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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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들랜드의 대평원에는 메아리도 없다.
탈박거리는 말발굽 소리, 덜컹거리는 수레바퀴 소리. 노래는 없다. 대평원에서 아무것도 노래 부르지 않는다. 전설의 음유시인 파하스조차 감히 노 래를 부르지 못했다는 땅 사이들랜드 대평원을 향해 POG 상단은 오만하게도 소음을 던져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다른 행위는 불가능했다. 그저, 졸고 있을 도리밖에 없다.
보스, 쳉, 그리고 수레꾼 우두머리인 킬로이가 삼각형을 이룬 채 상단을 선도하고 있고, 여덟 대의 수레가 덜컹거리며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지금 선도하는 자와 따르는 자의 차이는 극히 불분명하다. 모조리 졸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과도 같은 날이다. 어쨌든 그럴 거라고 믿으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POG 상단의 상인들에게 오늘은 하절기 여행이 시작된 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POG 상단의 하절기 여행은 항상 북부의 스카니아 마을에서 시작된다. 이 계절은 여름을 대비해서 양들의 털을 깎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양 모를 구입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며, 출발 이후의 여정은 매년 다르지만 출발은 항상 이곳이다. 이후 대륙을 여기저기 돌다가 추수철이 될 때쯤이면 하절기 여행은 대충 끝난다. 그러면 상단은 해체되며 상단의 조원들은 고향으로 가서 추수를 돕거나 여행에서 받은 배당금을 도박으로 날리거나 하 다가 동절기 여행이 시작되는 11월에 다시 모여드는 것이다. 그때는 대개 바이서스와의 국경 지대인 헤센빌에서 모이곤 했다.
초원은 끝이 없고 하늘은 기막히게 넓다. 길은 좁고, 그래서 여정은 더욱 길어 보인다. 12년 동안 매년 겪는 일이지만 스카니아 마을에서의 출발은 언제나 나른하고 기운 빠지는 것이었다. 헤센빌에서 출발하는 동절기 여행은 항상 활기에 넘친다. 하지만 스카니아 마을에서 출발하는 하절기 여행 에는 미치도록 찾아드는 졸음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맥 빠지는 여정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태양은 자신이 정해놓은 준엄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졸음에 겨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자 이미 태양이 서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쳉은 끈적거리는 목을 쓸어내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수레에 매인 말들은 지평선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믿는 것처럼 기운차게 걸어갔지만,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도 이미 네 시간가량. 끔찍스럽게 졸려 왔다.
그래서 쳉은 캐시헌터의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보스는 곧 날카롭게 외쳤다.
“이놈! 어딜 슬슬 빠지는 거야?”
쳉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보스는 졸지도 않는다. 정말 신뢰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상인이다. 신뢰할 수 있는 도박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 지만.
“아아, 호위 무사의 임무. 상단의 뒤를 경계해야지요.”
“얼씨구? 수레 위에 올라가 곯아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스. 이곳은 사이들랜드입니다.”
“지금이 지리 수업 시간이냐?”
“원한다면 대충 이곳을 소개해 드리지요. 이곳은 북부 사이들랜드. 가장 위험한 것은 뜨내기 도박꾼 정도인 땅. 신경 곤두세울 필요가 전혀 없는 곳 이지요. 그리고 낮에 틈틈이 자둬야 불침번 서기도 쉽지요. 보스가 나 대신 불침번 서주겠다면야 나도 낮 시간 동안 충실한 호위 무사로 남을 수 있습 니다. 어때요.”
보스는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보스 뒤에서 걸어가고 있던 킬로이는 히죽 웃었고, 쳉은 캐시헌터의 걸음을 늦추었다. 캐시헌터를 첫 번째 수레 옆에 붙인 쳉은 고삐를 수레 가장자리에 묶은 다음 수레를 향해 훌쩍 뛰었다.
풀썩.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양모가 꽉꽉 들어찬 수레는 아무런 충격이나 소음 없이 쳉의 몸을 받아들였다. 쳉은 양모 속에 푹 잠긴 채 팔을 베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디도스 활이라………….’
벽에 걸어둘 생각일까. 미의 방엔 쳉이 대륙 곳곳에서 가져다준 해괴한 물건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무기를 선물한 적은 없는데, 뜬금없이 활은 왜 가지고 싶어 하는 걸까.
게다가 결혼이라. 미와 결혼? 1년에 몇 차례 만났을 때 반갑고 즐거운 사이이기는 하지만 평생 동안 바라보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게 다가 미가 양떼를 버려두고 날 따라 대륙을 방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방랑을 포기하고 양떼를 돌볼 수 있을까? 둘 다 부정적. 우리는 어떻게든 어울리기 어려운 커플이다. 미래를 보기에 미래엔 관심이 없는 여자와 현재를 보기에 현재엔 관심이 없는 남자.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식이 나올 지 모르겠군.
게다가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멘스할 때는 히스테리도 부려주겠다고? 그게 무슨 구애야. 쳇. 도저히 미래를 볼 줄 아는 여자의 말이라고는 믿 어지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을 때 내가 매혹당할 건지 짜증을 부릴 건지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미는 미래를 본다.
