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4

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4


4

네리아는 거창하게 팔을 들어올려 신스라이프의 저택의 넓은 정원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아흔아홉, 삼백서른여섯, 아, 정확하게 이천오백마흔세 명이야.”

네리아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사람들은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운차이는 이 웬만한 연병장만 한 정원을 가득 메운 인파를 바라보며 끔찍한 신음을 뱉었고 그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들의 분산을 출검된 검의 운동과 고조된 육성에 의지한다고?”

운차이는 쌀쌀맞은 얼굴로 그란을 쏘아보았지만 그란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운차이도 이를 악문 표정으로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검을 뽑아들고 고함을 질러봤자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자칫하면 흥분한 군중들에 휘말려 그들 자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은 인파 가운데로 파고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넓은 직사각형 모양의 정원에서 그들 일행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정원 오른쪽, 나무 몇 그 루가 우거진 구석 자리였다. 조금 느긋하게 출발했던 것도 문제지만 모두 말을 타고 있었던 것도 문제였다. 말을 끌고서 이 많은 사람들의 가운데를 파고들어 가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앞쪽으로 전진하기 위해 말을 이끌며 인파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고, 결국 이곳에서 더 전진하지도 못한 채 멈춰 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운차이는 어금니를 악물며 으르렁거렸다.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이 이렇게나 보고 싶은 건가.”

파하스가 당장 호기 있게 말했다.

“운차이, 운차이! 설명해 줬잖은가. 이들은 66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풀리는 현장에 있고 싶어 하는 거라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잖은가! 자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나?”

“웃기지 마.”

“뭐라고?”

운차이는 팔짱을 끼며 턱을 당겼다.

“이게 정말 66년 만에 처음 있는 행사라면 난 이 빌어먹을 군중도 얼마든지 인정하겠어. 하지만 이건 66년 만의 일이 아니야. 그 동안 많은 멍청이 들이 여기 도전했다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일곱 명? 죽은 녀석만 일곱 명이라는 말이야. 많이 달아났다더군. 그럼 이건 몇 년에 한 번씩은 있었던 일 이야. 게다가!”

운차이는 그럴 수 없이 사나운 표정으로 군중을 쏘아보았다. 파하스는 그 시선에 난폭한 경멸이 담겨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운차이는 여전히 낮 게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그 동안 어떤 녀석도 성공하지 못했어. 이 사람들은 그걸 잘 알아. 나라도 66년 동안 무수한 실패자만 만들어낸 수수께끼라면 새로 나타나는 녀석 에게 별로 기대감을 갖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네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어머, 정말 그러네? 운차이 말이 맞아.”

“그렇다면 이 인파가 모인 이유는 도전자의 성공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또 다른 희생자를 보려고 몰려든 것이지.”

파하스는 그제서야 운차이의 경멸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성공한 도전자를 축하하기 위해서 모여들었을 수도 있잖은가?”

“내가 파악하는 인간이란 다른 사람의 행운을 축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동을 감수하는 동물은 아니더군.”

파하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운차이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자네가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군. 운차이, 하지만 말일세,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자네 말대로라면 이들은 단지 맞아죽는 사 람을 구경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몰려들었다는 말이 되잖나!”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운차이. 이들의 표정을 보게. 자네 말이 맞다면 양심이 그들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을 거야.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의 죽음을 기대하는 사나운 심성으로 물든 야수의 표정을 짓고 있는가? 천만에! 절대로 그건 아니야.”

주위를 둘러보던 파는 그 말에 동감했다. 정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 얼굴에는 어느 정도의 유쾌함이 가미된 흥분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흥분의 종류는 분명 기대감이었다. 파하스는 그 점을 확인했다.

“그들은 기대하고 있네.”

운차이는 주위를 주욱 둘러보고는 말했다.

“왜? 그 기대의 근거는 뭐지? 66년 동안 실패자만 보아왔던 턴빌 시민들이 왜 갑자기 이번 도전자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느냔 말이야.” 파하스는 싱긋 웃었다.

“때론 우주가 인간을 위해 움직이기도 하네, 친구.”

