힘도 빠져나간 상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쓰러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그냥 누워 버릴까?’
망설이는상준에게 정신을 확 들게 하는 최 교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 정말 대단해, 이현암.”
“뭐? 씨발 뭐? 현암?”
방금까지 포기하려 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상준이 벼락같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최 교주!”
갑자기 변한상준의 기세에 놀라 최 교주가 주춤했다. 완전히 부아 가난상준은 최 교주가 총을 집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이 뒤 집힌 상태로 외쳐댔다.
“여기서도 현암이냐? 이 씨발놈아! 너도 현암이야? 세상에 현암 밖에 없어?”
성질대로 외치고 나서야 상준은 아차 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최 교주는 충분히 총을 집어서 쏠 시간이 있었는데도 집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상준의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겉 으로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우습게 보이는 짓도 많이 했지만 생각은 깊고 치밀한 상준이다.
‘생령・・・・・・ 이쪽이 생령이구나!’
최 교주는 분명 자기의 백에 해당하는 생령을 분리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백호가 최 교주를 쫓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는 최 교주가 있지만 그는 권총을 집지 않고 있다. 집어서 쏘기만 하면 되는데도 그러지 않고 잡는 시늉만 낸 채 멈춰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앞에 있는 최 교주는 최 교주가 만들 어 낸 생령에 불과하다. 실제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물건을 집어서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상준은 안도하기에 앞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뿔싸! 그럼 진짜는?’
이곳에 생령을 두어 상준을 유인했던 것이라면 진짜 최 교주는 이 미 도망치는 중일지도 모른다. 문 너머에서 풍기는 기운이 유달리 미약하다 느껴졌던 것도 따지고 보면 간단했다.
최 교주 자신의 기운을 숨긴 채 생령의 기운만 느껴지게 만들어서 오히려 상준을 지하실 깊은 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밖이 다. 상준의 머리가 김이 나게 돌아갔다. 지금 일부러 상준을(비록 현 암이라고 오해는 했지만) 지하실까지 유인했다면 진짜 최 교주는 지 상으로 나가 도주하고 있을 것이다. 상준은 이를 악물고 힐기보법을 최대로 끌어 올리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최 교주의 생령은 발각되자마자 푸시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상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머리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눈앞도 침침하고 몸에도 힘 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상준은 오기로 이를 악물고 달렸다.
“현암! 아. 왜 또 하필 현암이야.”
상준을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터무 니없었다. 현암이라는 이름 하나였다.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자 아 까지나왔던 여자들의 감옥도 통과하게 되었다.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 은 여자들은 상준이 수상해 보였지만, 다시금 손을 뻗으며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최 교주를 얼른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힌 상 준은 거칠게 여자들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기다려! 아 씨발! 기다리라고 했잖아!”
“제발 저 좀 어떻게…….”
아까 상준한테 매몰차게 차인 여자의 손이 다시 한번 상준의 바짓 가랑이를 잡으려 했으나 상준은 귀찮다는 듯 여자의 손을 아예 사정 없이 밟아 버리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밟힌 여자의 비명 소리 와 감옥 안에서 욕하는 여자들의 아우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최 교주, 최 교주・・・・・・ . 이 망할 새끼 어디 갔어!”
이미 자신의 주술로 난장판이 되어 버린 1층에 도착한 상준은 헐 떡이며 그나마 소맷자락에 덜렁 남은 아주 조그마한 투시용 노란 깃 발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럴 때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력 의 기운으로 영력의 흔적을 찾으면 될 것 같았는데 귀신처럼 눈치를 챘는지 어쨌는지 최 교주 놈이 힘을 모조리 감추어 버려서 통 감지해 낼 수가 없었다. 애가 탄 상준은 들었던 작은 깃발을 던져 밟아 버 리고 자신의 주술에 맞아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던 열락교 교인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외쳤다.
“교주, 교주 어디갔어?”
“제・・・・・・ 제가 어떻게…………….”
“몰라? 이 병신!”
상준은 남자를 내팽개치고 다른 남자를 잡아 또다시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주가 어디 갔는지 이들이 알 수 있을 리 없다. 상 준은 아직도 피가 흐르는 머리를 왼손으로 움켜쥔 채 침착하려 애쓰 면서 머리를 굴렸다.
여기는 올라올 때부터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산길이었다. 당연히 차 같은 것은 애당초 들어올 수도 없다. 길도 외줄기라 정문에 서서 아 래를 내려다보면 한눈에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길가에 몸을 숨긴다 해도 도주하는 이상 눈에 띄는 것이 겁나지 않을 리 없다.