수레에 가득 담겨 있는 양모 속에서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쳉은 험악한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몸을 똑바로 세우려고 했지만, 상체를 일으키면 하체가 파묻히고 하체를 들어올리면 상체가 아래로 푹 꺼질 뿐이었다. 결국 쳉은 헐떡거리며 고함질렀다.
“으이아우오! 제기랄, 나 좀 꺼내줘! 켁켁!”
“저 자식 좀 꺼내줘라. 젠장, 팔기도 전에 양모 다 망치겠다.”
양모의 바다 속에서 듣자니 보스의 목소리도 아늑하게 들린다. 순간적인 닭살 때문에 쳉의 몸이 뻣뻣해졌기 때문에 킬로이는 수월하게 쳉을 끄집어 냈다. 쳉은 수레 밖으로 나동그라지자마자 곧장 캐시헌터의 고삐를 풀었다. 어이없는 눈으로 쳉의 동작을 보던 보스가 말했다.
“뭐야? 캐시헌터가 갑자기 애타게 자유를 갈구하는 눈빛이라도 보내더냐.”
“스카니아 마을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뭐 놔두고 왔냐?”
“예.”
“중요한 거야?”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휴지라면 보급품 수레에 많이 있다만.”
“제발, 보스!”
보스는 입술을 뒤집어 이를 보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젠장. 다녀와. 대신 배당금 2퍼센트 삭감이다.”
“알겠습니다. 늦어도 사나흘 뒤…………, 그러니까 사킨이나 턴빌 쯤에서 따라잡겠습니다. 킬로이? 마을에 들어가거든 절대로 보스가 도박장 근처에 못 가도록 막아줘요. 알았지요?”
킬로이는 얼굴 가득한 수염 속에서 히죽 웃었고, 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쳉은 곧장 캐시헌터에 자기 짐을 올린 다음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수레꾼들은 쳉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넬 시간도 없었다. 상단을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발걸음이 급했다.
이건 확인해 봐야 한다. 미의 그 웃기는 구애가 미래를 본 후에 나온 결론인지, 아니면 그저 그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시제가 퍽 이상하긴 하지 만, 과연 미가 보았던 미래에서 나는 미의 남편이었을 것인가?
쳉은 자기 머리의 성능에 대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나도 정말 절망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군. 어떻게 지금에서야 그 생각이 떠오른 거 지?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구애라니. 그리고, 그것이 미래를 본 다음에 나온 결론이 아니더라도…………….
‘젠장, 미 녀석. 너무 심드렁하게 말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게 바로 구애라는 것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잖아.’
쳉은 상당량의 당황에 적정량의 분노를 섞어 캐시헌터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랴! 이 자식아. 넌 다리가 네 개고, 내 다리까지 합치면 우리는 다리가 여섯 개다! 이 정도면 꽤 놀라운 속력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보는데, 네 생 각은 어떠냐?”
“위힝힝힝!”
캐시헌터는 동감의 함성을 지른 다음 스카니아 마을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뒤를 흘끗 바라보자 상단의 모습은 삽시간에 멀어져갔다.
오후 느지막하게 출발했기 때문에 많은 거리를 가지는 못했다. 쳉은 얼마 달리지도 못해서 일몰을 맞이하고 말았다. 해가 지고 나자 대평원은 순식 간에 캄캄해졌다. 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쳉은 말에서 내려 급하게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쳉은 달을 기다렸다. 곧 대평원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사색을 위해 특별히 눈을 감을 필요도 없는 캄캄한 대평원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주위에 둘러쳐진 어둠의 부피는 상상을 초월한다. 드문드문 빛나는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육체를 벗어나 버리려는 정신을 느낀다. 바로 그때 대평원의 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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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삶을 의심하게 만드는 거대한 무의 노래. 이럴 때 고독은 하찮은 감정이다. 차라리 고독해지길 바라지만, 주위에서 다가오는 암흑과 풀잎들의 흐느낌은 위아래 사방에서 육체를 침범해 온다. 아주 간단히 귀신이 되어버리는 기분. 이럴 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 정신은 즉각 대평원에게 빼앗겨 버리고, 정신이 빠져나간 육체는 영원히 평원을 배회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사라져간 음유 시인 파하스의 텅 빈 육체는 아직도 이곳 사이들랜드의 대평원을 떠돌고 있다고 한다. 북부를 오가는 상단들 사이에서는 파하스를 보았다는 목격담을 꽤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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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쳉은 미에 대해서 생각했다.
12년 전, 보스의 상단에 떠맡겨진 잔심부름꾼으로 이곳에 온 쳉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그때 처음으로 양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계집애에 게 맞아보았다. ‘메에메에’하고 울 줄밖에 모르는 양을 우습게 본 대가였다.
그날 밤, 횃불 옆에 있던 상인들 중에서 킬로이가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킬로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희끄무레한 무엇. 쳉은 소름이 쫙 돋았다. 하지만 잠시 후 안도와 동시에 짜증을 느꼈다. “메에에에…..”
들판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상단 주위로 불빛을 본 양 한 마리가 천천히 다가온 것이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상인들은 이 밤에 양이 혼자서 돌아다닌다는 데 어리둥절해졌다. 양은 다가오기도 그렇고 도망가기에도 뭣한 모습으로 얼쩡거리고 있었고, 짜증이 나 있던 쳉은 양을 놀래어주기 위해 불붙은 장작을 휘둘렀다. 양은 기겁하면서 달아났고 쳉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터뜨리려고 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쳉의 머리를 후려갈기 지 않았다면 쳉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을 것이다.