“무슨 말이지?”

“백일몽과 만취 상태에서만 그런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파하스는 말하겠어. 때론 우주가 인간을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을.”

파하스는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며 말했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말에 객관성을 더하고 설득력을 부여했다. 운차이는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표정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마법의 가을, 알고 있나?”

“무수한 노래의 소재지.”

“좋아! 누구의 일생이든 한번은 찾아오는 마법의 가을. 대왕이 드래곤 로드를 패퇴시켰을 때 그가 마법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우리로선 도저히 짐작할 엄두도 낼 수 없는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이 우주가, 딱 한 번만은 말이야, 친구, 딱 한 번은 인간을 위해 움직인단 말일세!”

운차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주를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것은 마법사뿐인 줄 알았는데. 그건 중첩된 행운에 붙여진 우수 어린 이름일 뿐이야.”

네리아는 입을 쩍 벌리고 운차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운차이 맞아? 어떡해, 운차이도 헤게모니아의 풍토병에 걸렸나봐. 하지만 파하스는 개 탄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삭막하기가 짝을 찾을 수 없는 친구 같으니라고! 하지만 파하스는 말하겠어. 오늘, 여기서, 파하스는 왠지 그걸 느낀다네! 여기엔 뭔가가 있고, 이 사람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어!”

“자네가 느끼는 것은 엊저녁에 마신 맥주의 남아 있는 취기겠지.”

“끄어어…………, 이 녀석! 그 독 묻은 혓바닥을 내밀어라, 내가 손 좀 봐주마!”

운차이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파하스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지만 아무 대꾸도 없는 운차이를 상대로 오랫동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쳉은 그 훌쩍한 몸을 나무에 기댄 채 조용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몰려든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료들이 말하는 군중들의 흥분이라 든지 기대감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가 느낀 것은 그저 여기는 참 시끄럽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소란을 싫어한다. 쳉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 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반려보다는 사랑하는 타인.

미.

쳉의 눈꺼풀이 완전히 덮여서 그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했다.

잠들었나? 네리아는 쳉을 흘긋 바라보며 생각했다. 쳉은 그 서글퍼 보일 정도로 긴 신장을 나무에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짙은 나무 그늘 이 그의 상반신을 뒤덮고 있었다. 봄의 햇살과 주위의 소란은 그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네리아는 쳉에게 말을 건네기는커녕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네리아는 그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돌맨은 어디다 숨겨두었어?”

그란은 네리아를 돌아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은밀한 장소에.”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응.”

“쳇. 알았어요, 알았어. 하지만 정말 돌맨만 내버려두고 와도 괜찮을까? 누구라도 한 사람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아? 아니, 내 생각으론, 음. 미와 인질 교환이라도 해야 될지 모르는데 데리고 오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아.”

그란은 뭐라고 설명할 듯이 입을 조금 벌리고는, 그 표정 그대로 네리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두 손 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바이서스 어로 말해.”

“그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우리 중 한 사람은 그 꼬마에게 묶여버리고 말아.”

“그래두우…….”

“후작이 공개된 장소에 나타난다면 만전을 기한 상태에서 나타나겠지. 어쩌면 수하들을 모조리 이끌고 나타날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한 사람의 힘이라도 아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돌맨에 대한 감시역으로 한 사람 빼놓을 처지가 아냐. 잊지 마. 우린 세 명뿐이다.”

“세 명? 아니, 쳉도 있고 파도 있고 파하스도…………, 헤헤, 아달탄도 있는데?”

네리아는 파의 다리 옆에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는 아달탄을 가리켜 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그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은 미 때문에 우리와 함께 있는 거야. 저들에겐 후작과 싸울 이유가 없어.”

“뭐? 어, 으으응. 그렇기는 하지만……………. 아니, 잠깐!”

네리아는 의혹으로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파와 파하스, 그리고 쳉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란, 그란…………!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렇지?”

“무슨 말이지?”

“설마……, 우웅. 후작을 체포하기 위해서라면, 미를 포기해도 좋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그란은 아무 대답 없이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안 돼! 그건 말도 안 돼. 미는 우리 때문에 후작과 우리 사이에 휘말려 든 거란 말이야. 난 그런 짓은 못해!”