‘그렇다면・・・・・・’
상준은 머리를 굴렸다.
‘최 교주 그놈,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상준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최 교주! 너 이 새끼 꼼짝 마!”
현암의 사자후만큼은 아니어도 주술을 돌려서 공력을 실었기 때문에 소리는 크게 울렸다.
그때 상준의 오른쪽에서 희미한 영적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상준은 최 교주가 이미 생령을 이용하여 자신을 속 이려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실제로 최 교주일 확률도 물론 있다. 하 지만 상준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직감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영력이 느껴지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무조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라라?”
직감대로 정신없이 달려가 보니 그곳은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여긴 막다른 곳 아냐.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몸을 돌리려는 상준에게 문득 아주 작은, 조그마한 한숨 소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들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느낌이 확왔다.
‘혹시……?’
상준은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여 가며 벼랑 끝 으로 살짝 시선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최 교주 높은 음흉하게도 벼랑 끝에 매달려서 손끝으로만 바위 모서리를 잡은 채 숨어 있었 다. 생령을 저 멀리 보내 놓고 일부러 벼랑을 자세히 내려다보지 않 는 한,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자리에 음흉하게 숨은 것이다.
‘하, 여우 새끼 같은 놈. 이걸 당장…….’
상준은 교활한 최 교주의 꼴을 보자 울화가 끓어올랐다.
‘저 개자식, 사람 죽이고 협박에 인신매매에 경관까지 부리고…………… 이 주기 선생이 피 보게 만들어? 이런 씨발……..’
머리에 흘러내리는 피가 영 멈추지를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찢어 진 것 같았다. 잠시 상처에서 왼손을 떼어 보니 피로 온통 물들어 있 다. 결국 상준은 이를 악물었다.
‘에이, 씨발! 돈 안 받어.’
결심한 상준은 일부러 두리번거리는 척하며 벼랑 쪽, 즉 최 교주가 매달려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최 교주 내 이자식. 잡기만 하면 말이야. 그냥 아주 잘게 다져서…….”
상준은 즐기려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분명 자기 발 밑에서 최 교주는 덜덜덜 떨고 있으리라.
“아~. 나한테 걸리기만 하면 말이지. 아주 그냥, 응?”
말하면서 상준은 슬쩍 발을 뻗어 최 교주의 손가락을 힘껏 짓밟았 다. 겉으로는 살짝 발을 디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힐기보법의 수법으로 공력을 잔뜩 실은 것이라 최 교주의 손가락이 버텨 낼 수 가 없었다.
“으아악!”
최 교주의 돼지 멱따는 듯한 찢어지는 비명이 벼랑 아래로 점차 멀 어져 갔다. 상준은 못 들은 척 일부러 반대쪽 하늘을 보면서 스스로 를 속이려는 듯 중얼거렸다.
“어, 벼랑에서 미끄러질 뻔했네. 아무튼 최 교주 그 자식, 잡히기 만 하면 말이지. 흠. 뭐, 아냐, 그런 놈은 천벌이라도 받을 거야. 암, 천벌이지, 천벌.”
“……그래서 놓쳤다고요?”
백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상준은 보란 듯이 아예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건들거리는 표정으로 백호의 앞에 태연히 앉아서 말했다.
“거, 아주 여우같은 놈이라니까. 거의 잡을 뻔했는데, 생령을 내 앞에 던져 놓고 튀었지 뭐요?”
그러나 백호는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최 교주의 시체가 열락교 건물 뒤 벼랑 아래에서 발견된 건 아십니까?”
“아,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놈이 그리로 도망치려다 떨어졌나 보구먼! 그런 걸 천벌이라고 그러지 않소?”
백호는 인상을 썼다.
“그렇다면 최 교주의 손가락은 왜 짓뭉개져 있었을까요?”
“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상준은 뜨끔했으나 시치미를 딱 뗐다. 백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 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처음에 부탁드린 건 분명 최 교주가 살인을 했다는 물증이 나 증거를 확보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신병을 확보, 즉 체포해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기억하시죠?”
“아, 그럼! 기억하지. 그런데 내 능력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내 몰골을 좀 보시오.”
백호는 몹시 화가 치밀었으나 억지로 눌러 참아 표를 내진 않았다. 대신 백호가 입 끝에 문빈 담배만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돌아갔다.
“그리고 이게 뭡니까? 바주카포를 쐈다고요?”