신나게 장작을 휘두르고 있던 쳉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따악! 정수리를 갈기는 그 충격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당시 쳉은 꽤 조숙했다. 조숙하다는 말은 상대의 권력이나 힘의 크기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쳉은 양 해도 구하지 않고 그의 정수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상당한 힘이나 권력을 가진 성인 남자이거나 어쩌면 양들의 신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는 정신을 차리기에 앞서 용서부터 빌기 시작했다(물론 정수리를 때렸으므로 당연히 그보다 키가 클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확신도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모르고 그랬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절대로………….”
그러나 그의 횡설수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고함 소리에 기겁했기 때문이다.
“야, 이 자식아! 대평원에서 불장난을 해? 대화재를 내고 싶다는 거야? 앙?”
고함 소리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쳉은 그 목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횃불 빛에 드러난 것은 그와 비슷한 신장에 역시 비슷한 나이쯤으로 보 이는 생명체였다. 하지만 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이 있었다. 쳉은 무섭도록 예리하게 그 차이점을 지적했다.
“계집애잖아?”
계집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쳉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얼빠진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사내애잖아?”
그때까지도 계집애에게 맞았다는 데 대한 당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쳉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쳉 이 알기로 계집애란 항상 자기 집 안에만 존재하며, 어쩌다가 길거리에 나오더라도 그 같은 사내애가 가볍게 손짓만 하거나 몇 마디 농담이라도 걸면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그런 계집애의 옆에는 항상 우락부락하며 무시무시한 아빠나, 아니면 우락부락하기만 할 뿐 별로 무섭지는 않은 오 빠 등의 부록이 따라다닌다.)의 등 뒤로 숨어버리는 존재였다.
쳉은 그 계집애의 왼손에 들려 있는 기다란 막대기를 보고서야 어떻게 이 계집애가 자기 정수리를 때릴 수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때쯤 간 신히 화도 낼 수 있을 만큼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쳉이 당시의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퍼붓기에 앞서 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계집애는 고개를 돌려 보스를 보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 V. 그라시엘. 스카니아 마을에 살아요. 양이 한 마리 없어져서 찾던 중이었어요.”
보스의 대답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쳉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돌멩이로 쳐야지. 마음이 여린 레이디로군.”
“아저씨 애니까 관리는 아저씨가 해야지요. 대평원에서 불을 가지고 노는 녀석이 어디 있어요.”
“흐음. 그렇군. 미안하다.”
그리고 쳉은 그 밉살스러운 계집애에게 시원하게 욕설 한번 퍼부어댈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보스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그런 뒤 대평원에서의 불 장난은 신성 모독보다 무서우며 적자 장부보다도 고약한 것이라는 내용의 엄격한 교훈을 받아야 했다. 당시 보스는 진정한 교훈이란 매가 동반되어 야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다(물론 쳉의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손을 대지 못하고 있지만, 그 믿음에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12년이 지나서, 그의 머리를 막대기로 두드리던 그 소녀는 이제 황당한 구애로 그의 머릿속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루미너스가 떠올랐다.
잠깐 동안 앉아 있었을 뿐이지만 바람 막아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대평원인 탓에 몸은 얼어붙어 위축되어 있었다. 쳉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캐시헌터는 이 광막한 무의 노래에도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 듯이 부지런히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쳉은 캐시헌터를 불러 안장을 얹고는 다시 달빛 아래 드러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풀밭 사이로 가늘게 뻗어 있는 고대 대로의 흔적을 따라 루미너스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쳉은 내처 달렸다.
달빛을 받으며 달리는 쳉의 모습을 보며 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중에 내쉰 숨결로 잔잔하던 수면 위에 파문이 지나쳤고, 곧 물 위에 떠오른 모 습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더 볼 필요는 없다. 쳉은 내일 정오쯤이나 되어야 여기에 도착할 것이다.
미는 손을 휘저어 의식을 종료하고는 대야에 담긴 물을 비웠다. 언제나 그렇지만, 물을 버리는 이 동작은 의식의 다른 단계에 비하면 아무 의미 없는 동작인데도 어느 때보다 손이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물이 아니라 미래를 흘려보내는 것 같은 기분. 마지막으로 가면을 벗으며 미는 자신도 모르게 말 했다.
“쳉은 늦을 거야.”
파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던져둔 미의 배낭을 보며 말했다.
“쳉은 늦을 거야.’ 흥흥. ‘쳉은 늦을 거야’라고? 어차피 떠날 거라면 쳉이 늦든 말든 떠나시지 그래? 쳉은 늦을 테니 천천히 떠나겠다는 거야?”
“미에게도 미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잖아.”
파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침대가 출렁이며 파의 다리가 흔들거렸다.