그란은 여전히 말없이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뭐라고 더 강렬한 말을 꺼내려 했을 때 그란의 입에서 혼잣말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네 번째 수레바퀴까지는 서로를 돕지.”

네리아는 움찔했다. 저것은 가이너 카쉬냅의 말로서 그 뒤에 생략된 말은 ‘하지만 다섯 번째 수레바퀴부터는 다른 바퀴들을 괴롭히지.’이다.

이 유명한 경구에 나오는 다섯 번째 수레바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꿈의 파편, 버리지 못한 동심, 헛된 소망 등을 나타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조직에 필요 없는 일원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그리고 지금 그란이 말하는 다섯 번째 수레바퀴라는 것은 네리아가 버리지 못한 순수성을 질 책하는 말이며, 동시에……………

“사실을 직시하는 게 좋지 않을까.”

“뭐? 무슨 말…….”

“쳉은 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우리에게 검을 겨눌 수 있지 않을까.”

네리아는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선 모습 그대로의 쳉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쳉은 과연 네 번째 수레바퀴인가, 다섯 번째 수레바퀴일 것인가? 네리아는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네리아의 감정은 쳉을 다섯 번째의 수레바퀴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다. 나머 지네 개의 바퀴와는 다른 방향을 꿈꾸는 다섯 번째의 바퀴.

“그, 그렇지만……”

“후작은 사용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할 수 없는 것까지 사용하는 작자다. 명심해. 우리는 세 명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쳉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그것까지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잊지는 말아줘.”

그란은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려 운차이처럼 인파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그란과 운차이의 뒤통수를 차례로 보며 울상을 지었다. ‘히잉. 내 남자 동료들은 너무 차갑고 무시무시하기만 해.’

그때였다. 신스라이프 저택의 입구 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네리아가 무슨 일인가 궁금하게 여겨 발돋움을 하려 했을 때 그 소란을 뚫고 한 마디 외침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아! 도전자가 도착했소!”

아달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 쳉은 눈을 번쩍 떴다.


인파가 갈라지며 정문에서부터 저택의 현관까지 기다란 길이 생겼다.

정문 쪽에서 시작된 술렁거림은 삽시간에 정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 전체에게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들끓는 고함 소리나 환호성 같은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응원의 한마디라도 있을 법한데, 턴빌 사람들은 목숨을 건 도전자에게 응원도 보내지 않았다. 운차이의 지적대로 그들은 지난 66년 동안 많은 도전자들의 죽음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술렁거림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해 못할 기대감으로 목을 뽑아대고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말 다섯 마리가 걷고 있었다. 도전자들은 말에 올라탄 채 걸어왔기 때문에 정원에 몰려선 군중들 모두가 기수들의 면면을 잘 볼 수 있 었다. 하지만 파의 눈은 곧장 첫 번째 기수의 가슴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돌아갔다.

파는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팍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흘러내린 머릿결이 얼굴을 조금 가린 채였지만, 파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에 익은 턱의 각도와 어깨 각도 때문이다. 미가 저런 자세일 때 그녀는 항상 눈을 감는다. 그냥 시선을 떨굴 때도 있지만 양자는 미세하게 다르다. 그리고 파는 그 차이를 본능적이라 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파는 미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달탄은 곧장 달려갈 듯이 온몸을 경직시켰지만 파는 아달탄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정문 쪽에서 이라도 아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돌맨에 대한 감시역으로 한 사람 빼놓을 처지가 아냐. 잊지 마. 우린 세 명뿐이다.”

“세 명? 아니, 쳉도 있고 파도 있고 파하스도…………, 헤헤, 아달탄도 있는데?”

네리아는 파의 다리 옆에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는 아달탄을 가리켜 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그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은 미 때문에 우리와 함께 있는 거야. 저들에겐 후작과 싸울 이유가 없어.”

“뭐? 어, 으으응. 그렇기는 하지만……………. 아니, 잠깐!”