“거 그렇게 말해 주는 편이 편하지 않아요? 제황사신을 날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면 더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
“아니, 여기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사제 무기가 돌 아다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술을 인정하는 것에 비해 결코 작 은 문제가 아닐 텐데요…….”
“아, 미안허우, 미안해. 하지만 나는 항상 그런 식으로 해 왔거든.”
백호는 다시 샐쭉한 눈초리가 되어 상준을 몰아붙이듯 말했다.
“그럼 사람들에게 용궁이니 아틀란티스니 레무리아 대륙이니 하 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 레무리아 대륙의 전설 모르시오?”
백호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까지 쉬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당신의 신원을 숨기기 위한 수법이었습니까?”
“간혹 쓰는 수법이지. 솔직히 너무 낯간지러워서 자주 못 쓰지만 이번엔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
“피해자로 갇혀 있던 여성의 상당수가 당신을 최 교주와 한패나 악당으로 보고 신고하려 했던 것도 아십니까? 고발한다고 한 여성도 있고…….”
“아,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지랄은. 그런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는 거요?”
백호는 책상을 가볍게 치며 일어나 뒷짐을 지고 상준을 꺼리듯 등 을 보이며 서서 말했다.
“제가 바란 것은 최 교주가 빠져나간 법의 그물망을 단속하고 법의 엄정함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느 정도의 편법을 각오하기까지 했고요. 하지만 이런 결과는 정말…….”
백호가 채 말을 잇지 못하자 상준은 능글맞게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인신매매는 없을 거 아니오. 최 교주도 벼랑에서 떨어져 천벌을 받았다니 비슷한 일이 벌어질 리도 없고, 생령 만드 는 능력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것도 아니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말이오. 어떻게 보면 잘 풀린 거 아니오?”
백호는 거의 체념하다시피 중얼거렸다.
“만약 현암 씨였다면…………….”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린 이야기지만 그게 상준의 성질을 건드렸 다. 상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화난 소리로 외쳤다.
“돈 내놓으쇼!”
“당신에게 의뢰한 일은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요?”
백호가 돌아보며 따지듯 말하자 상준도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 머리 안 보이시오? 그리고 어쨌든 간에 열락교가 없어진 게 누구 덕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백호는 거의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사실 상준도 이렇게까지 치 사하게 나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백호가 또다시 현암이라는 이름 자를 읊조리자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후유증은 오래갈 것 같았다. 상준이 밖으로 나가자 백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 고 책상 한 켠에 있던 파일을 열어, 능력자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 를 만들려던 기안 문서를 부욱 찢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백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상준은 검찰청 건물을 걸어 나오며 봉투를 집어넣은 왼쪽 가슴을 슬슬 어루만졌다. 처음에 약속했던 액수를 다 받지는 못했지만, 절 반 정도는 챙길 수 있었다. 억지로 뜯어내다시피 한 돈이다.
백만 원짜리 수표 스물다섯 장의 두둑한 부피를 흐뭇하게 느끼면 서상준은 검찰청을 나오자마자 미라처럼 머리를 둘둘 말고 있던 붕 대를 걷어 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사실 피는 많이 흘렸지만 찢 어진 상처는 병원에 가서 네 바늘 정도 꿰매니 금세 아물었고 이제 는 겉보기조차 표도 안 난다.
하지만 일부러 백호더러 보라고 붕대까지 둘둘 두르고 온 것인데, 이제는 필요 없어졌으니 유감없이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세상 사는게 이렇게 힘든데 말야. 전부 현암, 현암. 그 소리나 해 대고 말이지.”
돈을 받은 것은 흐뭇했지만 상준의 마음은 무거웠다. 누가 듣지도 않는데 여전히 구시렁거리며 걷는 상준의 눈에 저만치에서 자선 행 사로 행인들의 주의를 끌고 있는 봉사단원이 보였다. 상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가자 모금함을 둘 러멘 봉사단원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상준을 바라보았다.
상준은 두둑한 왼쪽 가슴을 기분 좋게 어루만지고는 손을 돌려서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큰마음 먹고 십만 원짜리 자기앞수 표 세 장을 쥐었다가 다시 한 장을 살짝 눌러 넣은 후 두 장만 통크 게 모금함에 집어넣었다.
모금함을 메고 있던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지만 상준은 괜찮다는 듯 돌아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소리가 듣기 좋은 듯 미소까지 띠면서 속으로 외쳤다.
‘세상에 나보다 착한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제기랄!’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