“그래그래. 계속 미적거리고 있어. 갑자기 쳉이 문을 열고 들어설 거야. 그때 ‘아아! 떠나려고 했는데, 쳉이 너무 빨리 돌아왔어! 만나버리고 말았으 니 이젠 떠날 수 없게 되었어!’ 이런 소리는 하지 말기. 알았지? 그리고 쳉이랑 결혼해서 가끔씩은 ‘미는 참 행복한 여자구나.’ 하고 헤벌레 웃으면서 죽을 때까지 재미나게 살아봐. 언니가 아이를 낳으면 내가 대모가 되어주지. 만일 아들을 낳으면 난 녀석에게 처음으로 여인의 환상을 줄 거야. 그리 고 딸이라면 그 녀석에게 처음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게 만들어주겠어. 한마디로 애 낳는 것만 빼고는 언니가 할 일을 내가 다 해주겠다는 말이지.”
미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포기했다. 파는 지금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언니가 집을 나서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난다 는 말을 들은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미는 뭐라고 말하는 대신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바지를 집었다.
파가 천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떠드는 동안 미는 옷을 갈아입었다. 겨울에 양을 칠 때나 입던 튼튼한 셔츠와 작업복 바지 등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 서 혁대를 살펴보다가 미는 파에게 말했다.
“칼은 어디 있니.”
파는 오른쪽 다리를 들더니 발가락 끝으로 벽장을 가리켰다.
“내 칼? 아래 서랍 날은 잘 갈아뒀어. 언니가 어느 쪽이 손잡이고 어느 쪽이 칼날인지 구분할 수 있다면 손가락을 잘라먹지는 않을 거야.”
“음……, 짧은 쪽이 손잡이지?”
“대개 그렇지. 그리고 반짝거리는 쪽이 칼날이야. 손잡이와 칼날을 구분하게 되었으니 이제 검술에 대해 교육시켜 주지. 손잡이는 언니 손에, 칼날 은 상대방 몸에, 그것만 지킬 수 있다면 언니는 천하무적일 거야. 즉석 검술 교육 끝.”
파의 농담을 한쪽 귀로 흘리며 벽장을 열고 아래 서랍을 열자 기다란 꾸러미가 나왔다. 천으로 감싼 꾸러미를 들어올리다가 의외의 무게에 놀라 당 황하는 미를 보며 파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천을 풀어헤치자 기다란 칼이 나타났다.
거무튀튀한 검집과 묵직해 보이는 가드를 보며 미는 아찔함을 느꼈다. 갈색으로 번들거리는 손잡이는 미에게는 말 매는 말뚝만큼이나 두꺼워 보였 다. 과연 저걸 쥘 수 있을까? 미는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천 사이로 드러난 그 투박한 모습을 살펴보면서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게 롱 소드니? 쳉 것이랑 다르게 생겼네.”
“저게 인간인가? 나와는 좀 다르게 생겼네.”
“비꼬지 마…………. 음, 알았어. 여기에 차면 되는 거지.”
“언니 오른손잡이였어?”
“응? 무슨 말이니?”
“으이구, 쳉 따라한 거구나. 쳉은 오른손잡이니까 왼쪽 허리에 차는 거야. 하지만 언니는 왼손잡이잖아.”
미는 자신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파에게 구박을 받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닌데. 의기소침해진 걸까? 결국 미는 오른쪽 허리에 거북한 느낌을 받으며 배낭을 둘러메고 파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허리에 매달린 롱 소드는 꽤 신경을 건드렸다. 정강이에 툭툭 부딪히는 것도 그렇 고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파는 일어나 앉아서는 여전히 심술궂은 시선으로 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음. 파. 미의 자세 이상하지 않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어?”
“맞아. 원래 언니는 너무 연약해서 숟가락만 들어도 옆으로 기울어지잖아. 난 언니가 어떻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건지 항상 불가사의하게 생각했어.” 파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롭게 바뀌어갔다. 미는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미는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는 대 신, 침대에 앉아 있는 파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뿌리치지도 않았다. 대신 두 팔을 들어올려 언니의 목을 감싸 안았다. 파의 팔에 난 솜털이 미의 귓가를 간질였다. 미 는 동생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잘 있어.”
파 역시 지금까지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닌 소곤거림으로 대답했다. 더 이상 높은 소리를 내는 것은 미나 파 모두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보.”
“쳉을 부탁해.”
껴안고 있었기 때문에 미는 파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하는 것은 잘 느낄 수 있었다. 파는 미를 풀어주더니 고개를 돌리며 다시 낭랑한 목소리로 말 했다.
“아아, 그래그래. 그 남자, 언니가 아니면 구제할 여자도 없는 남자이기는 하지. 그렇지만 나도 꿈이 있다고. 거지 무리나 다름없는 상단에 붙어다니 는 호위 무사 따위에게 도대체 기대해 볼 만한 미래가 있을 것 같아? 마나를 쓰지 않는 마법사 좋아하시네. 그런 남자를 나에게 떠넘기는 거야? 싫네, 싫어.”
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미를 봐서라도 좀 잘해줘. 응?”
“제기랄, 떠나지 마!”
파는 격하게 고함을 지르더니 왁살스럽게 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가 가만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동안 파는 크게 흐느끼면서 말했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미래 따위 알 게 뭐람. 누가 언니더러 미래를 책임지래?”
“파…….”
파는 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거세게 휘저었다.