네리아는 의혹으로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파와 파하스, 그리고 쳉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란, 그란…………!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렇지?”

“무슨 말이지?”

“설마……, 우웅. 후작을 체포하기 위해서라면, 미를 포기해도 좋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그란은 아무 대답 없이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안 돼! 그건 말도 안 돼. 미는 우리 때문에 후작과 우리 사이에 휘말려 든 거란 말이야. 난 그런 짓은 못해!”

그란은 여전히 말없이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뭐라고 더 강렬한 말을 꺼내려 했을 때 그란의 입에서 혼잣말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네 번째 수레바퀴까지는 서로를 돕지.”

네리아는 움찔했다. 저것은 가이너 카쉬냅의 말로서 그 뒤에 생략된 말은 ‘하지만 다섯 번째 수레바퀴부터는 다른 바퀴들을 괴롭히지.’이다.

이 유명한 경구에 나오는 다섯 번째 수레바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꿈의 파편, 버리지 못한 동심, 헛된 소망 등을 나타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조직에 필요 없는 일원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그리고 지금 그란이 말하는 다섯 번째 수레바퀴라는 것은 네리아가 버리지 못한 순수성을 질 책하는 말이며, 동시에……………

“사실을 직시하는 게 좋지 않을까.”

“뭐? 무슨 말…….”

“쳉은 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우리에게 검을 겨눌 수 있지 않을까.”

네리아는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선 모습 그대로의 쳉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쳉은 과연 네 번째 수레바퀴인가, 다섯 번째 수레바퀴일 것인가? 네리아는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네리아의 감정은 쳉을 다섯 번째의 수레바퀴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다. 나머 지네 개의 바퀴와는 다른 방향을 꿈꾸는 다섯 번째의 바퀴.

“그, 그렇지만……”

“후작은 사용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할 수 없는 것까지 사용하는 작자다. 명심해. 우리는 세 명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쳉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그것까지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잊지는 말아줘.”

그란은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려 운차이처럼 인파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그란과 운차이의 뒤통수를 차례로 보며 울상을 지었다. ‘히잉. 내 남자 동료들은 너무 차갑고 무시무시하기만 해.’

그때였다. 신스라이프 저택의 입구 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네리아가 무슨 일인가 궁금하게 여겨 발돋움을 하려 했을 때 그 소란을 뚫고 한 마디 외침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아! 도전자가 도착했소!”

아달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 쳉은 눈을 번쩍 떴다.


인파가 갈라지며 정문에서부터 저택의 현관까지 기다란 길이 생겼다.

정문 쪽에서 시작된 술렁거림은 삽시간에 정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 전체에게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들끓는 고함 소리나 환호성 같은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응원의 한마디라도 있을 법한데, 턴빌 사람들은 목숨을 건 도전자에게 응원도 보내지 않았다. 운차이의 지적대로 그들은 지난 66년 동안 많은 도전자들의 죽음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술렁거림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해 못할 기대감으로 목을 뽑아대고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말 다섯 마리가 걷고 있었다. 도전자들은 말에 올라탄 채 걸어왔기 때문에 정원에 몰려선 군중들 모두가 기수들의 면면을 잘 볼 수 있 었다. 하지만 파의 눈은 곧장 첫 번째 기수의 가슴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돌아갔다.

파는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팍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흘러내린 머릿결이 얼굴을 조금 가린 채였지만, 파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에 익은 턱의 각도와 어깨 각도 때문이다. 미가 저런 자세일 때 그녀는 항상 눈을 감는다. 그냥 시선을 떨굴 때도 있지만 양자는 미세하게 다르다. 그리고 파는 그 차이를 본능적이라 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파는 미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달탄은 곧장 달려갈 듯이 온몸을 경직시켰지만 파는 아달탄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정문 쪽에서

“후작의 부하. 왜 네 명뿐이지? 우리들이 찾아올 것은 당연히 예측했을 거잖아. 그런데 왜 저 정도 숫자만 데리고 나타난 것일까?”

“그렇군. 이상하군.”

“밖을 조사할까?”