“세상에 미래를 볼 줄 아는 무녀가 언니뿐이야? 그런 거야? 그렇지 않잖아!”
“그래. 그렇지는 않지.”
“그럼 다른 녀석더러 나서라고 해!”
“그 다른 녀석은 미더러 나서라고 말할걸. 똑같은 거잖아.”
“그럼 왜 언니야, 엉? 언니는 왜 나서는 거야!”
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 파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멋대로 엉킨 파의 머리카락 곳곳에서 손가락이 걸렸다. 계집애, 차라리 머리를 짧게 자르든가 하지.
“공명심일까? 미는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치 놓아주지 않으면 언니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는 한숨을 쉬고서 말했다.
“쳉을 위해서.”
파는 놀란 모양이었다. 미의 가슴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올린 파는 미를 올려다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쳉을………… 위해서? 무슨 말이야? 쳉을 버리고 가는 거잖아? 그 빌어먹을 미래인지 뭔지 때문에.”
“아냐. 쳉을 위해서야.”
“언니는 이상해. 언니 같은 사람은 없어.”
“파 같은 사람 역시 어디에도 없을걸.”
파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이를 앙다문 채 물었다.
“정말 갈 거야?”
파의 얼굴엔 미가 지난 23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겁에 질리고 두려워하는 얼굴. 그래서 미는 자칫 고개를 가로저을 뻔했다. 하 지만 미는 파의 이마에 키스하고서 몸을 돌렸다.
문을 여는 동작마저도 생경스러웠다. 지난 시간 동안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여닫던 문이었는데. 우리 집의 문손잡이는 여기 달려 있었구나. 그 동안 몰랐던 것인데, 이 손잡이는 왼손잡이에게는 조금 이상한 위치였다. 아주 조금.
“가지 마.”
등 뒤에서 들려온 파의 흐느낌은 애절했다. 미는 몸이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몸을 돌려 파를 힘껏 끌어안아 주었으면 쳉은 늦을 거야. 내일 아침에 떠나도 돼. 쳉이 빨리 달려도 내일 정오에 도착할 거야. 어쩌면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에 도착할지도 모르지.
미는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파는 혼란스러웠다.
‘갔어. 언니는 갔어 있지 않아. 돌아오지 않아.’
눈을 들어 방 안을 돌아본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의 이유였고, 이 방이 사이들랜드 대평원만큼 거대해진 원인이기도 하다. 시간은 미와 파를 쓰다듬어 왔고, 미와 파는 이 방을 쓰다듬어 왔다. 충분히 작아질 만큼. 마침내 자매들의 발랄한 웃음소리를 담기에는 오히려 비좁을 정도가 될 때까지. 그러나 오늘 저녁 미는 떠나갔다. 그때처럼 방이 다시 커져 있었다.
파는 거대해진 방에 비해 작아진 몸을 더욱 작게 움츠렸다.
“가지 마.”
흠칫거리며 파는 눈썹을 떨었다. 그녀의 말. 언니에게 던졌지만 언니에게 던진 말이 아니다. 말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거대해진 방 안 을 외롭게 떠돌다가 결국 그 주인에게 돌아왔다. 가지 말라고?
‘꺼져. 사라져버려. 죽일 거야. 쳉의 안에서 비켜.’
언니는 떠났다.
자매들의 집은 깨끗했지만 자주 보수되지는 못했다. 지붕에는 짚더미 사이로 약간 튀어나온 서까래가 하늘을 비죽이 찌르고 있었고 대평원을 종횡무진하던 바람의 옷자락이 서까래에 걸렸다.
휘우우웅.
“파하하하……………”
파는 웃기 시작했다.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도톰한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 온 눈물은 놀랄 만큼 차가웠다. 파는 웃었다. 쳉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할까? 언니는 떠났어. 의아한 눈빛. 대답을 강요하는 온갖 말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야. 제길. 가지 마. 언니는 가선 안 돼. 갔어. 언니는 떠났다고.
쳉은 꿈에 대해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재미 부족한 인생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밤의 꿈에 대해 심도 있게 고 민해 보았던 경험은 전무하다.
그러나 이날 아침 바람과 이슬을 피하기 위해 찾아든 바위틈에서 눈을 뜬 쳉은, 그로 하여금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할 뻔하게 만든 전날 밤의 꿈 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머리에 남아 있는 혹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고민은 8초 후 끝났다. 쳉은 미간을 찌푸리며 결론을 내렸다.
“젠장. 잠자리가 나빴나 보군.”
그리고 쳉은 곧장 휘파람을 불며 캐시헌터에게 다가갔다. 캐시헌터는 머리를 뒤채며 쳉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고, 쳉은 말의 등을 쓸어준 다음 가벼 운 손놀림으로 안장을 들어올렸다. 캐시헌터의 등에 안장을 얹고 뱃대끈을 조일 때였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뱃대끈 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무심하게 낙하한 안장은 쳉의 발등을 가격했고, 쳉은 한쪽 발을 쥐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 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대평원에서 추는 춤 치고는 퍽이나 격조가 떨어지는 춤이었다.
그 춤은 12초 후 끝났다. 쳉은 풀밭에 주저앉은 채 신발을 벗고는 발이 뭉개져라 주물러대며 말했다.
“뭐야? 오늘 일진이 왜 이래?”