운차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어. 근처에 아무리 많은 숫자를 매복시켜 뒀다 하더라도 이 인파를 뚫고 들어오기는 어려울걸.”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란은 못내 초조하다는 기분을 느끼며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후작을 추격한 이후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들로서 도 처음이었다. 그란은 치밀어 오르는 복수심을 가누려 애쓰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란은 누가 들으면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이라고 여 길 만큼 커다란 소리를 내며 호흡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네리아가 주의를 줘야 했다.

한편, 군중들의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후작 역시 군중의 숫자에 놀라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과 아무 관련도 없는 유언장 집행에 이렇게 많은 사람 들이 모인 까닭이 뭐지? 이것이 비록 구경거리는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많은 녀석들이 제 할 일도 팽개쳐둔 채 몰려든단 말인가?

후작은 이곳 어딘가에 추격자들이 있을 것을 짐작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후작은 흉흉한 심사를 억누르며 말을 몰아갔다.

계단참에 마련된 자리는 후작의 심사를 더욱 뒤틀리게 했다. 아무래도 유언장 집행은 완전히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질 모양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를 사려 물었다.

‘완전히 광대 꼴이 되겠군.’

할슈타일 후작은 계단 앞에 도착해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치 레이디를 모시는 기사처럼 정중한 동작으로 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위의 군중들 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미는 후작의 손을 무시하며 후작의 반대편으로 내렸다. 군중들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

하지만 궤헤른은 재빨리 말을 몰아 미의 옆에 섰다. 도주를 차단하려는 것이었지만, 미는 도망칠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조용히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미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며 말에서 내렸다. 가이버와 니크, 사무엘도 각자의 말에서 내려 후작 뒤에 시립했다.

계단참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턴빌 시장 데커드입니다.”

시장이라고? 후작은 깜짝 놀랐지만 데커드 시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신스라이프 씨의 유언에 따라 유언장 집행은 공개된 장소에서 행하여질 것입니다. 신스라이프 씨의 유언장에 제시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찾아 오신 분은 계단을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후작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맙소사, 이건 턴빌 시 전체가 관심을 기울이는 일대 행사였나 보군. 하긴 신스라이프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시청이 유지된다고 했던가. 이걸 짐작하지 못하다니!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저 한 개인의 유언장 집행에 불과한 일에 이렇게까지 나올 줄 짐작한다 는 것은 후작으로서도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궤헤른은 잠시 후작을 돌아보았다.

“제가 올라갈까요?”

시청에는 궤헤른의 이름으로 신청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를 데리고 여기서 기다려라.”

“예?”

“내가 올라가겠다.”

궤헤른은 후작의 말의 의미를 깨달으며 경악하고 말았다. 문제를 풀지 못했을 경우 사망하는 것은 그 도전자뿐이다. 후작은 스스로 죽음의 위험을 뒤집어쓰겠다는 말이었다.

“안 됩니다. 후작님.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닥쳐.”

“아니오, 절대 안 됩니다! 기회는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만일 제가 실패하면 후작님은 다시 도전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작님이 실패하실 경우 저는 후작님의 대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정답을 말씀해 주십시오.”

후작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궤헤른을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그의 눈빛 속에서 갈등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후작 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불운은 지겹게 맛보았다. 이제 내 행운을 시험해 보겠다.”

“후작님!”

“게다가, 나는 달아날 수 있지만 너는 달아나지 못한다, 이 머저리야!”

“예?”

후작은 갑자기 오른손을 쥐어 올려 보였다. 후작이 끼고 있는 조금 독특한 모양의 장갑에 매달린 쇠고리들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 다. 궤헤른은 후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집행되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턴빌 시청에서는 처형에는 커다란 관심이 없다고 들었으니까. 그러니 입 다물고 있어.’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란은 이를 드러냈다. 움켜쥔 그의 주먹에도 똑같은 모양의 장갑이 끼여 있었다.

OPG(오거 파워 건틀릿). 마법의 힘이 담겨 있는 장갑. 그것을 낀 자는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신비한 아티팩트. 대 륙에 몇 개 있지도 않은 이 보물들 중 두 개가 하필이면 도망자와 추적자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마법 도구들이 가지는 신비한 숙명의 부 름일지도 모른다.

궤헤른은 후작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후작의 눈빛에 굴복했다.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후작에게, 궤 헤른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만,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후작은 별말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무녀여.”

“말씀하세요.”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궤헤른은 다시 경악했다. 뭐라고?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미에겐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어요.”

“그 능력이 사라지기 전, 신스라이프의 시대를 보거나, 혹은 그 문제의 정답이 말해지는 시간을 본 적은 없는가.”

“믿기 싫으시겠지만, 없어요. 미는 그 문제에 대해선 아무것도 조언해 드릴 것이 없군요.”

“알았다.”

그리고 후작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얼빠진 표정으로 미와 후작을 번갈아 바라보던 궤헤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가 그 문제의 정답이었던 까닭은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 살며 미래를 보는 퓨처 워커이기 때문에. 하지만 미가 미래를 볼 수 없다면 그녀는 퓨처 워커가 아니다. 그냥 헤게모니아의 무녀일 뿐이다. 그렇다면 미는 신스라이프의 문제의 정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후작은 아무런 정답도 가지지 못한 채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궤헤른은 이제 계단을 올라가려는 후작의 등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외쳤다.

“안 됩니다, 후자……………”

“닥쳐!”

궤헤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터져나온 후작의 고함 소리는 삼엄했다. 궤헤른은 입을 벌렸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후작은 궤헤른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긴 심호흡을 했다.

“후우…….”

심호흡을 끝낸 할슈타일 후작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얀 돌계단에 내리쬐는 정오의 햇볕에 후작은 눈이 부셨다. 후작은 눈을 찡그린 채 계단을 걸어올라 갔다. 군중들은 이제 목숨을 건 도전에 임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경의 어린 침묵을 보내주고 있었다. 따가운 정오의 햇살만이 기승을 부릴 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믿기 어려운 고요 속에 후작의 발소리는 조용히 울려퍼졌다.

후작은 계단참에 올라서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에는 서류함으로 보이는 상자와 천으로 덮어둔 물건 하나가 놓여 있을 뿐 깨 끗했다. 그리고 그 테이블 너머에 서 있던 데커드 시장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다가 옆에 앉아 있던 자에게 허리를 숙이고는 뭔가 귓 속말을 나누었다. 다시 허리를 편 데커드 시장은 후작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궤헤른이오?”

“아니.”

“신청인의 이름은 궤헤른이라고 되어 있던데.”

“다 알고 있으면서 복잡하게 굴지는 말도록 하지. 거기 앉아 있는 공증인들은 저 아래의 남자가 궤헤른이라는 것을 인정해 줄 텐데.”

“물론 그렇소.”

“나는 저 궤헤른을 대신해서 도전하는 거요. 그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인지라, 내가 그에 대한 사랑과 우정으로 그를 대신하겠소.”

데커드 시장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몰랐다. 저 아래에 있는 궤헤른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궤헤른 은 아무리 봐주더라도 중년이라고 불러야 되는 나이인 것이다.

“…..당신이 오답을 말했을 경우 당신이 죽겠다는 말이군?”

“그렇소.”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시청은 고 신스라이프 씨의 유지를 받아들여 유언장 집행의 모든 과정에서 공정하고……”

“죽을 녀석만 준비되어 있으면 될 거 아니오.”

“예?”

후작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가 도전하고, 실패의 책임도 내가 지겠다는 거요. 신스라이프는 도전자의 조건을 정해 놓지는 않았을 거 아니오. 그리고 정식 절차 같은 것이야 일이 끝난 후에 다시 꾸밀 수도 있는 것이잖소. 지금 이 모임을 파하고 다시 정식 절차를 진행하는 번거로움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도전자는 여기 준 비되어 있고, 그는 실패의 책임도 지겠다고 말했소. 이걸로 충분하잖소.”

데커드 시장은 대답에 앞서 잠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들이 신스라이프의 유족 대표들인 모양이다. 그들은 서로 몇 마 디 말을 주고받은 다음 시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커드 시장은 다시 후작을 보고 물었다.