잠시 후 쳉은 떨어져나간 고리를 주워 바느질을 끝내고 캐시헌터의 등에 안장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등자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쳉은 신발을 다 시 신으면서 신발끈을 제대로 묶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발은 등자에서 미끄러졌고 쳉은 안장에 얼굴을 호되게 부딪힌 다음 고통과 상관없이 공포를 느끼고야 말았다. 심지어 쳉은 벌겋게 변한 콧잔등을 만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오, 코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이야?
쳉은 미신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그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은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급기야 전 날 밤의 꿈은 하나의 예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쳉은 이번에는 8분쯤 걸려서 전날 밤의 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시작은 시작이 아니다. 꿈은 원래 그렇다. 그리고 미는 말했다.
‘응. 쳉이 미랑 결혼해 주지 않으면 미는 귀족의 첩으로 시집가거나 마법사에게 잡혀가 실험 재료로 쓰이거나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야. 어느게 제일 무서워?’
‘세 개 다 별로 안 무서운데?’
‘하긴 그래. 진실이 아니면 진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는 거야.’
‘사실대로 말해. 도대체 내가 너랑 결혼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 일도?’
‘응. 아무 일도. 미와 쳉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왜냐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아무 일도…………. 다시는…………, 다시는?”
‘헤헤. 고마워, 쳉. 쳉을 만나서 미는 즐거웠어.’
미는 즐겁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렸지만 쳉은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꿈이니까. 그래서 쳉은 미의 얼굴에서는 절대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앞쪽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검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거대 한 그림자.
나무다. 터무니없이 큰 나무였다. 울창한 가지가 하늘을 덮을 듯하고 휘날리는 나뭇잎은 미를 향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끝은 끝이 아니다. 꿈은 원래 그렇다. 쳉은 다시 사이들랜드의 대평원에 서 있는 자신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고?”
쳉은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캐시헌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캐시헌터는 주인이 정신병자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가자! 이 자식아. 왜 늑장을 부린 거야! 내가 그런 꿈을 꿨으면 알아서 날 깨웠어야지! 혹시 네 주인이 예지몽의 능력을 가졌을지도 모르잖냐!”
미 V. 그라시엘은 고개를 돌렸다.
비록 희미한 모습이었지만 스카니아 마을은 아직까지도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미는 잠시 당혹감을 느끼며 스카니아 마을이 자기 뒤를 쫓아오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양떼를 몰아 대평원을 누비던 처녀답게 미의 걸음은 웬만한 사나이 못지않았다. 그러나 어젯밤 출발한 이후로 지금까지 걸었건만 스카니아 마을의 모습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은 아직 작은 점으로 뒤에 남아 있었다. 미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도 걸음이 느린가를 고민하다가 간신히 자신이 500큐빗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점심 생각이 날 때까지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지. 씩씩한 걸음걸이로 500큐빗을 걸어간 미는 오늘은 점심을 일찌감치 먹고 오후 동안 열심히 걸어가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는 바보 같아.”
미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아예 다시 걸어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서서 스카니아 마을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때, 아달탄? 스카니아 마을이 미를 따라오는 것이 틀림없어.”
미는 푸념하듯 말했다. 옆에서 미를 따라 걷고 있던 아달탄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을 뿐이었다. 미는 트롤의 목줄이라도 끊 어놓을 듯한 그 이빨을 보면서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달탄을 보며 히죽 웃던 미는 다시 스카니아 마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미는 미간 을 찌푸리며 스카니아 마을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따라와?”
미는 당황해 버렸다. 스카니아 마을은 전혀 작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커지고 있었다. 미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지만,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미는 기겁해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달탄. 미가 진짜 바보라는 거, 소문내면 안 돼?”
그녀가 스카니아 마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마리의 말이었다. 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 다.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정확하게 그녀가 온 길을 쫓아오고 있었다. 설마 그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인적 없는 대평원에서 전속 력으로 말을 달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왠지 불안했다. 그러나 사방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어쩌지?
미는 오른쪽 허리를 내려다보고 나서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말을 기다렸다. 앞서 보내자.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것은 신경 쓰여. 미는 여행 이후로 처음 맞이하는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 속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서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라서 가 만히 서 있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에 비해서 아달탄은 뒤쪽에서 달려오는 기수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달탄은 오히려 반대쪽을 향해 귀 를 곤두세웠고, 그래서 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달탄에게 뭔가 말을 건네기도 전에 뒤에서 달려오던 말은 그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뭔가 기다란 것을 들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수를 자세히 관찰한 미는 그가 들고 있는 것이 파이크임을 깨닫고 더 큰 불안을 느꼈 다. 그녀는 어젯밤 출발하기 전에 오늘의 자신을 볼걸 하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쳉의 말이 맞나 봐. 미는 5분 후에 뭘 해야 할지도 모르나 봐.
그때였다.
“컹컹컹!”
아달탄의 포효 소리가 요란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이 비키지 않으면 나는 그대로 깔아뭉개고 지나가 버리겠다. 따라서 당신은 그 자리에서 비켜 나 에게 길을 내주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라는 내용에 해당하는 바이서스 어 고함 소리가 오른쪽 뒤에서 들려왔다. 미는 그 말이 바이서스 어라는 것 을 짐작하는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되었지만 기절할 듯이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실제로 들려온 말은 “비켜! 깔려죽기 전에!”라는 바이서스 어였다.)