“이름이 뭐요?”

후작은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운차이 하슬러.”

조용해진 군중 덕분에 후작의 목소리는 꽤 멀리 떨어져 있던 네리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네리아는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렸고 그란의 얼굴은 이 제 악귀 같은 꼴로 바뀌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후작은 유머를 아는군.”

그란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쏘아보았다.

“유머라고?”

“여기 어딘가에 우리가 있을 것을 짐작하면서 말하는 거잖나.”

그란은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이 운차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계단 위를 노려보았다. 데커드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운차이 하슬러 씨. 신스라이프 씨의 유언장을 읽을 테니 차분히 들어주십시오. 유언장의 봉독은 유가족 대표이신 발레드 신스라이프 씨 가 해주시겠습니다.”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커드 시장의 소개에 따라 의자에서 일어난 발레드 신스라이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서류함을 열고는 거기에 서 유언장을 꺼냈다. 발레드는 읽기에 앞서 다시 시장과 몇몇 사람들에게 유언장이 진짜임을 확인하는 절차를 가진 다음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다음절어와 고어들로 점철된 신스라이프의 유언장은 확실히 문학 작품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유언장일 뿐이었다. 그리고 후작은 유언장의 내용 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언장의 중요한 내용은 여기 모인 사람들 전부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요식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할슈타일 후 작은 유언장이 봉독되는 시간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발레드 씨는 몇 군데 더듬거리긴 했지만 세 번은 읽어야 간신히 이해될 그 복잡한 유언장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읽었다. 군중들은 왠지 박수를 치고 싶은 기분을 느꼈지만 유언장에 대해 박수를 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군중들 중 일부에서만 울려퍼졌던 박수는 빠르게 사라 졌다.

네리아는 멀미난다는 표정을 하며 운차이에게 질문했다.

“에고, 머리야…………. 그러니까, 뭐야? 무슨 말을 한 거야?”

“네가 아는 내용 그대로야.”

“그 말을 저렇게 복잡하게 쓴 거야?”

“응.”

“나 신스라이프 씨 존경할래.”

“그러든지.”

발레드 씨는 유언장 봉독을 마친 다음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데커드 시장은 발레드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천을, 분명히 군중들을 의식한 화려한 동작으로 치웠다. 후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천이 치워지면서 나타난 것은 거무튀튀한 나무 상자였다. 한 뼘 정도의 길이를 가진 작은 상자인데 모서리마다 강철로 보강되어 있어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튼튼해 보이기만 할 뿐 거기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단 하나, 상자의 자물쇠가 있어야 할 부분에는 자물쇠 대신 밀랍 봉인이 되어 있었고 그 봉인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데커드 시장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군중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한 다음 다시 테이 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공증인 여러분, 그리고 유가족 대표께서는 앞으로 나오셔서 이 상자가 신스라이프 씨의 유언장에서 거론된 그 상자임을 확인해 주십시오.”

다시 확인 절차가 행해졌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 상자가 진짜이며 밀랍 봉인의 상태는 이상 없으며 도장도 모두 진짜라는 간단한 말을 상당히 예 스럽게 말했다. 데커드 시장은 기나긴 절차가 겨우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자, 운차이 하슬러 씨. 유언장의 내용에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까?”

“없소.”

“그럼 당신에게는 대답을 말할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도 이해했습니까?”

“그렇소.”

데커드 시장은 잠시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다다라버린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은 지금이라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설명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소중함을 이해 하지 못하는 자라면 말할 필요가 없고, 그것을 아는 자라면 말해 봐야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어쩌시겠습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데커드 시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겠소.”

데커드 시장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 한 컵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데커드 시장은 마른 입술을 핥은 다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 판단이고,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커드 시장은 화려한 동작으로 팔을 벌리며 어젯밤 내내 외웠던 말을 했다.

“신스라이프 씨의 유언 집행 책임자로서 질문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당신은 단 한번 대답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답의 맞고 그름은 이 상자가 판별해 줄 겁니다. 자, 묻겠으니 대답하십시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아오십시오!”