미가 옆으로 움직이자마자 뒤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튀어나왔다.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 시커먼 것은 그녀를 쫓아오고 있던 말을 향해 달려가 기 시작했다. 아달탄은 허리를 잔뜩 낮춘 채 뛰쳐나갈 채비를 갖췄지만, 주인이 옆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자 제자리를 지켰다. 놀란 나머지 바 닥에 주저앉아 버린 미는 욕설과 고함소리가 들려왔을 때 비로소 자기 등 뒤에서 튀어나간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 역시 한 필의 말이었다. 그 위에는 체격이 잘 빠진 남자가 롱 소드를 옆으로 늘어뜨린 채 몸을 최대한 앞으로 굽히고 있었다. 등자를 밟고서 일 어난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전력 질주의 자세로 말을 달렸다.
“이 자식아! 너무너무 그리웠다! 당장 말 세워!”
남자는 다시 한번 외쳤지만 그 말 역시 바이서스 어였기 때문에 미는 알아듣지 못했다. 달려오던 기수 역시 파이크를 앞으로 내뻗으며 당황한 목소 리로 외쳤지만(“젠장! 언제 여기까지!”), 그 역시 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망연히 생각했다. 왜 외국인들이 여기서 싸우고 있 는 거지?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절친한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격돌은 순식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전력 질주로 달리며 공격을 교환했기 때문에 관성으로 수십 큐빗을 더 달려 나갔다. 그 말은 파이크를 든 남자가 안장에 매달린 채 칼 에 맞은 상처에서 피를 흩뿌리며 미 쪽으로 달려왔다는 말이다. 미는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물론 말이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미는 미친 듯이 일어나려다가 발목을 삐끗해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다행히 안장에 매달려 있던 남자는 말에서 떨어졌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없어진 말은 그대로 미를 지나쳐 지평선으로 달려가 버렸다. 미는 발목의 고통도 잊은 채 질린 표정으로 말에서 떨어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속력과 연마된 기술에 의해 생긴 상처는 참혹했다. 피 냄새를 맡은 아달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바뀌었다. “으르르르.
남자의 팔은 거의 떨어져나갈 정도로 깊이 잘려 있었다. 남자는 그때까지도 파이크를 놓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파이크를 쥔 그 팔은 다시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땅에 나동그라진 채 피를 흘리는 남자를 보던 미는 고개를 들어 롱 소드를 쥔 남자를 찾았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서는 다시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오지 마!”
미의 요청은 두 번이나 묵살당했고, 남자는 거침없이 달려왔다. 미의 앞을 막아선 아달탄의 어깨 털은 곤두서 있었고 귀는 뒤로 착 달라붙은 모습이 었다. 그러나 미래를 보는 양치기와 괴물같이 생긴 번견은 똑같이 남자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했다. 빠른 동작으로 말에서 내린 남자는 미와 아달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곧장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미와 아달탄은 소외된 입장 속에 연대감을 느꼈고, 말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땅에 쓰러진 남 자에게 롱 소드를 겨누며 말했다.
“왈왈왈왈왈! 왈왈? 와르르, 왈왈!”
“왈왈……, 왈, 왈왈왈! 왈왈.”
아달탄이 외친 것은 아니다. 미에게는 그렇게 들렸다는 말이다. 바이서스 어를 알지 못하는 바에야 미에게는 남자들의 대화가 완전한 개소리였다. 미는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땅바닥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남자들의 개소리를 열심히 청취했다. 그러면서 미는 속으로 아달탄에게 통역을 부 탁할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롱 소드를 든 남자가 벌컥 화를 내면서 외쳤다. “왈왈왈!” 그러나 땅에 쓰러진 남자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끼이잉…… 끄응………….”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롱 소드를 든 남자는 당황하며 상대의 맥을 짚어보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파이크를 든 남자는 절명했다.
찌푸린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미와 아달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달탄은 깨끗한 이를 드러내며 남자를 경 계했다. “크르르르………….”
남자는 주춤했고, 미는 허리에서 롱 소드를 뽑아들 정도의 자신감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건드리면 부서질 듯이 굳어 있었고 롱 소드의 끝은 아달탄이 보기에도 한심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다다가지지!”
물론 미는 ‘다가오지 마!’라고 말하려고 했다. 슬프게도 의도와 행동이 항상 일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롱 소드를 든 남자는 미의 이상한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찌푸린 얼굴로 미와 아달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롱 소드를 검집에 꽂아 넣었다. 조 금 안심이 된 미를 향해 남자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사람으로서 나쁘지 않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바이서스 분인가 보지요.”
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쳉이 보았더라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미를 처음 대하는 남자는 놀랐다.
“차분함의 놀람. 서투른 내 언어는 당신의 고역으로서 미안하다.”
“놀랍도록 차분하군. 내 말이 서툴러서 미안하다. 따라해 보세요.”
남자는 더듬거리며 미의 말을 따라했다.
“아, 그래. 놀랍도록 차분하군…. 그리고?”
“내 말이 서툴러서 미안하다.”
“내 말이 서툴러서 미안하다. 하하하.”
남자가 웃는 것을 보자 미 역시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나 미는 롱 소드를 다시 꽂지는 않았고, 인간의 미소 따위에 별 관심이 없는 아달탄은 한결같 은 동작으로 남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미는 롱 소드의 끝을 아래로 내려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죽인 거죠?”
“응? 아아, 죽은 것은 칼에 맞았다.”
“아뇨………….. 어떻게 죽은 거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음. 저 남자는 당신 적?”
“적? 아, 나의 적이다.”
“미는?”
“미? 당신 이름? 당신의 죽음은 그란에게서 비롯하지 않는다.”
미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야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라는 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남자의 이름이 그란이라는 것도. 고개를 끄덕이 던 미는 그란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란은 미를 안심시키려는 듯이(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달탄에게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팔짱을 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쯤 일어나던 미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자 그란은 놀라서 외쳤다.
“모종의 부상?”
미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당황하다가 말했다.
“예. 아까 넘어질 때 다쳤나 봐요.”
“이런 다친 발목을 소유하고 있군.”
“그래요. 예. 다친 발목. 그런데…………, 왜 저 남자를 죽인 거죠? 당신들이 싸운 이유가 뭐지요?”
그란은 미의 말을 이해해 보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미의 등 뒤에서 또 다른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왈왈왈!”
새로 들려온 개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미는 황급히 몸을 돌렸고, 두 명의 새로운 기수와 세 마리의 말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기수는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였다. 매섭게 생긴 남자 기수는 죽은 남자의 말로 짐작되는 말을 붙잡아 끌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등에 이상하게 생긴 창 을 비스듬히 걸멘 여자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미는 여자의 말을 보고 감탄해 버리고 말았다. 바이서스의 억센 목동이나 탈 만한 새까만 거마였다. 하지만 아달탄은 당장이라도 발광해 버릴 듯이 긴장했다. 아달탄은 짧고 강하게 외쳤다.
“(꽤 끔찍스럽다는 것 이외에는 글자로 표현될 가능성이 전무한 소리)!”
달려오던 두 기수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들로서야 멈추고 싶은 의도가 없었지만 말이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다. 미는 당황한 얼굴로 그란을 돌아보았 지만 그란은 안심시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친구. 해침에 있어 당신을 선택하지 않는다.”
당신을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겠지.
“아달탄, 아달탄. 이리 와.”
몹시 긴장한 아달탄은 미가 몇 번 더 재촉한 다음에야 간신히 미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아달탄은 여전히 새로 나타난 사람들을, 그리고 그란을 경계했다. 쭈뼛거리며 다가온 두 기수는 말에서 내리더니 아달탄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란에게 다가갔다.
세 명의 바이서스 인들은 땅바닥에 있는 시체와 미, 그리고 아달탄을 가리키며 서로를 향해 열심히 개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미와 아달탄은 순식간에 소외되었다. 아달탄은 주인이 앉아 있었기에, 그리고 미는 말보다 빨리 뛸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틈에 달아나 버릴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 다.
새로 나타난 사람 중에 여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매섭게 생긴 남자에게 뭐라고 짖어대었다. 그러자 날카롭게 생긴 남자 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실례하겠소. 당신은 누구요?”
미는 반가움을 담아 대답했다.
“우리말을 잘하세요?”
“그렇소. 하지만 사이들랜드에서는 두 번씩 질문해야 답을 얻는 풍습이 있는 줄은 몰랐소.”
미는 남자의 냉랭한 대답에 주눅이 들면서 대답했다.
“미안해요. 미 V. 그라시엘이에요. 그리고 여기 귀여운 친구의 이름은 아달탄이고요.”
남자는 ‘귀여운 친구? 누구 말이오?”라고 되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미가 가리키는 그 귀여운 친구는 같은 개라도 자신의 동족임을 부정하고 말 모습이었다. 날렵하게 생긴 주둥이 양쪽으로 드러낸 두 개의 긴 송곳니는 한 뼘은 되고도 남겠다. 상처투성이인 이마 아래에 움푹 들어가 있는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고, 그 덩치는, 맙소사, 웬만한 망아지만 하군.
아달탄에 대한 관찰을 재빨리 끝낸 남자는 이어서 미를 관찰했다. 다리가 길고 눈빛은 맑다. 허리에 찬 검은 길이 잘 들어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칼 밥을 먹은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몸놀림은 흔들림이 적고 안정되어 있지만 검을 휘둘러서 체득하게 된 안정감은 아니다.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여기 주민인가 보군. 이상한 광경을 봐서 놀랐겠군.”
미는 입술을 삐죽하며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발목을 다치기까지 했지요. 그리고 자기소개를 했는데도 상대의 이름을 듣지 못해 조금 속상해 있기도 하고요. 아아, 그 전에 살인 장면을 봐서 꽤 흥분해 있다는 점이 있군요.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배가 고프다는 점은 따로 거론하지 않을게요.”
남자는 피식 웃고서 대답했다.
“운차이.”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붉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말했다.
“네리아예요.”
마지막으로 그란이 말했다.
“이미 언급된 내 이름은 그란.”
미는 다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눈앞에서 사람을 죽여버리고 나서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